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누이 강조하지만 청이란 실체를 우리가 정확하게 보아야 한다.
이런 속국개념을 강조하는 글을 보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다.
누구라도 지난 역사를 편견 없이 조금만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맹점도 바르게 보지 못한 체 일제가 일러준, 그리고 가르쳐 준 소설 같은 이야기를 사실처럼 여기고 받아들이는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고 애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가 남겨준 반도사관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의 속국개념이 자리 잡고 사실처럼 여길 때 그것이 바로 반도사관인 것이다.
한번 이치적으로 생각해보라.
왜 일제가 이런 식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라고 만든 것인지 최소한의 생각이 있으면 알 수 있는 이치이다. 이런 식의 속국개념이 자리 잡고 있어야지 그들이 병탄하고 합병하고 침탈한 모든 행위 범죄사실이 정당화되고 합리화가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지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더 붙인다면 그들의 근본 없고 보잘 것 없는 부끄러운 역사를 조선을 반도역사로 둔갑시키면서 더불어 담보하고 미화시킬 수 있다는 것 또한 중요한 요인이다.
명, 청은 서구세력과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면서 앞잡이를 자임하던 일제가 아시아역사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돌출된 명칭이다.
명, 청이란 개념은 대륙조선 내에 일정부분(예를 들면 국제대외정치, 또는 외적군사관리)만 총괄하고 황제의 지시를 받는 중국정권차원의 존재라고 보아야 할 부분이 많다.
대륙조선은 중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엄밀히 하면 청의 신하는 대륙조선의 신하 일 뿐이다.
그런 신하가 감히 고종황제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도 일제강점시기에 4대사고 모두 조선총독부 관리에 있으면서 보존순수성이 훼손되었으며 일부는 최근에 들어서야 뒤늦게 일본에서 돌려받은 것임을 인지해야 한다.
1913년 오대산사고 862책을 데라우치에 의해 동경대로 옮겨졌고 1923년 일본열도광동대지진으로 788책이 소실되었으며 1932년 경성제대(서울대?)에 보관되었던 27책과 2006년에 반환된 47책 고작 74책이 남았지만 이것조차도 신뢰성이 없다.
다 이와 같은 처지이다.
무엇을 근거로 진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국기개념과 그때 국기개념은 다를 수 있다.
서세가 밀어닥치면서부터 국기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그런 추세에 따라 대륙조선에서도 국기를 만들어야함을 황실에서 의논하였다고 본다. 그 당시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가 없었을 뿐 황제의 권한을 표시하는 皇旗 즉 삼각형 상징 國章은 존재했었다.
때문에 황실에서 대외적인 것을 감안 국가상징의 國旗를 만들어야 한다는 국제정세에서 대외정치담당신하와 논의 한 것일 뿐 그것을 조공속국이란 개념을 덮어씌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치 淸의 朝貢왕인 고종과 그것을 요구하는 청의 신하와 동등관계를 설정하고 갈등하는 것처럼 비치게 하는 것 자체가 왜곡이고 조작이란 말이다.
조선은 최소한 대한제국이 성립되기 전까지 대륙조선 중국황실이었다.
속국이란 개념은 조작냄새가 강하게 나는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근거로 청의 속국이란 공식을 정당화하고 맞추려는 술책인데 우리스스로 이렇듯 사실화하고 개념화하는 것은 우리의 신성한 역사를 먹칠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던 서세동점시기에 서구세력에 떠밀려 대륙조선에서 한반도조선으로 접혀 들어갔고 자의타의로 대한제국이란 국명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일제는 그러한 틈을 타 이와 같은 속국이란 역사편재를 만들고 사실화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만 존재한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일제가 만들어놓은 반도역사가 아니라 진실의 역사이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언젠가는 밝혀질 역사이고 이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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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늬 목간
[연합뉴스] 2009년 06월 05일(금) 오전 10:38
1882년 10월 2일자 도쿄 일간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는 태극기가 제작된 배경과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한다. 내용은 이렇다.
당시만 해도 조선은 국기가 없었는데,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자국의 국기인 황룡기를 모방해 국기로 사용하라고 조선에 압력을 넣었다.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서 쓰라는 것이다. 이에 고종은 크게 분개하며 거절한다. 그러면서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도를 적색과 청색으로 그리고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괘를 붙여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고 하교한다. 이것 하나만로도 청국은 조선이 벌써 자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실감했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국기의 필요성은 1876년 체결한 병자수호조약 때부터 대두됐다고 한다. 요즘에야 국가간 협상 때 국기가 테이블에 나란히 놓이는 게 당연하지만 당시의 조선은 그런 상징이 없었던 것이다. 중국이 조선에 국기를 사용하라고 간섭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이후 과정은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다. 수신사 박영효 일행은 그해 9월 25일 일본 고베의 숙소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한다. 즉, 시사신보를 이를 계기로 태극기 제작 과정을 보도한 것이다. 박영효 일행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받은 고종의 명에 따라 태극기를 만든 뒤 처음으로 선보이게 된다.
물론 태극무늬 탄생은 훨씬 이전의 일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지금과 유사한 태극 문양이 일반화해 신라에서는 주로 삼(三)태극을, 고구려와 백제는 사(四)태극을 사용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중기까지는 이(二)태극이 많이 쓰였으나 그 후로는 삼태극이 주로 사용됐다. 이는 공신의 무덤이나 집 앞에 세운 홍살문에서 잘 알 수 있다.
태극문양은 한민족의 정신세계가 함축돼 있다. 음양의 만물생성과 계절순환의 원리가 담긴 것이다. 만물은 우주에 충만한 음기와 양기로 생겨나고, 자연의 순환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태극의 진리를 설파한다. 청동기 시대의 거울이나 고인돌, 암각화에 새겨진 원도 우주와 태양, 하늘을 상징하는 태극이라고 학자들은 해석한다.
최근 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태극 무늬 목제품이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7세기 초반에 제작된 봉함목간(封緘木簡ㆍ관청의 물건이나 공문서를 운송할 때 봉투처럼 사용)을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해봤더니 태극무늬가 선명하게 나타났단다. 그동안 가장 오래된 태극문양으로 알려진 경주 감은사지 장대석의 태극무늬(682년)보다 오래됐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태극무늬는 한민족의 원형이라고 할 만큼 오랜 연원을 갖고 있다. 그런 터에 이번 목제품 발굴은 이를 구체적으로 재확인시켜주는 괄목할 만한 성과라고 하겠다. 태극문양의 근원이 중국에 있다는 일부 주장과 상식을 뒤엎을 수 있는 주체적 사료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태극무늬가 이후 어떻게 국기에 들어오게 됐을까? 고종은 박영효 일행이 일본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883년 3월에 국기로 정식 선포하고 그 이듬해엔 태극기 문양의 우표도 발행한다. 일제시기를 거치며 국기 기능을 한반도에서 사실상 상실한 태극기는 1948년 7월 제헌의회에서 다시 국기로 채택됨으로써 햇빛은 본다.
정확히 지금 형태의 국기가 결정된 것은 이듬해인 1949년 10월로 문교부가 '국기 제작법'을 고시하면서였다. 다시 말해 현재 우리가 보고 게양하는 태극기는 올해로 딱 60돌을 맞은 셈이다. 그래서 태극무늬 목제품 발굴을 계기로 태극기를 더욱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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