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조선삼한, 조선고려, 조선엽전(葉錢)

한부울 2008. 12. 14. 00:44
 

엽전!

왜 우리는 고려, 조선엽전에 그토록 무지한가?

우리는 엽전에 상평통보, 조선통보정도만 있는 줄 알고 있다.

그 수많은 유구한 역사에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화폐조차 다양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어눌한 민족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어찌 타당한 일인가 물어본다.

이러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바로 반도사관에 찌든 결과이다.

절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다

과하게 말하자면 동아시아 아니 아시아 전역에 신라, 고려, 조선 화폐가 있어 나머지 화폐가 생성되었고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들이다.

앞서 말한 것이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할 뿐 모든 유물들은 분명히 우리 것이라고 해야한다.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모든 유물에서 한반도에서 발굴한 유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만 우리 것이고 나머지는 우리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쪼그라든 역사에서 또 다시 일제사관을 답습하는 것이고 우리스스로 왜곡하고자 하는 것이니 당장 지양해야 할 것 들이다.

 

여기 일본인들이 수집한 고려, 조선화폐를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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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전 [葉錢]


고려· 조선시대에 만들어 쓴 철전·동전(銅錢) 및 석전(錫錢) 등의 주화(鑄貨)에 대한 통칭. 고려시대의 엽전으로는 철전(無文鐵錢)과 동전(東國通寶·東國重寶·海東通寶·海東重寶·三韓通寶·三韓重寶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동전(朝鮮通寶·常平通寶, 상평통보에는 當一錢·當百錢·當五錢 등이 있다.)과 석전(十錢通寶)이 있다.


엽전의 모양은 둥글고 가운데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으며, 명목가치(名目價値)에 따라 무게와 크기가 다르며, 동일한 명목가치의 엽전도 주조 시기·기관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우리 나라의 화폐사(貨幣史)에서 볼 때,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화폐를 만들어 쓰고자 한 것은 996년(성종 15) 철전을 주조 유통한 사실로 소급된다. 이때 만들어 쓰고자 했던 철전이 바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엽전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시기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목종과 숙종 연간에 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해동통보(海東通寶)·해동중보(海東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三韓重寶) 등 여러 종류의 동전, 즉 엽전을 주조 유통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세종 때 조선통보라는 엽전을 중앙과 각 지방에서 주조해 유통 보급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 철전이나 여러 가지 종류의 동전 등 엽전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한 노력은, 그 당시의 사회·경제적 미숙, 화폐원료 공급과 화폐유통 정책의 불합리성 등이 직·간접적 원인이 되어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0세기 말부터 16세기 말, 곧 임진왜란 이전에 이르는 6세기 동안에는 왕조의 교차는 있었다 할지라도 엽전과 같은 명목화폐 수용력의 증진이라는 점에서 볼 때, 사회·경제의 본질적 변화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왜란을 전후해 봉건 조선왕조의 성리학 중심의 가치체계와 농업 중심의 생산양식은 급속도로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해체 과정 속에서 농업·광업·수공업 등의 사회생산력은 증진되었고, 동시에 상품·교환경제 발전은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초부터 엽전과 같은 명목화폐의 통용을 필요로 하는 사회·경제적 요청에 부응하는 한편, 전란으로 파탄에 직면한 국가재정을 보완하기 위해 동전이나 석전 등 엽전을 법화로 주조, 유통시키고자 하였다.


화폐유통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전을 주조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정책 추진의 초기 단계에서는 우선 조선 전기에 주조해 보관해오던 동전(조선통보)을 유통 보급시키는 데 그쳤다. 그러나 국가가 화폐유통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량의 화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동전을 주조해 유통 보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7세기 초부터 1750년대 말에 이르는 시기에 별도로 주전청(鑄錢廳)을 설치하고 동전을 주조하거나, 중앙 관청 및 군영(軍營)은 물론 수원·개성·안동 등 각 지방 관청으로 하여금 화폐를 주조, 발행하게 하였다. 한편, 화폐주조사업에 소요되는 경비부담을 줄이기 위해 민간인에게 화폐주조를 허락하거나 싼값으로 중국 동전을 수입해 오기도 하였다.


조선정부는 17세기 전반기에, 그 시기에 주조된 ‘팔분서 조선통보(八分書朝鮮通寶)’와 십전통보(十錢通寶 : 錫錢), 그리고 조선 전기에 주조되었던 조선통보 및 중국 동전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엽전을 유통 보급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화폐유통 정책으로, 1740년대에는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한 개성을 중심으로 강화·교동·풍단·연백 등 인근 지방에서 동전이 원활히 통용되었다. 1750년대에는 중국과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국제교역이 발달한 의주·안주·평양 등지에서도 동전이 유통되고 있었다.


조선은 1678년(숙종 4)에 상평통보, 즉 엽전을 다시 주조, 유통시키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상평통보를 법화(法貨)로 채택, 주조 유통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화폐경제의 확대보급 추세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화폐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나 저해 요인이 없지는 않았다. 특히 전통적 사회질서의 해체를 수반하는 화폐유통에 대한 봉건사회의 보수적 반동이나, 화폐공급 부족현상으로서의 전황(錢荒)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요인들이 명목화폐의 통용을 필요로 하는 당시 사회의 근대를 향한 자체지향, 다시 말해서 봉건사회를 벗어나서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역사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었다. 따라서 16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물품화폐와 칭량은화(稱量銀貨)의 유통이 지배적인 봉건 조선사회에 명목화폐인 상평통보가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서 유통기반을 이룩하게 되었다.


상평통보가 초기의 유통보급단계를 지나 공·사 유통계에서 일반적 가치척도·교환수단·지불수단 및 가치저장수단 등 제반 화폐기능을 발휘하게 됨에 따라 호조·선혜청(宣惠廳)·균역청(均役廳) 등 중앙의 재정관리관청과 지방관청, 그리고 각 군영의 비축과 수입·지출의 화폐화 비율이 높아지고, 소작료·노임의 화폐화가 증진되었다.


또한,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이 보다 유동성향이 큰 화폐자본으로 전환되는가 하면, 크게는 토지·노예·가산·가축 등에서부터 작게는 시장의 일용잡화에 이르기까지 동전(상평통보 또는 엽전)을 매개로 거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720년대 이후에는 북쪽으로 회령, 서쪽으로 의주, 남쪽으로 동래와 제주도에서도 동전이 통용되는 등 그것의 유통 범위는 국내 각 지방으로 확대되고, 각 계층의 화폐에 대한 가치인식은 심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730년대부터는 ‘일문전 상평통보(一文錢 常平通寶 : 當一錢)’만을 법화로 사용하는 단순, 소박한 화폐유통체제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고, 그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당이·당오·당십·당백·당천전 등 각종의 고액전을 주조, 유통하는 문제와 함께 칭량금은화를 동전과 병용하자는 주장이 거듭 제기, 논의되기도 하였다.


또한, 1810년대 말에는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근대 금은본위제를 연상시키는 화폐제도개혁방안이 구상, 제시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따라 1860년대 초에 당백전과 1880년대 초에는 당오전을 주조, 유통하는 동시에, 대동전(大東錢)이라는 은화를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정부는 1678년에 상평통보를 법화로 주조, 유통할 것을 결정하고, 호조·상평청·진휼청(賑恤廳)·정초청(精抄廳)·사복시·어영청·훈련도감 등으로 하여금 그것을 주조하게 하였다. 그 뒤 상평통보는 중앙의 각 관청이나 각 군영 뿐만 아니라 각 지방관청에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주조, 유통하였다. 그러나 상평통보가 계속 통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장됨에 따라 정부는 화폐주조 관리체계의 획일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즉, 정부는 ‘화권재상(貨權在上)’이라는 전통적 정치이념을 구현하고 화폐원료의 수급을 적절히 조절하며, 또한 상평통보의 주조 발행과정을 합리적으로 관리, 통제하기 위해 상평통보의 주조관리체계의 획일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영조 시대를 거쳐 그와 같은 시도는 거듭되어 1785년(정조 9) 마침내 호조에서 상평통보의 주조·발행을 전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순조 때에 들어서면서 이 획일화 원칙이 무너지기 시작해 중앙의 각 관청·지방 관청 및 각 군영에서 상평통보를 주조, 발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화폐주조 관리질서의 문란은 표면적으로 획일화 원칙의 관리체계가 다원화되었다는 점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국고 전담하에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화폐주조사업이 부민(富民) 등에 의한 도급제(都給制)로 전환되는 경향이었다.


상평통보의 원료로는 동(銅)·석(錫)·연(鉛)이 사용되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동이 주가 되었다. 동은 주로 일본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했고, 석은 중국에서 수입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이나 석에 비해 그 혼합비율이 적은 연은 대체로 국내에서 채굴,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조선정부는 국내의 동광을 개발해 보았지만, 그와 같은 시도는 정부의 전통적인 광업개발 소극화 정책의 견제, 동광 경영의 불합리성 및 채광기술의 미숙성으로 19세기 전반기를 제외하고는 별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국내의 화폐원료는 거의 만성적으로 부족한 상태였고, 이와 같은 원료의 공급난은 조선정부의 원활한 화폐경제발전을 저해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즉, 동을 비롯한 화폐원료의 만성적 공급난은 일반 유통계에서 필요로 하는 충분한 수량의 상평통보를 주조, 발행할 수 없었고, 동시에 품질이 나쁜 화폐를 주조, 유통하게 됨으로써 상평통보의 원활한 유통이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화폐원료의 공급난으로 화폐의 품질이 조악해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상평통보 한 개의 무게는 ‘2전5푼’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동의 공급난 등이 중요한 원인이 되어 2전·1전7푼·1전2푼으로 점차 줄어들었고,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는 명목가치와 실질가치와의 격차가 큰 악화(惡貨)인 당백전·당오전 등을 주조, 유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상평통보는 1678년부터 조선정부의 유일한 법화로 계속 주조, 유통되어오다가 1894년에 주조가 중단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엽전, 즉 상평통보가 유통, 보급되고, 이에 따라 화폐경제가 확대 발전되었다. 화폐경제는 봉건 조선사회의 농업중심의 중세적 생산양식과 성리학 중심의 가치체계의 해체를 가져왔고, 근대지향을 촉진한 역사적 요인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朝鮮後期 貨幣史硏究(元裕漢, 韓國硏究院, 1975)

≪참고문헌≫ 朝鮮後期 貨幣流通史(元裕漢, 正音社, 1978)

≪참고문헌≫ 朝鮮後期 貨幣政策에 대한 考察(元裕漢, 韓國史硏究 6·7, 1971·1972)

≪참고문헌≫ 當五錢攷(元裕漢, 歷史學報 35·36, 1967)


엠파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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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백과에 엽전을 설명하기를 조선 초기에 만든 조선통보와 중국에서 수입한 주전들도 쓰였다. 1678년(숙종 4)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법화(法貨)로 정하여 대량으로 주조·유통시키기 시작하여 본격적인 화폐경제시대를 맞이하였다...조선 후기에는 동전을 주조하기 위하여 구리는 일본에서, 주석은 중국에서 각각 수입하였고, 소량이 첨가되었던 납[鉛]은 국내에서 충당하였다. 그러나 만성적인 원료부족으로 인하여 2전 5푼을 표준으로 했던 상평통보가 2전·1전 7푼·1전 2푼 등으로 점차 줄어들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자체가 고려와 조선인데 중국화폐를 수입하였다?

조선 후기 동전을 주조하기 위하여 구리는 일본에서 주석은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정말 가당찮은 말이다.

화폐를 주조하기 위하여 일본이나 중국에서 수입된 원료로 주조하였단다.

구리와 주석이 우리가 생산하기에도 모자랐다는 것인데 믿을 수 없다.

반도사관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아래 화폐를 보라 이것은 일본인들이 소장한 엽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고가치를 풍긴다.

우리가 보통 엽전이 조선에만 통용 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아래를 보면 고려에 이어 조선에도 같은 화폐가 공히 사용되었다고 보여 지는 것이 놀랍다.

우리는 엽전이라 하여 상평통보와 조선통보정도만 알고 있었지만 실제는 이와 다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엄청난 규모의 화폐가 존재했었고 광범위하게 사용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우리의 역사는 하나같이 정상적이지 못하다.

억지로 쪼개거나 쪼그라들게 만들어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장난쳐 놓았다.

그러한 장본인들이 지금 우리 유물을 가지고 소장한다고 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마음대로 농락하고 있는 현실을 왜 바로 보지 않으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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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소장 전시한 朝鮮高麗葉錢

 

엽전(葉錢)


아래는 일본인들이 조선엽전에 대하여 보충한 해설이다.


朝鮮銭解説


朝鮮の貨幣の歴史は高麗時代に始まり、当初は中国(唐)の貨幣の銭紋を用いた乾元重宝背東国銭や、高麗開元と称する開元通宝銭が作られていました。その後、朝鮮独自銭紋である「東国通宝」「東国重宝」「海東元宝」「海東重宝」「三韓通宝」「三韓重宝」など、各種の銭が鋳造されています。

 

조선의 화폐의 역사는 고려시대에 시작해, 당초는 중국(당)의 화폐의 전문을 이용한 건원중보 동국전이나, 고려개원으로 칭하는 개원통보전의 면에 글을 새겨 만들어졌다. 그 후 조선 독자전문인「동국통보」「동국중보」「해동원보」「해동중보」「삼한통보」「삼한중보」등, 각종의 전이 주조되었다.


続いて李氏朝鮮時代に入り「朝鮮通宝」「十銭通宝」などの銭名を経て、「常平通宝」が鋳造されるようになり、それ以降の朝鮮の標準貨幣となります。「常平通宝」は当初、単字背(背に文字が1つ)の「古常平」が発行され、続いて「新常平」の折二・小平・当五・当百が作られるようになり、李氏朝鮮時代を通して膨大な種類の常平銭が鋳造されることになります。常平銭の背文の組み合わせは、千字文と数字の組み合わせであると言われており、一説には一万以上の種類が存在するとされておりますが、現存するものは恐らく6~7千種類であると思われます。それの中には母銭のみが存在し、通用銭が存在しないものなどもあります。


계속되어 이씨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 「조선통보」「10전통보」등의 이름을 거쳐, 「상평통보」주조되게 되어, 그 이후의 조선의 표준 화폐가 되었다. 「상평통보」은 당초, 간단한 글자로 배문(문자가 1개)의 「고상평」이 발행되어 「신상평」의 折二・小平・当五・当百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이씨 조선 시대를 통해 방대한 종류의 상평전이 주조되게 되었다. 상평전의 배문의 편성은, 천자문과 숫자의 편성이라고 말해지고 있어 일설에는 1만 이상의 종류가 존재한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현존 하는 것은 아마 6~7천 종류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모전만이 존재해, 통용전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다.


李氏朝鮮時代に製造された絵銭は「別銭」と呼称されています。この「別銭」はその意匠の違いにより膨大な種類が存在し、朝鮮独特の意匠で人気があります。中には「開金牌」の台銭に使用されたと思われる大型のものがあり、その評価は高いものとなっております。


이씨 조선 시대에 제조된 그림엽전은「별전」이라고 호칭되었다. 이「별전」은 그 생각의 차이에 의해 방대한 종류가 존재해, 조선 독특한 생각으로 인기가 있었다. 안에는「개금패」의 태전(台錢)에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대형의 것이 있어, 그 평가는 높다.


태전(台錢) : 엽전 중에 엽전

개금패(開金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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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금패(開金牌)  조선시대 엽전 모양의 장식품 혹은 기념화폐


[열쇠패]

열쇠패는 일면 개금패(開金牌)라도 부르고 있다. 고종조(高宗朝) 전후에 만들어진 열쇠패는 조선왕조 후기의 상류사회에서 신부의 귀중한 혼수품으로서 가보처럼 애장되었다. 이 열쇠패는 불길(不吉), 불상(不祥)을 제방(除防)하려는 길상희원적 우의(吉祥希願的 寓意)가 다분히 의장화(意匠化) 되었고 그 형태는 각형(角形)과 원형, 방형(方形), 주머니형, 용형(龍形) 및 나비형 등으로 구분하며, 형태와 구도 및 문양 등은 왕가 열쇠패를 비롯하여 10여개의 형태로 나누어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열쇠패는 중국과 일본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희귀한 대형 기념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우리 선대의 얼과 손때가 묻은 장식고민구(裝飾古民具) 내지 실내장식 문화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별전]

 

별전은 중국으로부터 고려로 전래되어 만들어졌으나 조선 숙종 4년(1678)때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원래는 상평통보를 만들때 그 구리의 질·무게 등을 시험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지만, 일종의 기념주화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이 주조해 쓸 수도 있었으나 정상적인 주화인 상평통보처럼 통용되지는 않았다. 주로 왕실이나 사대부 등 상류층들이 소장하는 패물이나 애장품이었다.


별전에는 길상 문자를 비롯한 여러 문양들이 사용되었다. 별전에 나타난 붕어문양은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강해 기운이 세고 유연한 모습에서 여유로움을 상징하기도 하며, 새끼를 많이 낳는 다산의 의미와 공명출세 그리고, 부귀를 상징한다.


별전은 조선 말기에는 여러 개를 묶어 만든 열쇠패가 상류사회에서는 혼수품이 되기도 하였으며, 별전에 노리개·열쇠 등을 매달아 행운을 기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별전은 실용성보다는 길상을 뜻하는 문자와 형태를 가진 장식품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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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역사 공부할 때 늘 독창적이란 말을 많이 사용했다.

독창적이다?

이것은 무엇을 숨기려고 만든 말일까?

여기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희귀한 독창적이란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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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三韓通寶?

조선 삼한통보만 하더라도 뜻에서 보면

민중 즉 백성에게 널리 통하게 하려는 화폐를 굳이 어려운 글자를 새겨 민중들을 혼란 할 이유가 없다. 이미지가 강하게 아주 단순하게 문자를 새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위에 새겨진 글자 그대로

조선 내 삼한이 있었는데 그 삼한에서 다 통용되는 화폐란 뜻이다.

 

朝鮮三韓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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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高麗錢

 

 

 

 

 

 

 

 

 

 

 

 

 

 

 

 

 

 

 

 

 

 

 

 

 

 

 

 

 

 

 

 

 

 

                                                     朝鮮錢

상평통보

 

 

 

 

 

 

 

태전

 

 

 

 

 

 

 

 

 

 

별전

 

 

 

 

 

 

 

 

 

 

 

 

 

 

 

 

 

 

 

 

 

 

 

 

 

 

 

 

 

 

 

 

 

 

 

 

 

 

 

 

 

 

 

 

 

 

 

 

 

 

 

 

 

 

 

 

 

 

 

 

 

 

 

 

 

 

 

 

 

 

 

 

 

 

 

 

 

청조전(淸朝錢)

화폐주조만 놓고 보더라도 대륙을 지배하던 중국이라고 하는 청나라에서 작은 나라이면서 조공국이며 속국이라고 하는 한반도 조선이 주조한 별전이나 변전 태전 등을 주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다.

일본화폐전문가가 설명한 것처럼 조선의 별전이나 변전 태전 등은 기념주화 비슷한 것으로서 통용성보다 귀중품으로서 가치성을 더 부여 할 수밖에 없는 화폐 별전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황실이나 귀족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상층부에서 통용되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당시 재정상태에서 궁핍을 못면하던 조선이 이런 기념주화의미에 화폐를 무리하게 주조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부분이다.

반도역사가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것이지만 별전이나 태전 등을 자세히 보면 주조능력이 대단한 것이며 분명한 것은 대륙 중국 상층부가 바로 조선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느껴진다.

바로 청이 조선이란 말이다.

청이 하부에 있는 피지배층이고 그 위 상부계층은 바로 조선이란 말이다.

이러한 것은 여기 화폐 별전, 태전에서 볼 수 있는 명료한 이치이다.

 

                                                        大型繪錢 福緣 背八卦

 

                                                        大型繪錢 福緣 背八卦

 

                                                              同治通寶 背八卦

 

                                                           同治通寶 背八卦

 

                                                     北洋開國記念幣10文

 

                                                    北洋開國記念幣10文

 

                                                     中國銅幣 湖北銅幣50文

 

                                                   中國銅幣 湖北銅幣50文

 

당백전(當百錢)

또한 당백전(當百錢)이라고 하면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하여 재정마련을 위한 만든 화폐라고 하는데 당백전이 조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전(當錢)에는 당백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천전, 당 십오전, 당십이전, 당십전, 당오전, 당이전, 당일전등 무수히 많다.

당백전은 그 중에 하나 일 뿐 조선이 발행한 것이라고 하여 특별하게 부정적으로 볼 것 없다. 즉 대륙조선이 만든 화폐 중 일부 일 뿐인 것이다.

 

[咸豊元寶]

 

 

 

 

 

 

 

 

 

 

 

 

 

 

 

 

 

 

별전(국립민속박물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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