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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가 미국인황후를 얻었다.
글쓴이:한부울
살이쪄 얼굴만 크고 키가 짧다막한 고종이 과연 실제 고종인가?
아니면 반도사를 완성시키기 위한 일제가 만든 유구계왕족 또는 월계왕족 대역인가?
100년 전만 하더라도 요사이처럼 사진이나 그림이 넘쳐나지 않았다.
특수계층이 아니면 접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정보가 일반 대중들에게 막혀 그렇게 밝지 않았다.
아니 밝지 않았다는 표현보다 암흑 그 차체라고 해야 맞다.
때문에 일반백성들이 왕의 신분을 접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얼굴을 볼 수가 없어 조선말기 고종이 어떻게 생겼는지 솔직히 알 수가 없었다고 보는 면이 맞다.
우리가 지금 고종이라고 하는 사진 그 이외 왕손들 모두 사진으로 볼 수 있는데 일제가 의도적으로 얼마든지 조작 바꿔 놓을 수 있는 문제임을 우리는 냉철하게 보아야 할 일이다.
어진(御眞)은 삼국시대 이후로 꾸준히 그려왔다.
어진은 특히 조선시대때 많이 그려졌는데, 현재는 거의 다 소실되었다.
원래 고려시대 때 어진은 상당수 남아있었으나 조선 세종 때 대부분 불태우거나 묻어버렸다고 한다.
어진은 사진도 찍을 수 없게 하였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어진의 사진은 대부분 현대에 찍은 것이다
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용어로는 어진 외에도 진용(眞容)·진(眞)·진영(眞影)·수용(晬容)·성용(聖容)·영자(影子)·영정(影幀)·어용(御容)·왕상(王像)·어영(御影) 등 다양하다.
어진을 대하는 것은 성자신손(聖子神孫)이 보은사상(報恩思想)에 근거한 추모의 정례로부터 행하여졌기 때문에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수용을 바라보면서 그리는 경우는 흔치 않았던 모양이다.
어진 제작은 도사(圖寫)·추사(追寫)·모사(模寫)의 3종류로 나눌 수 있으며 도사란 군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수용을 바라보면서 그리는 경우에 일컫는 말이다.
추사란 왕의 생존 시에 그리지 못하고 승하한 뒤에 그 수용을 그리는 경우로서 흡사하게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한다.
조선시대의 몇몇 군왕이나 왕세자의 초상화는 이 방식으로 그려졌다고 알려진다.
전설상의 시조의 수용 역시 한결같이 이 추사 방식에 의거하였다.
모사란 이미 그려진 어진이 훼손되었거나 혹은 새로운 진전에 봉안하게 될 경우에 기존본을 범본(範本)으로 하여 신본을 그릴 때에 일컫는 말이라고 설명된다.
과연 1921년, 고종의 3년상이 끝난 후 당시 각 궁궐에 퍼져있던 역대 임금들의 어진들을 한 곳에 모아 모시기로 하고 창덕궁에 선원전을 설치했다 하여 1921년까지 남아있던 어진들은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철종, 고종의 어진이 현존한다고 하였는데 과연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1920년부터 일제에 의해 모든 것이 새롭게 짜여지던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
일제가 이것이 고종이다 라고 하면 고종이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영친왕이라고 하면 영친왕이 된다.
일반백성들이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진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것은 고관관리 역시 일반백성과 다르지 않다.
임금이 행차하면 거의 일반백성들은 땅에 머리를 대고 있기 때문에 머리를 쳐 들 수가 없다.
그런데 무슨 재주로 일반 백성들이 왕의 얼굴을 익힐 수 있단 말인가.
조선말기에 왕의 권한이 대폭적으로 축소가 되어 노출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매일 접견하던 고관대작 또는 귀족 신분의 정보통들은 모두 친일세력이라고 할 때 지시하는데로 시키는데로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보면 그들의 확인조차도 믿을 수 없는 것이어서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취약점을 일제가 최대한으로 이용했다면 조선말 실제 고종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을 감히 내릴 수밖에 없다.
물론 고종이외 왕족의 신분 역시 실제모습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때문에 그 당시 고종이라고하는 신분은 국제적으로 확인이 되지 않았던 바 아래 미국신문기사에 나오는 고종의 모습이 실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의 만행을 보면 반도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고 보이고 고종을 대역으로 삼는 음모는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라고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사례가 어찌 고종만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삼한역사에 등장하고 지금까지 잔존하였다고 하는 어진 모두가 사실이 아닐 수가 있다.
베트남 大越 李朝皇帝 1010년-1224년
묘호 |
시호 |
성명 |
재위 |
연호 |
왕릉 |
태조(太祖) |
奉天至理應運自在聖明龍見睿文英武崇仁廣孝天下太平欽明光宅章明萬邦顯應符感威震藩蠻睿謀神功聖治則天道政皇帝神武皇帝 |
李公蘊 |
974-1028 |
順天 1010-1028 |
壽陵 |
태종(太宗) |
開天統運尊道貴德聖文廣武崇仁尚善政理民安神符龍見體元御極億歲功高應真寶曆通玄至奧興龍大定聰明慈孝大行皇帝 |
李佛瑪(李德政) |
1000-1054 |
天成1028-1034 通瑞1034-1039 乾符有道1039-1042 明道1042-1044 天感聖武1044-1049 崇興大寶1049-1054 |
壽陵 |
성종(聖宗) |
應天崇仁至道威慶龍祥明文睿武孝德聖神皇帝 |
李日尊 |
1023-1072 |
龍瑞太平1054-1058 彰聖嘉慶1059-1065 龍彰天嗣1066-1068 天貺寶象1068-1069 神武1069-1072 |
壽陵 |
인종(仁宗) |
孝慈聖神文武皇帝 |
李乾德 |
1066-1127 |
太寧1072-1076 英武昭勝1076-1084 廣佑1085-1092 會豐1092-1100 龍符1101-1109 會祥大慶1110-1119 天符睿武1120-1126 天符慶壽1127 |
千德陵 |
신종(神宗) |
廣仁崇孝文武皇帝 |
李陽煥 |
1116-1138 |
天順1128-1132 天彰寶嗣1133-1138 |
壽陵 |
영종(英宗) |
- |
李天祚 |
1136-1175 |
紹明1138-1140 大定1140-1162 政隆寶應1163-1174 天感至寶1174-1175 |
壽陵 |
고종(高宗) |
- |
李龍翰 |
1173-1210 |
貞符1176-1186 天資嘉瑞1186-1202 天嘉寶祐1202-1204 治平龍應1205-1211 |
壽陵 |
혜종(惠宗) |
- |
李旵 |
1194-1226 |
建嘉1211-1224 |
- |
- |
昭皇帝 |
李佛瑪(李天馨) |
1218-1278 |
天彰有道1224-1225 |
- |
위 계보를 바탕으로 근세기까지 얼마든지 월 이씨왕족 후손들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근세기말 일제가 동남아 태국, 월국(베트남)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면 대역왕족으로서 이용가능성은 충분하다.
유구가 어딘가?
대만이라고 하고 있다.
대만역시 일제가 점령하였다.
아래 기사가 오보인가?
그러나 오보가 아닐 가능성이 더 많다.
요사이는 똑같은 기사거리, 수많은 사건등 오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기사가 지상에 실려 대중앞에 나가기 까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중대한 톱 뉴스가 오보라고 치부해버리면 당시 상황을 너무 현대에 맞춰 본다는 의미이다.
그 당시 기사를 쓰는 것도 어렵지만 많은 시간이 걸려 사실 이외 보도라는 뜬소문(gossip)형식의 보도는 경제적이지 않아 별 의미가 없다.
발행부수도 얼마되지 않는데다 오보가 나온다면 신문사가 바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지름길이다.
그럼에도 오보를 이와같이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본다.
일단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한반도에 존재한 대한제국과 대륙조선을 분리하고 볼 수 있어야 하는 점이고 이 기사가 후일 미일합작으로 고쳐져 수정보도 되었을 수 있다.
물론 그 당시까지 대한제국주체가 한반도에 존재한 것인지 아니면 대륙 협서나 하북, 산동을 근거로 하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대한제국은 대륙조선과 분리되어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대륙조선(CHINESE EMPIRE)의 황실은 감숙성(甘肅省)에서 신강성(新疆省)을 포괄하는 중원에 존재했다고 보인다.
대한제국이 존재하였던 곳과 대륙조선이 거 하였던 곳은 다를 수밖에 없다.
대륙조선(CHINESE EMPIRE)은 신비스러움을 더하는 거대한 제국이다.
그야말로 서양인들 눈에는 관심거리,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영국 왕자들이 올리는 결혼식을 우리가 특별한 시선으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대륙조선을 차지하려고 서양전체가 연합하여 덤벼들었고 그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라도 차지하려고 일제와 해군력을 담보로 하는 북만주기회주의정치세력들이 충돌하여 독식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사실도 먼저 인지해야 한다.
신미양요(1871.6.1~1871.6.11)가 한반도에서 일어난 사건인가?
그렇지 않다.
강화도가 어디인가?
병인양요(1866)는 분명 베트남 북부에서 사천성까지 영역을 그려 볼 수 있다.
대륙조선이 신강성에 있었다면 그곳 가까이 접근 할 수 있는 곳
그곳에 포대를 설치하고 미함선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포격하였다고 보인다.
대륙조선을 이탈한 세력들을 일제가 규합 대한제국이라고 하고 최종 한반도를 근거로 하였다고 보지만 그러한 대한제국황실은 일제에 의하여 조종되고 있었다고 한다면 대륙조선황실(CHINESE EMPIRE)은 미국에 의하여 크게 조종되었거나 보호아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미국에 건너간 의화군 이강은 직계는 아닐지라도 대륙조선의 황실 자손일 가능성이 많다.
문제는 대한제국에서 일어난 것처럼 만들었지만 사실 대륙조선 즉 CHINESE EMPIRE 에서 발생한 행사였음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때문에 나중에 오보라고 번복하고 난리굿을 한 것이다.
보도가 되자 미국과 일제가 대한제국에서 일어난 것처럼 꾸며 몰아가려고 했을 가능성이 많다.
어찌되었던 미국과 일본은 국제적으로 협력체제에 있는 우방관계이고 서로 나눠먹던 사이였다.
유라시아전체를 놓고 러시아와 서방세력들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패권을 놓고 충돌하고 있었고
미국과 일본은 대륙조선을 차지하려는 러시아 남하에 부심하고 있을 때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과 관계설정에 심사숙고 할 수밖에 없다.
늘 우리가 과거 사진이나 근대적 자료에 빠져 허우적일 때 판단력이 흐려지는 오류는 바로 대륙조선이란 실체와 대한제국이라는 개체에서 역사적인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물론 대한제국은 엄밀히 하자면 대륙조선의 유업을 그대로 이어 전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출발한 것이라고 근본적으로 이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래 게시한 사진에 보듯이 황비결혼식 행차 취타대 행렬 정면에 피부색이 다른 남 아시아인이 행차를 이끌고 있음을 눈여겨 볼 필요성이 있으며 대륙적인 분위기가 사진 모든 면에서 풍기고 있음을 속일 수가 없다.
[원본클릭]
이 사진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이상한 점
1. 우측상단 건물모양이 한반도 건물이 아니다.
2. 햇빛가리개를 들고선 병사들은 전통조선복장이 아니다.
3. 행렬 맨앞에 의장 병사 역시 옷차림이 대륙신식복장이고 모자 또한 인도풍모자이며 얼굴색도 남아시아인이다.
4. 노란색원 안에 인물이 고종인 것 같은데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고종모습하곤 다르다. 첫째 얼굴모습에서 고종은 통통한 편이라고 느끼는데 비해 사진에서는 깡마르며 고종은 한국인이기보다는 일본인 같이 키가 왜소하게 느낄 정도로 아주 작은 것 같은데 비해 사진에는 키가 상당히 크고 장신인 것 같은 느낌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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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가 미국인황후 얻었다
[조선일보]04/01(목) 17:56
왕조 동경이 낳은 미국언론 오보...일 세력 견제 의도도 .
필라델피아 출신 미국 아가씨 에밀리 브라운 /한국의 황후가 되다/1700만 한국 백성을 신민으로 거느리다'. 1903년 10월 24일 치 '콜로라도 스프링스 텔레그라프'지의 전면 머리기사다. 물론 특종이다. 그런지 한달 남짓 뒤인 11월 29일자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는 이 특종 기사를 받아 '유일한 미국인 황후 어떻게 대관했는가'라는 표제로 역시전면 머리기사로 결혼식 진행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이 두 신문의 기사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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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1931년 11월 29일치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에 보도된 고종황제와 미국인 에밀리 브라운양 결혼 기사. '유일한 미국인 황후 어떻게 대관했는가'라는 제목으로 브라운양의 클로스업된 모습과, 고종과 브라운 양이 일산으로 가린 연(임금의 수레)을 타고 궁을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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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의 독실한 장로교회 목사 피터 브라운이 10년전 열다섯살난 딸 에밀리를 데리고 한국에 선교차 갔다. 이 선교사가 고종을 알현할 때 에밀리를 데리고 궁궐에 들어갔다. 당시 명성황후가 뜻하지 않게 숨진 뒤에 고독한 나날을 보내왔던 황제께서 이 순박한 백인 소녀를 보고 친근감을 느껴자 주궁에 불러들여 각별히 대접했다. 아버지 교회의 성가대 지휘를 맡은 에밀리양은 아버지의 목회 활동과 한-미간 외교에 좋은 영향을 주리라 믿고 접근했다. '신미년 강화도 광진포의 한-미전쟁 이후에 양이 양추 양괴로 이미지가 사나웠던 미국의 한 여인이 황후가 된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까지 했다.
일찍이 포르투갈의 핸슬러 여왕이 신분 낮은 평민과 결혼, 귀천상혼 선례를 남겼고 미국 평민 출신 커즌부인이 인도 여왕이 된 적은 있지만 미국인 황후는 처음이라고도 했다. 이로써 미국피를 받은 한국 황제가 태어날 수 있게 됐다 하고 '지난 8월에 있었던 약혼식에는 폐백을 실은 우마차가 인산인해를 이룬 하객틈에 끊이질 않았다'고도 했다.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는 혼례 기사를 장황하게 쓰고 있는데,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은 황제 곁에 무개차를 타고 있는 에밀리 브라운양에 대한 묘사를 보자. '한국식으로 큰 머리를 하지 않고 퍼머 머리에 영국 여왕이 쓰는 듯한 왕관을 썼으며 붉은 비단에 푸른 수를 놓은 땅을 끄는 치마는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하여 무 척 무거워보였다. 아마 현대 문명인으로 브라운양 만큼 화려하게 꾸민 사람은 없을 줄 안다'. 52명으로 구성된 대취타 의장악대가 뒤따르고 오색 용기가 나부낀다는 등 누군가 한국 제도나 풍물에 정통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허구를 사실처럼 보도했던 것이다.
이 브라운양이 바로 엄황후라는 것과 이를 처음으로 보도한 것이 빈에서 발행되는 '신자유신문'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물론 당시 국내 신문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에는 이 미국인 황후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국내에서는 미국 신문들을 볼 수 없기에 아는 사람도 없고 다만 미국 외교관이나 선교사 상인들 간에 본국 친지들이 신문을 보고 문의해대는 바람 에 어리둥절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서울의 미국인들이 발행하는 영문 잡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 1903년 11월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거짓말이 참말 보다 생생하게 행세한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일 것 이다. 미국 몇 신문이 한 미국 아가씨가 한국 황후가 됐다는 가십 기사를 실어 한국에 사는 미국인들의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찌 이 광대놀음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그리고 미국 공사관은 문의가 번거롭게 답지했던지 다음과 같은 공 식 성명을 내고 있다.
'한국황제는 외국 아가씨와 결혼한 사실이 없다. 더욱이 에밀리 브라운양과 놀라운 결혼을 뒷받침해줄 근거는 추호도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한국 황실로부터 간호사-시녀-여교사-가정교사- 여의사 같은 미국인 여자를 고용하겠다는 초빙요구도 받은 적이 없다.'.
이 언론사상 대서특필될 만한 오보 픽션사건이 어떤 근거로 버젓이 일어날 수 있었던가는 미지수이나 학자들이 추정한 바는 이렇다.
▲이런 오보 기사들이 당시 앨런 미국 공사가 본국에 가 있을 동안에 일어났다는 사실
▲이것이 맨처음 보도된 신문의 편집장이 앨런과 절친한 사이인 리덴하우스라는 점
▲리덴하우스가 경인철도부설당시 기술감독으로 1년쯤 한국에 와있어 한국사정에 밝다는점
▲픽션 중 가례행렬 절차가 앨런이 쓴 일기가운데 고종과 민황후 행차묘사와 흡사하다는 점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친일배외, 곧 일본이 한국을 먹어드는데도 외국 세력 개입을 반대하는 노선을 걷고 있는데 대해, 앨런 공사는 미국 등 강대세력이 개입해야 일본의 한국 침략을 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노선 갈등을 빚고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황제가 미국인과 결혼한 픽션은 바로 한-미 합심으로 침략 일본에 대항해야 한다는 앨런의 사상을 친구인 편집장이 우회적으로 픽션화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임금이 없는 나라이기에 미국 사람들은 왕이나 왕조향수가 별나게 강하다. 한말에 헌신적으로 한국왕실에 와 희생적으로 봉사하다시피한 미국인이 하나둘이 아닌 것도 왕조향수와 무관 하지가 않다. 개국당시 외교를 도왔던 미국인 프레이저는 벼슬아치들이 상투에 꽂는 금관자 하나 얻어 이를 자랑스럽게 가보로 간직했으며, 이를 친지들에게 자랑하자 서로 금관자 하나 얻게 해달라고 졸라대더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하물며 미지의 나라 동양에서 왕비가 되고 왕자의 비가 된다는 것은 '신데렐라의 구두'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동양이나 중동 왕족이 미국에 가있다면 사실여부를 떠나 신문이 연문을 만들어 퍼뜨리게 마련이다.
가장 잘 팔리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에밀리 브라운 사건도 단순히 이런 미국의 왕조 향수에 영합하는 돈벌이에서 비롯됐을 수 도 있다. 그해 3월에도 한국 왕족 연문이 미국 신문에 보도되어 떠들썩했다. 고종의 맏아들인 왕세자(순종)에게 후사가 없자 장귀인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의화군 이강을 왕세손으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지모가 있는 엄비가 계비로 들어가 앉아 왕자인 영친왕 이은을 낳은지라 위상이 흔들리고 위태로워진 것이다. 그래서 의화군의 미국 유학은 자의가 아니라 이 같은 궁중역학의 작용이었으며 마음 편할 리가 없었음직하다. 그럴 무렵 '뉴욕 헤럴드' 1903년 3월 1일자에 의화군의 놀라운 성 명이 보도되었다. 자신은 미국민의 자유와 미국의 독립에 매혹되어 조국왕관을 포기한다 하고 국외생활 자유를 위해 왕실이 지워준 책임을 모두 포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계기로 의화군의 연문이 지상에 나돌기 시작했다. 그에 보면 이왕자가 다니고 있는 대학의 여학생부에 앤지 그레이엄이 라는 여학생이 있는데 발랄하고 쾌활하여 이 왕자가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한다. 한데 교칙이 너무 엄해 학생생활을 하면서 데이트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방학이 되어 그레이엄양이 고향인 휠링에 돌아가면 의화군은 따라 내려가 데이트를하고 가족과도 서로알고 지냈다는 것이다. 왕자비 탄생이라는 미국 여성 선망속에 연문이 번져나가고 여기에 왕 계승권 포기성명이 기름을 부어 왕관을 버린 사랑으로 풍문의 물결을 탄 것이다.
한데 그레이 엄양 자신이나 그의 부모는 이둘 사이에 정식 혼약 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하면서 둘 사이의 우정이상 관계를 부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미 결혼한 몸으로 본국에 부인이 있는 이상 그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 다른 사랑의 결실을 모색한다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여론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인의 왕실선망과, 이에 부응하여 신문을 많이 팔아 돈을 벌려는 삼류신문의 상혼 때문인지 한반도에 뻗쳐가는 일본 세력을 꺾는데 미국과 결합하기를 요망하는 여론에 부응하려 함인지 한국왕족과 미국시민의 결혼 이야기가 이렇게 20세기 초의 한 시대를 휩쓸었던 것이다.
[이규태 역사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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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April Fools’ Story: Emily Brown – The American Empress
by robert neff on April 1, 2010
In January 1903, Emperor Gojong married Emily Brown, the daughter of an American missionary, making her the first American empress in the world. The wedding ceremony was partially described as:
“The signal was finally given. At the head of the procession moved the generals of the army and the most favored troops. When a thousand or more soldiers had passed, trumpets blared, the palace gates were thrown wide open, and in glittering helmets and armor of five hundred years ago out marched the Emperor’s bodyguard.
“Following the bodyguard came the attendants in dazzling silks and waving plumes. Finally with a deafening din of drums, two chairs emerged. In one of these chairs sat the Emperor Yi Hi (Gojong) and in the other Emily Brown, Empress of Corea. Never before had a civilized being been appareled as she was. From head to foot she was covered with gems and silk so think that they fell in folds like heavy woolen cloth.
“Above the royal chairs waved a banner with a flying dragon fourteen feet long. Under the banner was an immense red parasol, indicating to the people that their monarch had shared his power and throne with the woman by his side.”
You can read the rest of her biography here – Korea Times.
It is hard to believe that some people actually believe this happened. Internet sites still have references to Emperor Gojong (I still prefer it spelled Kojong) as being married to Emily Brown who later changed her name to Om -”Dawn of the Early Morning.” What is even more amazing is that when I ask my Korean friends if they know about Gojong’s marriage to an American woman they merely nod that they have heard it but they don’t know much about her. They basically acknowledge that the story could be true. I remember one internet site that I contacted and informed that the story was not true actually asked me for proof because they were positive it was true. They cited a book in Europe that listed all of the world’s nobility. Kind of hard to prove something that isn’t true. Regardless, it makes a great April Fools’ story, especially when it is printed in the newspaper – its original creator.
Notes: The Boston Sunday Post is the image and source that everyone uses for their story of Emily Brown – unfortunately most of them never bothered to really dig. I have discovered three original sources/versions of the story and have found it in over 100 newspa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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