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도 불교 성지를 가다

한부울 2009. 3. 3. 11:50
 

[인도 불교 성지를 가다]<上>사카족 왕자 정각을 이루다

[세계일보] 2009년 02월 25일(수) 오후 05:27


갠지스강 푸른달 뜨면 붓다의 가르침 오롯이…


불자들에게 2월은 성지순례의 계절이다. 이때의 인도는 건기여서 여행하기에도 제격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이 마련한 ‘불교 8대 성지순례 프로그램’에 동행해 12일부터 22일까지 붓다의 80년 구도 역정이 스며 있는 인도와 네팔을 찾았다. 이곳에는 붓다가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를 비롯한 탄생지 룸비니, 첫 설법지 사르나트, 열반지 쿠시나가르 등 8대 성지가 있다. 이들 성지는 인도 북부 중앙에서 동서 400km, 남북 200km 반경에 집중돼 있다. 삶도, 문화도, 죽음마저도 불가사의한 나라 인도의 불교 성지순례 여정을 3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마하보디사원 경내에서 오체투지하는 티베트 승려들(사진 왼쪽)과 사원 안에 모셔진 붓다상.


인도(印度)의 어원은 인도 서북부를 흐르는 강 ‘인더스(Indus)’와 연관이 있고, 산스크리트어 ‘달(Indu)’과도 관련을 맺는다. 현장(602?∼664) 법사의 ‘대당서역기’에는 ‘세계의 어둠 속에서 우리를 비추는 달’로 인도를 설명하고 있다. 인도는 고대로 많은 종교 사상가들이 등장했다. 고타마 붓다도 이러한 종교 사상가 중 한 사람으로 출현해 인류 역사에 위대한 빛을 남기고 있다.


붓다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올해 불기 2553년) 전 인도 북부 룸비니(현재는 네팔 영토)에서 태어났다. 모친인 카필라국의 왕비 마야부인이 아기를 낳으러 친정으로 가는 도중 사라수(沙羅樹) 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동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붓다를 낳은 것이다. 광활한 들판에 자리 잡은 룸비니는 지금도 평화스러운 농촌 풍경을 하고 있다. 여느 성지처럼 룸비니도 오랜 세월 폐허로 방치돼 있다가 1896년 독일 고고학자 퓌러가 ‘아쇼카 석주’를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인도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원.


기원전 250년경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은 정복 과정에서 빚어진 일부 살육 참상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한다. 그가 인도 전역에 불교를 전하며 붓다의 자취가 서린 곳에 세운 돌기둥이 아쇼카 석주다. 이때 석주와 함께 스투파(탑)와 사원도 세웠으나 무슬림의 침공 등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석주마저 남은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세계 불교 산실로 거듭나고 있는 룸비니에는 아쇼카 석주와 마야데비 사원 터, 마야부인이 출산 후 목욕을 했다는 싯다르타 연못, 승원 터 등이 발굴돼 전 세계 불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인도-네팔 국경을 지나 룸비니로 향하는 길가에 즐비한 망고나무는 그 옛날 순례자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덜컹대는 버스에 시달리며 룸비니를 찾던 날 포항 죽림사와 진해 대광사 신도들이 이곳 성지에서 무릎을 조아리며 눈물로 기도하는 장면이 가슴 찡하게 목격됐다.


암울한 시대는 성인을 부르는가. 봄·여름·겨울궁전이 있고, 최상의 옷감과 노래와 춤이 만발하는 카필라성에서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안주할 수 없었다. 늙음(老)과 병듦(病), 죽음(死)을 절실히 생각한 그는 29살에 왕궁을 박차고 구도 행각에 나선다. 성곽 동쪽을 흐르는 아노마강을 건너 동남쪽으로 이동하며 계속해서 최고 단계의 여러 스승을 찾았으나, 그가 얻고자 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사상과 문화의 중심지 바이샬리를 무대로 ‘무소유처(無所有處)’의 가르침을 설파한 선인(仙人) 아라라 가라마라도 싯다르타의 구도 욕구를 채워주지 못했다. 맨발에 머리를 빡빡 깎은 싯다르타는 히말라야 설산에서 발원해 수천km를 달려온 갠지스강을 건너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니련선하 근처 우루빌라 마을의 고행림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싯다르타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자 긴 고행에 빠진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어언 6년의 세월이 흐르자 몸이 야위어 손으로 배를 만지면 등뼈가 만져질 정도였다. 죽음의 끝자락에서 싯다르타는 천녀(天女)의 소리를 듣는다. “리라(하프의 일종) 선을 너무 팽팽히 당기지 말라. 그 선이 끊어질지 모른다.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게 하지도 말라. 소리가 울리지 않을 것이다.” 궁극적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안락과 고행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이때 이곳을 지나던 우루빌라 지방 성주의 딸 수자타가 쓰러져 있는 싯다르타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조석으로 유미죽을 끓여 봉양한다. 몸을 추스른 싯다르타는 다시 니련선하 근처로 나가 보리수 아래에서 7일 동안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해탈의 즐거움이 가득했다. 붓다는 연기법을 깨우침으로써 출가의 과제였던 인간 존재를 구제할 길을 보았다. 모든 것은 조건이 있음으로써 생기기 때문에 조건을 없애면 그것도 없어지는 이치였다. ‘붓다’(진리를 깨달은 자)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붓다가 정각(正覺)을 이룬 보드가야로 가는 길. 인도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바하르주의 누더기 아스팔트는 곧게 뻗어 있으나 중앙선도 없고,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게 깔려 있다. 트럭이나 버스 뒤에는 어김없이 ‘horn please(경적을 울리시오)’라는 문구가 써 있다. 경적을 울리면 얼마든지 길을 비켜 주겠다는 뜻이다.


보드가야가 가까운지 니련선하를 끼고 있는 작고 조용한 마을 사이로 사원 하나가 우뚝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붓다의 정각지를 기념하는 높이 52m의 마하보디사원(대보리사)이다. 사원 입구는 먼 길을 달려온 각국의 순례객으로 붐볐다. 어마어마한 건축 규모며 아름다운 문양, 기하학적 예술미가 여간 빼어나지 않다. 세계 각국에서 온 1000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사원 구석구석에서 서로 경쟁이라는 하듯 기도정진하는 장면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국에서 온 불자들도 뒤질세라 탑 뒤에서 하루 3000배씩 절을 하며 차분하게 정진하고 있다. 서울 부암동 성불사 신도들이다. 한국인의 ‘독한’ 수행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룸비니·보드가야(네팔·인도)=정성수 선임기자 세계일보&세계닷컴

**************************

정법 씨앗’ 뿌린 그 길엔 행복의 열매가

[세계일보] 2009년 03월 01일(일) 오후 05:18


[인도 불교 성지를 가다] (中) 법을 전한 긴 여로

 

◇붓다가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법을 전한 곳을 기념해 세워진 사르나트 ‘다메크 스투파’의 위용.


인도 북동부 보드가야에서 대각을 성취한 붓다는 한동안 망설였다. 깨달은 바가 너무나 미묘해 사람들이 쉽게 이해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때 연꽃이 떠올랐다. 진흙 속에 살면서도 진흙탕의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는 연꽃. ‘그래, 연꽃과 같이 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리라.’ 붓다는 법을 전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처음에는 스승으로 모셨던 선인(仙人)들을 만나려 했으나,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함께 수행하다가 자신이 고행을 중단하는 것을 보고 실망해 사르나트(녹야원)로 떠난 5명의 비구(남자 승려)가 생각났다. 붓다는 무작정 그들을 찾아 나섰다.


보드가야에서 사르나트까지는 북서쪽으로 300㎞나 되는 먼 거리. 붓다는 갠지스강을 건너고 바라나시를 지나 드디어 사르나트에 이르렀다. 붓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비구들은 울화가 치밀었다. ‘저 자가 고행을 포기하더니 여긴 왜 올까’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점점 가까이 올수록 범상치 않았다. 붓다는 깨달음 이후 얼굴에 청정함과 원만함 등 일반인과 구별되는 32개의 상호(相好)를 띠고 있었다.


붓다가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법문을 설한 초전법륜지 사르나트. 사람과 동물이 인생의 벗이 되어 살아가고, 주어진 삶의 무게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100년의 도시.’ 이 소도시에는 붓다가 다섯 비구를 만난 곳을 기념해 세운 ‘차우칸디 스투파(탑)’, 다섯 비구에게 진리를 설한 곳을 기념해 세운 ‘다메크 스투파’, 옛 사슴 나라의 설화를 회억케 하는 사슴동산, 아쇼카 석주 등 유적지가 즐비하다. 지금은 비록 폐사지지만,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넓고 잘 단장돼 있다. 이 중 직경 28.5m, 높이 33.53m의 다메크 스투파는 거의 원형을 간직한 위용으로 순례객을 압도한다. 사르나트박물관에는 아쇼카 석주 상단부에 올려져 있던 4마리 사자상 등 초전법륜지에서 출토된 유물이 보관돼 있다. 아쇼카 석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5세기 굽타 왕조시대에 증축된 불교 보물들이다.

 

◇조계종 순례단이 붓다가 금강경을 설한 인도 기원정사 간다구티 사원터에서 최근 종단이 편찬한 ‘표준 금강경’을 봉정하는 고불식을 올리고 있다. 정성수 선임기자


붓다는 80세 생애 중 45년 동안이나 정법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걸어다녔다. 사르나트를 떠나 라즈기르(왕사성)로, 다시 북상해 슈라바스티(사위성)에 입성했다. 왕사성과 사위성은 대승경전을 설하며 교화의 꽃을 피우던 주무대. 라즈기르에는 붓다 재세 시 세운 최초의 사찰 죽림정사와 여행지에 세워진 나란다대학 터 등이 있다.


붓다가 죽림정사에 머물 때 하루는 밧가리라는 비구가 병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 죽기 전에 붓다를 한 번 뵙기를 간청했다. 붓다는 곧 승낙하고 그를 찾아가 위로했다. “밧가리야. 이 썩을 나의 몸을 보아서 어찌 하겠다는 거냐. 법(진리)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는 것이다.” 이 말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발견된다. 인간과 우주 만물 속에 내재한 불멸의 신성을 일컫는 이러한 통합적 지식을 ‘여명의 지식’이라고 했던가. 이에 반해 덧없는 피조세계를 좇는 지식은 ‘황혼의 지식’일터, 내가 선곳은 어디인가.


당대 부호인 수다타 장자가 붓다를 위해 사위성 근교에 세운 기원정사. 붓다가 생애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보석 같은 땅이다. 붓다는 가고 없지만, 세월의 이끼로 단장된 검붉은 사원터가 그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사상을 말없이 가르쳐 준다.


붓다는 이곳에서 진리의 최고 가치를 ‘행복’에 둔 많은 가르침을 쏟아냈다. ‘벗할 만한 사람과 벗할 수 있다면, 이것이 인간 최고의 행복이다. 부모님을 잘 모시고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면서 훌륭히 양육하고 올바른 생업에 힘쓸 수 있다면 이것이 인간 최고의 행복이다….’ ‘지나간 것을 좇지 않고, 오지 않는 것을 생각지 말며,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을 잘 관찰하라.’


붓다는 제자들에게 종종 질문도 던졌다. ‘아난다여, 무상(無常)인 것은 고(苦)인가, 낙(樂)인가?’ ‘대덕이시여, 그것은 고입니다.’ ‘그러면 무상이며, 고인 것을 바로 내 것이며, 내 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 속에서 자기 소유라고 집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묻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붓다의 아픔도 묻어 있다. 그는 아끼던 사리불 존자의 죽음을 맞아 제자들이 슬퍼하자 이렇게 타이른다. ‘내가 가르치지 않았느냐, 모든 사랑하는 사람과는 이별할 때가 온다고.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너 스스로를 의지하고, 법을 의지하라.’ 붓다는 생전에 수천 명의 제자를 얻었다.


붓다가 ‘금강경’을 설한 기원정사 간다구티 사원터에서 조계종 기획실장 장적 스님, 조계사 부주지 토진 스님 등 순례단은 조계종이 편찬한 ‘표준 금강경’(조계종출판사)을 봉정했다. ‘금강경’은 붓다 사상의 골수와도 같은 것이다.


라즈기르 동쪽에 위치한 400여m 높이의 영축산(靈鷲山)은 당시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독수리밥이 되기 위해 찾아가던 곳. 붓다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이곳에 올라 노인들에게도 법을 전했다. 붓다의 가르침을 듣는 그들은 행복했다.


라즈기르·슈라바스티(인도)

정성수 선임기자 세계일보&세계닷컴

**********************************************
[인도 불교 성지를 가다] <下>3개월간의 열반여행

[세계일보] 2009년 03월 02일(월) 오후 06:27


죽음 예견한 붓다 “번뇌 벗고 정진하라” 설파

 

◇인도 쿠시나가르 열반사에 있는 붓다의 열반상에 석양빛이 가득한 가운데 순례자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붓다에게 부여된 생의 불꽃이 거의 소진될 무렵, 등창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그에게 악마가 찾아와 “하루빨리 열반에 들라”고 재촉했다. 붓다는 이렇게 말한다. “악마여, 여래는 스스로 때를 알고 있으니, 물러가라. 지금으로부터 석 달이 지나 나의 본생지 쿠시나가르의 사라쌍수 사이에서 열반에 들리라.” 붓다는 앞서 제자 아난다에게도 자신의 열반을 알렸다. “아난다야. 내 나이 80에 들어 형상이 썩은 수레와 같으니 이제


더 굳고 강하기를 바랄 수 없다. 아난다야, 너는 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마지막 여행의 출발점 라즈기르(왕사성). 교화의 중심지 죽림정사는 지금 벽돌 한 장 찾아볼 수 없고 대나무만 듬성듬성 자라고 있다. 감옥에 갇혀서도 붓다가 있는 영축산을 향해 예배했다는 빔비사라왕의 감옥은 돌담 터가 그날의 슬픈 사연을 전한다.

 

◇붓다가 죽음을 앞둔 노인들에게도 법을 전파했다는 영축산에 순례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붓다는 우수에 찬 눈으로 라즈기르를 둘러본 뒤, 인도 북단 쿠시나가르로 향했으리라. 가는 중에도 그는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쉼 없이 법을 전했다. 붓다는 설법 중 ‘항하(恒河)의 모래’로 자주 비유했던 갠지스강을 건너 계속 북상했다. 삶과 죽음이 뒤엉켜 있는 영적 도시 바르나시에서 확인한 갠지스강의 모래는 밀가루처럼 고왔다. 바이샬리 벨루바 마을에 도착한 붓다는 제자들과 함께 우안거(雨安居)에 들어간다. 당시는 엄청난 더위와 습도의 계절이었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붓다는 병이 났으나 이내 회복한다. 이때 아난다가 묻는다.


“세존께서 병이 위중해 몸이 야위었을 때 저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아직 승가에 대해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뒤에야 안심이 들었지요.”


열반 전에 교단을 계승할 사람을 지명해 달라는 뜻이었지만, 붓다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가르쳤다.


                                 ◇붓다가 열반한 곳에 세워진 열반사와 사라쌍수.


“아난다여, 그 기대는 잘못된 것이구나. 나는 내가 이 교단의 지도자라든가, 비구들은 모두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든가 하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이 교단의 후계자를 지명해야 되겠느냐. 스스로를 의지처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는 사람이야말로 우리 교단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바이샬리에는 붓다가 ‘화엄경’을 설했던 콜후아 마을에 완벽한 형태의 아쇼카 석주와 ‘스투파(탑)1’이 있고, 붓다 입멸 후 8등분 한 사리를 분배받은 곳에 세워진 ‘스투파2’가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몸에는 괴색(壞色) 옷을 걸치고 손에는 발우 하나를 든 붓다는 쿠시나가르를 20㎞ 앞둔 파바 마을에서 대장장이 춘다로부터 ‘수크라 맛따바(돼지고기로 추정)’로 불리는 음식을 공양받고 또다시 병이 났다. 붉은 피를 쏟으며 심한 병고에 시달렸다. 설사를 계속하면서 스물 다섯 차례나 휴식을 취한 붓다는 마침내 쿠시나가르의 히란야바티강을 건너 두 그루의 사리나무 사이에서 고요히 누워 열반에 들었다. 이때 대지가 크게 진동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붓다가 열반한 곳은 지금 공원으로 조성돼 있고, 그 안에 흰 석회가 칠해진 열반사와 승원 유적지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열반사 안에는 붓다가 열반 시 고요히 누워 있던 모습 그대로 AD 5세기경에 조성된 6.1m의 열반상이 모셔져 있다. 다른 유적지보다 잘 단장된 너른 경내에는 당시를 재현한 듯 두 그루의 사라나무가 버티고 있다. 대부분 힌두교나 이슬람교 신자인 이곳 주민들은 불교 유적지를 공원처럼 여기고 공휴일이면 도시락을 싸들고 산책을 나온다고 한다. 한 무슬림은 ‘위대한 성인’으로서 붓다를 기억했다.


붓다의 유해는 열반 7일 후 인근 다비장터에서 불태워졌으며, 몸에서 나온 사리는 8개 왕국에 분배됐다. 붓다의 유해를 화장한 다비장터에 라마브하르 스투파가 세워져 있다. 한국에서 간 조계종 순례단은 석가모니불을 염송하며 탑을 세 차례 돌았다.


붓다가 열반을 눈앞에 뒀을 때다. 그는 극도로 피로한 몸이었지만, 제자들에게 의문이 남아 있으면 질문을 하라고 몇 번이고 권한다. 모두 침묵으로 일관할 때 아난다가 “교법이나 승가, 혹은 실천 방법에 대해 조금도 의문이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리라. ‘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다.”하늘에는 순한 소의 눈망울 같은 별들이 총총 피어나고 있었다. 조금 후 붓다는 가만히 눈을 감고 영원한 적정(寂靜)에 들어갔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고통을 참아내고,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마음의 해탈을 이룬 붓다, 인류는 그를 ‘위대한 스승’이라고 부른다. 광활한 영성의 들녘에 취해 고원한 정신세계를 더듬거렸던 기자의 인도 여행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쿠시나가르·바이샬리(인도)=정성수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