****************************
일본은 바다 밖으로 만리나 떨어진 곳에 있다. [계곡집]
谿谷先生集卷之五
序 十四首
送李從事尙古奉使日本序
今上踐阼之十載歲在丁巳。日本使者款徼效琛。顧敦隣好。朝廷嘉其嚮義。議遣使答其意。難愼使才。博簡朝列。維時李君尙古以前尙書郞。實膺下价之選。行有日矣。其友德水張維造而慰之曰。尙古良苦。夫日本不在溟海萬里外哉。嘗按之圖志。自釜山而對馬。自對馬而日岐。自日岐而赤間。海道各數百千里。自赤間而抵其國都。邐迆海港。陸跋水涉者又不下數千里。東南者。四海之委也。沃焦之墟。尾閭之壑。皆在是焉。風飆之所鼓盪。幽怪之所恣睢。大浪如山。小浪如屋。滔天而沃日者無時不然。高桅欲折。大帆欲倒。蛟涎鰐齒之不及乎身者僅咫尺耳。此天下之至險也。尙古生長京華。出門所適。不過數百里。一朝行涉此險矣。能無病乎。李君奮然曰。欸。何子言之愞也。丈夫生而有四方之志。豈可娖娖守妻孥。終老帷房之內哉。況某奉王命而使外國。雖蹈湯火。有不敢辭。區區舟楫之難。何足芥蔕於胸中哉。維曰。狡夷變詐百出。獸心而人面。今雖懷我好音。通冠蓋之信。一朝讒慝間其慮。鬼神助其禍。則美成在久。惡成不及改。或要我以難從之請。強我以不可行之禮。桀黠無道。有不可測。子將何以處之。李君曰惡。寧有此乎。日本之悔禍於我者于茲二紀矣。本朝政刑修明。外內乂安。聖天子所以宣威而耀德者。亦無所不至。彼旣不能無請懽於我。又安能逆理生釁。棄福而構禍哉。萬一有此。漢節在手。吾已忘吾身矣。況必無是理者乎。維曰。象胥輿臺紀綱之僕。嗜利頑頓者。憑依城社。黷貨無厭。足以辱國而取侮。交際之際。或餽以橐裝。欲却則逆彼懽。欲受則傷吾廉。子將何以處此乎。李君曰。刑法可以防小人之慾。禮義可以制君子之行。隷人之不循法度者。則有三尺在彼。何敢捐身而徇貨哉。賓餽之稍無名者。可却則却之。不可却則吾以餉陽侯耳。不亦綽然有裕哉。維曰。是數者。吾無以難子矣。然尙古不有垂白二親哉。居平舞斑弄雛。怡怡然無跬步之違。一朝舍膝下之歡而作海外之役。曠晨昏之奉而隔歲年之期。將無上貽門閭之念。下結岵屺之思乎。李君慽然有間曰。此某之不能懸解於中者。然某亦有聞矣。詩不云乎。王事靡盬。不遑將父。夫業已背親而仕。恩義固有時相奪矣。況二親幸無恙健飯。而某之行還。遠不出浹歲。竣事而歸。將必上紓聖主南顧之念。而下爲庭闈光寵。此某所以稍慰於方寸者也。維曰。然則尙古終無難於是役乎哉。李君曰。何敢然。顧某實有怵惕於夙夜者矣。壬辰之變。萬世不可忘也。今雖平氏滅而源氏興。革命更始。回心向順。然斷之於義。則凡日本之山川草木。無非我讎也。今旣不能犁庭蹀血。鞭秀吉之尸而灰其骨。反以玉帛鍾鼓。通其國而接其人。雖羈縻撫綏之略。不得不爾。然匹夫之諒。不能無槩然者矣。先正之奉使日域者。在麗有若鄭文忠。在本朝有若黃秋浦諸公。其峻節足以標名敎。淸操足以動殊俗。卉服之欽聳誦義。至于今不衰。今不佞於數公者。無能爲役。而謬忝將命。誠恐奉使無狀。以上辱吾君之命。而下獲戾於數君子者。此某之所大懼也。若乃懷安顧慮。錄錄作女曹兒態者。某雖不肖。亦不至若是汚。維於是蹶然起謝曰。偉哉。尙古之志也。始也吾有難於尙古。殆淺之爲丈夫也。退而錄其語。以贐其行焉。
*********************
종사관 이상고가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전송한 글
[送李從事尙古奉使日本序]
금상(今上)이 즉위한 지 10년째 되는 정사년(1617, 광해군 9)에 일본의 사자(使者)가 변방의 관문(關門)을 두드려 공물(貢物)을 바치면서 이웃 간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자고 청해 왔다. 이에 조정이 의(義)를 지향하려는 그 정신을 가상하게 여긴 나머지 그들의 뜻에 보답하려고 사신을 보내는 일을 의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신에 합당한 인재를 신중하게 고르기 위하여 조정의 반열에 있는 관원을 대상으로 널리 가린 결과 이군상고(李君尙古)가 전(前) 상서랑(尙書郞 육조의 낭관)의 자격으로 실로 하개(下价 서장관(書狀官))의 선발에 뽑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떠날 기일도 정해진 때에 그 친구인 덕수(德水) 장유(張維)[지은이]가 그에게 나아가 위로하여 말하기를,
“상고가 참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저 일본으로 말하면 바다 밖으로 만리나 떨어진 곳에 있지 아니한가. 일찍이 지도(地圖)를 살펴보건대, 부산(釜山)에서 대마(對馬)로 가고 대마에서 일기(日岐)로 갔다가 일기에서 다시 적간(赤間)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그 바닷길이 각각 수백 수천리 씩이나 되었다. 그리고 적간에서 그 나라의 수도에 이르려면 해변가 항구들을 잇 따라 거친 뒤에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하는데 그것이 또 최소한 수천 리는 되었다. 게다가 동남쪽으로 말하면 사해(四海)의 종착지로서 옥초(沃焦:동해남쪽 3만 리 지점에 위치하여 바닷물을 태워 말린다는 산)라는 큰 언덕과 미려(尾閭:바닷물이 새어 빠져 나간다는 곳)라는 골짜기가 모두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요동시키고 물귀신들이 제멋대로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크게는 산더미 같은 파도가 솟구치고 작게는 집채만한 물결이 일어나면서 하늘까지 잇닿아 해를 가리지 않는 때가 없다. 그리하여 높이 세운 돛대가 부러지려 하고 커다란 돛이 그만 곤두박질치려 하는 상황에서 교룡(蛟龍:상어)의 날름거리는 혓바닥과 악어(鰐魚)의 날카로운 이빨이 지척(咫尺)의 거리에까지 육박해 올 것이니, 이곳이야말로 세상에서 최고로 험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다.그런데 상고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도성 문밖을 나가 보았다고 해야 기껏 수백리를 넘지 못했을 텐데 하루아침에 이렇듯 험악한 지역을 건너가게 되었으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이군이 분연(奮然)히 말하기를,
여기서 기록하고 있는 일본 위치를 지금의 열도라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또한 조선을 한반도로 국한하여 보아서도 안된다.
1617년 임진왜란이 끝난지 20년 싯점이다.
일본 두목은 평씨(平氏)가 망하고 원씨(源氏)가 되었다고 하고 있다.
일본으로 가는 해로엔 상어와 악어가 득실된다고도 했다.
악어는 열대우림에 산다.
“아, 어쩌면 그대의 말이 이토록 유약하단 말인가. 장부가 이 세상에 나왔으면 사방을 경륜할 뜻을 가져야 마땅하니 어찌 몸을 조심하며 처자(妻子)의 생활이나 돌보면서 집안에 틀어박혀 늙어 죽어서야 되겠는가. 그런데 더구나 왕명(王命)을 받들고서 외국에 사신(使臣)으로 나가는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비록 끓는 물속에 들어가고 불길 속에 던져진다 하더라도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뱃길의 어려움 같은 구구한 일 따위야 어찌 조금이라도 꺼림칙하게 마음속으로 생각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장유가 말하기를,
“교활한 오랑캐로 말하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사기를 치니 얼굴은 사람 모습이지만 마음은 짐승과 같다고나 할 것이다. 지금은 비록 좋은 말로 우리를 달래면서 계속 사자를 보내 오고 있다 하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간특하게 참소하는 자가 이간질하여 생각을 바꾸게 하고 도깨비 같은 자가 그 화(禍)를 조장시킨다면 오랜 공력을 들여 겨우 성립시킨 우호 관계도 눈 깜짝할 사이에 최악의 상태로 뒤집혀지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혹 우리가 따르기 어려운 청을 요구해 오거나 우리가 행할 수 없는 예(禮)를 강요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이 교활하게 무도(無道)한 짓을 자행할 수도 있을 것인데, 그러면 그대는 장차 어떻게 이를 대처할 것인가.”
하니, 이군이 말하기를,
“아, 어찌 그런 일이 있기야 하겠는가. 일본이 우리에게 화(禍)를 끼친 것을 후회해 온 지 어언 20년이 되어 온다. 그동안 본조(本朝)의 정형(政刑)이 다시 밝게 닦여져 내외(內外)가 안정되게 다스려지고 있고, 성천자(聖天子)의 빛나는 위덕(威德) 또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 우리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또 어떻게 도리를 어기고 흔단(釁端)을 야기(惹起)시키며 복을 내버리고 화를 얽어낼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사신의 부절(符節)을 내 손에 지닌 이상 나는 이미 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런데 더구나 그럴 리가 분명히 없는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였다. 장유가 말하기를,
“상서(象胥 역관)와 여대(輿臺 하인)와 기강지복(紀綱之僕:재간이 있어 일을 주선하며 드나드는 인원) 가운데 이끗을 노리는 완악한 자들이 성(城) 안의 여우나 사당 속의 쥐새끼처럼 사신의 위세를 빙자해서 못 할 짓 없이 재물을 밝힌다면 나라를 욕되게 하고 모멸을 받기에 십상일 것이다. 그리고 교제(交際)할 즈음에 혹 탁장(橐裝:전대 속에 넣어 휴대하는 값비싼 물건으로 금ㆍ은ㆍ주(珠)ㆍ옥(玉) 등을 말함)을 선물로 줄 수도 있을 텐데, 그때에 그것을 물리치자니 그들의 호의를 저버리겠고 그렇다고 그냥 받자니 나의 청렴을 훼손시키게 될 경우, 그대는 장차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하니, 이군이 말하기를,
“형법(刑法)으로 소인의 탐욕스러움을 막을 수 있고 예의(禮儀)로 군자의 행동을 제어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인들이 법도를 따르지 않게 되면 형법이 바로 그들에게 적용될 텐데 그들이 어찌 감히 자기 몸을 망쳐 가면서 재물을 좇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선물로 제공되는 것 가운데 그것이 조금이라도 명분이 없는 것일 경우, 물리칠 만하면 물리칠 것이요 물리칠 수 없을 때에는 내가 그것을 가지고 양후(陽侯:수신(水神)의 이름)에게 던져 주면 그만이니, 그러면 또한 여유작작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장유가 말하기를,
“이 몇 가지에 대해서는 그대에게 어려울 것이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상고에게는 백발이 성성한 양친 부모가 계시지 아니한가. 평소에 색동옷 입고서 춤을 추고 새 새끼 데리고 장난치는 등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면서 그 곁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아니하다가 하루아침에 따스한 부모의 품을 놔둔 채 바다 멀리 나랏일을 행하러 나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침저녁으로 문안도 드리지 못한 채 1년 동안이나 떨어져 있게 되었으니, 위로는 문려(門閭)의 걱정[주D-001]을 끼치고 아래로는 호기(岵屺)의 그리움[주D-002]이 장차 있지 아니하겠는가.”
하니, 이군이 근심스러운 빛을 띠며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내 마음속에 늘 걸려 있는 점이다. 그러나 나도 들은 바가 있다. 시(詩)에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나라의 일을 견고하게 해 놓지 않을 수가 없어서 아버님 모실 겨를도 없다.’[주D-003]고. 대체로 볼 때 일단 어버이를 뒤로하고 벼슬길에 오른 이상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보은(報恩)과 신하로서 임금에 대한 의리 사이에는 본래 서로 합치되지 않는 때도 있는 법이다. 더구나 지금은 양친께서 다행히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식사를 하고 계시고 내가 갔다가 돌아오는 것도 멀어 보았자 1년을 채 넘기지 않을 것인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게다가 일을 잘 마무리하고 귀환하게 되면 장차 위로는 남쪽을 돌아보는 성주(聖主)의 걱정을 덜어 드리고 아래로는 우리 부모님에게도 영광을 안겨 드릴 것이 분명하니, 이것이 바로 내가 마음속으로 조금 위안을 삼는 것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장유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상고가 이번의 사행(使行)에 있어 끝내 어려운 점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니, 이군이 말하기를,
“어찌 감히 그렇다고 하겠는가. 돌아보건대 나에게는 실로 아침이나 저녁이나 두려워 떨리는 점이 있다. 임진년의 변고야말로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지금 비록 평씨(平氏)가 멸망당하고 원씨(源氏)가 새로 흥하여 국가의 체제를 바꾸고 다시 출발하면서 마음을 바꿔 먹고 우리를 따르려 하고 있다 하더라도 의리에 입각해서 단안을 내린다면 일본의 산천과 초목치고 우리의 원수 아닌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미 그 궁궐을 갈아엎어 쑥밭으로 만들고 그 국토를 피로 물들인 뒤 수길(秀吉)의 시체를 꺼내 채찍질하고 그 뼈다귀를 갈아서 재로 날려 버리지 못한 채 거꾸로 옥백(玉帛)과 종고(鍾鼓)를 가지고 그 나라와 교류하며 그 사람들을 만나려 하고 있으니, 이것이 비록 그들을 달래고 무마하기 위한 계략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더라도 필부(匹夫)의 심정으로서는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일본의 도성에 사신으로 갔던 선정(先正)을 돌이켜 살펴보건대, 고려 때에는 정문충(鄭文忠 정몽주(鄭夢周)) 같은 분이 계셨고 본조(本朝)에는 황추포(黃秋浦 황신(黃愼)) 등 제공(諸公)이 있었는데, 그 준열한 절조(節操)가 명교(名敎)를 표방하기에 족하고 그 청렴한 몸가짐이 풍속이 다른 나라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으므로 미개한 저 나라에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높은 의기(義氣)를 떠받들며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나로 말하면 앞서 거론한 공들에 비교하여 사신의 수행 능력이 정말 형편없는데도 외람되게 장명(將命 사명(使命))을 받들게끔 되었으니, 참으로 사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나머지 위로는 우리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고 아래로는 여러 군자들에게 죄를 얻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울 따름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크게 두려워하는 점이다. 그러나 가령 자신의 안전만 도모하려고 고려한 나머지 의젓잖게 아녀자들이나 취하는 태도를 지으면서 더럽게 구는 그런 짓은 내가 비록 불초(不肖)하지만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장유가 이에 벌떡 일어나 사과하며 말하기를,
“위대하도다, 상고의 뜻이여. 처음에 내가 상고에게 어려운 점이 있으리라고 여겼었는데 하마터면 천하 장부가 될 뻔 하였구나.”하고, 자리에서 물러가 그 말을 기록한 뒤 그의 길 떠나는 선물로 증정하였다.
문려(門閭)의 걱정 : 자식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을 말한다. 춘추 시대(春秋時代) 위(衛) 나라 왕손가(王孫賈)의 모친의 고사로서 아들이 아침에 나갔다가 늦게 돌아올 때면 문에 기대어 기다리고[倚門而望] 저녁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동구 밖에까지 나가서 기다렸다고[倚閭而望] 한다. 《戰國 齊策》
호기(岵屺)의 그리움 : 고향 떠난 아들이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시경(詩經)》 위풍(魏風) 척호(陟岵)에 “초목 우거진 저 산에 올라 고향땅 바라보며 아버님 생각하네 …… 초목도 없는 저 산에 올라 고향땅 바라보며 어머님 생각하네.”라 하였다.
나라의 …… 없다 :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모(四牡)에 나온다.
***********************************
谿谷先生集 지은이:
장유(張維, 1587년∼1638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판서 운익(雲翼)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둘째 아들, 우의정 김상용의 사위였다.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장생의 문인이다.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으며 1605년(선조 38) 향시에 장원을 했고, 1609년(광해군1) 문과에 급제를 했다. 이후 예문관·승문원 등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관직생활을 하던 중에 김직재의 옥이 일어나면서 매제 황상이 김직재 옥사에 연루되어 역적으로 체포되면서 그는 인척이라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12년 동안 장유는 고향인 안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은거하며 독서와 저술에 전념했다. 이 무렵에 대가의 문장을 거의 다 접했으며, 저서 《묵소고》 를 엮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고, 이조좌랑과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모시던 국왕을 쫓아낸 일을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그는 공신이면서도 공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소장 관인들을 보호하다 좌천을 당하기도 했다. 인조 14년의 병자호란 대에 최명길과 함께 강화를 주장했으며, 또한 최명길과 함께 양명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조선시대의 사상이 편벽(偏僻)함을 지적하여 “중국에는 학술에 갈래가 많아 정학자(正學者)도 있고 단학자(丹學者)도 있고 정주(程朱)를 배우는 자도 있고 육씨(陸氏)를 배우는 자도 있어 문경(門經)이 불일(不一)한데 우리나라는 유식무식(有識無識)할 것 없이, 책끼고 글 읽는 사람은 다 정주(程朱)를 송(誦)하여 다른 학(學)이 있음을 듣지 못하나 우리 사습(士習)이 과연 중국보다 훌륭하고 그런 것인가?”라고 반문하였다. 그는 양명학을 선학이라고 비의(非議)함을 변박하였으며, 천문·지리·의술·병서(兵書)·그림·글씨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신흠·이식·이정구와 더불어 월상계택(月象谿澤) 4대가로 꼽혔다.
1637년 의정부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친상을 이유로 18차례의 상소 끝에 물러났다. 사후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지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많은 저술은 대부분 정묘호란 때 분실되었고 《계곡집(谿谷集)》, 《계곡만필(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主解)》 등이 남아 있다.
**********************************************
'세계삼한역사 > SINA-신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강역의 혼란 (0) | 2009.08.15 |
---|---|
明使가 단종에게 루비를 바쳤다. (0) | 2009.08.15 |
조선 기생들은 대륙에서 살았다? (0) | 2009.08.10 |
조선統制使 이순신 복장은 고려복장인가? 아니면 몽고 복장인가? (0) | 2009.07.29 |
Chinois-chinoise 가 china 이고 대륙조선인가? (0) | 2009.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