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왜 황제(皇帝) 대신 황제를 썼을까
[한국경제신문] 2009년 06월 19일(금) 오후 05:55
어새'에 새긴 독립의지
경복궁의 북쪽 신무문 가까이 아름다운 전각 세 채가 나란히 서 있다. 가운데 전돌 건물이 집옥재(集玉齋),왼편 팔각 2층 건물이 팔우정, 오른편 단층 한옥 건물이 협길당이다. 세 건물은 모두 한말 비운의 군주 고종이 서재로 사용한 건물들로 통칭 집옥재라고 한다. 동편에 자리한 건청궁(乾淸宮)을 본궁으로 쓸 때 종종 집무실로도 사용했다. 팔우정은 위층 천장을 모란 무늬로 채우고 가운데에 태극 8괘를 그려 군주권을 표시했다. 세 건물은 조형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룰 뿐 아니라 단청이 매우 아름다웠다.
일제가 한국 병합을 강제한 5년째 통치 성과를 과시한다고 공진회(共進會)란 이름으로 박람회를 열 때 경복궁을 그 장소로 삼아 그 많은 건물들을 모두 헐고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 등 큰 건물 몇 채만 남겼다. 집옥재 건물들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훼철을 면했다. 3공과 5공 때는 이 지역에 수도경비사단 병력이 주둔해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 본의 아니게 원형이 보존됐다. 그러나 근래 이곳이 시민들에게 공개되면서 당국이 단청에 손을 대는 바람에 옛 아름다움을 잃어버려 가슴이 아프다.
나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가운데 집옥재 건물이 중국식 벽돌(전돌)로 지어진 것에 대해 궁금증을 금치 못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 고종의 이미지로는 집옥재처럼 훌륭한 서재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울 수 있다. 이곳에는 1885년 전후에 중국 상하이의 여러 서점으로부터 구입한 서적 3만여 책이 수장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서양의 기계 문명,과학 서적 등의 한역본(漢譯本)이 다수 섞여 있었다. 청나라에서 행해지던 양무운동 관련 서적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 책들은 나중에 규장각 도서에 포함돼 집옥재 도서란 이름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돼 있으며 규장각 '중국본' 도서 7만여 권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1873년 고종은 21세가 되면서 아버지 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직접정치를 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배외정책 노선이 옳지 않다는 판단 아래 군주 직접정치의 의욕을 다졌다. 그때 경복궁 내의 소궁으로서 건청궁을 건립했고, 그 경내에 집옥재 세 건물을 후속으로 지었다. 그런데 왜 중국식 전돌인가. 나의 오랜 이 의문은 몇 해 전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풀렸다. 이 책의 저자 박지원은 잘 알려져 있듯이 중국처럼 벽돌로 집을 짓기를 주장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고종이 왜 그의 주장을 따르게 되었는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소위 '유약하고 무능하다'고 알려진 군주 고종이 대실학자 박지원의 주장을 따랐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대목이다. 고종을 개명 · 개화 군주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나였지만 그 연결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박지원의 《열하일기》 후반부를 읽으면서 그 고리가 마침내 찾아졌다. 박지원이 따라간 사신 일행이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열하(현 승덕)에 당도하여 건륭제가 티베트 라마 불교의 지도자 판첸 라마를 평등례로 접하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박지원은 흥분했다. 대청국의 황제가 국익을 위해 일개 불승을 평등례로 대우하는 이 '큰 정치' 앞에 북벌의 복수심을 키우면서 청국이 주도하는 중국의 문명을 거부하는 조선의 식자들이 과연 나라를 이끌어갈 자격이 있는지를 자문했다. 그는 뒤처지는 나라가 되지 않기 위해선 바깥으로 향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선진문명 수용 개방론'을 폈다.
청년 군주 고종은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를 가까이 두고 그로부터 많은 자문을 받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거부한 일본의 국서를 접수하면서 앞서가는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능동적으로 임하고자 했다. 이 판단에 박규수가 큰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고종이 이렇게 박지원의 세계관을 수용하여 새 정치를 펴는 마당에서 박지원이 강력히 주장한 벽돌 사용을 자신의 서재 신축에 도입했다는 점은 쉬 납득이 간다. 역사 연구라는 것은 이렇게 종횡의 얽힘이 풀릴 때 가장 큰 희열이 느껴진다. 조선 후기 실학은 재야 선각자의 사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조정의 정책으로 살아 새 역사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의 북학론은 청국에 대한 복종을 전제로 하는 사상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각국이 개체 중심의 독립성을 가지고 서로 교류하여 발전하는 미래 세계를 꿈꾸었다. 이 노선은 고종의 대한제국 출범에 바로 닿아 있었다. 고종의 개국 · 개화 정책은 1880년대까지도 전통적인 중국과의 관계, 즉 조공책봉체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 청국이 패한 것을 계기로 그는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체를 바꾸고 1899년 드디어 '대청국 황제'와 대등한 관계에서 국교를 수립하는 한청조약을 체결하였다. 고종은 제국으로 국체를 승격시키면서 조선이란 국호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명나라의 추인을 받아 정해진 역사를 환기시키면서 이를 버리고 새 국호로 조선 다음으로 많이 우리를 지칭한 '한(韓)'을 택해 대한제국이라고 할 것을 스스로 제안했다.
최근 고궁박물관이 고종 황제가 국권 수호를 위해 서방 열강 국가 원수들을 상대로 펼친 비밀 친서외교에 사용한 '황제어새(皇帝御璽)'를 구입해 이를 보물로 지정할 계획이란 보도가 있었다. 이 어새의 문자에서 주목되는 것은 황제의 '황'자다. 황자는 본래 흰 백(白)자 밑에 임금 왕(王)자를 쓴다. 그런데 대한제국의 황자는 모두 흰 백자 대신에 스스로 자(自)자를 썼다. 이 어새뿐만 아니라 1899년에 만든 선대의 왕, 왕후를 황제, 황후로 올리는 추존 보인들에도 모두 이 글자를 쓰게 했다. 고종 황제의 조공책봉체제 청산에 대한 의지는 이렇게 강했다. 그런 그를 계속 무능 군주로 버려 둘 것인가. 강제 병합 100년을 한 해 앞둔 시점에서 일제가 씌워 놓은 역사 왜곡의 그물 걷기에 마음이 급하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한국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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