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roket)역사와 1944년 獨V2 로켓 런던공습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Wernher von Braun 1964년 5월, 마셜 우주 비행 센터에서 촬영
출생-1912년 3월 23일 독일 제국 포첸 비르지츠
사망-1977년 6월 16일 미국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
거주지-독일제국→나치독일→미국
국적-독일제국→나치독일→미국
분야-나치독일/미국로켓 기술자·개발자
주요-업적 로켓 개발(V2로켓, 새턴 로켓 등)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1912년 3월 23일 ~ 1977년 6월 16일)은 독일 출신의 로켓 과학자이다. 현 폴란드 지방인 포첸에서 태어나 스위스 취리히 지방에서 초등 교육을 받고 자랐다.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V시리즈 로켓을 개발하였는데 그중 V2로켓이 가장 유명하다. 나치 독일의 패망 후 미항공우주국 NASA에서 일하다가 퇴임 후 말년을 평화로이 보냈다.
초기 생애
1912년 포첸 지방에서 태어난 폰 브라운은 어릴때부터 남다르게 스위스 취리히에서 초등 교육을 받고, 중학교 졸업 후 자신도 우주에 가고 싶은 열망이 들어 로켓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우주여행협회에 가입한 폰 브라운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2년 동안 80회정도의 로켓 발사 실험을 하였다. 로켓 발사실험에 열정을 기울인 폰 브라운은 많은 청중들 앞에서 로켓 발사실험을 보여주는 등 로켓 연구에 박차를 가하다가 독일 육군 로켓 연구소의 소장 발터 도른베르거를 만나게 된다. 도른베르거는 폰 브라운을 베를린 공과대학에 입학시켜 폰 브라운으로 하여금 액체 연료 로켓을 전공할 수 있게 하도록 도와주었다.
페에데문데 로켓 연구소에서
Walter Dornberger, Friedrich Olbricht, Wilhelm von Leeb, and von Braun at Peenemünde, 1941
도른베르거의 눈에 띤 베르너 폰 브라운은 독일 육군 로켓 연구소에서 로켓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 당시 전쟁준비를 가속화하던 독일 제3제국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폰 브라운에게 로켓을 개발하도록 지원해주었다. 히틀러는 페에데문데 로켓 연구소를 세워주었고 폰 브라운은 많은 과학자들과 함께 로켓 연구를 시작했다. 폰 브라운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A1, A2, A3, A5로켓, 항공폭탄 V1로켓, 그리고 그 당시 최고의 로켓, V2로켓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Schematic of the A4/V2
히틀러의 전격전, 그리고 폰 브라운
마리아 폰 브라운, 베르너 폰 브라운의 배우자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삶의 터전을 늘리기 위하여' 전쟁을 시작한다. 그리고 히틀러는 폰 브라운에게 다량의 로켓 생산을 주문하였다. 촉박한 스케쥴 때문에 고생받던 폰 브라운은 결국 사임 직전까지 가지만,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겨우 남아 다시 일을 시작한다. 그때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는 프로그램을 SS에게 넘겨주라고 명령하였지만 폰 브라운은 그 명령을 고뇌끝에 거절한다. 결국 힘러는 1944년 폰 브라운을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그러나 도른베르거가 나타나 힘러에게 "베르너 폰 브라운이 없으면 V2로켓은 그저 제자리만을 맴돌 것입니다. 그것은 제 3제국에게도 치명적입니다."라고 말하여 히틀러의 직권으로 풀려나게 된다. 폰 브라운은 다시 페에데문데 로켓 연구소로 들어가 연구를 시작하게 되고, 독일의 미사일 기술을 세계 최고로 올려놓을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도른베르거와 그의 일행은 로켓의 연료가 실린 차량을 타고 바이에른의 산악 지대로 도망가버렸고, 1945년 폰 브라운은 오스트리아에서 미군 부대에 항복한다. 그 당시 폰 브라운은 뉴욕을 타겟으로 한 로켓 프로젝트를 진행중이였다.
미국과의 협력, 그리고 NASA에서
Von Braun (with armcast) immediately after his surrender
1963년 5월 19일,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있는 폰 브라운
항복과 동시에 독일 최고의 로켓 과학자 폰 브라운과 그의 독일 최고의 동료들은 뉴멕시코의 미군기지와 계약을 체결한다. 6.25 전쟁에 자극받은 미국 당국은 폰 브라운과 그의 동료들을 핵탄두를 장착한 유도 미사일 개발에 착수시켰다. 그러던 도중 폰 브라운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미항공우주국의 마셜우주비행센터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그는 곧 미국 최고의 로켓 과학자가 되어 미국의 로켓기술을 최상까지 끌어올린다. 이때, 폰 브라운은 110미터의 대형 로켓 새턴 5호를 개발하였고 그것은 1969년 아폴로 우주선에 사용되었다. 나치 독일에서의 노력, 미국에서의 노력이 합쳐진 기술은 폰 브라운으로 하여금 아폴로 우주선을 우주로 성공적으로 날리는 성과를 거두게 하였고,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다. 이 순간은 인류가 우주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었고, 미국으로서는 최대의 정적,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로 인해 떨어진 자존심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 순간은 폰 브라운의 생애에서 최고의 순간이였다. 이를 통해 폰 브라운은 미국 최고의 인기스타가 되었다.
Wernher von Braun, with the F-1 engines of the Saturn V first stage at the US Space and Rocket Center
Dr. von Braun, Charles W. Mathews, George Mueller, and Lt. Gen. Samuel C. Phillips relax in the Launch Control Center following the successful Apollo 11 liftoff on July 16, 1969.
말년 생애
베르너 폰 브라운의 무덤
성공적으로 우주로 유인우주선을 날려보낸 베르너 폰 브라운은 달을 뛰어넘어 화성에 유인우주선을 보낼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을 너무 늦게 시작했는가, 폰 브라운은 이미 늙어 있었다. 그리고 폰 브라운은 아폴로 계획이 취소되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였고 1972년 결국 미항공우주국에서 다음 세대가 좀더 기술을 발전시키기를 기원하며 떠나고 미국 메릴랜드 주의 페어차일드 항공 우주회사의 엔지니어링 개발 부사장으로 일하였다. 그러나 그의 몸 속에서 신장암이 발견되었고 병세가 악화되어 페어차일드 항공 우주회사를 떠난다. 1975년 그는 국제과학공로상을 수여받게 되었으나 1977년 초 입원 때문에 백악관 행사에는 참가할 수 없게 되었을 만큼 병세가 심해졌다. 그리고 1977년 6월 16일, 세계를 놀라게 했던 위대한 독일인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은 편하게 눈을 감는다. 그의 시신은 미국 알렉산드리아 아이비 힐 공동묘지에 묻혔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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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獨V2 로켓 런던 공습
[동아일보] 2008년 09월 08일(월) 오전 02:59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밀려 궁지에 몰리게 된 독일의 히틀러에게 한 편의 영화가 전달됐다. 지상에서 발사된 길이 14m, 무게 125t의 거대한 로켓이 100km를 넘게 날아가는 모습을 영화로 본 히틀러는 “6년만 일찍 개발됐었더라면…” 하며 가슴을 쳤다고 한다.
히틀러는 즉각 탄두만 980kg인 이 거대한 로켓을 만들 대규모 공장을 짓도록 지시했다. 그로부터 2개월여가 지난 9월 8일 이 거대한 로켓이 영국 런던 하늘에 나타났다. 단 한 대의 폭격기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거대한 폭탄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본 런던시민들은 경악했다.
보복무기(Vergeltungswaffe) 2호의 머리글자를 따 ‘V2’로 명명된 이 로켓은 이후 6개월여 동안 3000여 발이 발사됐고 런던을 포함한 연합국 주요 도시 시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대형 트럭을 이용한 이동식 발사대에서 쏘아지는 데다 당시로는 요격이 불가능한 시속 5760km의 속도로 날아오는 V2 로켓에 연합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V2 로켓의 명중률이 매우 낮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목표 지점에서 몇 km씩 떨어진 지점에 떨어졌고 런던으로 발사된 V2 로켓 중에는 해협을 건너지 못해 바다에 떨어진 것도 적지 않았다. V2 로켓의 비싼 생산비용은 오히려 독일군의 골칫거리가 됐다. V2 로켓 한 발의 제조비는 전투기 한 대의 제조비와 비슷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독일이 만든 V2 로켓은 6000여 발로 탱크 4만8000여 대를 만들 수 있는 비용이 V2 로켓 제조에 들어갔다.
1945년 전쟁이 끝났지만 V2 로켓의 주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과 소련은 V2 로켓 개발 연구원과 발사되지 않은 V2 로켓 확보 경쟁에 나섰다.
미국은 V2 로켓 개발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를 포함해 126명의 주요 연구원을 수백 발의 V2 로켓과 함께 미국으로 데려갔다.
소련으로 압송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미군에 붙잡힌 브라운 박사는 1950년부터 미국 육군병기공장의 유도탄 연구 기술부장으로 장거리로켓을 연구했다. 1960년부터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소속돼 아폴로계획을 포함한 우주개발계획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덕분에 V2 로켓에 사용된 엔진구조와 유도제어 기술은 아폴로 우주선인 새턴 5호에 이용될 수 있었다. 소련도 V2 로켓 발사 연구원과 V2 로켓을 확보한 덕분에 소련 최초의 미사일인 R1을 만들어냈다.
이현두 기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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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math of a V-2 rocket attack on the main intersection in Antwerp, Belgium, November 27, 1944
A V-2 replica on display in Musée de l'Armée.
Operation Backfire (WWII) V-2 rocket on Meillerwagen(Meiller Veh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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