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金)으로 본 시팡구(Cipangu)와 여송국은 콜롬비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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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송연(呂宋煙, Cigar)으로 본 이상하고 한심한 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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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는 Dios-corea 신이 내린 조선(고려)단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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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모란(天竺牡丹), 다알리아(Dahlia) 대고려 http://blog.daum.net/han0114/1705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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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2차대전에서 승리한 서양세력 특히 영국, 미국이 주동이 되어 현 근대사를 만들었고 완성시켰다고 보는데 북아메리카 대륙이 신대륙이란 사실을 강조시키위해 등장시킨 가공되거나 허상의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실제 이 콜럼버스가 취한 행동은 속된 말로 천하에 둘도 없을 도둑놈이었고 무고한 원주민들을 닥치는데로 살상하는 살인마적인 행동을 서슴치않았다는 사실에서 이와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대사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신대륙의 영웅이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을 믿는 자식들이라 했다.
어찌 이러한 행위가 정당할 수 있으면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하고 보는 심리에서 나온 광기라고 할 수 있고 최후에 가서라도 절대 인간이 특히 종교인이 스스로 취해서는 안될 행위를 그는 아무 죄의식없이 자행하였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것을 신대륙이란 상징으로 정당화하는 면이 없지 않다.
콜럼버스가 접한 곳은 아무런 죄가 없고 순박한 원주민이었다.
원주민은 처음 콜럼버스일행이 힘들 것을 걱정하면서 먹을 것과 편의 제공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눈이 디집어져 그들은 원주민에게 은혜를 살인으로 되값는 철면피같은 파렴치한 잔인성과 음흉함을 들어내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악행과 학살까지 자행하였다는 것은 천하에 둘도 없는 상도적놈인 것이다.
이러한 상이 그들에게 신대륙의 상징이 되었고 또한 종교가 되었다.
어쩜 이러한 것이 그들 종교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교인은 비종교인 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본이 될 수 있는 행동을 찾아 마땅히 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러한 상식을 도외시하고 비종교인보다 못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나는 그들을 저질 부류로 취급하는 것이고 역사망나니라 하여 신성한 역사이름으로 취급할 수 없는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현 근대사에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현 기독교가 그를 종교인으로 취급하고 미국이 콜럼버스를 신대륙으로 상징하여 영웅시하기 보단 차라지 역사에서 지워버려야 할 대상이라고 본다.
이러한 것이 오해가 되어
파괴의 역사
살인의 역사
분열의 역사
조작의 역사
강탈의 역사
불균형의 역사
부조리의 역사에 중심에 있었다는 오해를 받는 것이다.
기록에 나오는 것을 보면 이 콜럼버스는 부와 명예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조작과 왜곡, 악의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을 성 싶은 악질적인 인물로 실제 양심있는 학자들에게 비판받는 것은 물론이다.
또한 당시 항해사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상식인 지리학도 부족하여 서투른 항해사란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때문에 인류적으로 볼 때 그는 영웅이기 보단 도둑놈이고 건설적이기 보단 파괴적이었고 정의 보단 실리를 중요시한 저질이었으며, 공영이기 보다는 이기적인 것을 탐하고, 평화보단 전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한 약한자 위에 군림하고자 했으며 힘없는 자가 가진 모든 것을 강탈하고 갈취하는 인간말종이었을 뿐이다.
이 파렴치하고 추악한 콜럼버스를 무엇때문에 근대사에서 띄우고 영웅시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진실이 그러하다면 그것은 곧 인류를 파괴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들 역사에서 개척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미화 될 수 있는 성질이라고 볼 때 그들의 역사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파괴나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은 역사가 그들의 역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힘의 역사, 역학적인 면만 중요시하게 하는 그들의 근본적인 역사철학사상이라고 정리할 때 현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명경시와 파괴적인 상황은 어쨌던 그들이 뿌린 씨앗과도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어 안타까움만 더 할 뿐이다.
그래서 이렇듯 세계가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지구멸망을 아시아인 보다 미국인이 더 믿는단다.
현 근대사가 이런 파괴적이고 잔인한 인물인 콜럼버스를 영웅시한다는 것은 인류의 미래역시 미국인이 걱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진행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뿌리깊은 파괴성을 묵인하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을 반드시 우리 힘으로 시정케 하고 불안한 세상을 못본척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늦지만 이제라도 흔들리고 미래가 불투명한 세상을 제자리에 반듯하게 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 삼한역사의 정치철학사상과 가르침이 비로소 그 자릴 차지 한다면 인류가 공히 느끼는 심각한 문제는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본 블로그는 세계삼한역사 찾기하는 것이고 바람직한 올바른 길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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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크리스토퍼 콜럼버스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이탈리아어: Cristoforo Colombo, 스페인어: Cristóbal Colón 크리스토발 콜론, 1451년경-1506년 5월20일)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의 탐험가이자 항해가이다.
Arms of Columbus
탐험
그는 1484년 포르투갈의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왕이 허락하지 않자, 에스파냐로 갔다. 당시 에스파냐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있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던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였고, 그가 발견하는 것의 10%를 콜럼버스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 하에 선박 2척(핀타호와 니나호) 을 내주고 과거에 죄를 지은 자들은 면죄해 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주었으며, 또 팔로스항(Palos)에 사는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선박인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계약 후에도 이사벨 여왕이 계속 지원을 미뤘기 때문에, 실질적인 항해까지 걸린 시간은 6년이나 되었다.
콜럼버스의 항로
아메리카 탐험
콤럼버스 항로
The Colombus map was drawn circa 1490 in the workshop of Bartolomeo and Christopher Columbus in Lisbon.
Columbus's geographical conceptions.
그가 아메리카 탐험을 시작한 것은 당대 유럽인이 가지고 있던 중요한 사명인 기독교의 전파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순수한 탐구심이 아닌 새로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황금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실제로 그의 항해일지를 보면 금과 보물에 대한 언급이 10일 분량에 수백 차례나 등장한다. 또한 이사벨 여왕과의 계약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부의 축적이었다. 그는 총 4차례나 아메리카 대륙을 항해하였는데, 아메리카에 상륙한 것은 그 가운데 제1항해의 일이다.
Handwritten notes by Christopher Columbus on the Latin edition of Marco Polo's Le livre des merveilles.
제1회 항해의 출범은 1492년 8월 3일이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마 제도(Bahamas)에서 과나하니 섬(추정)에 도달했고, 이 섬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구세주의 섬)이라 칭하였다. 이 날은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어서 그는 쿠바·히스파니올라(아이티, Haiti)에 도달하여, 이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칭하였다.
이후 항해 도중, 산타마리아호가 파손되어 한 섬에 약 40명의 선원을 남긴 후에 이스파니올라(후 스페인)라고 이름지었다.
1493년 3월에 귀국하여 왕 부부로부터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되었고, 당시 그가 가져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콜럼버스의 달걀’이란 일화도 생겨났다. 17척에다 1,500명의 대선단에 의한 제2회 항해(1493년)는 그의 선전에 따라 금을 캐러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히스파니올라에 남겨 두었던 식민지 개척자는 인디오의 저항으로 전멸해 버렸으나, 콜럼버스는 여기다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토지를 에스파냐인 경영자에게 분할해 주고 인디언에게는 공납(貢納)과 부역(경작과 금 채굴)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것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학대 ·살육하였으며 노예화하였다. 이 항해에서 에스파냐로 보낸 산물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오자(1496년) 문책당하였다.
제3회 항해(1498년∼1500년)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오리노코 강 하구(河口)를 발견하였다. 콜럼버스는 제3회 항해에서 칼데아 신아람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선원 두 명을 데리고 갔다. 목적지인 남아시아에 다다르게 될 경우, 에덴동산의 거주자들이 이 두 언어를 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리노코 강 하구를 에덴동산의 관문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신의 명으로 불꽃의 검을 들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케루빔이 자신의 배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았다.[1] 제3회 항해 도중, 히스파니올라에서 내부 반란으로 그의 행정적 무능이 문제화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제4회 항해(1502∼1504)의 허가는 바스쿠 다 가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때문인 것으로 보이나, 그 사정은 명백하지 않다. 이 항해에서 그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고 가장 고생스러운 항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Columbus and Queen Isabella. Detail of the Columbus monument in Madrid (1885).
의의
그는 죽을 때까지(1506년) 자기가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었는데, 그의 서인도 항로 발견으로 인하여 신대륙이 비로소 유럽인의 활동무대가 되었고, 현재의 미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 탄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토대가 생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의 신대륙 발견 이후 일부 유럽인들의 침략적인 행위로 원주민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혹자는 선사 시대에 아시아인들이 이미 베링 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하였고 그 뒤로도 바이킹들이 발견 한 바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당시에 아메리카 대륙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비판
두번째 항해동안 콜럼버스와 그의 부하들은 역사가들에 의해 '집단학살'이라 불리운 정책을 편다. 타이노 인디언들은 조직적으로 노예화되고 살해되었다. 수백이 유럽으로 팔려갔고 다수는 과정에서 죽어갔다. 나머지 인디언들은 금을 가져오게 하여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수족을 잘랐다. 실제로 금이 그렇제 많지 않아서 많은 인디언들은 도망갔고, 스페인 인들은 이들을 사냥하여 죽였다. 인디언들은 저항하였으나 스페인의 무기가 훨씬 우월했고 유럽에서 옮아온 전염병이 그들을 파괴했다. 절망 속에서 인디언들은 자식을 동반으로 집단자살하였다. 2년만에 25만에 달하던 타이노 원주민의 수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나머지는 노예화되고 사망률이 높은 대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60년만에 타이노 인디언은 수백만이 남았고, 100년이 더 흐른 뒤에는 손에 꼽을 인구만이 남았다. 이러한 잔혹한 정복자로서의 콜럼버스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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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버스의 항해
[콜럼부스가 목표로 한 황금향 indies-인도네시아 자바해]
[콜럼부스가 indies라고 착각한-서인도제도]
콜럼버스의 1차 항해(1492년 8월∼1493년 3월)
콜럼부스는 네 차례의 탐험을 감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1차 탐험에 대해서는 다른 탐험에 비해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져 있다. 그것은 항해일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이 항해일지를 중심으로 콜럼부스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가고자 했던 목적지는 어디였고, 왜 그곳으로 가려고 했었는지를 탐험의 경과와 함께 분석해 볼 것이다. 먼저 콜럼부스가 탐험의 목적지로 상정하고 있었던 곳이 어디였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First voyage.
Captain's Ensign of Columbus's Ships
콜럼부스가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1차 탐험에 나서게 된 것은 1492년 8월 3일이었다. 콜럼부스는 3 척의 작은 카라벨선과 약 90 명의 선원들과 함께 스페인 남해안의 팔로스(Palos) 항을 출항하여, 카나리아(Canaria)에 잠시 기항(寄港)한 뒤 대서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곧장 항해하였다.
Replica of Santa Maria
콜럼부스는 10월 3일에 아직 생기가 있고 열매도 그대로 달려있는 많은 수초와 도요새 등을 목격하고 자신이 해도상에 표시된 육지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에 늦게 도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계속 항해하겠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나의 목표는 인디즈(Indies)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어 탐험의 목적지가 인디즈였다는 사실을 뚜렷히 밝히고 있다. 10월 10일에는 장기간의 항해에 지친 선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콜럼부스는 선원들에게 "앞으로 발견하게 될 땅으로부터 얻게 될 이익을 곧 분배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무마하면서, "선원들이 아무리 불평한다 하더라도 자신은 인디즈(Indies)로 가야만 하고, 그곳을 발견할 때까지 항해를 계속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콜럼부스가 탐험의 목적지로 삼았던 곳은 1차적으로는 인디즈(Indies)였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인디즈(Indies)라는 지명을 당시인들이 어떻게 사용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15세기 교양인들에게는 갠지즈(Ganges) 강 너머 아시아의 모든 땅들이 인디즈(Indies)라는 한마디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콜럼부스가 탐험의 목적지로 상정하고 있었던 인디즈는 당시까지 유럽인들에게 막연하게 알려져 왔던 안틸리야(Antillia), 카타이, 씨팡고 등을 모두 포괄하는 명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콜럼부스의 지리학적인 지식에 의하면, 이곳들은 모두 대서양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콜럼부스는 대서양을 서쪽으로 횡단해 가더라도 이들 중 어느 곳엔가는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콜럼부스는 카나리아 제도를 출항하고 나서는 계속 서향(西向)(270°) 침로를 고수하였다. 10월 6일 밤 핀타호 선장 알론소 핀손(Martin Alonso Pinz n)이 남서 침로(235°) 로 항해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여 왔으나, 콜럼부스는 그가 씨팡고로 가려고 한다는 의도를 간파하고 "대륙으로 먼저 가고 나서 섬(Cipango)으로는 나중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면서 그의 제의를 거절하고, 자신의 목적지는 씨팡고 보다는 대륙이었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로부터 콜럼부스는 먼저 인디즈 즉, 아시아 대륙에 도착하고 나서 씨팡고로 가려고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페인 국왕과 체결한 계약서 상에 나타난 탐험의 공식적인 목적은 "신의 도움으로, 대양상에 있는 섬들(islands)과 본토(mainland)를 발견하고 정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막연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콜럼부스가 상정하고 있었던 실제적인 목적지는 아시아 대륙과 씨팡고 섬이었다.
콜럼부스의 지리학적인 지식에 의하면, 아시아는 유럽에 매우 가까이 있는 대륙이었으며, 씨팡고는 아시아 대륙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황금향이었기 때문에 대서양을 횡단함으로써 유럽에 가까운 인디즈(Indies)에 도달한 뒤 씨팡고로 가려고 모험 항해를 감행하였던 것이다.
10월 10일 항해에 지친 선원들의 반란을 잘 무마한 콜럼부스의 탐험대는 10월 12일 금요일 아침에 바하마(Bahama) 군도(群島) 중 하나인 산 살바도르(San Salvador)를 초인(初認, made-out)했고, 거기에 상륙하여 스페인 국왕의 이름으로 소유하였다.
이후 콜럼부스 탐험대는 산타 마리아 데 라 꼰셉시온(Santa Maria de la Concepcion), 페르난디나(Fernandina), 이사벨라(Isabella) 섬에 기항한 뒤 10월 28일 그가 후하나(Juana)라고 명명한, 쿠바(Cuba)에 상륙하였다. 이때까지 콜럼부스는 자신이 씨팡고 부근에 도착하였다고 생각하였다. 11월 21일에는 알론소 핀손이 조선하고 있는 핀타호가 무리에서 이탈한다. 이후 콜럼부스는 자신이 에스파뇰라(Espa ola)라고 부른 하이티(Hayti)로 항해한 12월 5일까지 쿠바의 북동 해안을 탐사하면서 머물렀다. 에스파뇰라 섬을 일주 탐사하면서 그는 구아카나가리(Guacanagari) 마을에서 원주민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 섬에서 그는 25일 새벽에 좌초로 산타 마리아(Santa Maria) 호를 잃었다. 이 때문에 탐험대에는 니나호 한 척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어 콜럼부스는 구아카나가리(Guacanagari) 부근에 요새를 건설하고 선원들을 잔류시킬 것을 결심한다. 그렇게 해서 건설된 요새가 나비다드(Navidad) 요새이다. 1493년 1월 6일 핀타 호가 재합류한다. 그리하여 콜럼부스는 잔류하고자 원하는 선원들을 나비다드 요새에 충분한 식량과 비품을 주어 남겨 놓고, 1월 16일 자신은 니나(Ni a) 호에 승선하고 핀타호와 함께 스페인을 향해 출항한다. 2월 18일 아조레스(Azores)에 도달했고, 3월 4일에 리스본에 도착하여, 이틑날 포르투갈의 죠앙 2 세의 사절로 온 바르톨로뮤 디아즈(Bartolomeu Dias)의 방문을 받는다. 그는 콜럼부스에게 하선하여 항해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콜럼부스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자신은 카스티야 왕의 승인서와 면허장(commision)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강제 구인을 면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3월 9일 포르투갈의 주앙 2 세를 알현하게 된다. 주앙 2 세의 호의로 선용품을 공급받고 난 뒤, 마침내 3월 15일 항해에 나선지 225일 만에 팔로스 항으로 귀항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Departure of the first voyage from the port of Palos, by Evaristo Dominguez, in the municipality of Palos de la Frontera.
Columbus claims the New World in a chromolithograph by the Prang Education Company, 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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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항해(1493년 9월∼1496년 6월)
1차 탐험으로 서인도 제도를 발견한 콜럼부스에게는 2차 탐험의 목적은 너무나 명백했다. 그것은 새로이 발견한 지역에서 황금과 기타 경제적인 이득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2차 탐험 직전에 카톨릭 국왕 앞으로 보낸 계획서에서 콜럼부스는 탐험의 목적과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콜럼부스는 탐험의 목적이 우선적으로 '식민사업(peopling and settling)'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見?nbsp;위해 약 2,000 여명의 스페인인들을 에스파뇰라에 정착시켜 3∼4 개의 식민시를 건설하려고 계획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이후 2 세기에 걸친 유럽인들의 해외 팽창의 역사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식민사업이었다. 콜럼부스의 1차 탐험은 단순한 탐험이었지만, 2차 탐험은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Second voyage.
콜럼부스는 1차 탐험에서 귀환한 직후 곧바로 2차 탐험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여 17 척의 배와 1천 2백 여명의 대원을 이끌고 1493년 9월 25일 카디스(Cadiz) 항을 출항하였다. 이번에는 1차 탐험 때와는 달리 남서쪽으로 항로를 잡았다. 도미니카(Dominica)에 처음으로 도착한 탐험대는 마리갈란테(Mariegalante), 몬세라테(Monserrate), 성 마르텐(St. Martin), 푸에르토 리꼬(Puerto Rico) 섬을 경유하여 1493년 11월 28일 1차 탐험 때 일행 중 일부를 잔류시켜 놓은 나비따드(La Navidad) 마을 앞바다에 정박하였다. 그러나 나비따드 마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잔류자들도 모두 살해당하였다. 많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1차 탐험 때 아직 그 정체가 불확실한 영토를 발견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만한 경제적 성과를 올리지 못한 데 대해 이미 궁정에서는 온갖 비난과 의혹이 떠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콜럼부스로서는 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과 혹평의 근본적인 원인이 그들의 눈앞에 황금이라는 증거품을 보여주지 않은 데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콜럼부스는 나비따드 잔류민들이 살해당한 비극적인 사건을 맞이하였음에도 그 전말을 밝히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는 일 보다는 그들이 수집해 놓았을 금을 찾아내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사태를 수습한 콜럼부스는 새로운 식민시(植民市)로 '이사벨라'(Isabella)를 건설하게 했다. 콜럼부스 일행은 이곳에서 머물면서 이사벨라 마을의 건설을 지휘하는 한편, 황금과 향료 및 기타 상업적인 가치가 있을만한 산물들에 대한 탐사 작업에 전념하였다. 1494년 1월 6일 콜럼부스는 원주민들이 금이 많이 있다고 얘기한 니티(Niti)와 씨바오(Cibao) 방면으로 오헤다(Alonso de Hojeda)와 고르발란(Gin s de Gorbal n)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약간의 금 조각을 발견하고 각각 1월 20일과 21일 이사벨라로 귀환하였다.
신도시 이사벨라의 건설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가자 콜럼부스는 1494년 3월 12일 동생인 디에고(Diego Columbus)에게 이사벨라를 맡기고, 본격적인 탐사 작업에 나섰다. 콜럼부스는 오헤다를 대동하고 에스파뇰라 섬 내부로 깊숙히 들어갔는데, 바오 강(Rio Bao)과 야니코(Rio Janico) 강 하류 합류 지점에서 사금(砂金)이 발견되었다. 콜럼부스는 이곳에 산토 토마스(Santo Tomas)라는 마을을 건설하여 50 여명의 인원을 잔류시켜 원주민들을 동원해 사금을 채취하게 하고, 이곳을 마르가리트(Mos n Pedro Margarit)에게 맡기고 자신은 3월 29일에 이사벨라로 귀환하였다. 이사벨라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많은 이주민들이 사망하는 등 처참한 상황이었다. 여기다가 산토 토마스도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위험한 지경에 처하는 등 정세가 좋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쿠바가 섬인지 아니면 대륙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4월 24일 콜럼부스는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에스파뇰라 섬을 출항하였다. 콜럼부스 일행은 쿠바의 남해안을 따라 탐사를 계속하여 멕시코와 유카탄(Yucatan) 반도를 발견할 기회를 맞았으나 기상 악화로 항로를 이사벨라 쪽으로 변경하여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콜럼부스는 쿠바가 섬이 아니라 대륙(continent)이라는 것을 전 선원들에게 선서하게 하였다. 선원들이 선서하도록 강요받은 것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355 리이그 거리를 항해한 결과 쿠바는 그들이 여태까지 본 섬들보다 더욱 크므로, 그들이 볼 때 이 해안은 분명히 아시아 대륙의 일부임에 틀림없고 만약 조금만 멀리 항해했다면 문명인들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본토 발견의 대업을 달성했다고 생각한 콜럼부스는 병으로 앓아 눕는 처지가 되어 더 이상 탐사를 계속하지 못하고, 세 척의 배는 쿠바 서해안과 자마이카 남해안을 일주하여 1494년 9월 29일 이사벨라로 귀환하였다.
한편, 심각했던 식량 부족 문제는 1494년 2월 스페인으로 파견되었던 토레스(Antonio de Torres)가 10월 이사벨라로 귀환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토레스는 포르투갈과의 영토 협상에 대비하기 위해 식민지의 통치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고 콜럼부스 자신은 즉시 귀국하라는 국왕의 명령도 전하였다. 그러나 콜럼부스는 항해로 인한 병환과 경제적 이득이 될만한 이렇다할 것들을 수집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귀국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식량 문제가 해결되자 에스파뇰라 섬의 문제는 어느 정도 수습된 것처럼 보였으나, 1494년 겨울에는 이전부터 불온하였던 원주민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결정적인 전투로 비화되었다. 이 전투에서 1,500 여명의 원주민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이들 가운데 500여명을 1495년 2월말 스페인으로 귀환하는 토레스(Torres) 편으로 카스티유로 보냈다.
원주민과의 전투는 10개월 이상을 끌었으며 1496년 초까지는 에스파뇰라 섬에 거주하는 모든 부족을 복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의 상황과 콜럼부스의 실정(失政)에 대한 마르가리트(Margarit)와 부일(Buil) 신부의 보고는 국왕의 콜럼부스에 대한 신용을 땅에 떨어뜨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식민지 현황을 시찰할 목적으로 1495년 8월 5일 아구아도(Juan Aguado)가 파견되기에 이르렀는데, 그는 1495년 10월 이사벨라에 도착하였다. 그의 임무는 총독으로서 콜럼부스가 식민지에서 행한 일에 대해 조사하여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신임장에는 그가 "스페인 국왕의 대표로 파견된 자로서, 섬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신임하고 신뢰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식민지에 대한 통치권이 아구아도에게 일임된 것은 아니었으나, 식민지인들은 콜럼부스와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5 개월여 동안이나 논쟁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 아구아도(Aguado)는 식민지 현황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해 가고 있었다. 아구아도의 보고서는 "이사벨라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프거나, 불만에 가득차 있으며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고 있고, 몸이 성한 사람들은 섬 전역에 걸쳐 금을 채집하고 원주민들을 노예로 잡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콜럼부스로서는 아구아도의 보고서가 국왕에게 전달되기 전에 고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스페인으로 귀환하려고 마음 먹었을 때 태풍이 내습하여 이사벨라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사벨라를 재건하고 귀환할 배를 준비한 뒤, 콜럼부스는 이사벨라의 통치를 바르톨로뮤에게 위임하고 두 척의 배를 이끌고 1496년 3월10일 귀항길에 올랐다. 그러나 콜럼부스는 한 달여 동안 서인도 제도 근방에 머물러 있다가 4월 20일에야 구아델루뻬(Guadeloupe)를 출항하여 스페인으로 향하였다.
콜럼부스는 1496년 6월 11일 카디스로 귀항했는데, 이번에는 1차 탐험 때와는 달리 반응이 냉담하였다. 막대한 투자에 대한 상업적인 성과가 너무나 보잘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2차 탐험에서 이룩한 성과는 신대륙에 최초의 이민도시인 이사벨라와 산토 토마스 마을을 건설한 것과 포로로 잡은 원주민들을 스페인으로 보낸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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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항해(1498년 5월∼1500년 9월)
콜럼부스는 두 차례에 걸친 탐험으로 에스파뇰라와 푸에르토 리코(Puerto Rico), 자마이카(Jamaica), 쿠바(Cuba) 등을 발견했고, 식민 도시로 이사벨라(Isabella)와 산토 토마스(Santo Tomas)를 건설하였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기대했던 금광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대한(大汗)이 다스리는 중국 본토(Cathay)에도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콜럼부스는 3차 탐험 때부터는 자기의 탐험이 단순하게 상업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인 성념(聖念, holy sprit)에 의해 고취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궁정 안에서는 콜럼부스를 비난하는 여론이 나오기도 했지만, 카톨릭 국왕은 그를 여전히 신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497년 4월 말에서 6월 중순 사이에 카톨릭 국왕은 콜럼부스의 권리와 직위 및 특권을 재확인하고, 궁정의 비용으로 에스파뇰라에 정착시킬 300 여명의 지원자를 모집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카톨릭 국왕은 여론을 의식하여 곧 바로 출항할 것을 명하지는 않았다. 콜럼부스가 출항을 허가받은 것은 포르투갈에서 1497년 7월 8일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출항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난 뒤였다.
Third voyage.
Location of city of Sanlúcar de Barrameda, the starting point for Columbus's third journey.
콜럼부스는 1498년 5월 30일 5 척의 배를 이끌고 상루카르(Sanlucar) 항에서 출항하였다. 그로서는 세간의 비난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금과 대륙을 발견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이번 항로는 '선교사 존'(Prestor John)의 대륙과 더 많은 황금을 발견하기 위하여 이전 항로보다 더 남쪽으로 항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가 남쪽 항로를 택한 이유는 포르투갈인들이 기네아(Guinea)산 금을 발견한 지역인 시에라 레온(Sierra Leone)과 동위도인 북위 10도 선을 따라 항해함으로써 황금이 다량 채굴되는 위도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5 척으로 구성된 탐험대는 고메라(La Gomera) 섬에서 이진으로 나뉘어 세 척의 배는 카르바알(Carbajal)의 통솔 하에 곧장 에스파뇰라로 향하게 하고, 자신이 지휘하는 두 척의 배는 베르데(Verde) 섬을 경유하여 이전 항로 보다 훨씬 남쪽 항로로 항해하여 7월 31일 서인도 제도의 트리니다드(Trinidad) 섬에 도착하였다. 3차 탐험에서 콜럼부스는 베네주얼라의 아라야(Araya) 반도의 한 지점인 에스쿠도 블랑코(Escudo Blanco)에 도달하였으나 여기서 항로를 북쪽으로 바꾸어 남미 본토를 발견할 절호의 기회를 상실하였다. 콜럼부스 일행은 8월 15일 마가리타(Margarita) 섬을 발견하고 바로 에스파뇰라 섬으로 향하였다.
에스파뇰라에는 이사벨라(Isabella)와 산토 토마스(Santo Tomas)라는 식민시가 건설되어 있었으나, 바르톨로뮤 콜럼부스(Bartholomew Columbus)는 이사벨라를 포기하고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라는 새로운 마을을 건설하였다. 콜럼부스 일행이 산토 도밍고에 도착했을 당시 에스파뇰라는 콜럼부스가 사법(司法) 담당자(chief Justice)로 임명했던 롤단(Francisco Roldan) 일당의 반란에 직면하고 있었다. 롤란은 부하 70 여명과 함께 마구아나(Maguana) 부족과 연합하여 콜럼부스 형제의 일방적이고 융통성 없는 통치 정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획책하였던 것이다. 한편, 카르바알(Carbajal)이 인솔한 세 척의 배가 롤단이 지배하고 있던 사라구아(Xaragua) 지역으로 들어감으로써 롤단 일당의 세력은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거의 일 년여를 끈 롤단 일당의 반란은 콜럼부스가 롤단을 다시 그의 지위로 복귀시키고 그에 대한 모든 죄목을 사면하고, 그의 휘하의 사람들 중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채집한 금과 노예를 동반하고 스페인으로 자유로이 귀환할 것을 보장함으로써 마무리 지어졌다.
롤단 일당의 반란을 겪고 난 콜럼부스는 식민지의 통치 방식을 전환하였다. 그것은 스페인 정착민들에게는 일정한 경작지를 분배하는 동시에 그곳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노예로 할당하는 방식이었다. 원주민들 입장에서는 이 방식이 가혹한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환영하였고, 스페인 정착민들도 이 방식이 보다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고 할당받은 지역에서 발견되는 금을 더 많이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호하였다. 그리하여 1500년 경에는 콜럼부스는 식민지를 일종의 공포정치를 통하여 통치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통치 방식은 향후 신대륙 식민지 지배의 한 전형이 되었다.
궁정에서 콜럼부스에 대한 평가는 갈수록 하락하고 있었다. 서인도 제도에서 귀환하는 사람들은 탐험에 나설 때 약속받은 급료를 지급받지 못한 것에 대해 콜럼부스를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페인 국왕은 1499년 3월 21일 식민지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보바디야(Francisco de Bobadilla)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에게는 콜럼부스에 대한 반란 사건을 취조하고 반란에 참여한 자들을 처벌할 권한이 주어졌다. 1499년 5월 21일 스페인 국왕은 보바디야를 콜럼부스를 대신하는 에스파뇰라 총독(Governor)으로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보바디야는 어떠한 사람이라도 스페인으로 귀환시킬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5월 26일에 보바디야에게 신임장을 발부하였으나, 양 국왕은 콜럼부스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여 보바디야를 에스파뇰라로 파견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 콜럼부스가 에스파뇰라 섬을 제노아인에게 팔아넘기는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러한 상황은 스페인 국왕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콜럼부스에게서 돌아서게 만들어 마침내 양 국왕이 신임 총독의 파견을 결정하였다. 보바디야는 1500년 8월 23일 산토 도밍고에 도착하였다.
보바디야가 산토 도밍고에 도착할 당시 콜럼부스는 베가(La Vega)에, 바르톨로뮤는 사라구아(Xaragua)에 머물고 있었고, 디에고가 산토 도밍고의 통치를 담당하고 있었다. 산토 도밍고에 도착한 신임 총독 보바디야는 산토 도밍고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장악하고 디에고 콜럼부스(Diego Columbus)를 체포하여 감금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뒤이어 보바디야는 1500년 9월 15일 자신이 신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콜럼부스에게 정식으로 통지하였다. 그러나 콜럼부스는 자신은 양 국왕과 맺은 계약에 의해 총독인 것이며, 양 국왕은 아직 자기에게서 총독의 지위를 박탈하지 않았다고 완강하게 주장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보바디야는 단호한 조치로 나갈 수밖에 없어서 콜럼부스를 체포하여 감금하고, 뒤늦게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에 도착한 바르톨로뮤(Bartholomew Columbus)도 체포하였다. 이로써 콜럼부스 삼 형제에 의한 에스파뇰라 식민지 통치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콜럼부스 삼 형제는 1500년 10월 초 에스파뇰라를 출발하여 10월 하순에 카디스 항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콜럼부스의 3차 탐험은 비참하게 끝이나고 말았다. 총독의 지위는 박탈당했고, 그동안 애써 모아놓은 전 재산은 몰수 당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사슬에 묶여 압송되는 치욕스런 경험을 체험한 콜럼부스는 이후 종교적인 신비주의로 기울게 된다. 이러한 종교적인 신비주의는 자기가 발견한 서인도 제도가 성서에 기록된 지상 낙원(earthly paradise)이라는 확신으로까지 진전되었다.
이처럼 자신이 호언하던 금이나 향료 등 상업적인 이익을 거두지 못하여 세간 사람들로부터 '모기 제독'(Admiral of the Mosquito)이라는 비난을 당하고 총독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죄인으로 취급되는 등 갖은 고통을 겪은 콜럼부스는 점차 종교 속에서 위안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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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항해(1502년 5월∼1504년 11월)
1500년 10월말 콜럼부스가 죄인의 몸으로 체포되어 카디스 항에 도착할 당시 스페인 국왕은 그라나다(Granada)에 체류하고 있었다. 이는 나폴리 문제를 프랑스의 루이 7세(Louis XII)와 협의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하여 콜럼부스 형제는 사슬에 묶인 채로 세빌랴의 쿠에바스(Las Cuevas) 수도원으로 압송되어 국왕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페인 국왕은 1500년 11월 11일 프랑스와 그라나다 비밀 조약으로 나폴리를 양분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되었다. 카톨릭 국왕은 콜럼부스가 죄인으로서 체포되어 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으나, 콜럼부스 형제를 자유롭게 풀어 주고 입궐(入闕)할 수 있도록 2천 두카트(Ducat)의 돈을 하사하였다. 콜럼부스가 스페인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그라나다에 도착한 것은 1500년 12월 17일 이었다. 콜럼부스는 보바디야가 에스파뇰라 섬에 있는 자신과 형제들의 소유물을 불법적으로 몰수하였다고 강력하게 항의하고 보바디야를 처벌해 줄 것과 자신의 총독으로서의 지위와 특권, 권리 등을 회복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스페인 국왕은 그의 형제들을 호의로 맞아주는 것 이외에는 이렇다할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바디야가 총독으로서 콜럼부스 형제의 재산을 몰수한 것은 정당하며, 몰수한 그 재산은 그가 차지해도 좋다는 것과 콜럼부스가 이주민들에게 지불하기로 약속한 급료는 약속대로 지불하고, 그 나머지의 10분의 9는 궁정에 귀속되고 나머지 10분의 1만이 콜럼부스 형제의 몫이 된다고 결정하였다. 그 사이 보바디야가 식민지를 자의적으로 통치한다는 사실이 전해져 1501년 9월 3일 오반도(Nicolas de Ovando)가 새로운 식민지 총독으로 임명되어 1502년 2월 13일 에스파뇰라로 파견되었다.
Fourth voyage.
Columbus intimidates natives by predicting lunar eclipse
식민지에서 모은 전 재산을 압수당하고, 총독의 지위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두 형제 모두 사슬에 묶여 압송당한 굴욕적인 경험을 체험한 콜럼부스는 자신의 탐험과 신대륙 '발견'을 정당화하고 그것이 신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자서전을 쓰려고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콜럼부스는 자서전으로 『예언의 서』(El Libro de las Profecias)를 집필하려고 하였으나,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그 사이 콜럼부스는 새로운 탐험을 계획하면서 국왕에게 그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1502년 2월 6일자 편지에는 자신의 항해에 대한 경험과 능력 등을 자신하면서 새로운 탐험을 지원해 줄 것을 국왕에게 요청하고 있다. 콜럼부스의 인내심있는 요청에 스페인 국왕은 1502년 3월 14일 그의 4차 탐험을 승인하고 탐험을 준비하는 데 사용하도록 10만 페소(peso)의 금화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건이 있었다. 에스파뇰라 섬에는 결코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콜럼부스는 탐사 작업에 적합한 선박 4 척을 구입하여 1502년 5월 11일 카디스(Cadiz) 항을 출항하였다. 이번 탐험의 주 목적은 쿠바와 3차 탐험 때 발견한 남미 본토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는 수로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콜럼부스는 이 수로를 발견하기만 하면 인도양으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먼저 인도로 출발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에게 전하는 서한까지 지참하였다.
4차 탐험의 항로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체로 2차 탐험 때의 항로를 취한 것으로 보이며, 기상 조건이 양호하여 대서양 횡단 22일만인 6월 16일 도미니카(Dominica) 섬 남쪽의 마르티니크(Martinique) 섬에 도착하였다. 그 동안의 경험으로 이 지역에서는 여름철에 태풍이 내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콜럼부스는, 비록 국왕의 명에 의해 에스파뇰라에 입항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태풍을 피하기 위해 산토 도밍고에 입항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새로 부임한 오반도(Ovando) 총독에게 요청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기상은 그의 예견대로 악화되어 콜럼부스의 탐험대는 6월 29일에는 에스파뇰라 부근까지 떠밀렸고, 6월 30일에는 마침내 태풍이 내습하여 산토 도밍고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콜럼부스 탐험대는 제각각 흩어져 쿠바 남해안까지 표류하였다. 태풍을 피하고 난 탐험대는 아주아(Puerto Viejo de Azua)에서 재집결하여 10여일 정도의 휴식을 취한 뒤 다시 항해에 나서 1502년 7월에서 10월까지 온두라스(Honduras), 니카라구아(Nicaragua), 코스타 리카(Costa Rica) 연안을 탐사하면서 인도양으로 통하는 해로를 발견하는 작업에 전념하였다. 1502년 10월 말에는 파나마의 베라구아(Veragua) 부근까지 탐사하여 원주민들로부터 금을 수집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 원주민들로부터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암바(Ciamba)와 씨구아레(Ciguare) 지방에 금과 향료 등이 풍부하게 있다는 정보도 듣게 되었는데, 콜럼부스는 이 씨구아레(Ciguare)를 갠지즈 강 근처에 있는 까띠가라(Cattigara)와 동일시 하였다. 콜럼부스는 이 지방으로 가기 위하여 파나마(Panama) 동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11월 2일 푸에르토 벨로(Puerto Bello)를 거쳐 11월 26일에는 레트레베테(Retrevete)까지 이르렀으나 역조와 악천후, 장기간의 항해로 인한 선원들의 사기 저하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난 콜럼부스는 결국 회항을 결심하여 1503년 1월 6일 악천후 속에서 황금이 발견되었던 베라구아 부근의 벨렌 강(Rio Bel n)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콜럼부스는 파나마 지협(地峽)을 발견하여 탐험의 목적을 달성할 절호의 기회를 상실하였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벨렌 강 하구에 도착했지만, 이틑날부터 폭풍우가 몰아쳐 2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폭풍우로 항해를 한다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한 형편이었고 1월 말이 되자 강 입구는 폐쇄되어 오도 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모든 상황이 절망적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콜럼부스는 신의 목소리(voice of God)를 다시 한 번 듣게 된다.
콜럼부스는 이곳에 마을을 세워 바르톨로뮤에게 맡겨 금광을 찾아보게 하고, 자신은 스페인으로 귀항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세워진 마을이 산타 마리아 데 벨렌(Santa Maria de Bel n)이었다. 이 마을은 남미 본토에 세워진 최초의 식민 도시였다. 콜럼부스는 이곳에서 4월 16일까지 머물러 있다가 20 여명의 인원을 남겨놓고, 스페인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식량을 수급하고 선박을 수리하기 위해 산토 도밍고로 향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에 겪은 악천후로 배는 파선 상태였고, 그나마 좀조개들이 선저를 파먹어 거의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결국 두 척의 배로는 더 이상의 항해가 곤란하다고 판단한 콜럼부스는 6월 25일 자마이카로 들어가서 피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콜럼부스를 포함한 116 명의 탐험대는 이곳에서 거의 일년여 동안 고립되게 되었다. 당시 이들이 자마이카에서 겪은 어려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였다. 그러나 디에고 멘데스의 죽음을 무릅쓴 행동으로 고립된지 일년여 만인 1504년 6월 29일 멘데스가 임대한 배에 승선하여 자마이카를 벗어날 수 있었다. 콜럼부스 일행은 산토 도밍고에서 휴식을 취한 뒤 출항하여 1504년 11월 7일 산루카르(Sanlucar) 항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2년 반에 걸친 콜럼부스의 4차 탐험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콜럼부스가 국왕으로부터 어렵게 허가받은 4차 탐험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애당초 목표로 하고 있었던 인도양으로의 수로는 발견하지 못하였고, 베라구아(Veragua)에서 발견한 금은 경제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룩한 것이 있다면 파나마의 베라구아 근처에 벨렌(Santa Maria de Bel n)이라는 남미 최초의 식민시를 건설한 정도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콜럼부스는 12년에 걸쳐 총 네 차례의 탐험을 감행하였으며, 탐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탐험의 목적을 점차 종교적인 것으로 정당화시켜 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콜럼부스의 1차 탐험은 단순하게 인디즈나 씨팡고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지만, 서인도 제도에 도달하여 자신이 아시아 대륙의 일부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다음부터는 금광과 향료, 기타 경제적인 이익이 될만한 자연산물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탐사를 계속하였다. 2차 탐험의 목표는 너무나 명백했다. 그것은 새로이 발견된 서인도 제도에 사람들을 이주시켜 금광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서인도 제도에서 발견된 것은 경제성이 없는 사금에 지나지 않았다. 궁정 내에서 자신에 대한 비난이 비등하게 되자 콜럼부스는 3차 탐험 때부터는 자신의 탐험에 선교적인 성격을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3차 탐험 때 죄인의 몸으로 압송된 뒤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총독의 지위도 박탈당하고, 국왕과 맺은 계약으로 보장받은 식민지에서 산출되는 수입에 대해서도 아무런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게 된 콜럼부스는 말년에는 더욱 신비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처럼 콜럼부스가 자신의 탐험을 선교적 동기로 정당화하게 된 것은 불행했던 그의 인생 말년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대서양 탐험을 계획하고 감행하게 된 것이, 여러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지를 회복시키고 이교도를 개종시키려는 선교적 목적 때문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종교적 열정이 완전히 퇴색하지 않은 중세 말기에 서인도 제도의 몇몇 섬들을 발견한 것 이외에는 이렇다할 상업적인 이익을 올리지 못한 콜럼부스가 자신은 신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으며, 자신은 신이 계시해 준 신성한 목적을 완수하도록 '선택받은 도구'(chosen vessel)라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콜럼부스가 당시로서는 무모한 대양 항해라는 모험을 하면서까지 금과 향료 등 경제적인 이익을 얻으려고 아시아 대륙이나 인디즈로 가려고 했던 참된 동기는 어디에 있었을까? 개인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콜럼부스로서는 탐험에 소요된 경비를 벌충해야만 했고, 탐험에 동참한 선원들에게도 합당한 보상을 해 주어야 했다. 게다가 탐험을 후원해 준 스페인 국왕에게도 투자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경제적인 이익을 올려야만 했다. 가난한 이방인인 콜럼부스로서는 새로운 영토를 발견하여 그곳에서 막대한 이익을 획득함으로써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으며, 귀족(Don)이자 대양의 제독(Admiral), 총독(Governor)이자 식민지의 부왕(Viceroy)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 에 콜럼부스는 황금에 대해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탐험에 동참했던 많은 선원들과 탐험을 후원해 준 스페인 궁정을 고려할 때, 이러한 개인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해석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콜럼부스의 대서양 탐험에 대한 충분히 만족할만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역사적인 사건은 한 개인에 의지하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형성된 구조(structure)라는 커다란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 점을 상기한다면, 콜럼부스 탐험대로 하여금 귀금속과 향료 등을 찾아 모험 항해에 나서도록 만든 추동인(推動因)은 중세 말의 '침체된 경기'와 '재정복'이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정황이 상호접목된 시대적인 구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항애자]]
Columbus Before the Queen, dramatically imagined by Emanuel Gottlieb Leutze, 1843 (Brooklyn Museum of Art)
Columbus' tomb in Seville Cathedral. The remains are borne by four statues of kings representing the Kingdoms of Castile, Leon, Aragon and Navarre.
Replicas of the Niña, Pinta and Santa Maria sailed from Spain to the Chicago Columbian Exposition.
Bronze statue at Central Park, New York City by Jerónimo Suñol, 1894.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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