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동남아 와 임진왜란

한부울 2009. 7. 16. 22:28

자바섬(JAVA) http://blog.daum.net/han0114/17048814

Javanese 과 Japanese 는 같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8696

서양지도에서 밝힌 1840년대 인구표 http://blog.daum.net/han0114/17048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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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와 임진왜란?

여기서 당장 무슨 결론을 돌출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의문이 존재하는 임진왜란을 다른 각도에서 파악하고 진단할 때 다소 의문이 풀릴 수 있는 여지도 있다고 보고 지금부터 하나하나 짚어보고자 한다.

1592~1598 당시 서세 예수회가 주도한 항해시대 환경과 식민지 확보 상황을 들여다 보아야 하며 시대적 환경과 특히 동남아 지역적 지배구도 환경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파악할 때 바로 대륙조선과 왜구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란 확신이다.

때문에 그 당시 해적활동상황과 항해시대 시대적인 상황 그리고 동남아 지배구도 지역적환경을 파악하기 위하여 좀 더 새로운 접근을 하고자 한다.

 

미얀마에는 몬(Mon)족이 세운 한타와디(pegu)왕조 즉 페구왕조와 샨(shan)족이 세운 인와(Ava)왕조 이 두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있다가 1486년 민찌뇨(Minkyinyo 1486 – 1531) 라는 왕이 퉁구왕조를 세우고 그의 아들이자 16세에 국왕이 된 타빈슈웨티(Tabinshwehti)라는 대왕이 등장하여 강력한 화약무기를 포르투갈에게 수입하고 다수의 포르투갈 용병과 일본사무라이(해적, 해구)들을 고용?하여 전통군대와 힘을 합쳐 순식간에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위 붉은 글씨에 보듯이 임진왜란이란 란이 발생할 수 있는 중요한 동기가 묻어있음을 알 수 있다.

분명치는 않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타빈슈웨티 국왕이 살해(1550)당한 후 그의 처남 바인나웅 (Bayinnaung:1551~1581재위)이 즉위하여 미얀마 전역을 통일하고 이웃나라들을 모조리 복속시키고 속국으로 만들어 인도차이나 최강국이 되었으나 아유타야 원정 때 흑태자 나레수엔의 보복으로 시암과 미얀마는 그 후 300년 동안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시암북부에 있던 라나타이는 16세기 중반에 미얀마에게 패하여 속국이 되어 나중에 카빌라의 치세 때 독립하게 된다.

 

1.버어마-퉁구왕조 (Toungu 1531∼1752)
난다 바인(Nanda Bayin : Nandabayin-1581~1599)

 

2.시암-아유타야 왕조(Ayutthaya Kingdom1350∼1767)
나레수엔(Naresuan : Phra Naret)
the King of Ayutthaya kingdom from 1590 until his death in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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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선조는 하니족? 

[대륙조선연구회]글쓴이: 차무 09.07.22 23:17

안녕하세요.

처음 글 올리는 것 같네요. 원래 눈팅만 하는 회원인데...얼마전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회원님들께 알려드릴까 합니다.

얼마전에 중국 운남성 홍하주 하니족 자치구에 다녀왔는데요.

그곳 현지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전에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를 찾아 자기들 마을로 왔었다고요. 하니족 언어도 일본언어랑 비슷한 점도 있다는군요.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연구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그 지역은 중국서남쪽 베트남 접경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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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버어마 (Burma) 와 그 외 동남아 국가 현황

 

Burma, officially the Union of Myanmar, is the largest country by geographical area in mainland Southeast Asia, or Indochina.

 

수도

네피도(공식)
핀마나(행정)

공용어

버마어

정부 형태

국가원수
총리

군사독재, 연방제
탄 슈웨
테인 세인

독립
 • 독립

영국으로부터 독립
1948년 1월 4일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676,578km² (40위)
3.06%

인구
 • 2005년 어림
 • 1983년 조사
 • 인구 밀도

 
50,519,000명 (24위)
33,234,000명
75명/km² (119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5년 어림값
$937.7억 (59위)
$1,691 (150위)

HDI
 • 2006년 조사


0.585 (135위)

 

국명: 미얀마 연방(Union of Myanmar ; 1989년 버마에서 미얀마로 국명을 바꾸었다.

        버마는 미얀마에서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부족 이름이다

수도: 양곤(Yangon; Rangoon; 인구 400만명)

인종: 버마인 65%, 샨족 10%, 카렌족 7%, 라킨족 4%,

        그 외 친, 까친, 몬, 중국계, 인도계 등이 소수 민족으로 있음

언어: 버마어를 비롯하여 카렌, 친, 샨, 까친 등의 방언

종교: 테라바다 불교 87%, 기독교 5%, 무슬림 4%, 정령신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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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X


1.Bagan dynasty (849–1287, 1st Empire)

2.Ava (1364–1555)

3.Pegu (1287–1539, 1747–1757)

4.Mrauk U (1434–1784)

5.Toungoo dynasty (1486–1752, 2nd Empire)


1.파간왕조 (Pagan)

 

Pagodas and temples continue to exist in present-day Bagan, the capital of the Bagan Kingdom.


파간 왕조(1044년~ 1287년)는 버마인에 의한 최초의 미얀마 통일 왕조이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은 오래되었지만 11세기 중엽에 아노우라타왕이 일어나서 이라와디강 유역을 중심으로 아라칸 지방에서 하(下)미얀마에 이르는 영토를 정복하고 몬인(人)의 세력을 합쳐 강대해졌다.


3대 챤지타왕의 치세(治世)까지 반세기는 종교·문학·미술 등 몬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 문화가 차차 형성되어 현재의 미얀마 문화의 요람기(搖藍期)라고 말한다. 실론과의 접촉으로 이입(移入)된 상좌부 불교(上座部佛敎)는 국가적인 보호를 받아 성하게 되었다. 국력을 기울여 세워진 불사(佛寺)·불탑(佛塔)은 현재에도 수천 가지가 남아 있는데 그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13세기에 찾아온 마르코 폴로가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는 도시’라고 견문기(見聞記)에 기록하고 있다.


또 이 무렵 몬 문자를 기초로 미얀마 문자가 만들어졌다. 송(宋)나라에 대해서는 파간(蒲甘)으로 알려지고 조공(朝貢)을 바쳐 왔으나 원(元)나라의 정벌(征伐)을 받아 1287년에 멸망했다.


불탑(佛塔:파고다)왕조라고도 일컫는 바와 같이 파간왕조는 파고다·사원을 많이 건립하여 왕조 말기에는 국력을 소모하기도 하였다. 1287년 원(元)나라의 침공을 받아 수도 파간을 점령당하였으나 원나라 입조(入朝)를 약속하고 일시 위기를 면하였다. 그러나 이 사이 파간왕조에 입사(入仕)하고 있던 샨족(族)의 고위관리 3명이 왕위를 찬탈, 파간왕조는 멸망하였다


2. 아바왕조(Ava)

 

Ava (Innwa)

Central Burma 1364-1555 Burman kingdom

Shans also founded Ava's predecessor minor kingdoms of

Myinsaing (1298-1312),

Pinya (1312-1364) and

Sagaing (1315-1364)

 

샨족(Shan)

 

타이족으로서 주로 미얀마 동부지역에 살며 북부지역에도 일부가 산다. 미얀마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큰 소수민족으로서 전체인구의 1/10을 차지한다. 20세기 후반 인구 약 314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타이어족에 속하는 말을 쓰기 때문에 타이의 타이족, 라오스의 라오족과 언어학적으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미얀마 동쪽 끝 비교적 고립된 지대에 사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문화적으로 대부분 미얀마인들에 더 가깝다.


소승불교도이며 고유한 문자와 문학을 가지고 있다. 이들 대부분이 사는 샨 고원지대에는 낮은 산맥과 숲으로 뒤덮인 울퉁불퉁한 구릉들이 줄지어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영토가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주로 고원 사이의 계곡과 평지에 산다. 주변 산간지방에는 샨족과 경제적인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는 원주민들이 산다. 샨족은 거의 전적으로 관개시설을 이용한 쌀농사를 바탕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동농경(화전농경)으로 농사를 짓기도 하는데, 그결과 삼림이 상당히 훼손되었다. 여러 세기 동안 서쪽의 이라와디 강 유역에 사는 미얀마인들과 북쪽으로 윈난 성[雲南省]에 사는 중국인들과 많은 교역을 했다. 전통적으로 이들 사회는 평민인 농민계급과 세습귀족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귀족계급은 지방의 우두머리들과 샨 국가 지배층을 배출했다. 이들은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다. 13~16세기 미얀마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했으나 샨족의 왕국이 무너진 후 30개 이상의 작은 주(州)로 나누어졌으며 이들 대부분이 미얀마 왕에게 공물을 바쳤다. 영국 식민지시대에는 영국 왕에게 종속된 세습 우두머리들이 샨 주를 지배했다. 1922년 대부분의 주가 샨 연방국에 참여했다. 샨 연방국은 상당한 지역적인 자치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미얀마의 다른 주와 마찬가지로 1974년 제정된 헌법에 의해 자치권을 대부분 잃었다. 그뒤 지역 자치문제에 관해 미얀마 정부와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 무장한 샨 분리주의 단체가 생겼지만, 20세기 후반부터 타이 국경과 가까운 지역에서 아편을 불법적으로 생산해서 수출하는 데 전념하게 된 듯하다. 이 아편 생산지역을 황금의 삼각지대로 부르기도 한다.

 

미얀마의 샨족(族)이 세운 최대의 왕조(1364∼1555). 미게강(江)과 이라와디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아바를 수도로 하고 상부 미얀마를 지배했다. 미얀마에서는 인와왕조라고 부른다. 파간왕조가 원(元)나라의 침공으로 쓰러지자 당시 인도차이나반도 전역에 걸쳐 대이동을 하던 샨족의 한 무리가 미얀마에 이르러 추장 타도민뱌의 지휘 아래 1365년 아바에 수도를 정했다.


그들은 중부 미얀마의 퉁구를 거점으로 하는 미얀마인의 퉁구왕조 및 몬족의 페구왕조와 싸웠고, 중국의 명(明)나라와도 충돌하여 침공을 받았다. 퉁구왕조의 바인나운 왕이 페구왕조를 토멸하고 1555년 아바도 점령하여 멸망하였다.


3. Pegu (1287–1531)

 

몽족(Mon)


타이 및 미얀마의 일부지역에 사는 소수민족. 페구인(人) ·탈라잉인이라고도 한다. 미얀마 이라와디강(江)의 동부 삼각주지역에 약 35만명, 타이 중서부에 약 6만 5천명이 거주한다.


형질적(形質的)으로는 같은 계통의 팔라웅족보다 단두(短頭)이고 코가 크다. 언어는 남(南)아시아어족 중 몬 크메르어군(語群)에 속하며, 캄보디아의 크메르인과 더불어 동남아시아의 비교언어학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 서부에서 동남아시아로 이주할 때 인도문화 ·소승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이 지방의 문명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몇 개의 고대 왕조문명을 이룩하였는데, 그 중 페구왕조(7~10세기) ·드바라바티왕국(11세기) 때가 전성기였다. 1757년까지 왕국이 존속되다가 미얀마인에게 정복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 ·비문(碑文)에서 지난날의 번영을 엿볼 수 있다.


생업은 관개(灌漑)에 의한 벼농사 외에, 사탕수수·파인애플을 재배하고 어로(漁撈)도 한다. 거주단위는 핵가족으로, 결혼 뒤 3년 정도는 처가 쪽에서 거주하다가 독립가정을 이룬다. 종교는 소승불교이지만, 민간신앙으로서 집의 수호령(守護靈)을 믿는다.

 

1.The Burman kingdom of Ava or Innwa (1364 – 1555), the successor state to three smaller kingdoms founded by Burmanized Shan kings, controlling Upper Burma (without the Shan states)


2.The Mon kingdom of Hanthawady Pegu or Bago (1287 – 1540), founded by a Mon-ized Shan King Wareru (1287 – 1306), controlling Lower Burma (without Taninthayi).


3.The Rakhine kingdom of Mrauk U (1434 – 1784), in the west.

 

                                            Mrauk U from Shwetaung pagoda


4.Several Shan states in the Shan hills in the east and the Kachin hills in the north while the northwestern frontier of present Chin hills still disconnected yet.

 

몬족이 미얀마에 세운 왕조(1287∼1539). 한타와디(Hanthawaddy)왕조라고도 한다. 중국 화난[華南(화남)]지역에서 남하한 몬족은 살윈강과 시탕강을 건너 타톤·코스마·페구의 세 지방에 걸쳐 국가를 건설하였다. 처음 국가를 세운 와레루(1287∼96)는 타톤지방의 행상인으로 타이 수코타이왕의 근위대장이 되어 공주와 결혼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1281년 마르타반을, 1287년 페구를 점령하고 몬족의 왕이 되었다. 빈냐우(1353∼85) 때에 왕도(王都)를 마르타반에서 페구로 옮기고, 라자다리(1385∼1423)는 이라와디 삼각주의 요충지 바세인과 먀웅마를 함락시키고 왕국을 3성(省) 96군(郡)으로 재편성하였다. 14세기말∼15세기 초에 걸친 하(下)미얀마 페구왕조와 상미얀마 아바왕조의 싸움은 15세기 중반부터 페구왕조의 약체를 가져 왔고, 공주를 인질로 보내게 되었다. 아바왕조를 탈출한 라자다리의 딸 신소부공주는 1452년 왕위에 올랐다가 승려 출신 담마제디(1459∼92)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파카유피(1526∼39) 때 타퉁구왕조의 타빈시웨티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에 걸쳐 번영하였으며 소승불교가 융성하였는데 1453년에 세운 높이 88m의 슈웨모다탑과 신장 55m의 석가 열반상이 이 시대 작품이다.


5. 퉁구왕조 (Toungu 1531∼1752)

 

                             Tai-Shan Realm in SE Asia circa mid-14th century

 

                           Shan states in 1540 vis-vis other SE Asian kingdoms

 

                            Shan states after 1557, now inside Bayinnaung's Empire


미얀마의 왕조(1531∼1752)로서, 보통 밍키니오 왕(1486~1531 재위)이 창건자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왕조 창건의 영예를 확실하게 제국을 통일시킨 그의 아들 타빈슈웨티(1531~50 재위)에게 돌리고 있다. 그리하여 16세기에 타빈슈웨티가 페구 ·아바 ·퉁구 등 3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미얀마를 통일하여 수립하였다. 타빈슈웨티는 우선 미얀마의 모닌샨족을 굴복시켜 파간 왕조가 무너지자(1287) 야기된 미얀마의 분열요인 중 하나를 제거했다. 시탕 강 너머 퉁구 지방에서 통치력을 강화시킨 그는 남쪽을 향해 이라와디 삼각주 지역을 손에 넣고 몬 왕국의 수도 페구를 함락시켰다. 1544년 프로메에서 샨 족(Shan State)이 이끄는 반란군을 진압한 뒤, 그는 파간 왕국의 옛 수도에서 미얀마 전체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군대를 동원하여 서쪽에 있는 아라칸 해안 지역을 공격했다. 그의 군대는 아라칸에서의 패배로 후퇴하던 도중 동쪽으로 진군해 아유타야에서 저항하고 있던 시암(지금의 타이) 군대를 공격했으나 다시 패배했다. 그가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은 계속해서 반란과 소요를 일으켰으며 타빈슈웨티는 1551년 결국 암살당하고 말았다.


타빈슈웨티를 이어 처남인 바인나웅(1551~81 재위)이 왕위에 올랐다. 바인나웅은 추진력 있는 지도자로, 뛰어난 군대의 통솔력을 발휘하여 미얀마 제국을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는 정벌을 계속하여 남쪽의 타보이에서 북쪽의 슈웨보까지, 아바에서 동쪽의 치앙마이까지 장악했다. 또 그는 라오스 영토의 대부분과 메남차오프라야 유역에서 방콕 근교 지역까지 미얀마의 종주권을 넓혔다. 그 결과 시암은 15년간이나 미얀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바인나웅은 아라칸 왕국 정벌을 계획했으나 1581년 죽고 말았다.


그 후 아유타야왕조(타이)와의 전쟁에서 몇 차례 분열의 위기에 봉착했으나 4대 아나육페툴룬 등의 힘으로 통일이 유지되었다. 1635년 6대 탈룬왕(王) 때 수도를 연안(沿岸)인 페구에서 내륙에 위치한 아바로 옮겼는데 이후 해외와의 교섭을 멀리하고 통치조직을 정비, 조세대장(租稅臺帳)을 작성하는 등 내정에 힘을 쏟았다. 최초의 버마어(語) 법전(法典)이 완성된 것도 이때이다. 18세기에는 청나라 군대와 만풀군의 침입, 그리고 몬족(族)의 반란 등으로 국내가 혼란하였고 1752년 몬족이 아바를 점령함으로써 멸망하였다.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왕조(1486∼1599). 하(下)버마 시탕강 상류에 있는 타웅구는 14세기 후반부터 상(上)버마에서의 전화(戰禍)를 피한 유민(流民)을 흡수하면서 세력을 축적해 민치뇨 때 왕국을 열었다. 다음 왕 타빈슈에티는 하버마의 몬족과 포르투갈인 세력을 복속시키고 도읍을 페루로 옮겼다. 그의 사촌동생 바인나움은 1555년 아바왕조를 멸망시키고, 상버마·샨구릉 일대를 손아귀에 넣고, 아유타야와 라오스의 비엔티안을 공략해 제압하였다. 그러나 왕실 직할지는 델타지대로 한정되었고, 다른 버마 여러 지방에는 바인(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친왕·왕자를 파견하였으며, 샨구릉과 그 밖의 지역을 종래대로 토후의 지배에 맡기고 공납만 부과하였다. 따라서 주변지방이 언제나 이반(離反)할 경향이 있었고, 거듭되는 원정에 델타지방의 물적·인적 자원이 고갈되어 난다바인왕 때 왕조가 붕괴되었다.


아유타야 왕조(Ayutthaya Kingdom1350∼1767)

 

                                                         1686 French Map of Siam


(1351년 - 1767년)는 현재의 타이 중부를 중심으로 타이족에 의해 세워졌던 왕조로 1351년에서 1767년까지 존재하였다. 아유타야 왕조의 태조는 라마티보디 1세로 타이어로 유통 왕이라 불린다.


태국에서 일어났던 다른 왕조와 마차가지로 중국과 인도, 유럽을 묶는 중간에 위치하는 지리적인 이점을 살려, 무역이 나라의 중요한 경제적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아유타야 왕조에서도 왕가를 중심으로서 독점 무역을 했다. 주로 중국에 쌀을 수출하여 국력을 기르고, 일본, 일본의 류큐 왕국 등과 베트남(안남) 등의 동아시아 국가, 동남아시아 크고 작은 섬들 부, 아랍, 페르시아나 서양과 활발하게 무역을 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 부를 바탕으로 아유타야에서는 당시 번영하고 있던 크메르 문화를 흡수하면서, 중국, 유럽, 페르시아 등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독자적이고 화려한 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역사


유통 왕의 출신에 대해서는, 사료가 많지 않다. 그 때문에 그의 출신에 대한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역병(또는 콜레라)로 버져진 치엔세인으로부터 이주해 왔다는 설과 롭부리 출신설 등이 있다. 어쨌건 간에, 아유타야조 개국 당시의 주변 상황은 북쪽으로 수코타이 왕조가 인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유타야가 개국된 타이 중부는 수코타이 왕조의 영토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유타야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까지의 낡은 유적이 타이 중부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왕조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유타야 왕조 창설 이전의 타이 중부의 이 공백기에 롭부리나 페차부리는 수코타이 왕조와는 달리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따라서 유통 왕의 출신도 아마 타이 중부에 있는 나라의 왕가 출신이라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게다가 ‘유통’이라는 말은 ‘돈의 요람’을 뜻하며, 타이 중부에서 이 이름을 가지는 왕은 많다. 즉, 타이 중부의 작명의 관습이기도 하다.


유통 왕은 왕조 연대기에서는 라마티보디라고 하는 이름으로 기술되고 있다. 왕이 즉위할 시기에 스판나품 왕가의 협력이 절실했고, 이후에는 대수코타이 정책으로 인해 두드러지게 된다.


라마티보디 1세는 국내를 통일하고, 실론으로부터 승려를 불러 소승불교를 국가의 공식적인 종교로 지정하고 동시에 힌두의 법전인 다르마샤스트라나 타이에서의 관습을 바탕으로 법전(삼표법전)을 정비했다. 삼표법전은 근대적인 법전이 정비되는 19세기까지 타이의 기본 법전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14 세기말까지 아유타야 왕조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하였지만, 동남아 지역을 완전히 압도할 만큼의 인구는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쇠퇴하고 있던 크메르 왕조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베트남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라마티보디는 말년 1362년 앙코르 왕조를 공격해 아유타야의 영토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러나 아유타야는 앙코르를 완전한 장악하지 못했다. 수코타이 왕국과의 관계는 수코타이가 아유타야에 조공을 바치는 형태가 되었지만, 그 후 100년 후에 아유타야 왕조가 수코타이를 병합해 수코타이 왕조는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유타야에 새롭게 흥한 스판나품 왕가와 수코타이의 왕가와의 인척 관계를 강화하여 그 후에도 수코타이 왕가는 명맥은 겨우 유지하게 된다.


멸망


15 세기에는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 왕국이 아유타야의 고민거리가 된다. 말레이 반도에서는 말라카나 탄브라린가 이남의 말레이 반도 여러 도시가 15세기 초기부터 이슬람교으로 개종 하게 되어,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유타야는 말레이 반도 남부를 잃지만, 말레이 반도 북부를 계속 장악하여 고급품을 거래해온 온 중국 상인에 의해 국내의 경제는 활기를 유지하게 된다.


한편, 서쪽의 버마는 지역의 패권을 노리며, 16세기경부터 집요하게 아유타야를 침략하여 아유타야의 골칫거리가 되게 된다. 버마 타운 굿 왕조의 군주 바인나운은 1569년에 아유타야왕 마힌트라티라트를 패망시켰으나 나레수안에 의해서 아유타야는 재건되었다. 이후 버마가 내란에 휩쓸리면서 버마의 침공은 줄어들지만, 콘바운 왕조가 국력을 축적하게 되면서 아유타야는 다시 버마의 침략에 골머리를 앓는다. 결국 1767년에는 신뷰신에 의해서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을 당하게 된다. 이때 아유타야의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버마군이 퇴각한 후 새롭게 왕이 된 탁신은 아유타야 재흥을 위해 방콕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차오프라야 강이 흐르는 톤부리 방면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1351-1369 Ramathibodi I

1590-1605 Naresuan

1656-1688 Narai

1758-1767 Boromaracha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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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역사 (802~1819)


인도차이나 반도에서는 6세기 후반에 진랍국(眞臘國)이 일어나 부남국을 멸망시켰다. 이 무렵 이라와디 강 하류에는 페다 왕국, 차오프라야 강 하류에는 드바라바티 왕국, 중부 베트남에는 임읍국(林邑國)이 있었다.


8세기에 접어들어 국제무역 정세가 변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았던 북부 베트남이 점차 독립하여 968년에는 딘[丁]왕조가 최초의 독립국가를 형성했다. 딘 왕국은 그후 점차 남하하여 임읍국을 약탈하면서 세력을 확대해갔다. 진랍국도 8세기에 들어서자 모습을 감추어 소국으로 분열했다. 9세기가 되자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서 톤레사프 호 주변의 평야를 중심으로 농업국가인 앙코르 제국이 건설되어 거대한 앙코르와트 사원과 도성(都城)인 앙코르톰을 구축하고 지배범위를 현재의 타이-미얀마 국경 근처까지 넓혔다. 거의 같은 무렵 미얀마에서는 미얀마인의 파간 왕조가 성립되어, 페구 왕국을 정복해 그 문화를 기초로 오늘날 미얀마 문화의 원형을 완성했다. 또한 남방상좌부불교(南方上坐部佛敎)를 받아들였다.


13세기말 몽골 제국이 베트남과 미얀마에 침입하여 베트남을 일시적으로 지배했고 미얀마의 파간 왕조를 멸망시키고 자바에도 원정함대를 파견했다. 이러한 혼란과 앙코르 제국의 쇠퇴를 틈타 타이인이 발흥했고 1220년경 그들은 수코타이를 크메르족의 손에서 빼앗아 수코타이 왕조를 세웠다. 그후 1292년 치엥마이 왕조, 1350년 아유타야 왕조가 일어나 수코타이 왕조를 지배하게 되었다. 1353년에는 라오스의 루앙프라방을 중심으로 란창 왕국이 세워졌다. 타이인은 남하해서 말레이 반도까지 진출했으나 1450년경에 말라카 왕국에 의해 저지당했다. 한편 미얀마에는 12세기말 스리랑카에서 소승불교가 전해졌고 타이에서도 신도가 생겼는데 이는 인도문화의 직접적인 영향이 쇠퇴한 결과이며, 인도 서안 쪽 무역상인에 의해 수마트라 북부에 이슬람교가 전해져 15세기 중반 말라카 왕국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이로부터 이슬람교는 동남아시아 제도의 주로 말레이인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의 진출]


1509년 포르투갈 함대가 말라카에 진출해 1511년 말라카 왕국을 점령하고 그들의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전초기지로 삼았다. 또한 이 무렵부터 화교의 이주가 시작되어 전체적으로 도시거주 인구가 늘었기 때문에 쌀 공급지인 미얀마·타이·자바 등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스페인은 태평양을 넘어 동남아시아로 진출해, 향료의 산지 몰루카 제도의 패권을 놓고 포르투갈과 싸웠으나 패하자 1571년에 마닐라를 점령하고 중국과 무역을 시작했다. 1596년에는 네덜란드, 1600년에는 영국 함대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유럽 각국은 몰루카 제도와 중국 일본에 대한 무역의 패권을 두고 싸웠는데 1623년에 영국이 물러나고 1639년 일본의 쇄국령에 의해 네덜란드가 일본무역을 독점함으로써 아시아 무역에서 네덜란드가 우위를 차지하더니 1641년 네덜란드가 말라카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일종의 안정이 이루어졌다. 그 사이 미얀마에서는 1531년퉁구 왕조가 일어났고, 자바에서는 1580년경   마타람 왕국이 성립했는데 둘 다 농업국가였으나 해상을 통한 국제무역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이 같은 상황은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변함이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각지에서 지배자의 교체가 잇따랐다. 자바에서는 네덜란드가 개입하여 1755년 마타람 왕국이 둘로 분할되었고, 미얀마에서는 1752년 콘바웅(아라웅파야) 왕조가 성립했다. 1767년에는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가 미얀마에 의해 멸망하고, 1782년 방콕에는 현존하는 라타나코싱 왕조(방콕 왕조 또는 차크리 왕조)가 성립했다. 또한 베트남에서는 1786년 타이손[西山] 당이 전국을 통일했다. 18세기말이 되자 유럽 각국의 식민지 경영이 더욱 활발해졌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내란에 개입하여 1802년 구엔[阮] 왕조의 타이손 당 멸망을 도왔고, 영국은 1791년 페낭과 1819년 싱가포르를 획득했으며, 네덜란드는 수마트라와 자바에서 스페인은 필리핀에서 점차 세력범위를 확대했다. 유일하게 영국과 프랑스 세력의 중간지대인 타이만이 가까스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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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a (Innwa) Central Burma 1364-1555 Burman kingdom

Shans also founded Ava's predecessor minor kingdoms of

Myinsaing (1298-1312),

Pinya (1312-1364) and

Sagaing (1315-1364)


Pegu (Bago) Lower Burma 1287-1539

Mon kingdom

Siamese (Sukhothai) vassal state (1287-1330)


Sukhothai Central Thailand 1238-1448

First Siamese kingdom; Predecessor to Ayutthaya


Ayutthaya Central and Southern Thailand 1351~1767

Predecessor state to present day Kingdom of Thailand

Burmese vassal (1564-1587)


Lanna (Chiang Mai) Northern Thailand 1292~1776

Burmese vassal (1558-1776)


Lan Xang Laos 1353-1707

Burmese vassal (1574-1599)


Assam 1228-1822

Burmese vassal (1817-1822),

province (1822-1825)


Shan States

Northern Sagaing, Kachin Hills, Shan Hills, Yunnan, parts of Vietnam

10th century-16th century

Largely absorbed into Chinese and Burmese kingdoms by 16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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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빈슈웨티(Tabinshwehti :1512 ~ 1550 )


미얀마 퉁구왕조의 창시자(재위 1531∼1550). 페구 ·마르타반 ·타라인 ·프롬을 공략하여 페구를 수도로 정하고 중부 미얀마를 통합하였으며 왕조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1287년의 원나라 원정으로 쇠미해진 파간왕조를 찬탈한 샨족(族)이 아반왕조를 세운 이래 미얀마는 약 2세기 동안 샨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사이 미얀마족은 퉁구 이남으로 피신하여 미얀마족 재흥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를 실현한 사람이 타빈슈웨티이다. 16세기 전반 페구 ·마르타반 ·타라인 ·프롬을 공략하여 페구를 수도로 정하고 중부 미얀마를 통합하였다. 1546년 아라칸으로, 1549년 타이로 진격하여 왕조의 기초를 구축하였으나 궁정생활의 부패가 원인이 되어 몬족(族)의 반란이 일어나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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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인나웅(Bayinnaung : ?~1581)


Braginoco라고도 하는데(1551~81 재위) 미얀마를 통일하고 샨족 국가들과 시암(지금의 타이)을 정복해 미얀마를 동남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었다. 1550년 하(下)미얀마의 몬족이 반란을 일으켜 1551년에 몬족의 왕자가 페구에서 바인나웅의 처남인 미얀마 국왕 타빈슈웨티를 살해했다. 바인나웅은 퉁구로 진격해 왕을 사칭한 자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 후 남쪽으로 진군해 페구 시를 점령하고 반란을 이끌었던 스밈타우를 처형했다. 다른 몬족의 지도자들도 항복하여 반란은 끝이 났다. 바인나웅은 타빈슈웨티가 했던 것처럼 페구를 수도로 삼았다.


1554년 고대 미얀마 왕국의 수도였던 아바를 점령한 샨족의 족장들을 정벌하러 나섰고 다음해 아바를 점령하여 샨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다음은 가장 강력한 적인 시암을 공격할 차례였다. 1563년 바인나웅은 시암인들이 자신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구실을 붙여 전쟁을 일으켰다. 이듬해 시암의 수도 아유타야에 입성하여 시암 왕실 일가를 인질로 미얀마에 데려왔다. 1568년 반란이 일어나자 바인나웅은 또다시 시암으로 진군했다. 시암인들이 맹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1569년 8월이 되어서야 겨우 아유타야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바인나웅은 자신의 봉신(封臣)을 왕위에 올려놓고 수천 명의 시암인들을 노예로 미얀마에 데려왔다. 미얀마인들은 15년 이상 시암을 지배했으나, 시암 왕자 나레수안(1590~1605 재위)이 지도한 해방운동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불교를 후원해 탑을 세우고 사원에 보시금을 많이 냈으며 실론의 불교왕국과 다각도의 외교관계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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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 바인(Nanda Bayin : Nandabayin-1581~1599)


아버지 바인나웅이 세운 제국이 해체되면서 그의 왕위도 끝이 났다. 난다바인이 왕위에 오르자 아바(Ava)의 부왕인 삼촌이 반란을 일으켜 3년 만에 진압되었다. 1584년 12월 시암의 영웅인 나레수엔을 제압하기 위해서 그의 아버지시대에 속국이었던 시암을 공격해 3년 동안 차오프라야 강 계곡으로 여러번 군대를 보냈지만, 번번이 나레수엔에게 패했다. 그 뒤 1593년 타보이와 테나세림을 시암에 빼앗겼다. 미얀마 남부에 있던 아버지의 신민 중 한 집단이 반란을 일으켜 시암인을 끌어들여 살윈 강변의 마르타반과 모울메인을 점령하자 난다바인은 곤경에 처했다. 1595년 난다바인은 결국 페구로 밀려나 그곳에서 시암인의 공격을 막았다. 1599년 퉁구·프롬·아바의 부왕이었던 난다바인의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아라칸 왕을 끌어들인 뒤 페구를 포위해서 난다를 생포하고 바인나웅 제국의 나머지 속국들을 해체했다. 난다바인 재위 중 퉁구왕조는 파국으로 치달았지만, 이것은 난다 바인의 정치적 지도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통치하기에 벅찬 큰 제국을 건설한 바인나웅의 지나친 야망에 그 원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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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레수엔(Naresuan : 시암의 국왕(1590~1605)

Phra Naret라고도 하는데 1555 시암 피차눌로크~1605. 4. 25 살윈 강.

 


미얀마의 지배에서 나라를 구한 타이의 민족 영웅. 1569년 미얀마 왕 바인나웅(1551~81 재위)은 시암을 정복하고 나레수엔의 아버지 마하 타마라차를 봉신(封臣)으로 삼아 왕위에 앉혔다. 당시 수도였던 아유타야는 약탈당하고 시암국민 수천명이 미얀마에 노예로 끌려갔으며, 캄보디아도 시암을 여러 차례 침략했다. 이때 겨우 16세였던 나레수엔도 미얀마의 봉신으로 피차눌로크의 북부지역을 다스리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샨(shan)국에 미얀마의 군대와 종군한 뒤, 1584년 미얀마에 충성하기를 거부했다. 시암을 침략해 온 미얀마의 6군단을 눈부신 군사작전으로 물리쳐, 수도를 장악하려는 미얀마의 계속되는 침략기도에 쐐기를 박고 동시에 캄보디아 침략도 물리쳤다. 1590년 아버지가 죽자 왕이 되면서 주도권을 잡아 당시 캄보디아의 수도였던 로베크를 점령하여 캄보디아를 시암의 속국으로 삼고, 북쪽의 치앙마이왕국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했다. 1593년 초 그의 야심을 꺾으려고 미얀마가 대군을 파견했을 때 나레수엔은 미얀마 군을 격퇴하고 미얀마 왕세자와 격투끝에 그를 죽였다. 그 뒤 미얀마가 왕위다툼으로 내란이 일어나 더 이상 시암을 위협하지 못하게 되자 나레수엔은 말레이 반도의 타보이와 테나세림을 점령하여 시암이 인도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상업 로를 열었다.


나레수엔은 그 후 200년가량 지속된 시암 독립의 기초를 세우고 군사력과 정치적 안정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17세기에 시암이 팽창하고 번영할 수 있게 했다. 그는 1605년 샨(shan)국에서 전쟁 중에 죽었고 동생 에카토차로트가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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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상왕국(Lan Xang)


14∼18세기 인도차이나 반도의 메콩강(江) 중류유역에 있었던 왕국. 라오족(族) 고래의 정치제도와 상좌부(上座部)불교를 결합한 왕권사상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란상이란, <백만의 코끼리>라는 뜻이다.


통일란상시대(1354∼1710년 전후)와 삼국시대(1779년까지)로 나눌 수 있다. 넓은 뜻의 타이족의 일파인 라오족이 주된 민족이었으나, 인접해서 거주하던 불교도 푸앙족 등 타이계(系) 민족 외에도 선주(先住) 남아시아계 민족(캄·쿠이·로벤 등)도 왕국에 포함되어 있었다.


북부의 무앙사와(현재 루앙프라방)의 땅을 도읍으로 삼은 초대 건국왕 파굼은 역사전설 속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 실재성이 인접국가 수고타이의 같은 시대 비문(碑文)에서 확인되었다.


2대 왕 삼 센 타이(재위 1373∼1416)는 윈난[雲南(운남)]을 거쳐 명(明)나라에 입공(入貢)하여 1404년 노과군민선위사사의 도선알로서 중국사료(史料)에 등장한다. 윈난토사[雲南土司(운남토사)]로서의 란상과 명나라의 관계는 만력연간(萬曆年間;1573∼1619)까지 존속했으나, 관계가 긴밀했던 15세기 이후에는 왕국의 성장, 중부 비엔티안으로의 천도(遷都), 명나라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1479년 베트남 레조[黎朝(여조)]의 레 타인통[黎聖宗(여성종)]이 침공해와 일시 위기에 처했으나, 명나라의 개입과 서쪽의 랑나타이 왕국의 원군에 의해 재기하였다. 그 후 랑나타이와의 정치·문화에서의 접촉이 현저해졌다.


랑나타이의 왕통이 끊어져 가던 1546년 포티사라트왕(재위 1520∼47)은 큰아들 세타티라트를 이 나라의 왕으로 보내는 한편, 중부지방을 거쳐 베트남 침공을 획책했으나 그 다음해에 죽었다.


세타티라트왕은 미얀마(버마)의 타웅구왕조의 세력확대에 대항하면서 1556년 비엔티안으로 천도하고, 타이의 아유타야 왕조와 동맹을 맺고 타이·캄푸치아 방면으로 파병했다. 그가 죽은 뒤 란상은 약 10년간 미얀마에 신하로서 복종했다.


공위기(空位期)를 거쳐 16세기 말의 노케오왕과 17세기초의 보라봉사왕에 의해 부홍을 이룩하고, 술리나봉사왕 치세(1637∼94)에는 불교문화·민족문예가 융성하여 최후의 원숙기를 맞이했다.


18세기에 접어들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먼저 북부의 루앙프라방이 독립하고, 이어서 남부에 참파사크 왕조가 성립하여, 뒷날 타이의 군사개입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중부에 남은 비엔티안 왕국(한문사료에 있는 萬象國), 북부의 루앙프라방 왕국[南掌國(남장국)] 등은 모두 그 기간에 란상의 명칭을 계승한 국가였다.


1.고대시대


랑카수카왕국(4세기경)

타가웅왕국(?~?)

웨이타리왕국(기원전 5세기경)

칼링가왕국(3세기경)

타루미왕국(5세기경)

푸놈왕국(1세기~6세기)

와라만왕국(기원전4000~기원전1000)

드바라바티왕국(5세기경~12세기경)

하리푼차이왕국(8세기경~1296)


2.중세시대


인도네시아

슈리비자야왕국(?~14세기경)

사일렌드라왕국(?~9세기경)

산자야왕국(732~929)

마타람왕국(9세기경~11세기경)

케디리왕국(11세기경~1222년)

싱가사리왕조(1222~1292)

게랑구왕국(?~1293)

마자파히트왕국(1293~1520년경)

파자자란왕국(1333~1526)

반탐왕조(1556∼1843)

데마크왕조(1582~1800)

아체왕조(1502년경~1904)


말레이지아

말라카왕국(1390~1511)

조호르왕국(1511~1885)

말레이지아왕국(1955~)

브루네이술탄국(1409~)


미얀마

퓨왕국(?~832)

아라칸왕국(기원전6세기경~1785)

몬족의 파간왕조(107~1044)

버마족의 파간왕조(1044~1369)

핀야왕조(1309~1360)

사가잉왕조(1315~1364)

전 한타와디왕조(1287~1539)

후 한타와디왕조(1747~1757)

인와왕조(1364~1555)

타웅구왕조(1486~1752)

냐웅얀왕조(1721)

콘바웅왕조(1752~1885)


시암

난차오왕국(650년경~902)

다리왕국(902~1253)

수코타이왕조(1236년경~1402년경)

아유타야왕조(1340~1767)

탁신왕조(1767~1782)

라타나코신왕조(1782~)


라오스

란상왕국(1353~1707년에 분열)

루앙프라방왕국(1707~1893)

비엥찬왕국(1707~1975)

참파샤크왕국(1713~1893)


캄보디아

전 앙코르제국(605~802)

후 앙코르제국(802~1436)

로케오제국(1436~1593)

프놈펜제국(1593~)


참파왕국(192~1822)


베트남

전 리왕조(544~602)

고왕조(938~968)

딘왕조(968~980)

전 레왕조(980~1009)

리왕조(1010~1225)

친왕조(1225~1400)

호왕조(1400~1407)

후 레왕조((1428∼1527:막왕조를 몰아내고 1533∼1789)

막왕조(1527~1650년경)

통킹국(1602년경~1777년)

타이손왕조(1778~1802)

느웬왕조(1802~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