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때 1만리끝의 아라비아제국에서 조공을 했다.
글쓴이: 지명선 조회수 : 34 08.09.01 17:57
<사서의 근거>
고려사절요 제 3권 현종황제 갑자15년(1024년)-고려사절요 상(민족문화추진회 옮김) 268페이지에 이렇게 나온다.
“西域大食國悅羅慈等 一百人來獻土物
서역대식국열라자등 일백인래헌토물”
“ 서역 대식국(아라비아제국)의 열라자등 1백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역사적 의의>
거리기준을 10리가 6km로 보았을때 고려의 서쪽 1만리지점이 바로 아라비아반도이다. 고려사 지리편에 보면 고려의 너비가 만리라고 나온다. 대식국의 사신이 실크로드(고려의 내부도로)를 통하여 고려의 경성에 왔고, 그 아라비아제국이 고려와 맞닿아 있다함은 고려의 영토가 아라비아까지 미치고 있음을 뜻한다.
<고려사절요의 기타내용>
이밖에도 고려는 여러 제국, 제후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데, 그 계략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가을 7월 황제의 생신에 거란이 하례객을 보냈다.
2) 서여진의 추장 도라와 동여진의 노을견등이 와서 말을 바쳤다.
3) 병인 17년 8월 송의 광남사람 이문통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4) 동년 5월 동서여진의 추장이 각기 부락의 자제들을 거느리고 와서 말과 활, 쇠뇌를 바쳤다.
5) 동년 2월 거린이 태부 이지순을 보내 예물를 가지고 왔다.
6) 정묘18년 흑수말갈 귀덕 대장군 아골아가가 와서 말과 가물, 무기를 바쳤다.
7)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8) 영광군이 높이 8척이 되는 산호수를 바쳤다.
9) 송의 강남사람 이문통 등이 와서 서책을 바치니 모두 597권이었다.
10) 무진19년 9월 송의 천주사람 이선 등 30여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해설>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들을 보면, 고려의 북쪽(몽골고원, 시베리아)의 거란, 동여진(동몽골, 동북삼성), 서여진(중앙아시아),흑수말갈 (흑해연안), 탐라(산동성), 송의 강남사람(양자강이남), 송의 천주사람(복건성지방), 송의 광남사람(광동성, 광서성) 대식국(아라비아반도)등으로 보이는데, 고려의 영역이 극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서북아시아(흑해), 시베리아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대륙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태수
悅羅慈(열라자)는 엘리자의 음역으로 보입니다. 8) 영광군이 높이 8척이 되는 산호수를 바쳤다/ 산호초는 열대지방에 나는 것이 아닌가? 나주와 영광은 류구국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류구국에서 표류되어 나주 가가도에 온 경우가 있습니다. 현재 한반도 나주에는 해안이 없습니다. 나주와 영광은 인도차이나 반도 또는 미얀마 서해안 지역도 검토해보아야 합니다. [대륙조선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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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1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7월 5일(무인) 3번째기사
민심 수습·제도 정비·강명·예법 등에 관한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상소문
○集賢殿直提學 梁誠之 上疏曰:
恭惟我主上殿下, 以文武不世出之資, 新登寶位, 祗謁宗廟, 此正勵精圖治, 以新庶政之時也。 臣不揆鄙拙, 姑將管見, 仰瀆聖聰, 伏惟睿鑑垂察。
一, 得民心。 蓋人君享國之長短, 在於得民心之如何。 自古帝王之興, 以除害救民, 創業於前, 而繼體之主, 又能愛養斯民, 澤洽人心, 故雖衰世, 思先王之德而不能離。 臣以經史考之, 周 之 文王 始開王業, 武王 克成厥勳, 而 成王 、 康王 相繼撫之, 故人心固結, 至于八百年而不忘。 漢 之 高帝 除 秦 、 項 之虐, 以有天下, 而 惠 、 文 、 景 相與休息, 政在養民, 光武 中興, 明帝 亦以愛民爲政, 故其歷年至于四百年。 唐 之 太宗 佐 高祖 , 平 隋 亂而身致太平, 以至 玄宗 開元 之治, 亦有愛民之意, 故歷年幾三百年。 宋 之 太祖 以上聖之資, 削平五季之亂, 四宗迭作, 百年無事, 高宗 南渡, 孝宗 又愛民之主也。 故三百年之間, 雖顚沛 閩 、 廣 , 而民心如一日。 至於 宋 之 元嘉 、 隋 之 文帝 、 周 之 世宗 、 金 之 大定 , 可謂小康, 而或創業無積累之漸, 或繼世無守成之主, 故俱不得歷年之永, 豈可與 周 之仁厚、 漢 之寬仁、 唐 之仁義、 宋 之忠厚, 同日語哉? 吾東方前朝 太祖 統一三韓, 功德在人, 其後 成 、 穆 、 顯 、 德 、 靖 、 文 、 宣 、 肅 、 睿 、 仁 十世, 皆以養民爲務, 故歷年垂五百年。 恭惟我 太祖康獻大王 以神聖之資, 拯民塗炭, 太宗 、 世宗 、 文宗 相繼而作, 道洽政治, 民安物阜, 歷年之久, 固未易量也。 願殿下亦以上天立君愛民之心, 前代得民永年之效, 反覆思之, 全以休養生聚, 勤恤民隱爲事, 則本朝之業, 直與 檀君 、 箕子 、三國、前朝而竝美矣。 其愛民之道無他, 不過輕徭、薄賦、省刑三者而已。
一, 定制度。 蓋休養生息, 固人君之先務, 而立法定制, 亦不可緩也。 愛民則爲國之本, 立法則馭世之道, 固不可擧此而遺彼也。 若法制未定, 則一時典章, 隨立隨改, 後世子孫, 固無所憑依矣。 故 周 之 成 、 康 制禮作樂, 漢 之 武帝 立 漢 家法度, 唐 則 貞觀 、 開元 俱有制作, 以維持一代之體。 但 宋 之新法制度太煩, 亦以之基禍。 然則法不可不立, 而亦不可草草爲之也。 吾東方前朝之時, 田柴之科、府衛之制, 至精至詳, 可謂盛矣。 然惟後世田制紊, 而爲私田, 兼竝攘奪, 山川爲標, 兵制廢而爲私兵, 蒙 、 倭 迭侵, 無軍可禦。 本朝 太祖 、 世宗 之時有 《元典》 、 《續典》 , 又有謄錄, 皆良法也。 然田制、儀注未成一定之制, 兵制、貢法多爲權宜之法, 豈非盛代之闕典歟? 乞命大臣更加商確, 以定一代之制, 以爲萬世子孫之則, 幸甚。
一, 法前代。 蓋 唐 、 虞 三代之治, 固萬世帝王之所龜鑑也。 然 漢 、 唐 、 宋 、 金 , 亦皆無可法者乎? 但世運有淳漓耳。 若取法漢 文 , 則養民之政至矣, 漢 高 ㆍ 光 、 唐 太宗 拔亂濟世之功, 何可少哉? 宋 太祖 規模氣象光明正大, 朱子 以謂, ‘與 堯 、 舜 合’, 金 世宗 大定 之治, 前史亦稱之。 願殿下上法 唐 、 虞 三代, 兼取 漢 、 唐 、 宋 、 金 之政幸甚。 且東方之人, 徒知有 中國 之盛, 而不知考東方之事, 甚爲不可, 乞以前朝 太祖 之救民、 成宗 之定制、 顯宗 之守成、 文宗 之養民爲法, 又以 毅宗 之喜詩酒、 忠烈 之好鷹犬、 忠惠 之嗜宴遊、 恭愍 之用 辛旽 爲戒。 然求之於前代, 不若求之於祖宗, 願以 太祖 之勇智、 太宗 之英明、 世宗 之制禮作樂撫養生民, 文宗 之專心文敎, 不忘武備爲法, 則不必遠求於他, 而爲治之道, 盡在於此矣。 一, 知大體。 蓋欲知爲國之道, 當知人君之職代天理民也, 用賢以養民也。 願殿下於廣廈細氈之上, 常加聖慮, 當今諸曹、百官何事爲急, 八道之弊何者爲甚。 於是 平安道 , 議流移蘇復之策, 定節制置司之地, 咸吉道 慮六鎭偏重之害, 思 龍城 置營之便, 黃海 疾疫若何以可救, 江原 講武場何者可除, 京畿 之民賦何以不煩, 而役何以不重也? 又下三道審貢法之行, 除代納之弊, 忠淸 以南尤嚴漏戶之禁, 慶尙道 愼待 倭 之道, 全羅道 擇 濟州 之守。 如是則外方之弊, 大者皆擧矣。 於是內而吏曹定官制, 戶曹定田制定貢賦, 禮曹定儀注, 兵曹定兵制審陣法, 刑曹定奴婢番上之法, 工曹定輿地圖籍之事。 以之謀議則委政府, 出納則委政院, 諫爭彈劾則委臺諫, 論思則委講官, 任事則委六曹, 至於侵漁外吏, 則罪倉庫吏, 其外方軍民, 令監司、守令、大小水陸將(師)〔帥〕爲之鍊養, 則內外百官之職, 亦無不盡矣。 於是思 周 家之得民, 立 漢 家之制度, 法前(伐)〔代〕之治, 撮爲國之要, 慮事未然, 謹終于始, 以安靜爲治, 以剛明爲政, 不變國俗, 以禮事大, 接臣僚有法, 待文武如一, 則人君代天理民之道, 斷斷無遺矣。
一, 慮微。 蓋天下之事, 莫不自微而始, 以至於大故。 愚闇之人, 忽之以亡, 奏 之亡以刑戮, 前 漢 之亡以外戚, 後 漢 之亡以宦官武將, 魏 之亡以宗室弱, 晋 之亡以 羌胡 處置失宜, 梁 之亡以崇佛以納 侯景 , 隋 之亡以宴遊以伐 高句麗 , 唐 之亡以內寵 楊貴妃 始禍, 而 藩鎭 、宦官迭爲煽亂, 後 唐 之亡以倡優, 後 晋 之亡以 契丹 , 後 周 之亡以主少, 宋 之亡以 王安石 , 王安石 新法立而數世之間, 君子、小人如仇讎矣。 南 宋 之亡, 以與 元 夾攻 金 人爲失策也, 遼 之亡以鷹犬, 金 之亡, 以棄根本之地而南下也, 元 則夷主 中國 , 政令無紀, 天下大亂, 無足道矣。 吾東方 新羅 之亡, 以女主荒淫, 百濟 之亡, 以驟勝驕敵也, 高句麗 之亡, 以恃强窮兵也。 前朝則初以武臣搆怨而竊柄, 中則嬖倖恃勢而害政, 終則權姦用事而虐民, 至於 倭寇 四侵民不聊生, 則國不可爲矣。 恭惟我本朝祖功宗德, 無讓前朝, 而家法之正, 則遠過焉。 但前朝兵制之盛, 雖今日或未易擬也。 伏望殿下, 爲天地立心, 爲生民立極, 一言一動不違於天, 一政一事務合乎理, 圖難于易, 爲大於細, 則宗祧幸甚, 生民幸甚。
一, 謹始。 蓋人君卽位之初, 百官之所瞻仰, 萬民之所倚望, 隣國之所聽聞, 而子孫萬世之基, 正在於此, 而人主操駕馭之權, 以奔走一世之人, 故干進之人, 或以邊功, 或以土木, 或以佛神, 或以詞章, 或聲色、貨利, 或鷹犬、麴糱, 乘間投隙, 雜然而進, 人主不悟一事之中, 則始之不謹, 終不可言矣。 且 孟子 云, “爲政不難, 不得罪於巨室。” 人主聽諫, 則士大夫之心翕然矣, 不然則反是矣。
一, 尙安靜。 蓋持盈守成之君, 在謹守成規而已。 如有可救之弊, 則漸改之使如前規而已。 故治民如烹鮮, 能勿擾之足矣。 民心一搖, 則邦本危矣, 宋 之新法是已。 然則弊法, 固不可不更張, 而人君所尙者安靜而已。 漢 史云, “載其淸靜, 民乃寧謐。” 此之謂也。
一, 重剛明。 蓋人君之德, 莫大於仁, 仁厚則與剛明似相反也, 非剛明, 則內謁盛行, 中貴驕橫, 小竪專恣。 戚里恃恩, 權臣竊柄, 詞臣取寵, 姦臣、佞臣左右逢迎, 而讒諛得志, 則雖有仁厚之政, 不得如其志矣, 此人君之德, 所當剛明者也。
一, 儀從本俗。 蓋臣聞, 西夏 以不變國俗維持數百年, 元昊 英雄也。 其言曰, “錦衣玉食, 非蕃性所便”, 金世宗 亦每念上京風俗, 終身不忘。 遼 有南、北府, 元 有 蒙 、 漢 官, 而 元人 則以根本爲重, 故雖失 中原 , 沙漠以北如古也。 吾東方世居 遼水 之東, 號爲萬里之國。 三面阻海, 一面負山, 區域自分, 風氣亦殊。 檀君 以來設官置州, 自爲聲敎, 前朝 太祖 作信書敎國人, 衣冠、言語悉遵本俗。 若衣冠、言語, 與 中國 不異, 則民心無定, 如 齊 適 魯 。 前朝之於 蒙古 , 不逞之徒相繼投化, 於國家甚爲未便。 乞衣冠則朝服外, 不必盡從華制, 言語則通事外, 不必欲變舊俗, 雖燃燈、擲石, 亦從古俗無不可也。
一, 事大以禮。 蓋以小事大, 禮之常也, 自古皆然。 我國家實東方荒服之地也。 邈處日出之濱, 且有山谿之險, 隋 、 唐 之盛, 猶不得臣, 遼 用隣國之禮, 金 稱父母之邦, 宋 以賓禮, 元 通婚媾。 然 元 則用兵數十年, 卒以臣服, 雖稱甥舅, 東海之事, 與昔日不同矣。 我 高皇帝 卽位欲加兵, 則天下初定, 不之加則無以示威, 拘行人以辱之, 增歲幣以困之, 後至戊辰, 天威始霽, 而蕃國之封定, 蕃國之勢, 與畿內之勢異, 事大之禮, 不可不盡, 而又不可以數也。 前朝則稱宗改元矣, 在今日小小節次, 不必拘例, 但盡其誠意而已。 今後例恩附表以謝, 勿煩使命, 以休平安之民, 以存事大之體幸甚。
一, 待臣僚有法。 蓋人君貴, 無與敵也。 然待下當以禮。 敢諫者, 不可曰干名也, 勤幹者, 不可曰爲祿也。 雖有干名爲祿之人, 當取其敢諫勤幹而已。 至於死喪之際, 施之以恩, 刑獄之間, 待之以禮。 國家以如此忠厚之俗待士而成風, 則百世士大夫亦皆以忠厚報其上矣。
一, 待文武如一。 蓋自古文武之間, 猜嫌易起。 文吏有勢而淸要, 武班勤苦而無權, 萬一人主偏信詞臣, 而言語禮貌之間待之或異, 則前朝庚癸之事, 誠可慮也。 毅宗 以後至于 忠烈 , 武臣執柄, 芟夷朝廷, 幾盡以文武交構故也。 今政府、政院以至臺諫, 皆以文武交差, 其慮亦周矣。 然兵曹鎭撫所使令、令史之待別侍衛甲士, 甚爲苛薄, 至於侍衛牌, 則視之如奴隷焉。 臣觀殿下之待文武, 可謂如一。 乞自今昇平百年, 毋忘今日, 則宗社幸甚, 臣民幸甚。 臣竊惟 司馬光 以爲, “人君處心之要有三, 曰仁、明、武, 治國之要亦有三, 曰任人、聽諫、賞罰”, 以此爲疏, 獻于四朝, 臣亦以此六事反覆參詳, 於壬申冬獻于上王。 今其藁在政院, 伏望殿下命寫一通, 特賜睿覽, 不勝幸甚。
上命取壬申年疏及罷行城疏以觀, 謂 誠之 曰: “汝之兩疏, 皆甚切也。”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양성지(梁誠之) 가 상소하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 그 문무(文武)의 비상하신 자질로써 새로 보위(寶位)에 오르시어 공경히 종묘(宗廟)에 알현하시니, 이는 정히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림을 도모하여 서정(庶政)을 일신하게 하실 때입니다. 신이 비졸(鄙拙)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선 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우러러 성총(聖聰)에 번독하는 바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예감(睿鑑)으로 굽어 살피소서.
1. 민심을 얻는 것입니다. 대개 인주가 나라를 누리는 데 있어 그 장단이 바로 민심을 어느 정도 얻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일어날 때면 반드시 폐해를 제거하고 인민을 구제하는 정신으로 앞에서 창업해 놓으면 이를 계승하는 임금이 다시 그 인민을 능히 사랑해 길러 그 은택이 인심 속에 흡족히 배어 있으므로 비록 쇠잔한 세대에 이르러도 선왕의 덕을 생각하여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이 경사(經史)를 가지고 상고컨대, 주(周)나라 의 문왕(文王) 이 비로소 왕업을 열어 놓으니, 무왕(武王) 이 이어서 능히 그 공훈을 이루었고, 성왕(成王) · 강왕(康王) 이 서로 이어가며 백성을 무육(撫育)하였기 때문에, 인심이 굳게 뭉쳐 8백 년에 이르도록 잊지 않았고, 한(漢)나라 의 고제(高帝) 가 진(秦)나라 와 항우(項羽) 의 포학(暴虐)을 제거하고 천하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혜제(惠帝) · 문제(文帝) · 경제(景帝) 가 서로 이어가며 인민을 편안하게 휴식시키고 그 정치가 백성을 기르는 데 있었으며, 광무(光武) 가 다시 중흥하였고 명제(明帝) 또한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정치의 기본을 삼았기 때문에 그의 역년(曆年)이 4백 년에 이르렀으며, 당(唐)나라 의 태종(太宗) 이 고조(高祖) 를 도와 수(隋)나라 의 난(亂)을 평정하고 몸소 태평 세월을 이룩하였고, 현종(玄宗) 에 이르러서도 개원(開元) 의 치(治)162) 가 역시 백성을 사랑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역년(曆年)이 거의 3백 년에 이르렀으며, 송(宋)나라 의 태조(太祖) 는 상성(上聖)의 자질로써 오계(五季)의 난(亂)163) 을 평정하였고 사종(四宗)164) 이 번갈아 일어나서 백 년간 무사하였다가 고종(高宗) 이 강남으로 건너갔으나 〈남송(南宋)〉 효종(孝宗) 도 역시 백성을 사랑하는 인주였습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3백 년간 비록 민(閩) · 광(廣) 165) 지방에 힘을 못펴고 지냈지만 민심은 하루같이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송(宋)나라의 원가(元嘉) 166)와 수(隋)나라의 문제(文帝)와 주(周)나라의 세종(世宗) 과 금(金)나라의 대정(大定) 167)에 이르러서는 소강(小康)168)을 이루었다고 이를 수 있으나, 혹은 창업한 뒤에 쌓아 나가는 공이 없었고, 혹은 대를 이어 수성(守成)에 힘쓰는 군주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장구한 역년(曆年)을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주(周)나라 의 인후(仁厚)함과 한(漢)나라의 관인(寬仁)함과 당(唐)나라의 인의(仁義)와 송(宋)나라의 충후(忠厚)와 더불어 같은 날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東方)으로 말하면 전조(前朝)169) 의 태조(太祖) 가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그 공덕(功德)이 사람들 머리 속에 남아 있었고, 그 뒤에 성종(成宗)·목종(穆宗)·현종(縣宗)·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선종(宣宗)·숙종(肅宗)·예종(睿宗)·인종(仁宗)의 10대에 걸쳐 모두가 백성을 기르는데 힘썼기 때문에 그 역년(曆年)이 5백년을 드리우게 된 것입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신성(神聖)하신 자질로써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셨고, 태종(太宗)·세종(世宗)·문종(文宗)께서 서로 대를 이어 일어나셔서 도(道)가 몸에 배시고 정사를 잘 다스리시어 인민이 편안하고 물자가 풍성하게 되었으므로 그 역년(曆年)의 장구할 것을 실로 쉽게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도 또한 하늘이 군왕을 세워 백성을 사랑하게 한 마음과, 전대(前代)에서 민심을 얻어 긴 역년(曆年)을 누리게 된 효험을 가지고 반복해 생각하시고 순전히 생민의 산업을 기르고 민간의 숨은 고통을 구휼(救恤)하는 것을 일삼아 하신다면 본조의 성업이 곧장 단군(檀君)·기자(箕子) 와 삼국(三國), 그리고 전조(前朝)와 더불어함께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 백성을 사랑하는 길이란 다름 아닌,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적게 하며 형벌을 덜어 주는 세 가지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1. 제도(制度)를 정하는 것입니다. 대개 백성을 휴양해 생식(生息)하도록 하는 것은 본시 인군의 선무(先務)이나,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 것도 또한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며, 법을 세우는 것은 세상을 규제하는 한 방법으로서 본시 이것은 거행하고 저것은 벌릴 수도 없는 것이어서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법제를 고정하지 않으면 한때의 전장(典章)을 수시로 세우고 고치게 되어 후세 자손들이 실로 빙고(憑考)하여 의지할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주(周)나라의 성왕(成王)·강왕(康王)이 예악(禮樂)을 제작하였고, 한(漢)나라의 무제(武帝)는 한가(漢家)의 법도를 세웠으며, 당(唐)나라 에서는 정관(貞觀)·개원(開元) 연간에 다같이 제도를 만들어서 모두 한 조대(朝代)의 체제를 유지해 왔으나, 다만 송(宋)나라 의 신법(新法)의 제도가 너무 번거로 와서 또한 화(禍)의 터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법은 세우지 않을 수도 없으면서 또한 급작스럽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동방에서는 전조(前朝)때 토지 제도의 전시과(田柴科)와 군사 제도의 부위제(府衛制)의 제도가 지극히 정밀하고 상세하여 잘 정제(整齊)되었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전제(田制)가 문란해져서 사전(私田)으로 되면서 겸병(兼倂)과 양탈(攘奪)이 자행되어 산과 내로써 토지의 경계로 삼았으며, 병제(兵制)는 폐하여져서 사병(私兵)이 되었으므로 몽고(蒙古) 와 왜구(倭寇) 가 번갈아 침입해 와도 방어할 만한 군사가 없었습니다.
본조(本朝)에 와서는 태조(太祖)·세종(世宗)때《원전(原典)》과《속전(續典)》이 있었고 또 《등록(謄錄)》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좋은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제(田制)와 의주(儀註)가 아직 일정한 법제를 이루지 못하였고, 병제(兵制)와 공법(貢法)도 임시로 적당하게 한 법이 많았으니, 어찌 성대(盛代)의 불충분한 전장(典章)이 아니겠습니까? 빌건대 대신(大臣)에게 명하시어 이에 다시 검토(檢討)를 더하여 한 조대(朝代)의 제도를 정하시어 자손만대의 법칙으로 삼게 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전대(前代)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저 당(唐)·우(虞) 와 삼대(三代)176)의 정치는 본시 만대 제왕의 귀감(龜鑑)이 되는 바입니다. 그러나 한(漢)·당(唐)·송(宋)·금(金)이라 할지라도 또한 어찌 모두 본받을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다만 세상의 운수가 후하고 박함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 한(漢)나라의 문제(文帝)를 본받는다면 백성을 기르는 정치가 지극할 것이며, 한(漢)나라 의 고제(高帝)·광무제(光武帝)와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난(亂)을 뿌리뽑고 세상을 건진 공을 어찌 적다 할 수 있겠습니까?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규모(規模)와 기상(氣象)의 광명정대함을 주자(朱子)는 이르기를 요(堯)·순(舜)과 합치한다.고 하였으며, 금(金)나라 세종(世宗)의 대정(大定) 연간의 정치는 전대사(前代史)에서도 이를 칭송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당(唐)·우(虞)와 삼대(三代)를 본받으시고 겸하여 한(漢)·당(唐)·송(宋)·금(金)의 정치를 취하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또 우리 동방사람들이 다만 중국의 부성(富盛)함만을 알고 동방의 일들을 상고할 줄 모르는 것은 몹시 불가한 일이니, 빌건대 전조(前朝)의 태조(太祖)가 백성을 구제한 것, 성종(成宗) 이 제도를 정비한 것, 현종(顯宗)이 수성(守成)한 것, 문종(文宗)이 양민(養民)한 것을 모범(模範)으로 삼고, 또 의종(毅宗)이 시주(詩酒)를 좋아한 것, 충렬왕(忠烈王)이 응견(鷹犬)을 좋아한 것, 충혜왕(忠惠王)이 연유(宴遊)를 즐긴 것, 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을 서용한 일들로 경계를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전대 역사에서 구하는 것이 오히려 조종(祖宗)에서 구함만 같지 못하니, 원컨대 태조(太祖)의 용지(勇智)와, 태종(太宗)의 영명(英明)과, 세종(世宗)의 예악(禮樂)의 제작 및 생민(生民)의 무양(撫養)과, 문종(文宗)이 문교(文敎)에 전념하시면서도 무비(武備)를 잊지 않으신 일들을 모범으로 삼으시면 반드시 멀리 다른데서 구하지 않으셔도 그 다스리는 방법이 다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1. 대체(大體)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인주의 직책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며 어진 이를 서용하여 백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넓은 집과 고운 방석 위에 계실지라도 항상 성려(聖慮)를 더하셔서 현재 여러 관서의 백관(百官)은 무슨 일이 급하며 팔도(八道)의 폐단은 어느 것이 심한가를 살피소서. 이리하여 평안도(平安道)는 유리(流離)하여 옮긴 인민들을 소생 회복케 할 대책을 의논하여 절제사(節制使)를 정하고 관사(官司)를 설치할 지역을 정할 것이며, 함길도(咸吉道)는 육진(六鎭)의 편중이 가져오는 폐해를 고려하여 용성(龍城)에 영(營)을 설치하여서 편리함을 생각할 것이며, 황해도(黃海道) 의 역질(疫疾)은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 있고, 강원도(江原道)의 강무장(講武場)은 어느 것을 없앨 수가 있으며, 경기(京畿) 백성들의 부세(賦稅)는 어떻게 하면 번거롭지 않게 하고, 어떻게 하면 요역(徭役)이 무겁지 않게 하겠습니까? 또 하삼도(下三道)는 공법(貢法)의 시행을 살펴 대납(代納)하는 폐단을 제거해야 할 것이며, 충청도(忠淸道) 이남은 누호(漏戶)의 금령(禁令)을 더욱 엄하게 하고, 경상도(慶尙道)는 왜인(倭人)을 지대(支待)하는 방법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 전라도(全羅道)는 제주(濟州)의 수령을 잘 택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외방(外方)의 폐단으로서 큰 것은 모두 열거(列擧)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안으로 이조(吏曹)에서는 관제(官制)를 정하고, 호조(戶曹)에서는 전제(田制)와 공부(貢賦)를 정하며, 예조(禮曹)에서는 의주(儀注)를 정하며, 병조(兵曹)에서는 병제(兵制)를 정하고 진법(陣法)을 심의할 것이며, 형조(刑曹)에서는 노비(奴婢)의 번상(番上)하는 법을 정하고, 공조(工曹)에서는 국토의 지도(地圖)와 지적(地籍)을 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모의(謀議)는 의정부(議政府)에 위임하고, 출납(出納)은 승정원(承政院)에 위임하고, 간쟁(諫爭)과 탄핵(彈劾)은 대간(臺諫)에게 위임하고, 논사(論思)는 강관(講官)에게 위임하고, 직사(職事)를 맡기는 일은 육조(六曹)에 위임할 것이며, 인민을 침해 수탈한 외리(外吏)에 이르러서는 창고리(倉庫吏)를 죄주고, 외방의 군민(軍民)은 감사(監司)와 수령(守令)과 대소의 수륙 장수(水陸將帥)로 하여금 이를 단련해서 기르게 하면 내외 백관의 직무가 또한 다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에 주(周)나라 에서 민심을 얻은 소이연(所以然)을 생각하고, 한(漢)나라와 같은 제도를 세우며, 전대의 정치를 본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을 채용하여 일은 미연에 생각하고, 시종 근신하면서 안정(安靜)을 다스림의 바탕으로 삼고, 강명(剛明)을 행정의 자세로 삼으며, 국속(國俗)을 변경하지 않고, 예로써 중국을 섬기며, 신료(臣僚)를 대접하기를 법도 있게 하고, 문무(文武)를 대하기를 하나 같이 하시면, 인군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에 결단코 유실함이 없을 것입니다.
1. 작은 일에 배려를 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천하의 일은 미세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큰 변고(變故)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는데, 어리석고 어두운 사람은 이를 소홀하게 여겼다가 결국 망하였으니, 진(秦)나라는 형벌로 망하였고, 전한(前漢)은 외척(外戚)으로 망하였고, 후한(後漢)은 환관(宦官)과 무장(武將)으로 망하였고, 위(魏)나라는 종실(宗室)이 약하여 망하였고, 진(晉)나라는 강호(羌胡)의 처치를 잘못하여 망하였고, 양(梁)나라는 불교를 숭상하고 후경(侯景)을 받아들여서 망하였고, 수(隋)나라는 연유(宴遊)와 고구려(高句麗)의 정벌로 망하였고, 당(唐)나라는 안으로 양귀비(楊貴妃)를 총애한 것이 화(禍)의 시초가 되어 번진(藩鎭)과 환관(宦官)이 번갈아 난역(亂逆)을 선동해서 망하였고, 후당(後唐)은 창우(倡優)로 망하였고, 송(宋)나라는 왕안석(王安石)때문에 망하였는데, 왕안석이 신법(新法)을 세우고 나서 수대(數代) 사이에 군자와 소인이 원수같이 되었습니다. 남송(南宋)이 망한 것은 원(元)과 더불어 금(金)나라 사람을 협공한 것이 실책이었고, 요(遼)나라는 응견(鷹犬)으로 망하였고, 금(金)나라는 근본이 되는 땅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망하였고, 원(元)나라는 오랑캐로서 중국에 들어가 주인이 되니 정령(政令)에 기강(紀綱)이 없어 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으니, 이는 족히 따를 만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 동방의 신라(新羅)가 망한 것은 여왕의 황음(荒淫) 때문이었고, 백제(百濟)가 망한 것은 갑작스런 승리로 적을 멸시한 때문이었으며, 고구려(高句麗)가 망한 것은 강한 것만 믿다가 병력이 궁진한 때문이었습니다. 전조(前朝)는 처음에는 무신(武臣)의 원한을 사게 되어 대권(大權)을 절취 당하였고, 중간에는 고임 받는 무리가 그 세력을 믿고 정사를 해쳤으며, 마침내에는 권세 잡은 간신들이 정권을 쥐고 백성을 침해하였는데, 왜구(倭寇)가 네 차례나 침입하여 인민이 생활에 안정하여 살 수가 없게 되어서는 나라를 유지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본조(本朝)는 조종(祖宗)의 공과 덕이 전조에 양보할 것이 없고 가법(家法)의 정대함은 훨씬 앞서고 있으나, 다만 전조 병제(兵制)의 훌륭한 점은 비록 오늘에 와서도 아직 쉽게 견줄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시고, 생민을 위하여 극진하게 하시어 일언일동(一言一動)이 하늘의 뜻에 어긋남이 없고, 일정일사(一政一事)에도 사리에 합당하도록 힘쓰시어 쉬운 것도 어렵게 도모하시고, 미세한 것에서 큰 것을 이루시면, 종사와 생민을 위하여 크게 다행하겠습니다.
1. 그 시초에 근신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인군이 즉위한 처음에는 백관이 우러러 보고 만민이 의지해 기대하며, 인국(隣國)도 주의 깊게 듣고 보는바 되어, 자손만대의 터전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인주가 신하를 지휘하는 권세를 조종하면 한 세상 사람을 분주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에 사진(仕進)을 구하는 사람들이 혹은 변방에서의 공로를 가지고, 혹은 토목(土木)의 역사를 가지고, 혹은 불·신(佛神)의 일을 가지고, 혹은 사장(詞章)을 가지고, 혹은 성색(聲色)또는 화리(貨利), 혹은 응견(鷹犬)과 국얼(麴糱)을 가지고 틈을 타고 그 틈에 뛰어들어서 분잡하게 나오기 때문에, 인주가 어느 한 가지 일에 빠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시초에 삼가지 않았으므로 그 종말은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맹자(孟子) 는 말하기를, ‘정치하기는 어렵지 않으니, 먼저 그 나라 거실(居室)에게 원망을 사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인주가 간(諫)하는 것을 따르면 사대부(士大夫)의 마음이 흡연(翕然)히 합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와 반대가 될 것입니다.
1. 안정(安靜)을 숭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대개 조심스럽게 수성(守成)해 나가는 인군은 근신하여 이미 이루어진 규모를 지켜 나갈 따름입니다. 만일 구제해야 할 폐단이 있으면 점차 이를 개정하여 전의 법규와 같게 할 뿐입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생선(生鮮)을 삶는 것과 같다고 옛사람은 말하였습니다. 능히 소요스럽지만 않게 하면 족한 것입니다. 민심이 한번 흔들리게 되면 그 나라의 근본이 위태롭게 되는 것이니, 송(宋)나라 의 신법(新法)이 곧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폐스러운 법은 본래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군이 숭상할 것은 안정(安靜)뿐입니다. 한사(漢史)에 이르기를, ‘청정(淸靜)을 이루니 백성이 드디어 안정하게 되었다.’고 함은 이를 말한 것입니다.
1. 강명(剛明)을 중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인군의 덕은 인(仁)보다 큰 것이 없는데, 인후(仁厚)한 것은 강명한 것과 상반(相反)되는 것 같기도 하나, 강명하지 않으면 내알(內謁)이 성행(盛行)하게 되며, 따라서 중귀(中貴)가 교만하여 전횡(專橫)하게 마련이고, 그 아래 조그마한 액예(掖隷)까지도 방자하게 됩니다. 척리(戚里)는 은총만 믿으며, 권신(權臣)은 대권(大權)을 절취하게 되고, 사신(詞臣)은 총애만을 취하며, 간신(姦臣)·영신(侫臣)을 좌우로 맞아 아첨하는 무리들이 그 뜻을 얻게 되면 비록 인후한 정치를 행함이 있어도, 그 뜻과 같이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인군의 덕이 마땅히 강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예법(禮法)은 본국의 풍속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신은 듣건대 서하(西夏) 는 그 나라의 예속(禮俗)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 백 년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원호(元昊) 는 본시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금의(錦衣)와 옥식(玉食)은 번국(蕃國) 사람 체질에 편리한 것이 아니다’ 하였고, 금(金)나라 의 세종(世宗)도 또한 매양 상경(上京)의 풍속을 생각하며 종신토록 잊지 않았습니다. 요(遼)나라 에서는 남부(南府)·북부(北府)가 있었고, 원(元)나라 에서는 몽관(蒙官)·한관(漢官)이 있었는데, 원나라 사람은 그 근본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비록 중원(中原) 을 잃었어도 사막(沙漠)이북의 본토는 옛과 같았습니다.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遼水)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렀습니다. 삼면(三面)이 바다로 막혀 있고, 일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그 구역(區域)이 자연적으로 나뉘어져 있고, 풍토(風土)와 기후(氣候)도 역시 달라서 단군(檀君) 이래 관아(官衙)와 주군(州郡)을 설치하고 독자적인 성위(聲威)와 교화(敎化)를 펴 왔으며, 전조(前朝)의 태조(太祖) 는 신서(信書)를 지어 국민을 가르쳤는데, 의관(衣冠)과 언어(言語)는 모두 본국의 풍속을 준수하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의관과 언어가 중국과 더불어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정착되지 않아서 마치 제(齊)나라 사람이 노(魯)나라에 간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전조 때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서로 잇달아서 몽고(蒙古)로 투화(投化)한 것은 한 국가로서는 매우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바라건대 의관은 조복(朝服) 이외에 반드시 다 중국 제도를 따를 필요는 없고, 언어는 통사(通事)이외에 반드시 옛 습속을 변경하려 할 것이 아니며, 비록 연등(燃燈)·척석(擲石)이라 할지라도 역시 옛 습속을 좇아도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1. 사대(事大)하기를 예(禮)로써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법의 상도(常道)로서, 예로부터 다 그러했습니다. 우리 국가는 실로 동방에 위치한 황복(荒服)의 땅입니다. 멀리 해뜨는 해변에 위치해 있고 또 산과 계곡의 천험(天險)의 지리(地利)를 가지고 있어서 수(隋)·당(唐)의 창성(昌盛)함으로도 오히려 신하로 삼지 못하였으며, 요(遼)나라 는 인국(隣國)의 예로 대하였고, 금(金)나라 는 부모의 나라로 일컬었으며, 송(宋)나라 는 빈례(賓禮)로 대하였고, 원(元)나라 는 혼인을 서로 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원(元)나라 는 전쟁을 일으킨지 수십 년에 마침내 신하로 복속케 하였고 비록 생구(甥舅)로 일컬었으나, 동국(東國)의 모든 일은 옛날과 아주 달라졌던 것입니다.
우리 고황제(高皇帝)께서 즉위하시고 군병을 일으키려 하자 천하가 비로소 평정하여졌으니, 이 군병을 일으키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것이 없어 행인(行人)을 구속하여 욕을 보이기도 하고, 세폐(歲幣)를 늘려 곤란을 주기도 하다가 그 뒤 무진년에 이르러 황제의 위엄과 노여움이 비로소 그쳤고, 번국(蕃國)으로 봉(封)하는 일도 정하여졌던 것인데, 번국의 사세는 기내(畿內)의 사세와 다르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법을 다하지 않을 수도 없고, 또한 자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전조에서는 종(宗)이라 일컫고 개원(改元)하였는데, 오늘에 있어서 소소한 절차를 반드시 전례에 구애받을 것은 없고 다만 그 성의를 다할 따름입니다. 이제부터는 상례의 은공(恩貢)에 표문(表文)을 붙여 치사하고 사명(使命)을 번거롭게 하지 말며, 평안한 백성을 좀 휴식케 하시면서 사대(事大)의 체통을 유지하게 하시면 다행하겠습니다.
1. 신료(臣僚)를 대접함에 있어 법도(法度)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인군은 그 존귀함이 아무도 더불어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마땅히 예로써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감히 간(諫)하는 자를 명예를 구하는 행위라고 이르지 못하며, 부지런하고 재간(才幹) 있는 자를 녹봉 받기 위한 행위라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명예를 구하고 녹봉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마땅히 용감하게 간한 것과 재간과 근면한 그것을 취할 뿐입니다. 나아가서 사상(死喪)에 즈음하여는 은혜를 베풀고, 형옥(刑獄)에 계류된 사람이라도 예로써 대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에서 이와 같이 충후(忠厚)한 풍속으로 선비를 대접하여 하나의 풍속을 이루게 되면, 백대를 내려가도 그 사대부가 역시 충후한 마음으로 윗사람에게 보답할 것입니다.
1. 문·무(文武)를 하나같이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예로부터 문무 사이에는 시기(猜忌)와 혐오(嫌惡)가 일어나기 쉽습니다. 문리(文吏)는 세력도 있고 청요(淸要)의 직위를 가지는데, 무반(武班)은 근로하면서도 권세가 없어, 만일 인주가 편파적으로 문신을 믿고 언어(言語)와 예모(禮貌)에 있어 그들을 대하는 것이 혹 다르게 되면, 전조 때 경계(庚癸)의 사건206) 이 실로 염려됩니다. 의종(毅宗) 이후 충렬왕(忠烈王) 에 이르기까지 무신이 권병(權柄)을 잡고는 온 조정을 죽여 없애버린 것이 거의 다 문무 사이에 서로 얽힌 혐오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의정부와 승정원(承政院)을 비롯하여 대간(臺諫)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무로 교체해 가며 임명하고 있어, 그 배려 또한 주도(周到)합니다. 그러나 병조(兵曹)와 진무소(鎭撫所)의 사령(使令)·영사(令史)들이 별시위 갑사(別侍衛甲士)를 대하는 것이 몹시 까다롭고 박하며, 시위패(侍衛牌)에 이르러서는 마치 노예(奴隷)처럼 보곤 합니다.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 문무를 대하심이 하나같다고 이를 만합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 백 년을 승평(昇平)하더라도 오늘의 일들을 잊지 않으시면 종사(宗社)와 신민을 위하여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마광(司馬光)이 이르기를, ‘인군이 마음을 가지는 데 가장 긴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어질고 밝고 용감한 것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긴요한 것이 또한 세 가지가 있으니, 사람을 가려서 맡기고, 간(諫)하는 것을 따르며, 상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고 하여 이로써 소(疏)를 지어 4조(四朝)에 바쳤는데, 신도 역시 이 여섯 가지 일을 가지고 반복 참작하여 임신년207) 겨울에 상왕(上王)께 바쳤습니다. 이제 그 고본(藁本)208) 이 승정원에 있을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명하여 그 1통(通)을 베껴서 올리도록 하시고 특히 예람(睿覽)하여 주시면 이에서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임신년에 올린 소(疏)와 행성(行城)을 파하자는 소를 가져다 보고, 양성지(梁誠之) 에게 이르기를,
“너의 두 가지 소(疏)는 모두가 매우 긴절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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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3日(己亥) 2번째기사
대군이 후퇴하여 시일을 끌면 군량이 부족할 것이므로 대책을 세우게 하다
○政院啓曰: “我國存亡、天下安危, 在此一擧, 而不意大軍, 旣已退住。 若過旬日之後, 則以 慶尙 一道所聚之穀, 萬無接濟之理。 說令退住京城, 見存米豆, 尤無可支之路。 朝廷講究, 雖曰靡有遺策, 而若許備邊諸臣, 一刻登對, 則豈無稟講定完之事乎? 臣等旣忝近密, 心有所懷, 未敢含默, 敢稟。” 上曰: “意則然矣。”
【史臣曰: “ 皋陶 、 稷 、 契 之賢, 不及於 堯 、 舜 , 而 堯 、 舜 之疇咨不已; 蕭 、 張 、 信 、 越 之智, 不及於 高祖 , 而 高祖 之聽用如流, 是非故自菲薄, 而(亨)〔享〕好問之名, 蓋中心慊然, 猶恐一善一策之或伏, 而不爲吾德業之補。 不如是, 則豈但德不就而業不成而已? 禍敗之來, 有不可勝言故也。 今者南夷之據境上, 已七年于玆矣。 幸賴天朝之兵, 來救萬里之國, 國之存亡, 在此一擧。 而千鈞之發, 反爲鼷鼠之誤, 則 楚 卒食盡, 東歸可憂; 諸葛 糧絶, 勢必班師。 當此之時, 規畫之策, 靡遠不逮, 無微不擧, 猶慮善謀之難得, 而政院之請, 只曰備邊之登對, 則亦云狹而已矣。 未聞一宰之召對, 一相之來予, 只敎以意則然矣, 則未知穀已竭矣, 事己蹙矣, 更無可爲之勢而然耶? 古之人, 以誠求之, 則雪闖而瓜生, 氷裂而鯉躍。 況穀者, 在於人而非神運鬼 輸之物耶? 誠能激宗社灰燼之憤, 起陵寢抔土之悲, 推誠於一使之發, 布誠於吾民之心, 則往往富民邑連其居者, 感激之餘, 不知所惜, 壹戶而聚至於一邑, 一邑而聚至於八道, 則十萬軍半歲之糧, 不費力而易致矣。 噫! 計不出此, 而遺本趨末, 故求之不以誠, 而應之不以實, 科條雖密而得穀愈鮮。 此無他, 獻言之路不廣, 而用言之道至狹故也。 當時之人, 無一人出而救之者, 吁可惜也!”】
정원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존망과 천하의 안위가 이번 일에 달려 있는데, 뜻하지 않게도 대군(大軍)이 후퇴하여 주둔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대로 열흘이 지난다면 경상도 에서 모은 곡식으로는 그들을 접제(接濟)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가령 서울로 물러나 주둔한다 하더라도 현재 있는 쌀과 콩으로는 더욱 지탱할 길이 없습니다. 조정에서 대책을 강구한 것이 빠짐없이 하였다고는 하지만 비변사의 제신들을 일시에 조정에 모이도록 한다면, 어찌 강구책을 세우지 못하겠습니까. 신들이 이미 근밀한 자리에 있으므로 소회를 지닌 채 침묵하고 있을 수가 없어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견은 그럴 듯하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고요(皐陶)·직(稷)·설(契) 의 현명함이 요순(堯舜)에 미치지 못하는데도 요순은 그들에게 자문(咨問)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소하(蕭何)·장량(張良)·한신(韓信)·팽월(彭越)의 지혜가 고조(高祖) 에게 미치지 못했는데도 고조는 그들의 말을 물흐르듯이 따라 써주었다. 이는 고의로 스스로를 낮추고 묻기를 좋아한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속으로부터 스스로 부족하게 여겨 한 가지 선(善)이나 한 가지 계책이라도 혹 숨겨져 나의 덕업(德業)에 보탬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덕이나 업이 성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앙과 실패가 닥쳐옴이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남쪽 오랑캐가 영토를 점거한 지 이미 7년에 이르렀다. 다행히 중국군이 만리타국(만리지국)을 구원해주는 힘을 입게 되었으니, 나라의 존망이 이번 일에 달린 것이다. 그런데 천균(千鈞)의 화살이 도리어 새앙쥐를 쏘게 되었으니, 이는 초(楚)나라 병졸들이 식량이 다해 동으로 돌아가게 되는 근심이요, 제갈양(諸葛亮) 이 양식이 떨어져 어쩔 수없이 군대를 돌리게 된 형세이다. 이런 때를 달해서 규획(規畫)의 계책에 있어 원대한 데까지 미치지 않는 것이 없고 작은 것이라도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이 하더라도 좋은 계책을 얻기 어려울까 걱정인데, 이제 정원에서 청한 것은 단지 비변사의 관원을 등대(登對)시키라고만 하였으니 역시 소견이 너무 협소하다고 하겠다. 한 명의 재신(宰臣)을 소대(召對)하거나 한 명의 상신(相臣)을 불렀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겠고, 단지 ‘의견은 그럴 듯하다.’는 말로만 전교하였으니, 곡식이 이미 고갈되었고 일이 이미 글러져서 다시 해볼 수 없는 형세라고 여겨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옛사람들은 정성으로 찾으면 눈 속에서 외가 나왔고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가 뛰어 나오기도 했는데, 하물며 곡식이란 사람이 준비하기에 달린 것이요 귀신이 운송하는 물건이 아닌 데이겠는가. 진실로 종사(宗社)가 불에 타버린 분노를 격발시키고 능침(陵寢)의 분묘를 훼손당한 비분을 일으켜, 한 명의 사신을 보낼 적에도 정성을 다하고 백성들의 마음에도 정성을 편다면, 부민(富民)으로서 고을에 잇달아 사는 자들이 감격한 나머지 아까운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한 집에서 모아 한 고을에 이르고 한 고을에서 모아 팔도에 이르면 10만 군사의 반 년 양식은 힘들이지 않고도 쉽게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이런 계책은 쓰지 않은 채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따르기만 하여 성심으로 구하지도 않음으로써 호응도 실답지 않게 된 것은 물론 조목이 세밀할수록 얻는 곡식은 더욱 적게 되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말을 할 수 있는 길이 넓지 못하고 또 말대로 시행하는 길이 협소하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으로 한 사람도 나와서 바로잡는 자가 없었으니, 한심하고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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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53권, 24년(1800 경신 / 청 가경(嘉慶) 5년) 2월 22일(을사) 1번째기사
지평 이경신이 《주자어류》 주해와 의례, 비축물 등에 대해 상소를 올리다
○乙巳/持平 李敬臣 上疏曰:
“伏見昨年傳敎之諄諄 朱夫子 之書者, 臣敬奉圭復, 一唱三歎, 殆無異於聞樂之抃, 聽皷之作者。 以我殿下之聖, 更求 朱子 之道, 聖賢之學, 帝王之治, 今可得行於大海之東矣。 臣嘗見 《大全》 之書, 雖有難解處, 上自先正, 已有箚疑之屬, 益之以後儒之說, 則庶可無疑。 而至於 《語類》 , 則乃其門人子弟之記錄於平日言行者, 反加詳於 《大全》 之書, 欲求 朱子 之道者, 其不可不讀審矣。 但其語錄, 與今通行文字, 稍不相類, 故人皆以其難曉而爲之束閣者多, 而雖或讀之者, 亦不無郢書燕說之弊。 臣願先使廷臣之洞曉者, 爲之註解, 以便讀者之取考, 則豈不有助於國人之誦法 朱子 也。 又記向來鄕飮鄕射儀式綸音之頒下也, 雖在窮谷深山之中者, 莫不扶杖聽詔, 皆有思見德化之願矣。 及其 《鄕禮合編》 之出也, 鄕飮、鄕射篇中註釋, 多所欠明。 此乃任事之臣, 以其難書易之見, 不念易書難之弊, 當東榮之 ‘東榮’, 房戶間之 ‘房戶’, 旣不爲指定其處, 斯禁之 ‘禁’, 弓二寸之 ‘二寸’, 又不能明其所用。 惟彼四方之欲行其禮者, 亦安所考信而有所取衷者哉? 若不能明其義而强欲行之, 則恐不免 朱子 所譏 明州 之乖陋者矣。 臣請更命解經之臣, 詳加証正, 以之頒於外而垂於後, 則其爲四方之儀則, 後聖之法程, 爲如何哉? 謹按 《儀禮》 中, 燕禮及大射禮, 乃三代人君與群臣相與揖讓者也。 朱子 曰: ‘君臣之間, 一於嚴敬, 則情或不通, 而無以盡忠告之益, 故因其飮食聚會, 而制爲燕饗之禮, 以通上下之情, 而致殷勤之厚也。’ 旨哉言乎? 其有得於古聖王制禮之意者盡矣。 乞以此二禮, 必先行之於上, 以爲吾民視準則之地焉。 又竊伏念有國必有蓄。 其所爲蓄者, 乃民之所以爲天, 傳曰, 國無三年之蓄, 國非其國。 今以我國言之, 雖謂之無一年之蓄可也, 此乃不知儲穀之術而然也。 古之儲穀, 必以其窖, 史策所傳, 斑斑可見。 今可掘地爲窖, 陶土成穴, 如今燔瓦之竈, 灌穀其中, 厚埋其上, 雖至十數年, 決無濕潤腐爛之患矣。 古者九年十年之蓄, 皆以是也。 今以一國倉儲, 皆爲窖藏, 不爲斂散, 以除民弊, 而隨其豐歉, 加減其價, 一如 耿壽昌 常平之制, 則年或不登, 民或艱食, 亦當仰指官倉, 以爲生命, 而或南或北, 一糶一糶, 糞土珠玉, 價當倍蓰, 此法之行, 非惟裕國, 亦當濟民也。 我國所出之貨, 爲天下所貴者, 惟銀是也。 而國中侈靡之風, 日盛一日, 刀粧鞍开, 指環䯻釵, 莫不以是爲尙。 諸般壽福之字, 雜瑣斑爛之文, 終歸消毁, 不復爲貨。 以有限之出, 爲無窮之費, 其貨益貴, 其價益高。 故每年燕行之商, 不得充八包之數, 有時彼使之來, 無以應煩費之需。 財力漸屈, 物價漸登, 爲今之計, 莫若禁斷, 國中以銀爲开之物, 雖其已用爲佩者, 亦皆使秤其銖兩, 賣爲行貨。 則國之所儲, 錢不如銀, 民之所用, 銀不如錢, 錢當歸民, 銀當歸國, 國無經費之憂, 民無錢荒之歎。 至於諸般燕貨之不可不用於公私之間者, 其價之不復翔登, 昭如可見矣。 我國貴賤上下之所以爲衣者, 溫則有蠶絹, 涼則有麻布。 而皆不如綿布之不侈不儉, 宜寒宜暑, 如食物之茶飯菽粟, 不可一日之或闕者也。 近以國中白金之踊貴, 乃以是而充代其價, 以爲交易之需於彼國, 故細織一疋直可四兩, 而後乃可充白金一兩之數云。 以吾民可以爲衣之布, 代吾民不可爲食之金, 以輪於境外萬里之國, 國安得不貧, 民安得不寒也? 國家年年費用之多, 惟濬川之役是也。 鑿取溝中之沙, 布置溝外之地, 一遇潦雨, 復流入溝, 勢所必至。 然則溝中溝外, 沙恒循環, 此役何時可已? 此費何時可省也? 臣竊以爲但待夏潦方漲溝渠皆滿之日, 乃以耒耟之牛, 入耕溝中之沙, 則沙自乘流, 不能復止者, 其性卽然, 若用十餘耦一日之力, 則何患積沙之不去, 溝道之不通也。 或以爲沙皆流下, 南入於江, 則鹽倉之塞, 又可慮也, 此又有術。 當作二三碇石, 付以鐵藜, 繫以巨索, 深之江中, 曳以上下, 則碇石所過, 亦如牛耕, 以淺爲深, 以塞爲通, 乃反易於溝中之沙也。 自昔帝王之治, 必以經界爲本者, 蓋觀於 孟子 之告 滕文公 之訓可知也。 後世經界, 雖不如古, 而其爲爲治之本則一也。 故 朱子 於 臨漳 , 乃以此經界, 爲一郡永久利害, 先得善熟於句股開方之數者, 數人相度, 措劃十成八九, 謂可以脫漳民於塗炭之苦矣, 乃爲當世疑貳之言所沮, 而卒罷之。 則其後 湖南 、 廣西 , 再命再辭者, 蓋以解謝千里失業之民之意也。 惟我祖宗之典, 田之改量, 必有年數者, 豈不以 孟子 、 朱子 以經界爲先之意, 爲之法者也? 夫何近者, 恬嬉成俗, 因循爲事, 國中之田, 或有至百餘年不量者。 陵谷變遷, 水陸互換, 或以量外而爲沃土, 或以量內而無田形。 或有閒田, 民不開墾者, 蓋恐虛結之竝侵也, 或耕厚土而不納一錢者, 蓋緣吏奸之刀筆也。 以臣所見聞言之, 邑無量案而結無常總, 任自低昻於年分者, 海西之 兎山 是也, 人以世居而田去結存, 長納其稅而不免者, 湖南之 全州 是也。 舞文之吏, 皆盜漏結, 無告之民, 恒稅白地。 或南或北, 沿縣峽邑, 無處不然。 澤不下究, 冤不上聞, 民生之燋焠, 國用之耗竭者, 職是之由也。 今我殿下, 以 朱子 之書, 講 朱子 之道, 朱子 之所欲行於當時者, 乃可得行於今日矣。 請命有司之臣, 更加詳勉於 《大全》 、 《語類》 之言, 及於經界之事者, 依以行之焉。”
批曰: “公車近聞琅凾, 際見爾章, 開口便說 朱夫子 , 付以利用厚生之方。 仗馬有聲, 亮非細幸。 曰篤嘉汝, 可謂不負其職。 第一條 《語類》 云云, 予嘗以爲 《大全》 出於夫子, 《語類》 出於門人, 故 《大全》 如 《易》 繫, 《語類》 如 《論語》 。 第於記載之際, 人品有疎密, 文法有詳略。 樂混全而忌剖析, 捨寶藏而取零金, 往往不免其失。 蓋 大全 、 語類 , 譬之在天爲命, 在人爲性, 分看好合看亦好。 同處見異, 異處求同, 方可謂善觀 朱子 。 故 燕 而購書, 岳 而剡人, 擬成一統大文字, 天開斯文, 予意若成, 則爾當與薦中人, 共聞編書之役矣。 第二條儀禮云云, 堂、榮、豐、禁之制, 雖近於名物度數之末, 此爲基本, 可審不可忽也。 朱夫子 釋宮室, 與 爾雅 略相出入, 而前虛而後實, 角坫而側廉, 則有如明堂布位, 井井秩秩。 自 王安石 以後, 《儀禮》 不講, 而舊法從而不章, 鄕禮合篇 註說中, 違於禮意者, 眞所謂有司失其傳, 自內閣詳考釐正。 第三條飮射云云, 飮酒, 所以勞農也, 序齒, 所以尊年也。 予所惓惓者, 在於斯, 中外不能對揚, 又速官箴。 有關國綱, 付之廟堂處之。 第四條窖倉云云, 漢 之敖倉, 唐 之洛口倉, 俱以窖而貯之, 劉 、 項 八年之爭, 楊 、 李 六年之戰, 取之無禁, 用之不竭者此也。 但窖雖陶埏, 惡濕喜燥, 故大江以南, 不如河北。 先以井田一區之意, 試之於西北, 未爲不可? 廟堂量度, 先問便否於西北道臣以聞。 第五條銀貨云云, 器用服飾之日趨糜費, 可勝言哉。 鍮器尙有古禁, 況九府圜法之所稱白金者乎? 若於一朝設法而禁之, 反有乖於 蓋公 治 齊 之義, 惟在宰執侍從之家, 上行下効之如何耳。 第六條綿布云云, 漢 繒 唐 絹, 不足踰其美矣。 無脛而走隣, 年年尾閭, 是何異於脫吾民之衣, 委之殊鄕。 金蔘充包, 比有修明者, 綿布想不至如前狼藉, 惟在使行防禁之闊狹矣。 第七條濬川云云, 顧我 先大王愛恤元元之盛德大業, 史不勝書, 而濬川卽其中一事。 濬亦有大小之分, 而其費大爲近萬, 小亦數千, 若使牛耕而人休, 則費可省矣, 利亦博哉。 翻沙則成堆, 成堆之後, 築數仞之阜於水門外, 曠處閒地, 種植以防之。 至於餘沙之入于江者, 疏而導之, 用石碇鐵犂, 爾言正合予宿昔留意者。 然碇犂與芭柵間, 難易又當何居, 廟堂亦可稟啓。 第入條量田云云, 欲復三代之制, 當先井田, 而井田旣不可復矣, 均田、限田, 亦可謂近古。 唐 初始立口分世業之法, 旋爲兼竝者所占。 田制之不可猝變類如此, 目下先務, 改量爲上, 但邑不得人, 則不如不改量。 朱夫子 蓋嘗試之, 而留丞相同鄕之人, 又復沮戲? 其難其愼, 不得刻勵施行者, 良有以也。 古昔先王之時, 草木繁蕪, 桑麻翳蔚, 村巷無犬吠, 官府長子孫。 卽風流篤厚禁罔疏闊八箇字, 予所蚤夜憂勤, 不外此耳。 朝紳輯睦而後烝黎乂安, 烝黎乂安而後風俗醇厖, 風俗醇厖而後飮射可以行, 財穀可以裕, 究其本則 朱夫子 是耳。 爾言可謂識務。”
지평 이경신(李敬臣) 이 상소하기를,
“작년 전교에, 주자서(朱子書)에 대하여 지성으로 말씀하신 것을 보고 신은 그것을 두 번 세 번 되풀이해 읽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기를 마치 풍악소리 북소리를 듣고 손뼉을 치고 춤을 추듯 하였습니다. 성스러운 우리 전하께서 주자 의 도(道)까지 깨치셨으니 성현(聖賢)의 학문과 제왕(帝王)의 정치가 오늘날 바다 동쪽에서 실현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도 일찍이《주자전서》를 보았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 있기는 하지만 그전의 선정(先正)들이 이미 차의(箚疑) 등속을 써둔 것들이 있고 게다가 또 뒤에 유자들의 학설도 있어서 별 의심없이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류(語類)》에 있어서는 바로 그의 문인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평소 언행(言行)에 대해서는 오히려《전서》보다 더 상세하게 되어 있어 주자 의 도를 배우려면《어류》를 읽지 않고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말투가 지금 쓰고 있는 문자와는 조금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알기 어렵다 하여 그냥 묶어두고 있는 자가 많고 또 간혹 읽는 자가 있어도 역시 가당치도 않은 것을 억지로 끌어다 대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신은 우선 조정 신료 중에서 그에 통달한 자로 하여금 주해(註解)를 내게 하여 독자들의 참고에 편의를 제공한다면 주자학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기억나는 것은 지난번 향음례(鄕飮禮)·향사례(鄕射禮)에 관하여 윤음을 반포하셨을 때 아무리 심산궁곡에 사는 백성들이라도 모두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그 윤음을 들으면서 덕치의 교화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향례합편(鄕禮合篇)》이 나왔을 때는 향음례·향사례 편의 주석들이 분명하지 못한 곳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물론 그 일을 맡았던 신하들이 어려운 것을 쉽게 풀이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쉬운 것이 오히려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으로, 가령 당동영(當東榮)의 ‘동영(東榮)’이라든지 방호간(房戶間)의 ‘방호(房戶)’가 과연 어느 곳임을 지정하지 않았고, 사금(斯禁)에서의 ‘금(禁)’과 궁이촌(弓二寸)에서의 ‘이촌(二寸)’같은 것도 어디에 어떻게 쓰이고 있음을 밝혀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방에서 그 예를 행하고 싶더라도 어디에 가서 확실한 고증을 하여 절충을 취할 것입니까. 만약 그 의의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억지로 그 흉내나 내려고 하면 주자(朱子)가, 명주(明州)에서 행한 의식을 두고 예에 어긋나고 야비하다고 비난했던 그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신이 바라는 것은 다시 경의 주해를 맡았던 신하에게 좀더 상세한 고증을 하도록 명하여 분명한 전례를 중외에 반포하고 후대에 물려주어 사방의 의칙(儀則)이 되고 후왕의 법정(法程)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면《의례(儀禮)》속에 있는 연례(燕禮)및 대사례(大射禮)는 그것이 바로 삼대(三代) 시절에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서로 읍양(揖讓)하던 의식입니다. 주자도 이르기를 ‘임금·신하 사이가 근엄과 존경으로만 일관하다 보면 정이 혹 통하지 않아 서로 도움이 되는 충고(忠告)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을 차려두고 서로 모이는 기회를 갖기 위하여 잔치하고 음식을 권하는 예를 만들어 상하의 정이통하게 하고 은근한 정이 붙도록 한 것이다.’ 하였는데 그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입니까. 그야말로 옛 성왕(聖王)이 그 예를 만들었던 근본 취지를 십분 이해한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도 우선 그 두 가지 예를 위에서 꼭 행하시어 우리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도록 하소서.
또 삼가 생각건대 국가가 있는 한 반드시 비축이 있어야 합니다. 비축을 하는 것은 바로 백성들이 그것을 하늘로 여기기 때문인데 전(傳)에도 이르기를, 국가에 3년 비축이 없으면 국가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로 말하면 1년 비축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것은 곡식 저장술을 몰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반드시 곡식을 움에다 저장했었는데 그 사실은 사책(史策) 군데군데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땅을 파고 움을 만들고 질흙으로 구멍을 만들어두기를 지금의 기와 굽는 가마처럼 만든 다음 그 안에다 곡식을 넣고 흙으로 그 위를 덮어 두툼하게 묻어두면 비록 몇 십 년이 가도 결코 습기가 차 썩거나 뜰 염려가 없습니다. 옛날에 9년, 10년씩 비축해 둘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국의 창고에 저장해둔 것을 모두 움에다 저장하고 받아들이고 내주고 하면서 민폐를 끼칠 것 없이 해의 풍흉에 따라 값만 조종하기를 경수창(耿壽昌)의 상평(常平) 제도처럼 한다면, 혹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먹고 살기가 어렵더라도 관창(官倉)을 바라보고 그것을 생명선으로 삼을 것이며 남쪽이거나 북쪽이거나 그 지역의 시운에 따라 한 쪽에서는 팔고 다른 한 쪽에서는 사들이고 하여 썩은 흙 같던 것이 주옥(珠玉)처럼 변하고 값도 곱으로 오를 것이니, 그 법이 이행되고 보면 국가만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구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보물 중에서 천하가 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은(銀)뿐입니다. 그런데 나라 안에 사치 풍조가 날이 갈수록 더하여 칼 장식·안장꾸미개에서 가락지·비녀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은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갖가지 장수와 행복을 비는 글자 문양이나 기타 자질구레한 반짝거리는 문양들은 결국 하나의 소모품이 되어버리고 보물로서의 가치를 되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산량은 한계가 있는데 소모는 무한정으로 하기 때문에 보물은 보물대로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값도 따라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마다 연경 가는 장사치들은 짐을 수량대로 채우지 못하고 가끔 그 쪽에서 나온 사행들에 대해서도 그 많은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재정은 점점 줄어들고 물가는 점점 올라가고 있는데 지금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자면 무엇보다도 나라 안에서 은으로 장식물을 만드는 일을 일체 금하고 비록 이미 만들어 장신구로 차고 다니는 것들이라도 그것을 다 저울로 중량을 달아서 그걸 팔아 돈으로 만들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국가 비축물로서는 은이 돈보다 좋고 사용하는 백성들로서는 은이 돈만 못하여 돈은 자연 백성 쪽으로 몰릴 것이고 은은 국가로 돌아오게 되어 국가도 경비에 대한 걱정이 없을 것이고 백성들도 돈 흉년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사 간에 쓰지 않으면 안 될 갖가지 중국 물건들도 값이 더는 올라가지 않을 것이 눈으로 보듯 훤합니다.
우리나라는 귀천상하를 막론하고 다습게 입으려면 명주가 있고 시원하게는 삼베가 있지만 그 모두가 무명베만 못합니다. 무명베는 너무 사치스럽지도 너무 검소하지도 않고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적당하여 마치 먹는 물건에 있어 하루도 빼놓을 수 없는 밥이나 콩처럼 친근합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나라 안에 백금(白金)이 너무 귀한 탓으로 무명베로 그 값을 쳐서 저들 나라와 교역(交易)하는 데 쓰고 있기 때문에 세무명 한 필 값이 넉 량은 되어야 백금 한 냥과 맞먹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백성들이 입을 베를 우리 백성들이 먹지도 못할 백금과 바꾸어 국경 밖 머나먼 나라로(만리의 나라 밖으로)보내는 격이니 나라가 무슨 수로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며 백성들은 무슨 수로 춥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국가에서 해마다 비용을 많이 쓰는 일이 준설 사업인데 그 역시 도랑 속에 있는 모래를 굴착하여 겨우 도랑 밖에다 그냥 펴두기 때문에 큰 비만 한 번 왔다 하면 그 모래가 다시 도랑 안으로 흘러 들어갈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래는 도랑 안팎으로 늘 돌고 도는 격인데 그 일이 언제 끝나겠습니까. 그리고 그 비용 절감은 어느 세월에나 할 것입니까.
신의 생각에는 여름철 장마에 물이 불어 도랑들이 다 차 있을 때 소에다 쟁기를 메워 도랑 안으로 들어가서 그 모래를 갈면 그 모래는 성질상 그대로 있지 못하고 흐르는 물결 따라 저절로 떠내려갈 것이니 만약 쟁기 여남은 개만 동원하여 하루 품만 들이면 모래가 쌓여 도랑물이 흐르지 않을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 모래가 다 남쪽으로 흘러가 강을 메우면 염창(鹽倉)이 막힐 우려가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또 방법이 있습니다. 두서너 개의 닻돌에다 가시가 돋게 만든 쇠붙이를 부착하고 큰 줄로 묶은 다음 그것을 강 속에다 집어넣고 위아래로 끌어당기면 닻돌이 지나간 곳은 마치 소가 간 것처럼 되어 얕았던 곳이 깊어지고 막혔던 곳이 트일 것이니 도랑 안의 모래 처리보다 도리어 쉬울 것입니다.
예로부터 제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반드시 경계(經界)를 근본으로 삼았던 것은 맹자(孟子) 가 등문공(滕文公) 에게 한 말만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후세에 와서는 그 경계 문제가 비록 옛날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것이 나라 다스리는 데 근본이 되고 있는 점은 일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자(朱子)도 임장(臨漳) 에서 경계 문제가 일개 군의 영구한 이해 관계를 좌우한다고 보고 우선 전지 측량에 능숙한 자 몇 명을 구해 지형을 보아 재고 분할하고 하여 십중팔구의 성과를 거두고는 임장 백성들을 이제 도탄 속에서 구제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결국 당시 그 일에 회의를 느끼는 자들의 방해로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호남(湖南)·광서(廣西)를 맡으라는 명령을 두 차례에 걸쳐 받았지만 두 번 다 사양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천 리 밖에서 생업을 잃고 있는 백성들에 대해 사죄하는 뜻에서였던 것입니다.
우리 조종들께서도 전지에 있어 반드시 연한을 두고 다시 측량하는 법을 만드셨는데 어찌 경계를 우선으로 여겼던 맹자·주자 의 뜻을 본받았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근자에는 태평 무사가 풍속이 되고 그대로 따르는 것만을 일삼아 나라 안 전지중에 어떤 것은 1백여 년이 가도록 측량을 하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능선이 계곡으로 계곡이 능선으로 변하고, 물바다가 뭍으로 뭍이 물바다로 변하여, 혹은 측량에서 제외된 것이 옥토인 것도 있고 혹은 측량을 이미 받은 것인데 전지 형태조차 없는 것도 있습니다. 혹은 놀고 있는 땅이 있는데도 백성들이 개간하지 않는 것은 실지로는 없는 전지까지도 조세가 부과될까를 염려해서이고, 혹은 비옥한 땅을 경작하고 있으면서도 돈 한 닢 바치지 않는 자도 있는데 그것은 간교한 아전들 붓끝 농간으로 그리 된 것입니다.
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만 말하더라도 읍(邑)에는 비치된 양안(量案)이 없고 결수[結]도 일정한 총수가 없이 연분에 따라 저들 멋대로 올렸다 내렸다 한 곳이 황해도 토산(兎山)이고, 사람이 대대로 살고 있다 하여 전지는 없어졌는데도 결수는 남아 있어 계속 조세를 물고 있는 곳이 전라도 전주(全州)입니다. 누락된 전결이 있으면 문서로 농간을 부리는 아전들이 다 횡령하고 호소할 곳 없는 백성들은 없는 땅의 조세를 계속 바치는 것입니다. 남이건 북이건 바닷가나 산골이나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은택이 아래까지 미치지 못하고 원성이 위에 알려지지 않아 민생은 야윌 대로 야위고 국용은 바닥이 날 대로 났는데 그 모두가 이상과 같은 폐단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주자 저서를 가지고 주자 의 도를 강론하고 계시니 주자 가 당시에 행해보려고 했던 일들이 오늘에 와서야 행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라건대 일을 맡은 신하로 하여금 《대전》과《어류》에 있는 말들 중에 경계 문제에 관해 언급한 것을 좀 더 상세히 강구하여 그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근래 올려온 소장들이 별로 시원한 내용이 없던 차에 그대 상소문을 보니 입을 열자마자 주자 에 대해 말하였고 게다가 또 이용후생(利用厚生)에 관한 문제까지 덧붙여 있었다. 모두 입 다물고 있는 풍토 속에서 그대가 이 말을 한 것은 참으로 적잖이 다행스럽다. 내 그리하여 그대를 가상히 여기는 것이니, 그대는 자기 직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첫 번째 조항의《어류》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나는 생각하기를,《대전》 은 주부자 손에서 나온 것이고《어류》는 문인들 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대전》이 《주역》의 계사(繫辭)와 같다면《어류》는 《논어》와 같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기록할 때 사람 성품이 데면데면한 자도 있고 주밀한 자도 있었을 것이며 문장을 쓰는 법 역시 상세하게 쓰는 자가 있는가 하면 대략으로 쓴 자도 있었을 것이다. 또 통틀어보기를 좋아하고 하나하나 분석하기를 꺼려하며 깊이 숨어 있는 보물은 버리고 부스러기 금만 취하기도 했을 것이므로 가끔은 잘못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체로 《대전》과 《어류》를 놓고 비유해서 말한다면, 똑같은 물건인 것이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명(命)이 되고 사람이 받은 입장에서 보면 성(性)이 되는 것과 같아서 분리해서 보아도 좋고 종합해서 보아도 좋다. 아무튼 동일한 곳에서 다른 점을 발견하고 또 다른 곳에서 동일점을 찾아내야지만 비로소 주자를 잘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燕) 에서는 책을 사오고 악(岳)에서는 사람을 골라 하나의 통일된 큰 문자(文字)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하늘이 만약 사문(斯文)의 길을 열어주어 내 뜻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대도 선택받은 한 사람이 되어 그 책의 편찬 사업에 함께 종사해줘야 하겠다.
두번째 조항의 《의례》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당(堂)·영(榮)·풍(豊)·금(禁) 같은 것들이 의식을 거행하는데 있어 그 물건이나 제도로 보아서는 비록 말단적인 것에 속하지만 이것들이 기본이기 때문에 잘 알아야지 소홀히 할 것은 아니다. 궁실(宮室)에 관한 주자 해석이 《이아(爾雅)》와는 다소 들쭉날쭉하지만, 앞은 비고 뒤는 차 있으며 각(角)이 점(坫)이고 측(側)이 염(廉)이라고 한 것은 마치 명당(明堂)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처럼 질서 정연한 것이다. 왕안석(王安石) 이후로 《의례》를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옛 법도가 어두워지고 말았는데《향례합편(鄕禮合篇)》의 주석이 예의 본의와 틀린 것들이 있는 것은 그야말로 담당자가 잘못 알고 한 것으로 내각에서 상세히 고찰하여 바로잡도록 할 것이다.
세번째 조항의 향음례·향사례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술을 마시는 것은 농부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고 나이 차례를 따지는 것은 연장자를 존경하기 위한 것으로, 내가 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일인데 중외에서 그 뜻을 받들어 거행하지 못하여 또 관잠(官箴)의 제정까지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 기강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묘당에 회부하여 처리하도록 해야겠다.
네번째 조항의 움창고에 관하여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한(漢)나라의 오창(敖倉), 당(唐)나라 의 낙구창(洛口倉)이 모두 움으로 된 창고들로서 유방(劉邦)·항우(項羽)의 8년 전쟁과 양(楊)과 이(李) 의 6년 전쟁때 누구나 마음대로 가져가고 써도써도 동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만 움이 비록 질흙으로 다진 것일지라도 역시 습기를 싫어하고 건조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큰 강 이남이 하북(河北)만은 못했던 것이다. 우선 적합한지의 여부를 타진해 보는 뜻에서 서북 한 곳이라도 시험해보고 싶은데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묘당에서 잘 헤아려보고 그 편리 여부를 우선 서북면의 도신(道臣)에게 물어 아뢰도록 해야겠다.
다섯번째 조항의 은화(銀貨)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각종 기물이나 복식들이 날이 갈수록 사치해지는 꼴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옛날에는 놋그릇도 금했었는데 더구나 화폐 유통을 맡고 있는 기관에서 백금(白金) 이라고 부르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그것을 하루아침에 법을 만들어 금지하고 보면 도리어 개공(蓋公)이 제(齊)나라 다스리던 뜻과 괴리되는 점이 있을 것이니, 우선 재집(宰執)·시종(侍從)의 집에서부터 실천하여 아래에서 본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섯번째 조항의 무명베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한(漢)나라의 비단도 당(唐)나라의 비단도 무명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다. 다리 없이 이웃으로 달려가듯 해마다 끊임없이 새나가고만 있으니, 이는 우리 백성들의 옷을 벗겨다가 다른 고장에다 버려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근래에는 금과 삼으로 짐을 채우는 제도에 대해 자주 정리하고 단속하고 있어서 아마 그 전처럼 무명베를 낭자하게 써버리지는 않을 것이지만 오직 사신 일행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일곱번째 조항의 준설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 선대왕께서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신 거룩한 덕과 큰업적이야 역사에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준설 문제도 그중의 하나였다. 준설이 물론 공사규모가 크고 작은구별은 있지만 크다면 그 비용이 만(萬)에 가깝고 작아도 몇천이 드는데 만약에 소가 갈고 인력은 쉬게 된다면 비용이 많이 절감될 것이고 이득도 상당할 것이다. 모래를 자꾸 파내면 무더기를 이룰 것이니 무더기가 되고 난 뒤에 수문(水門)밖 공한지에다 몇 길 되게 언덕을 쌓고 거기에 나무를 심어 유사를 방지하면 될 것이다. 그밖에 조금 남아 강으로 흘러들어온 것들은 닻돌과 쇠갈고리를 이용하여 흘려보내자고 하였는데, 그대 말이 내가 두고두고 생각해 온 것과 바로 들어맞는다. 다만 닻돌과 쇠갈고리를 이용하는것과 대나무 바자를 치는것 중 어느것이 더 손쉬울지는 묘당에서 알아 여쭙도록 해야겠다.
여덟번째 조항의 양전(量田)에 관해 운운한 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삼대(三代)다시 만들려면 우선 정전법부터 시행해야 되지만 정전법은 이미 실시할 수 없게 되었고 균전법(均田法)‘·한전법(限田法)도 옛 제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당(唐)나라 초기에는 처음으로 가구수에 따라 전지를 분배하고 대대로 이를 업으로 삼게 하는 법을 제정했었지만 금방 토지 겸병자들이 차지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지 제도라는 것이 그만큼 갑자기 바꿔지지는 않는 것으로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측량을 다시 하는 것인데 그것도 고을에서 적임자를 쓰지 않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할 수가 있는 것이다. 주자 도 언젠가 시도를 했었지만 한 고향 사람인 유 승상(留丞相)이 또다시 빈정대며 훼방을 놓지 않았던가. 그만큼 어렵고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기에 마음을 굳게 다지고 시행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옛날 선왕 시절에는 초목도 울창하고 뽕나무와 삼도 번성했으며 마을에는 개짖는 소리가 없고 관청에서 자손을 기를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해 풍류(風流)가 독후(篤厚)하고 금망(禁罔)이 소활(疏闊)했던 것인데, 내가 밤낮없이 걱정하고 노력하고 한 것도 이상 여덟 글자에 불과한 것이다. 조정의 진신들이 화목해야지만 백성들 살기가 편안하고, 백성들 살기가 편안해야지만 풍속이 순후해지고, 풍속이 순후해야지만 향음례도 향사례도 행할 수 있고 재물도 곡식도 여유가 있는 것인데, 그 근본을 찾자면 주자 가 바로 그것이다. 그대 말이야말로 시무(時務)를 아는 말이라고 하겠다.”하였다.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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