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a가 청(淸)나라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1784236
동학과 호서 호주( 湖西, 湖州) http://blog.daum.net/han0114/1704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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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운동 달콤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양무운동의 진의가 무엇인지 대륙조선과 무슨관계가 있는지 알려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대륙조선 말기에 이홍장이 제시하는 양무운동에 휘말려 나라전체를 내어주는 꼴을 당했을 것이란 추측이 여러가지 형태에서 나타나고 있다.
추후 양무운동에 대해서 한번 따져 볼 필요성을 느낀다.
물론 대륙조선황실에서는 사통팔방역할을 하는 이홍장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은 만큼 역할을 이홍장이 했는가는 의문이 많이 남는 부분이다.
이홍장은 권력주체가 아닌 청을 권력주체로 만들었고 스스로 동서양을 넘나들며 외교술을 부려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그것은 결국 장개석으로 이어지는 국민당 전신이고 지금의 중화민국 중공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정녕 대륙조선을 위해서 역할을 하였다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청일전쟁(갑오왜란)으로 북양군벌 수장 이홍장이 마관조약에서 합의해준 배상금은 일본예산의 4배나 되는 어마어마 한 금액이다. 그것을 3년동안 영국파운드 금화로 바꿔 지불하게 했다. 이것으로 일본은 열도에 국가기반을 만들수 있었고 서방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금본위제도를 도입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홍장만 믿고 있던 대륙조선은 천자국의 권위와 영토뿐만아니라 여기저기서 요구하는 배상금에 찌들어 버려 스스로 무너지는 꼴이 되어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거대한 나라라 할지라도 이렇듯 재정에서 휘말려 버리면 도저히 견디어낼 수가 없는 법이다.
황해전쟁의 일본군 상대는 해군력을 담보로 하는 북만주 기회주의 정치집단이다.
그것이 바로 북양군벌이고 청이고 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이라고 하는 세력은 이 군벌이 전부였지만 조선을 좌지우지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북양군벌이 마치 대륙전체를 통치하는 청나라인 것처럼 과대 포장되었을 것이다.
서세가 조선황실을 면대하는 것이 사정상 어려웠다고 할 때 조선은 청을 앞에 내세웠을 수도 있으며 전면에 나선 북양군벌을 청제국이라 오해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관리가 대륙조선의 독특한 정치체제에 대하여 분석하여야 할 애매한 관계설정이 존재한다고 언급하였다.
서세에 밀린 대륙조선 황실주체는 북양군벌 해군력에 의지하는 조건으로 북경을 할양하였고 그들에게 정치적 권한을 어느정도 위임하면서 정주(수원)나 서안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이후 동남으로 밀려 들어오는 서세에 한층 더 쫓겨 서쪽으로 이동 하였거나 최후에는 미국의 정치적 보호아래 카르카시, 사마라칸트 등을 기반으로 마지막까지 정치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war in the east 1894 wouned after skirmish in corea (old-print.com)
압록전쟁?
소위 갑오전쟁이라고 하는 청일전쟁은 corea(대륙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이며 대륙조선에게 반하여 일본이 조선을 대리하고 나선 북양군벌과 충돌한 것이고 대리전이라고 해야한다.
황하일 것 같고 야룬일 것 같은데 황해전쟁이라고 하였고 야루(압록강전투)라하는 것에서 계속 의문이 남는다.
혹 야루(yalu)가 음차로 야르(yar)로 변한 것(lu->r)은 아닌가?
야루는 대륙조선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중요한 길목역할을 할 수 있는 큰 강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야루가 지금 한반도의 압록강은 분명히 아니다.
야루충돌이 대륙조선을 빼놓고 청과 일본사이에서 벌어진 동북아 패권다툼의 전쟁인 것처럼 그려놓았다는 사실이 혼란을 야기시키는 문제이다.
그러나 위에 영문 묘사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거창한 전쟁이 아니라 그냥 소규모 충돌이었다.
skirmish in corea 소 충돌, 소규모 접전인 것이다.
이것은 북양군벌이 일본과 힘겨루기에서 발생된 충돌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을 과대하게 부풀린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대륙조선을 청이라고 하고 볼때 청이 비록 서세에 밀리고 있었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륙전체를 차지하고 지배하고 있던 권력주체라면 한반도 그것도 압록강에서 잠시 패퇴하였다고 힘도 한번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체 대륙북방지역을 그냥 빼앗기고 대만까지 양보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어 날 수 있는 상황을 미리그려놓고 꿰 맞춘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대륙조선을 말살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꼼수가 아닌가 한다.
조선말기 미국선교단체 조사에 따르면 조선군사가 근 100만(989,376)가까운 자원이 각지방에 나눠져 존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이 아니라 상식처럼 청이라고 하였을 때 한반도에서 가벼운 충돌로 한번 패했다고 그냥 주저앉고 말았을 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륙조선이 해군력을 담보로 세력화한 북양군벌에게 요동, 하북, 산동을 지킬 것을 명령했거나 위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육군(동학군?)만큼은 대륙조선이 지방에 분산 관할 하였을 것이다.
가벼운 충돌이지만 여하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요동, 하북, 산동 등을 잠시 영향권에 넣게 된다.
이후 북양군벌은 그렇다 치고 청나라 황실주체는 서태후가 독단했고 영토를 일단 빼앗기는 황망한 경우에도 별다른 대책없이 화친이나 정전만 고집하고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중국이란 주체가 대륙조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산동성 위해위를 점령한 일본은 곧바로 대륙 동지나해로 내달아(?) 대만을 침공하고 점령한다.
여기서 지역적 구도나 공격루트가 어딘지 모르게 조작냄새가 난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부터가 무리였다.
그렇게 구도를 짜다보니 전쟁지역적인 구도가 어거지가 되었고 결국 일본은 이상한 방향으로 무리한 공격 루트를 정하여 대만을 공격하였으며 마치 대륙 광동지역이나 복건성에서 공격하는 것 같은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청나라 영토인 대만이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입장에서도 청이 취한 군사적 상황은 솔직히 전무하다고 보여지는 점도 이상하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청일전쟁 지도가 어딘가 모르게 꾸며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일본은 처음부터 대만을 공격하고 점령하고자 한 전쟁을 동북아패권전쟁인 것처럼 한반도를 덧붙여 그려 놓았을뿐이다.
압록강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은 단번에 대련을 점령하였으며 산동 위해위를 점령하였고 대만을 공격하고 점령하고 말았는데 이상한 것은 종전후 마관회담에서 요동할양 요구한 일본은 정작 3국(러ㆍ프ㆍ독) 간섭하에 둔 이유가 아무래도 독특하다.
남의 떡을 강제로 빼앗아 자기가 먹으려는 것도 아니고 엉뚱한 놈에게 나눠주는 꼴이라 마치 도둑놈이 구경꾼들에게 훔친 물건을 인심쓰는 듯한 괴이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무주공산처지에 있는 대만을 겨양하고 빼앗은 것이다.
그런데 북양과 남양함대가 존재했다고 보지만 대만을 일본이 침공하는 과정에서 남양함대의 움직임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남양함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만은 무주공산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남양함대가 대륙 동지나해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북양이 담당해야 한다.
대륙조선 군사가 대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바다 길을 북양(?)군벌이 지켜부지 못하고 패함으로서 해안을 장악당한 입장에서 전황이 크게 악화되었고 대륙육군이 진군하는 자체가 막혀 꼼짝할 수 없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런 과정은 분명하지 않지만 동학군의 역할이 분명하게 존재했을 거란 가정이 없지 않으며 이러한 사실 전부를 숨기고자하여 청일전쟁을 한반도전쟁이라 꾸며 도식하였던 것이라고 판단된다.
결국 서방제국이 공모하고 위치조작한 전쟁인 것이다.
그것은 한반도에 대륙조선을 집어넣기 위한 술책이고 속임수라고 보아야 한다.
대만을 침공한 세력은 남아시아와 동남아를 떠돌던 해적집단인데 대륙소속 일본세력일수도 있다.
대륙남단 광동성 좀 더 확대하여 복건성을 근거로하는 해적무사정치집단세력들이 복건성과 광동성해안 일부를 점령하고 대만까지 공격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청일전쟁 광경은 화가가 그린 그림이 전부이고 그것이 전쟁상황을 증명하는 자료로 남아있다.
화가가 종군하면서 그렸다는 것인데 얼마든지 상상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자료만 가지고 어떻게 전체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전쟁구도적인면에서나 전략적으로도 산동반도 위해위에서 항로를 따라 곧바로 내달려 대만섬 동쪽에서 부터 들어가야 함에도 대만북방지역 광동성이 뻔이 보이는 상황... 언제든지 대륙에서 공격받을 수 있는(아마도 안전장치가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됨)펑후제도(澎湖群島)를 별 희생자 없이 점령하였다는 것이고 3일후 대만을 점령했다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조작냄새가 나는 소설같은 픽션이다.
그렇다면 북양군벌과 해전을 치룬 곳도 동지나해 근방일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대만전쟁과 전혀 상관 없는 미미한 충돌이 황하입구나 양자강 입구에서 이미 수차례 있었다고 보이나 정작 일본이 대만을 공격하는 낌새를 채고 그것을 막으려고 대륙조선병력이 대만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북양군벌이 궤멸당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대만침공 청일전쟁지도에는 공격하는 일본만 있고 방어하는 청은 존재하질 않는다.
무엇때문인가?
충돌초기에는 청이 천진에서 한반도 청주까지 기세좋게 함대를 이끌고 들어간 것 까지 그려 놓았지만 정작 자국영토인 대만을 일본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점령하는데도 어떠한 방어책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점이다.
더군다나 여순(대련?이라고 한다)을 점령한 후 얼마 안되어 한반도는 동학운동의 농민저항전쟁이 절정에 이르면서 우금치전투가 벌어졌고 남접 10만명, 북접 10만명 등 총 20만여 동학군세를 대적한 일본도 비록 승리하였다고 하지만 상당한 피해를 보았을 것이고 그로인한 데미지도 컸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점인데 그러한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곧바로 대륙산동성 위해위를 공격하였고 이어 대만을 이상한 공격방향으로 침공하면서 점령하였다고 하는 것은 전쟁장소와 간격이 엄청난 거리에 있었던 다른 전쟁을 일본이 동시에 치뤘다는 전쟁이라 지금 이시대의 미국도 힘들어 했을 전쟁을 그 당시 일본이 소화했다고 하는 것은 믿을 바가 못된다.
규모가 적으나 크나 전력 분산으로 인한 전략적인 문제가 크게 노출되었을 것이라고 예상 할 수 있음에도 거뜬하게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고 있다. 동시다발 전쟁을 완벽하게 치룰 수 있는 군사력을 일본이 가졌다면 이미 약세를 보았던 입장에서 대륙전체를 곧바로 점령하지 않았는지 왜 대만으로만 만족 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군사력은그 당시 미국이나 영국과 대적해도 뒤지지 않을 힘이 아닌가?
하지만 후일 담에 청일전쟁 당시 조금만 더 시일을 끌었다던지 전쟁양상이 좀 더 확대되었다면 결코 최후승리가 일본쪽으로 돌아 갈 수 없었다고들 한다.
아마도 동학전쟁이 치열했음을 언급한 말일 것이다.
솔직히 운좋게 승리한 것이라고 보아지는 것이고 자칫했으면 일본은 영원히 멸하고 말았을 지도 모를 어리석은 전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식에 주장도 사실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
대륙조선이 자꾸 서쪽으로 쫓기고 있었던 상황이라면 대만은 무주공간으로 남았을 가능성과 영국이나 미국이 간섭하지 않는 조건,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묵인아래 대만은 일본이 점령하는 것을 눈감아 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점도 있다.
어쨌던 소규모 충돌로 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북양군벌은 참패하였다고 하고 조선은 약소국으로서 청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고 선전하고 있으며 청황실은 뒷짐지고 있는 사이 대만을 일본이 생자베기로 점령하였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을 풀어보면 당시 서세동점이란 거대한 파고에 밀리던 대륙조선에게 북양군벌 즉 청이라고 지칭하는 정치적주체집단의 기회주의적 발동에 의해서 대륙조선 황실에 더 많은 것을 양보받기 위한 세력다툼으로부터 발생된 것이라고 보이며 그런 과정에서 북양군벌은 일본과 힘겨루기에서 패하고 조선의 신뢰를 잃었으며 결국 세력까지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 황하입구(즉 대륙조선의 출구)는 일본이 관할하게 되었고 대만을 일본에게 넘겨주는 수모를 겪게 한 북양군벌의 무능함에서 절망한 대륙조선은 멸망의 길로 줄달음치는 꼴이되고 만 것 같다.
더군다나 마관조약(馬關條約.시모노세키下關조약)에서 일본이 대륙조선에 막대한 배상금까지 요구하여 결국 일본의 국가예산 4배가 넘는 3억6000만엔을 영국 파운드 금화로 일본에 넘겨져 국고자체가 바닥이나 재정적인 어려움도 대륙조선 멸망의 근원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결론적으로 청일전쟁이란 것은 곧 조일전쟁이며 한반도에서 벌어진 충돌은 분명코 아니다.
또한 동학운동 역시 동학을 모토로 하는 반세운동이라고 칭해야 하며 한반도 공주가 아니라 대륙조선에서 발생된 것임도 바르게 알아야 하는 점이다.
끝으로 동학운동은 동학전쟁이라고 해야 하고 또 다른 갑오왜란이라 해야 한다.
서이로부터 또한 일본왜구로 부터 삼한통일주체인 고려를 이은 조선천자국을 살리고 보존코자 하는 순수한 우국 충정에 나온 대륙조선 정규군인들의 군사적 대규모 저항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점이다. 동학전쟁에서 겨우 이긴 일본이 피해가 발생한 전쟁배상금을 대륙조선을 대리하여 나온 이홍장에게 요구한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서구자료에는 1894년에 일어난 sino-japanese war 전쟁비용을 2억 엔, 60억 달러: 5조4천억원 이라 산정했다. 동학혁명은 대륙에서 발생한 동학전쟁이고 갑오왠란이며 조일전쟁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당시 동학전쟁으로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조선인들은 2~5만명이라고 하지만 실제 그 이상 될 것이고 사상자만 30~50만명 정도 일 것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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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군벌 (Beiyang Army)
북양군의 훈련 모습
북양군벌 (중국어 정체: 北洋軍閥, 병음: běiyáng jūnfá)은 청조 말기 중국 공화정 초기 등장한 현대식 군사집단으로 약 30년 이상 중국을 지배한 군사 세력을 말한다. 리훙장의 강력한 북양군(北洋軍)에서 출발해 위안스카이를 거치면서 분열하여 중국을 지배하였다.
기원
Origins under Li Hongzhang (to 1900)
북양군의 기원은 태평천국의 난이후 부각된 리훙장의 안후이 성 군대이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 북양대신에 오른 리훙장은 그의 군대를 현대화하고 함대를 제조하여 이른바 북양군과 북양함대로 키웠고 이것이 청일 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로 성장했다.
이홍장(중국어: 李鴻章, 병음: Lǐ Hóngzhāng, 1823.2.15~1901.11.7)은 청 말기의 한족계 중신으로 청의 부국강병을 위한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사람이다. 태평천국의 난 이후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하였으나, 청일 전쟁을 계기로 실각하였다.
마관조약(馬關條約)은 이홍장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는 전혀 손상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북양군벌에 악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회담체결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결국 대륙조선에게 엄청난 재정부담을 안겨 더욱 힘을 쓸수 없도록 만들어 그 당시 중국인(대륙조선인)들이 분노하고 비난을 하던 반역적 회담결과였다.
Yuan Shikai's ascendancy (1901–1908)
1901년 리훙장이 죽고 그의 자리는 위안스카이가 대신했는데 바로 이 위안스카이가 바로 북양군의 실질적인 주인 되며 그의 부하들이 나중에 중국 군벌로 성장하게 된다. 위안은 청나라의 구식 군대를 현대화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허베이 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고 중간에 잠시 군권을 박탈당했으나 다시 복권된다.
The Beiyang Army under Manchu control (1909–1910)
The 1911 Revolution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위안은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북양군을 이끌고 베이징을 점령하여 청나라의 군권을 장악했고 쑨원과 타협하여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위안이 다시 공화제를 부인하고 전제군주국으로 돌아갈 조짐을 보이자 각지에서 반발하고 북양군내에서도 몇몇 계파가 반발했다. 쑨원등 공화파는 그 남방의 군벌등과 연합해 그에 대항하고자 했다.
북양군의 분열-Beiyang clique in power (1911–15)
Yuan Shikai as the Emperor of China (1915–1916)
Fragmentation of the Beiyang army (1916–18)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자 북양군은 다음의 3대 계파로 분열했다.
군벌이름 |
출신지 |
대표인물 |
安徽省 군벌 |
안후이 성(安徽省) |
돤치루이(段祺瑞) |
직례 군벌 |
직례(直隸) (현재의 河北省) |
펑궈장(馮國璋) |
펑톈 군벌 |
펑톈(奉天) (현재의 遼寧省, 만주) |
장쭤린(張作霖), 장쉐량 |
High warlordism (1919–1925)
각 군벌 계파는 모두 자체적인 부대로 무장하고 지방각자의 출신지에 할거하면서 중앙 베이징 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쟁탈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켰다. 각 군벌의 이합집산에 따라 중앙정부의 내각도 교체되기 일수 여서 1916년부터 1928년 사이 총 38차례의 내각 개편이 있었다. 이러한 군벌의 군웅할거는 일본과 서양 제국주의자들의 이권 개입, 불평등 조약과 맞물려 중국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외침을 가속화시켰다.
각 군벌들은 외세를 등에 업고 자신의 힘만 키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북벌과 통일 (Northern Expedition)
1924년 쑨원은 중국에서 전제 군벌을 몰아내고 혁명을 완수하는 데에는 군사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광저우에서 제1차 국공 합작을 주창, 소비에트 연방의 소련군의 도움으로 황푸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국민혁명군을 조직하였다.
국민혁명군-This ROC military symbol based on the Five Races Under one Union flag was replaced by the Nationalist government in 1928 because of its association with the Beiyang government.(1928년 중국국민당 심볼 베이스와 교체됨)
1926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은 군벌 타도를 위한 북벌에 출정하였다. 국민혁명군은 군벌의 폭정에 신음하던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와 중국 공산당의 도움으로 직례 군벌, 안후이 군벌을 차례로 붕괴시켰다. 베이징은 다시 국민당 정부의 손으로 돌아왔고 1928년 펑톈군벌인 장쉐량도 만주에서 일제에 밀려 장제스에게 의탁함으로 북양군벌의 활거 혼란시대는 끝나고 중국은 통일되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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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國民黨
직위 |
이름 |
취임 |
이임 |
총리 (總理) |
쑨원(·孫中山) |
1919.10.10 |
1925.3.12 |
주석 (主席) |
장징장(張靜江) |
1926.5.19 |
1926.7.6 |
장제스(蔣中正) |
1926.7.6 |
1927.3.11 | |
후한민(胡漢民) |
1935.12.7 |
1936.5.12 | |
총재 (總裁) |
장제스(蔣中正) |
1938.4.1 |
1975.4.5 |
주석 (主席) |
장징궈(蔣經國) |
1975.4.28 |
1988.1.13 |
리덩후이(李登輝) |
1988.1.13 |
2000.3.24 | |
롄잔(連戰) |
2000.3.24 |
2005.8.19 | |
마잉주(馬英九) |
2005.8.19 |
2007.2.13 | |
대리주석 (代理主席) |
우보슝(吳伯雄) |
2007.2.13 |
2007.3.14 |
장빙쿤(江丙坤) |
2007.3.14 |
2007.4.11 | |
주석 (主席) |
우보슝(吳伯雄) |
2007.4.11 |
현임 |
중국국민당(중국어 간체: 中国国民党, 정체: 中國國民黨, Kuomintang of China, KMT, Chinese Nationalist Party)은 중화민국의 정당이다. 1894년에 홍콩에서 결성된 '흥중회', 1905년에 결성된 '중국동맹회', 1914년 일본 도쿄에서 결성된 '중화혁명당' 등이 국민당의 전신이다. 국민당과 쑨원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12년:
1월 1일: 난징(南京)에서 쑹자오런(宋敎仁)과 쑨원(孫文)이 중화민국 임시정부(中華民國臨時政府)를 구성하였다. 쑨원이 임시 대총통직을 맡았다.
2월: 신해혁명(辛亥革命)을 통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를 퇴위시키고자, 당시 군권을 장악했던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 와의 막후 협상을 하였고, 그 결과 쑨원이 대총통직을 위안스카이에게 이임하였다.
7월-8월: 동맹회(同盟會)를 주축으로 국민당으로 개편되고 쑨원이 이사장으로 추대되었다.
1913년: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대리 이사장 쑹자오런을 암살하고 국민당과 국민당 의회를 해산한다. 쑨원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비밀결사인 중화혁명당을 조직한다.
1914년: 쑨원이 중화혁명당을 광주에서 확대 조직한다.
1919년: 중화혁명당이 국민당으로 개칭된다.
1924년: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광주에서 소집. 쑨원의 삼민주의를 포함한 정치 이념을 강령으로 채택한다. 당시의 국민당은 소련의 지원을 많이 받은 바, 중국공산당 계열의 인물을 포함하는 연합정국의 형세였으며, 이 전국대표회의는 제1차 국공합작의 시작점이 된다. '소련과 연합전선을 취하고(聯蘇), 공산당원을 받아들이며(容共), 농업과 공업을 중요시 한다(農工扶助)'는 3대 정책을 통하여 국공합작이 전개되었다. 공산당원은 공산당 당적을 보유한 채, 개인의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을 취하여 공산당 대표인 리다자오(李大釗, 이대소), 마오쩌둥(毛澤東, 모택동) 등의 공산계열 인원 여럿이 국민당 요직에 선출되었다.
1925년: 쑨원 사망. 장제스가 뒤를 이어서 국민당 계열을 이끌게 된다.
1926년 2월: 장제스가 베이징 정부 (장쭤린의 군벌 정부)에 대한 북벌을 주장하며 북진한다.
1927년: 북진 중이던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4.12에 반공 숙청을 감행한다. 이로서 제1차 국공합작은 끝나게 되며, 10여 년 동안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시작되게 된다. 난징(南京)을 수도로 정한다.
1928년: 장제스의 국민당이 베이징에 입성하면서 중국 대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張學良, 장학량) 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하는 시안 사건(西安事變)을 일으킨다. 시안사건은 제2차 국공 합작의 시발점이 된다.
1937년-1945년: 항일 전쟁. 중일전쟁의 시기이다.
1946년-1949년: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시작된다. 이 전쟁의 결과로 국민당은 대만으로 물러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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