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한부울 2009. 5. 16. 23:09

터키-아르메니아 ‘100년 적대’ 풀리나 http://blog.daum.net/han0114/17047899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한겨레]2005년08월03일 제571호


대학살 90주기 축제가 열리는 수도 예레반을 찾다

터키가 자행한 ‘인종 청소’는 아직 인정도 사과도 받지 못해


예레반=하영식 전문위원


5년 전,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취재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특히 아르메니아 민족에 대한 대학살의 사례 하나하나는 인간 잔인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아무런 단죄 없이 그냥 넘어가버렸고 9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르메니아 민족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할 것을 세계에 호소하고 있다.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는 제단


아르메니아로 가는 도중 여정을 풀었던 터키의 반(Van)시나 카르스(Kars)시는 대학살 이전에는 아르메니아인들로 채워졌던 도시들이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교회 터나 수도원 터가 과거의 쓸쓸한 역사를 전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에 들어서면서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질 뻔했던 민족이 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민족의 새로운 터전을 건설하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는 모습에서 받았던 벅찬 감동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과거의 슬픔을 말끔히 씻어내려는 듯 수도 예레반에서는 국제영화제까지 개최해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도착하자마자 네명의 아르메니아 대학생과 함께 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모지를 방문했다. 수도 예레반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민족의 대학살을 기리는 성지를 마련해놓았다. 성지로 향하는 입구인 언덕배기에 도착하자 커다랗게 펼쳐진 플래카드가 한눈에 들어왔다. ‘1915 2005’라는 숫자 위에 ‘90’이 적혀 있어 아르메니아 대학살 90주년을 뜻한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지난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대학살 90주년 행사.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이 이 대학살을 인정하고 있다. (AFP 연합)


기념지로 들어서는 가파른 오르막길은 90년 전 대학살을 당한 아르메니아 민족의 삶처럼 고행의 길이었다. 차오르는 숨을 억누르면서 겨우 언덕에 올라서자 길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길 양편으로 우거진 숲 속에서는 온갖 새들이 그곳을 천국으로 삼아 날아다니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기념지에서 내려오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인 나에게 각별한 호기심을 드러내며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거대한 평지가 드러나면서 뾰족이 솟은 추모탑이 눈앞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와 학생들은 추모단으로 내려갔다. 그곳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가파르게 깎아놓아 방문객들이 자연스럽게 제단에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그곳에는 학살당한 아르메니아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영원한 불꽃이 타고 있었고 주위에는 방문객들이 바친 꽃들이 놓여 있어 사뭇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 무리의 아르메니아 가족이 어린이들과 함께 불꽃 주위에 서서 무엇인가에 대해 열심히 얘기하고 있었다. 비극적으로 죽어간 할아버지 세대에 대해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도 타오르는 불꽃 주위에 모여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한 뒤 추모단의 계단에 모여 앉아 각 집안의 내력을 주고받았다. 놀랍게도 네 학생 모두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거친 증조부모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본드(예레반의대 3)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당시 조부모가 겪었던 일들을 너무도 생생하게 4대에 걸쳐 대물림하면서 기억하고 있었다.


“1915년 나의 증조부는 당시 아르메니아인 마을의 대표였다. 증조부는 신망이 두터워 인근의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터키군 장교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어느 날 밤 비밀스럽게 터키군 장교 한 사람이 와서는 빨리 마을을 떠날 것을 권했지만 증조부는 마을 사람들과 생사를 같이하겠다면서 남았다. 다음날 증조부는 마을의 모든 남자들과 함께 어딘가로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증조부는 이른 아침 마을 사람들과 함께 끌려가기 전 증조모에게 어린 조부와 피할 것을 권유해 겨우 조부는 화를 면했다.”

 

 

△ 성지로 향하는 입구에 있는 플래카드. '1915-2005'라는 숫자를 적어 아르메니아 학살 90주년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사진/ 하영식)


수십만명이 터키군에 끌려가 죽어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문치(유럽대학 경영학 3)는 자신의 “증조부모는 무사했지만 증조부의 형제들이 모두 처참한 살육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기오르기(예레반의대 3)도 자신의 증조부는 목숨은 구했지만 지금의 터키 카르스에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홀로 예레반으로 피난해 고아로 힘든 삶을 살았다는 얘기를 전해주었다.


죽임을 당한 150만명의 영혼을 달래기에는 너무도 좁은 공간이지만 그나마 이곳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아르메니아 민족으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사실 아르메니아 대학살건은 소비에트 시절 금기시된 이슈였다. 소비에트 초창기부터 크렘린 당국은 아르메니아 대학살건에 ‘반소비에트적 민족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얘기하는 지식인들은 가차없이 반소비에트 민족주의자로 몰아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내거나 처형했다. 이런 식으로 스탈린이 권좌에 있는 동안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처절한 침묵이 강요됐다.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들어선 뒤 쌓였던 아르메니아 민족의 한은 결국 폭발하게 된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50주년을 맞은 1965년 4월24일,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는 학생을 중심으로 한 20만명의 시민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인정를 요구하면서 시위를 시작했다. 이 시위는 당시 소비에트연방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시위로 소비에트 전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크렘린 당국에서는 이 시위를 반소비에트 시위로 몰아 시위 군중들에 발포를 명령했으나 예레반 정부의 수반은 크렘린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 물론 예레반 정부의 수반이 명령 거부로 사퇴하긴 했지만 이때부터 크렘린 당국도 아르메니아 대학살 문제에는 간섭하기를 포기했고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한 공론화는 가속적으로 추진됐다. 추모 행사가 열렸고 추모탑과 추모단이 설치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 추모단의 가운데에는 학살당한 영혼을 위로하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다. (사진/ 하영식)


아르메니아 민족은 노아의 방주 신화로 유명한 지금의 터키 동부 지역의 아라랏산 근방에 거주하면서 고도의 문명생활을 누려왔다. 301년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고, 주위의 국가들이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할 때도 개종을 거부해 나중에는 근방에서는 아르메니아 민족만이 기독교 민족으로 남았다. 바로 이 때문에 기회만 생기면 아르메니아를 이슬람 국가로 개종하기 위한 이슬람 제국들의 침략이 이어졌다. 15세기께부터 오토만 제국이 중동과 발칸 전 지역을 정복하면서 아르메니아도 오토만 제국의 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벌어지기 전 오토만 제국에는 약 3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살고 있었다. 1915년에 터키 정부가 수립한 정책에 따라 실행된 대학살로 150만~2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3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 중 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인구가 죽임을 당한 ‘인종 대청소’가 자행된 것이다. 당시 터키 정부는 누구나 치를 떨 정도의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동원해 아르메니아 민족을 학살했다.


1915년 4월24일, 터키군은 325명의 아르메니아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을 체포해 처형했다. 대학살의 서막은 이렇게 올랐고 계속적으로 아르메니아 남자들이 학살됐다. 당시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 남자들을 학살하기 위해 18살 이상 50살 이하의 아르메니아 남자들을 모두 군대로 소집했다. 강제징집된 아르메니아 남자들은 터키군에서 얼마간 훈련을 받다 나중에는 모두 무장해제된 뒤 50명에서 100명 단위의 그룹으로 나뉘어 다리 건설과 도로공사 현장에 동원됐다. 얼마 뒤 이들은 모두 집단적으로 공사장에서 터키군에게 학살됐다. 이런 식으로 수십만명의 아르메니아 남자들이 터키군에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


남자들에 이어 남아 있던 어린이들과 부녀자들, 노인들은 모두 사막으로 강제 추방돼 굶주림과 갈증, 학살로 죽어갔다. 한 예로 35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을 시리아의 사막으로 추방했는데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단지 35명만이 살아남았다.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문제와 연계


이러한 대학살로 인해 아르메니아 민족의 운명은 완전히 변하게 됐다. 고대 시대부터 살아온 땅과 가족과 재산을 잃고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됐다. 현재 러시아에 200만명, 미국에 100만명을 비롯해 107개국에 모두 900만명의 디아스포라 아르메니아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다.


예레반의 러시아-아르메니아대학의 국제관계학연구소장인 로잘리 가브리엘리안(61) 교수도 개인적으로 아르메니아 대학살과 깊이 연관돼 있다. 교수의 조부모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겪은 당사자들이다. 지금은 터키의 도시인 카르스시에서 교수의 조상들은 수 백 년 동안 뿌리를 내려 살아왔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진행되던 1915년 로잘리 교수의 조부모들은 대학살을 피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레반으로 피난왔다. 조부모들은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가족들은 모두 터키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로잘리 교수는 오토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1915년이 아닌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다고 말했다. 1893년에서 1896년까지 이미 수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오토만 제국은 ‘아르메니아인 없는 아르메니아’나 ‘터키인만을 위한 터키’라는 기치를 내걸고 아르메니아 민족에 대한 대학살을 구체화시켰다는 것이다.

 

 

△ 1915년 오토만 제국은 누구나 치를 떠는 잔인한 방법으로 150~200만명의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다. 전체 300만 아르메니아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인구였다.


로잘리 교수는 “1915년 터키군에 의한 대학살이 시작되면서 6개월 만에 150만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다. 이는 국가가 치밀하게 주도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터키의 국가적 범죄임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터키 정부는 단 한 번도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다. 도리어 대학살건을 제기하는 아르메니아에 대해 완전한 국교 단절과 국경 봉쇄, 금수 조치를 통해 심각한 경제적 압박을 가했다. 또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한 국가들에 대해서는 외교적 보복을 일삼았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아르메니아는 이웃 국가들로부터 고립되면서 경제적으로 엄청난 곤란을 당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민족이 무엇보다도 터키 정부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다. 한 가지 극단적인 역사 왜곡의 예를 든다면, 아르메니아 민족을 대학살의 가해자로 터키 민족을 대학살의 피해자로 만들어놓은 적반하장 격의 역사 왜곡이다. 그동안 터키 정부는 3천만달러 이상의 예산을 지출하면서 주로 미국 대학의 역사학자들을 매수해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혼신을 기울여왔다.


1915년을 잊었기에 홀로코스트가 있었다

 

 

현재 유럽연합 가입을 서두르고 있는 터키로서도 아르메니아 대학살건은 쿠르드 민족 문제와 더불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아르메니아대학살추모사업회 바르세기얀 회장은 “이미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인정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킨 상태이기 때문에 터키가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 사과하고 배상하지 않고서는 유럽연합 가입은 불가능할 것”이라면서 아르메니아 대학살건을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문제와 연계한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독일의 나치가 2차 대전 중 치밀한 계획하에 유대민족에 대한 말살을 시도한 역사는 잘 알려졌으나, 이보다 앞선 1915년에 터키가 자행한 아르메니아 민족 대학살은 인류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인 <나의 투쟁>에서 “지금 누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기억하는가?”라는 주장을 펴면서 유대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역으로 말하면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일어났을 당시 이 사건이 세계적인 문제로 도마 위에 올랐더라면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이처럼 아르메니아 대학살건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함에도 강대국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완전히 무시당해왔다. 지난 2000년 4월, 아르메니아 대학살건은 미국 내의 아르메니아인 사회를 중심으로 공론화가 진행되어 미국 의회의 소위원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터키의 압력을 받은 미국 정부는 하원에 권고해 안건의 심의를 중단시켜 세계 여론의 질타를 받은 일도 있었다.


21세기에 들어선 세계는 지금도 90년 전에 학살당한 아르메니아 민족을 다시 한 번 학살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학살자인 터키와의 군사적·경제적 이해관계가 훼손될 것이 두려워 학살자의 편에 서서 학살자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 게 서글픈 국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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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뻔뻔하다

[인터뷰/ 라브란디 바르세기안 추모사업회 대표]


사과하고 빼앗긴 땅 돌려줘도 모자란데 대학살 왜곡에 3천말달러나 지원

 

                                                            △ (사진/ 하영식)


라브란디 바르세기안 박사는 아르메니아대학살 추모사업회의 대표이자 역사학 박사로 예레반대학의 교수이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모지를 세우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으며 지금까지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왔다.


미국의 몇몇 역사학 교수들은 터키 정부의 뇌물을 받고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진실을 부정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에 대한 사례를 든다면?


미시간대학의 저스틴 마카티 교수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들의 수를 150만명에서 30만명으로 축소했다. 그가 터키 정부로부터 뇌물을 받고 역사를 왜곡했다는 데 대해 슬픔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터키 정부는 지금까지 약 3천만 달러의 비용을 지출하면서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역사를 왜곡하는 저술활동을 지원해왔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9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아르메니아 민족에게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아르메니아 민족의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현재 아르메니아 민족이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이유는 90년 전에 일어난 아르메니아 대학살 때문이다. 학살을 피해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지금 모국에는 300만명이 남아 있고 전 세계 107개국에 900만명의 디아스포라 아르메니아인들이 살고 있다. 1915년 대학살이 있기 전 아르메니아인들은 현재의 터키 동부에서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누리면서 모여 살았다. 그러나 대학살은 우리 민족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우리가 살던 땅을 잃었고 재산과 생명을 잃었다. 그렇다고 세계가 이 사실을 아는 것도 아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당했던 역사적 사실을 세계에 알리기를 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 사실은 세계적 이슈로 부각됐고 점점 더 많은 나라에서 아르메니아 대학살건을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관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 가족이 대학살에 연관돼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대학살과 연관돼 목숨을 잃은 가족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이들의 기억을 모아 후세에 그대로 전해줘야겠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역사를 전공한 학자다. 학자적 양심에 따라 진실된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도 작용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문제에 관여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무엇이었나.


2000년 6월에 파리에서 아르메니아 대학살건이 프랑스 의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상원에서 이를 반대했다. 곧이어 2만5천명의 아르메니아인들과 프랑스인들이 프랑스 의회 앞에 모여 아르메니아 대학살건을 통과시킬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때 나는 군중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연설도 하면서 파리 시민들의 지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르메니아 대학살건을 위해 거의 일생을 바쳤는데 이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받지는 않았나.


터키 정부에서는 나를 아르메니아 출신의 테러리스트 넘버 원으로 올려놓았다. 그만큼 터키 정부에서는 나를 혐오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터키 정부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과와 함께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터키 정부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과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서 빼앗은 땅을 되돌려줘야 하며 재산과 물질적 손실에 대한 배상을 통해 상처를 치유해줘야 한다. 그런 엄청난 대학살을 저질러놓고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왜곡하기에만 급급하다면 터키 민족에게는 아무런 미래가 없을 것이다. 독일처럼 과거 사실에 대해 사과하고 배상하면 국제 사회의 미래에 동참할 수 있지만 터키처럼 부정하고 도리어 피해자인 아르메니아 민족을 공격하고 궁지에 빠뜨리려 한다면 터키는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다고 본다. 터키가 현재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르메니아 대학살건을 통과시킨 유럽의 여러 국가의 반대에 부딪혀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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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뒤엔 모든 게 달라질 수도”

[인터뷰/ 영화 <아라랏>의 감독 아톰 에고얀]


조부모가 학살 희생자… 터키에 들어가 배경화면 몰래 촬영

 

                                                            △ (사진/ 하영식)


예레반에서는 ‘골든아프리콧 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화려한 복장을 한 군악대의 팡파르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오랜만에 예레반 시민들이 영화제가 열리는 모스크바시네마극장 주위로 몰려들었다. 올해로 두해째를 맞는 국제영화제는 전세계에 흩어진 아르메니아 출신 영화 관계자들과 다수의 국제적인 영화제작자와 영화평론가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특히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영화 <아라랏>을 만든 아톰 에고얀 감독도 영화제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조부모들도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피해자들이었다.


선조들 중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경험한 사람이 있는가.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 당사자들이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어린 나이였다. 지금의 터키 에베렛에 살았는데 할아버지는 전 가족이 희생당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어린 아기였는데 부모와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됐다. 할머니는 어려서 아무런 기억이 없는데 단지 자신의 아버지가 들려주던 노래만 기억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고아로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자라났는데 나중에 카이로에서 만나 결혼했다.


영화 <아라랏>은 당신 필생의 작품인 것 같다. 터키 현지에서 촬영하기가 괜찮았나.


현지 촬영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단지 배경에 사용하기 위한 비디오를 몰래 촬영하는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선조들이 살았던 곳을 방문하기를 원하지만 내 이름이 알려진 이상 그곳에 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영화를 준비하는 데 많은 세월이 걸렸다. 영화를 만든 가장 중요한 동기가 있다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정’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아직도 터키쪽에서는 자신들의 선조가 저지른 역사적 사실인 대학살을 부정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일어난 지 90년이 흘렀고 4대째의 후손이 아픔을 함께하고 있다. 자라나는 후손이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도 영화를 만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세계에 흩어진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아르메니아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세계에 흩어진 아르메니아인들이 고국을 방문하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원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이곳에 함께 살면서 뿌리를 내리고 아르메니아를 다시 건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르메니아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일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영화 <아라랏>과 같은 작품을 다시 만들 계획인가.


제작했던 영화 <아라랏>은 개인적인 관점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관점도 다양해질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5년이 되면 아르메니아 대학살 100주년이 된다. 10년 뒤가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