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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3년만에 한국에

한부울 2009. 5. 21. 15:57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3년만에 한국에

[매일경제] 2009년 05월 11일(월) 오후 04:52

 

 

안견(安堅) 작품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등 국외로 반출된 우리 국보급 문화재들이 오는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 박물관 100주년 특별전'에 전시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몽유도원도를 소장하고 있는 일본 덴리(天理)대와 구두로 대여 합의를 끝냈으며 협약서 작성 절차를 앞두고 있다"며 "이를 '한국 박물관 100주년 특별전'에서 4주간 공개할 예정"이라고 11일 밝혔다. 몽유도원도는 1996년 호암미술관이 개최한 '조선전기 국보전'과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청 이전 개관 전시 때 한국에 온 적이 있다.


몽유도원도는 안견이 1447년 4월 세종 아들인 안평대군에게서 꿈에서 본 도원 이야기를 듣고 사흘 만에 그린 작품으로 조선 전기 회화 가운데 금자탑으로 꼽힌다. 안견 작품 중 유일하게 현존한 진품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안평대군 발문, 신숙주ㆍ박팽년 찬시 등 당대 명사 21명이 쓴 글이 들어 있다는 점도 특징. 1453년 계유정란 이후 사라졌다가 1893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발견됐으며 이후 여러 사람 손을 거쳐 1950년대 초 덴리대가 구입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소장한 고려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등 국외 반출 문화재 10여 점도 '100주년 특별전'에 전시하기 위해 협의 중이다. 이 밖에도 천마총에서 나온 국보 207호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ㆍ천마총에서 출토된 말 그림) 등 수장고에 있으나 거의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들도 함께 전시할 계획이다.


[손동우 기자]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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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안견(安堅, 조선, 생졸 연대 미상)자는 가도, 득수, 호는 현동자, 주경. 세종(1419-1450)과 문종(1451-1452)전후에 활약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화원의 신분이었다. 당시 많은 화가들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안평대군의 절대적 후원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의 소장품을 감상하면서 더욱 더 식견을 넓혀 중국의 여러 유파를 직접 대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안견이 자성일가하고 오랫동안 조선시대의 회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그의 타고난 재주 이외에도 안평대군 소장의 명품들을 깊이 연구하고 수용할 수 있었던 데에 연유한다고 생각된다.


그의 화풍은 이른바 이곽파라고 불리우는 북송대 북방산수의 독특한 수지법과 준필을 즐겨 구사하였으며 험준한 산세의 포치나 대국적인 스케일에 의한 화면 운용등은 그가 당시 중국의 화풍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감지케 한다. 참고로 조선초기의 화단은 고려시대에 축적된 중국 회화가 다수 전승된 이외에 연경을 중심으로 하여 명과의 회화 교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당시의 화단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화풍들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한국적 화풍의 형성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1) 북송의 이성과 곽희,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소위 이곽파 또는 곽희파 화풍.

2) 남송의 화원이었던 마원과 하규가 형성한 마하파를 위시한 원체화풍

3) 명대의 원체 화풍

4) 절강성 출신인 대진을 중심으로 하여 명초에 이룩된 절파 화풍.

5) 북송의 미불, 미우인 부자에 의해 창시되고 원대의 고극공 등에 의해 발전된 미법산수화풍이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역시 곽희파 화풍이었으며, 곽희파 화풍은 조선 초기의 산수화단에 제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안견화풍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또한 안견의 화풍에는 비단 곽희파 화풍뿐만 아니라 남송의 원체 화풍과 원말 명초의 매너리즘의 영향도 다소 가미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주된 기반은 역시 곽희파 화풍에서 찾아볼 수 가 있다.


유명한 '몽유도원도'는 그의 대표작으로서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도원을 몽유한 후 안견에게 꿈에 본 바를 설명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1447년 4월 20일에 착수하여 3일만인 23일에 완성을 본 장권형식의 그림이다.


이곽파의 강렬한 영향 이후에 형성된 그의 필의를 엿볼 수 있으며 환영적 감각으로 묘출해낸 관념경의 신비를 전개했던 비경의 산수인 이 작품은 안평대군의 제발을 비롯하여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서거정 등 20여명의 대학자와 문인들이 쓴 제문이 씌어있는 이유로 더 더욱 유명하다.


그의 화풍은 이른바 안견파라고까지 불리울 정도로 조선시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과 함께 조선시대 4대화가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작품으로 몽유도원도 외에 안견 사시팔경도, 안견 적벽도 등이 있다.


몽유도원기, 계유정난이후 안평의 글씨는 거의 다 불태워졌는데 살아남은 몇 안되는 안평대군의 글씨이다

 

                                                           [몽유도원기]

 

                                                        오른쪽 도원경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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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1447년(세종 29) 작. 비단 바탕에 먹과 채색. 106.5×38.7 cm. 일본덴리[天理]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이 그림은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에서 논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도연명의 《도화원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 양식도 여러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 큰 특징은 그림의 줄거리가 두루마리 그림의 통례와는 달리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전개되고 있으며 왼편의 현실세계와 오른편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큰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보고 그렸으나 오른편의 도원세계는 부감법을 구사하였다. 안평대군의 발문을 보면, 안견은 이 그림을 3일 만에 완성하였다고 하며, 거기에는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 한 수를 비롯해 당대 20여 명의 고사(高士)들이 쓴 20여 편의 찬문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림과 그들의 시문은 현재 2개의 두루마리로 나뉘어 표구되어 있는데, 이들 시문은 저마다 친필로 되어 있어 그 내용의 문학적 성격은 물론, 서예사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그림은 안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 후의 한국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치:<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세종 29년(1447) 어떤 날 꿈속에서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여행하고 거기서 본 바를 안견에게 설명해 주어 3일만에 완성된 그림인데,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조선 최고의 그림이며, 한국회화사 전반에 걸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몽유도원도>에는 도원의 경치를 그린 그림과 함께 안평대군의 발문, 그리고, 안평대군의 주위에 있던 박팽년, 최항, 신숙주 등 당시의 쟁쟁한 인물 21인이 자필로 쓴 찬시도 함께 실려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몽유도원도〉는 회화 작품으로써 뿐만 아니라 서예 작품으로써, 또는 당시 안평대군을 둘러싼 중신들과의 관계를 알아 볼 수 있는 사료(史料)로써도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평가: 결국 <몽유도원도>는 왕자로서의 안평대군이 현실에서 겪어야 하는 고민, 즉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면서 오히려 거기에서 오는 갈등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찰과 번민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정에서 그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고, 또 알고 있었던 도연명의 <도화원기>의 세계를 찾아 꿈속에서 홀연히 도원의 세계를 여행하였으며, 그가 꿈속에서 경험한 황홀한 이상세계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그리게 한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