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

한부울 2009. 5. 2. 00:20

고려연방(Unite Corea)국가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최두환박사는 하중부(河中府)가 이곳 사마르칸트일 가능성을 제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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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

 

 

트란스옥시아나는 시르다라 강과 아무다라 강(혹은 옥서스강)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대부분, 타지키스탄 대부분, 카자흐스탄 남서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주로 8세기 전후의 이 지역을 지칭할 때 쓰이는 표현이다. 아랍어로는 마와란나하르(마와라안나풀:Ma Wara'un-Nahr 아랍어: ما وراء النهر)라고도 한다. 주요 도시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이다.


어원


트란스옥시아나라는 말은 라틴어로 '옥서스 강 너머'라는 뜻에서 나왔으며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관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역사


비단길이 지나는 곳으로 고대부터 번영하였다.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제국 때에는 소그디아나라는 이름의 사트라피(Satrap:페르시아 제국 주(州)총독의 칭호)였으며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을 당한 이후로 헬레니즘 문화가 발달했다. 기원전 3세기에는 일부지역이 박트리아의 지배에 들어갔고 기원전 2세기부터는 파르티아의 영향권으로 편입됐다. 파르티아의 지배를 받던 126년에는 한 무제가 보낸 장건이 중국인 최초로 이 지역을 통과한 뒤 기록을 남겼다. 파르티아가 사산왕조 페르시아로 교체된 3세기부터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사산왕조 페르시아대에는 동서무역의 중심지로 특히 각광을 받아 경제,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뤘다. 7세기 이슬람 제국에 의해 정복당했으며 이후 이슬람화하였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왕조의 지배를 거쳐 이란에 세워진 여러 이슬람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다. 1219년, 칭기스 칸의 호라즘 원정 때 정복되어 몽골 제국으로 편입되었고 이후엔 차가타이한국의 영토로 들어갔다. 1370년, 이 지역의 중심도시 사마르칸트를 수도로 하여 티무르 왕조가 설립됐고 약 1세기 가량 존속하다가 1500년에 우즈베크 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우즈베크족이 이 지역을 차지하여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어졌다.


고대


옛날에는 기원전부터 소그드인의 근거지이며, 아무다리야강이나 시르다리야강, 자라후살강등의 하천의 유역에 사마르칸드나 부하라 등에 대표되는 도시나 촌락군과 경지가 개발되어 정주지역의 주변에 퍼지는 초원이나 사막에는 유목민이 활보하는 땅이 되었다. 또 중화권(中華권)을 묶는 Silk Road가 발달하여, 투르크족(Turkic peoples)이나 소그드(sogd)인등이 교역 등을 통해서 동서가 연결되었다.


투르크 제족(터키어: Turk halkları, Turkic peoples)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시베리아에서 발칸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퍼져 거주하는 튀르크어파를 모어로 하는 민족을 말한다

 


이슬람시대


이 땅은 9 세기부터 10 세기 걸쳐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아바스 왕조 칼리프(Caliph)·마문

(Al-Ma'mun)의 탈권에 공헌한 사만왕조(Samanids)은, 마문(Al-Ma'mun)의 위임을 받아 마와라안나풀로부터 호라서(呼羅珊 아랍어: خراسان Khorasan)에 걸치는 영역을 지배하여 수도가 된 부하라의 궁정을 중심으로 근세 페르시아어의 최초의 문예 부흥을 완수했다. 이 지역은 13 세기 몽고인에게 침범될 때까지 이슬람 문화의 한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사만왕조(Samanids)은 동방으로부터 진출해 온 투르크계의 카라한 왕조(黑汗 Kara-Khanid Khanate 터키어: Karahanlılar, 840년~1212년)에 멸해 사마르칸트나 부하라는 카라한왕조의 왕족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카라한왕조는 13 세기 초 호라즘(Khwarezm-Shah)왕조의 아라웃디·무하마드(Ala ad-Din Muhammad II of Khwarezm)에 의해 멸해져 사마르칸트는 일시 호라즘(Khwarezm-Shah)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지나 1219년, 몽고 高原로부터 발흥한 징기스칸이 인솔하는 몽고 제국에 의해 마와라안나풀 전역은 침공을 받아 사마르칸트나 부하라 등의 제 도시는 몽고 제국군의 공격에 의해 함락되면서 파괴되었다.


아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 아랍어:لعبّاسيّ  ون)는 아랍 제국의 두번째 이슬람 바그다드 칼리파왕조의 이름이다. 마문(Al-Ma'mun786년~833년, 재위813년~833년)은 아바스왕조 제7대 칼리프로 하룬 알라시드의 아들이다. 부왕(父王)의 서거 후(809년), 이복형(異腹兄)인 제6대의 칼리프 아민에게 대항 813년 바그다드를 포위하여 형이 암살된 뒤에 즉위하였다.


몽고제국 시대


호라즘제국(Khwarezm-Shah)왕조멸망 후 각 도시에 다루가치(達魯花赤 Darughachi: 진압하다)을 설치 몽고제국의 행정구에 편입시켰다. 마와라안나풀 전역의 정복의 과정에서 이 지역에는 징기스칸의 여러자녀의 采邑이 다수 설정되어 징기스칸에 의해 임명된 대관이나 서기들은 오고타이칸시대에 들어 전 국토 행정조직 재편이 진행되었지만 중앙아시아에 재정부문을 통괄하던 마후무드·얄라와치(Mafmud Yalawach)와 후임이 된 마스우드·베크(Amīr Mas ud Bak)는 부모와 자식간이었다. 1260년에 몽고황제 몽케 칸(1208년 ~ 1259년)의 죽음에 의한 혼란의 결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오고타이가家 카이두(Khaidu, Qaidu1230년~1301년)와 차카타이(Chagatai)家 바라크의 대두였다. 몽고제국 중앙아시아의 재무 당국은 왕족끼리의 분쟁에 의하여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카이두의 지배에 흡수되어 버렸다. 1301년의 카이두 사후 차가타이家의 두아(Dua1282~1307년)가 동쪽은 이리지방 일대로부터 마와라안나풀 전역까지 지배했지만, 두아의 사후는 두아의 여러자녀가 當主를 이었지만 短命의 當主가 계속되어, 케베크등에 의한 내부의 중흥이 꾀해졌지만, 정도 없게 후계자를 둘러싸고 차카타이家는 내분상태에 빠졌다. 이 과정 중에서 마와라안나풀 내부를 근거지로 하는 차카타이家의 아미르(아랍어: ير ; amir 총독, 총사령관)층 중에서 바르라스 부족의 티무르(1336年4月9日 - 1405年2月18日)가 발흥하여 이리지방을 근거지로 하는 두아예의 차카타이家의 왕족들과 지배지역을 나누게 된다. 이것이 티무르왕조와 Mughal Empire·칸家의 기원이 되었다.

 

티무르朝 시대

 


티무르는 마와라안나풀을 중심으로 권력을 확대하여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 인도, 킵차크한국(Golden Horde [러시아 남부와 동유럽에 성립한 몽골계의 한국이다])의 제세력이 항쟁을 반복하는 킵차크초원에도 원정하였다. 한편, 중심지인 사마르칸트나 자신의 고향인 샤흐리사브즈(Shahrisabz), 코자 암드 야사위묘(Mausoleum of Khoja Ahmed Yasawi) 등, 거대한 회교 사원이나 마드라사(madrasa), 궁전, 정원, 중앙아시아 각지의 성자묘나 스스로를 포함한 티무르 한 집안의 묘등, 현재에도 남는 거대한 건축군의 건설을 각지에서 진행했다. 몽고에서 무슬림(Muslim)이라고 하는 이른바 차가타이인 이라고 하는 의식이 마와라안나풀의 차가타이·한국(ulus)계의 아미르층이 형성되어 티무르왕조시대에는[集史 ]재 편찬이나

차가타이 왕후 귀족의 사이에도 페르시아어 문예의 애호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모어인 차가타이·터키어의 문예운동 등의 문화 활동도 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티무르사후, 티무르가의 왕족끼리의 분쟁이 계속되어 사마르칸트 등은 係争地가 되었기 때문에, 문화적 중심은 이윽고 비교적 정권이 안정되었던 호라서(呼羅珊Khorasan)의 헤라트(Herat)로 옮겨졌다. 티무르왕조의 왕족의 혼자서 후의 무갈왕조(Mughal Empire)의 시조인 바부르(1483년 2월 14일~1530년 12월 26일)등도 주변의 왕족들의 분쟁에 뛰어들어 킵차크한국(ulus)의 시반 이에노우시로예인 우즈베크(Uzbeks)의 수장 샤미바니·한이 마와라안나풀까지 남하해 마침내 사마르칸트를 제압하여 티무르왕조를 멸했다. 바부르는 여러 번 사마르칸트 탈환을 시도했지만 완수하지 못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카불(Kabul)을 거점으로서 인도에 들어가 무갈 왕조를 세웠다.


샤미바니왕조 이후(우즈베크계 왕조시대)


샤미바니·한을 시조로 하는 샤미바니왕조는 티무르 왕조때 활발한 페르시아어, 차가타이·터키어에 의한 문예 운동을 적극적으로 흡수 계승했다. 수도가 된 사마르칸트나 부하라는 그 시발지로 하여 영향은 무굴·한국에까지 직접으로 이어졌고 현재의 新疆위구르자치구의 문화기반을 형성하고 있다. 16 세기말에 샤미바니왕조의 멸망 한 후 아스트라한·한국 (Astrakhan Khanate)의 카심(Qasim1466-1490)이 부하라를 수도로서 삼았고 러시아제국의 진출에 골치를 썩이면서도 20 세기에 만기트왕조 마지막 군주 아림·칸(Mohammed Alim Khan제위1911年1月3日~1920年8月30日)이 소련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마와라안나풀은 몽고계 정권이 계속 이어졌다. [위키, 네이트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