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왜 처형했을까?
지금 그의 행적을 보고 일본 극우보수세력들이 영웅시하고 있는 사람을 그 당시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로 처형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그 경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처럼 단순하게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인가 밝혀질까 두려워 처형했다?
그러한 점 보다 더욱더 은밀하고 은폐하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을 하치에몬이 알고 있었을 것이고 상대방 조선이 알아서 안 될 것들을 그가 밝힐 것이 두려워 미리 입막음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이다.
왜구무사집단 강호정부가 그 당시 상황에서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 입막음까지 해야 했을까?
첫째 생각해 볼 것은 일본(왜구무사집단)이 차지하고 거류하고 있었던 지역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문제가 있는 것 같고.(지금의 열도가 아니란 말이다.)
둘째 일본과 조선의 지위적문제가 있어 조선이나 국제사회에 이러한 점이 구체적으로 알려지거나 노출되어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질 것이 두려워 제거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지역적인 문제에서 먼저 보면 과연 지금의 일본이 그 당시 어느지역을 근거로 존재했는가 이다.
1833년이라면 강호시대(에도-江戸 幕府 時代, 1603년~1867년) 말기로서 왜구무사집단을 자연스럽게 경제부흥 첨병으로 유도되고 있을 때 이므로 그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나 정치적으로도 상국인 대륙조선을 상당히 의식하고 의지하던 시대라고 여겨지는 면이 있다.
분명한 것은 그 당시 朝鮮(高麗)은 대륙에 존재하였고 皇帝國이며 天子國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 때이므로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과연 일본(19세기 말엽 명치시대 때 왜구무사집단이 이룩한 국가명)이 지금의 열도에 존재 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 문제에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당시 강호시대 때 모든 지명이 대륙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존재하였다면 일단 필리핀도 의심 가는 곳이지만 지금의 대륙 절강성, 복건성 연안을 연계하는 지역에 산재하여 거류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지금의 열도와 한반도는 대륙조선(고려)이 통치하던 동이 영역이고 관할지 영토의 일부분이다.
대륙에 거류하던 왜구무사집단 서쪽 또는 북쪽 어느 곳에 공 섬(무인도)이 있어 침범하였다고 하는 것인데 공 섬이던 아니던 간에 대국에게 무례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호막부입장에서는 엄중함을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대국이며 황제국인 조선에게 추후 알려져 책임 소지를 취조 당 할 수 있는 중대한 것이기에 사전에 스스로 정부차원에서 입막음한 것이라고 보아야 함이다.
또 한 가지는 만약 열도에 들어앉기 전이라면 대륙조선이라는 위치를 들어낼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할 것이 두렵고 일본의 근원이 밝혀질까 염려되어 입막음하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 간에 들어 낼 수 없는 문제를 자체적으로 덮어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처형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끝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의심스러운 부분은 하치에몬이 직접 그렸다고 하는 지도이다.
이 지도를 보면 하나같이 조선과 일본의 정확한 위치개념이 없는 잘려진 지도이다.
그냥 조선이고 부산이 전부다.
그 당시 일본이 제공하는 모든 세부적 지도가 다 이렇게 잘려져 있다.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등등 전부 다 그렇다.
어떤 것은 유구를 조그맣게 어떤 것은 유구를 대만보다 더 크게 필리핀처럼 그려 마치 유구가 20세기 초때 바다 밑으로 사라진 것처럼 의미를 부여한다.
유구를 숨기고 싶은 것이다.
1800년경 일본이 그렸다고 하는 세계지도를 보면 꽤 정확하게 그렸다.
그러나 유독 숨기고 싶은 것들 중, 유구가 그렇고 한반도에 조선을 집어넣을때가 이렇듯 위치 개념자체가 어수선하다. 왜 이런 지도를 그들이 억지로 만들어 들어내놓고 싶어하는지 그리고 어디가 어딘지도 분명하게 알 수 없는 이런 지도를 증거라고 하면서 심문조서에 올려 근거로 삼았는지 그것이 매우 궁금하고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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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진실 쥐고 있던 하치에몬, 그는 왜 처형당했나
[쿠키뉴스] 2009년 02월 13일(금) 오후 06:01
KBS 1TV ‘역사추적’은 14일 오후 8시10분 ‘금단의 땅 독도-하치에몬은 왜 처형당했나’ 편을 방송한다. 일본 우익 인사들이 독도 실효 지배의 근거로 내세우는 하치에몬을 통해 제작진은 역으로 독도가 한국령에 속한다는 역사적 증거를 살펴본다.
하마다 출신 어부 하치에몬은 막부 허가 없이 울릉도로 건너갔다가 처형된 인물이다. 하마다 영주에게 울릉도와 독도로 가기 위한 도해허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1833년 울릉도에 갔다. 이후 목재를 베어 오사카에 팔다 3년 뒤 감찰을 돌던 막부 관리에게 발각됐고 그해 사형에 처해졌다. 판결 직후 “이번 하치에몬이 울릉도를 도해한 사건으로 엄벌에 처해졌다. 외국으로의 도해는 엄히 금한 바, 향후 도해해서는 안 된다”는 해안 경고문이 하마다항을 비롯한 주요 해안에 걸렸다.
하치에몬의 판결문에는 그가 울릉도 도해 당시 직접 그렸다는 지도가 포함돼 있다. 한반도, 울릉도, 독도는 붉은색이고 오키섬과 일본열도는 하얀색으로 구분돼 있다. 당시 일본인들의 영토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그들에게도 독도는 금단의 땅이었던 것이다.
프로그램은 일본의 부속도서에서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를 제외한다는 내용이 담긴 ‘대장성령 4호’(1951년 2월13일 공포)와 ‘총리부령 24호’(1951년 6월6일)를 통해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확인한다. 피해 보상 문제가 협의됐던 한·일협정문서에서 발견된 내용이다. 또 제작진은 ‘돗토리번 문서’와 “죽도 외 1도의 건은 우리나라(일본)와 관계없다”는 내용이 담긴 ‘태정관 지령문’을 통해서도 역사적 실체를 파악한다. 태정관 문서에 첨부된 지도인 ‘기죽도약도’는 이 지역이 독도임을 알려준다.
하치에몬은 해외 개척 시기인 메이지 시대가 오자 막부의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며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하마다항에 송덕비가 세워지고, 하마다 개항 100주년 시민창작극의 주인공이 됐다. 우익 인사들은 일본이 독도를 지배했다는 근거로 하치에몬을 내세운다. 그러나 하치에몬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진실이 새겨져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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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에몬의 공술 (심문조서) 기록
나는 마츠바라 포구에 가명과 이름을 아이즈야 하치에몬으로 신고하여 회선 1척을 소유하고 직승선두를 하고 있었다.
1830년7월, 마츠다이라엣츄노카미(松平越中守)의 영토, 에치고지역의 마을사람들의 연공미를 에도로 운임을 받고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니가타에서 계약 성립 후 짐을 싣고 출범하였다. 때때로 난풍을 만나면서도 1831년7월 에도에 착선하였다. 그래서 쌀을 운반하는 일을 정체하지 않고 마칠 수 있었다. 배가 고장이 나서 할 수 없이 폐선하고 선원들 모두를 내보내게 되었다.
나는 다른용무가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숙소에 체류하였다. 이전부터 알고 있던 에도 금전출납계 무라이오기에몬(村井荻右衛門)씨의 집을 방문 했을때 다케시마 도해를 출원하였다.
처음 다케시마(현재의 울릉도)에 가장 근접하게 된 것은 마츠마에로 선적했을 때로 그 이후로도 마츠마에를 도해할 때마다 안타까웠다. 다케시마는 이와미 지역의 해안에서 북북서 방향, 100리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어 일명 울릉도라고도 불렸던 공섬으로 초목이 무성하고 주변에는 전복이나 생선이 매우 많다고 여겨진다. 이 섬에 도해하여 초목을 채벌하고 어업을 하면 내가 이익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마츠다이라스오노카미(松平周防守 - 하마다 지역 영주)님은 중역이시기에 다케시마도해의 허가를 내려주신다면 재무조성이 될 것은 물론 제일 먼저 국익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잘 모르기 때문에 내존서(의견서)를 내도록 말하였기 때문에 이해하고 여상으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1831년8월 어느날, 무라이오기에몬님의 내존서를 지참하였다. 내존서에는 다케시마 외에 이와미 지역 해안에서 북쪽으로 해상 7,80리 정도 떨어진 곳에 마츠시마(현재의 독도)라고 불리는 섬이 있으며, 마츠시마·다케시마 두 섬 모두 공섬이라고 생각됨으로 이대로 두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초목을 채벌하고 어업을 하면 나의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막대한 국익이 될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스오노카미님께 낼 세금의 금액은 한번 도해를 시도해 보고 그에 맞는 비율을 정하기로 하고 두 섬으로의 도해 출원을 내락할 것으로 처리되었다.
곧바로 무라이님의 윗사람인 금전 출납계 우두 오타니사쿠베(大谷作兵衛)님의 곳에 이끌려갔다. 내존서를 보여드리자 또 다시 두 섬에 대해 물었다. 이전과 똑같이 대답하자 추후에 답변을 할 것임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그래서 이외의 용무를 정리하고 1831년11월 어느 날, 에도를 떠났다.
12월 밤 육로를 통해 집으로 돌아왔다. 1832년1월11일, 가로 오카다타노모님의 가사 하시모토산베이가 불러들였다. 내존서가 에도로부터 오카다타노모님께 오게되어 두 섬의 예측에 대해 다시 물었다. 이것 또한 전과 같이 대답하였다.
오카다타노모님의 허가를 받고 도항할 수 있도록 하시모토산베이에게 부탁하자 1월18일 에도 무라이오기에몬으로부터 나에게 서장이 도착하였다. 다케시마는 일본이라고 하기 어려움으로 도해계획은 취소하도록…라는 내용이었다. 예상과는 다른 답변이었음으로 매우 안타까웠고, 하시모토산베 측에 이 서장을 지참하여 다시 오카타타노모님이 허가하시도록 부탁하였다. 얼마 후 하시모토산베이의 모습을 보러가자 에도로부터의 이야기는 다케시마(울릉도)는 하지 말고 마츠시마(독도)로의 도해를 시도해보는 것은 어떤가....라는 것이었다.
마츠시마(독도)는 작은 섬으로 장래성이 없으므로 에도에는 마츠시마라는 명목을 남기고 다케시마로 도해를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떤가. 만일 다른 곳에 누설될 경우에는 표착한 모습을 연기하는 등 세세하게 토의하여 하시모토산베이로서 도해하기로 하였다. 섬의 모습이나 예측대로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한 도해임으로 마츠다이라스오노카미님으로 입용은 낼 수 없음으로 내가 은조를 하는 등 오카다타노모님으로부터의 세세한 지시를 하시모토산베로 부터 듣고 실행하게 되었다.
하마다에서 출자자를 찾았지만 이야기만으로는 신용을 얻지 못하여 고민하던 가운데 오사카에서도 출자자를 찾을 수 있도록 하시모토산베에게 부탁하였다. 하시모토산베이는 이를 위해 오사카 시마자키우메고로(嶋崎梅五郎)님께 출자자를 찾기위한 상담을 할 수 있도록 첨장을 써 주었다. 첨장을 받고 2월에 하마다를 떠났다. 2월16일 오사카에 도착하여 곧바로 첨장을 시마자키우메고로에게 보여주고 출자자가 될 만한 사람들을 찾을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나도 숙소에 체류하면서 출자자가 될 만한 사람을 찾았지만 잘 나타나지 않았다. 걱정하고 있던 가운데 2월 어느 날 옛 친구이기도한 나카하시마을의 주고쿠야(中國屋) 쇼스케(庄助)가 방문하였다.
주고쿠야 쇼스케는 마츠다이라스오노카미 영토 지산 다이마산(大麻山)의 나무를 팔기위해 에노코지마(江之子嶋) 하리마야(播磨屋) 후지사부로(藤三郎)와 함께 이전부터 오사카 하야시힌에몬(林品右衛門)님께 문의하고 있는 자로 나도 이 일에 연계되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다케시마는 이시주(石州)앞바다 쪽에 있는 공섬이라고 그럴듯하게 꾸며 말하며, 이번에 스오노카미님의 지시로 도해하여 앞으로 거래가 허가되면 다케시마의 산물을 오사카에 가져와 막대한 이익이 된다. 산물을 솜씨 있게 판다고 생각하고 도해 출자금을 내지 않겠냐고 추천해보았다. 주고쿠야 쇼스케는 자기 혼자로는 무리임으로 하리마야 후지사부로에게도 추천해보겠다며 헤어졌다. 다음날 주고쿠야 쇼스케가 하리마야 후지사부로를 데리고 왔다. 또다시 도해 시도 수속에 대해 물었다. 의심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음으로 오사카 저택으로 데리고 갔다. 시마자키우메고로님이 두 사람에게 출자하여도 위험성은 적다고 추천함을 통해 의심이 사라졌다. 주고쿠야 쇼스케는 은 1관목을 출자하였고, 하리마야 후지사부로는 선대공직을 하고 있음으로 다케시마로 도항하기 위한 회선을 새롭게 만들게 되었다. 또한 하리마야 후지사부로의 지인인 다마조하치오마을 이즈미야(和泉屋) 한사부로(半三郎)도 이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고, 물품의 매매는 다치바나마을 다이고쿠야(大黒屋) 테이시치(定七)가 맡기로 하였다. 이즈미야 한사부로는 다이코쿠야 테이나나를 통해 금 10량을 전달하였고, 하리마야 후지사부로도 일이 바쁨으로 친척 아와지야(淡路屋) 센베이(善兵衛)에게 증인을 맡기기로 하였다. 이외의 출자자는 없었다.
회선에 대해서는 배를 섬에 두는 것은 어려움으로 교섭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작은 배로 하고, 또한 해안에서 잘 나가도록 하리마야 후지사부로에게 주문하였다. 80석을 싣는 배가 1척 만들어졌다. 배의 이름은「진도마루(神東丸)」(80석적 약12t, 전체길이 10~11m)으로 하고 승선두는 내 이름으로 하였다. 배는 3관200목이 들었다. 그 중 1관800목은 도해계획에서 이익이 났을 때 반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리마야 후지사부로에게 지불하였다. 남은 돈은 다시 도해면허가 내려졌을 때 추가로 가입자를 모아 지불하기로 하였다.
또한 하리마야 후지사부로가 걱정이 되어 해부 호리가와마을 이세야(伊勢屋) 요베이(輿兵衛)로부터 나와 하리마야 후지사부로의 연반증문을 주고 은1관목 이자를 붙여 상대에게 빌렸다.
다이마산 입목을 보러가기 위해 오사카 술 상인으로부터 술 20통을 산 후 주고쿠야 쇼스케, 아와지야 센베이와 나는 하마다에 가기로 하였다. 산슈 쇼도시마마키마을 주스케(重助) 외 2명을 고용하여 진도쿠마루에 탔다.
1832년7월18일 오사카를 출발하였다. 히로시마에 선착했을 때 나는 다른 용무가 있었음으로 상륙하고 같은 해 8월2일에는 진도마루보다 빨리 하마다에 도착했다.
배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식사를 할 수 없음으로 야마구치현에서 실은 술을 남기지 않고 다 팔아 겨우겨우 같은 해 9월2일에 하마다에 입진하였다는 것이었다.
입진했을 때는 이미 북해는 가기 어려운 시기임으로 그 해의 도해는 중지되고 1833년3월경 도해하기로 하였다. 뱃사람 중 주스케는 그대로 배에 남기고 다른 2명은 해고하였다.
주고쿠야 쇼스케, 아와지야 센베이는 오사카를 출항했을 때 다이마산 입목을 보기 위해 오사카의 하야시힌에몬으로부터 산역 요시다류자에몬(吉田柳左衛門)님께 추천장을 받았음으로 그 추천장을 내놓았다. 요시다류자에몬님께 묻자 입목 지출이 가능할 것 같았음으로 입목을 보러 가고 둘은 일단 오사카에 돌아갔다.
1833년2월 어느 날, 주고쿠야 쇼스케, 아와지야 센베이와 하리마야 후지사부로, 이즈미야 한사부로, 오고쿠야 테이시치가 함께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요시다류자에몬님께 묻자 태도가 나쁨으로 다이마산 입목건은 없던 것으로 한다는 답이었다는 것이다.
주고쿠야 쇼스케는 다케시마도해계획도 이런 식이면 안 되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출자금은 손실된 것으로 할테니 계획에서 빠지고 싶다는 것으로 아쉽지만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하리마야 후지사부로, 이즈미야 한사부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다른 용무가 있었음으로 아와지야 센베이에게 잡용금 40량을 전달하고 다이코구야 테이시치도 함께 오사카에 돌아갔다.
이전부터 하시모토산베이로부터 다케시마도해계획은 오카다타노모님도 중요시하고 있으며, 마츠이즈쇼님도 관계되어 있다고 들었음으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아와지야 센베이를 하시모토산베이와 대면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토의를 하였다.
주스케, 기쿠치지마 세토다신베이(瀬戸田新兵衛), 조슈 오기쿠메조(荻久米蔵), 세키슈 우마지마온고로(馬嶋音五郎), 이와슈 소토노우라야스키치(外之浦安吉), 이와슈 고사마을 신사쿠(新作) 등을 뱃사람으로 고용하여 도해를 위해 채비하였다.
1833년4월 어느 날, 뱃사람들이 술에 취해 높은 분의 산인 줄 모르고 입목 5~6개의 나무를 못 쓰게 만든 것을 알고 배주인이었던 내가 관청에 불려, 같은 해 6월 어느 날 하마다 구역 입진 거주를 못하도록 선고받았지만, 다케시마도해에 관한 것은 오카다타노모님의 내락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하마다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어머니께 들은 대로 배일을 은밀히 진행시켜, 배안에서 먹을 음식은 아와지야 센베이가 도맡아하였다. 하리마야 후지사부로, 이즈미야 한사부로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쌀과 일상용품을 구입하여 실었다. 다케시마에 있어서 짐을 실을 때 이변에 대처하기 위해 이전부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인 나라자키햐쿠하치로(楢崎百八郎)에게 밤중 아무도 몰래 방문하여 이러한 일들을 이야기 하고 이가 가지고 있던 옥 2돈 5부의 총포 1척과 화약이 필요하다고 부탁하고 이를 받아왔다.
나의 선대(키요스케)부터 가지고 있던 창날 2개를 갈고, 통나무 7개를 세공하여 2개에는 앞에 창을 끼워 창을 만들고, 5개는 낫을 붙여 완성시켰다. 그 외에도 도끼 등을 모아 배에 싣고 준비가 완료되었다.
1833년6월14일, 다케시마 출항에 대해 아와지야 센베이를 하시모토산베이의 곳에 보냈다. 하시모토산베로부터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지만 자연스럽게 해상에서 외국선과 마주쳐도 하마다 임원들로부터 명령받은 것이라고 해야 하며, 이와슈의 배인 것은 반드시 숨길 것이라고 오카다타노모님께서 이야기했다는 것을 전달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알아듣고 나와 아와지야 센베이는 배사람인 주스케, 신베이, 쿠메조, 오토고로, 야스키치, 신사쿠 6명과 함께 진도마루에 타 같은 해 6월15일에 하마다를 출항하였다.
곧바로 다케시마에 갈 예정이었지만 날씨가 나쁘고 바람이 불어 일단 조슈삼도(야마구치현 오기시미섬)에 도착하였다. 다시 날짜를 정하여 출발하고 인기지역 후쿠포구(오개촌)에 도착하였다. 후쿠포구로부터 순풍을 타고 북쪽으로 와서 마츠시마(현재의 독도) 근처에 왔다. 배 안에서 보아 마츠시마는 매우 작은 섬으로 나무도 거의 없었다. 상륙하지 않고 그대로 북서쪽으로 가서 같은 해 7월 21일에 다케시마(울릉도)에 도착하였다.
배에 타고 있던 전원이 상륙하고 섬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이전부터 짐작했던 대로 인기척이 없는 공섬이며, 다른 도해자들도 없는 것 같이 보였다. 초목이 무성하여 발들일 틈도 없으며 매 등 새들이 많이 날아다니고 있으며, 물가에는 전복이나 생선이 눈을 의심할 정도로 매우 많이 있었다. 바다 속에는 바다사자와 같은 형태의 소와 같은 동물(일본 강치)이 있었다.
산에서부터 매와 같은 큰 새가 날아와 사람을 발견하면 물 것 같아 지참하였던 총포 탄환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갔다. 새 1마리, 바다사자 1마리를 타살하였기 때문에 그 후 조수들이 다가오지 않아 총포를 그만 쏘기로 하였다. 조수는 그대로 배에 실었다.
그리고 전원 배에 타서 섬 4면을 돌아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나침반으로 방향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북서에서 북동으로 기울어진 큰 섬산으로 주위는 20리정도 있었다. 남서 방향으로 약간 배를 정착할 수 있는 바위사이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배를 세울 곳도 없었기 때문에 바위 사이에 배를 묶어두었다. 조수를 위협하기 위해 초목을 잘라 밤낮으로 불을 때웠고, 바위 주변에 있는 전복이나 생선을 잡아먹었다. 배에 실어놓은 낫, 도끼 등을 제 나름대로 가지고 상륙하여 무성한 초목을 채벌하며 길을 만들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인삼(조선인삼)으로 보이는 풀을 5~6개 정도 발견하여 캐내었다. 다케시마일원의 나무는 느티나무, 뽕나무, 삼나무, 벚나무 외 잡목이었다. 각자 4,50그루 정도 나무를 베어 배에 실었다.
섬의 모습은 내가 자필로 적었다. 골짜기에는 맑은 샘물도 있어 이와 같이 이 섬은 분명히 유익한 땅이라고 여겨짐으로 빨리 돌아가서 이를 보고하기 위해 모두 배에 올라 타 1833년8월9일에 다케시마를 출항하였다.
해상까지 또한 난풍을 만나 전용신(全龍神)의 재앙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워하여 싣고 있던 조수는 물론 나무등도 반 이상은 바다에 버리고 배를 가볍게 하여 겨우 조슈 고시하마(야마구치현 오기시)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씨가 나아지는 것을 기다리고 같은 해 8월15일에 하마다에 돌아왔다.
나는 배에 남아 일단 섬의 모습을 알리기 위해 아와지야 센베이를 하시모토산베이의 곳으로 보냈다. 그날 밤 하시모토산베이가 배로 와서 섬의 모습을 물어보았다. 세세하게 섬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막대한 이익이 나올 것은 분명하며 다시 도해허가를 오카다타노모님과 마츠이즈쇼님께 받을 수 있도록 아와지야 센베이와 함께 부탁하였다.
그 후로도 나는 전과 같이 배를 숨겨두었다. 아와지야 센베이에게 말하여 인삼과 같은 풀 3개와 바다에 버리지 않고 가져온 나무 16그루 중 뽕나무, 느티나무 등 좋은 것을 골라 3그루를 오카다타노모님, 마츠이즈쇼님께 드리기 위해 하시모토산베이에게 가져가게 하였다. 다케시마로부터 가져온 물건을 공개하도록 부탁하고 도해허가는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자세한 상황을 포함하여 스오노카미님으로부터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와지야 센베이는 오사카에 돌아가도록 명을 받았고, 선물은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대로 하마다에 남았고 아와지야 센베이와 배사람들은 함께 진도마루를 타고 1833년9월2일 하마다를 출항하여 오사카에 갔다. 배안은 또다시 먹을 것이 없어 가까운 곳에 상륙하여 배에 있던 창이나 총포 등 필요 없는 도구를 모두 섞어 합 대금 1량으로 팔아 식량을 사고, 같은 해 9월16일에 오사카에 돌아갔다고 한다. 배사람들 모두 내보내고 나무 13그루는 하리마야 후지사부로 쪽에 맡기고 배는 빌린 것을 갚기 위해 이세야 요베이에게 전달했다고 아와지야 센베이로부터 전해 들었다.
들은대로 하마다 임원들로부터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1834년5월 어느 날, 진도마루 이전 배사람이었던 우마키마을 주스케로부터 이번에 오슈의 배를 타는 후지에몬(藤右衛門)이라는 사람이 같은 마을의 테이지로(貞次郎), 가베이(嘉兵衛), 에이조(栄蔵), 오사카 에비스마을 아와야 겐조(源蔵)에게 신청하여 진도마루 이전 배사람 신베이, 쿠메조도 배사람으로 고용하여 다케시마에 건너갈 예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주스케도 우마키마을 배의 히라에몬(平右衛門), 나카에몬(仲右衛門), 나카조(仲蔵) 등과 따로 신청하여 오슈배에 승합하여 도해할 것을 생각했는데, 아와지야 센베이가 전부터 나의 뜻에 대해 하마다 임원들이 숙고하고 있으며, 무단으로 가서는…이라고 말하여서 하시모토산베에게 말하자 도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없었음으로 다케시마를 향해 출항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것을 듣고 나는 매우 놀랐다.
주스케의 소문은 알고 있는 정도로 당국은 물론 전단에서 신청한 것 이외에 다케시마에 도해한 적은 없다. 다케시마로부터 북서 쪽 해상 50~60리 정도 떨어진 곳에 구름이 겹쳐서 둘러싸인 곳이 있어, 자연스럽게 조선일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승회할 생각은 없었음으로 도해는 하지 않았다.
주고쿠야 쇼스케 등으로부터 지원받은 돈에 대해서는 도해 계획 등의 잡비로 남김없이 사용하고 자기 이익도 챙기지 못했다.
나는 일단 교토 부근에서 머문 후 다시 하마다로 돌아가 숨어있었다. 이번 스오노카미님의 처소의 이동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나의 뜻도 여기까지구나라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관명에 의해 죄인으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다케시마가 조선의 영토이며 도해 금지였다는 것을 듣고 대단히 송구스러우며 후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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森須和男(모리쓰 카즈오)씨의 "八右衛門とその時代 (하치에몬과 그의 시대)"에는 하치에몬의 진술을 소개하는 도중, 하치에몬이 그렸다는 지도 두 장을 같이 실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리쓰씨는 그의 책에 지도 원본을 싣지 않고, 알아보기 쉽도록 모사본을 따로 제작하여 실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리쓰씨의 의도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책을 읽어보면 알지만, 모리쓰씨의 저서는 독도 영유권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치에몬이라고 하는 인물과 그 인물의 행동에 대해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상황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지도 원본을 실을 경우 인쇄물이라는 한계 때문에 모리쓰씨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가 잘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거나 그의 저서에 실려 있는 지도 두 개의 모사도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었습니다.
<'하치에몬과 그의 시대'에 실려 있는 두 개의 지도 모사도 : 모리스 카즈오 저>
1. 원본이 아니라 모리쓰 카즈오의 책에 있는 흑백 변형지도로 올려놓은 사진
2. 인터넷에서 하치에몬의 지도(죽도방각도) 로 알려져 일본 웹에 유포되고 있던 사진하지만, 이 지도의 실제모습은 이러했습니다.
오른쪽:竹嶋渡航始末記(죽도도항시말기)에 실려있는 하치에몬이 그린 원본 지도-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색깔과 같이 붉게 채색되어 있으며, 일본 영토에는 채색이 없다.
왼쪽:모리스 카즈오의 '하치에몬과 그의시대'에 실려있는 모사본에 스티브 바버씨가 채색을 입힌 지도
일본동경대 도서관 소장 '竹嶋渡海一件記 全(죽도도해일건기전)'에 실려 있는 하치에몬이 그린 원본 지도 울릉도(죽도)와 독도(송도)가 조선의 색깔과 같이 붉게 채색되어 있으며, 일본영토에는 채색이 없다. (2009.02.14 08:10 KBS 역사추적 방송 화면 캡쳐)
[출처] 하치에몬 사건 - 날조본능 작성자 머찐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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