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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학당 [英學黨] -동학 이음운동

한부울 2009. 2. 10. 20:39
동학(東學) http://blog.daum.net/han0114/17045951

 

영학당 [英學黨]


1898년 12월과 1899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전라남북도 일부 지역에서 봉기한 무장농민조직. 영학당은 동학당(東學黨)의 잔여 세력들이 1898년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 대신 ‘영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재건한 조직이다.


이들이 ‘영학’이란 명칭을 쓴 것은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가 영학, 즉 영국의 종교인 것처럼 위장하여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같은 위장을 위해 한때 영국인 선교사를 초빙하여 설교집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영학당의 조직 가운데 가장 먼저 봉기한 것은 흥덕(興德)의 영학당이었다. 흥덕의 영학당 두령 이화삼(李化三)은 1898년 12월 300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관아에 들어가 민회(民會) 형식으로 농민들의 의사를 모아 군수를 내쫓았다.


이 민회에서 흥덕군수의 무미(貿米)·세전 독징(稅錢督徵) 등 탐학상이 지적된 것으로 보아, 흥덕에서의 영학당 봉기는 흥덕군수의 탐학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봉기는 사흘 뒤 광주(光州)에서 파견된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이화삼 등은 체포되었다. 이화삼이 붙잡힌 뒤 영학당에서는 1899년 5월 4일 흥덕군에서 호남공동대회(湖南共同大會)를 열고 이화삼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화삼은 석방되지 않고, 5월 27일 광주로 극비리에 이송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영학당 등 농민 400여 명은 그날 밤 고부에서 봉기하여 고부군아를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한 다음, 자신들이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을 위하여 봉기하였음을 방문을 통하여 천명하였다.


이들은 이어 흥덕·무장의 군아를 습격, 점령하였다. 이때 고부의 김문행(金文行)과 정읍의 최익서(崔益瑞)가 봉기를 지휘하였다.


이들은 고창을 거쳐 영암의 민란을 지원한 다음, 곧 광주·전주를 거쳐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5월 31일 고창군아 공격에서 영학당군은 관군에 패퇴, 해산되고 말았다.


이로써 영학당의 봉기는 일단 진압되었으나, 관군은 영학당의 재기를 염려하여 고부·태인·정읍·부안 등지에 210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들 영학당이 동학당의 잔여 세력이라는 사실은 5월의 봉기를 지휘한 최익서가 “우리 당은 모두 갑오년의 여괴(餘魁)·누도(漏徒)로서 이번에 봉기하였다.”고 말한 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또, 그들이 내건 ‘보국안민’·‘척왜양’도 동학당의 그것과 같았다.


이 영학당의 봉기를 보도한 당시의 ≪황성신문≫은 한발 등으로 농민들의 빈궁이 가속화되고, 그 위에 가해진 지방관들의 탐학이 농민들의 봉기를 부추겼다고 진단하면서, 그와 같은 상황은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하였다. 영학당의 봉기는 1894년의 동학농민군 봉기를 계승한 농민들의 반침략·반봉건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續陰晴史

≪참고문헌≫ 梅泉野錄

≪참고문헌≫ 皇城新聞

≪참고문헌≫ 大韓帝國의 改革事業과 農民層動向(金度亨, 韓國史硏究 41, 1983)

≪참고문헌≫ 韓末英學黨李化三等供草報告書(愼鏞廈, 韓國學報 35, 1984). 대한제국시기 英學黨운동의 성격(李永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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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삼 [李化三]

1866(고종 3)∼1910.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영환(永煥), 영신(永信)으로 개명. 자는 화삼(花三). 전라남도 장성 출신. 통정대부 지백(智白)의 아들이다. 을미사변으로 유림들이 거의하던 1896년 장성에서 거의한 기우만(奇宇萬)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장성·광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고종의 선유조치로 향리로 돌아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종숙 이사유(李司維)와 함께 향리인 장성군 삼계면의 150여 장정들을 규합,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삼북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일본군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다. 1906년 봄 의병장 이대극(李大克)이 영광에서 기병하여 기삼연(奇參衍)의병부대에 합류하여, 법성포·무장·장성 등지에서 전투를 벌일 때 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기삼연부대가 패배하고 의병들이 흩어지자, 다음해인 1908년 3월 이대극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부대를 재편성할 때 후군장에 임명되었다. 이 후 계속하여 무장·장성·영광·고창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9년 4월 이대극이 전사하자 부대를 수습하여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1910년 1월 본진에 합류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참고문헌≫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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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 [奇參衍]

1851(철종 2)∼1908. 조선 말기의 유생·의병장. 본관은 행주(幸州). 별명은 백마장군(白馬將軍), 자는 경로(景魯), 호는 성재(省齋). 전라남도 장성 출신. 봉진(鳳鎭)의 아들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기우만(奇宇萬)과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기를 맹세하고 장성에서 나주로 나아가 많은 의병을 소집해 광산(光山)에서 거의(擧義)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부가 선유사(宣諭使)로 신기선(申箕善)과 이겸제(李謙濟)를 파견해 선유하자, 의병을 해산시켰다.


재거를 밀모하던 중 일진회회원의 밀고로 관찰사 조한국(曺漢國)이 파견한 전주진위대 김한정(金漢鼎)에게 붙잡혀 전주옥에 구금되었다. 다시 서울 평리원옥에 이감되어 한달 남짓 수감된 뒤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군대해산 후 1907년 9월 수록산(隨錄山) 석수승암(石手僧庵)에서 회맹, 호남창의맹소 대장에 추대되었다. 격문을 돌려 적에게 부역하는 자의 처단 및 재산 몰수를 경고하였다.


이 해 9월 23일 고창 문수암(文殊庵)으로 진군 중 접근해 오는 적을 맞아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때 고창 이민(吏民)들의 협력으로 군기와 군량을 공급받아 의병들에게 공급하고 영광·부안·정읍 등지에서도 연승하였다. 이어 12월에는 광주의 최상진(崔相鎭) 등 관리의 내응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다.


이 때 군량비축을 위해 법성포(法聖浦)의 세곡을 탈취할 계획으로, 12월 7일 의병 1백명은 먼저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기습해 불태웠다. 그리고 그 곳 창곡(倉穀)을 탈취, 군자에 쓰고 남은 것은 모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뒤 전세가 달라지자 전투 양상을 바꾸어 소단위로 나누고 유격전으로 돌입하였다. 특히 김준(金準)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무동촌전투(舞童村戰鬪)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날씨가 추워져 의병들이 분산되자, 각지에 흩어진 의병에게 연락, 동짓날을 기해 장성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우산중(犀牛山中)에서 잠시 휴병한 뒤 재차 고막원(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철수하였다.


12월 27일 의병부대를 이끌고 설을 쇠기 위해 험준한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으로 들어갔다. 밤중에 큰비가 내려 노숙하던 사졸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 적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갑자기 안개가 덮여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다행히 탈출하였다. 탈출한 뒤 순창 복흥(福興) 산중의 재종제인 구연(九衍)의 집에서 부상을 치료하였다.


장졸들에게 설을 쇤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지시하고, 구수동(九水洞) 촌가에서 은신하던 중 정월 초하룻날 적 수십명이 돌입해 주인에게 총검을 들이대므로 자진해 붙잡혔다. 비보를 접한 김준이 창평에서 적을 무찌르고 3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양(景陽)에 도착했으나 이미 경찰서에 수감된 뒤였다.


1908년 1월 2일 광주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총살당하였다. 그 뒤 호남의 의병은 김준·이석용(李錫庸)·김용구(金容球) 등이 김준이 순국한 다음에는 조경환(曺京煥) 등의 의병에 재편성되어 항일전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湖南義兵將列傳(幸州奇氏大宗中編)

≪참고문헌≫ 독립운동사 1(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참고문헌≫ 抗日義兵將列傳(金義煥, 正音社, 1975)

≪참고문헌≫ 近代民族意議의 脈絡(李鉉淙, 亞細亞文化社, 1979)

≪참고문헌≫ 의병들의 항쟁(조동걸, 민족문화협회, 1980)

≪참고문헌≫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엠파스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