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Pirate 해적

한부울 2009. 6. 24. 00:33
 

Pirate 해적


 

Pirate History (해적의 역사)


해적행위에 대한 역사가 언제부터였는지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3,000년 보다 더 이전부터 해적(Pirate), 해적행위(Piracy)라는 의미의 단어가 사용되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B.C. 140년대 로마의 역사가 Polybius에 의해 처음으로 "Pirate"라는 단어가 등장하였고, 영국 최초의 사전에는 항구내, 바다의 도둑 또는 약탈자라고 그 의미가 기록 되어졌으며, 검은 올리브유를 바른 얼룩덜룩한 검은 깃발에 허가없이 무장을 한 배를 지칭하기도 했다.


"Piracy"는 A.D. 100년 그리스 역사가 Plutarch에 의해 언급되어, 17세기 이전에 들어 그리스와 라틴계 사람들에 의해 "Piracy"라는 의미가 최종으로 정의되어 졌다. Plutarch는 법의 권위 없이 바다의 도시나 배를 공격하다라는 의미로 기술했으며, 또한, "Piracy"는 Homer의 "The Odyssey"와 "The Iliad"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Piracy in the Middle Ages (중세기 해적)


9 - 11세기의 스칸디나비아인(Scandinavians)들은 영토 부족으로 인하여 그들의 제국을 확장시키기를 원했고, 고대 스칸디나비아인(Norsemen or Northmen)들은 지금의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인 들이었다. 이들은 해적이 아닌 바이킹(Vikings) 이라고 불렀지만, 잉글랜드와 다른 나라에서는 바다의 도둑이라고 불렀다.


A.D. 789년, 잉글랜드 남부해안에 처음으로 바이킹의 배가 상륙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바이킹이라고 알려진 것은 793년 부터였다. 그들은 잉글랜드 북쪽해안의 린디스파인

(Lindisfarne)섬에 있는 교회를 파괴하고 약탈을 시작으로 영국의 북쪽 해안 랜드폴(Landfall)까지 약탈을 일삼았다.


795년에는 더블린(Dublin), 799년에는 France 남서부 해안까지 도달했으며 그들의 제국 확장은 A.D. 1050년에 들어서야 끝을 맞았다.

 

 

The Golden Age of Piracy (해적행위의 황금기)


15세기 신세계가 발견됨과 동시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미국인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이했다. 아메리카는 에스파니아에 의해 점령되었고, 본토의 제어를 벗어나 바다에서의 힘이 곧 제국의 힘이 되었다. 에스파니아는 급속히 신세계에서 세력을 펼치기 시작했고, 이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가 따라잡으려 애를 썼다.


에스파니아는 아메리카 원주민들로부터 부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해적들의 스폰서가 되었다. 해적들은 에스파니아 본토로 돌아가는 수송선단을 공격하여 각종화물과 보물들을 약탈했다.


해적행위에 속하는 샤락함대는 곧 합법화 되었고, 17세기 말에 들어서는 에스파니아의 해군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해적행위의 비정규전으로 에스파니아를 물리쳤고 더욱더 해군력을 강화 시켜 갔다.


대양에는 무역을 위해 수많은 항로가 생겨났고, 수많은 상선대는 값비싼 상품들을 운송함과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군인들을 실어 나르는데 이들이 바로 해적이었다. 이들은 탐욕스러운 모험가나 반역자들, 또는 난폭한 노예들로 구성이 되었으며, 17세기 중엽에 들어서는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1655년 Barbados에서는 잉글랜드의 인간쓰레기들이 모두 카리브해로 모였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해적들은 약탈이 끝나면 Jamaica의 Port Royal의 선술집에 들러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17세기부터 18세기 초기에는 샤락허가서가 남용이 되어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했다. 대영제국과 각기 다른 나라들간에 마찰이 발생하게 되고 서로를 향해 공격하고 나포하게 되므로 카리브해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샤락 허가서 (Letters of Marque):나포 면허장으로, 사설 함대에 무장을 허가하며, 타 국가 간의 전시 상태일 경우 그 국적의 함선을 공격 및 약탈 할 수 있었던 허가서 이다.


상황이 악화되어가자 해적행위를 더 이상 방치 할 수 없었고 법적인 제한을 하기 시작하였다. 법을 등진 해적들은 그들 스스로를 죽게 만들었다. 지중해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16 - 17세기 무렵에는 북아프리카의 Barbary 해안 항구 Algiers, Tunis, Morocco는 Barbarossa와 같은 해적들의 사냥터가 되었다.

 

                   카리브해의 여해적을 소재로한 영화 컷스로트 아일랜드의 한 장면

                            <감독 : 레니할린, 주연 : 지나 데이비스, 매튜 모딘>


The End of the Golden Age of Piracy


어지러웠던 해적들의 황금기는 1650년부터 1725년까지 이어졌다.


카리브해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섬들은 해적들의 은닉처가 되었고, 또한 추격대와 해군들을 피하기에는 무척이나 유용했다. 사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해적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사로잡힌 해적들은 런던으로 보내어져 심판을 받았다. 윌리엄 키드(William Kidd)와 같은 이가 대표적 예이다. 1700년에 들어서야 영국은 해적 사냥꾼들에게 포상을 하기 시작했으며, 해적행위는 배심원들이 없이 무조건 사형이라는 형벌이 내려졌다. 집행이 끝나면 시체를 게시하여 경고 하였다.


곧이어 1713년에는 유럽 각국이 협약을 맺어 해적토벌을 위해 해군력이 동원 되고 카리브해의 식민지는 점차 조용해져 갔다. Bahamas의 통치자 Woodes Rogers나 Henry Morgan경과 같은 자마이카의 통치자들 역시 해적행위에 대한 처벌에 나섰고, 이에 상인들도 지원을 아끼지 않아 카리브해의 해적 전성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Types of Pirates (해적들의 형태)


해적들은 "Buccaneers", "Privateers", "Corsairs"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이들은 시대별 다른 의미로 해석 되어 졌다.


Buccaneers


(신대륙의 에스파니아 식민지를 약탈했던 모험가 출신의 해적)


17세기의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의 모험가들로 에스파니아의 식민지인 Hispaniola(오늘날의 Dominica, Haiti)의 요새를 공격하거나 농장을 약탈했던 이들이다. 남미의 인디오 아라와크(Arawak)족에게서 구운 생선이나 소고기 등을 약탈했으며, 이 일로 인해 불어로

"Boucan"이라고도 불려졌다.


초기 Buccaneer들은 유럽의 각종 상품들과 화약을 팔아 신대륙의 담배 교역을 하다가, 에스파니아의 식민지 지사들이 무역을 저지하자 이에 불신을 얻었고 후에 탈출한 노예들과 탈영병들이 합류되어 해적행위를 일삼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Buccaneer들은 Fortuga의 작은 섬 곳곳에 본부를 설립했고, 훗날 활동을 위한 전진기지로 Jamaica섬을 사용했다.


가장 유명했던 Buccaneer의 한명인 Henry Morgan경은 Tortuga에서 500명, Jamaica에서 1,000 명의 Buccaneer를 소집하여 그들의 사령관이 되었고, 1671년에 Panama를 점령했다.


1684년 프랑스와 에스파니아는 Ratisbone조약을 통해 Buccaneer의 활동을 억제 시켜 나가자 곧이어 그들의 활동이 잠잠해졌다. 그해 Buccaneer 들에게는 각 섬의 지사자격의 제안이 들어왔고 많은 Buccaneer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강성했던 Buccaneer들은 각국의 지원을 받으며 동맹을 맺었고, 1688년 자마이카의 통지자이자 Buccaneer의 왕 Henry Morgan경은 그해 사망하여,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부하들과 Tortuga에 머물렀던 Buccaneer들은 뿔뿔이 흩어져 대부분이 해적으로 돌아갔다.

 

                                        <Henry Morgan, 1671년 Panama 점령>


Privateers (샤락함대)


Privateer는 각국의 해군에서 승인을 받아 범선에 무장을 하거나, 또는 개인의 위탁을 받아 운영하는 사설함대로 적대국의 배를 공격했던 조직이다. 이들에게는 "Letters of Marque"라는 면허장이 주어졌고, 정부 또는 지사에게 고용되어 독립적으로 운영되어 해적과는 분리가 되었다.


대게 전시상태의 경우에만 적대국 함대를 공격하는 해전을 인정했지만, 그 외의 해적행위를 일삼아도 정당성만 인정되면 묵인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이러한 함대 승무원들 역시 "Privateers"포획사선 라고 불렸다.


샤락함대의 목적은 적국의 무역을 방해하여 상업을 붕괴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고, 나머지는 식민지의 지사와 선장, 승무원들의 급여를 만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가끔 샤락선들은 고용된 국가 또는 영국국기(Union Jack)를 배에 걸고 항해하기도 하여, 지나가는 각국의 상선대를 목표로 약탈을 일삼았다. 하지만, Queen Anne의 전쟁(1702-1713)이 끝나자 그들은 할 일을 잃어 버렸고,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해적으로 전향하기도 했다.


1812년 미국의 독립전쟁 후 샤락선단은 영국의 무기와 군수 물자를 운송해주는 일을 맞아 어느 정도 수입을 올리며 맥을 유지했고, 1856년 파리 선언(Declaration of Paris)에 의해 샤락함대는 공식적으로 완전 폐지되었다. 하지만, Venezuela와 Mexico, United States, Spain은 이 선언을 지지하지 않았다.


Corsairs


Corsair는 지중해에서 활동하던 해적 또는 샤락함대를 일컫는 말이다.


가장 유명했던 Corsair는 Barbary 해안이라고 불리우는 북아프리카 연안에서 활동하던 무슬림 해적들 이었다. Corsair들에게는 기독교국의 범선들을 공격하는 권한이 주어졌으며, 그중에서도 Barbarossa가 가장 유명했다. 이에 기독교국의 기사단은 터기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루게 된다.


초기에는 종교적 충돌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각국들 간의 약탈을 위한 해적행위로 이어졌다. 1783년 파리 조약에 서명함으로서, 미국은 대영제국에서 독립하였다. 영국군대는 미국을 떠났지만, 이미 다른 문제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독립한 미국의 배들은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는 영국의 무적함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함대는 해적들의 쉬운 공격대상이 되었다. 특히 지중해를 지나는 미국 상선대는 바바리 해안을 지나면서 무차별 공격을 받게 되었다. 배가 나포되고 화물을 강탈당했으며, 승무원들의 몸값을 요구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1795년 미연방 국회는 당시 프랑스 혁명과 본토의 인디언들로 인해 양측의 일에 매우 바쁜 상황이라 바바리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모든 요구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공물을 지불하기로 동의했다. 조약의 대상은 바바리 연방인 Algeria, Morocco, Tunisia, Tripolitania(리비아)였고, 미연방의 범선은 더 이상의 공격을 모면하게 되었다.


이후 미연방은 그들의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해군을 건설해야 했고, 선장육성에 만전을 기하게 된다. 이에 북미의 해상보험회사들은 지중해로 항해하는 범선을 수락하게 되지만, 여전히 바바리의 공격에서 안전을 보장 받지 못했다.


1801년 Thomas Jefferson 대통령이 임명될 때까지 공물을 계속 되어졌고, 미연방과 프랑스와의 해전이 종식 되고서야 바바리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미국은 바바리에 대한 공격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여 1804년 8월에 Pahsa의 함대가 Tripoli의 항구를 포격함으로 유리한 입장에 들어서게 된다[大航海時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