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은 어떻게 일어섰는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4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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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기생들은 대륙에서 살았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발발시켜 대륙조선문화와 조선인들을 매일같이 대대적으로 청소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공연한 사실이다. 러시아 스탈린의 권고가 있었다고 하지만 모택동이 한국동란에 자진하여 참전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대륙조선문화와 조선인들이 파괴와 죽음으로 내몰렸을까 생각하게 한다.
대륙조선인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조선인의 기억들을 없애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었을까 생각하게 한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기간동안 홍위병을 내세워 대륙전역을 세분하여 반체제인사를 색출하고 반동, 반역으로 내몰아 인명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대륙은 죽의 장막이라고 하여 외부와 차단되어 이와 같은 어마어마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러한 체제에서 벌어진 일들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며 피해자 입장에서는 지옥이 따로 없었을 같다.
이 많은 사람 중에 대륙조선인은 얼마나 될까?
공산혁명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근대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모택동의 주도로 시작된 농공업의 대증산 정책인 대약진운동으로 약 3,000만명이 굶어 죽었으며 1966년-1976년에 일어난 십년동란(十年動亂)이라고도 하는 문화대혁명기간 동안에 홍위병에게 희생된 인민이 위키자료에서는 약 2천~3천만명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7~8천만명이 무참하게 살상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그당시 하루에 대륙전역에서 60만명씩 죽여 나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홍위병에 의해 무작위로 딱지 붙여지고 축출되는 상황에서 대륙조선인들은 지식인이라 몰려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고 반동분자라고 하여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며 평소 사상이 고로 하다고하여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고 한족과 이질적이라고 하여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생사지경을 벗어나기 위하여 수많은 대륙조선인은 한족으로 행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용케 위기를 벗어나 비겁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한족으로 생명을 부지 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또는 극단적으로 자진하거나 위기를 피해 서쪽지방으로 도망을 하여 비명횡사 위기를 모면 하였을 것이다.
어찌되었던지 대륙조선인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고 해야 한다.
앞으로도 대륙조선의 기억을 없애기 위하여 중공정치인들은 어떠한 일도 서슴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보잘 것 없는 정통성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륙조선의 자취를 지우는 일은 지금도 그들 내부에서 지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서북공정, 동북공정도 이와같은 선상에서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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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기생들이 대륙살았던 자취가 발견되었다.
위에 사실처럼 그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지우기를 하고 있을 망정 우리입장에서는 대륙조선찾기를 절대로 멈출 수가 없는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정통성을 온전하게 찾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다 할 뿐인 것이다.
그러한 끝없는 고민속에서 마침내 진주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웹상에 떠도는 조선 명기들의 그림과 시인데 무심코 지나치지 못하고 자세히 보니 도저히 반도사관으론 이해가 되지 않을 대륙풍경이 그녀들의 서정적인 시와 함께 그려져 있다는 사실에서 할말을 잊는다.
그래서 눈딱고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았다.
분명히 조선기생의 대륙풍경 사실화가 맞다.
1.계생(桂生) : 혹은 매창(梅窓). 부안 기생.
2.일지홍(一枝紅) : 성천(成川)의 기생.
3.홍랑(洪娘) :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때의 명기
4.황진이(黃眞伊) : 생몰미상. 개성 출신 조선 중종 때의 명기.
5.추향(秋香) : 조선시대 밀양기생
6.취연(翠蓮) : 자는 일타홍(一朶紅). 금산(錦山)출신 조선 중기 기생
이 그림을 보고 얼빠진 고사학자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중국 것을 베껴 그린 것이거나 모방하거나 모사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무조건 중국과 같은 것이라면 이렇듯 하찮게 취급하고 뭉개 버린다는 것은 조선 문화자체를 천박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화사관이나 친일사관에 빠진 폐해이다.
진정 그들의 말처럼 모방 모사한 것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 전해내려 오는 고화나 유물모두 솔직히 온전한 것이 없다해야 한다.
그것은 조선시대에는 예술이란 개념자체가 없고 모두 베끼거나 모사 모방의 천국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반도조선에 살았던 기생들이 그림 한 폭 그리려고 멀고도 먼 대륙으로 날아 갈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신분이기에 분명코 여기 웹상에 올려져 있는 그림 모두가 모방하고 모사한 것이라고 할 것이 뻔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기생들이 그린 산수화는 그 시대에 그 곳에서 살면서 실생활에서 체험하고 정서적으로 느껴 표현한 서정적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중국풍이라고 모방했다거나 모사, 베낀 것이라고 절대로 폄하해선 안 된다.
고사학자 그 누구라도 조상을 함부로 대하고자 하는 부정한 마음이 있었서는 안된다.
이제 헛소리 그만하고 바로보자.
조선시대 작품전체를 하찮은 쓰레기로 몰아가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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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桂林)이다.
중국 광서장족(廣西壯族)자치구 북동부에 있는 군사·교육 도시.
서강(西江)지류인 계강(桂江)상류지역에 있으며 상계철도(湘桂鐵道)가 지난다.
진대(秦代)에는 계림군, 한대(漢代)에는 시안현(始安縣)이 설치되고 당(唐)대에는 임계현(臨桂縣)으로 개칭되었다. 명(明)·청(淸)대에는 계림부(桂林府)의 관아가 있던 곳이다.
1.桂林近郊 (47×68㎝)
傷春 / 계생
이것은 봄이 감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임을 그리워한 탓이네
티끌 같은 세상 괴로움도 많아
외로운 목숨 죽고만 싶네
不是傷春病 / 只因憶玉郞
塵豈多苦累 / 孤鶴未歸情
계생(桂生) : 혹은 매창(梅窓). 부안 기생. 『매창집(梅窓集)』이 전한다.
계생(桂生, 1573~1610)1)은 전라북도 부안의 이름난 기생이다.
성은 이(李)요 자는 천향(天香)이요, 호는 매창(梅窓)으로 시를 잘 짓고 노래와 춤을 잘 하였다. 계생은 한 태수와 몹시 사이가 가까웠다. 태수가 벼슬이 갈린 뒤 고을 사람들이 공덕비를 세워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 계생은 늘 달이 밝으면 가야금을 공덕비 곁에서 타고 긴 노래를 불러 그를 잊지 못하는 속내를 보였다.
계생이 처음에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2) 첩이 되었는데, 그가 귀경한 후에 행방은 감감해지고 편지조차 끊어졌다
계랑은 계유년(1573) 태생이기에 계생, 또는 계랑이라 하였으며, 향금(香今)이라는 본명도 가지고 있다. 계랑, 이매창은 1573년에 당시 부안현리였던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안의 명기로 한시 70여 수와 시조 1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시와 가무에도 능했을 뿐 아니라 정절의 여인으로 부안 지방에서 400여 년 동안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 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그가 죽은 후 몇 년 뒤에 그의 수백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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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촌(魯家村)
노(魯)씨들이 사는 동네이다.
즉 사실화이다.
이러한 산세는 한반도엔 없다.
아래 사진은 현재 대륙 계림 노가촌(魯家村)이다.
얼마나 똑같은가?
비교해 보았다.
이렇게 똑 같이 그릴 수 있다는 것은 그곳에서 살면서 실제로 보고 느낀 것에서 나온 작품이다.
굉장한 것이다.
1700년도 중반에 기생신분으로 그린 그림의 장소를 현재에 와서도 그 배경과 구도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정확하게 판 박은 듯이 그려져 있어 현재 비교하여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고 우리민족에겐 그야말로 새로운 접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는가?
이곳에서 아래 시처럼 일지홍은 ...임 보내려는 때 술도 떨어지고
꽃 지고 새가 슬피 우는구나하고 슬퍼했던 것이다.
2.魯家村 (57×88㎝)
離別 / 일지홍
말은 다락 아래 매어 놓고
이제 가면 언제나 오시려나 은근히 묻네
임 보내려는 때 술도 떨어지고
꽃 지고 새가 슬피 우는구나
駐馬仙樓下 / 慇懃問後期
離筵樽酒盡 / 花落鳥啼時
일지홍(一枝紅) : 성천(成川)의 기생.
(註) 선루(仙樓)―신선이 산다는 다락.
일지홍(一枝紅)은 조선후기 성천(成川)에서 활동한 기녀이다. 그녀는 시에 능하여 붓대를 잡고 턱을 괴고 있다가 금방 지었으며, 당시품휘(唐詩品彙)는 재사(才思)가 없어서 볼 것이 없다고 하였다 한다. 심염조(沈念祖,1734 ~ ?)와 시를 주고받았으며
신광수(申光洙, 1712~1775)도 그녀에게 시를 지어 주어 유명해졌다.
현재 桂林魯家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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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大埠古刹 (47×69㎝)
묏버들 가려 꺾어 / 홍랑
그녀의 시조와 최경창의 한역가가 전하는데 아래와 같다.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손대
자시난 窓밧긔 심거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擇折楊柳寄千里
人爲試向庭前種
須知一夜生新葉
홍랑(洪娘) :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기생. 홍원 출생.
1573년(선조 6) 가을에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리던 최경창(崔慶昌)이 북도평사(北道評事)로 경성에 갔을 때, 그녀도 따라가 그 막중(幕中)에 있었다.
이듬해 봄에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오자 쌍성(雙城)까지 따라와 작별하고, 돌아가다가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러 시조 1수를 지어 최경창에게 보냈다.
그뒤 3년 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최경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고 즉일로 떠나 7주야 만에 상경하였다. 그때 양계(兩界:평안도·함경도)에 금(禁)함이 있고,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죽은 탓으로 이것이 문제가 되어 최경창은 면관(免官)되고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파초(Musaceae-Banana)
조선 정조대왕 그림 (파초)
파초과는 생강목에 속하는 외떡잎식물의 과이다. 열대 지방에 3속 150종 가량이 자라는데, 한국에는 야생종이 없으며 관상용으로 재배되는 것이 있을 뿐이다. 커다란 여러해살이 초본 또는 목본으로서, 땅속줄기가 발달되어 있으며, 잎은 사방으로 퍼지는 것과 2열로 퍼지는 것이 있다. 꽃차례는 큰 포엽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이 꽃보다 먼저 눈에 띈다.
계: 식물계
(미분류): 속씨식물문
(미분류): 외떡잎식물강
(미분류): 닭의장풀군
목: 생강목
과: 파초과 (Musaceae)
바나나(Banana)는 파초과 파초속 식물을 두루 일컫는 말이다.
속: 파초속(Musa)
열대 아시아와 말레이시아 등지가 바나나의 원산지이지만, 현재의 주된 생산 지역은 인도, 브라질, 필리핀, 에콰도르 등이다. 바나나는 3~10미터 정도의 높이를 지니며 여러해살이풀로 분류된다. 주로 식용을 목적으로 재배되며 대한민국에서는 제주도 등지에서 소량 재배하고 있다. 씨(종자)는 짙은 갈색을 띠고 있으며 둥글고 5 밀리미터 정도 된다. 원기둥 모양의 헛줄기를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플랜틴은 중요한 식품으로 자리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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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나무-코코넛(coconut) 또는 코코야자는 야자나무과 (종려나무군)에 속하는 상록 교목이다. 코코넛 나무는 코코스 속에서 유일한 종으로 넓은 종려나무로 30 미터 크기까지 자라며, 4~6 미터 길이의 날개 모양의 잎사귀와 각 작은 잎사귀들은 60에서 90센티미터 길이이다. 오래된 나무잎은 깨끗이 흩어져서 나무줄기를 부드럽게 남겨둔다 코코넛은 코코넛 나무의 열매를 뜻한다.
코코넛 나무는 열대지방 전체를 걸쳐 자라며, 장식이나 요리 등 실제로 코코넛 나무의 모든 부분은 인간이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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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頭甸村 막다른 골목길 (57×88㎝)
秋月夜 / 추향(秋香)
노를 저어 맑은 강어귀에 이르니
인적에 해오라기 잠 깨어 날고
가을이 짙은 탓인가 산 빛은 붉고
흰 모래엔 달이 둥글다
移棹淸江到 / 驚人宿驚飜
山紅秋有色 / 沙白月無痕
추향(秋香) : 조선시대 밀양 기생
한방(韓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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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白沙村 (57×88㎝)
半月 / 황진이
崑崙의 귀한 玉을 누가 캐어
織女의 얼레빗을 만들었는가
오마 던 임 牽牛 안 오시니
근심에 못 이겨 허공에 던진 거라오
誰斷崑崙玉 / 裁成織女梳
牽牛一去後 / 愁擲碧空虛
백사촌은 중국 운남성(云南省) 여강시(麗江市)의 북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하는 납서족(納西族) 마을이다. 백사촌은 납서족이 여강 지역에 정주한 최초의 거주지라고 하는데, 송, 원(宋, 元) 시기에는 여강의 정치경제 중심지이었다. 마을 중심에 축구장이 있으며 그 주변에 주택들이 자리 잡고 있다. 백사촌의 호수는 약 200호이다. 백사촌은 여강 벽화의 집합처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백사촌에 있는 대보적궁(大寶積宮)은 대규모의 명대(明代) 벽화로 유명하다.
조선시대의 시인·명기(名妓).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서(書)·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文人)·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滿月臺懷古詩)》 《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 《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 《영초월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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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西雙版納湖畔 (47×68㎝) 長霖(긴 장마)
열흘이나 이 장마가 / 취연
열흘이나 이 장마 왜 안개일까
고향을 오가는 꿈 끝이 없구나
고향은 눈앞에 있으나 길은 먼 千里
근심 어려 난간에 기대 헤아려보노라
十日長霖若未晴 / 鄕愁蠟蠟夢魂驚
中山在眼如千里 / 堞然危欄默數程
취연(翠蓮) : 자는 일타홍(一朶紅). 기생
(註) 장림(長霖) : 긴 장마
중산(中山) : 지명. 사랑하는 임이 있는 곳, 또한 고향
일타홍은 조선 중기 금산(錦山)출신으로 주로 한양에서 활동한 기생이다. 일송(一松) 심회수(沈喜壽1548-1622)가 일찍 고아가 되어 배움을 잃었는데 오직 주색이 있는 곳만 찾아 다녔다 한다. 그때 일타홍(一朶紅)은 헌신적으로 심희수를 계도하여 청운의 뜻을 이루게 하였다. 일타홍은 소년 심희수의 마음을 가라앉혀 글공부를 하게 했고 끝내 심희수의 곁을 떠남으로써 심희수를 분발하게 하여 과거에 급제시켰다. 훗날 극적인 상봉을 하고 이후 줄곧 심희수를 곁에서 모셨다. 십여 년 만에 심희수와 함께 일타홍은 그녀의 고향인 금산으로 내려가고 그곳에서 얼마 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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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쌍반납 타이족 자치주-Xishuangbanna Dai Autonomous Prefecture
(西双版納傣族自治州, 병음: xīshuāngbǎnnà dǎizú zìzhìzhōu, 아카어: Siˇsawˇpaˆna, 하니어: Xisual banaq)는 윈난 성최남단에 위치한 다이족 자치지역이다. 중국어의 서쌍반납(西双版納)라는 표기는 타이어 "십송빤나"(สิบสองปันนา)를 음차한 표기이다.
면적은 2만 평방km, 인구는 84만 명이다. 중심지는 징훙이다. 이곳에는 예부터 소수민족인 다이루족이 거주했으며 코끼리가 서식하는 곳이다. 이곳은 소승 불교가 번성하는 등 동남아시아적인 광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근년에는 관광지로 발전했다.
남쪽은 라오스, 미얀마로 966킬로미터에 이르는 국경선에 접해 있다. 메콩 강이 남쪽으로 흐르고 메콩 수운으로 라오스나 타이와 연결되어 있다.
(서쌍반납 타이족 자치주 열대 식물원 호반)
(서쌍반납 타이족 자치주 열대 식물원 호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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