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軍

외딴섬 예비군 훈련날은 '마을 잔칫날'

한부울 2009. 4. 4. 11:53
 

외딴섬 예비군 훈련날은 '마을 잔칫날'

[조선일보] 2009년 03월 20일(금) 오전 03:00


지난 17일 오후 3시, 전남 완도군 금당도(金塘島)에 있는 육군 제31사단 금당면 예비군중대에 전화가 울렸다. "금당면대 이병 이민호입니다!" "아따, 민호냐. 배로 택배가 온다는디 그것 좀 집까정 실어다 줄 수 있겠는가?"


이민호(21) 이병이 득달같이 전투모를 쓰고 선착장으로 뛰었다. 심부름을 마치자마자 또 전화가 울렸다. "면사무소에서 등본 좀 떼서 서울 아들한테 좀 보내야 쓰겄는디."


금당면대 신정규(50) 면대장은 "보건소에서 약 타달라는 전화, LPG통을 갈아달라는 전화…. 연로한 주민들의 심부름 전화가 하루 15통쯤 온다"고 했다.


푸른 물이 넘실대는 봄 바다 끝에 금당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완도에서 뱃길로 60㎞쯤 가는 곳이다. 여의도(8.5㎢) 두 배가 채 안 되는 넓이(13.91㎢)다. 섬 끝에서 끝까지 긴 곳은 7.8㎞, 짧은 곳은 2.8㎞다. 생후 3개월 아기부터 98세 할머니까지 1179명이 이 섬에 산다. 금당도엔 술집도, 다방도, 중국집도 없다. 자장면을 시키면 고흥군 녹동 읍내에서 115t 페리호가 50분 걸려서 실어온다.


이 섬을 지키는 군대가 금당면대다. 편제인원은 39명이지만 실제로 주둔하는 군인은 딱 4명이다. 신 면대장과 상근 예비역 박정철(22) 병장, 이민호 이병, 김현송(21) 이병이다. 나머지는 예비군이다.


금당면대의 존재 이유는 유사시에 주민들을 지키는 것이다. 31사단 레이더 기지에 이틀에 한번꼴로 걸리는 '의아 선박'(의심스러운 선박)을 확인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 임무다. 기지에서 연락이 올 때마다 신 면대장이 바다에 나간 주민들에게 무전을 쳐서 일일이 선박 신원을 확인한다.


신 면대장에겐 마을 주민들이 '정보원'이다. 그는 주민들을

▲이동 신고망(택시기사·집배원·상수도검침원·환경미화원)

▲고정 신고망(노래방·목욕탕·식당·여관·이발소 주인)

▲기본 신고망(10개 마을 이장)

▲군 특별 신고망(외딴 집에 사는 주민) 등 4개 그룹으로 나눠 '관리'한다.


신 면대장의 '정보원 관리' 비결은 금당면대원들의 친절한 인사와 민첩한 심부름이다. 강형원(59) 금당면장은 "초등학교·중학교가 하나씩밖에 없고 섬 사람끼리 자체적으로 결혼을 많이 해서, 7·8촌까지 따지면 주민 전체가 친척 아니면 학교 선후배"라고 했다. 육군본부 예비군조직관리과장 조규덕(50·육사 39기) 대령은 "주민들과의 끈끈한 관계가 유사시 작전 수행에 큰 힘이 된다"고 했다.

 

 

한가롭고 태평한 금당도가 잔칫집처럼 북적대는 날이 1년에 세 번 있다. 예비군 훈련날이다. 지난 17일 오후부터 18일 오전까지, 금당도 가학선착장에 페리호가 닿을 때마다 예비군 전투모를 쓴 청년들이 하나 둘씩 가뿐히 뛰어내렸다. 서울·광명·광주광역시 등 외지에 나가 살던 금당도 청년들이 올 첫 예비군훈련에 참가하려고 길게는 왕복 20시간씩 걸려서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18일 오전, 금당면 복지회관에 모인 예비군 앞에서 신 면대장이 "일동 주목!" 하더니 다음달 새신랑이 되는 예비군 권대호(26·경기 광명시·자동차정비업)씨를 일으켜 세웠다. "여기 있는 대호는 결혼준비도 미루고 여기까지 훈련받으러 왔어. 자, 박수!" 박수 소리가 가라앉자 신 면대장이 덧붙였다. "대호 아부지도 우리 중대 출신이여. 여기는 다 여러분 아버지들이 훈련받은 부대니까 여러분들 잘해야 돼."

 


오후 1시, 훈련이 시작됐다. 오르막길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신음이 나왔다. "워메, 나 죽겄네." 금당중학교 동창인 예비군 권대민(25)씨와 김보람(25·서울 수유리·작곡가)씨가 티격태격했다. "야, 니 똑바로 걸어라. 건방지다." "야, 내가 니 1년 고참이다. 니는 한참 밑이라 보이지도 않는다."


얼굴에 위장크림을 바른 예비군들이 진지에 매복했다. 상근 예비역 병사들이 가상 적군 역할을 맡았다. 진지 속에 앉은 예비군들이 '친절하게' 외쳤다. "야, 잘 와라. 잘못 오면 총 맞는다잉." 상근 예비역 병사들과 예비군들은 이 섬에서 자란 친구들이다. 예비군들이 번개같이 가상 적군을 포획했다. 예비군 김건오(24)씨가 "전부 아는 사람들이라 같이 훈련 받기 편하다"고 했다.


오후 7시, 금당도를 떠들썩하게 한 훈련이 끝났다. 청년들은 마지막 배 시간을 놓칠까 봐 총알같이 선착장으로 뛰었다. 이 배를 놓치면 꼬박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한다. 정신없이 배에 타는 아들 손에 어머니들이 문어·낙지·김치 보따리를 안겼다.


상근 예비역 병사들이 각자 집으로 퇴근했다. 신 면대장만 덜렁 부대에 남아 발을 씻고 양치를 한 뒤 면대 사무실 한쪽에 딸린 9.9㎡(3평)짜리 방에 곤한 몸을 뉘였다. 그는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금당면대장으로 이 섬에 5년째 근무 중이다. 한 달에 한두 번 왕복 22시간 걸려서 인천 집에 다녀온다.


신 면대장은 "아무 연고 없던 이 섬이 이젠 제2의 고향이 됐다"며 "섬에 왔던 청년들이 떠나고 나면 내 자식들과 헤어지는 것처럼 2~3일씩 쓸쓸하다"고 했다. 육군 예비군 중대 3666개 중 금당도처럼 외딴 섬에 있는 부대는 모두 26개다.

전남 완도군 금당도. 예비군훈련을 받기 위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네 선후배들이 배를 타고 이곳 금당면 예비군중대에 한데 모였다. /김영근 기자


금당도=박순찬 기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