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왕건상 관은 황제가 쓰는 통천관
한부울
"고려는 천자 황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48211" 이다, 란 사실과 "고려연방(Unite Corea:960-1392)국가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라는 사실은 고려가 하나의 체제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연방국가들은 아래 국가를 연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려연방(Unite Corea) 탕구트족:탱그리:단국 (Tangut:7 세기~13 세기)
고려연방(Unite Corea) 송(宋) (Song Dynasty:960~1279) 고려연방 시원년도 960년
고려연방(Unite Corea) 서하(西夏)(Western Xia:1032~1227)
고려연방(Unite Corea) 호라즘 제국(Khwarezm:1077~1211)
고려연방(Unite Corea) 금(金)(Jin Dynasty:1115–1234)
고려연방(Unite Corea) 원(元)(Yuan Dynasty:1271~1368)
고려가 연방체제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종교이다.
인종과 민족이 다른 것과 문화 관습 풍습등이 다른문제와는 달리 종교문제 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민감하고 갈등이 많았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이미 고구려 광개토대왕 아버지이신 18대고국양왕(재위384년~392년)은 다종교를 장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불교만 장려하였다고 나오지만 실은 조로아스터교,마니교,네스토리우스교 등 다양한 종교를 널리 인정하고 양성하여 문화를 발전시켰다.
정복왕조는 종교를 차별하거나 편애하는 정책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고구려도 다종교정책을 사용한 것이다.
고구려유시를 받은 고려연방체제에서도 시대적 환경을 고려 할 때 종교적인 갈등소지가 극에 다달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원칙적으로 고려는 불교를 숭상한 것으로 나오지만 북방불교인지 남방불교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종교를 널리 흡수하고 장려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고려 서방국들은 대체적으로 이슬람교
고려 동방국들은 도교(신선)
고려 남방국들은 남방불교 및 힌두교
고려와 그외 주력정치집단인 북방세력들은 북방불교을 신봉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고려에서 최소한 원조가 망하기 이전까지 종교를 국교라고 강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고 고려황족이나 귀족등 정치주도세력에서 북방불교를 다수를 신봉하였다고 생각되는 점이며 나라가 전체적으로 힘을 잃고 이리저리 갈라지고 쪼개지는 과정에서 호국불교라고 하여 불교를 숭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때문에 그러한 점이 바로 고려말기에 정치적인 혼란을 겪게 된 원인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후 이와같은 고려를 그대로 이관받은 조선의 붕당역시 당파싸움으로 이어졌다는 부정한 면을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라 이러한 종교적인 관점을 기초로 하고 분석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현대에서 들어서도 세계 온지역에서 종교갈등문제로 골머리를 썩이지만 8차에 걸친 십자군전쟁
(1096~1254)이후 종교갈등은 첨예화되고 국가간 전쟁을 초래하는 극단인 면으로 발전하였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심에 고려와 조선이 존재한 것이다.
십자군전쟁(Crusades war 1096~1254) http://blog.daum.net/han0114/17048212
이 기사는 바로 고려 왕건 태조가 황제라는 사실을 실제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소개한 것이다. 개성 출토 고려태조 왕건상(동상)이 쓰고 있는 관은 중국 황제가 쓰던 통천관(通天冠)이며, 이에 따라 고려왕조가 건국 전기와 중기에는 황제국을 표방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되었다고 한다.
왕건상이 쓴 관(冠) 통천관은 중국에서 태자(太子)나 제후(諸侯), 나아가 조선시대 왕들이 착용한 원유관(遠遊冠)과는 전혀 다른 황제만이 쓰고 사용 할 수 있는 권위의 관이라는 말이다.
이 말을 풀이하면 반도사관에 의한 작은 한반도 고려가 아니라 아시아 대륙을 통치하던 즉 962년~1392년 사이에 unite corea 라는 연합국형태나 연방국체제의 다민족 국가를 거느린 거대한 국가로서 바로 중국(중원)황제의 나라였음을 우리가 알 수 있게 하는 기사이다.
참으로 속 시원한 자료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설마하며 믿지 못하겠다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미리 반도사관이란 선을 그어놓고 자신의 생각을 가두어 놓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고려는 결코 반도에 갇혀버린 작은날 작은역사가 아니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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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건상 관은 황제가 쓰는 통천관
[연합뉴스]2006-06-07 19:51
고려 태조 왕건 청동상
노명호 교수 "2㎝ 남근은 마음장상(馬陰藏相)"
13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막하는 '북한문화재' 특별전 출품작 중 하나인 개성 출토 고려태조 왕건상(동상)이 쓰고 있는 관은 중국 황제가 쓰던 통천관(通天冠)이며, 이에따라 고려왕조가 건국 전기와 중기에는 황제국을 표방했다는 사실이 다시금 확인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려사 전공인 노명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2005년 11월 개성역사박물관 방문을 통해 북한 학자들과 왕건동상을 공동 조사한 데 이어 최근에는 북한문화재 특별전 자문위원으로서 왕건동상을 정밀 재조사한 결과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7일 밝혔다.
노 교수 분석에 의하면 왕건상이 쓴 관(冠)은 통천관이며, 이는 중국에서는 태자(太子)나 제후(諸侯), 나아가 조선시대 왕들이 착용한 원유관(遠遊冠)과는 다르다.
즉, 통천관은 중국 진나라에서 시작돼 조금씩 형태가 변화하다가 당(唐)나라 무덕(武德) 4년(621) 공포된 거복령(車服令)에서는 '24량(二十四梁) 통천관'으로 제도화하게 된다. 왕건상이 쓴 통천관이 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만, 관에 붙은 8개 일월(日月)을 상징하는 원형 형상은 중국 황제의 통천관과는 구별되는 대목이라고 노 교수는 덧붙였다.
왕건동상은 화려한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 각종 비단천 조각 등과 함께 출토됐다.
노 교수는 "이들 비단천 조각은 아직 정밀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으나 옥대는 중국 송나라에서도 천자나 태자가 주로 착용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왕건동상이 착용하고 있었던 복식도 황제의 복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왕건동상은 전체가 아니라 관에만 금 도금을 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노 교수는 덧붙였다.
고려 태조 왕건 청동상
노 교수는 이어 왕건동상이 앉은키는 84.7cm(의자 면부터 외관 중간까지의 높이)로 성인 남자의 그것과 거의 같은 크기인 데 반해 남근은 길이가 2cm에 지나지 않는 까닭에 대한 해명도 시도했다. 그에 의하면 왕건동상은 발바닥을 비롯한 신체의 특징 10여 곳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32대인상에 해당하는 특징들이 발견됐다.
노 교수는 나아가 그런 32대인상 중 하나가 성기를 몸속에 감춤으로써 겉으로 드러난 남근은 매우 작은 형태를 하고 있는 마음장상(馬陰藏相)이므로, 태조왕건상은 이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법원주림'이라는 6세기 중국의 불교 문헌에는 자신의 성별을 의심하는 여인들에게 부처가 법력으로 마음장상에 대해 알게 하는 서술이 있는데, 작을 때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으나 때로는 매우 커질 수도 있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노 교수는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을 9일 오후 3시 서울대 역사연구소 연구발표회에서 공개한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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