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양칠성’ 그의 조선 이름 찾아준 일본인
[한겨레신문] 2008년 12월 18일(목) 오후 06:34
한겨레가 만난 사람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교수
일제시대 포로감시원으로 끌려간
‘조선인 BC급 전범’ 명예회복 활동
“한국의 근현대사 진상규명 작업
어느 나라도 못한 자랑스런 유산”
1975년 11월 인도네시아의 가릇 영웅묘지에 3인의 일본인이 성대한 의식과 함께 안장됐다. 수백년간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을 도운 공로를 뒤늦게 인정받아 국립묘지에 묻힌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종주국이었던 네덜란드가 식민지배 체제를 다시 확립하려 하자 독립을 염원하던 인도네시아인들은 거세게 저항운동을 벌였다. 3인 가운데 한 사람은 인도네시아 게릴라들의 무장투쟁을 지원하다가 네덜란드 군에 잡혀 1949년 총살형을 당한 야나가와 시치세이다. 아마도 한 일본학자가 끈질기게 조사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양칠성이란 이름과 한국 국적을 찾지 못하고 그냥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양칠성을 우리가 기억하게 된 것은 우쓰미 아이코(67)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의 공이 크다. 우쓰미 교수는 일제 때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됐다가 종전 후 비시(BC)급 전범으로 가혹하게 처벌받은 이들의 명예회복·보상 운동을 지원해온 활동가이자 학자다. 지난 6일 서울에서 한국·조선인 비시급 전범 유족들의 교류회(<한겨레> 12월8일치 12면 참조)가 열렸다. 이 교류회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그를 만나 30여년에 이르는 활동과 연구 성과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최근 <왜 김은 심판을 받았는가>라는 저서를 아사히신문 출판부에서 냈습니다. 이게 몇 번째 책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조선인 비시급 전범문제에 관한 많은 저서를 냈는데 무슨 연유가 있습니까?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어 교사를 하다가 독서신문에 연재됐던 자이니치(재일동포) 관련 르포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사회학을 택해서 사회적 약자, 소수자 문제, 특히 자이니치 문제를 파고들었습니다. 당시 가지무라 히데키 교수가 이끄는 조선연구소에서 모이던 연구자들과 함께 공부를 하다가 조선인 전범 얘기를 들었지요. 전혀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친일파 또는 나쁜 조선인이라는 생각이 들어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이 문제에 관여하게 된 것은 1975년 인도네시아 자바에 갔을 때입니다.”
왜 인도네시아인가요? 유학을 간다면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으로 가는 것이 보통인데?
“당시는 전공투(1960~70년대 일본 사회를 뒤흔든 학생운동 조직 ‘전학공투회의’의 줄임말)의 투쟁시대라 박사과정에 있어도 자리가 없어 어떻게 먹고사느냐가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남편(무라이 요시노리)이 이슬람과 개발 문제를 연구하고 싶다며 파견유학생 시험을 봐 장학금을 얻었습니다. 나비 수집이 그의 취미이기도 했고요. 나 자신은 한국에 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는데다 지인이 한국에서 체포되는 일이 벌어져 포기했습니다.”
양칠성의 존재를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남편을 따라 인도네시아로 가 파자자란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무렵, 3인의 일본인이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으로 추대됐습니다. 하지만 조선인이 있다는 얘기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요. 두 사람은 일본에서 유족을 불러서 유골을 나눠 전달했는데 인도네시아 이름 코마르딘, 일본 이름 야나가와 시치세이에는 그런 조처가 없었습니다. 이상한 일본이름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누군가가 남편에게 조선인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자카르타에 남북한의 대사관이 다 있는데 왜 유족에게 알려주지 않느냐고 따졌더니, 일일이 그런 거 하기 귀찮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대단히 화가 나서 그의 신원을 확인해서 일본에 돌아가면 유족에게 꼭 알려주자고 결심했지요.”
전북 완주군 삼례 출신인 양칠성은 왜 이역만리 떨어진 인도네시아까지 와서 불귀의 객이 됐을까? 그의 극적인 삶을 이해하려면 일제가 태평양전쟁 기간 실시했던 포로감시원 제도를 알아야 한다. 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기습을 시작으로 동남아를 침공한 일본은 다음해 2월 싱가포르, 3월 자바를 점령하고 식민지 병력을 포함해 25만~30만명의 연합군을 포로로 잡았다. 일본은 부족한 전투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42년 5월 조선에서 징병제를 실시함과 동시에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반강제적으로 지원을 한 조선인 3200여명은 부산의 노구치부대에서 2개월간 엄격한 훈련을 받은 뒤 그해 8월 선박 편으로 3016명이 타이·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지에 배치됐다.
이들의 운명은 크게 엇갈렸다. 전쟁이 끝나 운좋게 살아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동남아 오지에서 풍토병에 걸렸거나 해상 이동 때 연합군 해군의 공격으로 숨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종전 후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정착해 성공한 이가 있는 반면 연합군 포로 학대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이 집행된 14명을 포함해 모두 12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들이 이른바 조선인 비시급 전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장기형을 받은 전범들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직전에 일본의 스가모형무소로 이감돼 수감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뒤 ‘동진회’라는 상부상조 모임을 결성했다. 수감자 가운데 일부는 일본 정부의 냉대에 분격해 만기가 온 뒤에도 출소를 거부하며 항의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을 만나 조사를 하고 일본에 돌아와 잡지 <삼천리>에 ‘인도네시아 영웅이 된 조선인’이란 짧은 글을 썼더니 양칠성이 조카인 것 같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동진회 모임을 찾아가 ‘포로감시원 출신인 양칠성을 혹시 아느냐’고 물었더니 함께 지냈다는 동료들이 그의 고향을 알려주었지요. 1978년에 방한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족들에게 인도네시아 영웅묘지에 묻혀 있다고 전해주었더니, 여동생이 ‘알려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왜 좀더 일찍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더군요.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고 죽은 줄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동진회 지원활동을 하게 된 건가요?
“당시 조선인 비시급 전범 문제는 벽에 부닥쳐 있었지요.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면 65년 한-일 협정으로 모두 끝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일이라고 발을 뺐습니다. 이학래(83·동진회 회장)씨 등 동진회 회원들은 무엇보다도 일본에 방치돼 있는 옛 동료들의 유골이라도 유족들에게 꼭 돌려주고 싶어 했지요. 일본 정부는 가족들이 나타나면 돌려주겠다는 소극적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함께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활동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국회청원을 할 때 창구역을 맡아준 것이 도이 다카코 사회당 의원입니다. 78년에는 보상을 요구하는 표현이 있어 무산됐고, 다음해 ‘성의 있는 처우 요구’라고 문안을 완화했더니 채택됐습니다. 중의원 사회노동위에서 채택되자 바로 전화로 알려준 사람이 나중에 총리까지 지낸 무라야마 도미이치 의원이었지요. 국회청원은 강제력이 없어 당장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82년 유골 송환식을 했습니다.”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동진회 회원들과 함께 의원회관의 방을 찾아다니며 의원이나 보좌관에게 사정을 설명할 때마다 반드시 ‘어떻게 조선인이 전범이 됐느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기도 힘들어 전범이 된 경위를 설명하는 짧은 팸플릿을 만들어 돌렸지요. 그런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해 82년 <조선인 비시(BC)급 전범의 기록>을 냈습니다. 그것이 최초의 본격적인 책입니다.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가 서평을 써주고 와다 하루키 교수도 의미있는 일이니 열심히 해달라고 격려를 해주었지요. 혹시 일본의 우익운동으로 오인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자료가 빈약했을 텐데 어떻게 모았습니까?
“60년대 재일동포 사학자 박경식 선생이 낸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에 일부 나와 있기는 했지만, 일본 후생성의 철수자 기록에 조선인·대만인 전범에 관한 것은 1~2쪽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재판기록도 없었고요. 동진회 회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이 만든 자료를 입수했고요. 에이(A)급 전범을 심판한 도쿄군사재판의 속기록 10권을 쭉 읽어봤는데 포로감시원을 지칭하는 ‘코리안 가드’ 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대학에 자리를 잡아 고정수입이 생기면서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네덜란드 공문서관 등에서 전범재판 자료를 찾았지요.”
전후 60여년이 지났어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비시급 전범뿐만 아니라 위안부·군인군속·유골 귀환 등 모든 전후처리 문제가 마찬가지입니다. 이른바 대동아전쟁은 전후 두 가지 방식으로 처리됐습니다. 하나는 전쟁재판인 도쿄군사재판인데 식민지 지배는 아예 심판 대상에서 빠져 버렸습니다. 또 하나는 배상인데 경제협력 방식으로 해버렸습니다. 한-일 기본조약이 전형적이지요. 그런 틈 사이에 시베리아 억류자, 자이니치 문제 등 모두 방치돼 버렸습니다. 이제 어느 하나를 따로 해결하자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포괄적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정권교체가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년에 총선이 있으면 기회가 올 수 있겠지요.”
한국 사회에서 과거사위원회 통폐합 여부가 큰 논란거리인데 일본인 학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십니까?
“내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평가하는 부분은 과거사에 관한 진상규명위원회들을 만들어 자신들의 역사를 다시 보려 한 것입니다. 일본은 하려 해도 할 수 없었지요. 단지 일제 때뿐만 아니라 군내 의문사 등 정부 수립 이후의 일도 조사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의 대단한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국 드라마를 보더라도 근현대사를 다룬 영상이 많이 나옵니다. 민주화투쟁에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역시 한국인들이 싸워온 성과가 이런 형태로 결정을 이룬 것입니다. 근현대사의 문제점을 재검토하는 것은 미국 ·영국 어디도 하지 않은 것이며 자랑해야 할 유산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과거사위원회들을 없애려 해도 꾸준히 자료를 축적해 다음 단계에 대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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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쓰미 아이코 교수의 연구 관심사는…
‘자이니치’부터 ‘교과서’ 문제까지
일본 국회도서관 누리집에서 우쓰미 아이코 교수의 이름을 입력해 검색해보면 공저, 소책자를 포함해 35권의 도서명이 나온다. 조선인 비시급 전범, 일본의 전쟁책임, 전후보상, 역사교과서 문제 등이 일관된 관심사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 가장 빠른 책이 1980년에 나온 <적도 아래 조선인 반란>이다.
1941년 도쿄에서 태어나 미국의 점령 시절을 보고 자란 그는 와세다 대학에서 자이니치(재일동포) 등 소수자 문제를 학문의 테마로 삼았다. 당시 졸업논문을 쓰기 위해 재일동포들을 만나고 다닐 때 자이니치 차별문제를 개인적 출세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항변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게이센여학원에서 교수로 오래 재직하다 물러났고 현재는 와세다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객원교수다.
김효순 대기자 한겨레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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