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첸 공화국(Chechnya)과 이치케리아 체첸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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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Palestine) 아바스 수반, 러시아 체첸공화국 방문
[뉴시스] 2008년 12월 21일(일) 오전 09:42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21일 러시아 체첸공화국의 수도 그로즈니에 도착했다. 체첸공화국의 람잔 카디로프 대통령은 공항까지 마중 나가 아바스 수반을 환영했다. 양 정상은 환영인파로 가득 메운 도로를 따라 대통령 관저로 향했다.
체첸공화국의 카디로프 대통령은 최근 아랍 국가들의 영향력 있는 무슬림 지도자들을 만나며, 무슬림 국가로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아바스 수반은 기자회견을 갖고 "이곳에서 집과 같은 따뜻함을 느낀다. 체첸공화국을 방문할 수 있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반군 출신의 카디로프 대통령은 이제 러시아 크렘린궁에 충성을 다짐한 상황이 됐다. 그는 이달 초 '하지(Haj)' 성지순례 기간 동안 사우디아라미아의 메카에서 아바스 수반을 만났었다. 체첸공화국은 지난 1994년과 1999년 두 차례 독립을 주장하는 이슬람 분리주의 세력과 전쟁을 치른 후, 현재 다소 평화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
러시아 크렘린궁은 카디로프 대통령이 일부 이슬람 율법을 시행토록 허용했다 이에 따라, 공공기관의 여성들은 히잡(hijab)과 긴 치마를 입을 수 있게 됐으며, 일정 기간 동안 알코올 섭취가 금지된다.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은 "아바스 수반이 오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만나는 22일까지 러시아에 머물게 된다"고 밝혔다.
이남진기자 뉴시스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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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Palestine
2003년 찍힌 위성사진.
팔레스타인(히브리어: 에레츠 이스라엘, 아랍어:필라스틴 / 팔라스틴)은 지중해와 요르단 강 사이와 그 주변 지역을 일컫는 여러 역사적인 지명 가운데 하나이다. 몇 천 년 동안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정의는 여러 번 변화해 왔다. 현대 역사에서 가장 넓은 정의는 영국이 통치할 당시에 쓰였는데 이 당시는 현재 시리아, 요르단과 이라크의 땅 일부를 포함한 트랜스 요르단 역시 팔레스타인의 일부였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구역인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인다.
명칭
팔레스타인은 필리스틴이란 단어에서 근원되었다. 미케네 문명당시 남부 그리스에서 이주했던 필리스틴인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현재의 가자 지구 근처에서 서식했다. 이 지역은 "성지" (Holy Land)라고도 불린다. 고대 이집트당시 쓰인 글들은 이 지역을 r-t-n-u (retenu; 레테누)라고 가리킨다.
히브리 성경은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전의 팔레스타인을 카난이라고 불렸고 그 후에는 이스라엘이라고 가리켰다. 히브리의 땅이라는 명칭과 더불어 우유와 꿀이 흐르는 땅, 성지, 주님의 땅, 약속의 땅같은 시적인 묘사들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민수기는 카난의 지리와 국경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민수기 34:1) 여호수아에서는 레바논을 묘사하는 부분도 찾아볼 수 있다. (여호수아 13:5) 히브리 전통에 따르면 카난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어받은 땅중에 일부였다. 그들이 이어받은 땅은 터키의 일부도 포함되었다. 네 복음서들은 모두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꾸르안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이스라엘로 돌아가라고 선언한부분 부터 성지라는 단어는 대략 일곱 번 나타난다. (수라 5:21: 백성들이여 하나님이 너희에 게 명령한 성역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뒤돌아서지 말라 그리하면 손실자로써 전복되니라)
역사
역사 동안 팔레스타인은 여러 제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기원전 1000000년 - 5000년)
예리코에서 발굴된 주거갈릴리
호수근처에서 발굴된 인간의 흔적은 대략 기원전 600,000년 당시쯤 존재했을 것으로 알려진다. 베들레헴과 라말라에 있는 동굴들에서도 돌, 나무와 동물 뼈다귀로 만들어진 무기와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12,500년에서 10,200년쯤 존재했던 나투피안 문화의 흔적인걸로 보인다. 이 시대의 흔적들은 텔 아부 후레이와와 예리코에서도 발견되었다. 기원전 만년에서 5천년사이 농업 공동체가 세워졌다. 이것을 증언하는 흔적들은 예리코에서 발견된 진흙으로 만들어진 벽돌, 도자기 조각 등등이 있다.
순동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카난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도시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들의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 진흙벽돌로 만든 벽을 세웠고 도시 주변에 있던 작은 마을에서 식량을 제공받았다. 주변에 있던 이집트와 시리아와 무역을 했다. 정확하지 않은 이유로 기원전 2300년 카난인들이 세운 도시 국가의 일부는 파괴되었다. 카난인들은 고대 이집트, 시리아, 페니키아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1250년 남부 그리스에서 필리스틴인들이 왔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필리스틴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이미 존재하던 인구와 어울리면서 그들은 그들만의 정체를 잃기 시작했다.
철기 시대 (기원전 1200년 - 330년)
남부 그리스에서 온 필리스틴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던 인구에게 마차와 철제 무기들을 소개했다.
히브리 성경 시대
이스라엘의 12부족사이에 나뉘어진 성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이주했는지 오래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존재했는지 불확실하지만 히브리 성경시대는 기원전 13세기사이 12세기쯤 시작했다. 성경에 따르면 히브리 민족이 기원전 1200년에 연합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기원전 1020년 사울이 왕국의 첫 왕이 되었다. 기원전 1000년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만들었으며 이 시대 당시 솔로몬 왕이 첫 성전을 지은 것으로 알려진다. 기원전 930년 전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나눠졌다. 북쪽에는 이스라엘 왕국이 있었으며 남쪽에는 유다 왕국이 있었다. 1세기에 유럽으로 쫓겨났다. 기원전 722년에서 720년 사이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 의해서 함락되었고 586년 남쪽의 왕국은 바빌로니아가 점령했다. 바빌로니아가 유다 왕국을 점령하면서 첫 성전과 예루살렘은 파괴되었다. 남쪽에 남아있던 히브리인들은 거의 바빌로니아 왕국의 노예가 되었다.
페르시아 왕국 통치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한 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페르시아는 약간의 자치를 허락해 이 시대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 성전을 지을 수 있었다. 몇몇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군인이 되었고 나머지는 농업을 계속했다. 기원전 400년에서 나바테아인들은 네게브에서 따로 문명을 시작했다. 160년까지 지속되었다.
클래식 시대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삼키게 되면서 팔레스타인은 고대 그리스의 손에 넘어왔다. 이 시대 당시 유다로 불렸다. 그가 죽은 후 그가 점령한 땅들은 여러 조각으로 나눠졌는데 팔레스타인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 시대 당시 팔레스타인은 빠른 발전으로 몰라보게 바뀌었다. 도시 개발 계획으로 튼튼하게 요새화된 도시들이 만들어졌다. 무역과 상업이 왕성하게 이루어졌고 필리스틴인들의 전통을 흡수한 도자기가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기원전 2세기쯤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유대문화와 그리스의 문화 사이의 벽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포경의 흔적을 숨기려고 하는 유대인들도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의 다툼은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고 유대인들의 박해는 마카베오 반란의 발단이 되었다.
Roman Iudaea Province in the 1st century CE as based on Robert W. Funk's The Acts of Jesus, Michael Grant's's Jesus: An Historian's Review of the Gospels and John P. Meier's A Marginal Jew.
로마 제국 지배
기원전 63년부터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했지만 헤로데 대왕이 로마에 의해 분봉왕이 되면서 로마의 지배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예수가 태어날 쯤 팔레스타인은 혼란에 빠졌고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박해받았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66년에서 73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전쟁 중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생포했고 통곡의 벽만 남기고 두 번째 성전을 전부 파괴했다. 132년 쯤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 실패로 끝난 이후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팔레스타인 밖으로 쫓겨났다. 로마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이름을 유다에서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바꾸었다. 132년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의 이름을 바꾸고 유피테르를 위한 성전들을 지었다. 기독교는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Palestine in the Time of Christ as rendered by as B.W. Johnson (1891) in The People's New Testament.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 (330 - 64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330년쯤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기독교는 팔레스티나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곳에 성묘교회를 지었다. 강림교회와 예수 승천 교회 역시 지어졌다. 352년 유대인들은 또다시 티베리아스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비잔티움 제국은 잔인하게 억눌렀다. 390년쯤 팔레스티나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5th century CE: Byzantine Diocese of Palaestina I (Philistia, Judea and Samaria) and Palaestina II (Galilee and Perea).
아랍 칼리파의 지배 (638 - 1099년)
500년만에 유대인들은 조건하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마야드(661-750년)의 지배아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이 소유하고 있는 공통점을 강조하기 위해 경전의 민족이라고 불렸다. 이 시기당시 예루살렘에 알 악사 모스크가 지어지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 점령
1516년 오스만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했을 때 "팔레스타인"이란 명칭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1800년쯤 제국은 점점 쇠약해졌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동맹국의 편을 들어서 영국이 오스만이 가지고 있던 땅의 대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20세기
1947년 국제 연합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제안하였다.
영국의 팔레스타의인 통치로 팔레스타인이라는 명칭은 돌아왔다. 영어, 히브리어와 아랍어가 공식 언어로 선택되었다. 19세기와 20세기당시 팔레스타인이라는 명칭은 라파에서 (가자지역의 남쪽에 있음) 리타니 강까지 뻗는 지역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네게브 사막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1800년대 말 동유럽에서 시작된 포그롬과 유럽 전체에서 악화된 반유대주의는 시온주의의 발단이 되었다.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유대인 대학살은 유대인들의 귀환을 더욱더 부채질 했다. 유대인 민병은 팔레스타인을 위해 끈질기게 공격했다. 더불어서 유대인 대학살이 끝난후 시온주의자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는 대신 키프로스에 있는 난민촌이나 심지어 독일로 다시 보내서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고 제2차 세계 대전후 10만명의 군대를 두는 건 경제적으로 무리였다. 결국 1947년초 영국의 정부는 팔레스타인 통치를 끝내겠다고 선언했고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국제 연합으로 떠 맡겼다.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의 사이가 점점 악화되자 1947년 국제 연합은 3분의 2의 투표로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채택했다. 유대인들은 이결의안을 환영했으나 아랍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대신 아랍측은 3일동안 파업을 한다고 선언했으며 예루살렘에서 폭동을 일으키며 유대인 인구가 높은 곳을 공격했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고 다음 날 영국의 통치는 공식적으로 끝났다. 독립 선언후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와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침입하면서 제1차 중동 전쟁이 시작되었다. 결과로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An 1890 map of Palestine as described by medieval Arab geographers, with Jund Filastin administrative area
현재
1949년 정전협정에 따라 예루살렘은 반으로 나눠졌다. 동예루살렘과 웨스트뱅크는 요르단이 가졌고 가자 지구는 이집트의 땅이 되었다. 제1차 중동 전쟁때문에 70만명이 넘는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하거나 아랍 국가로 떠났으며 동시에 그 당시 무슬림 국가에 남아있던 80만명의 유대인들역시 이스라엘로 떠났다. 이중 대략 60만명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흡수되었고 나머지는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주했다. 제3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면서 가자 지구와 웨스트뱅크를 점령했으나 2005년 가자지구에서 철수했다. 웨스트뱅크는 현재는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으며 1993년부터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존재한다.
Palestine in British map 1924 the map now in the National Library of Scotland
Palestine and Transjordan were incorporated (under different legal and administrative arrangements) into the Mandate for Palestine issued by the League of Nations to Great Britain on 29 September 1923
The new era in Palestine. The arrival of Sir Herbert Samuel, H.B.M. high commissioner, etc. with Col. Lawrence, Emir Abdullah, Air Marshal Salmond and Sir Wyndham Deedes. Churchill and Abdullah (with Herbert Samuel and T. E. Lawrence) during their negotiations in Jerusalem, March 1921.
Map of the West Bank and the Gaza Strip, 2007
인구 통계
1세기당시의 인구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기 전의 유태인 인구는 확실하지 않다. 공식적인 일치는 없지만 대략 백만명에서 6백만명 사이로 추정된다.
오스만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지배했을 당시 역사가 Volney의 견적에서는 1785년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200,000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 버나드 루이스는 오스만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던 첫 세기 당시 대략 300,000명 정도 살고 있었다고 예상했다. 저스틴 맥카시의 통계의 따르면 19세기 초에는 대략 35만명정도 존재했었다고 한다. 1860년에는 대략 41만명으로 늘어났고 1900년에는 60만명이 되었다. 대략 94%가 아랍인이었다고 한다.
현재
The region as of today: Israel, the West Bank, the Gaza Strip and the Golan Heights
팔레스타인의 현재 모습
현재 이스라엘에는 7백만 명이 살고 있으며 77%는 유대인, 18.5%는 아랍인, 4.3%는 "기타"로 분류된다. 유대인 중 68%는 이스라엘에서 태어났고 나머지는 외국에서 태어났다. 22%는 유럽과 미국에서 태어났으며, 10%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중동 포함)에서 태어났다. 팔레스타인 측은 웨스트 뱅크에는 240만 명의 팔레스타인이 살고 있고 가자지역에서는 14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정부측은 웨스트뱅크에 140만명이 있다고 예측했으나 인구 통계학자 Sergio DellaPergola는 웨스트 뱅크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숫자를 합치면 333만이 된다고 비판했다. 이스라엘, 웨스트뱅크, 가자지역의 인구를 합치면 대략 9백만에서 천만 명 정도 된다. 요르단의 인구는 대략 6백만인데 이 중 대략 절반이 팔레스타인 출신이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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