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민봉기-염군봉기(捻軍起義)와 둥간혁명(東干) http://blog.daum.net/han0114/17049430
*************************************
동학(東學) -대륙조선이 외세에 의하여 난도질 당하고 종지부를 찍도록 계기가 된 사건의 전말
the Flag of Cheondogyo religion
Cheondoism or Chondoism
(in Korean 天道教, hangul 천도교, Cheondogyo, "religion of the Heavenly Way"
Japanese 東学 dougaku, "Eastern School")
동학(東学)의 반대말은 서학(西學)이다.
서학(西學)을 좁은 의미에서는 가톨릭교를 의미하며, 그 때문에 이를 서교(西敎) 또는 천주학(天主學)이라고도 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근세기 모든 국제갈등은 여기서 부터 시작 되었다고 보아야 옳다.
그렇다면 미궁에 빠져있는 근대사의 진실을 푸는 열쇠 또한 이러한 이치에서 찾아야 옳을 일이다.
동학은 한반도에서만 국한된 철학이고 종교학문일까?
동양의 종교학이라고 불릴 수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동양 역시 한반도인가?
아니다.
동양은 소아시아, 터어키를 깃점으로 하는 동쪽 전역을 이른 명칭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동학에는 이슬람 회교도 들어간다.
즉 다시말하면 동학과 서학을 나눈 것은 서양과 동양을 나눈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와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근대사를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래 조선과 대륙에서 벌어진 민란을 중심으로 동학의 시조 최제우가 죽은 시대를 연결하는 연대표를 한번보자.
두문수민란(杜文秀起義, Panthay Rebellion1855-1873) 雲南省에서 발생한 회교민란
1860년 철종 경희궁으로 천궁(遷宮). 최제우(崔濟愚), 경주에서 동학(東學)을 창시.
함풍제가 열하(熱河)로 피서산장으로 도피하고
1861년 철종 창덕궁으로 환어.
이후 함풍제는 자금성으로 환궁하여 죽다.
1861年 七月 十七日,咸丰帝在承德去世。
1862년 충청˙전라˙경상도 곳곳에서 잇단 민란 일어남.
1862년(철종 13)에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일련의 농민봉기
1862년(철종13) 三南民亂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사건
약 12,00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둥간혁명(東干):섬서성(陝西省)·감숙성(甘숙省)을 중심으로 발생한 봉기(1862-1873)
1863년 금위영(禁衛營)군졸들, 받은 녹미(祿米)의 질 문제로 소요. 동학교조 최제우 체포되고, 남해에 민란. 흥선군을 대원군(大院君)으로 봉하고,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시행.
1863년 음력 8월에 철종 재위 14년 만에 33살의 나이로 후사도 없이 승하하였다.
1864년 북인(北人)˙남인(南人)을 등용하고, 비변사(備邊司)와 의정부(議政府)의 업무분장
1864년 최제우, 대구에서 사형.
1864년 천경 함락, 태평천국 멸망.
1871년 전국에 내려진 서원철폐령.
시대, 시차뿐만 아니라 동학과 회교가 잘 연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제우가 1863년에 체포되어 그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되었는데 그해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철종(哲宗)제25대왕(1831.6.17~1863.12.8)이 재위14년 만인 1863년 12월 3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또 1860년에 최제우(崔濟愚)가 경주에서 동학(東學)을 창시하였을 때인데 철종은 경희궁으로 천궁(遷宮)하며 비슷하게 함풍제 역시 열하(熱河)로 피서산장(避暑山莊:離宮)으로 도피(?)한다.
아시다시피 천궁(遷宮)은 궁을 옮기다. 이동하다. 이사하다란 뜻이다.
철종과 함풍제가 똑같이 무엇인가에 쫓겨 궁을 급하게 옮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61년에 철종은 경희궁에서 다시 창덕궁으로 환어하였고 비슷하게
함풍제(咸豊帝, 1831.7.17~1861.8.22)역시 자금성으로 환궁하였으나 그해 바로 죽는다.
철종이 졸하기 전 1862년에 진주민란을 시발점으로 삼남민란이 일어나 전국이 민란으로 혼란속에 빠져들었고 그 이듬해 여름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금위영(禁衛營)의 군졸까지 소요를 일으켜 민란은 더욱 확산되었다.
또한 철종죽음과 함께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의문점은 철종 자손들 생몰이 하나같이 불분명하다 점이다.
마치 어떤세력에 의하여 몰살 당했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점들을 모두 들어 추측컨데 대륙전체에서 발발한 민란과 금위영 군소요를 빙자한 청군벌이나 서세의 명을 받은 왜구명치군벌들이 대륙조선 자체를 없애고자 모의 쿠데타하여 왕가 전체가 집단 살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고 대륙조선 왕조 계보자체를 끊고 말살하고자 기록상 아예 자손들을 요절한 것처럼 꾸민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때문에 철종을 이은 고종은 한반도 고종과 대륙조선 고종이 다를 수 있다는 추론이 생기는 것이며 당시 미국에서 조선은 1881년도에 망한 것으로 기록하였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물론 철종은 대륙조선의 황제임에 틀림이 없다.
즉 말년에 함풍제와 너무나도 똑같은 행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철종 이후 조선이 바로 망하지 않았으며 철종을 이은 고종이 분명하게 존재하였다.
이 고종이 함풍제를 이은 동치제(同治帝, 1856~1875)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20세의 젊은 나이에 천연두로 사거했기 때문이다.
이어 광서제(光緖帝)인데 청나라의 최초의 방계(傍系)혈통 출신 황제이다.
고종 역시 방계(傍系)혈통이다.
조선시대 계보를 보면 크게 나누어 전기 태조이성계계보와 후기 16대 인조계보로 나눈다.
태조이성계 계보는 다시 나누어 2대 정종계보와 3대 태종계보로 나누고
전기 직계 왕들은 모두 3대 태종계보로 잇는다.
후기 16대 인조계보는 17대 효종계보와 인평대군계보로 나누며
후기 왕들은 모두 17대 효종계보가 직계가 된다.
조선시대 마지막왕인 고종은 바로 방계로 인평대군계보이다.
위 계보에 따라 나라의 변고가 있었던 것처럼 반도사는 꾸미고 있다.
직계(直系)혈통 철종의 죽음으로 인하여 대륙조선이 한반도 조선으로 둔갑하고 청이 대륙중국으로 둔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임술농민항쟁, 삼란민란(三南民亂), 제주민란, 농민봉기 등 민란은 회민민란이라고 보이고 최제우의 동학도 태평천국의 난과 겹쳐진다.
1863년 철종의 죽음은 동학과 연관 된 민란으로 촉발된 군소요에 의하여 자행된 것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대륙전체를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게 한 태평천국난은 이때 1864년에 천경(남경)이 함락되면서 마침내 태평천국 멸망하였다는데 태평천국의 홍수전과 이수성은 반도역사에서 최제우로 둔갑한 것이라고 보인다.
이수성(李秀成, 1823∼1864 태평천국의 忠王)은 천경(天京)이 함락된 후 천왕(天王) 홍수전(洪秀全, 1814~ 1864.6.1, 광동성 객가출신)이 남경에서 자살하고 그의 아들을 보호하면서 탈출을 꾀하였으나, 청군벌 증국번의 상군에게 잡히어 처형되었다.
최제우가 1863년 대구에서 사형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시차는 1년 난다.
또 하나 대륙 태평천국이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종교이며 천왕인 홍수전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라고 하면서 상제회(上帝會)라 하며 포교를 하였다면 분명 기독교 국가 미국이 적극적으로 도왔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을 포함한 서세가 청군벌에게 협력하여 섬멸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태평천국의 종교적인 의미는 서학과 대치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태평천국 역시 서학이 싫어하는 종교적 이념(예수 그리스도와 다르지 않는 근원) 즉 넓은 의미의 동학철학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반도사의 동학은 동양종교 이슬람까지 포함하는 아주 넓은 의미의 상징성을 포괄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라고 풀이된다.
flag image by Antonio Martins-Tuvalkin, 24 September 2003
천도교(天道敎)는 조선 말기 최제우가 1860년에 서학 그러니까 천주교에 반대하여 창시한 민족종교인 동학(東學)을 1905년에 3대 교조 손병희가 개칭한 종교이다.
1860년(철종 11) 경주(慶州) 지역의 몰락 양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에 의하여 창도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신흥종교다. 최제우는 전통적인 유교(儒敎)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유교 경전을 배워, 성년이 되어서는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나 있었다. 당시 한국은 어린 헌종왕의 즉위로 외척(外戚)의 세도정치가 계속되면서 정권다툼으로 지배층의 알력이 극도에 달하였고, 양반과 토호(土豪)들은 백성들에 대한 횡포와 착취를 자행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등, 사회는 매우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비롯한 외세(外勢)의 간섭이 날로 심해져 국운이 위기에 처하는 한편, 국민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유교 ·불교가 극도로 부패하여 조정은 민중을 제도(濟度)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서학(西學: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팽창하여 그 이질적인 사고(思考)와 행동이 우리의 전통적인 그것과 서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때 최제우는 서학에 대처하여 민족의 주체성과 도덕관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道)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양산(梁山) 천수산(千壽山)의 암굴 속에서 수도하면서 도를 갈구(渴求)한 지 수년 만에 ‘한울님(上帝)’의 계시를 받아 ‘동학’이라는 대도(大道)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동학은 서학에 대응할 만한 동토(東土) 한국의 종교라는 뜻으로,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 ·불(佛) ·선(仙:道敎)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 ‘인내천’의 사상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기에는 종래의 유교적 윤리와 퇴폐한 양반사회의 질서를 부정하는 반봉건적이며 혁명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는 ‘동학’이란 교명(敎名)과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이라고 한다. 영부란 백지(白紙)에 한울님의 계시에 따라 그린 일종의 부적(符籍)으로, 궁을형(弓乙形)으로 되어 있고 때로는 태극부(太極符) ·궁을부(弓乙符)라고도 부른다. 주문은 13자로 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의 본주(本呪)와 8자로 된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강령주(降靈呪) 등이 있다. 이 영부와 주문은 동학을 포교하는 데 중요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는데, 예컨대 주문을 외면서 칼춤을 추고 영부를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면 빈곤에서 해방되고, 병자는 병이 나아 장수하며 영세무궁(永世無窮)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동학은 신분 ·적서(嫡庶)제도 등에도 반기를 들어 이를 비판하였으므로, 그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다. 포교를 시작한 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 같은 추세를 지켜보던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사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최제우가 이수성인가?
최제우를 비롯한 많은 교인들이 순교한 후에도 조정의 탄압이 계속되자 교인들은 지하로 숨어들어가 신앙생활을 계속하게 되었고, 한편 최제우의 뒤를 이은 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海月)은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에서 은밀히 교세를 정비 ·강화하였다. 전부터 내려오던 접주(接主)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교인들의 일단(一團)을 ‘포(包)’라 하고 여기에 포주(包主)를 두었다. 포주 위에는 접주 ·대접주, 그 위에 도주(道主) ·대도주를 두는 한편, 포주 ·접주 밑에는 ‘육임(六任)’이라 하여 교장(敎長) ·교수(敎授) ·교집(敎執) ·교강(敎綱) ·대중(大中) ·중정(中正)을 두었다. 이와 같이 대중 속에 조직된 동학은 94년(고종 31)에 발생한 동학농민전쟁의 주체가 되었고, 이 때 사형을 당한 최시형의 뒤를 이은 3세 교주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을 1905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여 계속 교세확장에 힘쓰게 되었다. 한편 동학은 이 때 시천교(侍天敎)라는 또 하나의 교파가 분리되었다.
동학의 교리는 3단계의 발전과정을 겪었다. 교조인 최제우 단계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사상, 2대 교주인 최시형 단계에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 그리고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의해 개창된 천도교 단계에서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변화되었다. 물론 이 3단계의 교리발전 과정이 전적으로 단절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동학의 시천주 사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시천주라는 말은 〈동경대전〉의 21자 주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즉 최제우가 종교체험을 할 때 상제(上帝)로부터 받은 '지기금지원위대강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至)에서 처음 등장했고 이것이 뜻하는 바가 최제우 자신에 의해 해석되었다. 그러나 그가 시천주에 대해 해석을 붙인 "내유신령(內有神靈)하고 외유기화(外有氣和)하여 일세지인(一世之人)이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의 뜻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학의 경전을 전체적으로 검토해 시천주의 뜻을 간접적으로 살펴보면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천주를 정성껏 내 마음에 모신다는 의미이다. 우선 최제우에게서 초월적 신은 상제·천주·한울님 등으로 나타나며 내재적 신은 지기(至氣)로서 나타난다. 즉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인간과 우주를 주재하는 초월적 신과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내재적 신의 성격이 동시적으로 나타난다. 전자의 예는 〈용담유사〉 〈안심가 安心歌〉의 "호천금궐(昊天金闕)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 보냐"에 잘 나타나 있고 후자의 예는 〈용담유사〉 〈교훈가〉의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하단 말가"에 잘 나타나 있다. 이처럼 최제우의 경우 한울님은 초월적 숭배 대상으로서의 성격과 내재적 성격을 상호보완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초월적 성격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시형의 경우, 천주는 인격적·초월적 개념 대신에 천(天)이라는 비인격적 개념이 우세하게 나타났다. 즉 사인여천·양천주(養天主)·인즉천(人卽天) 등의 개념이 등장해 사람을 하늘처럼 섬길 것을 강조하고 마음속에서 천주를 기르고, 나아가 사람이 바로 하늘이라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한울님에게서 인격적 개념을 탈각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우주만물에도 하늘이 깃들어 있다는 '물물천(物物天) 사사천(事事天)'의 범천론적(凡天論的) 사상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최시형 단계에서는 내재적인 천의 개념이 우세해지면서 초월적인 신의 개념은 부분적으로만 수용되었다. 손병희 단계에서는 전통적인 천주개념은 거의 사라지고 인간을 천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인내천사상이 등장했다. 그것도 인간을 중심으로 천이 이해되어 있다.
두산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Donghak Peasant Revolution
Tonghak (Donghak) Rebellion 1894
A document used by the Tonghaks.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1894년에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3월의 고부 봉기(제1차)와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2차)로 나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배경
1860년 경주 지방 출신 잔반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東學)은 ‘동양의 학문’ 혹은 ‘조선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가톨릭을 비롯해 당시 들어오던 서학(西學)에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최제우가 창시한 이 동학은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에 뜻을 두어 일부 지식인과 일반 농민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동학의 교세가 날이 갈수록 커지자, 정부는 혹세무민의 이유를 들어 교주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이에 동학의 교세 확장은 잠시 주춤하였으나 제2대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교단을 정비하였다. 이후 동학교도들은 1892년과 1893년에 두 차례의 집회를 열어 처형된 초대 교주 최제우의 누명을 벗기고,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
위 삽화에서 봉사 안경(서세입장에서 보면 반서양정책을 쓰고 대륙영토를 지키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을 쓴 조선을 완전무장한 일본과 청이 짓밟고 있는 광경을 러시아가 쳐다보고 어떤 행동으로 옮기려 하는 상황이다.
당시 러시아는 대륙조선 영역인 중앙아시아를 넘보고 영국과 대치하며 남진을 지속적으로 하던 시절이고 시베리아 역시 개척하고 있는 때 알타이 몽골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서 아직 극동으로는 관심조차 가질 수 없었을 때이다.
이것은 바로 중앙아시아 동쪽 지금의 신강지역(만주:어쩌면 중앙아시아 북쪽전역을 포함)을 지정하는 것이라고 보여지고 그 남쪽인 대륙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 삽화에서 풍자하는 곳이 과연 한반도의 상황을 알리려 한 것인가?
극동은 러시아가 아직 손이 미치지 못하였다면 한반도역시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할 때이다.
일본 군벌은 1872년까지 지금의 열도에 완전하게 들어가지 않았던 때로서 에도막부(江戶幕府)근거지로 산동지역과 절강, 복건성 근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것일게다.
그러니 한반도의 군사적인 지역적 가치는 논하기 힘든 상황이다.
바로 대륙상황을 풍자하고 있는 삽화라 할 수 있다.
청 역시 청나라가 아니라 대륙조선을 탐내는 왜구 명치군벌과 마찬가지로 북양군벌이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알리고 있는 것이다.
반외세 운동으로의 확대
동학의 지도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졌는데, 하나는 교단의 지도자들이고, 하나는 농민 지도자들이다. 교단 지도자의 대표적인 인물은 최시형과 손병희 등으로 포교의 자유 쟁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농민 지도자의 대표는 전봉준, 황하일 등으로 교단 지도자와는 달리 사회 변혁에 뜻을 두었다.
이들 중 농민 지도자였던 전봉준, 황하일 등은 전라도 금구에 동학교도 및 농민 1만 여명을 모아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다. 또 보은에 모여 있던 동학교도들 역시 금구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전국적 봉기를 꾀하였다. 특히 보은의 동학교도들은 지도부에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왜와 양이를 처부수고자 의병을 일으킴)’, ‘보국안민’의 명분을 내세워 그들을 설득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정부의 탄압과 교단 지도부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으나 전봉준 등은 이에 굴하지 하고 기회를 노려 동학 농민 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고부 봉기를 일으켰다.
Catholic missionaries in Korea alarmed many Koreans
1차 봉기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을 일본의 시장화하는 한편, 조선에서 쌀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으로 억압하였고, 일본인 어부들의 횡포는 조선 어민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선(汽船)이 조선 연안에서 무역에 종사함은 물론, 세미(歲米) 운송을 위한 기선의 도입으로 종래의 조군(漕軍)과 선상(船商)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위에 세미운송의 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의 횡포 또한 막심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였다. 신임 군수는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어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있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1894년 1월 10일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 는 등의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전라감사(全羅監司)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源明)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로 보냈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사람으로 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전봉준은 피신하여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 기회에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판단,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1894년 3월 하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構)˙부안(扶安)˙고창(高敞)˙ 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白山)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곧,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시킬 것 등의 4대강령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투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 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官屬)들을 응징하고 무기를 탈취하니 혁명군의 기세는 한층 더 충천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영병(領兵) 250명과 보부상대(褓負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라고 하였다.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싸움을 벌였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군사 800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全州城)에 입성한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월평리(月平里)의 황룡촌(黃龍村)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경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한편 홍계훈의 경군은 28일에야 전주성밖에 이르러 완산(完山)에 포진하고 포격을 가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차 수세에 몰려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이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하였으니, 즉 정부는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淸)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은 일본대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 뿐더러 청,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강화(講和)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의 실시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은 이미 상륙하였고,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Officers in the Chosen (Joseon) army 1890
Japanese troops firing on Tonghaks
Japanese exports flooded into Korea
*****************************
황토현전투
황토현 전투는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농민군이 전북 정읍 황토현 일대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첫 승리를 거둔 전투로 후에 황룡촌 전투에서도 승리하게 되었다.
배경 : 1894년 1월 10일 전북 고부에서 고부 민란을 시작으로 발발한 농민 운동은 규모가 커져 2월 30일 전북 고창군 무장에서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남접계 지도자들이 4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정읍군 태인 주산리에서 태인접주 최경선이 이끄는 300명의 농민군과 말목장터에 집결한 수백 명의 농민군들까지 합세해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후에 금주, 부안, 고창 등 여러 곳에서 농민군이 집결하고 4월 1일 태인과 4월 4일 부안 관아를 점령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라감사 김문현, 영관 이경호 등이 영내 잡색군 등 총 1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정읍 황토현에서 격돌했다.
전투 과정 : 감영군 700명과 향군 600명 등 1300명의 관군이 태인을 지나 백산으로 가고 있었는데 4월 6일 태인 인근 화호 나루 일대에서 첫 접전이 이루어졌다. 농민군은 패주하는 척 하였고 관군을 농민군을 추격했다. 농민군은 정읍 황토현에 진을 치고 관군도 황토현 부근에 진을 쳤다. 4월 7일 새벽 농민군은 관군에게 포를 쏘아 혼란에 빠뜨린 뒤 미처 대처하지 못한 관군을 추격해 패전시켰고 이 과정에서 영관 이경호가 농민군들에게 체포되어 전사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농민군을 사기를 충전하게 되었고 전주로도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군은 완산에 머물면서 포격을 시작했고, 동학군은 여기에 대항할 만한 병기가 없어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다. 홍계훈은 이미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이 징계를 당했으며 앞으로도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여 징계하겠다는 것을 밝혔고 한편으로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도착하였으며 일본의 군대도 자국민 보호를 위해 출병하기로 했다. 동학군은 이런 상황에 따라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전주성에서 철병했으나 이미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내에 진입한 상태였다.
2차 봉기
전라도 각읍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은 일병(日兵)이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고, 청,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폐정개혁을 논할 때가 아니라 항일투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신곡(新穀)이 여무는 시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孫華中)은 광주에서 궐기하였으며, 호남, 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參禮)를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公州)로 향하였다. 또한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 옥천 등 요지를 점거하여 동학군을 원호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과 일본군은 급히 증원부대를 요청, 동학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0월 21일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을 공격,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근대적 무기와 화력으로 인해 우금치(于金峙)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여 논산, 금구, 태인 등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11월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미증유(未曾有)의 광범한 민중의 무장봉기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났고, 이들의 개혁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다.
우금치 전투
배경 : 우금치 전투는 동학 농민 운동 때 일어난 대전투로 이 전투에서 농민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농민군 해산과 진압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 조정은 농민군이 밀고 들어오자 일본과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등이 다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은 1894년 6월에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정권을 세우고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공사로 임명했다. 그해 9월에 전봉준이 4,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과 북접의 연합을 시작했다.
전봉준은 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선택하고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과 합류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김개남 대신 10월에 북접의 손병희가 논산에서 합류하여 2만 명의 군세가 되었고 남접 10만 명, 북접 10만 명 등 총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공주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 조정과 일본군은 신정희, 허진, 이규태, 이두황 등에게 3,200명의 관군과 일본군은 미나미가 이끄는 2,000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맞섰다.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0월 23일부터 10월 26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은 청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금강 건너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홍성 농민군은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20만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우금치 전투 : 농민군은 무너미 고개와 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 붙치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미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관군을 우금치 옆 벱세울 앞산에 주둔하고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관군을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m 앞까지 조일 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려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과 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서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고 전봉준은 군인, 이서, 상인들에게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 연합군은 11월 14일에 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져 12월에 전봉준은 체포되고, 이후 조일 연합군의 호남 일대의 농민군 대학살전이 일어났다.
평가
동학 농민 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 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이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에서 활동한 김구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김구는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고 몸을 숨겼다
崔済愚
崔時亨
孫秉熙
鄭雲亀
徐仁周
徐丙鶴
全琫準
鄭益瑞
金道三
李容九
崔麟
김개남
흥선대원군
조병갑
박성빈
김구
[위키백과]
*************************
東學黨征討略記
東學黨의 檄文
東學黨의 兵器
贈朝鮮國東學黨書
'세계삼한역사 > 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85년 ‘거문도 사건’ 진실은… (0) | 2009.04.18 |
---|---|
동학과 湖西, 湖州 (0) | 2009.02.10 |
영학당 [英學黨] -동학 이음운동 (0) | 2009.02.10 |
대륙열강쟁탈조계지과정 (0) | 2009.02.10 |
세자 천연두 완치 기념 십장생도 제작 (0) | 2009.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