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정조 ‘경호부대’ 200년 전 위용 드러냈다

한부울 2009. 6. 13. 15:04
 

그렇다면 이러한 시설이 지금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남아 있어야 하지만 어디에 있는가?

왜 그럴까?

무수히 많은 피침역사(?)에서 파괴되거나 소실되었다?

반도사관이 이러한 것들을 궁금하게 여기는 우리에게 늘상 둘러치는 괴변이었고 변명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조가 그렇게 아끼던 심환지 일파에 의해 없어졌다고 한다.

무엇때문에? 정적이니까...

사실이 그런 것인지...

반도사에서 한반도에 한성, 한양이라고 하는 지금 서울에 그러한 건물이 실제 조성되었는지... 

아니면 본래 대륙조선이 존재하였던 본거지인 대륙 한성, 한양에서 장용영이란 군사진영이 축조되어 지금 현재 우리가 볼 수 없어 엉뚱하게 헤메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밝혀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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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경호부대’ 200년 전 위용 드러냈다

[한겨레신문] 2009년 06월 12일(금) 오전 09:25


 


장용영 서울 진영 그린 ‘본영 도형’ 발견

195cm 채색도로 이현궁터 위치한 본영 담아

수세식 화장실 갖춘 653칸 장대한 군사시설


조선 정조 임금(재위 1776~1800)의 시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친위 부대 ‘장용영’이다. ‘씩씩하고 용감한 부대’라는 뜻의 장용영은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날고 긴다는 최정예 무사들을 뽑아 특별히 만든 군대였다. 재위기간 중 서울과 화성(수원)에 주둔부대를 두고 정조를 지켰던 장용영의 서울 본영(내영)을 상세히 그린 대형 채색 그림과 건물 배치 도면이 발견됐다. 조선 후기 군영의 세부를 그린 도면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소의 정정남 연구교수와 이왕무 연구원은 최근 옛 왕립도서관인 장서각 서고와 고려대박물관에 소장된 ‘본영도형’ 3장이 장용영 군영을 그렸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학술지 <장서각>21호에 내용을 공개했다.


‘본영도형’은 서울 종로 4가~창경궁 사이의 이현대로 동쪽(현 혜화경찰서와 그 부근)에 있던 장용영 본영의 내부 얼개를 그린 채색 그림과 그 평면도격인 건물 배치도면 2종이다. 1799년 그린 채색그림과 1801년 작성한 건물 도면은 장서각에, 1799년 그린 건물 도면은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용영의 내부 배치와 건축 형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표현돼 정조 등에게 군영 현황을 보고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눈을 끄는 것은 장지 세 폭을 이어붙인 길이 195.8cm의 아름다운 채색 그림이다. 주요 지휘소와 막사, 무기·군수품 창고, 연못 등 당시 내부 모습을 조망하듯 밑그림을 그리고 꼼꼼히 색칠한 뒤 시설마다 한자 명칭을 적어놓았다.


그림을 보면 장용영은 넓은 터에 다양한 군사 관련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대장의 처소인 북쪽의 내대청, 장교들이 근무하는 중앙부의 외대청, 각종 무기를 만들고 관리하는 남쪽의 군기대청, 군량미와 무기류 등을 보관하는 창고인 동서남북 행각 등이 보인다. 내대청 부근에 창덕궁 부용정과 비슷한 연못과 정자, 은행나무가 있고, 군기대청 위에도 수양버들 늘어진 큰 연못이 있어 군 시설답지 않은 운치를 풍긴다. 터가 본디 왕실 별궁이던 이현궁이어서 연못과 정자 등은 그 자취일 것이라는 추정이다.


창고 행각 등의 그림 속 건물들은 많은 벽돌을 써서 벽체를 지은 것이 특징이다. 정조가 수원 화성을 지으면서 썼던 벽돌 축조기법을 그대로 활용한 셈이다. 수세식 변소도 있다. 그림 아래 연못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2개의 측간(화장실)을 지나는데, ‘수도(水道)’란 문구가 쓰여져 측간 아래 물을 흘려 오물이 씻겨가게 하는 얼개였음을 보여준다. 이밖에 다른 2종의 평면도 도면들을 보면, 건축물 규모가 원래 터인 이현궁의 칸수는 66칸이었던 것에 비해, 1799년 도면은 532칸 반, 1801년 도면은 653칸으로 늘어나 정조가 서거전까지 장용영 규모를 키우는 데 힘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왕무 연구원은 “현재 조선 후기 군영 자체에 대한 사료가 거의 없어 장용영 도면들은 당시 군제사 연구에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용영 군영은 정조 사후인 1802년 정적인 심환지 일파에 의해 없어지면서 다른 군영, 창고로 쓰였다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 주둔지, 담배 공장 사택으로 바뀐다. 해방 뒤 동대문경찰서(혜화경찰서)와 대형 상업 빌딩들이 늘어선 도심으로 변했다. 수령 500년 넘은 은행나무(그림 중앙의 큰 나무)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도판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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