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친킴(眞金:裕宗:Zhenjin1243년~1285년)

한부울 2009. 6. 1. 17:28
 

친킴은 쿠빌라이 3남 황태자였다.

眞金 이라고 하는 것은 신라의 후예라고 스스로 들어내고 싶어하는 이름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金나라의 태조인 아골타가 신라계통인 김함보의 고손자라고 하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스스로 金(신라)이라고 하였고 또한 淸의 왕들이 스스로 이름에 애신각라(愛新覺羅:신라를 생각하고 사랑한다)란 명호를 붙여 사용했다는 것에서 금과 청은 신라후예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친킴 즉 眞金은 신라를 흠모하게 한다거나 스스로 신라의 대통을 잇게 할 목적으로 쿠빌라이가 이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고 또한 유목정복왕조 몽고가 분리되어 쇠락하면서 아시아동북과 중국 중원을 원나라가 차지하고 몽고를 이었다고 하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신라의 혈통이란 상징적인 냄새가 풍기는 기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고려태조에게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특별한 크고 작은 전쟁한번 없이 신라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양도, 양위하였다는 것은 半島史를 만들기 위해 신라를 억지로 고려에 편입하려고 하였던 후일 사가들의 장난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흔적들이다.

원의 주체는 신라의 후신이고 고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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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킴(眞金:裕宗:Zhenjin1243년~1285년


친킴(眞金,1243년~1285년)은 몽골제국의 왕족이었다. 그는 쿠빌라이와 차브이의 차남이었다. 그는 원 유종(元裕宗)으로 원 성종이 추숭하였으며 시호는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 휘는 패아지근진금(孛兒只斤眞金)(징김)이었다.


그는 코코진과 결혼하여 원 성종 테무르를 낳았다. 그녀는 곤기라트 부족 출신으로 쿠빌라이의 차남 친김의 처로 받아들여져 1263년에서 1265년까지 3년간 아들 카말라, 다르마발라, 테무르를 얻었다.


1281년에 차브이가 사망하며 군주 후,비의 궁과 소속영지, 재산은 동일 부족 출신의 후,비가 상속하는 몽골의 전통을 따라 생전의 차브이가 모은 막대한 재산을 코코진이 상속하였다.


1285년에는 친김 태자가 쿠빌라이보다 먼저 죽고 원나라에 의해 최고의 권력과 재산이 있는 세력이 있는 황태자부의 관리 권한이 코코진이 받았다.


그의 가족은 다음과 같다.


황태자비 코코진

장남 진왕(晉王) 카마라 (예순테무르의 조부)

차남 순종(順宗) 다르마발라 (카이산의 부친, 부인은 다기)

삼남 성종(成宗) 테무르

[한국자료]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년 ~ 1294년)

 

                                                 차브이(察必皇后,~1281년)

                                  성종(成宗)1294年 - 1307年(孛兒只斤鐵穆耳, 테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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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킴(Cinkim, 1243年 - 1285年)


친킴(Cinkim, 1243년 - 1285년)은 몽고제국(원)의 왕족. 쿠빌라이와 황후 차브이와의 차남. 한자 표기는 진금(真金). 집사(集史)의 페르시아어 표기에서는 م كيم Chīm-kīm 라고 쓰여진다. 아버지 쿠빌라이의 치세에 황태자의 칭호를 얻어 중국의 정무를 맡을 수 있는 절대권력을 가졌지만, 아버지에 앞서 요절한다. 사후 그의 3남 정비 코코진과 아들 성종 패아지근철목이(孛兒只斤鐵穆耳, 테무르)에 의하여 묘호(廟号)를 裕宗, 文恵明孝皇帝가 시호(諡號)로 되었다.


생애


세조 쿠빌라이가 황후 차브이의 사이에 4명의 적자 가운데 차남으로, 맏형 드르지가 요절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적장자에 해당한다. 쿠빌라이의 형 몬케의 치세에 쿠빌라이가 중국의 경략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쿠비라이의 중국 방면에 있어서의 본거지인 내몽고의 도시 개평부(후의 上都)에서 요추(姚枢)등 쿠빌라이의 한인(漢人)지략가에 둘러싸여 자랐다. 쿠빌라이 즉위 후의 1263년, 친킴은 연왕에 봉해지고 중서령에 임명되어 쿠빌라이가 신설한 중앙 행정 기관 중서성(中書省)의 관할을 맡았으며, 上都・大都를 중심으로 하는 내몽고에서 중국 화북 방면의 통치를 맡았다. 다음 1264년에는 判枢密院일을 겸해 군정 기관 추밀원도 장악하여, 쿠빌라이 자신의 궁정(宮廷)도 설치되어 정권(政権)의 동체(胴体) 부분이 되는 중국북부의 政・軍을 지배하는 강력한 권한이 주어진다.


어릴 적부터 한인(漢人)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던 친킴은, 中・下級官僚로서 중서성에 집중된 한인관료의 지지를 받았다. 또 중서성의 고관인 右丞相 안톤은 친킴의 외가사촌동생이며, 쌍방의 어머니의 친가인 콘기라트 부족을 필두로 하는 몽고귀족층도 친킴의 여당(与党)이 되었으므로 그 권세는 높아져 1273년에는 황태자가 되었고 쿠빌라이의 후계자로서 확고한 지위를 확립한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황후 차브이의 고용인인 아후마드(Ahmad Fanakati ?-1282 Muslim)를 신임하여 화북의 재정장관에 등용되어 재정업무를 혼자서 관리하게 되자 아후마드등의 이슬람교도 재무관료와 친킴의 밑에 집중된 한인(漢人)·몽고사람들은 통치의 방침과 권한의 영역을 두고 수면아래에서 대립하게 되었다. 1281년에 아후마드의 후원자인 차브이가 죽자 친킴당파와 아후마드당파의 정권 분쟁은 더욱 더 가열하게 되어, 다음 1282년에 친킴파의 한인관료에 의하여 아후마드가 암살되기에 이른다.


아후마드가 죽고 난후 이미 황태자가 된 친킴의 권한을 간섭할 수 있는 권신은 없어졌다. 그 때문에 친킴을 추종하는 정파는 화북지방에 독재적인 권력을 이용, 미리부터 쿠비라이에게 양위를 진언하는 사람까지 나타날 정도의 상황이 되었지만, 1285년 갑자기 친킴은 병사한다.


친킴의 사후, 그 절대인 권력에 의지하며 매우 광대하여 풍부하게 성장하고 있던 황태자府의 영지와 재산은 친킴의 미망인 코코진에 인계되어 쿠빌라이의 사후, 코코진은 친킴의 3남 테무르(성종)를 즉위 시켰다. 1294년 6월 3일, 테무르는 조부 쿠빌라이에게 세조의 묘호와 聖德神功文武皇帝를 시호하였고, 조모 차브이에게 昭睿順聖皇后를 시호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친킴에게도 裕宗文恵明孝皇帝를 시호로 하여 친킴은 황제에 준하는 제사를 받았다.


종가


부모


아버지 쿠빌라이 칸(忽必烈, 1215년 ~ 1294년) 

어머니 차브이(察必皇后,~1281년)


황후·측실


코코진(闊闊真 ?~1300년)은 원나라 황제 테무르의 어머니였다(元史 백람야겁적비자(伯藍也怯赤妃子)

안진미실비자 (安眞迷失妃子)


아들


※元史, 集史 에서는 친킴의 남아는 3명이다.


장남 진왕 감마랄(甘麻剌) 또는 카말라(1262년 ~ 1302년)는 원현종(元顯宗)

차남 순종 다루마바라(答剌麻八剌, 1264년~1292년)(원 무종 카이산의 아버지)

3남  성종 테무르 母 코코진

[일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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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henjin


Zhenjin (Činkim, 1243 - 1285, Chinese: 眞金) was the second son of Kublai Khan, founder of the Yuan Dynasty. He was designated as the Crown Prince (皇太子) by Kublai Khan in 1274, and became the head of Zhongshusheng (Chinese: 中書省, "Central Secretariat"). The North Chinese Buddhist monk Haiyun gave him the name, Zhejin (True Gold), when he was born in 1243. He was also known as a strong supporter of Confucianism. When A Confucian-trained official in South proposed that Kublai's abdicate in favor to Zhenjin in 1285, Kublai was angered. However, he died in 1285, 9 years before his father Kublai Khan. Distressed by the death of him, Kublai Khan thus made Zhenjin's son Temür the new Crown Prince, who later became the Emperor Chengzong.

[영어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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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金


眞金(1243年-1285年),元朝第一代皇帝元世祖忽必烈之嫡子,第二代皇帝元成宗鐵穆爾之父,母昭睿顺圣皇后弘吉烈氏。真金年少時,已從漢儒姚枢、窦默二人讀《孝经》,元世祖大悦。中统三年(1262年),封其為燕王。至元十年(1274年),晉封為皇太子,故人称真金太子,并统辖中书省。至元二十二年(1285年),有御史奏請元世祖禪讓給真金,阿合马余党塔即古等人得悉此事后便借理算为名突然封存御史台奏章,把此事上报给元世祖。结果元世祖大怒,真金由此驚恐而逝。後來事過境遷,元世祖在悔恨之餘,立真金之子鐵穆爾為皇太孫。元成宗即位後,追封其父真金廟號裕宗,諡號文惠明孝皇帝。


真金有三子:


元顯宗甘麻剌

元順宗答剌麻八剌

元成宗鐵穆爾 

[중공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