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계보가 정상적이라고 판단 할 수 있는가?
왕조승계 계보에 대한 의문
조선 대변혁기
1.세조반정-계유정란(癸酉靖亂) 단종2년 1453년 10월 10일
2.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음력 9월 2일(양력 9월 18일)
3.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1년) 음력 3월 12일 서인이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는 정변
4.철종사망 1863년 음력 12월 8일
세조반정-계유정란(癸酉靖亂) http://blog.daum.net/han0114/17047986
계유정란(癸酉靖亂)의 모티브가 되었던 정난(靖難)의 변(變)
http://blog.daum.net/han0114/17047986
중종반정(中宗反正)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은 연산군이 재위 12년간 화옥(禍獄)과 황욕(荒慾)등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놓았다는 이유로 페하기로 밀약하고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다 싶었던지
이어 "...명망이 있던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부정(軍資副正) 신윤무(申允武) 등의 호응을 얻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응은 어떤 의미일까?
호응은 부름에 응답? 통했다...적극적이지 않았다는 표현일 것이다.
차라리 동조라고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어 애매모호하다.
이조참판(吏曹參判)은 이조의 종2품 당상관이고 이조판서의 바로 아래에 관직으로 재임한 경력만을 가진 성희안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즉 중추원(中樞院) 종2품 지사(知事)직 중추원 서열 4위에 있었던 박원종이 연산군을 폐하겠다고 감히 밀약하여 결국 성공시켰다고 하는 것은 일제총독부관리하에 무엇인가 시대적으로 필요에 의하여 꾸며낸 픽션같은 느낌이 있다.
반정이라고 하면 결국 쿠테타인데 반정에 대한 필연적 이유가 부족함이 없지 않다.
연산군을 폐하는 이유만으로 반정을 일으키고 왕을 몰아낸다면 누가 왕권을 온전하게 수호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그러한 도발이 재발되지 않도록 관리들을 필요이상으로 통제하고 싹을 자르도록 극악한 철권통치를 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후 그러한 왕권에 대한 도전에 대하여 제왕들이 오히려 수긍하는 것처럼 자세를 취하고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듯한 실록기술에서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반정실록 그대로 볼 때 그 당시 정치상황이 철저한 봉건왕권시대가 아닌 관료중심시대라고 착각 할 정도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제왕들은 그렇듯 나약한 제왕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게 보아서인지는 모르지만 조선시대 왕조들의 계보를 보면 무엇인가 이상한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물론 계보를 따짐에 있어 천리를 거슬리지 않음에서 출발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이 그래도 버티고 있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타의에 의하여 전체흐름을 왜곡, 조작, 가필되어 역사의 궤도를 완전히 틀어놓았다는 느낌이 적지 않으며 심하게 말하자면 조선왕조실록 자체가 10분의 1정도로 축소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500년 역사 사건기록에서도 대륙에서 근거하는 모든 사건들이 한반도사관에 맞게끔 조정되었거나 또는 없어지게 하였거나 누군가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사건자체를 통째로 빼버려 본래 조선왕조실록이 유업으로 뜻을 승계하는 후손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의미를 크게 훼손하여 온전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졌고 남겨진 것들을 우리가 정사라고 신뢰 할 수 없는 많은 의구심만 쌓이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태조 이성계 계보 略記
기록에 의하여 태조 이성계로 부터 시작하여 2대가 차남이고 3대가 5남이며 4대가 3대 태종의 3남인 세종이다.
특히 2대 정종 자식들이 17 명인데 그 자손들에게 승계되지 못하고 정종 아우인 태종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정종과 반대로 태종의 자 3남인 세종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세종자식들이 18명인데 마침내 5대가 세종 장자의 신분이다. 마땅히 그 이 후부터는 장자인 적통세손에게 승계가 되어야 하지만 천리를 거슬리며 문종 아우인 차남 세조가 승계한다.
7대 세조 자손 4명중 차남이 8대 예종이 승계하고 다시 9대는 예종 형인 덕종 자식들 중 차남이 성종 9대가 된다. 성종 자손들이 16명인데 10대가 장자인 연산군이 된다.
10대 연산군은 폐군이 되어 그 자손들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고 연산군 아우인 차남이 1차 반정으로 11대 중종이 된다.
여기서 1차 변혁이라고 본다.
반정으로 신료들에 의하여 천자가 바뀐다는 1차 변혁이고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초기 조선실록을 보면 가짜 티무르제국과 연계 할 수 있다.
성종 차남인 중종 또한 자손들이 9명이고 장자가 12대 인종이 된다.
인종은 자식이 없었고 인종 아우인 차남이 13대 명종이 된다. 13대 명종 또한 자손이 빈약하여 대를 잇지 못하고 중종 자 막내 덕흥대원군의 자 3남이 14대 선조가 된다.
선조 자손들이 14명인데 그 중 적장자 영창대군이 대를 잇지 못하고 차남이 15대 광해군이 되지만 연산군과 마찬가지로 폐군으로 몰려 대를 잇지 못하고 만다. 광해군 아우이며 선조 5남 원종의 자들 중 장남이 2차 반정으로 16대 인조가 된다.
여기서 2차 변혁이라고 본다.
이때 또한 반정으로 천자가 바뀜에 2차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가짜 명나라와 연계 할 수 있다.
2차 반정으로 임금이 된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 1580년~1619년)은 선조의 5남으로서 조선의 왕족이며 조선 제14대 왕 선조가 인빈 김씨 사이에서 낳은 서자이다. 휘는 부(?), 시호는 공량(恭良)이다.
1587년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으며, 구사맹의 딸 인헌왕후와 혼인하여 4남을 두었다. 그러나 첫째 능풍군은 일찍 죽었으며, 둘째 능양군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고 조선 16대 왕이 된다. 생전에 아들 능창군을 후사 없이 죽은 형 신성군의 양자로 보냈지만 그가 신경진의 옥사에 역모로 몰려 사형되는 것을 봤고 이 때문에 화병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다. 아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추존되었으며, 이후 인조는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 하여 1632년 논쟁 끝에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무덤은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장릉(章陵)이다.
원종 정원군(定遠君)
부왕 : 선조
모친 : 인빈 김씨
형 : 신성군
제 : 의창군
비 :인헌왕후 구씨, 좌찬성 구사맹의 딸
적장남 : 능양대군(인조, 1595년-1649년)
적차남 : 능원대군(綾原大君, 1598년-1656년): 문화유씨(文化柳氏) 유효립(柳孝立)의 딸과 혼인
적삼남 : 능창대군(綾昌大君, 1599년-1615년): 역모죄로 사형
서장자 : 능풍군 (일찍 사망)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년~1626년)는 조선의 추존왕인 원종(元宗)의 정비(正妃)다.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이기도 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아들인 능양군(綾陽君)이 보위에 오르자 부부인(府夫人)에 진봉되었으며 궁호(宮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하였다. 1632년에는 남편인 정원군(定遠君)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함께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기도 김포시의 장릉(章陵)으로 남편인 원종와 함께 묻혀있다.
************************
인조반정(仁祖反正)은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 1년) 음력 3월 12일, 서인 일부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 : 인조)을 왕으로 세운 무력 정변이다.
소 중화주의에 근거한 친명 세력이었던 서인은 신흥 강국인 후금과 쇠퇴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사실상 중립정책을 펼친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의리명분론에 입각하여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또한 1618년(광해군 10) 인목대비를 감금하고 폐서인으로 격하시키자 이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다. 특히나 광해군의 집권 이후 서인 세력에게 정계 진출이란 꿈도 꿀 수 없었다. 즉,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1620년 신경진이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귀·김류·김자점·최명길 등이 이에 동조했다. 1623년(광해군 15) 음력 3월 12일 밤,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서인 세력들이 반정을 일으켰다. 이이반(李而?)이 이 일을 사전에 밀고하였다. 그러나 예정대로 거사는 실행에 옮겨져서, 장단(長端)으로부터는 이서(李曙)의 군사, 이천(伊川)에서는 이중로(李重老)의 군사가 모여들었다. 홍제 능양군의 친솔(親率) 아래 이날 밤 창의문(彰義門)을 향해 진군(進軍)하였다. 한편 반정 당일에 반정군을 지휘해야 할 김자점이 제때 도착하지 못하는 등 혼란이 있었으나, 이괄이 김자점을 대신하여 반정을 성사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궐은 미리 포섭되어 있는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內應)을 얻어 점령되었고, 그 길로 왕대비(王大妃)인 인목대비의 윤허(允許)를 얻어 무난히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곧 인조이다.
광해군은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내리는 동시에 강화로 귀양 보내었다. 내고, 한편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이위경 등 수십 명을 참형(斬刑)에 처하고 200여 명을 귀양 보냈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이이첨·정인홍·유희분·이위경(李偉卿) 등 광해군 때의 권세가들이 대역죄로 참형되어 대북은 몰락했다. 이 때 대북파로 몰려 참수된 자가 40명이나 되었으며, 숙청되어 귀양 간 자가 200여 명이라 전해진다. 반정 모의에 참여했으나 밀고했던 이이반도 반역죄로 주살 당했다. 이후로 대북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북인 정권의 우상인 남명 조식 계통의 남명학파는 크게 배척받았다. 얼마 후 광해군은 제주도로 다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18년 동안 살다가 생을 마쳤다.
반면 이 반정에 공을 세워 집권한 서인 이귀·김유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각기 등위(等位)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이 논공(論功)이 공평하지 못하였다. 여하튼 이 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 남인의 이원익(李元翼)이 다시 소환되어 입상(入相)함을 계기로 남인 제2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명, 청이란 나라 존재가 실제 없었는데도 하나같이 중국이라고 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
소중화란 용어자체가 사라져야 함이다.
명, 청은 오히려 서인, 남인과 북인으로 풀어야 한다.
명의 주원장은 홍건적 일원으로서 잔당을 이끌고 고려를 피해 남경에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그 당시 서경, 남경, 북경과 동경을 지금의 위치로 보면 안된다.
서인은 색목인을 포함한 이슬람계 정치집단일 수 있다.
북인은 북방불교계 북방세력 정치집단이며
남인은 남방불교 힌두계 정치집단이다.
동인은 정통적인 동이 세력군으로써 성리학(聖理學)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집단이다.
금(金)이 어디인가 바로 신라(新羅)이다.
명(明)은 고려(高麗)나 고려와 연결되는 지배계급이다.
서인정권은 친명배금을 내세웠으나, 어이없게도 명나라에게 문전박대를 당해 무려 22개월이 지나서야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게 된다. 이때 명나라로서는 원군까지 파병한 광해군을 내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명, 청이 대륙조선인데 자국에 일어나고 있는 세력들을 물리치는데 원정이라고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 아닌가?
문전박대라고 표현한 것은 일제가 만든 용어이고 사대속국 한반도조선이다.
내란과 호란
반정에 큰 공을 세웠던 이괄이 서인의 일부 기득권 세력과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서울이 함락되고 인조가 공주까지 피난 가는 사태도 일어났으며,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함과 더불어 구체적인 전략도 없이 무조건적인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637년 병자호란에서 패망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일부 학자들은 인조반정을 보수 세력의 반동적인 쿠데타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
삼전도 굴욕
가짜 청나라와 연관할 수 있다.
삼전도 굴욕광경은 그야말로 조작의 극치이고 음모의 냄새가 진동하는 픽션이다.
실록에 청을 만들고 조선이 나약한 속국으로서 사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꾸민 이야기고 거짓이다.
정묘 병자호란은 세계전쟁리스트에도 나오지 않는 충돌이다.
호란 즉 란이니 내전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반정보다 못한 정치적 트러블인 것이다.
그것을 일제가 청나라을 중국으로 만들고 조선왕조실록에 창작을 한 것이다.
조선은 대륙조선이다.
엄청난 지배영역을 가진 나라인지라 곳곳에서 정치적인 불만으로 아니면 종교적인 불만으로 난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언제든지 정치트러블이 있어 내란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많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배경이 명이니 청이니 구분하려고 하는 씨앗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인조가 삼전도에 굴복하여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양새는 기껏해야 동판으로 꾸며 제작 된 것이고 상상속에 환영뿐이다.
일제가 얼마든지 시켜 만들 수 있는 것들이다.
1637년 삼전도 굴욕이 설령 있었다고 하자 그 후 조선에는 치욕을 죽음보다 못하다고 분해하고 원통하게 생각하는 세력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수모를 겪은 치욕스러운 비를 신주단지처럼 보호하고 모실 리가 없다.
아마 벌써 깨버리고 조각조각내어 묻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국왕이 무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만천하에 알리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여 백성들에게 조롱감이 되도록 하였겠는지 이와 같은 것이 正史라고 주장하는 얼빠진 사람들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자가 바로 사대하는 것이고 친일하는 반역인 것이다.
픽션같은 소설이야기에 민족전체가 바보가 되어 지금까지 자학하게 만든 꼴은 어떠한 것을 제시하더라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님을 지금부터라도 알아 깨우쳐야 한다.
조선은 한반도에 갇혀버린 나약한 조선이 아니라 삼한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대륙아시아 조선임을 알아야 한다.
***************
인조계보는 조선시대 후반기 왕조계보에 주도한다.
인조계보를 이성계 계보라 할 수 있는가?
인조 삼전도 치욕을 생각하면 무엇인가 짜 맞춘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인조는 처음부터 숭명척후금이라는 정책을 사용하였다는 것 자체가 국론을 분열시키고 악감정을 조장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 한 것이고 무엇 때문에 나라가 위험스러운 정책을 고집하였는가 하는 것은 또한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인조는 총6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장자 소현세자는 두고 인렬왕후 소생 차남에게 17대 효종이 되게 한다.
17 대 효종은 한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 가 바로 18대 현종이고 현종 역시 외동자만 출생케 하여 그가 19대 숙종으로 계보를 잇는다.
그러나 숙종은 3남을 두었고 그 장자가 20대 경종이 되었고 경종 소생 자손들이 없어 숙종 자 3남 중 차남 경종의 바로 아래 동생이 21대 영조가 가 된다. 영조는 장조와 진종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장자인 장조 소생 5남 중 차남을 22대 정조로 삼는다.
다시 정조는 2명의 자손을 두었고 차남이 23대 계보를 잇게 한다. 손조는 외아들 익종을 두었지만 바로 잇지 못하고 그 아들 익종 자 외아들에게 24대 헌종 계보를 잇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21대 영조 자손 중 장자인 장조의 소생으로서 의소세손인 장자와 22대 정조 외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있는데 그 중 은언군의 계보가 헌종 조의 자손이 없음에서 25대 철종 계보를 잇게 한다.
******************
삼전도(三田渡)는 조선시대 한강상류에 있던 나루터이다. 오늘날의 위치로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이다. 1637년 1월 30일, 조선 인조가 이곳에서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 협정을 맺었다.
1636년 인조 14년인 병자년 12월 초에 청 태종은 직접 12만의 군사로 조선을 침략하는 병자호란을 일으킨다. 조선은 청군을 맞아 결사항전을 했지만, 전황이 불리해져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계속한다.
1637년 1월 초엔 청의 12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했으며, 조정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화의를 하자는 주화파로 분쟁하게 된다. 그 사이 청군에 의해 강화도로 피신했던 세손과 왕자들이 모두 잡히자,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로 나아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한다.
청은 조선에 다음과 같은 강화조건을 제시한다.
조선은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를 지킬 것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을 것
왕의 장자 및 제2자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명나라 예에 따라 사절을 보낼 것
출병 요청에 임할 것
청군이 귀환할 때 병선(兵船) 50척을 제공할 것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1637년 강화조건의 결과로 소현세자와 부인강씨,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와 김상헌 등의 신하들이 청나라 선양으로 압송되었다.
1639년 인조 17년 삼전도비를 세운다.
1640년 인조 18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반청론자인 임경업을 수장으로 수군 6천명을 파견했으나, 청조의 책망을 받고 돌아오고, 임경업은 1644년 명에 투항한다.
1645년 청나라에 볼모로 억류되었던 소현세자가 귀국하나, 귀국 후 2개월 만에 석연치 않은 죽음을 당하고, 부인 강씨는 사약을 죽었으며,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다.
삼전도비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 1639년 인조 17년 세웠다. 사적 제101호(1957년 2월 1일 원래는 한강변 삼밭나루터에 항복을 했던 곳에 세워졌지만, 청일전쟁 후 일제 강점기에 1913년 일제가 다시 세워놓은 것을, 1945년 주민들이 땅 속에 묻어버렸다. 1963년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나자, 원위치에서 석촌동으로 옮겼다가 송파대로 확장공사로 다시 현 위치에 세워지게 되었다. 비문은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의 명필인 오준이, 두전은 여미징이 썼다. 총 5.7m 높이에, 폭 1.4m의 대리석 비이다.
*******************
여기서도 변괴가 있었다고 보여 진다.
조선왕조실록도 철종까지 조선조 정식계보로 삼는다.
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책으로 되어 있는 가장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그래서 이 후 고종과 순종은 별개로 구분하고 있다.
사대사고(四大史庫)가 일제총독부에 관리되어 보관하였다는 사실이 여기저기서 인정된다.
때문에 고종과 순종은 일제가 특별한(?)목적에 의하여 그들 입맛에 맞게 만든 왕조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고, 순종조가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조선 태조 때부터 고치거나 수정 조작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란 판단이다.
이와 같음은 지금의 조선사가 신뢰성을 담보 할 수 없음도 있다.
사대사고(四大史庫): 태백산(경북 봉화), 오대산(강원 평창), 정족산(강화도), 적상산(전북 무주)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철종 대까지 기록하고 있지만 알 수 없는 변괴로 인하여 철종 역시 헌종조에 자손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장조 왕족인 은언군 자손을 먼 강화도 교동에서 찾아 옹립하였다는 자체가 미심적음이 없지 않다.
그래서 철종 조를 철저하게 분석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
인조 왕계보 (이성계 계보와 다른 계보)
제16대 인조(仁祖, 1595년~1649년, 재위 기간: 1623년~1649년)는 소현세자,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 용성대군, 숭선군, 낙선군 6자를 두었고 인조 장자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 음력 1월 4일~1645년 4월 26일)는 1645년 음력 2월 귀국하고 난후 음력 4월 26일 갑자기 숨을 거두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세자가 죽고 난 뒤, 곳곳에 검은 반점이 나고, 시신이 빨리 부패했다는 점에 인조와 인조의 총애를 받던 소용조씨(昭容趙氏:조귀인)가 의원 이형익을 시켜 그를 독살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鳳林大君)은 17대 효종이고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효종(孝宗, 1619년~1659년, 재위 1649-1659)은 조선의 제17대 임금이다. 휘는 호(淏),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 정식 칭호는 효종흠천달도광곡홍열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孝宗欽天達道光穀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 인조와 인렬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1626년 봉림대군에 책봉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난 갔으나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간 선양(瀋陽)에 억류되었다. 그 후 왕이 되어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1645년 조선의 근대화라는 꿈을 안고, 먼저 조선으로 귀국한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귀국하여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음력 5월, 인조가 승하하자 조선의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효종은 청나라에서 볼모로 지내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반청사상을 길렀으며, 형님인 소현세자가 독살로 추정되는 의문사를 당하자 극에 달하였다.
즉위 직후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등 대청 강경론자들을 등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설에는 이중 송시열이 북벌에 반대한 보수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대청강경론자 일색의 인사 발령을 한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오히려 북벌반대론자인 송시열을 등용함으로써 보수적인 관료들과의 힘겨루기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1651년 조귀인의 옥사를 계기로 김자점 세력을 처단하였다. 이완(李浣)·유혁연(柳赫然) 등 무신(武臣)들을 등용하여 어영청(御營廳)과 금군(禁軍)을 개혁하는 등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당시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을 등용하여 신무기 제작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1655년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과의 유대를 통해 청나라에 대한 견제 방편을 삼았다.
아내 :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
아들 : 현종(顯宗) 현종(顯宗, 1641년~1674년)
아들 : 대군(조졸)
딸 : 숙신공주(淑愼公主)
딸 : 숙안공주(淑安公主)
딸 : 숙명공주(淑明公主)
딸 : 숙휘공주(淑徽公主)
딸 : 숙정공주(淑靜公主)
딸 : 숙경공주(淑敬公主)
후궁 : 안빈(安嬪) 이씨(李氏)
딸 : 숙녕공주(淑寧公主)
아들 2자 중 대군을 일찍 죽고 효종의 맏아들인 현종(顯宗, 1641년~1674년)이 18대에 오른다.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현종(顯宗, 1641년~1674년 재위:1659년 ~ 1674년)
부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
아들 : 숙종(肅宗)
딸 : 명선공주(明善公主)
딸 : 명혜공주(明惠公主)
딸 : 명안공주(明安公主)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이 19대 숙종(肅宗, 1661년 음력 8월 15일~1720년)이다
숙종(肅宗, 1661년 음력 8월 15일~1720년 재위:1674년 ~ 1720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1661년 - 1680년): 공주 2명이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1667년 - 1701년): 자식이 없었다.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1687년 - 1757년): 자식이 없었다.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 ~ 1701년):경종 즉위 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숭.
경종(景宗)
성수왕자(盛壽)<조졸>
숙빈 최씨(和敬 淑嬪 崔氏)
영수왕자(永壽)<조졸>
연잉군:영조(英祖)
이름 없음(왕자)<조졸>
명빈 박씨(?嬪 朴氏)
연령군(延齡君, 1699년 - 1719년)
영빈 김씨(寧嬪 金氏)
귀인 김씨(貴人 金氏)
소의 유씨(昭儀 劉氏)
숙종을 이은 20대 경종(景宗, 1688년~1724년)은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이다.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원자로 봉해졌다가 1690년 3살 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어머니인 장희빈은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갑술환국으로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자 장희빈은 다시 빈으로 강등되었다가 결국 1701년에 사약을 받게 되었다.
장희빈이 죽을 당시 경종의 나이는 14살이었는데, 나이가 어린 경종이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줄곧 병환에 시달린데다가 아이를 얻지 못하자 숙종은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을 경종의 후사로 정할 것을 좌의정 이이명에게 조용히 부탁했다. 결국 연잉군은 그해에 왕세자 대신 편전에 참석하여 정치를 배우라는 숙종의 왕명을 받았다. 이때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연잉군은 노론의 지지를 받았으므로 소론과 노론 간의 권력 투쟁은 날로 심해져 갔다. 그런 가운데 1720년에 숙종이 승하하자 경종은 부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었다. 그 때 경종의 나이는 이미 33살이었고, 숙종이 아파서 누워 있던 4년 동안 대리청정을 하면서 숙종 대신 국정을 돌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정사를 처리하는 데는 서툴지 않았다.
그러나 본래 몸이 약했던 데다가 숙종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건강이 더욱 나빠져 의식이 뚜렷하지 못한 때가 많았다. 결국 경종은 재위 기간 4년을 병석에서 지내야만 했고, 노론과 소론의 정권 다툼으로 정치가 잠잠할 날이 없던 시기였으므로 특별한 업적 또한 남기지 못했다. 이 시기에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혀 놓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발간되었고, 서양의 것을 모방한 소화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경종의 치세 중에 신임사화가 일어나 수백 명이 처벌받았다. 재위한 지 4년 2개월 만에 37살의 나이로 죽은 경종은 평생 자식을 두지 못했다. 능은 의릉이다.
경종(景宗, 1688년~1724년재위: 1720년 ~ 1724년 )
단의왕후 심씨 (자식 없음)
선의왕후 어씨 (자식 없음, 소현세자 후손 밀풍군의 아들 관석을 입양하려고 함)
20대 경종은 후사가 없어 숙종 숙빈최씨 2자 연잉군이 21대 영조가 된다.
영조(英祖, 1694년 ~ 1776년)는 조선의 제21대 임금(재위, 1724년~1776년)이다. 숙종(肅宗)의 차남이자 서장자이며, 경종의 배다른 아우이다. 화경숙빈 최씨(和敬淑嬪 崔氏)의 소생이다.
영조
부왕 : 숙종
선왕 : 경종 (이복형)
어머니 :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년 ? 1757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년 ? 1805년), 김한구의 딸
정빈 이씨(靖嬪 李氏)
진종(眞宗, 효장세자, 1719년?1728년)
옹주(翁主) - 일찍 죽음
화순옹주(和順翁主, ? ~ 1758년 음력 1월 17일) - 의정(議政) 봉조하(奉朝賀) 김흥경(金興慶)의 아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08년 - 1758년 음력 1월 4일)에게 하가(下嫁).
영빈 이씨(暎嬪 李氏)
장조(莊祖, 사도세자, 1735년 - 1762년) ― 홍봉한의 딸,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홍씨, 1735년 - 1815년)와 결혼.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년 ~ 1752년)
정조(正祖, 1752년 - 1800년)
화평옹주(和平翁主) - 예조참판 박사정(朴師正)의 아들,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1725년~1790년)에게 하가(下嫁).
화협옹주(和協翁主) - 영의정 신만(申?)의 아들,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綬)에게 하가.
화완옹주(和緩翁主) - 이조판서 정우량(鄭羽良)의 아들,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 ? ~ 1757년)에게 하가(下嫁).
귀인 조씨
화유옹주(和柔翁主) - 호조참판 황자(黃梓)의 아들,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 ? ~ 1802년)에게 하가(下嫁).
폐숙의 문씨
화령옹주(和寧翁主) - 증영의정 심정(沈鼎之)의 아들,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 ? ~ 1817년)에게 하가(下嫁).
화길옹주(和吉翁主) - 좌포장, 의금부판사 등을 역임한 구선행(具善行)의 손자,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에게 하가(下嫁).
영조는 장자 진종(眞宗, 효장세자, 1719년?1728년) 과 장조(莊祖, 사도세자, 1735년 - 1762년)를 두었다.
장자 진종은 1719년, 영조와 정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나 영조가 즉위한 후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으며, 그 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726년 조문명의 딸 효순왕후와 가례를 올렸다. 그는 10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으나, 훗날 영조에 의해 이복동생 장조의 아들 정조가 그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면서 진종(眞宗)에 추존되었다. 시호(諡號)는 효장(孝章)이다. 1899년 고종때 소황제(昭皇帝)로 추존되었다.
장조(莊祖, 1735년 음력 1월 ~ 1762년)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조선의 추존왕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나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장조는 1735년 음력 1월 이선은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영빈 이씨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모친인 영빈 이씨의 곁을 떠나 내시와 나인들 손에서 성장하였다. 이선은 영조의 맏아들이며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어 세자가 되었다. 본래 총명하여 1749년(영조 25년) 승명대리(承命代理)로 청정(廳政)시킬 만큼 영조는 세자를 총애하였다.
그러나 소론과 친하던 이선은 점점 노론과 친분이 있던 부왕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가혹한 꾸중을 들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이는 난폭함과 광증(狂症)으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또 세자는 왕의 젊은 계비(繼妃) 김씨 및 총희(寵姬) 문숙의(文淑儀)와 사이가 좋지 못해 이들의 참소가 심했다.
노론을 지지하는 아버지 영조와 정견을 달리 하여 대립했다. 1762년(영조 38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열거하였다. 이를 본 영조는 크게 화를 내어 세자의 위를 폐하려 하였다. 이어 윤(閏) 5월 또 다른 근거 없는 말이 나돌게 되었다.
결국 노론을 상징하는 이선의 아버지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뒤주 속에서 이선을 가두어 굶겨 죽였다. 영조는 뒤에 이를 후회하여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아버지를 죽인 노론에 대해 원한을 갖게 되어, 1777년(정조 1년)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아버지의 시호를 상시하였다.
영조가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 것은 종사를 위해 결단을 내린 후 은정을 베푼 것라고 영조가 말한 바 있다. 사도세자가 살인을 수시로 한 것은 자신이 직접 반성한 기록이나 죽은 사람들의 이름, 영조의 말 등을 볼 때 어느 정도 사실로 보인다.
아버지: 영조(1694년 - 1776년)
어머니: 영빈 이씨 (1696년 - 1764년)
비(妃): 헌경왕후(혜경궁 홍씨, 1735년 - 1815년)
아들: 의소세자(1750년 - 1752년)
아들: 정조(1752년 - 1800년)
딸: 청연공주(淸衍公主)
딸: 청선공주(淸璿公主)
후궁: 숙빈 임씨
아들: 은언군(恩彦君, 1754년 - 1801년)
아들: 은신군(恩信君, 1755년 - 1771년)
후궁: 경빈 박씨
아들: 은전군(恩全君, 1759년 - 1778년)
딸 : 청근옹주(淸瑾翁主, 1758년 - ?) - 당은첨위(唐恩僉尉) 홍익돈(洪益惇)에게 하가
영조 차남 장조는 사도세자인데 5자를 두었다.
장자 의소세손, 차남 22대 정조, 3남 은언군, 4남 은신군, 5남 은전군을 두었다.
장자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년 음력 8월 27일 ~ 1752년 음력 3월 4일)은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빈 홍씨(惠嬪 洪氏)의 적장자이다. 이름은 정(?)이고, 시호는 의소(懿昭)이며, 정조의 동복형이다. 영조 27년(1751년) 음력 5월 13일 영조에 의해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1752년 3살의 어린 나이로 통명전(通明殿)에서 사망하였다.
차남 정조(正祖, 1752년 음력 9월 22일 ~ 1800년 음력 6월 28일)는 조선의 제22대 임금이다. 1752년(영조 28년) 음력 9월 22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원손이자 형인 의소세손이 3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고 삼년상을 치르던 중에 태어난 왕손이라 영조는 "이제 나라의 근본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먼저 호칭을 원손(元孫)이라 정하고, 고묘(告廟)와 반교(頒敎)는 7일이 지난 뒤 거행하도록 하라."고 하며 그날로 원손(元孫)으로 호를 정하였다.
1759년(영조 35년) 음력 윤 6월 22일 명정전(明政殿)에서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761년(영조 37년) 음력 3월 10일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음력 3월 18일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며, 이듬해인 1762년(영조 38년) 음력 2월 2일 어의궁(於義宮)에서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인 청풍 김씨(淸風 金氏)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1762년(영조 38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자, 왕세손으로 동궁에 정립되었다.1764년(영조 40년)에 영조는 세손을 자신의 맏아들이며,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후사를 이어 종통(宗統)을 이어받도록 하였다.
1775년(영조 51년) 10월에 영조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전교하는데, 이때 홍봉한 등 외척당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때 "세손은 동인, 서인, 노론, 소론 등을 알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 유명한 홍인한의 '삼불필지론'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영조는 홍인한의 주장을 물리치고 군사를 동원하는 동원령인 순감군권을 넘겼고 세손은 대리청정을 시행하게 되었다. 홍인한이 대리청정을 반대하기 전 혜경궁 홍씨는 영조의 뜻임을 알리는 편지를 미리 보내기도 했다 한다.
그 이듬해인 1776년 음력 3월 5일 영조가 경희궁(慶熙宮) 집경당(集慶堂)에서 83세로 승하하자, 음력 3월 10일 숭정문(崇政門)에서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1752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차남으로 출생.
1758년 성균관에 입학
1759년 왕세손에 책봉됨
1762년 음력 2월 김시묵의 딸과 결혼,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 비명으로 사망, 왕통 이음
1762년 개인 도서관 개유와 설치, 노론에서 강목의 구절 등을 문제삼은 음해를 받음
1764년 조부 조선 영조에 의해 효장세자와 효순현빈 조씨의 양자로 입양됨
1776년 영조 사망, 왕위에 오름
1776년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순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존, 사도세자에게는 장헌이라는 존호를 추숭
1779년 홍국영을 축출하고 친정(정사 직접 주재)
1781년 규장각을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1782년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박팽년을 추모, 노량진에 조선육신 이라는 신도비를 세움
1789년 장헌세자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수원에 화성 쌓음
1794년 '문체반정' 개혁론 주도
1799년 아버지 장헌세자 저술 손수 편집, 예제 3권 남김
1800년 사망
왕비와 후궁
호칭 |
출생 |
사망 |
부모 |
자녀 |
비고 |
효의선황후 김씨(孝懿宣皇后 金氏) |
1753 |
1821 |
김시묵(金時默), 홍씨 |
없음 |
|
의빈 성씨(宜嬪 成氏) |
1753 |
1786 |
|
1남1녀 |
|
수빈 박씨(綏嬪 朴氏) |
1770 |
1822 |
박준원, 원씨 |
1남1녀 |
|
원빈 홍씨(元嬪 洪氏) |
1766 |
1779 |
홍낙춘 |
없음 |
홍국영의 동생 |
화빈 윤씨(和嬪 尹氏) |
1765 |
1824 |
윤창윤 |
없음 |
|
자녀
호칭 |
출생 |
사망 |
모친 |
자녀 |
비고 |
문효세자(文孝世子) |
1782 |
1786 |
의빈 성씨 |
|
|
옹주 |
1784 |
|
의빈 성씨 |
|
|
순조(純祖) |
1790 |
1834 |
수빈 박씨 |
2남4녀 |
김조순의 딸(순원왕후)과 혼인 |
숙선옹주(淑善翁主) |
1793 |
1836 |
수빈 박씨 |
1남 |
홍현주에게 하가 |
22대 정조는 문효세자와 차남 23대 순조를 두었다.
장자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년 음력 9월 7일~ 1786년 음력 5월 11일)는 정조가 의빈 성씨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휘는 향(享),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782년 음력 9월 7일 새벽에 태어나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86년 음력 5월 11일에 5세로 요절한다
차남 순조(純祖, 1790년 음력 6월 18일 ~ 1834년 음력 11월 13일)는 조선의 제23대 임금(재위 1800년-1834년)이다. 휘는 공(蚣),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이고 정조(正祖)의 차남이자 수빈(綏嬪) 박씨(朴氏)의 아들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비(妃)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이다.
1800년(정조 24)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804년까지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繼妃)인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폐위를 주장했던 동생 김귀주(金龜柱)를 비롯한 벽파(僻派)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時派)의 숙청에 주력했다.
또한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1801년 1월 오가작통법을 시행했으며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천주교 탄압은 그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을해박해)과 1827년에도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부인: 순원숙황후 김씨(純元肅皇后 金氏, 1789년 - 1857년, 김조순(金祖淳)의 딸)
1남: 익종(翼宗, 1809년 - 1830년)
1녀: 명온공주(明溫公主, 1810년 - 1832년) -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에게 하가(下嫁)
3녀: 복온공주(福溫公主, 1818년 - 1828년) - 창녕위(昌寧尉) 김병주(金炳疇)에게 하가(下嫁)
2남: 대군(大君, 1820년 음력 2월 23일 - 1820년 음력 5월 26일)
4녀: 덕온공주(德溫公主, 1828년 - 1844년)
윤백영 : 덕온공주의 외증손녀
후궁: 숙의 박씨(淑儀 朴氏)
2녀: 영온옹주(永溫翁主, 1817년 - 1829년)
조선의 제23대 순조는 순원숙황후 김씨 소생 장자 익종(翼宗, 1809년 - 1830년) 과 차남 대군(大君, 1820년 음력 2월 23일 - 1820년 음력 5월 26일 요절)을 두었다.
익종(翼宗, 순조 10년 음력 8월 9일(1809년 9월 18일)~순조 30년 음력 5월 6일(1830년 6월 25일)은 헌종(憲宗)의 아버지로써 조선의 추존왕이다. 자(字)는 덕인(德寅)이며 휘(諱)는 영(?), 시호는 효명(孝明)으로 흔히 효명세자라고도 불린다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자로 태어나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음력 10월에 세자빈(신정왕후)과 가례를 올렸다. 1827년에는 아버지 순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의 인물을 중용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830년에 서거하였다. 사후에 아들인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한 뒤 그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하였으며 이후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이 그의 입승대통을 이어받아 왕(고종)으로 즉위하였다.
아버지 :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1790년 ~ 1834년)
어머니 :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1789년 ~ 1857년)
왕비 :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1808년 ~ 1890년)
아들 :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1827년 - 1849년)
양자 :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1852년 ~ 1919년)
익종은 외아들 헌종을 두었다.
헌종(憲宗, 1827년~1849년)은 조선의 제24대 임금(재위 1834년 - 1849년)이다. 휘는 환(奐),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이다.
헌종은 효명세자(익종)와 신정왕후 조씨의 아들로 태어나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830년에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1834년에 순조가 승하하자 8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으나 15살이 되던 해에 직접 정치하기 시작했다.
헌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 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또 수재와 전염병 때문에 삶이 점차 어려워져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하다 보니 임금을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킨 모반 사건이 2번에 걸쳐 일어났다. 1836년에는 충청도에 있던 남응중이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했으며 1844년에는 민진용이 역시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번의 모반 사건 모두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과 몰락한 양반이 일으킨 것으로 이 시기에는 누구나 왕권에 도전할 수 있었을 만큼 임금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
1845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조정의 허락 없이 제주도와 서해안을 측정하고 돌아가는 일이 있었으며 1846년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로마 가톨릭 탄압을 구실로 삼아 군한 3척을 몰고 와 임금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848년에는 외국의 배들이 경상도와 전라도, 황해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이 크게 동요했다. 바로 이 때부터 조선은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호 개방 요구를 맞게 되었지만, 조선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탓에 별다른 대책도 세우지 않고 각 당의 권력 장악에만 신경썼다.
한편 헌종시대에 대규모 천주교 탄압이 있었는데, 이를 기해박해라고 부른다. 당시 천주교는 1831년 천주교 조선대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승인될 정도로 크게 성장했으나, 1839년 기해박해로 모방신부등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천주교 선교사들과 유진길, 정하상등의 평신도들이 새남터에서 대거 처형되고, 1845년에는 한국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하는 된서리를 맞았다.
9년 동안의 친정 기간 동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 투쟁에 휘말렸던 헌종은 국내는 물론, 조선 주변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다가오는 열강 세력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1849년 6월, 23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할아버지 :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할머니 :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김씨
아버지 :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 익종(翼宗)
어머니 :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조씨
정비(正妃) :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 김씨
계비(繼妃) :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홍씨
후궁(後宮) : 순화궁 경빈 김씨(純和宮 慶嬪 金氏)
후궁(後宮) : 숙의 김씨(淑儀 金氏)
궁인(宮人) : 궁인 김씨(宮人 金氏)
딸 : 옹주(翁主)
헌종은 아들이 없고 딸만 하나 두었다.
그러자 21대 영조 차남 장조의 5자중 3남(22대 정조동생)의 아들 3남중 막내 3자 전계대원군의 자 회평군, 영평군, 3남 원범(哲宗 元範, 1831년 - 1863년)을 철종으로 하였다.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1785년~ 1841년)은 조선의 왕족이며 철종의 친아버지이다. 이름은 이광(李壙)이다.
은언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사망시까지 봉군호가 없었다 한다. 형 상계군이 역모로 몰려 죽고, 어머니 송씨와 형수 신씨가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하여, 삼촌의 양자로 입양된 둘째형을 제외한 아버지 은언군 등 일가족이 모두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1801년 아버지 은언군이 사사되고, 1844년 장남 원경(元慶)이 민진용의 난에 연좌됨으로서 그의 일가는 다시 몰락하게 되었다. 사후 셋째 아들 원범이 조선 순조의 양자로 입양되어 즉위하면서 전계군에 피봉되었다가, 전계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아버지: 은언군 인(恩彦君 姻, 1754년 - 1801년)
어머니: 군부인 송씨(君夫人 宋氏 1763년 - 1819년 4월 4일)
형 : 상계군(常溪君)
형 : 풍계군(豊溪君), 삼촌 은전군의 양자로 감
부인: 완양부대부인(完陽府大夫人) 최씨
아들: 회평군 원경(懷平君 元慶, 1827년 - 1844년)
아들: 영평군 욱(永平君 昱, 1828년 - 1901년)
부인: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
아들: 철종 원범(哲宗 元範, 1831년 - 1863년)
철종(哲宗, 1831년 음력 6월 17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의 제25대 임금(재위 1849년 음력 6월 9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이다. 초명은 원범(元範), 휘는 변(?),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철종은 1831년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 사제(私第)에서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李?)의 아들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4년(헌종 10) 이복형 회평군(懷平君) 이명(李明)의 옥사로 인해 일가가 교동도(喬桐)로 유배되었으나 곧 강화도로 옮겨져 기본적인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1849년 헌종이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죽자 순조비(純祖妃)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곧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조선 왕조 왕위 계승의 관례조차 무시한 행위였다.
즉위 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1851년(철종 2년)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哲仁王后)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이로인해 김문근을 위시로 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며, 1859년 관리들의 부정 비리를 지적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1861년에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 소속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別技軍)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 숙위 강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기존의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으며, 결국 1862년 진주 민란을 시발점으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총칭한다. 철종은 봉기 발생 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기강을 확립하고, 농민의 요구 조건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1862년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하였다.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며, 각종 부가세를 혁파하고 도결(都結)이나 방결(防結)을 폐지하였으며,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한편 1860년 경주 지방의 잔반인 최제우(崔濟愚)가 만든 신흥 종교인 동학(東學)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고 교주인 최제우(崔濟愚)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천주교 또한 민중 속에서 계속 유행하고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이 또한 탄압하였다.
철종은 자신의 권력을 지지해줄 남인들이 집권층인 노론 벽파의 천주교 탄압으로 숙청당하고, 그 자신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색(酒色)을 가까이 하여 건강이 점점 나빠지다가 1863년 음력 12월 8일에 재위 14년, 33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철인왕후 안동 김씨(哲仁王后 安東金氏, 1837년 - 1878년)
원자(元子, 1858년 음력 10월 17일 ~ 1859년 음력 4월 23일)
귀인 밀양 박씨(貴人 朴氏)
왕자(王子, 1854년 음력 7월 10일 ~ ? )
귀인 평양 조씨(貴人 趙氏)
왕자(王子, 1859년 음력 10월 13일 ~ ? )
왕자(王子)
숙의 방씨(淑儀 方氏)
왕녀(王女)
왕녀(王女)
숙의 범씨(淑儀范氏)
영혜옹주(永惠翁主, 1859년 ~ 1872년 음력 7월 4일) - 하가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 1861년 ~ 1939년)
궁인 이씨(宮人 李氏)
왕자(王子, 1862년 음력 윤 8월 8일 ~ ? )
왕녀(王女)
궁인 김씨(宮人金氏)
왕녀(王女)
궁인 박씨(宮人朴氏)
왕녀(王女)
안동김씨 소생 장자는 태어나자마자 한살(1858년 음력 10월 17일 ~ 1859년 음력 4월 23일)도 못되어 요절하였다.
귀인밀양박씨 소생왕자는 1854년 태생하였으나 몰한 년도와 이유를 모른다.
귀인평양조씨 소생왕자 또한 1859년 태생하였으나 몰한 년도와 이유를 모른다.
귀인평양조씨 소생왕자 차남 역시 태생년도와 몰한 년도가 분명치 않다.
궁인이씨 소생왕자 역시 1862년 태생하였으니 몰한 년도와 이유를 모른다.
기록에는 철종 자손이 5명이나 존재하였으나 하나같이 생몰이 불투명하다.
철종이 사망한 1863년 음력 12월 8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왕족 모두가 하나같이 몰(사망)년도가 불분명하다.
대변혁, 변괴란 과연 무엇일까?
철종대가 끊기자 조선왕조실록도 더 이상 기록 할 것이 없어 마감한다.
그러나 조선왕조 24대 고종은 철종대와 상관없는 16대 인조 3남 인평대군 자손을 찾아 마침내 계보를 성립한다.
조선왕조계보가 정상적이라고 판단 할 수 있는가?
조선왕조 23대 임금의 정좌한 초상화를 왜 보존하고 있질 못하는가?
남아있는 초상화는 이성계(명나라 주원장이라고도 함), 영조와 철종 뿐이다.
철종은 불에 탄 반쪽만 남은 초상화이다.
그나마 멀쩡하게 남은 것은 영조 초상화뿐이다.
초상화를 보존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나타내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그러한 실체가 과연 무엇일까?
**********************************************************
'세계삼한역사 > SINA-신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남아 와 임진왜란 (0) | 2009.07.16 |
---|---|
포파산-Mount Popa (0) | 2009.07.16 |
북양군벌 (Beiyang Army)이 청 인가? (0) | 2009.07.04 |
국내 초기 비행기 (0) | 2009.07.03 |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Dutch East Indies/ Netherlands East Indie) (0) | 2009.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