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음모론의 세계

한부울 2009. 3. 21. 19:47
 

음모론은 가능성이다.

가능성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가가 사실일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늘 사실과 공존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것이 결과적으로 사실이라고 밝혀지지도 않을 것이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뚜렷하게 반박 또한 부정 할 수 없게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치적인 것이 진실에 가깝다는 그러한 원칙이 진리 때문이다.

어떠한 문제에서 인간이 이해가 가능하고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추측하지 않고 바르게 인지 할 수 있게 하는 능력 즉 이치적인 판단이 어느 인간에게나 자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늘 이러한 가능성이 음모를 잉태하게 한다.

그러한 가능성은 지극히 이치적인 것이고 상식적인 문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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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의 세계

[위클리조선] 2009년 03월 10일(화) 오전 10:20


최근 ‘군포 연쇄살인 사건의 수사 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청와대 이메일을 놓고 야당과 정권 사이에 ‘음모론’ 공방이 벌어졌다. 야권은 “전대미문의 청와대발 여론조작 시도”라며 국정조사와 특검 도입을 촉구했다. 반면 청와대는 “개인적 차원의 편지였지만 청와대 근무자로서 부적절한 행위였다”며 메일을 보낸 홍보기획관실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실의 행정관이 제출한 사직서를 수리했다. 그리고는 “행정관의 편지는 개인 차원의 돌출행동이었음이 밝혀진 만큼 계속 문제 삼으려는 것은 정치공세”라고 했다. 요컨대 별 것도 아닌 일을 음모론적으로 침소봉대해 여론을 호도, 정권의 이미지에 상처를 내려는 시도라는 주장이다.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불거진 사건들은 상당수가 음모론으로 연결된다. 1987년에 있었던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사건도 마찬가지다. 폭파범 김현희(47)는 최근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부 때 국정원이 나를 MBC에 출연시켜 바보로 만들려 했다”고 주장했다. 노 정권이 자신을 음모론의 주체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선 여전히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은 조작된 것이고, 김현희는 가짜”라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근래의 혹은 현대의 국제적으로 굵직한 사건들 역시 상당수가 음모론에 시달리고 있다. 과연 진실은 따로 있나, 아니면 음모라는 주장 자체가 음모인 것인가. 먼저 음모론이란 무엇일까.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 칼 포퍼는 “어떤 강력한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고통이나 재난이 발생한다고 설명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음모론의 특질은‘대중이 무기력한 원인을 가진 자의 탓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에 음모론은 대중을 쉽게 호도할 수 있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는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의 투명성”이라며 “우리는 정보 유통이 투명하지 않았던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경험으로 인해 음모론에 취약한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주간조선은 국내외의 굵직한 사건들 가운데 음모론이 수반된 대표적 사안들을 추려보았다. 음모론이 더 그럴 듯한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물론 여러분의 몫이다.


아시아 금융위기는 기획된 것인가


정 설 1997년 태국·인도네시아 등 화폐 가치 폭락… 한국은 위기 극복했지만 구조조정 후유증


IMF는 2000년 6월 “1990~1995년 동아시아로 약 3200억달러에 달하는 해외자본이 유입됐으며 이는 1980년대 전체 순유입액의 두 배 이상”이라고 발표했다. 이 같은 대규모 자본유입이 동아시아 경제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초과했다는 것이다.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은 해외채무 규모가 GDP의 28~57%에 달했다. 주목되는 것은 해외부채에서 차지하는 단기부채의 비중이었다. 한국은 1996년 말 기준, 단기부채 비중이 50%를 넘어섰고 태국이 41%, 인도네시아 25%, 말레이시아는 28%를 차지하고 있었다.


과도한 부채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환율정책을 자유롭게 펼 수 없었다. 자국 화폐의 평가절하는 기업이나 은행의 외채상환에 부담을 줬고, 외자도입에 부정적 영향을 끼쳐 경제성장을 둔화시켰으며 수지 악화로 기업의 도산을 초래했다. 기업 부실은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졌다. 부실 채권이 쌓이면서 자산 부실화가 초래됐고 금융시스템의 불안정성이 높아졌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국제 금융기관들은 동아시아의 은행과 기업에 대한 신규 대출을 꺼리게 됐다. 그러자 해외 차입금리가 상승했다. 해외 단기채무 규모가 외환보유고 이상으로 증가했지만 이에 대한 각 정부 대책의 실효성이 의심을 받으면서 불신은 더욱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 가치가 폭락했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외환 유동성 부족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 전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됐다. 한국에선 대기업이 연쇄 부도를 맞았고, 은행 및 종금사의 부실채권이 증가했으며, 경상수지 적자가 크게 늘어났다. 한국은 결국 1997년 12월,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받아 유동성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산가치 폭락, 구조조정, 노숙자 양산 등의 숱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음모론적 주장


“서방 투기자본의 아시아경제 장악 음모 고금리·저환율로 거액 챙겨갔다”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는 서방세계의 음모”라는 주장이다.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투기자본 세력이 세계무역기구(WTO)를 앞세워 다른 나라의 자본시장을 개방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뒤 외채가 누적돼 외환 유동성이 부족하게 되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해 구조조정을 유발하고 이 과정에서 대상국의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하도록 강요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례로 1997년 11월 우리가 일본에 정부 차원의 지원을 요청했을 때 미국이 일본에 ‘한국이 IMF에 가지 않으면 지원하지 말라’며 압력을 행사했다는 점과, 자본시장의 무리한 개방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했는데도 IMF가 구조조정의 하나로 한국자본시장의 과감한 추가개방을 요구했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로 ‘빈곤의 세계화’란 저술로 유명한 캐나다 오타와대학 미셸 초스도프스키 교수를 꼽을 수 있다. 그는 2005년 한국을 방문해 “국제 투기자본이 통일 뒤의 한반도를 재식민화 하기 위해 1997년 한국의 금융위기를 치밀하게 추진했다”고 주장했다.


“IMF 구제금융을 통해 외국 투기자본들이 한국의 기업을 장악하면서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견해에 동조한 대표적 정치자가 마하티르 모하메드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다. 그는 아시아 각국의 통화 가치가 한꺼번에 급락한 데 대해 여러 차례 ‘미국 배후설’과 ‘유대자본 농간설’을 제기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현재와 같은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20~40년간 일했지만 외국 투기자본의 음모로 2000억달러 이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1999년 5월 ‘아시아를 위한 뉴딜정책’이란 책을 통해 “아시아인들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또 무엇이 게임의 법칙인지 헷갈리게 됐다”고 했다. 마하티르는 “고금리 긴축정책을 펴라”는 IMF 권유를 따르지 않고 고정환율제를 실시한 뒤 외화 유출을 통제했다. 당시 IMF는 “말레이시아 경제는 파국을 맞을 것”이라 경고했지만 성공적으로 금융위기를 극복했다.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사건


정 설 22년 전 115명 탄 KAL기 폭파 테러… 범인 김현희 ‘북한 공작’ 입증해 사면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해역에서 공중 폭파됐다. 기내에는 한국인 승객 93명과 승무원 등 115명이 탑승해 있었다. 승객은 대부분 중동에서 귀국하던 근로자들이었다. 사건 15일 만에 양곤 동남쪽 해상에서 파손된 KAL기 부유물 7점이 발견됐다. ‘비행 중 폭발에 의한 추락’임을 보여준다. 수사 결과 이 여객기는 ‘북한의 대남공작원 김승일(하치야 신이치라는 일본인으로 위장)과 김현희(하치야 마유미로 위장)가 술로 위장한 액체 폭발물(PLX)과 시한폭탄을 기내에 두고 내렸으며 이로 인해 폭파됐음이 밝혀졌다. 이들은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살아남은 유일한 증인이자 범인인 김현희는 사형이 확정됐다. 하지만 사건이 북한에 의해 자행된 국가적 범죄였음을 입증한 공로로 한참 뒤 특별사면을 받았다. 김현희는 특수공작원 훈련을 받던 중 만난 납북 일본 여성(다구치 야에코=리은혜)의 존재를 밝혀, 납북 일본인 문제를 일본과 북한 간의 새로운 외교 현안으로 부상시키기도 했다.


음모론적 주장


“탑승자 유해·유품, 블랙박스 등 전무 대선 전날 김현희 압송해온 것도 수상”


안기부는 1990년 “안다만 해역에서 비행기 잔해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잔해에 남은 88올림픽 표지와 태극마크로 미뤄 폭파된 KAL기가 틀림없다”면서도 “115명 탑승자의 유해나 유품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가 북한 테러리스트임을 입증하는 사진 3장을 발표했다. 첫째는 1972년 11월 평양을 방문한 남북조절위원회의 남측 대표 장기영씨에게 꽃다발을 선물한 평양 화동 김현희, 둘째는 일본 하기와라 기자가 1972년 평양주재 당시 찍은 화동 김현희, 셋째는 평양서 꽃다발을 증정하려고 대기하는 화동 김현희의 사진이다. 김현희는 이 세 장의 사진에 대해 ‘내 것이 맞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음모론 주장자들은 몇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먼저 사진에 나온 화동의 귀는 동그란데, 김현희의 귀는 세모꼴이란 주장이다. 그들은 “귀는 지문과 마찬가지여서 레슬링 같은 과격한 운동이나 성형에 의하지 않고는 변하지 않는 다”는 성형외과 전문의 견해를 들어 사진의 진실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둘째로 그들은 “정희선이란 북한 여인이 ‘사진 속 화동은 나’라고 밝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희선이란 여인이 1988년 3월 외신기자회견을 한 장소가 북한이었음이 드러나면서 거꾸로 북한이 음모론을 조작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야기시켰다.


우리 정부는 기체의 결정적 부위나 탑승객 유품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고 10일 만에 현지조사단을 철수, 수색을 중단했다. 가장 중요한 증거품이 될 수 있는 블랙박스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블랙박스를 찾으려면 발신음 추적을 위한 ‘수중공명위치탐지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음모론자들은 정부가 보잉사에 이 기계를 요청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이 역시 간과하기 힘든 대목이라고 주장한다.


김현희는 대선 하루 전날 서울로 압송됐다. 정부는 “바레인 측 사정에 의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중앙일보는 10년 뒤인 1996년 4월 선거철마다 불거진 북풍(北風) 변수를 전하면서 “1987년 박수길 당시 외무부 차관보가 바레인 당국에 거의 떼를 쓰다시피 해 압송 타이밍을 맞췄다고 한다”고 전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특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한 공작 차원에서 이 사건이 활용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한편 이 같은 일련의 음모론에 대해 김현희 본인은 최근 월간조선을 통해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이 나를 MBC에 출연시켜 바보로 만들려고 했으며 국정원 간부로부터 이민 권유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참여정부로부터 ‘KAL기 폭파 사건은 남한에 의해 조작됐다’는 진술을 하도록 강요받았다”며 “방송 제작진이 내 집을 기습 촬영해 사생활을 노출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또 “KAL기 사건은 북한 소행임이 명백한데도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이중적 태도를 견지했다”며 “이로 인해 5년간 주부로서 평범한 생활이 어려워져 도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김씨는 또 KAL기 사건과 관련된 과거사위의 활동도 음모라고 주장했다. 그는 “검찰과 사법부에 국정원의 위법 사실을 알렸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고 했다. 요컨대 김현희 주장의 핵심은 “북한은 존립을 위해 대남 테러사건을 일으켰고, 남한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조작설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정 설 1974년 8·15 행사장서 총 맞아 사망… 범인 문세광은 현장서 체포돼 사형


유신체제가 절정에 이르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저격사건이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총탄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두부 관통상을 입고 운명했다. 경축식은 TV로 생방송되고 있었기에 국민적 충격은 더욱 컸다.


범인 문세광(당시 22세)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수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문은 자신이 북한과 조총련의 지시를 받고 치밀한 계획에 따라 범행했다고 자백했다. 사건 발생 127일, 대법원 확정 판결 사흘 만에 문세광은 전격 사형에 처해졌다.

 

 

음모론적 주장


“문세광 권총엔 5발 들었는데 현장에서 발사된 총알은 7발”


문세광이 그날 준비한 권총 탄환은 5개. 첫 발은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실수로 자기 다리를 쏘았고, 박정희 대통령을 노리고 발사한 두 번째 탄환은 연단에 맞은 것으로 발표됐다. 세 번째 탄환은 불발. 네 번째 탄환에 육영수 여사가 쓰러졌으며, 문세광이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마지막 탄환은 천장에 맞았다고 수사기록은 전한다.


그런데 문이 경호원들에게 제압되는 가운데 현장에서 총성이 한 번 더 울린 것으로 파

악됐다. 조사 결과 총소리가 실제로는 총 7번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4번째와 6번째 총성은 문의 총성과 파장이 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음모론자들은 이 같은 정황들을 토대로 ‘문이 총을 쐈을 때 다른 누군가가 거의 동시에 총을 쏜 것 아니냐. 그렇다면 그게 누구냐. 고의로 육 여사를 맞힌 것 아니냐’는 등의 꼬리를 문 의혹이 제기돼 왔다. 요컨대 당시 권부가 정권 유지를 위한 ‘극약 처방’으로 육 여사까지 희생양으로 삼은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9·11은 조작인가


정 설 세계무역센터에 항공기 충돌 대참사… 서방의 아프간 공격과 이라크전 계기 돼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상징물이던 세계무역센터(WTC)와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펜타곤)에 항공기를 이용한 테러가 발생했다. 이날 오전 8시45분 아메리칸항공 소속 AA11기가 무역센터 북쪽 건물에 충돌했으며 9시3분엔 유나이티드항공 소속 UA175편이 남쪽 건물을 들이받았다. 이어 37분 뒤 AA77기가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을 들이받았다.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은 9시55분, 10시30분엔 북쪽 건물이 붕괴됐다. 부속건물인 7호 빌딩도 그 여파로 오후 5시20분 무너졌다. 범인은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로 알려졌으며 이들이 민간항공기를 납치해 공격한 것으로 파악됐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충돌 직후인 이날 9시31분 “미국에 대한 명백한 테러”라고 사건을 규정하고 전국 주요 건물을 폐쇄했다. 그는 9월 15일 오사마 빈 라덴이 숨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상군 투입을 결정, 10월 7일 공격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빈 라덴을 검거하지 못했다. 미국은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공격을 감행,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음모론적 주장


“빈 라덴의 형, 부시家와 친분… 사고 당일 아버지 부시 만나 현장에서 고성능 폭탄 흔적 발견된 것도 의문”


음모론은 부시 집안과 빈 라덴 집안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9·11 이전부터 관계를 맺어온 사이”라는 것이다. LA경찰 출신 마이클 루퍼트는 “오사마 빈 라덴의 형인 살림 빈 라덴이 1976년 빈 라덴 가문이 미국에 투자했던 자금을 처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이 일을 맡았던 사람이 텍사스 출신의 짐 배스였다”며 “그런데 그는 조지 W 부시의 절친한 친구”라고 주장했다. 1998년의 상황에 대한 ‘증언’도 있다. 다큐멘터리 ‘화씨 911’을 제작한 마이클 무어 감독은 “군산(軍産)복합 사모펀드인 칼라일그룹은 1998년과 2000년 두 차례 사우디를 방문해 빈 라덴 가문을 만났다”며 “당시 칼라일그룹을 대표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 부시였다”며 방문 사진을 2004년 공개했다. 사고 당일에 대한 얘기도 있다. “9월 11일 이른 아침, 칼라일그룹 사무실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형인 샤피그 빈 라덴과 아버지 부시가 만났다”는 것이다.


의혹은 북미항공우주방위군(NORAD)으로 이어진다. 1958년 상공 감시를 위해 이 기관을 세운 미국은 1989년부터 미국과 캐나다의 방공 식별권에 들어오는 모든 항공기를 탐지·확인·추적할 수 있게 됐다. 1992년부터는 멕시코 국경까지 감시 범위를 확대했다. USA투데이는 “북미항공우주방위군은 9·11 직전 2년간 항공기 및 미사일 테러 대비 훈련을 해왔다”고 보도했다. 이 기관은 2000년 한 해만 67건의 항공기 납치 진압작전을 수행, 성공률 100%를 기록했다고 한다. 음모론자들의 의문은 그런데 왜 9·11 당일만 예외냐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테러 징후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의문은 또 있다. 국방부를 공격한 항공기의 잔해가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미국 정부는 “충격과 고열에 녹아 잔해가 증발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항공기는 티타늄 합금 엔진을 장착하고 있다. 엔진 2개의 무게는 12톤. 음모론자들은 일부 학자의 입을 빌려 “12톤 티타늄 합금 엔진이 제트연료 폭발로 녹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미 국방부에 충돌 장면을 찍은 CCTV 필름을 공개하라고 요구했지만 당국은 거부했다고 한다.


자금 지원 여부도 의문이다. 파키스탄정보국(ISI)의 마호메드 아메드 국장은 테러 지휘자인 모하메드 아타에게 10만달러를 송금했다. 전달자인 오마르 셰이크가 자신의 역할을 시인했다. 하지만 ISI가 왜 테러범에게 10만달러를 지원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9·11 공식 보고서는 “자금 지원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짧게 언급했다.


무역센터 부속건물인 7호 빌딩은 항공기와 직접 부딪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붕괴됐을까. 음모론자들은 “폭탄을 사용해 의도적으로 무너뜨렸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브리검영 대학 물리학과의 스티븐 존스 박사는 “전자현미경 분석 결과 현장에서 고성능 폭탄에 쓰이는 테르마이트(Thermite) 흔적이 발견됐다”고 했다. 한편 빌딩 설계자인 레스 로버트슨은 “무역센터는 훨씬 큰 여객기가 충돌해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다”고 주장했다. 음모론자들의 최종적 추론은 “9·11은 미국이 새로운 제국주의 정책 추진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다이애나는 살해됐나


정 설  영국 왕세자비 다이애나 교통사고… 동행하던 아랍 애인과 함께 숨져


다이애나 스펜서는 1981년 영국 황태자 찰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끊이지 않는 불화설 끝에 1996년 결국 이혼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아랍 출신의 영국 거부 도디 알 파예드와 교제를 시작했다. 도디의 아버지는 영국 최고의 백화점인 ‘해로즈’의 오너다.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와 도디는 파리의 리츠칼튼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한 뒤 벤츠600을 타고 호텔을 나섰다. 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추적하자 벤츠는 알마교 밑 터널을 지나면서 속도를 높였다. 호텔 출발 4분 뒤였다. 벤츠는 터널 안 13번 기둥을 들이받았고 도디는 즉사했다. 다이애나는 4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다음날 프랑스 경찰은 운전사 앙리 폴을 상대로 음주 및 약물검사를 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프랑스법상 음주 한계를 3배나 초과한 알코올이 검출됐으며 그가 사고 전 석 달간 항우울제와 알코올중독 치료제를 복용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운전자 과실로 일단락됐다. 많은 음모론이 제기됐지만 의회는 사고 13년이 지난 2008년 단순 운전부주의로 재확정했다.


음모론적 주장


“기사가 만취 운전했다는 것은 거짓말 섬광 터뜨려 한순간 시력 마비시켰다”


먼저 “운전기사 폴이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는 주장이다. 폴이 정상적으로 걸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녹화된 리츠칼튼호텔 폐쇄회로 TV필름이 간접적 증빙자료다. 음모론자들은 “다이애나 고의 살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시체 공시소에서 폴의 혈액을 바꿔치기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프랑스 경찰은 2차 부검 및 DNA검사를 실시해 그 혈액이 폴의 것임을 재확인했다.


과속 여부도 논란이 됐다. 사고 장소의 제한속도는 30 마일(약 48㎞). BBC는 “프랑스 법의학자들과 충돌전문가들의 조사 결과 다이애나의 벤츠는 74~90마일(약 118~140㎞)로 달린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터널 폐쇄회로 화면엔 다이애나 승용차가 찍히지 않았다. 음모론자들은 “그날 밤 다이애나의 승용차를 찍은 다른 폐쇄회로 TV필름이 존재하며 그 차는 아주 느리게 주행했다”고 주장했다. 일부는 ‘폐쇄회로 화면’이라며 BBC로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호텔 출발 전에 호텔 뒤쪽에서 파파라치가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경찰은 사고 2주 뒤 “다이애나의 승용차가 충돌 전에 또 다른 차와 충돌했다”며 “부딪친 차는 1983~1987년식 흰색 피아트”라고 했다. 하지만 이 차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음모론자들은 “그 차가 고의로 다이애나의 벤츠와 충돌해 사고를 야기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목격자의 입을 빌려 “충돌 직전 터널 안에서 엄청난 섬광이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섬광 때문에 기사가 일시적으로 시력 장애를 겪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목격자라고 주장하는 프랑수아 레비스트르는 “그 불빛에 시력장애가 생겨 다이애나의 차가 제어력을 잃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이애나가 도디의 아기를 임신했기 때문에 살해됐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다이애나의 사체가 부검 전 몇 시간 동안 방부 처리된 점’에 주목한다. 방부 처리에 사용된 포름알데히드가 임신 진단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부검 시신에 대한 방부 처리는 불법이다.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프랑스 경찰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이애나는 사망 당시 임신 중이었으며 이 사실이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이애나 사망 열흘 전 그녀의 생리통 치료를 맡았던 의사는 “임신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방부 처리는 가족들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예수는 신화인가


정 설 4대 복음서는 BC 7~6년 출생한 실존인물로 기록


4대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실존 인물이다. 예수의 출생지에 대해 마태오(마태) 복음서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적혀 있고, 마르코(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나사렛 출신”이라고 돼 있다. “성탄절에 말구유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루카(누가)복음에 나와 있다.


예수의 출생 시기는 BC 7년, AD 6년이라는 주장이 맞선다. 마태복음(2장 1~16절)엔 “예수가 태어난 해에 하늘에 동방의 별이 나타났다”는 내용이 있는데 독일의 저명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동방의 별’을 목성과 토성이 일직선상에 놓여 강렬한 빛을 발한 시기로 해석했고 이를 BC 7년으로 계산했다.


반면 AD 6년 주장은 누가복음(2장 1~2절)의 “아우구스투스가 호적을 명함에 따라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옮겨갔다”는 구절을 근거로 삼은 것이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퀴리누스(Quirinus) 총독을 시켜 팔레스타인 인구 조사를 위해 ‘호적 정리’를 한 것이 AD 6년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음모론적 주장


“예수 이야기와 닮은꼴 고대신화 많아…실존 인물이 아니라 고대神 재구성한 것”


음모론의 핵심은 “예수가 생물학적으로 존재했던 실존인물이 아니라 고대의 여러 신을 응용해 재구성된 존재”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2007년 피터 조셉 감독의 다큐멘터리 ‘시대의 정신(Zeitgeist= Spirit ot the Times)’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예수를 지칭하는 상징들, 예를 들면 △처녀의 몸에서 잉태됐고 △12월 25일 출생했으며 △12명의 제자 또는 추종자가 있었고 △기적을 행하며 병자를 고쳤고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내용들은 예수 이전에 존재했던 여러 고대 신의 특징”이라 주장한다.


예수를 실존인물로 보지 않은 사람들에 따르면 예수와 빼닮은 고대신은 한둘이 아니다. 예컨대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 호러스(Horus)도 처녀의 몸에 잉태돼 12월 25일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동방의 별이 그의 출산을 지켜봤으며, 3명의 왕이 출생을 숭배했다. 호러스는 성인이 되어 12명의 추종자와 함께 방랑의 길에 올라 병자를 치료하고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행했다. 호러스는 ‘신의 양’으로 불리다가 측근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사흘 뒤 부활했다.


고대 그리스의 신 아티스(Attis)도 유사하다는 주장이다. 아티스 역시 처녀의 몸에 잉태돼 12월 25일 태어났고, 성인이 되어 기적을 행하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며,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밖에 페르시아의 고대신 미타라(Mithara·12월 25일 태어나 12명의 제자와 기적을 행하며 가르침을 펴다 죽은 뒤 사흘 만에 부활)와 인도의 신 크리슈나(Krishna·처녀의 몸에서 태어났고 동방의 별이 출생을 알렸으며 제자들과 기적을 펴다가 죽은 뒤 부활), ‘신의 독생자’ ‘왕 중의 왕’으로 불린 그리스의 신 디오니소스(Dionysus·처녀수태를 통해 12월 25일 태어나 가르침을 폈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다 죽은 뒤 부활) 등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예수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고대신들의 출생일이 12월 25일이라는 데 특히 주목한다. 천문학자들에 따르면 12월 25일은 동짓날 가장 작아진 태양이 사흘간(12월 22~24일) 남십자성이 있는 별자리에 머물며 십자가(cross) 형태를 이루다 다시 커지면서 이동을 시작하는 날이다. 이런 태양의 움직임은 고대인들이 모두 주목했고 여기에 신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십자가는 별자리인 남십자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예수의 죽음은 사흘간 이동을 멈춘 태양이며, 예수의 부활은 12월 25일부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태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란 주장이다.


이들은 ‘십계’ 역시 표절이라 주장한다. “십계는 이집트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 중 125번째 부분을 패러디했다”는 것이다. 사자의 서 중에서 ‘나는 살인하지 않았다(I have not killed)’란 대목이 ‘살인하지 말지어다(Thou shall not kill)’란 십계명으로 응용됐으며, ‘나는 도둑질하지 않았다(I have not stollen)’는 ‘도둑질하지 말지어다(Thou shall not steal)’로, ‘나는 거짓말하지 않았다(I have not told lies)’는 ‘거짓말하지 말지어다(Thou shall not bear false witness)’로 차용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는 지중해 연안을 돌며 가르침을 펴고 병자를 치료해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지만 지중해 인근의 어느 학자도 이 같은 예수의 행위를 기록해둔 사람이 없었다”며 성경 이외의 어떤 기록물도 예수의 행적을 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어 “예수와 성경은 천문학과 신학의 학문적 혼합물”이라고 주장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실은


정 설 닉슨이 재선 노려 야당 선거본부 도청했다 탄핵 당해… 테이프 일부 공개 안 돼


1972년 6월 17일 미국에서 발생한 도청 스캔들. 공화당 대통령 닉슨(Nixon)의 재선을 노리는 ‘재선위원회(Committee to Re-elect the President)’가 민주당 선거본부가 있는 워싱턴 워터게이트 호텔에 잠입,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체포된 사건이다. 닉슨은 “백악관은 도청사건과 연관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언론의 집요한 취재로 이 사건이 백악관과 관련돼 있음이 드러났다. 결국 수사 과정에서 도청을 위해 호텔에 설치한 테이프와 닉슨이 보좌관에게 “CIA를 시켜 경찰 수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담긴 테이프, 백악관 집무실 녹음 시스템이 자동 녹음한 테이프 등이 공개돼 닉슨의 잘못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로 인해 하원사법위원회는 대통령 탄핵 결의를 가결시켰고 닉슨은 1974년 8월 19일 정오에 자진 사퇴했다.

 

음모론적 주장


“미공개 테이프는 케네디 암살 음모 담긴 것 ‘다 밝히겠다’던 정보요원 아내도 의문사”


“워터게이트 사건이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관련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음모론을 펴는 사람들은 워터게이트 당시 닉슨이 백악관 집무실 대화 녹음 테이프를 재판에 넘기길 꺼렸다는 데 주목했고 여기에 케네디 암살과 관련된 단서가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닉슨의 수석보좌관을 지낸 헬드맨은 회고록을 통해 “이 테이프에서 닉슨이 법률고문 존 딘과 대화를 나누며‘문제는 이것 때문에 피그스만(bay of pigs) 작전이 드러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닉슨의 보좌관이던 존 얼리치맨(John Earlichman) 역시 “피그스만 작전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의 닉슨식 암호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피그스만 작전이란 케네디 정부가 쿠바에 게릴라를 침투시켜 반미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려고 한 작전을 말한다. 하지만 음모론자들은 “피그스만 작전이란 용어를 닉슨이 케네디 암살사건에 차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FBI 국장을 지낸 후버와 친분이 두터웠던 닉슨은 케네디 암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로 지목돼 왔다.


음모론자들은 “CIA 요원이자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E 하워드 헌트가 케네디 대통령의 실제 암살범”이라는 주장까지 폈다. 이들은 하워드 헌트의 아내 도로시 헌트가 1972년 12월 8일 시카고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것 역시 단순한 추락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도로시 헌트가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닉슨의 치부를 폭로하겠다”며 정권에 100만달러를 요구하다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음모론자들은 당시 추락 비행기 조종사의 혈액에서 청산가리가 발견됐다는 것에 의혹을 제기해 왔지만 이에 대한 미국정부의 공식적 반응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진주만 공격 유도설


정 설 일본, 1941년 12월 하와이 해군기지 폭격… 미국의 태평양전쟁 참전 계기돼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동남아시아를 장악해 가고 있었다. 위기를 느낀 미국은 철과 석유의 해외 공급을 통제하며 일본을 압박했다. 일본은 이에 대응해 1941년 12월 7일 하와이주 오아후섬 진주만에 있는 미국 해군 기지를 기습했다. 공격에는 전투기 441대, 항공모함과 구축함 등 함선 20여대가 동원됐다. 이 공격으로 진주만에 주둔한 미 해군 함선 12척과 188대의 비행기가 피해를 입었으며 군인 2400여명과 민간인 68명이 사망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미·일 간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 승리를 통해 전세를 뒤엎고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은 종결됐다.


음모론적 주장


“미 해군, 일본군 송신 내용 이미 파악 참전 명분 만들려고 공습 알고도 방치”


2차 대전 참전 명분을 찾고 있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일본의 공습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묵과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의 세력 확대를 막고 영국을 지원하기 위해 2차 대전에 참여하려 했지만 1차 대전 이후 해외 불간섭 정책을 유지해 오고 있던 미국 국민과 의회는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었다. 때문에 음모론자들은 “참전을 위해 여론과 의회의 동의를 구해야 했던 루스벨트가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해 미국을 건드리도록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음모론자들은 “피해가 클수록 여론이 더 격해질 것을 노리고 루스벨트 정부가 공습 당일 진주만 항공 정찰을 취소해 (일본의) 공습이 성공하도록 했다”는 주장까지 편다.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함선과 비행기 대부분이 실전에 효용 없는 구식이었다는 점도 ‘공습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음모론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신식 함선과 비행기는 공습 전에 모두 빼돌렸다는 것이다. 


음모론은 학계에서도 제기됐다. 해군 저널리스트 로버트 스티넷(Robert Stinnet)은 ‘기만의 날(Day of Deceit)’과 ‘진주만: 모든 음모의 원천’이란 두 권의 책을 통해 “미 해군은 진주만 공습에 관한 일본군 통신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며 “하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이를 묵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했다”고 비난했다. 피츠버그대의 도널드 골드스타인(Donald Goldstein) 교수도 “전쟁에 개입하려던 루스벨트 대통령에겐 재난이 필요했다”며 “그것도 작은 것이 아니라 큰 것이 필요했다”고 비판했다.


베일에 싸인 가축 떼죽음


정 설 캐나다·미국·남미서 연쇄 떼죽음… 감각기관만 감쪽같이 떼어가


1960~1970년대 중반에 걸쳐 미국, 푸에르토리코, 캐나다, 남미 등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걸쳐 1만마리가 넘는 가축이 기이한 상태로 떼죽음을 당했다. 도살된 동물들은 대부분 혈액이 한 방울도 없이 메말라 있었고 눈·귀를 비롯한 생식기관, 감각기관, 배뇨기관 등이 다이아몬드나 삼각형 모양으로 잘려 나갔다. 잘린 부위는 달군 쇠로 지져진 듯 깔끔하고 예리했다. 하지만 무엇으로 잘라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떼죽음이 누구의 소행인지, 무엇 때문인지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도살 현장 주변에 야생동물이나 사람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까마귀나 독수리처럼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들도 사체 주변에 일절 얼씬거리지 않았고 그 이유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가축 주인과 농부들은 이런 기괴한 현상에 겁먹어 가축들이 도살될 때마다 폐기시켰다.


음모론적 주장


“40년 전에 레이저 같은 첨단장비 썼다니… 그런 기술 없었다… 외계인 소행 아닌가”


원인 모를 가축의 떼죽음을 놓고 ‘외계인의 소행’이란 추측이 불거졌다. “외계인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가축의 특정 기관을 추출, 이종교배나 생체실험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동물의 신체를 절단한 기구가 불에 달군 정교한 쇠이거나 레이저를 이용한 기구라는 견해가 이를 뒷받침했다. 당시 레이저는 최첨단 장비였다.


“가축이 도살된 지역 주변에 UFO가 자주 출몰했다”는 지역 주민들의 말도 음모론에 힘을 실어줬다.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1975년 3월 10일 텍사스 주에서 발견된 암송아지 사체 주변의 방사능 수치는 정상치보다 0.5%가량 높게 나왔다. 사체는 원 모양으로 눌린 풀 위에 놓여있었는데, 이 역시 UFO 관련설에 힘을 보탰다. 1976년 뉴멕시코 목장에서 발생한 여러 건의 도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9장의 현장 사진에서 UFO를 연상케 하는 둥근 구형이 촬영된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 의회의 논쟁거리로도 떠올랐고 미국 정부는 진상 규명을 위해 4만달러 이상의 기금을 마련해 조사에 착수했지만 원인 규명에 실패하고 말았다. 일부 UFO 연구자들은 “가축들의 떼죽음이 외계종족의 소행으로 짐작된다”는 주장을 이어갔고 이에 대한 반론도 강하게 제기됐지만 결국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의 죽음


정 설  푸틴 정권 비난하던 러 정보요원 런던서 독극물 중독, 3주 만에 사망


2006년 11월 23일 런던에서 러시아 정보기관 연방보안국(FSB) 요원 출신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Alexander Litvinenko)가 살해당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1998년 당시 연방보안국장이었던 푸틴이 정적(政敵)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의 암살을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수감됐고 출감 후 영국 망명길에 올랐었다.


망명 후 리트비넨코는 영국서 러시아 신문기자인 안나 폴리트콥스카야와 함께 푸틴의 정책에 대항했다. 하지만 안나는 2000년 10월 7일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살해됐다.


리트비넨코는 안나의 암살 배후를 추격하던 중 마리오 스카라말라라는 이탈리아 학자로부터 “안나와 리트비넨코, 마리오, 베레조프스키가 암살 대상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리트비넨코는 2006년 11월 1일 런던의 일식집 ‘이추’에서 암살 관련 자료를 받기 위해 마리오를 만났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미 어디선가 독극물에 중독된 상태였던 것이다. 그는 런던 바르셋 병원으로 곧바로 옮겨져 위 세척을 받았지만 3주 뒤인 11월 23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음모론적 주장


“사인은 희귀 핵물질인 ‘폴로늄 210’  푸틴이 배후거나 푸틴 제거 위한 짓”


리트비넨코를 죽인 독극물은 ‘폴로늄 210’이라는 방사능 물질로 밝혀졌다. 이 물질은 원자로나 입자가속기를 통해 1년에 100g 정도만 생산되는 희귀물질로 체내에 들어가면 내장과 백혈구를 모조리 파괴한다. 폴로늄 210의 궤적을 추적한 런던 경찰은 리트비넨코의 집, 리트비넨코가 쓰러진 당일 FSB 전 요원을 만난 밀레니엄 호텔, 마리오를 만난 일식집, 영국에 망명 중인 푸틴의 정적 베레조프스키의 런던 사무실에서 모두 폴로늄 210의 흔적을 발견했다. 폴로늄 210은 국가 기관이 아니면 구할 수 없는 물질이기 때문에 리트베넨코의 죽음 뒤에는 푸틴의 살해 지시가 있었다는 의혹이 일었다.


실제 영국 정부는 진상 규명을 위해 러시아 정부와 접촉했지만 러시아는 “관련 없는 일”이라며 일축했다. 푸틴 대통령도 “리트비넨코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정치적 도발로 이용되는 것은 유감”이라며 선을 그었다.


리트비넨코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은 결국 미궁에 빠졌지만 ‘푸틴 배후설’ 이외의 음모론도 제기됐다. “정적 베레조프스키가 푸틴을 곤경에 처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리트비넨코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베레조프스키를 사건 배후로 의심하는 시각이 높았다. 이 사건은 아직 영국과 러시아 두 나라 사이에 풀어야 할 ‘외교적 매듭’으로 남아 있다.


/ 기획취재팀(팀장 이범진 기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