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소빙기… 조선 100만 명 굶어 죽다
[중앙일보] 2008년 12월 06일(토) 오전 12:54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김덕진 지음, 푸른역사 펴냄)
지난 상반기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21세기 역사학, 우주과학과의 만남’이란 주제로 여러 차례 강연을 한 바 있다. 20세기에 급진전을 이룬 우주과학의 입장에서 설명하는 지구의 역사다. 운석 충돌에 의한 공룡 멸종설 등 외계 충격(extraterrestial impact)설은 고고학이나 지질학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기록된 인간의 역사에도 영향을 끼쳐 왔다.
역사는 누가 만들어 가는가. 지배 계층인가? 기술의 혁신인가? 이런 전통적 질문의 범위를 ‘천문학적’으로 확장시킨 것이 최근 역사학에서 이해하는 ‘외계 충격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외계의 충격’이 백성의 삶을 뿌리 채 흔들고,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계에선 17세기를 포함해 250~400년간을 ‘소 빙하기’로 간주한다. 세계적으로 이상저온 현상과 폭설·가뭄 등 자연재해가 극심했던 때다.
끊임없는 자연재앙 속에서 농사가 잘 될 리가 없었다. 조선사회는 미증유의 대기근에 직면한다. 1670년(현종 11년, 경술년)과 1671년(현종 12년, 신해년)에 연이어 든 ‘경신 대기근’이다.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역병이 휩쓸었다. 거두지 못한 죽은 자의 시신은 또 다른 전염병을 불렀다. 백성은 무참하게 죽어나갔고, 무심한 하늘 아래 임금은 무력했다.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에게 내린단 말인가.”(현종, 1670년 5월 2일) 1671년 말 서인 계열의 윤경교는 경신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100만 명에 이른다고 상소를 올렸다. 100만 명이란 숫자는 당시 조선사회 추정 인구 510여 만 명의 20%에 해당한다. 불과 30여 년 전에 병자호란, 70여 년 전엔 임진왜란을 겪었던 시점이다.
저자는 17세기 재난의 시대를 거치며 조선이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었다고 해석한다.
먹거리를 찾고, 역병을 피해 유랑하던 백성들은 비교적 구휼제도와 방역이 잘 갖춰진 서울로 대거 몰렸다. 서울로 인구가 집중돼 이후 근대적 도시와 상공업 발달에 인적 토대가 됐다는 것이다. 위기가 기회가 된 것일까? 하지만 재난의 시대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이들은 취약계층인 양인과 노비였다. 이들의 인구가 격감했다. 특히 각종 세금 부담을 지고 있는 양인이 줄어든다는 것은 국가 재정 위기를 의미한다.
기아 구제에 쓰일 재원 마련도 시급했다. 현종과 숙종은 기근이 들 때마다 구휼비 조달을 위해 공명첩을 남발하고 납속을 자주 실시했다. 양인은 벼슬을 사고, 노비는 면천(免賤)될 기회가 늘었다. 저자는 “17세기 대기근은 재력으로 신분을 바꿀 수 있는 세상을 우리 역사상 최초로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조선사회를 지탱해 온 전통적 신분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변동은 정쟁을 격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저자는 16세기 후반 정여립 사건 이후 잠잠하던 정쟁이 기근이 격심해진 17세기에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일어났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간 학계에서 17세기는 ‘소외된 시대’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친 뒤 18세기 영·정조 시대를 맞이하는 과도기 정도로 자리매김됐다. 저자가 재발견한 17세기는 소 빙하기의 정점에 이른 ‘혹한의 겨울’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연 변화의 싹이 움텄다는 것이다.
배노필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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