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티무르제국과 조선의 관계?

한부울 2009. 6. 5. 16:24
중종반정(中宗反正)은 과연 한반도 조선사가 맞는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7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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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제국과 조선의 관계

 

티무르제국과 조선

티무르제국

생존

제위

 

朝鮮

생존

제위

티무르                 

1336~1405

1370-1405

太祖 李成桂

1335~1408

1392~1398

피르·술탄

1374~1407

1405-1407

定宗 李芳果

1357~1419

1398~1400

하릴·술탄

1384~1411

1407-1409

 

 

 

샤 루흐

1377~1447

1409-1447

太宗 李芳遠

1367~1422

1400~1418

울루그 베그

1393~1449

1447-1449

 

 

 

압드 알 라티프

1420~1450

1449-1450

世宗 李祹

1397~1450

1418~1450 

압둘라 미르자

1410~1451

1450-1451

文宗 李珦

1414~1452

1450~1452 

 

 

 

端宗 李弘暐

1441~1457

1452~1455

아부 사이드

1424~1469

1451-1469

世祖 李瑈

1417~1468

1455~1468 

사마르칸드정권

 

 

 

 

 

술탄·야디가르 

 

1469-1470

睿宗 李晄

1450~1469

1468~1469

술탄·후세인

1438~1506

1470-1506

成宗 李娎

1457~1494

1469~1494 

술탄·마하무드

 

1494-1495

 

 

 

바이순구르 

 

1495-1496

 

 

 

술탄·아리         

 

1496

 

 

 

바이순구르(任)

 

1497 

 

 

 

바불

 

1497-1498

 

 

 

술탄·아리(重任) 

 

1498-1500

 

 

 

헤라트정권

 

 

 

 

 

술탄·후세인

1438~1506

1470-1506

燕山 李㦕

1476~1506

1494~1506

무자파르·후세인

 

1506-1507

중종반정

 

1506년

 

中宗 李懌 1506년~1544년


술탄 (Sultan):이슬람교 최고 권위자인 칼리프가 수여한 정치적 유력 지배자의 칭호. 아랍어로 왕(王), 지배자를 뜻하는 말이다.

무함마드(Muhammed) 예언자

세조반정은 아부사이드가 조카를 제거한 사건과 일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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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왕조[Timurid dynasty]


이란과 중앙아시아에서 예술과 학문을 찬란하게 부활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1405년 티무르가 죽은 후 그의 정복지들은 두 아들에게 분배되었다. 1407년에 죽은 미란샤는 이라크·아제르바이잔·모간·시르반·그루지야를 차지했고 샤 로흐는 호라산을 물려받았다. 1406~17년에 샤 로흐는 마잔데란·세이스탄·트란속사니아·파르스·케르만뿐만 아니라 미란샤의 영토까지 손에 넣으면서 영토를 확장해 시리아와 후지스탄을 제외한 티무르 제국을 다시 통일했다. 그는 또한 중국과 인도에 대한 명목상의 종주권을 지니게 되었다. 샤 로흐의 재위기간(1405~47) 동안 경제 번영이 회복되었고, 티무르의 출정으로 입은 많은 피해들이 복구되었다. 무역과 예술 공동체들이 수도인 헤라트에 생겨났고 도서관이 세워졌으며, 이 수도는 새롭고 예술적인 찬란한 페르시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건축 분야에서 티무르 왕조는 많은 셀주크 전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터키옥색과 푸른색 타일을 사용하여 건물의 정면을 복잡한 선형과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했다. 때로는 건축의 내부도 비슷하게 장식하기 위해 그림과 스투코로 장식했다. 사마르칸트에 있는 티무르의 능인 구르에아미르는 가장 대표적인 표본이다. 다각형 방 위쪽에 솟은 타일을 붙인 반구형 둥근 천장은 세로 홈이 새겨졌고 약간 볼록한 모양이다. 아크 사라이 중에서 티무르의 궁전은 1390~1405년 케시에 세워졌는데, 단지 기념비적인 성문만이 다시 채색된 타일 장식과 함께 남아 있다. 시라즈·타브리즈·헤라트에서는 세밀화파들이 티무르 왕조하에서 번영을 누렸다. 헤라트에 모였던 예술가들 중에는 베자드(1525경 죽음)가 있는데, 그의 극적이고 강렬한 화풍을 페르시아의 필사화에서는 필적할 만한 것이 없었다. 바이순쿠르 작업장은 가죽 가공, 제본, 장식서체, 나무와 비취조각 등의 작업이 행해지던 곳이다. 그러나 금속세공에서는 티무르 왕조의 예술품이 결코 이전의 이라크 유파를 따라가지 못한다.


샤 로흐가 죽은 후 곧 뒤따른 내부 분열이 티무르 왕조의 결속을 서서히 파괴했다. 1449~69년에는 티무르의 아부 사이드와 카라 코윤류(흑양조)의 우즈베크 동맹세력과 아크 코윤류(백양조) 사이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아부 사이드가 1469년 살해되고, 아크 코윤류가 서부에서 방해를 받지 않고 다스리는 동안 티무르 왕조는 호라산으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학문, 특히 문학·역사서술·세밀화 분야는 계속 번영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위대한 티무르인이었던 후사인 바이카라(1478~1506)의 궁전에서는 시인 자미, 화가 베자드와 샤 무자파르, 그리고 역사가인 미르흐완드와 흐완다미르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후원했다. 재상인 미르 알리 시르 자신은 차가타이 투르크 문학을 일으키고, 페르시아어의 부활을 조장했다. 비록 헤라트의 마지막 티무르인이었던 바디 앗 자만이 1506년 우즈베크 무하마드 샤이바니의 군대에 살해되었지만, 페르가나의 티무르 왕조 통치자 자히르 웃 딘 바부르는 왕조 패망 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1526년 인도에서 무굴 제국 황제들의 계보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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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제국 후임 왕 이력

 

1.티무르(تيمور Tīmūr/Taymūr 1336년 4월 9일~1405년 2월 18일,

영어로는 테멀레인(Tamerlane: 절름발이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의 몽골-투르크계 군사 지도자이며,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재위 1370년 ~ 1405년)이다. 이름은 중세 몽골어로는 Temür, 현대 우즈베크어로는 Temur 로서, “테무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말의 뜻은 "쇠"(鐵, iron)을 의미하며 이 이름을 가진 투르크계, 몽골계의 인물은 상당히 많았다.


2.피르 무하마드 Pir Muhammad (1374-1407)


1392년에 그는 Qandahar의 지사에 임명되었다. 그의 영토는 힌두교의 Kush의 땅 서쪽에

서 Indus River까지 넓혔다. 1397의 가을에 그는 Timurids의 인도원정에 선두를 이끌었고,

Multan의 통치자의 지위를 갖추게 되었다.


Timur는 임종 때 Pir Muhammad를 그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Timur는 그의 아들 누구도 대임을 맡기기가 마땅찮다고 느꼈다 (Jahangir 와 Umar Shaikh는 죽었고 아들 Miran Shah는 정신적 고통으로 곤란에 있었으며 Shah Rukh는 너무 종교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Pir Muhammad는 불행하게도 그의 친척까지도 Timur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사마르칸트에 명령을 하달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고 1407년 그의 심복고관에 의해 살해되었다.


3.하릴·설탄 Khalil Sultan(1384–November 4, 1411)

Transoxiana의 Timurid 지배자(1405-1409) Miran Shah의 아들과 Timur의 손자이었다.


Timur의 생애동안  Khalil Sultan는 정복자의 특별한 신뢰를 받았다. 그는 인도의 정벌동안의 그 자신을 통제하며 1402년에 Ferghana의 규칙을 받았다. 1405년 Timur의 죽음에

Khalil는 그의 후계자로서 임명 되었다. Timur의 후계자 Pir Muhammad는 빨리 물러나게 하였다. 그리고 Khalil는 사마르칸트의 통제를 얻었다. Khalil는 Timur의 지배력 얻고 Timurid 왕자에게 Chagatai Khan의 꼭두각시인형 표제를 줬다. Khalil도 이전에 또한 Timur의 손자로서 왕좌와 주장하는 권리를 만들었던 동맹자(Sultan Husain )를 얻었다.


그 사이에 Herat에서 통치하고 있었던 Shah Rukh도 그의 요구를 강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Khalil에 반대하는 Oxus River에 나아갔다. 그러나 Khalil의 아버지 Miran Shah가 인정하고 있는 아제르바이잔 점령지를 돌려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halil의 위치는 약해지기만 했다. 그는 사마르칸트에서 평판이 좋지 못했다, 그의 아내 Shad Mulk를 경멸했다. 후자는 Khalil에 대한 많은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고결함의 대가로 올림 판에 낮은 출생의 사람을 지명할 것을 용납하게 했다. 기근은 그에게 심지어 더 많은 경멸을 낳았다. 그는 그들의 지지를 얻을 시도에 Moghulistan(동쪽의 Chagatai Khans의 영역)에 갔던 그의 전 고문(Khudaidid Husain)과 함께 Ferghana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Shah Rukh가 1409년 5월 13일에 반대가 없는 도시에 들어갔을 때 사마르칸트의 Khalil의 지배는 마침내 끝났다. Transoxiana는 그 다음 Shah Rukh의 아들 Ulugh Beg에 주어졌다.  Khalil는 Shad Mulk를 쟁탈했던 Shah Rukh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뒤로 아내를 맞이했고 Ray의 통치자에게 지명되었다. 그는1411년에 거기서 죽었다. 그의 아내는 그의 죽음 후 바로 자살했다. 그는 Babur(Mughal Empire의 창설자)의 조상이 되었다


4.샤 루흐(Shah Rukh, 沙哈鲁, Shahruh Bahadur)

샤(Shah) : 페르시아(이란)왕 극존칭

Bahadur 각하 대인


샤 루흐의 두상샤 로흐(1377년~1447년, 재위 1409년~1447년, 페르시아어: شاهرخ)는 티무르 제국 제3대의 군주이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군(名君)으로서 내란을 진압하여 오스만투르크와 명나라의 국교를 회복하여 티무르 제국의 융성 시대를 이룩했다. 샤 루흐는 학문·예술에 대한 훌륭한 이해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다음의 울루그베그의 치세와 함께 티무르 풍(風) 이슬람 문화의 최성기를 맞았다.


1377년, 티무르의 4남으로서 사마르칸드에 태어났다. 청년기로부터 아버지 따라 각지에 원정을 하여 공적을 만들었기 때문에 헤라트의 장관에 임명되었다. 1405년 아버지가 명 원정 도중에 발병하여 오트랄에서 병사했다. 왕조는 원래 티무르의 탁월한 군사능력과 카리스마 아래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티무르의 사후 각지에서 내란이 일어났다. 샤는 그러한 사정으로 헤라트에 비축한 군사력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군사능력을 가지고 각지를 평정하여 1409년 왕조군주로서 즉위했다.


즉위 후는 아버지시대부터의 무단정치를 재차 온건적인 정치를 한다. 우선 아버지시대의 숙적인 오스만왕조와 명과의 국교관계를 수복 각각교역을 하였다. 수도를 사마르칸드로부터 헤라트로 옮겨 아버지의 시대에 의한 전란으로 파괴된 문화시설 보호·부흥에 진력했다. 샤 자신도 뛰어난 문인이며 문화정책을 많이 장려하여, 아버지시대의 왕조의 전성기를 되찾았다. 1447년 71세에 사망 후를 울루그·베크가 이었다.


일대 영웅이 사망한 후 멸망 할 수 있는 운명의 역사에서 샤는 보기 좋게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여 제국을 번영시켰다. 정치가로서는 아버지의 티무르를 능가한 명군이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5.Ulugh Beg (1393 or 1394 in Sultaniyeh (Persia) – October 27, 1449)

(Chaghatay/Persian: (میرزا محمد طارق بن شاه رخ (الغ‌بیگ Mīrzā Mohammad Tāregh bin Shāhrokh (Ulugh Beg) - also Uluğ Bey, Ulugh Bek and Ulug Bek)


울루그베그(1393년~1449년, 재위 1447년~1449년, 페르시아어: الغ‌بیگ)는 티무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티무르 제국 제4대 군주로, 제3대 군주 샤 로흐의 장자이다. 문화인으로서 뛰어난 수학자·천문학자·역사학자로서 학자·예술가들을 우대하고 학문·예술을 보호 장려했기 때문에 수도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학예(學藝)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그러나 군주로서의 재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란이 끊이지 않았고 재위 불과 2년 8개월 만에 살해당했다.


1408년, 아버지의 명을 받아 사마르칸드의 지사로서 부임하여 거기를 통치했다. 울루그는 문화적이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명과의 국교를 수복하면서 사마르칸드에는 교역으로 중국문화가 받아들여지게 된다. 울루그는 이슬람계 만이 아니게 중국의 문화나 학문도 보호 또는 장려하여 한층 더 학교나 천문대등을 다수 건설했다. 이 울루그의 치세에 의하여 사마르칸드는 이슬람문화의 중요한 도시로서 번창했다.


1447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군주의 지위를 이었다. 그러나 울루그는 정치가로서는 우수했지만 군인으로서는 아버지나 조부에게 뒤떨어지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 후계자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난다. 게다가 그것을 호기로 여겨 우즈베크족까지도가 침공해 왔기 때문에 제국은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혼란에서 울루그 자신도 1449년에 장남·압드 알 라티프의 반란에 살해당하고 만다.


울루그는 정치가로서도 우수하지만 천문학자·역사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천문표나 4한국사등 귀중한 저서를 남기고 있는 문인이기다. 그러나 울루그의 치세 불과 2년 만에 일어난 내란으로 제국의 권위를 실추시켜 멸망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조선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든 것 이외 집현전을 만들어 많은 학자들을 양성하였고 대간의(大簡儀)·소간의·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 및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한다.

농법, 의학, 금속활자발달, 음악부흥, 무기제조, 성진수축, 병선개량 등 내, 외치문화 전반적으로 큰 업적이 많았다.

여기서 비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머리를 흔들고 부정하고 싶지만 그것 또한 반도사관에 길들려져 판단이 바로 설 수 없다고 하는 면을 고려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분명히 세종대왕 치적과 울루그베그 치적이 너무나도 비슷하고 닮은데가 여러 곳에서 존재한다.

이상한 것은 티무르왕조와 이씨조선이라 명명하는 것이다.

서양사에 제국이름하나 명명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숨기고자 함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서 의구심만 증폭시키게 하는 것이다.

역사를 부정한 방법으로 급조하다보면 실수가 아닌 실수가 나올 수 있는 일이다.

조선이란 거대한 영역을 동서남북으로 쪼개어 이쪽은 티무르라 하고 저쪽은 이성계라 이씨를 붙였으며 북쪽은 몽고 남쪽은 조선의 대외적 중앙명칭인 명자만을 따로 떼내어 명 중국을 만들고 또 이어 청이라하여 조선을 난도질 하였다는 사실을 총체적으로 의심 할 수밖에 없다.

근세역사는 승자역사이고 그 주체는 서구세력이다.

즉 일제가 재편하고 만든 반도사관도 승자역사에 따른 것이고 근대조선을 이씨조선이라고 강조한 것이나 티무르가 건국자이고 시조라고 하여 티무르제국이라고 명명하여 강조한 것이나 일맥 하는 것이어서 결국 승자역사에서 그러한 의미부여문제는 대수가 되지 못하는 법이다.

조선왕조 시조인 이성계이력과 티무르이력은 너무나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조선왕조 세종과 티무르제국의 울루그베그는 일인이명이 아닐까?

 

소련우표-Ulugh Beg's observatory in Samarkand. In Ulugh Beg's time, these walls were lined with polished marble.


6.Abd al-Latif (1420 – May 9, 1450)

압드 알 라티프는 티무르아침의 제5대 군주(재위:1449년-1450년) 제4대 군주·우르그·베크의 장남.


아버지는 정치가로서는 뛰어났지만 통솔력이 없었기 때문에 1447년에 아버지가 즉위 했을 때부터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우즈베크족의 침공까지 당해 제국이 붕괴하는 가운데 1449년 압드 알 라티프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제5대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 암살되어 제국은 한층 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Abd al-Latif Timur의 증손자이다.

그는 Ulugh Beg (Transoxiana:현대 우주벡공화국과 카자흐스탄공화국) Timurid 지배자의 제3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Balkh의 지사에 임명되었다. Shah Rukh의 죽음이 따랐던 계승 싸움동안, 그는 Herat를 차지했다. 그러나 Ulugh Beg이 1448년에 도시를 떠난 후에 Abu'l-QasimBabur에 의해 정복되었다.


Abd al-Latif은 그의 아버지에게 충실하지 않았다.  그가 사마르칸트의 율법에서 무시당했다라고 하는 사실에 화가나  Ulugh Beg이 재탈환을 목적으로 Khorasan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을때 그는 명을 어기고 반기를 들었다. 1449의 가을의 사마르칸트 근처 Dimashq에서 그의 아버지를 패배시켰다. Abd al-Latif는 그에게 메카에 순례를 하는 허가하고 Ulugh Beg가 도중에서 살해되도록 명령하였다.  이것은 불명예스러운 것으로서 "Padarkush" (존속살인)라고 하여 Abd al-Latif를 비난했다.  며칠 뒤에 그의 형제 Abd al-Aziz도 죽였다.  이 처럼하여 그는 Transoxiana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기였기에 지방의 종교그룹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amirs에 의하여 음모로부터 구하지 못했다. 그의 통치는 단지 6개월 동안 만이었으며 후임으로 그의 사촌 Abdullah가 이었다.


7.Abdullah (also ‘Abdullah Mirza) (after 1410—June 1451)


Abdullah는 Timurid Empire의 단명인 지배자이었다. 인도, 메소포타미아와 코카서스 지방의 상당한 지역과 함께, 현대의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의해 공유되는 영토를 차지했다.


Timurid 왕조의 귀족으로서 Abdullah는 Timur의 증손자이고 Shah Rukh의 손자 아브라힘의 아들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에 의하여 Fars의 지사직이 인정되었다- Abdullah는 Shah Rukh의 죽음이 있었던 1447의 계승 위기동안 그의 사촌 Sultan Muhammad에 의해 위험이 처해진 그 자신을 발견했고 행정구를 버릴 것을 강요당했다. Ulugh Beg의 지지자로서 그도 구속되었다. 그러나 Abd al-Latif는 살해되었다. 그는 해금되었고 사마르칸트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를 지지했던 군대가 그에게 아낌없이 돈을 줄 것을 강요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범위하게 거대해진 지배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비교적 간단한 통치기간동안  Sultan Muhammad의 형제 Ala' al-Daula에 의해 형성되던 반항은 크게 위협으로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에 근거지가 Bukhara에 있었던 Abu Sa'id에 의해 시작되는 영향력상승은 치명적인 것을 알았다. Uzbeks의 지지와 함께 타슈켄트에서 사마르칸트까지 전진하면서 Abu Sa'id는 Abdullah를 패배시켰고 1451년에 그는 처형되고 말았다.


8.Abu Sa’id Gurgan. Muḥammad b. Mīrānshāh b. Timūr (Herat, 1424 - 1469)

제6대 술탄 아부 사이드(Abu Sa’id Gurgan : 재위 1451~1469)


아부사이드(1424-1469)는 오늘날 카자흐스탄공화국, 우즈베크공화국,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걸쳐있던 Timurid Empire 지배자였으며 Timurid 왕족이었다.


아부사이드는 Timur의 증손자이고 Miran Shah의 손자이며 Ulugh Beg의 조카였다. 그는 Babur(Mughal 제국의 창설자)의 할아버지이었다. 젊었을 때는 Timur 제국의 존속을 위한 Timur의 자손과 Black Sheep Turkomans와 White Sheep Turkomans 사이에서 전쟁을 하던 시기(1405-1510)에 그의 선조는 그를 지도자로 만들었다.


그는 군대를 일으켜 Samarkand와 Bukhara(1448-1449)를 근거지로 만드는데 실패하였으나 Yasi에 그의 기지를 설치하고 Turkestan의 많은 지역을 1450년에 정복하였다. 1451년 6월 그는 Samarkand를 Abul-Khayr Shaybani Khan 밑에서 우주벡 투르크군의 도움으로 함께 쟁탈하고 Timur제국의 동부 Transoxiana의 지배력을 지켰다. 그는 1454년에 Khorasan(호라산)의 Babur Ibn-Baysunkur와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촌 Jahan Shah이 Herat을 1457년 말에 잡음으로써 1458년 전쟁을 승리하는데 이점을 얻었다. 그리하여 Timur의 나머지 Heartland를 얻었고 중앙아시아의 가장 강력한 Timurid 왕자가 되었다. 그는 1459년 3월에 Sarakhs의 전투에서의 다른 Timurid 왕자 세 명의 연합에 승리하였고 1461년까지 동쪽의 이란과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했다. Jahan Shah와 이란을 나누는데 동의했다. White Sheep Turkoman 족장, Uzun Hasan이 공격해서 Jahan Shah를 죽였다. 그는 Uzun Hasan의 평화요청을 거절하고 Jahan Shah의 아들의 도움요청을 수락했다.


그는 Ak Koyunlu에 대항하는 전쟁 중에 아제르바이잔의 산에서 소규모군대에 의해 잡혔고, 1469년 Uzun Hasan에 의해 처형되었다.


유능하고 양심적인 지배자로서 Miran Shah의 영광과 번영을 다시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위한 계획된 관개와 합리적인 관세 체계를 증진함으로써 그의 왕국은 경제적 번영을 이루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는 또한 수피교도 제자이었고 shaykh Khwaja Ubaydallah Ahrar 아래에서 낙시반디(Naqshbandi)와 가까웠다. 그는 Khwājagān의 shaykh인 마울라나 무함마드 카이(Mawlānā Muammad Qāī)와 친하였고 Naqshbandiyya와도 친하였다.


셰이크 (Shaykh) 아랍 이슬람사회에서 노인, 부족 또는 가족의 장로, 종교적으로나 공공의 면에서 권위를 가진 자에 대한 존칭.

수피즘 (Sufism) 이슬람교도의 일부가 신봉하는 일종의 신비주의 신념 또는 사상


9.술탄·야디가르 1469-1470 제위1년인데 자료 찾기가 힘들다.


10.후사인 바이카라 Husain Bāiqarā(1438 ~ 1506.5.4)


헤라트(Herat)를 중심으로 페르시아 지역을 통치한 티무르 왕조의 술탄으로, 1457년경에 구르한의 수도 아스타라바드를 빼앗고, 아부 사이드의 주권하에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 아부 사이드에 의해 코레즘으로 쫓겨났으나, 후에 구르한 전역(全域) 및 마잔데란을 탈환, 아부 사이드가 죽은 후 헤라트를 병합하고 다시 왕위에 올랐다.


본명은 Husain b. Mansūr b. Bāiqarā. 티무르의 손자 중 만수르(Mansur) 술탄의 아들로서, 7-8세 무렵 부친이 사망하자, 헤라트를 통치하고 있던 친척인 술탄 바부르(Babur Ibn-Baysunkur : 1422-1457)의 보호를 받았다. 1457년 바부르가 사망하자 사마르칸트를 통치하고 있던 술탄 아부 사이드(Abu Said : 1459~1469 재위)가 헤라트를 공격했을 때 잡혀서 감금되었다. 그러나 후세인은 쿠라산(Khurasan)지역으로 도망했으며, 세력을 키워 자신만의 영토를 갖고자 노력했다.


그는 1457년경에 흑양왕조(Black Sheep Turkmen)를 공격하여 구르한(Gurgan 혹은

Gorgan) 지역의 수도 아스타라바드를 빼앗고, 이어서 카스피해 연안의 마잔다란

(Mazandaran)까지 점령했다. 근거지를 확보한 후세인 바이카라는 1458년에 스스로 헤라트의 통치자임을 선언했으나, 1459년에 아부 사이드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와리즘(Khawarazm) 지역으로 물러났다. 그 후 1460년에 트랜스옥사니아에서 아부 사이드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며, 1464년부터 반란의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그는 아부 사이드에 대항하기 위해 우즈베크족의 도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1469 년 아부 사이드가 사망하자, 그 아들 술탄 야디가르 무함마드(Yadigar Muhammad : 1469-1470 재위)가 군대를 수습하여 영토를 통치하고자 했으나, 결국 1470년에 후세인 바이카라에게 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술탄 야디가르의 형제 술탄 아흐마드(Ahmad)가 사마르칸트로부터 원군을 보내왔으나, 헤라트는 이미 후세인 바이카라의 세력권하에 있었다. 후세인 바이카르는 1470년 7월 7일에 공식적으로 헤라트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술탄 야디가르는 유배되었다. 그 후 사마르칸트가 내부 분열로 쇠락했던 반면, 후세인 바이카라가 통치하는 헤라트는 점차 영토를 확장했으며, 국내적으로도 번영을 누렸다. 후세인 바이카라는 문학 ·예술을 특히 애호했으며, 그 스스로가 문인이기도 했다. 저서에 성인(聖人) ·왕족의 전기 《애인의 모임 Majalisu’l-‘Ushshāq》(1502)이 있다.[두산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