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조선시대 붕당(朋黨)은 당쟁으로 보아야 하는가?

한부울 2009. 7. 18. 00:56

조선시대 붕당(朋黨)은 당쟁으로 보아야 하는가?

 

글쓴이:한부울


일제가 심어 준 반도사관으로 붕당을 보아서는 안 된다.

붕당은 조선시대의 정치제도로서 독창적이며 고려시대 때부터 검증된 제도이다.

독창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세계사에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치제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실제로 고조선 고구려를 시발점으로 하여 신라를 이어 고려와 조선이 다민족과 다문화를 아우르고 포괄한 정복왕조였다면 분명코 독특한 정치제도 아래 홍익인간사상을 바탕으로 한 제세이화 통치를 하였을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붕당을 식민사관에 의하여 부정적으로 보기 보다는 대륙사관에서 좀 더 긍정적인 면으로 분석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월한 정치제도를 마치 조악한 정치적 난맥상으로 보아 이권당쟁에 의한 아귀다툼양상으로 해석하고 붕당을 당쟁 즉 당파싸움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우리스스로를 옭아매는 것이다.

대륙조선이란 실체를 부정하며 거대한 정복왕조가 가질 수밖에 없는 엄청난 동력에 의한 가치를 반도사관으로 매도하는 것도 부족하여 무시되고 진의를 간과한 나머지 우리스스로가 지대한 오류 속을 헤매도록 하는 심각한 역사바라보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몽고징기스칸 등장은 19세기말 일제가 만든 역사조작 중에 가장 성공한 역사 만들기이다.

몽고징기스칸을 만들고 그러한 몽고가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일본이라는 엉터리 같은 역사로 둔갑시켜버린 것이다.

몽고징기스칸이 존재 할 때 일본은 동남아시아 자바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종족이 서세의 비호를 받으면 이동한 시기는 1872년경 이후이다.

그때 지금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열도가 고려연합제국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몽 고려, 원 고려가 침범하고 정복할 일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몽고 징기스칸을 앞세워 만든 역사 상징성은 고려와 조선이 그 중심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거대한 국가체제를 지속하고 다문화 및 종교를 포괄하는 정치적 제도는 매우 독특하지 않으면 반발에 부딪치고 그르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고려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아우르는 정복 왕조임에 틀림이 없다.

그 영역범위가 바로 중앙아시아를 깃 점으로 하여 동서남아시아를 포괄한 동방중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서양인들이 고려를 unite corea(고려연합)라고 했던 것이다.

고려는 투르크족으로서 정통왕조 적통자임을 만방으로부터 인정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동방이라 함은 서방에서 보았을 때 유라시아 깃 점으로 한 동편을 통털어 말하는 것이다.

동방이라 함은 중앙아시아도 포함이 되는 것이다.

터키가 우리를 형제 국으로 보는 관점에는 투르크라는 개념이 들어있다.

고려를 망하게 한 이성계 조선이 들어서면서 고려가 일시에 그 곳에서 사라졌는가는 의문이 많다.

고려는 중원을 차지하고 전 아시아를 통치한 세력이다.

조선초기에 고려 영토인 중앙아시아를 공격 정복왕조로서 근거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티무르제국이 점령하지 못한 지역 위구르 지역을 몽고 만주지역 중심으로 존재한 것이라고 보이며 중원천자국의 입지는 변하지 않았다고 보인다.

송고려 원고려의 근거인 동아시아전역이 후 명이라는 명명되는 세력들에 의하여 점령되거나 또는 승계 되는 절차를 거치면서 조선이 통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면 그러한 역사 흔적은 무굴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티무르가 이성계 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티무르제국과 무굴제국 초기와 중기에 존재한 대륙조선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서양인들이 지칭한 indies(인디즈: 인도, 인도차이나, 동인도) 무굴조선일 가능성도 많다.

때문에 명조선, 청조선일 가능성이 있다.

동인과 남인, 북인 새롭게 등장하는 정치세력이다.

초기조선은 서에서 동으로 북으로 남으로 이동 확장했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서가 주축이 된다.

조선은 중앙아시아의 天子國(高麗)을 그대로 유지하는 상태에서 고려를 중국으로 섬겼을 가능성이 많다.

天子國이 존재한 자리는 이슬람 영역인 위구르지역 티무르가 점령하지 않았던 영역이다.

그러나 고려와 다르게 半島史에는 이성계가 억불숭유정책을 택했다.

억불은 알겠는데 숭유는 자연스러운 역사 흐림과 많은 차이가 있고 뒤틀린다.

半島史는 전체 역사흐름에서 무엇인가 속이고 있는 것이다.

고려는 정복왕조이고 연합형태의 국가이므로 알게 모르게 종교 갈등때문에 힘들어했을 것이다.

조선의 등장은 종교분리라고 볼 수 있다.

고려가 불교(정통민교, 도교)를 국교로 삼았는가 하는 사실과 조선이 숭유 즉 유교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았는가 하는 것은 분명치 않다.

숭유 성리학의 실체가 무엇인가?

도교인가? 아니면 동학 즉 동교 (東敎) 인가?

주자와 주돈이가 성리학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들은 송 고려인들이다.

즉 고려인이다.

그럼에도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고 半島史는 말한다.

불교는 힌두일 가능성과 북방불교, 남방불교를 총괄하는 또 다른 형태의 민교일 가능성이 많다.

어쩌면 오히려 고려가 숭유 즉 성리학을 중하게 여겼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은 건국시 종교정책면에서 정황상 아무래도 이상한 점이 많다.

이슬람이다.

 

 

때문에 조선시대 때 종교 갈등으로 인하여 반정 연속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와 조선은 국가영역이 한없이 넓으니 지역이 다르고 관습이 다르며 풍속과 풍토가 다른 정치색들이 존재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종교적인 갈등이 분명코 존재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서인이 주축이 된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서인이 집권하고 북인(고려집권층)체가 영구히 몰락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를 수 있다.

물론 인조반정은 정치적인 단순한 환란이나 정치적인 난맥상이라고 하기엔 기존 틀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어서 위 사실을 공감케 하는 면도 없지 않다.

타협이 불가능한 인종문제, 지역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로 인하여 도저히 정권주체와 통합이나 융합이 어려워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좀 변이적으로 분석할 때 반도사를 짜집기 하는 세력들이 과정에서 무대를 바꿀 필요를 느껴 짜집기하기 위한 픽션이 아닌가 여겨진다.

실제로는 단순한 정치폭거가 아니라 시대적 상황을 설명한다면 바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세조반정, 중종반정, 인조반정은 각각 조선정권자체를 뿌리까지 흔들 수 있는 정란이고 확대되어 병란을 이어진 것이지 일개 정치인들의 이권다툼에 의한 내분은 분명히 아님을 알아야 한다.

복합적 다문화사회에서 현재도 그렇지만 종교적인 갈등은 어느 시대나 나라전체를 송두리째 뒤 흔들 수 있는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면은 동서양을 딱히 구분하지 않고 빈번하게 발생된 혼란이라고 보아야 한다.

종교적 갈등은 분쟁으로 이어지고 병란 또는 반란사태로 확대되는 것은 특히 서양사에서 비일비재 한 내용이고 부정할 수 없는 극단적 이치이다.

수많은 나라가 이러한 종교 갈등 이유 때문에 분열되고 멸망한 것이다.

때문에 붕당이라는 것은 이러한 면을 희석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정치제도였을 것이다.

아시아를 포괄한 고려를 이은 조선이라 하지만 위 세 차례의 반정에 의하여 점차 종교적 갈등이 첨예화되고 국론이 분론이 되어 불만이 증폭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임진왜란은 서세에서 처음 시도한 종교전쟁으로 포르투갈 예수회 추종자가 된 왜구의 반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은 일제가 半島史를 창작하는데 중요한 빌미와 구성요소가 되었고 감히 조선사를 제멋대로 분리하고자 하는 중요한 모토로서 이용되었을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붕당정치는 인종과 지역, 극단적 종교 갈등으로부터 국론을 조정하면서 나라 통합에 지장이 없도록 유효적절하게 타협하고 봉합하며 조절기능으로 존재한 조정 장치로 충분한 정치적 가치를 다 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갈등과 분쟁을 최소화하고 국론통합을 이어가는 정통 정치적 제도형태이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제도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난맥상에 빠질 때 갈등과 불만을 낳고 상방 소통이 불가능하게 하여 내부로부터 폭발되면서 환란과 국란으로 이어지고 나라 전체를 위태롭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처럼 단일 민족구성원으로 존재한 것이라면 이러한 갈등요소는 없어야 마땅하다.

때문에 당쟁으로 비쳐 질 수밖에 없는 오해 소지도 있는 것이다.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은 조선이 동으로 이동하며서 부터 발생된 것이라고 보이고 조선의 신진공신들이 서인을 대항하여 고려기득권 층 귀족출신 사대부 중심의 정치세력 즉 동인들이 결집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훈구파와 사림파이다.

물론 지역적 종교적인 문제가 큰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서울 한양 어느곳 동네에 사는 정치인을 두고 동편과 서편을 나누는 형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서인(훈구파:기호파)과 동인(사림파:영남파)을 나눔에 있어 현 半島史 분리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동인은 전통적 지역인 천자중심의 중앙아시아 고려귀족출신 정치인들이고 서인(東人)은 신생 조선공신을 대칭하였다고 불 수 있다. 동인(東人)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눠지지만 서인은 대체적으로 유동적이지 않다.

그것은 집권 정당이기 때문이다.

신생조선정치세력들에게 대항하는 정치세력들은 서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인, 남인과 북인을 포괄하는 정치세력으로 확대 등장하였을 것이고 남인과 북인은 근본적인 사상 차이에 의하여 결국 갈라지는 형태가 된 것이다.

남인은 인도 대륙 양자강남쪽 아니면 동, 남아시아를 포괄하는 무굴, 남명정치세력일 것이고

북인은 원 고려 만주북방을 구심점으로 한 만주 정치세력이었을 것이다.


특히 북인은 대북(大北) 소북(小北), 대북은 골북(骨北) 육북(肉北) 중북(中北), 소북은 청소북(淸小北) 탁소북(濁小北) 많은 분열(?)을 한다.


숙종 때 와서 조선 기득권층 공신인 서인은 노론 소론으로 갈라진다.

이것은 인종, 종교적 분열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때 노론은 불교(남, 북방불교 힌두)나 도교(동학, 동교)라고 보이고 소론은 색목인 출신으로서 즉 이슬람 종교관을 가진 정치세력이라고 판단되는 점이 많다.

 

이후 23대 순조대 부터 시파, 벽파 나뉘어 세도정치가 횡행하였다는데 그 중심엔 순원황후가 있다.
세도정치와 붕당은 성격과 개념자체가 다르다고 해야 한다.
세도정치가 무엇인가?
왕의 신임과 직접적인 위임(委任)을 받아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일인데 총신(寵臣:총애받는 신하) 또는 척신(戚臣:겨레붙이기하는 신하)이 국왕의 신임을 받아 국정을 장악하였던 정치형태이다.
이유는 나라의 임금 세손이 귀하게 됨으로서 마땅한 적통으로 승계가 힘들어졌기 때문에 왕권이 흔들리면서 자연스럽게 세도정치가 개입하게 된 것이다.
이과정에서 솔직히 법통이나 적통은 찾을 수 없었으며 왕통계승 자체가 어렵게 되면서 많은 음모가 등장하고 끝내 역사가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24대 헌종대 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헌종은 8세의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순원왕대비가 수렴청정하다가 15세부터 직접통치를 하였으나

1849년 23살의 나이로 일찍 승하하고 만다.
요절한 것이다.
이후 역사는 분명치 않고 혼란스러워 진다.

순원황후는 청말 서태후를 보는 듯 하다.

딱히 청과 조선을 분리하고 볼 이유가 없어진다.
청과 혼입이 되면서 반도사에는 조선과 청을 억지로 따로 떼어놓고 구분하려고 애쓴 흔적이 여기저기 보일 뿐이다.
갑자기 어린나이로 승하한 헌종의 뒤를 이를 적통자가 없어 부득불 22대 정조 형제 인 증조부뻘되는 은언군 먼 학열을 찾아 순원왕대비가 철종을 승계하게 하였는데 이와같은 일은 조선왕조 왕위계승의 관례조차 무시한 행위였다.
솔직히 철종대 부터 조선 왕조정통성이 흐려지거나 와해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러하니 자연스럽게 왕권이 약화되고 세도정치가 활개를 칠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
조선 인조(1623~1649)반정 시기에 명이 망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명 의종(1627~1644)과 청 태종(1636~ 1643)이 비슷하게 졸한다.
인조반정시기가 이상하게 명나라가 망하는 시기와 일치하고 명의 마지막 황제가 청나라 2대 황제 태종과 졸하는 시기가 비슷하다.
한사람의 진짜 임금을 역사서에 억지로 셋으로 나눈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철종대 이르러 왕위 계승이 정통성과 다르게 뒤틀리면서 청과 혼입한 듯하고 대륙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어쩌면 철종대에 현실적으로 있을 법한 사건들이 중복하여 일어나 무엇인가 보일 듯 말듯 년도 숫자상 차이만 두었을 뿐이지 실제 꿰 맞추어 보면 사건대부분 일치하는 듯한 느낌이 있다.

특히 철종(1849∼1863)은 러시아 마지막 황제 리콜라이2세를 대입하게 할 정도로 철종 자손들이 하나같이 의문투성이 죽음이고 물음표(?)다.

한마디로 떼죽음, 몰살이란 표현조차 부족하지 않다고 느낄 정도라 리콜라이2세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철종제위 밖에 혼란기가 태평천국의 난(1851년~1864년)과 비슷하다.
특히 반도사를 중심으로 한 19세기 역사는 한나라를 두나라를 만들고 한 임금을 같은 시기에는 세 임금으로 만들어 겹치기 한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으며 많이 헷갈리게 한 기간이다.

헷갈리게 하는 것들은 몇가지가 더 있는데 서양 즉 미국에서는 1881년을 조선이 망하는 년도로 보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 역사로 아무리 따져보아도 망할 건덕지가 없다.

다만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이 발생했을 뿐이다.

하지만 조선을 한반도로 국한하지 않고 중앙아시아 및 대륙을 통치하고 있었던 대륙조선이라고 할 때 여러가지 사건을 추측을 할 수 있다.

첫째 서방제국과의 전쟁이다.

1868년 인도제국을 만들고 북진하던 영국과의 충돌이 있었을 것이고 미, 영, 프랑스를 견제하면서 남진 하던 러시아와의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중앙아시아 제국들을 사이에 두고 충돌을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영국과 아프칸전쟁(Afghan's War) 제1차(1838-42), 2차(1878~1880)을 의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간적으로 17년이란 갭이 있지만 의문의 떼죽음을 한 철종가 몰살 영향으로 조선 내부적으로 급격한 혼란이 있었을 것이고 더하여 서양제국과 연쇄적인 충돌이 발생하였다면 아무리 강한 조선이라 할지라도 사방공격으로 무너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이것이 조선이 1881년에 망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점이다.

혼란은 또 있다.

이하응(1820~1898)과 이홍장(1823~1901) 생졸이 3년차이에 똑 같은 나이에 죽는다.

이하응이 3년 일찍 태어나 이홍장보다 3년 일찍 죽는다.

동학의 시조 최제우(1824~1864)와 야훼교(서학)의 시조 홍수전(1814~1864) 사망년도가 같다.

철종대 순원대왕대비 또한 서태후역할과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순원왕후는 자신의 친가인 안동김씨세력과 결탁하여 장헌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 원범(元範)을 강화도(산동성이다)에서 궁으로 데려와 덕완군(德完君)으로 책봉하고 자신과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시키니 조선의 제25대 왕인 철종(哲宗)이다.
서태후 역시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서 그녀의 조카를 데려와 광서제로 만든다.

그러나 이런식에 비교에서 약간의 시간적인 차이가 존재하지만 반도사의 짜집기 행태를 보면 시간적 차이만으로도 동일한 인물로 보지 못할 이유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주요 인물들이 중복 겹쳐지는 면이 비일비재 하여 조선시대 말기 역사가 의문투성이다.

다시말해 대륙조선이 한반도조선으로 오그라들면서 생기는 오류라고 본다.

즉 한반도붕당은 파당, 파벌싸움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대륙붕당은 홍익인간사상과 제세이화정신이 살아있는 지극히 바람직한 정치제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붕당은 당파싸움이 분명히 아니다.
또한 한반도조선말기 세도정치와 붕당은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때문에 순조대 이후 순원황후로 인한 세도정치는 조선의 정통성이 붕괴되는 과정에 있었다고 보이며 조선초중기 대륙정치의 붕당과는 거리가 있는 이질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붕당역사로 볼 때

태조 이성계로 부터 연산군까지 역사가 티무르역사(서인)와 흡사하고

중종에서 광해군까지 역사가 명(동인)과 무굴역사(서인)와 비견되며

인종반정으로 광해군과 인조 교체역사가 마치 명(동인)청(북인)전쟁을 상상케 하는 것이고 

인조에서 철종까지 역사가 청(북인)과 마지막 남명(남인)같으며

세도정치인 고종이후 역사는 청말역사와 너무나도 흡사하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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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붕당(朋黨)은 당쟁으로 보아야 하는가?

 

붕당(朋黨)

Political factions in Joseon Dynasty

The Bungdang (Hangul: 붕당, Hanja: 朋黨)


Hangul

붕당

Hanja

朋黨

Revised Romanization

Bung-dang

McCune-Reischauer

Pung-tang

Political factions in Joseon Dynasty



국어사전에는 [朋黨] <명사> 이해나 주의 따위를 함께 하는 사람끼리 뭉친 동아리.<준말> 당(黨)④. <동의어> 당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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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교육으로 당쟁을 활용한 일제

 

조선의 당쟁을 처음 정리한 일본인은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다. 시데하라는 1907년에 쓴「韓國政爭志(한국정쟁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인의 오늘날의 작태를 이해하려면, 그 원인을 과거의 역사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역사적 사실의 근원으로 고질적인 것은 당쟁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시데하라 히로시는 1905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대한제국 학부참정관으로 부임해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입안했다. 시데하라가「한국정쟁지」외에도「조선교육론」과「식민지교육」이라는 책을 썼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의 당쟁을 연구한 것은 효율적인 식민지교육을 위한 것이었다. 시데하라 이후 많은 일본사학자가 조선의 당쟁사에 관심을 보이며 자신의 주장을 쏟아놓았다.

일제 어용학자 시데하라 히로시의 이같은 역행은 학자로서의 정당한 연구라기 보단 어용나팔수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을 당쟁이란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이용하여 식민교육을 정당화하는데 혈안이 된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가와이 히로다미라는 당쟁이 개인 간 감정대립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히로시의 의견이 너무 피상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조선의 당쟁은 경제생활의 곤란과 사회 제도의 문란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뒤를 이은 호소이 하지메는 가와이의 주장에서 한 발 더 나가「붕당 사화의 검토」라는 책에서 당쟁의 원인은 민족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나는 혈액이 굳어버린 채 흐르지 않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사람의 혈액에 이처럼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다는 것도 조선의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시비를 함께 궁구해 둘 필요가 있다. 여하간 대영웅도 하룻밤에 그 국민의 피부나 머리카락의 색, 눈동자의 빛을 바꿀 수 없고, 수천 년 수백 년에 걸쳐 육성된 인격 또는 국격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바꾸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다."


호소이는 분열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민족성이 당쟁의 원인이고 오랜 세월 내면화된 기질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해방된 지 60년이 넘었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은연중에 우리 뇌리에 깊이 박혀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정치에 대한 과도한 집중과 무관심이 교체하면서 냉소와 불신이 깊어지고 있는 데는 일본이 심어놓은 당쟁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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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朋黨)은 조선 중기 이후 특정한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다. 또한 붕당정치(朋黨政治)는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각 붕당들 사이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의 정치 운영 형태이다.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원리로 하는 붕당정치는 현대의 정당정치와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지만 정치적인 이해관계는 물론 구성원 사이에 학문적 유대 또한 공유했다는 점이 조선 시대 붕당의 특수한 성격이다.


16세기 중엽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을 최초의 붕당 성립 시기로 본다. 이 시기의 붕당은 특정 가문의 권세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을 통해 조선 중기 정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9세기 초엽 이후 붕당정치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특정 양반 가문이 권력을 쥐고 독재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었다.


붕당정치를 당쟁(黨爭) 또는 당파 싸움이라고도 부르나, 이 용어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의견의 교환과 대립에 대해 당의(黨議)라고 표현하였다.


붕당은 본래 중국에서 정치인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유교적 정치 이념 하에서 붕당을 형성하는 것은 범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송나라 이후 성리학 이념은 군자(君子)끼리 모인 '군자당'(君子黨)이 소인(小人)을 배제하고 정치를 주도하여야 한다는 논리를 지지했으므로 이를 받아들인 조선의 유학자들도 조선 중기 이후 붕당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붕당이 발달하게 된 원인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유학파(儒學派)의 대립, 둘째 왕실 내척(王室內戚)의 내분, 셋째 제도상의 결함이다. 특히 제도상의 결함은 양반의 수는 늘어가는데 양반에게 수급권을 줄 토지가 모자라게 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이 와중에 과전법은 직전법으로 바뀌면서 기성세력과 신진세력 사이에 알력이 생겨났다. 이는 달리 보면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성종 때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연산군 때부터 차츰 불거지게 되었고, 결국 선조 때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대립이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붕당 정치가 시작된다.


선조는 덕망 있는 사림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문신들로 하여금 한강가의 독서당(讀書堂, 호당)에서 공부하면서 매달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이이(李珥)의 유명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이 독서당에서 제출된 것이다. 사림 정치가 확산되면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이른바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불리는 문치주의의 절정을 꽃피웠다. 그러나 사림이 많아지면서 기성 사림과 신진 사림의 분화가 촉진되고 여러 붕당(朋黨)을 형성하여 서로 경쟁하는 양태로 변하였다. 성리학에서는 군자(君子)들의 붕당 형성을 긍정하였기 때문에 사림 정치가 붕당 성립을 가져오는 것은 필연적 추세였다.


최초의 붕당 대립 구도의 성립은 1575년(선조 8년)으로 이조전랑직 임명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심의겸을 추종하는 기성 사림인 서인과 김효원을 영수로 하는 신진 사림인 동인의 결집에서 비롯되었다. 심의겸이 서울 서쪽에 김효원이 동쪽에 살았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4] 서인과 동인의 분당은 문반 관료의 인사권을 쥔 이조전랑 자리를 둘러싸고 심의겸의 아우(심충겸)와 김효원이 서로 다툰 데서 비롯되었다. 이조전랑은 5품·6품의 낮은 자리이지만, 삼사(三司)의 하나인 홍문관 출신의 엘리트 관료가 임명되는 것이 관료로서, 삼사(三司)의 공론(公論)을 수렴하여 대신들을 견제하고, 또 물러날 때에는 후임자를 스스로 천거할 뿐 아니라 이 자리를 거치면 재상으로 쉽게 오를 수 있는 요직이었다. 따라서 전랑의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권력 경쟁의 핵심 과제였다.


이 사건에는 서인과 동인의 분당 배경에는 기성 관료와 신진 관료의 이해와 충돌, 학파와 지연의 차이, 그리고 척신 정치에 대한 강·온의 태도 차이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동인 대 서인


선조가 즉위하면서 훈구파의 탄압을 이겨내고, 사림파가 정치 주도 세력이 되었다.


동인(東人)은 조선 최초의 붕당으로 16세기 중엽 사림파 중 신진 세력인 김효원, 유성룡, 이산해 등이 연합하여 결성하였다. 주로 이들은 영남 명유인 이황, 조식의 문하였으며, 이 밖에도 개성의 처사학자인 서경덕 문인들도 가담하여, 이들의 연합은 학연의 성격이 짙었다. 동인은 대체로 지방의 청류를 자처하는 한사(寒士)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일원적인 학맥과 정책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 자체 내에 이질적 요소를 많이 지닌 청류의 연합 세력과 비슷했다. 서인의 정책이 주로 치인(治人)에 역점을 두어 제도 개혁을 통한 부국안민(富國安民)에 치중했다면, 동인의 정책은 수기(修己)에 역점을 두어 치자(治者)의 도덕적 자기절제를 통해 부패를 막으려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동인의 구성원들은 신진 사림의 급진파로 이루어져 있어 훈구파의 척신 정치의 청산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서인은 대체로 서울 근방에 생활 근거를 둔 고관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학문적으로는 이이·기대승·김인후(金麟厚)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또 왕비는 대체로 서울 근방의 고관 집에서 채택되는 것이 관례여서 자연히 서인 중에는 척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심의겸도 명종비(妃)의 동생으로서 외척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체질적으로 사림에 속하고 또 사림도 그를 존경하여 옛날의 척신과는 달랐다. 초기에 기성 사림 중심의 서인은 학문적 구심이 없어 큰 세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동인과 서인 사이의 중재역을 자처하던 이이가 서인에 합류하고 성혼도 서인에 합류하면서 두 사람이 서인의 구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에 따라 결집되어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동인의 분열


선조 초에는 서인과 동인의 경쟁 체제가 유지되면서 큰 실정은 없었으나,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정여립 모반사건)를 계기로 서인은 동인을 배제하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동인 중 일부 급진 세력이 관련되었지만,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을 자극하여, 2년 뒤인 1591년(선조 24)에 동인은 서인 정철이 세자 책봉을 왕에게 건의한 사실을 문제 삼아 정철 일파를 내몰았다(→건저문제).


그때 선조가 동인의 편을 들어주면서 동인은 세력을 회복하게 되고, 정철의 처벌 문제로 인해 강경파(급진파)인 이산해 중심의 조식·서경덕계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유성룡 중심의 이황계인 남인(南人)으로 갈라졌다. 기축옥사 때 피해를 입은 세력이 조식·서경덕계였으므로 서인에 대한 반감이 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할 기미를 보이자 조선은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였으나, 당시 조선은 일본이 침략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놓고 소모적인 정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정철 일파의 실각으로 동인 특히 북인이 우세한 가운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혼란한 가운데 정권을 잡은 남인은 일시적으로 서인과 북인과의 공존 체제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화의 계획이 실패하면서 강경책을 취했던 북인이 득세하고, 북인이 다시 광해군을 내세운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내세운 소북(小北)으로 분열되어 광해군 즉위와 함께 대북이 정권을 잡았다. 서인과 남인에 비해 학문적 기반이 부족했던 대북은 왕권 중심의 강력한 정치를 지향하고 다른 당파의 배제를 꾀하였다. 그러나 북인의 탄압을 받던 남인과 서인이 연합하여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키면서 이후 북인은 정계에서 숙청되어 흥선대원군 집권 이전까지 정계에서 배제되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은 형식적으로 남인과 연합 정국을 구성하였으나, 효종이 즉위하면서 북벌론을 국시(國是)로 하면서 성리학의 대의(명분론·의리론과 원칙론)에 충실한 서인의 입지는 더욱 커져 갔다.


당쟁의 격화


숙종대에 이르러 상호 비판을 전제로 100년 가까이 공존하던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세 차례에 걸친 환국의 와중에 남인과 서인은 서로를 숙청하고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경신환국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가 기사환국으로 실각한 서인은 이 과정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과 윤증·박세채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으로 나뉘었다. 노론과 소론은 경술환국을 통해 복권하면서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였고, 이후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영조 즉위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당쟁이 치열해질수록 숙종은 성군이 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백성들도 살기 편했다. 왜냐하면 정적이 건재하여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부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탕평책


영조는 즉위하던 해(1724년)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책(蕩平策)을 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사이의 화해를 유도하고 당파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겠다고 선언해 이전까지의 격렬한 당쟁은 영조대에 이르러 사라졌다. 또한 노론과 소론 양쪽의 주요 인물들을 외척으로 만들어 세력의 안정화를 꾀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탕평책을 지지하는 탕평당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당파를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당쟁의 표면적 안정에 중점을 두고 능력에 관계없이 양쪽을 고르게 등용한 영조와는 달리, 정조는 국정의 철학으로 명절과 의리를 제시하고 자신의 국정 운영에 부합하는 세력(남인의 청남계, 노론의 청명당계 등)을 중용하였다.[5] 영조의 탕평책과 대비하여 정조의 탕평책은 준론탕평(峻論蕩平, 옳고 그름을 명백히 가리는 탕평책)이라 불린다.[6] 그러나 붕당 간의 당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정조의 정책에 찬성하는 시파(時派)와 반대하는 벽파(僻派)로 새로운 당파를 형성하여 당쟁을 계속하였다.


시파 대 벽파


장헌세자의 죽음을 에워싸고 시파와 벽파 간의 당쟁이 일어난다. 장헌세자의 죽음 이후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죽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벽파가 생겨났다. 홍봉한 일파는 시파에 속하고 김구주(金龜柱) 일파는 벽파에 속하는데, 이로써 노론의 분열은 물론 소론·남인도 주로 시파에 속하는 등 당쟁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 후 정조가 즉위하자 자연히 시파를 가까이했으며, 순조가 즉위했을 때는 영조의 계비인 김씨가 섭정을 함에 따라 벽파가 정권을 잡았다. 1801년(순조 1년)에 일어난 신서파와 공서파의 대립이었던 신유사옥도 이 시파·벽파의 대립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붕당정치의 종말


정조가 죽고 순조 대신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국내 로마 가톨릭 신자 탄압을 빌미로 시파를 모두 숙청하였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난 후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잡게 되고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붕당은 정치 세력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였다.


당파의 분할 과정


본래 조선에는 훈구파와 사림파라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는데 훈구파가 훨씬 권세가 컸으며 명종 시대까지 훈구파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첫 붕당은 집안 내의 붕당으로서 파평 윤씨 일가인 윤임과 윤원형을 영수로 삼은 대윤과 소윤이다. 대윤과 소윤은 중종 때부터 명종 때까지 주요 당파로 있었으나 윤임과 윤원형의 죽음으로 당은 거의 사라졌다. 명종 이후부터는 사림파가 득세하였는데, 이때 동인과 서인으로 당대의 대학자 이이와 이황을 영수로 하여 나뉘었다. 두 당파는 동서분당을 계기로 완전히 갈라설 때까지 혼재한 상태였다.


이후 동인은 후에 이황의 제자인 남인과 그 외 인물은 북인으로 분할되었고, 이이의 당파인 서인은 나뉘는 동인으로 말미암아 세력이 넒어지는 듯했으나, 광해군 시절 정파로 자리 잡은 북인에서 갈라진 대북과 소북으로 말미암아 서인은 정치적 입지를 잃었다. 서인은 인조반정으로 다시 득세한 이후로 남인과 당쟁을 벌였고, 남인을 꺾은 이후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할되어 당쟁을 서로 벌였다.


현종 때부터 숙종 때까지 남인과 서인이 번갈아 정권을 잡았다. 이때 남인은 서인 처벌을 엄히 하자는 청남과 느슨하게 하자는 탁남으로 나뉘었다가 영조 때에 다시 남인으로 통합된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여 사색당파를 고루 등용한다고 하였지만, 사도세자가 죽는 임오화변의 영향으로 사색당파가 벽파와 시파로 나뉘었다. 이때 노론은 대체로 벽파로서 사도세자에 반대하여 그 죽음을 방조 또는 찬성했으며, 시파는 대체로 노론과 북인을 제외한 나머지로서 사도세자를 지지하여 그 죽음을 반대하였다. 정조의 즉위로 시파가 득세했지만, 정조 말년에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그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한 공서파와 그에 대해 느슨하게 대한 신서파로 나뉘었다. 공서파는 벽파가 주를 이루며, 신서파는 시파가 주를 이루었으나 동일한 당파이지는 않다.


순조가 즉위한 이후로는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의 벽파가 크게 득세한 가운데 공서파도 세를 얻지만, 시파는 일시적으로 약화되고, 신서파는 몰락한다. 그 뒤 시파인 김조순의 세도정치로 붕당은 종말하였다.


사색당파인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은 정치적 당파이면서 학파의 성격을 지니지만, 시파·벽파 및 공서파·신서파는 정치적 당파일 뿐 학파와는 무관하다.


역사적 평가


당쟁의 폐해를 조선의 멸망 원인으로 보던 지적에 대해 일본의 식민사관의 영향이라는 설이 확산되었으나, 조선시대에도 당대 지식인들의 당쟁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였다. 이익은 '붕당론'을 통해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있으며, 당쟁의 원인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시데하라 아키라 등은 한국인의 민족성이 본래 싸움을 좋아하고, 잔혹하고,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기 때문에 당쟁이 가열되었다고 주장하였다.[7] 또한 조선이 임진왜란 초반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를 거듭한 이유가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 계급투쟁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들은 붕당이 지배 계층인 양반 사회의 이득만을 대변하는 정치 집단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붕당은 계급의식이 깨어나지 않았던 근대 이전의 시대적 한계 속에서 발전된 정치 형태로서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붕당 정치는 외척과 공신의 폐해가 컸던 조선 사회에서 특정 가문이나 공신 집단의 횡포를 효과적으로 견제하였다. 또한 절대군주제 하에서도 신하들의 소수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중소지주계급 전체로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오히려 정조 이후 붕당정치가 붕괴하고 특정 가문이 독재하는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 왕조가 휘청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거꾸로 붕당의 정치적 자정 기능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종래에 학자들이 시데하라 아키라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당쟁으로 말미암아 무수히 많은 사람이 사약을 받아 죽었다고 주장해 왔으나 사실무근이다. 당쟁이 격심했던 이 시기는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으로부터 1727년(영조 3년) 정미환국까지 50년 정도였으며, 이때 정치적 이유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이건창이 지은 《당의통략》에 따르면, 모두 79명으로 1년에 약 1.6명이다. 이는 서양에서 당파 사이의 대립이 격심했던 때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가 희생되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혁명 당시인 1792년 8월 10일 하루에만 무려 1천3백 명이 정치적 이유로 희생되었으며, 파리 코뮌 기간, 흔히 “피의 주간”이라 불렸던 1871년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7일 동안 2만5천 명이 희생되었다. 러시아의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1905년 1월 22일 당일에는 150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게다가 당쟁이 격심했던 그 시기에 가장 민생이 안정되었음을 볼 때 역설적이게도 당쟁이 있었기 때문에 백성이 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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