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바다의 한국사

한부울 2008. 11. 23. 19:28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01. 세계를 뒤흔든 한 장의 지도- 천하전여총도

02. 역사의 수수께끼, '캘리포니아 섬'

03. 최한기. 김정호의 '지구전후도' 

04. 천하전여총도에 나타난 천하의 중심 한반도 

05. 천하전여총도, 정화선단의 비밀 

06.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 - 1 

07.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 - 2 

08. 라’의 세계-1 

09. 라’의 세계-2 

10. 라’의 세계-3 

11. 장보고, 신화의 이면- 1 

12. 장보고, 신화의 이면- 2

13. 장보고와 장지신

14. 신라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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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한 장의 지도- 천하전여총도

2007년 01월 09일 (화) 07:38:03 서현우


<서현우와 함께하는 바다의 한국사 1> 

 

 

87년 '북한공작원 김현희'에 의해 공중폭파됐다고 발표된 KAL 858기 실종사건을 다룬 소설 『배후』(창해, 2003)의 작가 서현우. 울산 토박이인 그는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고 민주화운동으로 옥살이를 한 바 있다.


그는 줄곧 진중한 책읽기와 풍부한 여행 경험을 쌓아왔고, 특히 세계사와 한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기성 학계의 정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 위해 발로 뛰는 독특한 탐구의 길을 걸어왔다.


매주 화.금요일에 통일뉴스에 연재하는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는 이같은 그의 각고의 노력의 산물이다. 기존의 주류 사관을 뒤엎는 그의 참신한 반란에 한번 빠져들어가 보도록 하자. /편집자 주

 

 

1장, 세계를 뒤흔든 한 장의 지도- 천하전여총도


1. 천하전여총도


2006년 1월 중순의 어느 날. 필자는 영국과의 시차를 고려하여 늦은 오후에 이르러서야 인터넷을 통해 각종 언론매체의 외신란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틀 전 ‘세계일보’가 예고한 단신 기사에 의하면 세계역사를 새로 써야할지도 모를 놀라운 고지도 한 장이 그날 영국 런던에서 공개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세계역사를 바꿀만할 지도라?


그도 그럴 것이 ‘세계일보’는 그 날 공개될 예정인 고지도가 1418년의 지리지식이 담긴 중세 중국의 지도로, 놀랍게도 오늘날 접하는 세계지도의 지형윤곽이 거의 담겨 있음을 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418년이라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첫 항해에 나서기보다 무려 74년이나 이른 시기가 아닌가?


필자는 처음에 쉬이 믿기지 않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문제의 지도가 중국의 지도라는 데에 있었다. 무엇보다 중국은 ‘짝퉁’과 ‘가짜’의 이미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데다, 이번 지도의 공개가 한 해 전인 2005년 중국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진 유명한 정화鄭和 제독의 첫 항해 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최근 세계적 관심과 논쟁을 낳고 있는 명나라 정화함대의 항해궤적에 대한 의문, 또 지난 3년간의 필자의 연구내용을 떠올리며 일말의 흥분을 숨길 수 없었다. 더욱이 문제의 지도가 다름 아닌 세계적 권위의 ‘이코노미스트(Economist)誌’에 의해 공개된다는 데에 있어 더욱 그랬다.


‘이코노미스트誌’는 서양 주류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온 160여년 전통을 자랑하는 보수적 시각의 매체가 아닌가? 그런 ‘이코노미스트誌’가 합당한 분석과 검토 없이 자사의 전통과 권위를 실추시킬 행위를 간단히 할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필자의 이러한 의심과 기대는 결국 지도의 공개가 답해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인터넷을 검색하던 필자는 ‘한국일보’와 BBC의 사이트에서 문제의 지도사진을 접하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충격과 경이감에 젖어야 했다.


한마디로 문제의 지도는 필자에게 있어서 놀라움 그 자체이자, 일대사건이었다.

 

 ▲ 1763년 제작된 천하전여총도(天下全與總圖),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란 원본지도를 필사했다고 한다. [자료사진 - 서현우]  

 

‘천하전여총도天下全與總圖’ 


류강(劉剛, LiuGang)이란 이름의 중국인 법률가가 2001년 상하이의 고서점에서 500달러에 구입했다는 천하전여총도는 위의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세계지형의 윤곽이 거의 다 드러나 있다.


지도의 여백에 씌어진 글귀엔 지도의 제작 시기가 청나라 중기인 1763년이란 것과, 그것이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란 원본지도를 필사한 것이란 내용이 들어있다.


지도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즉 지도가 1418년 제작의 원본지도를 필사한 것이 분명하다면 가히 세계사를 새로 써야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것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이루어진 아메리카 대륙에로의 항해와, 그것을 단초로 전개된 지리상의 대항해가 서양사회에 부여하기 시작했던 온갖 ‘최초’란 영광의 타이틀을 반납해야 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하여 중세 동양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이해, 나아가 그동안 가려지고 숨겨져 온 서양사의 비밀들을 하나씩 드러내는 단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기본적인 역사인식을 토대로 지난 역사를 반추해 본다면, 중상주의를 앞세운 절대주의 중세유럽의 확장, 그것에 기초하여 전개된 산업혁명, 나아가 근대제국주의의 등장이 낳은 저들의 오만과 독선, 폭력은 그 저변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로 상징되는 역사상 ‘최초’라는 우월주의 관념이 깊이 도사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상 ‘최초’라는 그들의 인식은 올바른 것인가? 필자는 위 지도야말로 그것을 부정하는 하나의 강력한 증거라고 확신한다. 그런 만큼 위 지도의 출현은 필자의 예상대로 세계유수의 언론 및 대중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아내고, 더하여 세계 역사학계를 긴장과 술렁거림으로 몰아넣는 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어쨌든 필자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위 천하전여총도의 가치를 단번에 깨달았다. 그것은 이 지도가 우리 역사와 놀라운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필자가 확신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역사와의 놀라운 연관성이라니?


필자는 이제부터 독자와 더불어 역사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흥미로운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여행의 첫걸음은 위 천하전여총도와 함께 시작될 터이니, 독자들은 여행 내내 위 지도에서 눈을 떼지 말기를 바란다.


그럼 이제부터 필자와 더불어 여행을 떠나보자.


2. 남극대륙


영국의 BBC는 천하전여총도의 공개를 보도하면서 간략한 평을 내놓았는데 중심적 내용은 이렇다. ‘1418년의 원본지도가 있었다는 것은 지도를 그린 사람의 주장일 뿐이다.’


한 마디로 위 지도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원본지도가 존재하거나, 존재했다는 어떤 증거는 없다. 그러나 필자로선 그것이 천하전여총도 제작자의 주장일 뿐이라는 BBC의 시각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엔 BBC의 평가는 어딘가 서툴고 서두른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천하전여총도는 2006년 1월의 공개 직후 뉴질랜드의 와이카토 대학에 분석이 의뢰된 상태이다. 분석결과는 후술하겠지만, 공개 당시 BBC는 천하전여총도가 1763년에 제작된 것이란 점에 대해선 부정적 입장을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BBC의 시각을 전제로 하여, 1418년에 제작되었다는 원본지도(천하제번식공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 천하전여총도가 제작된 1763년이란 시기와 지도상의 내용을 비교해보자. 눈 밝은 독자라면 이미 알아챘듯이, 지도상의 남극대륙의 존재가 이 지도의 진실에 중대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1763년의 지도에 남극대륙이라니 말이다.


역사의 정설에 의하면 남극대륙은, 1820년 1월 27일 F. G. 벨링스하우젠( Fabian Gottlieb von Bellingshausen, 1778~1852)이 이끄는 러시아 해군탐험대가 최초로 대륙의 일부를, 다시 3일 뒤인 1월 30일 영국해군의 브랜스필드(Edward Bransfield 1785~1852)가 이끄는 탐험대가 오늘날의 남극반도를 목격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오늘날 남극지역의 벨링스하우젠 해海, 표트로1세 섬, 알렉산드르1세 섬은 이 때의 러시아 탐험대에 의해, 또 브랜스필드 해협과 브랜스필드 분지 등은 이 때의 영국 탐험대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때 브랜스필드 탐험대는 벨링스하우젠 탐험대와 달리 눈에 띄는 섬마다 영국령이라 선언하여 19C 영국제국주의의 일면을 알려주기도 한다.


어쨌든 1820년에야 그 존재가 드러난 남극대륙이 천하전여총도에 나타난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혹자는 이 남극대륙의 존재로 인해 천하전여총도가 1763년에 제작된 지도가 아니라, 19C 이후에서 현재까지의 어느 시기에 제작된 가짜 또는 위작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상당수 독자들은 중세 유럽의 몇몇 지도에 남극대륙이 나타나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피리 레이스(Piri Reis, 1465~1555, 오스만터키)의 지도(1513년), 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Oronteus Finaeus, 1494~1555, 프랑스)의 지도(1532년), 하지 아메드(Hadji Ahmed, 오스만터키)의 지도(1559년), 제라더스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 1512~1594, 네덜란드)의 지도(1569년), 필립 부아슈(프랑스)의 지도(1737년) 등이 대표적인 지도인데, 현재까지 지도학상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이들 지도들이 남극대륙이 발견된 1820년 이전의 지도들이라는 점에 있다.


더하여 각 지도에 묘사된 남극대륙의 일정 영역들은 누군가의 실제 탐사를 전제하지 않곤 도저히 그와 같이 묘사할 수 없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기에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유명한 게라더스 메르카토르 외의 나머지 인물들은 그 지도로 인해 유명해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1532년 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Oronteus Finaeus, 1494~1555, 프랑스)의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 오늘날의 남극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역사의 정설. 그리고 그것과 배치되는 위 지도들의 존재. 이 주제를 다뤄 유명해진 인물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신의 지문’의 작가 그레이엄 헨콕(Graham Hancock)이다. 헨콕의 ‘신의 지문’은 남극대륙이 나타나는 이러한 지도들의 미스터리에서 시작되는데, 그가 내린 주장과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남극대륙의 지도들은 제작 당시의 문화, 기술, 수학적 능력 등의 전반적 문명 수준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현 인류가 그런 수준의 지도를 제작할 능력에 도달한 때는 존 해리슨에 의해 경도측정 기구인 크로노미터가 발명된 18C 이후부터이다. … 또한 그 지도들이 보다 이른 시기의 다른 지도들로부터 필사 혹은 참조되었다는 지금까지의 정황증거들을 통해 볼 때 지도의 기원은 현 인류의 기억에서 단절된 오랜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미지 문명의 산물이다.’


헨콕이 말한 미지의 문명은 놀랍게도 그가 유사 이전에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초고대문명이다. 그런데 헨콕의 초고대문명은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다만 여기서 필자가 헨콕으로부터 (비록 그의 주장이 무시할 수 없는 정황들을 담고 있긴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진실은, 그가 논리의 전제로 내세운 남극대륙의 지도들이 그의 주장대로 이전의 어떤 지도들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더하여 그 점이야말로 필자와 헨콕의 유일한 일치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위에서 헨콕이 인용한 중세 유럽지도들의 기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커다란 수수께끼에 봉착한다. 그러나 여기선 일단 수수께끼로 남겨두기로 하자. 다만 뒷장에서 다룰 내용을 살짝 귀띔한다면 사실 남극대륙의 존재는 조선에서 제작된 두 종류의 지도에서도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도들은 이 장의 주제가 아니기에 여기서 다시 천하전여총도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위의 헨콕이 언급한 지도들의 예를 통해 이제 우리는, 단지 (19C 이전의) 지도상에 남극대륙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 지도가 무조건 가짜 또는 위작이라 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 더 덧붙여, 천하전여총도가 후대의 위작이라면 제작자는 결코 남극대륙을 그려 넣지 않았을 것이란 게 필자의 생각이다. 오히려 불필요한 의심을 살 수 있기에 말이다. 혹시 필자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가? 그런 독자들을 감안해 이번엔 보다 강한 근거를 들어보겠다.


자, 이번엔 천하전여총도 상上에서 눈길을 유럽지역으로 돌려보자. 독자들의 눈에 유럽의 지형이 어딘가 허전해 보일 것이다. 그렇다, 단번에 영국본토인 브리턴 섬과 아일랜드 섬이 없음을 깨달을 것이고, 나아가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가 위치한 스칸디나비아 반도마저 볼 수 없음을 알아챌 것이다.


이 점을 남극대륙의 문제와 대조하여 한번 생각해 보자. 천하전여총도가 후대의 위작이라고 하기엔 지도상의 불균형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우리 자신이 후대의 위작자라는 입장을 가정해 보자. 위작은 남에게 최대한 그럴듯하게, 아니, 진짜보다 더 진짜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무리할 만큼의 남극대륙을 그려 넣는 과감성에다, 그와 너무나 대조적인 유럽지형에서의 소심함은 위작이라고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필자는 지도상의 남극대륙의 존재야말로 역설적으로 천하전여총도가 1763년에 제작된 것이라는 증거의 하나로 간주한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들에겐 여러 의문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의문들은 뒤에서 하나씩 다룰 것이니, 미련 없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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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수수께끼, '캘리포니아 섬'

2007년 01월 12일 (금) 00:15:43 서현우


<서현우와 함께하는 바다의 한국사 2> 

 

3. ‘캘리포니아 섬’

 

▲ 2006년 1월 17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 의해 런던에서 공개된 1763년 제작의 세계전도 '천하전여총도'. 지도상엔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를 필사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남극대륙이 나타나고, 북아메리카의 워싱턴, 오리건, 캘리포니아 주 일대가 섬으로 그려져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이제 독자들은 눈길을 천하전여총도 위의 북아메리카 대륙의 서안으로 옮겨 보자. 오늘날의 워싱턴, 오리건, 캘리포니아 주州 일대의 미국 서안이 본토로부터 분리되어, 하나의 섬으로 그려진 것이 주의를 끌 것이다. 서술상의 편의를 위해 이 섬을 ‘캘리포니아 섬’이라 일컫기로 하고, 다음으로 나아가자.


필자가 천하전여총도의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서 ‘캘리포니아 섬’은 또 하나의 준거가 된다. 독자들은 천하전여총도가 제작된 1763년이란 년도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도 상의 ‘캘리포니아 섬’은 결코 상상이나, 가공, 또 우연의 결과가 아닌 것이 된다. 또한 실제로 1763년에 지도가 제작되었음을 알리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 근거로 ‘캘리포니아 섬’이 앞서 언급한 남극대륙이 나타나는 조선의 두 지도와, 또 중세 유럽의 상당수 지도에서도 나타남을 들 수 있다.


아래에 실린 지도들은 모두 19C 조선에서 간행된 지도인데, 이 중의 ‘곤여전도坤與全圖’는 위에서 말한 조선의 두 지도 중의 하나이다. 이제부터 두 지도를 살펴보자.

 

     ▲ 후손 하성래가 소장하고 있는 1821년 제작된 하백원의 만국전도. [자료사진 - 서현우]  

 

 ▲ 조선에서 제작된 곤여전도상(上)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본(1860년판). [자료사진 - 서현우]  

 

 ▲ 조선에서 제작된 곤여전도하(下)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본(1860년판). [자료사진 - 서현우] 

 

‘하백원의 만국전도’는, 16C 후반과 17C 초에 걸쳐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들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이탈리아)와 기울리오 알레니(Giulio Aleni, 1582~1649, 이탈리아)가 각각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1602년)와 ‘만국전도萬國全圖’(1623년)에서 영향을 받은 지도인데 이들 두 지도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와 거의 비슷한 또 하나의 지도가 존재하는데 조선의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1770년대)가 그것이다. 이들 지도를 편의상 ‘4지도’라 칭하자.


그런데 위 하백원河百源(1781~1844, 조선 후기의 실학자)의 만국전도에서 볼 수 있듯이, ‘4지도’들엔 공히 남극대륙 및 호주 대륙이 자리할 공간이 남반구를 가득 채운 미지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4지도’가 앞서의 남극대륙이 나타나는 지도들에 비해 훨씬 후대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반구에 대한 내용만은 분명 뒤쳐짐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번엔 곤여전도(1860년)로 눈을 돌려보자. 곤여전도는 형식에서부터 ‘4지도’와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앞서의 ‘4지도’는 하나의 타원형에 연속성을 담고 있는 데에 비해, 곤여전도는 세계를 두 개의 원에 양분한 양반구형兩半球形지도이다.


그 다음의 차이는 곤여전도엔, ‘4지도’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처리된 남반구 일대에 남극대륙과 함께 호주대륙이 선명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처음에 곤여전도의 남극대륙에 대해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4지도’에서 보듯이 미지의 영역을 나타내는 형상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검증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곤여전도를 ‘4지도’와 비교해 보았다. 독자들로서는 위의 하백원의 만국전도와 곤여전도의 비교를 통해 상호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백원의 만국전도에서 볼 수 있듯이 ‘4지도’의 남반구는 공히 호주대륙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즉 남반구를 둘러싼 선형이 지도상의 여백이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곤여전도는 호주대륙이 나타남은 물론 남극대륙과 함께 그 선형(線形)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분명 지형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다, 나아가 나란히 놓인 양 대륙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곤여전도의 그곳이 남극대륙임을 확신하는데, 필경 독자들도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이제 곤여전도가 ‘4지도’와 구별되는 세 번째 차이를 살펴보자. 그것은 이 장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세 번째 차이는 시선을 곤여전도의 남반구 영역에서 벗어나, (곤여전도하下의) 북아메리카의 서부 해안 일대로 향하면서 나타난다. 그곳의 한 섬이 독자들의 눈에 들어왔을 때, 독자들의 머릿속은 어느 새 앞서 천하전여총도에서 본 ‘캘리포니아 섬’을 떠올릴 것이다. (주의: 캐나다 중앙부에 보이는 세로방향의 직사각형은 바다를 나타내는 만灣이 아니라, 글귀가 씌어진 공간임)


오늘날의 우리는 지도를 통해 아주 쉽게 그곳이 섬이 아니라, 단지 캘리포니아 반도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 반도는 캘리포니아 주州와 이어져 있는데다, 캘리포니아란 이름으로 인해 자칫 미국의 영토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州와 달리 그곳은 엄연한 멕시코의 영토이다. 사실 캘리포니아란 말 자체가 스페인에서 유래된 것으로, 현재의 미국령領 캘리포니아 주州 역시 이전엔 멕시코 영토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스페인 제국이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 오늘날의 텍사스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미국 서남부의 광활한 지역이 스페인령領에 속했다. 그러다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 멕시코의 영토가 되었던 것이 19C 중반의 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미국의 영토에 편입된 것이다. 당시 멕시코가 상실한 지역은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오클라호마, 콜로라도, 그리고 와이오밍 주의 일부인데 현재의 멕시코 영토와 거의 맞먹는 수준의 엄청난 면적이다.


어쨌든, ‘캘리포니아 섬’은 한동안 유럽의 지도에서도 등장했는데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보자.


현재까지 그 유래가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수수께끼로서, 18C 중엽에 이르기까지 무려 2백여 년 이상이나 당시의 유럽인은 물론, 북아메리카 진출 백인들에게 있어서 캘리포니아 일대는 섬으로 잘못 알려지고 있었다.


혹자는 그 이유의 하나로,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은 유럽인의 진출이 비교적 늦게 이루어진 곳이라는 사실을 들기도 하겠지만, 실제로는 캘리포니아 연안으로의 탐험은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16C만 해도 1542년 포르투갈 출신의 스페인 탐험가인 후안 카브리요(Juan Rodriguez Cabrillo, ?~1543?)를 필두로 하여, 유명한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 1545~1596)와 토머스 캐번디시(Thomas Cavendish, 1555~1592)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C 유럽에서 출판된 대부분의 지도들은 캘리포니아 일대를 섬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캘리포니아 섬’은 하나의 정설이었다.


1705년 독립 이전의 미국 본토에서 그곳을 섬이 아닌 실제의 반도로 나타낸 지도가 간행되자, 지도제작사에는 반발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캘리포니아 섬’을 일주한 선원이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런 가운데 1746년이 되기까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유럽에서는 여전히 ‘캘리포니아 섬’을 묘사한 지도가 제작되었다.

 

              ▲ 1626년 영국의 존 스페드가 제작한 '캘리포니아 섬'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 1650년에 제작된 '캘리포니아 섬' 지도. 캘리포니아란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자료사진 - 서현우]  

 

 

▲ 1696년 조한느 쟌이 제작한 '캘리포니아 섬' 지도. 이 지도상엔 남극대륙이 나타나지 않는다. [자료사진 - 서현우]  

 

독자들은 이제 당시 유럽의 ‘캘리포니아 섬’ 지도와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천하전여총도 및 곤여전도와의 상관성에 대해 유추하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두 지도상上의 ‘캘리포니아 섬’이 남극대륙과 더불어 유럽 지도들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 단정할 것이다.


더하여 독자들은 ‘캘리포니아 섬’은 유럽의 초기 탐험가들이 캘리포니아 반도를 섬으로 오인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1763년에 제작된 천하전여총도는 크게 이상할 게 없다. 다만 천하전여총도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원본 지도로서의 (1418년의) 천하제번식공도에 대한 내용은 한마디로 완전 거짓이며, 원본지도는 존재한 적이 없게 된다. 더불어 필자는 지금까지 별것 아닌 지도를 가지고 쓸데없이 시간과 지면을 낭비한 셈이 되어버린다.


과연 그럴까?


오늘날 지도제작의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실수로 간주되는 ‘캘리포니아 섬’에 대해 다시 주의를 환기해 보자.


‘캘리포니아 섬’은 16C 중엽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란 말이 스페인어에서 유래했음은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매우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하고, 초기 탐험가의 착오에 기인한 것이라 가정해 본다면, 1542년 최초로 캘리포니아 연안을 탐험한 스페인 탐험가 후안 카브리요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국령領 캘리포니아에까진 미치지 못했지만,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을 카브리요에 앞서 탐험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즈텍 제국의 정복자이자, 스페인령領 멕시코 총독을 역임 했던 유명한 헤르난 코르테즈(Hernan Cortes, 1485~1547, 스페인)이다.


코르테즈는 1536년부터 약 3년에 걸쳐 오늘날 멕시코의 태평양 연안을 대부분 탐사하면서 아메리카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는데, 1539년 그의 부하 프란시스코 울로아(Francisco de Ulloa, ?~1540, 스페인)가 코르테즈의 명령에 의해 캘리포니아 만灣을 샅샅이 조사하곤 그곳이 섬이 아니라, 반도라는 사실을 최초로 확인한다.


코르테즈는 당시 스페인 정부의 신대륙 정책을 수행한 스페인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캘리포니아 반도가 확인된 1539년부터이거나, 최소한 그가 스페인으로 최종 귀환한 해인 1541년부터 ‘캘리포니아 섬’은 수정되었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위 17C의 지도들에서 보듯이 캘리포니아 일대는 지도상에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 섬으로 남아 있게 된다.


필자는 그 이유를 당시 스페인 지도제작자들의 머릿속에 이미 ‘캘리포니아 섬’이란 관념이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라 추정한다. 즉 코르테즈의 탐사 이전부터 지도상엔 ‘캘리포니아 섬’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탐험의 결과 착오로 인해 섬이라 알려진 것이 아니라, 코르테즈도, 카브리요도, 드레이크도 캐번디시도 이미 지도를 통해 그곳에 존재하는 ‘캘리포니아 섬’을 가정하고 탐험에 나섰다는 얘기이다.


그 증거는 ‘캘리포니아’란 말 자체에서 찾을 수 있는데, ‘파라다이스 섬’이란 뜻의 이 말은 1510년 스페인 남부도시 세비야에서 출간된 G. R 몬탈보(Garci Rodrigues de Montalvo)의 소설 ‘에스플랜디안의 모험’에서 유래하여 당시 유행어가 되어 있었다. 즉 코르테즈나, 카브리요가 탐험에 나설 당시 스페인에서는 이미 그곳이 캘리포니아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 섬을 찾아 탐험에 나섰다는 뜻이다.


반복하자면 ‘캘리포니아 섬’은 탐험과 무관하게 애초부터 섬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물론 탐험 결과를 반영한 지도도 존재했다. 아래 지도는 17C의 ‘캘리포니아 섬’들의 지도와 달리 이미 16C에 실제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 1570년 벨기에 지도제작자 오르텔리우스의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1570년에 이런 지도가 제작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탐험의 결과가 지도학계에서 제대로 공유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럼에도 이후 2백여 년 가까이나 ‘캘리포니아 섬’이 대세를 이뤘다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단지 추정해 보건대, 당시 지도제작자들에게 있어서 탐험가들의 보고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캘리포니아 섬’ 지도가 광범하게 퍼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되기까지 더욱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어쩌면 ‘캘리포니아 섬’ 지도의 기원이 콜럼버스 시대 이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르네상스의 절정기에 접어든 유럽사회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탐험가들을 다룬 전기 작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에 의하면 당시 유럽사회는 지리지식에 대한 갈망이 폭발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섬’ 지도는 콜럼버스 이전부터 그렇게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의문을 던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최초로 ‘캘리포니아 섬’을 지도상에 남겼는가? 이에 대한 답은 남극대륙에 이은 또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겨두자.


독자들은 이쯤에서 천하전여총도와 곤여전도에 나타난 ‘캘리포니아 섬’이 우연이나, 상상, 가공의 산물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 것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동양의 지도에서 ‘캘리포니아 섬’을 찾을 수 있는 지도라곤, 우리가 지금까지 확인한 천하전여총도와 곤여전도 외에 또 하나가 있는데, 흥미롭게도 그 지도 또한 조선에서 제작된 지도이자, 남극 대륙이 나타나는 지도로서 앞서 말한 조선의 두 지도 중 나머지 하나가 그것이다. 그 지도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제 이 장의 마지막으로, 곤여전도의 유래와 현황에 대해 살펴보고 그와 관련하여 천하전여총도를 평가해 보자.


곤여전도는 목판본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으론 3종류의 판본이 존재하는데, 그 시초는 17C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소속의 또 다른 서양선교사 페르디난드 베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3~1688, 벨기에)에 의해 1674년 북경에서 판각된 북경판이고, 2번째는 그로부터 2백여 년이 지난 1856년의 광동판, 다음 3번째는 광동판이 나온 불과 4년 뒤 1860년 조선에서 판각된 조선판이다. 위에서 살펴본 곤여전도는 조선판으로, 조선판은 현재 각자 3개 본이 전해져오는데, 서울대 규장각(보물 제882호)과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성신여대 박물관 소장본이 그것이다.


북경판과 광동판은 2백여 년의 시차만큼이나 많은 차이가 있으며(필자가 아직까지 직접 확인하진 못함), 조선판은 광동판을 모본으로 하여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우리가 ‘캘리포니아 섬’의 관점으로 천하전여총도를 바라볼 때 우선적으로 인지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극대륙이 발견되기(1820년) 이전의 남극대륙이 그려진 지도가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1929년에 발견된 피리 레이스 지도를 제외하곤) 20C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라는 사실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학문의 보편화에다, 학문세계의 확장, 대중매체의 발전 등에 힘입었을 것이다.


더불어 캘리포니아 섬이 그려진 지도들의 존재사실이 동양에까지 알려진 것은 위의 예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경로를 거쳤다는 점이다.


만약 천하전여총도가 20C 초반이나, 혹은 그 이전에 누군가에 의한 위작이라면 도대체 그 인물은 어떻게 당시에 쉬이 알 수 없는 여타 정보들을 죄다 모을 수 있었겠는가?


혹시 중국의 그 위작자가 곤여전도 광동판(1856년)을 모본으로 한 것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가정할 땐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만약 위작자가 곤여전도(구형지도)를 모본으로 삼았다면 당시의 뛰어난 지도제작 수준을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천하전여총도에 1763년이란 제작년도를 정하기 위해 18C 여타 지도들의 제작수준도 확인해 봤을 것이다. 어쩌면 마테오리치나 알레니의 곤여만국전도와 만국전도(모두 평면지도)를 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전여총도의 제작수준이 백여 년 전인 17C 초의 이들 지도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조잡한 수준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작으로서 유일하게 설명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것은 위작자가 1418년의 지도를 필사했다고 밝힌 만큼 그럴 듯 하게 하기 위해 15C 초 수준을 감안하여 제작했을 경우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의문을 던져놓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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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 김정호의 '지구전후도' 

2007년 01월 16일 (화) 00:20:22 서현우


<서현우와 함께하는 바다의 한국사 3>

 

 

87년 '북한공작원 김현희'에 의해 공중폭파됐다고 발표된 KAL 858기 실종사건을 다룬 소설 『배후』(창해, 2003)의 작가 서현우. 울산 토박이인 그는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고 민주화운동으로 옥살이를 한 바 있다.


그는 줄곧 진중한 책읽기와 풍부한 여행 경험을 쌓아왔고, 특히 세계사와 한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기성 학계의 정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 위해 발로 뛰는 독특한 탐구의 길을 걸어왔다.


매주 화.금요일에 통일뉴스에 연재하는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는 이같은 그의 각고의 노력의 산물이다. 기존의 주류 사관을 뒤엎는 그의 참신한 반란에 한번 빠져들어가 보도록 하자. /편집자 주


4. 지구전후도


우리는 지금까지 천하전여총도 상의 남극대륙과 ‘캘리포니아 섬’이란 두 가지 특징을 놓고, 천하전여총도가 실제 1763년에 제작된 것인지의 진위여부를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위 두 가지 특징이 천하전여총도에서 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살펴본 1860년 조선판 곤여전도와 이 장에서 다룰 또 하나의 조선지도에서도 나타남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 또 하나의 조선지도인 ‘지구전후도’를 통해 천하전여총도의 진실에 다가가 보자. 필자가 이글을 쓰게 된 최초의 계기는 10여 년 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본 한 쌍의 고지도에서 비롯되었다.


고지도는 통칭 ‘지구전후도’라는 이름의 1834년 실학자 최한기와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목판본 세계지도이다. 각각 ‘지구전도’와 ‘지구후도’로 불려지는 이 지도는 현존하는 목판본 세계지도로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자, 남극대륙이 나타나는 동양의 지도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 1834년 최한기와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지구전도(37.0*37.5cm).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 1834년 최한기와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지구후도(37.0*37.5cm).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위 지구전후도는 앞서본 곤여전도와 거의 흡사하다. 남극대륙과 ‘캘리포니아 섬’이라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특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지 않은가?


차이라면 지구전후도는 등간격의 경선을 유지하는데 비해, 곤여전도는 주위로 가면서 경선 간격이 넓어진다는 점, 그리고 지구전후도엔 24절기와 남북회귀선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는 점 정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1834년이란 제작년도이다. 즉 앞서의 곤여전도 광동판(1856년)과 조선판(1860년)보다 이른 시기의 것이란 점이다. 아래는 지구전후도에 대한 서울대 규장각의 설명문이다.


1800년 경 청나라에서 제작된 장정부莊廷敷의 지구도에서 영향을 받은 지도로, 남극대륙의 존재를 볼 때 그곳이 탐험된 이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독자들은 남극대륙의 존재가 최초로 알려진 해가 1820년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 설명문에 보이는 장정부의 지구도에 남극대륙이 나타난다면 또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고 만다.


필자는 장정부의 지구도에 대해 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장정부의 지구도엔 남극대륙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전후도가 비록 장정부의 지구도에서 영향을 받긴 했지만, 남극대륙의 묘사는 그와 무관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어쨌든 한 가지 의문은 해명되었다. 다음은 위 설명문의 이어진 문장을 보자. 남극대륙의 존재를 볼 때 그곳이 탐험된 이후에 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필자는 이 역시 쉬이 믿을 수 없었다. 남극대륙의 존재가 확인된 지 불과 14년 이후의 조선의 지도가 아닌가? 당시 동서양의 정보전달 속도가 그렇게 빠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동서양 근세사 전공자 두어 사람에게 문의를 해보았다. 그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8C 후반에 이르러 청나라의 서양사정에 대한 정보의 범위는 현재 우리의 상상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마카오를 중심으로 한 광동지방은 서양정보의 집산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시 유럽사회는 막 근대로 접어들던 만큼 여전히 절대적 비중의 문맹률을 보이고 있었고, 신정보의 교류는 엘리트․지배세력 중심의 소수 지성사회에 한정되어 있었다. 당시 동서양간의 교통수준을 감안할 때 유럽 대중사회에 보편화된 정보가 아닌 이상, 그것도 한두 국가에 의해 확보된 정보가 불과 14년 만에 동아시아에까지 전해졌다고 보기엔 상당히 무리가 따른다. 게다가 그 14년이란 기간은 중국의 신정보가 조선에 전달되기까지의 최소 2~3년의 시간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 남극대륙은 가상으로 그려졌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어쩌면 서양의 남극탐험대가 귀로에 광동에 들렀을지도 모르겠다".


결론은 필자의 판단에 무게를 두고 있었지만, 필자에겐 썩 시원한 대답은 아니었다. 분명하게 선을 긋는 것을 좋아하는 필자에겐 아무래도 ‘무리가 따른다’는 표현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처럼 들린다.


어쨌든 필자는 유럽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일단 배제한 채, 지도상의 남극대륙이 가상의 대륙일 가능성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 2가지 준거가 세워진다. 하나는, 당시 지도제작상의 시대적 기풍, 또 하나는, 제작자의 다른 제작물과의 비교를 통한 제작자의 세계관에 대한 고찰이다.


그럼 당시대의 기풍부터 살펴보자.


이 시대의 기풍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동양의 지리 관념의 큰 흐름을 알 필요가 있다. 그 흐름은 17C 초를 기점으로 이전과 크게 양분할 수 있는데 바로 고증학적 경향의 등장이다. 17C 초는 시대적으로 서양사회와의 접촉시기이며, 정치적으로 명.청 왕조의 교체기이다.


그 이전 시기는 전통적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고조된 중화사상의 영향으로 지도제작에 있어서 직방세계職方世界란 관념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직방세계란 한마디로 문명화된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바로 중국 중심의 천하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은 지도제작에서 중국을 과대.과장하게 나타내는 대신에 주변지역은 생략 또는 소략小略하게 취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후 시기는 17C 초 명.청 교체라는 한漢족의 중국 통치가 무너지는 역사적 상황과, 서양인의 중국진출에 따라 기존의 세계관에 대변환을 가져온 시기이다. 이른바 중국판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고증학의 대大개화 시기이다. 고증학이란 엄격한 증거에 의거하여 실증적으로 논하는, 실사구시 정신으로 표현되는 근대과학의 기풍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풍은 당대의 지도제작에 있어 혁명적 전환을 낳았는데 앞서 살펴본 하백원의 만국전도나 곤여전도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지구전후도’의 제작자인 최한기나 김정호는 후기 시기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조선 실학의 중심인물에 속한다. 그런 그들이 유독 남극대륙만 상상으로 그렸다고 볼 수 있을까?


김정호의 여타 지도들을 확인해 보라. 왜 우리가 그의 ‘대동여지도’를 조선 지도제작의 결정판이라 일컫고 있는가? 그 속에 투영되어 있는 그의 실사구시 정신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철저한 현실세계의 반영, 실제성과 정확성에 있음이 아닌가?


이와 같이 시대적 기풍과 제작자의 세계관이란 두 가지 준거 모두를 통해 볼 때 필자는 ‘지구전후도’의 남극대륙은 결코 상상이나 가공, 가상의 산물일 수가 없다고 단정한다.


다음은 당시 러시아나 영국의 남극탐험대가 귀로에 아시아를 방문했을 가능성이다. 그런데 이 역시 필자가 확인한 결과는 두 탐험대 모두 아시아에 들른 적이 없었다. 더하여 두 탐험대에 이어 각각 1821년과 1823년에 남극대륙을 찾은 미국의 존 데이비스(John Davis)나, 영국의 포경업자 제임스 웨들(James Weddle)의 항해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이외의 남극탐험대는 ‘지구전후도’의 제작시기인 1834년과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더구나 문제는 남극대륙의 해안선을 본격 조사하기 시작한 때가 19C 후반에 이르러서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위 지구전후도에서 볼 수 있는 남극대륙의 해안선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이러한 점으로 볼 때 필자로선 위 서울대 규장각의 설명문에 아무래도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위 지구전후도의 기원은 무엇인가?


다시 지구전후도를 살펴보자.


필자가 지금까지 ‘지구전후도’에 주목해온 이유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이다. 그것은 보다시피 구형지도로서 고도의 수학적 방법이 투영되어 당시 조선의 과학적 수준과 세계에 대한 인식범위를 가늠할 수 있는 점에다, 무엇보다도 남극대륙의 존재와 ‘캘리포니아 섬’에 대한 의문에서였다.


그런데 필자에게 있어 마지막의 ‘캘리포니아 섬’이야말로 지구전후도의 기원을 유추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아래 니콜라스 샌슨(Nicolas Sanson, 1600~1607 프랑스)의 지도에 보이는 ‘캘리포니아 섬’을 지구전후도와 천하전여총도, 그리고 오늘날 지도상의 그것과 비교해 보자.

 

                                   ▲ 1650년 니콜라스 샌슨의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 2006년 1월 17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 의해 런던에서 공개된 1763년 제작의 세계전도 '천하전여총도'. 지도상엔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를 필사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남극대륙이 나타나고, 북아메리카의 워싱턴, 오리건, 캘리포니아 주 일대가 섬으로 그려져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 오늘날의 북아메리카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독자들은 위 지도뿐만 아니라, 지구전후도와 앞서 확인한 ‘캘리포니아 섬’ 지도들 모두를 상호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위 지도에서 독자들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할 것이다. 즉 섬과 반도가 각자 차지한 면적의 비율이 서로 어울리지 않다는 점을 말이다. 오늘날 지도상의 실제의 캘리포니아 반도는 북아메리카 서해안의 하단부분만을 차지하는 데에 비해, ‘캘리포니아 섬’이 나타나는 모든 지도엔 섬의 크기가 캐나다의 밴쿠버 부근에서 하단까지, 즉 오늘날의 미국 서해안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필자는 두 가지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하나는 ‘캘리포니아 섬’ 지도들이 각기 동일한 종류의 지도(혹은 지도들)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증거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캘리포니아 섬’ 지도의 최초 제작자가 실제 그곳을 탐사하면서 그곳을 섬이라고 오인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첫째의 결론엔 쉽게 수긍하겠지만, 둘째의 결론엔 의아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래의 지도를 살펴보자.

 

                                  ▲ 캐나다 밴쿠버섬 일대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위 지도에서 독자들은 앞서 말한 필자의 결론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으리라 본다. 아래는 필자의 견해이다.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은 최초의 ‘캘리포니아 섬’ 지도제작자는 멕시코 서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도중 실제의 캘리포니아 반도의 어귀를 확인한다. 그런 뒤 반도의 바깥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여 오늘날의 밴쿠버 해안에 이르러 그곳의 (오늘날의 미국본토와 캐나다의 서쪽 국경해안에 걸쳐 있는) 해협을 발견한다. 그는 그 해협이 앞서 확인한 캘리포니아 반도의 내해內海와 이어지는 것이라고 오인하곤 지도상에 그곳을 거대한 섬으로 묘사한다".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마 필자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더구나 지질학적으로 생각할 때 당시의 해협은 지금보다 더욱 넓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궁금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그곳을 최초로 항해하여 지도를 제작한 그(그들)는 누구인가 하는 궁금증을 말이다. 과연 누가 지도상에 최초로 남극대륙과 ‘캘리포니아 섬’을 그려 넣었는가?


필자는 그동안 ‘지구전후도’가 던져준 이러한 의문을 푸는데 있어서, ‘지구전후도’가 유럽의 영향뿐만 아니라, 남극대륙과 ‘캘리포니아 섬’ 등의 문제에 있어선 동양의 독자적 기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라는 가설을 지녀왔다.


그 근거로 호주대륙의 발견에 대한 예를 들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백과사전에 의하면 호주대륙이 최초로 알려진 것은 1606년 네덜란드의 W. 잰츠(Willem Janszoon, 1570~1630)가 이끄는 탐험선 두이프켄 호에 의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론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이나 수隋나라의 역사서인 수서隋書 등에 캥거루가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백과사전의 정보는 어디까지나 서양의 관점이란 사실을 말이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지구전후도’의 독자적 기원은 결코 허무맹랑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필자는 바로 천하전여총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확신한다.


다시 천하전여총도로 돌아가 보자. 현재까진 천하전여총도가 1763년에 제작된 것임을 부정하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만약 이 지도가 실제 1418년 제작의 천하제번식공도를 모본으로 하여 필사된 것이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모든 지도들 중에서 남극대륙과 ‘캘리포니아 섬’이 나타나는 가장 앞선 시기의 지도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최초의 지도를 남긴 자가 최초의 탐험 또는 항해자일 것이며, 더불어 지금까지의 증거로 볼 때 그(그들)는 동양인임에 틀림이 없다. 나아가 그들에 의해 수집된 지리상의 정보가 유럽으로 전해진 것이 분명하며,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중세 지도학상의 모든 수수께끼가 해명된다.’


이것이 천하전여총도가 가져다준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에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여전히 천하전여총도의 위작에 대해 의심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다음 장에선 천하전여총도의 마지막 남은 의문과, 또 분석결과를 통해 그 실체에 대해 한발 더 다가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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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전여총도에 나타난 천하의 중심 한반도 

2007년 01월 19일 (금) 01:02:08 서현우

 

 

<서현우와 함께하는 바다의 한국사 4> 

 

 

5. 세계의 중심, 한반도


이 장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문제의 천하전여총도에 흥미를 가질 것이다. 또 그만큼 지도의 분석결과에 대해 궁금해 할 것이다.


한편으로 독자들 중 상당수는 지도의 진위여부에 앞서, 도대체 그 지도가 우리 역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에 더 관심을 느낄 것이다. 더욱이 ‘바다의 한국사’란 제하의 이 글의 첫 장에 내세운 주제이기에 말이다. 이 장에서는 그러한 의문을 놓고 논의를 시작하자.


문제의 천하전여총도는 2006년 1월의 공개 직후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학계에 미친 파장은 물론이고 세계 유수의 방송에 의해 비상한 관심사로 취급되어왔는데, 특히 미국과 동남아시아는 지도의 진위논쟁에 있어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유독 한국에선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 이유는 문제의 지도가 중세 중국의 지도이기에,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인식 때문일 것이며, 더구나 이른바 ‘동북공정’에 심기가 불편한 우리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행여 지도가 더해줄 중국역사의 영광과, 그에 대비되는 우리역사의 상대적 빈곤 탓일 것이다.


어쨌든 문제의 천하전여총도는 공개와 동시에 뉴질랜드의 와이카토 대학에 분석이 의뢰되었다. 분석결과는 뒤에서 살피기로 하고, 여기선 일단 다음의 내용으로 논의를 시작하자.


이제까지 보았듯이 독자들은 천하전여총도(1763년)에 나타나는 남극대륙과 ‘캘리포니아 섬’이란 특징이 공교롭게도 조선의 두 지도, 지구전후도(1834년)와 곤여전도(1860년)에도 나타남을 알았을 것이다.


만약 천하전여총도가 실제로 1763년의 것이라 밝혀진다면, 이 지도들 중에서 시간적으로 가장 앞선 시기의 지도이자, 두 특징이 담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지도가 된다. 그렇다면 이 지도들을 그보다 앞선 시기의 지도들과 비교해 보자. 아래는 앞장에서 다룬 4지도 중의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1602년)와 기울리오 알레니의 만국전도(1623년)이다.

                    ▲ 1602년 제작된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 [자료사진 - 오길순]  

                     ▲ 1623년 제작된 기울리오 알레니의 만국전도. [자료사진 - 오길순]  

 

알다시피 위 지도들은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제작한 지도들이다. 그런데 위 지도들엔 (당연하게도) 남극대륙 및 호주대륙이 미지의 영역으로 나타난 반면, 캘리포니아 반도의 실제 정보가 담겨 있다.

즉 캘리포니아 일대의 실제 정보가 (당시 유럽의 일반적인 지도보다도 더) 이른 시기부터 동양에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이다.


더하여 4지도의 나머지 지도들인 조선의 지도, 천하도지도(1770년)와 ‘하백원의 만국전도’(1821년)는 이 지도들의 복사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 내용이 흡사하다. 그러므로 이들 4지도가 17C 이후의 동양의 일반적인 세계지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만약 천하전여총도가 후대의 위작이라고 간주해 보자. 위작자는 당연히 위 지도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위작자는 왜 위 지도에서 부정된 ‘캘리포니아 섬’을 차용했으며, 나아가 콜럼버스 시대 이전인 1418년의 원본 지도(천하제번식공도)를 운운했을까? 그것은 스스로 위작임을 드러내는 꼴이 아닌가? 더하여 원본지도에다, 조정에 바쳤음을 의미하는 공도貢圖란 이름을 붙여서 말이다.


한편으로 지구전후도의 제작자인 최한기, 김정호와, 곤여전도의 중간重刊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의문이 생긴다. 왜 그들은 당시 신정보이자, 이미 일반화된 정보를 외면한 채 굳이 그들의 지도상에 ‘캘리포니아 섬’을 택했을까?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당대 실학의 거두이자, 부호였던 최한기의 서고, 태연재泰然齋와 기화당氣和堂엔 중국, 일본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의 각종 진귀한 물건들로 넘쳐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위 지도들 이외의 여타 동서양의 신 지도들도 접했을 것이다.


위의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필자가 가질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논리는, 천하전여총도가 스스로 알리고 있듯이, 실제 그 지도가 1418년 제작의 천하제번식공도의 모사본이란 것이다. 아울러 최한기와 김정호가 천하전여총도와 그 기원을 같이하는 모종의 지도를 입수하여 그것을 더 신뢰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판 곤여전도의 모본이라 알려진 1856년 광동판 곤여전도 역시 같은 경우일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논리이자, 가설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몫이다. 자, 이제 천하전여총도에 대한 논의의 마지막으로, 필자가 이제까지 언급을 미뤄온 지도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드러내 보자. 이 특징이야말로 필자가 이 지도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이유의 핵심이 된다.


이제 독자들은 눈길을 아래의 천하전여총도로 향하여, 지도의 중앙에 남북으로 그어진 수직선이 어디를 지나는지 확인해 보길 바란다.

▲ 2006년 1월 17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 의해 런던에서 공개된 1763년 제작의 세계전도 '천하전여총도'. 한반도가 중심에 놓여있고 지도상엔 1418년에 제작된 '천하제번식공도'를 필사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순간 독자들의 눈이 커질 것이다. 놀랍게도 중앙 수직선이 한반도를 관통하고 있음이 아닌가? 앞서의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나, 알레니의 만국전도를 보라. 그 지도들의 중심 경선은 그저 태평양 가운데를 지나, 각자 베링해 양안의 육지로 이어질 뿐이다. 중심 경선과 한반도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천하전여총도의 중앙에 한반도가 놓여져 있다니?


한반도를 지나는 그 수직선의 위아래로 눈길을 따라가 보라. 그 선은 접었던 흔적이라 보기엔 선의 굵기가 어울리지 않게 가늘다.


독자들 중의 일부는, 그렇다고 해서 이 선이 한반도가 지도상의 중심임을 나타낸다고 보기엔 무리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필자의 처음 생각도 그랬다. 그러나 이 지도가 1418년 지도의 모사본이라고 밝혀진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최종 판단이다.


이 수직선을 단지 우연이라고 하기엔, 1418년 당시의 중국적 사유방식이나, 가치관, 세계관에 의해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지도가 되고 만다. 독자들은 뒷장에서 (이 글의 다른 주제에서 다룰) 대명혼일도 같은 지도를 통해, 당시 명나라 지도의 특징들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인데, 앞서 언급한 직방세계관으로 볼 때 당연 지도의 중심은 중국, 그것도 당시의 명나라 도읍지인 오늘날의 남경이나, 새 도읍지로 한창 건설공사 중이던 오늘날의 북경이어야 마땅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이 수직선은 한반도가 중심임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어진 선이다. 즉 한반도자오선을 강조하는 일종의 지도상의 경선인 것이다.


독자들의 판단은 어떠한가?


보다시피 이 지도는 두 개의 큰 원을 일부 겹친 형태로 하여 그 안에 세계를 담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의 수직선이, 두개의 원이 맞닿는 아래위의 ∨와 ∧, 두 모서리를 잇는 가상의 수직선에서 약간 어긋남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놓고 필자는 한반도 상上의 수직선에 대해 두 가지 경우를 추론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이 수직선이 지도의 모본인 1418년의 천하제번식공도에 실제 그어져 있었다는 것, 또 하나는, 만약 그렇지 않다면 1763년 모사본의 제작과정에서 제작자의 눈에 한반도의 위치가 모본과 달리 지도의 중앙에서 약간 비켜나는 것처럼 보이자, 제작자가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 특별히 그은 선이라고 말이다. 필자로선 그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만약 독자들마저 필자와 의견이 같다면, 우리는 위 수직선을 지도상의 한반도자오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지도의 진위여부에 따라 두 가지 궁금증을 가질 것이다. 즉 1418년 모본 지도의 존재가 진실이라면 대체 그 지도제작자가 누구인가라는 것과, 이와 달리 이 지도가 후대의 위작이라면 대체 그 위작자는 무슨 의도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우리로 하여금 위작의 심증을 더 하게 하는 것인가를 말이다.


자, 이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천하전여총도에 대한 분석을 마치기로 하고, 이제 그것을 둘러싼 국제적 논쟁과, 뉴질랜드 와이카토 대학의 분석결과에 대해 알아보자.


분석결과가 나오기 이전까지 논쟁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1763년이란 제작연대에 있었다. 즉 지도가 실제 1763년의 것임이 확인된다면 당연히 1418년의 원본지도는 인정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경우의 비유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만약 한국인의 누군가가 현재까지 확실치 않은 화성이나, 여타 태양계 행성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들을 통합하여 최대치의 추정지도를 작성한다고 하자. 그는 어떤 엇갈리는 정보를 판단하는데 있어 더 오래된 정보를 취하는가 하면, 어떤 부분에선 일반이 쉽게 알 수 없거나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과감히 취하여 마침내 지도를 완성한다. 그런데 이 한국인은 엉뚱하게도 지도상에다, 이 지도가 (인류가 지구 밖의 행성 탐사에 나서기 전인) 20C 초의 어떤 시점에 작성된 지도의 모사본이라고 써놓는다. 그의 실제 의도는 후세에 이르러 한국인이 최초의 행성탐사에 나섰다는 증거조작을 위해서이다."


"실제로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오래전에 제작되어 아주 낡아버린 지도가 한 장 있는데 아무개는 그 지도가 보관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지도를 정성들여 모사한 뒤 모사한 지도에 그 유래를 밝힌다."


독자들은 위에 예에서 어느 쪽이 현실적이라 생각하는가? 불문가지, 두 번째일 것이다. 더하여 첫 번째의 예가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그런 한국인이 있다면 그는 사기꾼이기 이전에, 거의 정신병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논쟁의 초점은 1763년에 맞춰져 있었다.


논쟁의 양상을 들여다보자. 세계 언론의 비상한 관심 속에서도 지도의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주로 미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졌다. 특이하게도 필자에겐 미국을 제외한 유럽과 호주 등의 서방사회가 논쟁의 과정을 관심 있게 지켜볼 뿐, 진위 논쟁에 적극적이지 않는 것처럼 비쳐졌다.


필자의 생각에 서양의 이러한 반응은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는데,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 장에서 다루고자 한다.


어쨌든 진위논쟁에서 대표적 인물은 미국 워싱턴 주 타운샌드 소재 신대륙발견연구소의 구나 톰슨(Gunnar Thompson) 박사와 싱가포르국립대학 동아시아연구소의 게오프 와데(Geoff Wade) 박사라고 할 수 있는데, 전자는 지도가 진실이라는 입장의, 후자는 위작이라는 입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위 톰슨은 인류학자이자, 고지도연구가로서 신대륙 항해에 대한 수수께끼를 다룬 여러 저서를 출간한 인물인데, 그는 최근에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는 명나라 초기 정화 함대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과 세계주항의 가능성을 뛰어넘어, 이미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 시대에 몽골 함대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그런 만큼 그는 천하전여총도를 중세 유럽지도 및 원나라 지도와 비교해 가며 천하전여총도야말로 중세 유럽지도의 기원이었음을 주장했다.


반면 와데는 천하전여총도가 지난 50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이수한 누군가에 의한 위조품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두 개의 원에 세계를 묘사함은 유럽의 전통이며, 또한 ‘캘리포니아 섬’은 17C 유럽의 것이다. 또 중국을 중앙에 둔 (그의 표현) 세계지도는 17C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도에서 나타남을 볼 때, 이 지도는 예수회 지도를 텍스트로 하여 17C 유럽지도를 베낀 것이다.


2. 명나라 시기의 여타의 지도 어디에도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반영하지 못했다.


3. 실제 구형의 지구를 평면에 묘사하려면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데, 당시 중국엔 그런 지식이 없었다.


4. 지도엔 해안선만이 아니라, 내륙의 하천이나 산맥이 그려져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5. 중국이 볼품(원문엔 Poor)없게 묘사되어 있다. 당시의 중국인 지도제작자가 왜 자신의 나라를 그렇게 초라하게 묘사했는가?


위의 양 입장은 완전히 상반되는 내용이다. 한쪽은 유럽의 지도가 그것(천하전여총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유럽지도의 모사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 필자가 확인한 바, 양측 어느 쪽의 주장에도, 또 그 내용에도 지도의 중심으로서의 한반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지도가 위조된 것이라 주장하며 위 와데가 내세운 근거는 필자가 보기엔 동양에 대한 무지의 발현일 뿐이다. 싱가포르 국립대학 동아시아연구소의 책임연구원으로서 말이다. 필자는 다음 장에서 그의 저급한 동양에 대한 인식수준을 15C 조선의 관점에서 규명해 보일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논쟁의 과정에서 2006년 3월 하순, 뉴질랜드 와이카토 대학의 분석결과가 세상에 알려졌다.


방사선 탄소 연대측정 및 질량스펙트럼 분석 방법을 통해 나온 결과는 지도 제작에 사용된 종이와 잉크가 실제 17~18C의 것이란 내용이었다. (종이는 이미 지도의 공개 당시부터 대나무로 만든 종이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 연대가 밝혀진 셈이다.)


이러한 결과는 필자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겐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다양한 해석이 요구되는 문헌학으로서의 역사학이 내린 결과가 아니라, 자연과학이 실증해준 엄연한 과학적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제 천하전여총도는 250여년의 세월을 넘어 역사학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자신을 둘러싼 비밀의 껍질을 누군가가 하나씩 벗겨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지도의 중심, 한반도. 한반도자오선.


과연 누가 무슨 의도로 한반도를 세계의 중심에 세웠을까? 그리고 그의 정체는, 대체 그는 누구일까? 호기심을 묻어두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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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전여총도, 정화선단의 비밀 

2007년 01월 23일 (화) 14:55:22 서현우


<서현우와 함께하는 바다의 한국사 5>

 

 

87년 '북한공작원 김현희'에 의해 공중폭파됐다고 발표된 KAL 858기 실종사건을 다룬 소설 『배후』(창해, 2003)의 작가 서현우. 울산 토박이인 그는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고 민주화운동으로 옥살이를 한 바 있다.


그는 줄곧 진중한 책읽기와 풍부한 여행 경험을 쌓아왔고, 특히 세계사와 한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기성 학계의 정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 위해 발로 뛰는 독특한 탐구의 길을 걸어왔다.


매주 화.금요일에 통일뉴스에 연재하는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는 이같은 그의 각고의 노력의 산물이다. 기존의 주류 사관을 뒤엎는 그의 참신한 반란에 한번 빠져들어가 보도록 하자. /편집자 주


6. 천하전여총도와 정화 선단


우리는 앞장에서 놀라운 사실을 접했다. 문제의 천하전여총도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결과, 지도제작에 사용된 종이와 잉크가 실제 17~18C의 것이며, 또 세계전도로서의 지도의 중심이 바로 한반도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래는 지도상의 세계의 중심, 한반도를 재확인하기 위해 그 부분을 확대해본 것이다.

                                    ▲ 천하전여총도 중심부. [자료사진 - 서현우]  

                                ▲ 천하전여총도 아시아 중심부. [자료사진 - 서현우]  

 

한반도 상上에 ‘고려高麗’란 두 문자가 뚜렷한 가운데, 지도상의 중심을 나타내는 수직선이 지나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고려高麗’란 두 문자는 한반도의 한 가운데에 씌어져 사각형의 테두리로 둘러져 있는데, 수직선은 그것의 세로방향과 정확히 평행하여 그어져 있다. 이로서 우리는 ‘고려高麗’가 먼저 씌어지고 난 뒤에, 수직선이 그것과 겹치지 않도록 주의하여 그어졌음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지도를 제작할 땐 지도에 담을 내용을 정한 후, 우선적으로 지도의 중심을 결정한다. 그 다음에 지도의 전체 내용과 지면의 크기에 따른 비율을 가늠할 것이다.


보다시피 천하전여총도에 나타난 중심은 한반도이다. 게다가 그곳이 중심임을 강조하는 수직선까지 나타나 있다. 분명 수직선은 그 이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1418년의 원본지도에 나타났는지, 아니면 1763년 모사 당시에 원본지도 상의 중심을 재차 강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반도를 중심으로 삼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것은 또한 다분히 의도적이자,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을 전제로 우리는 원본지도제작자의 정체에 대해 유추해볼 수 있다. 즉 원본지도제작자에게 있어 한반도는 그의 정신적 근원이자, 모태란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의 정체성이 지도상의 ‘고려高麗’에 있다는 말이다.


천하전여총도의 원본지도인 1418년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는 ‘공도貢圖’란 이름이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까지의 항해결과에 대한, 보고 형식의 지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본지도제작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바다 및 항해와 관련 있는 인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곤 그가 어떻게 원본지도에 나타난 내용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겠는가? 나아가 그가 항해에 직접 참여한 인물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런데 천하제번식공도天下諸番識貢圖는 명나라 3대 황제인 성조成祖 대에 조정에 바친 지도이다. 성조의 연호인 영락永樂16년이란 지도상의 설명이 그것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면 위 지도제작자는 당시 명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영락제 시기의 유명한 정화鄭和 제독의 남해 대원정이다. 정화의 원정은 1405년에서부터 근 30여 년에 걸친, 역사상 그 유래가 없는 대규모 선단에 의한 7차례의 대항해를 말한다. 지금까지의 역사의 정설은 이 항해의 무대가 인도양 전역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남아시아 연안의 대부분 지역을 포함하여, 동아프리카 해역에까지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이르러서 이 항해가 세계적인 관심사로 대두되었는데, 그 이유의 핵심은 정화 선단의 항해 범위가 기존의 인도양 연안만이 아니라,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 각지와 남극 대륙 등에까지 이른 전지구적 차원의 항해였다는 주장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들은 필자가 보기엔 무시할 수 없는 정황․증거들을 토대로 한 것으로, 만약 사실로 입증된다면 가히 세계역사를 새로 써야 되는 차원의 문제이다. 그것은 정화 선단의 업적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 페르니난도 마젤란 등의 시기보다, 단지 앞선다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상 서양 지리상의 항해가 동양의 성과에 기인한 것이란 결론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다분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천하전여총도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이 지도가 정화 선단의 세계 항해를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더하여 필자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관심은 위 지도제작자와 정화 선단의 관계이다. 한마디로 그는 정화 선단에서 어떤 존재였나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자면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항해의 성과를 담은 지도의 작성을 맡았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 글 전체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겠지만, 앞질러 결론을 내리자면 당시 정화 선단의 항해는 비록 명 조정의 대외정책에 기이한 것이지만, 실제 그러한 항해를 가능케 한 항해술과 조선술 등 항해의 절대적 기반은 위 지도제작자와 같이 당시까지 ‘한반도 정체성’을 지녀온 해상집단이란 사실이다.


필자는 이 글의 전반에 걸쳐 그 사실의 논증은 물론이거니와, 이들 해상세력의 기원에서부터 명멸하기까지의 활동무대를, 또 이들이 서양 지리상의 항해에 미친 자취들을 하나씩 밝힐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사의 해부는 불가피할 것이며, 오늘날 동북공정의 역사적 연원도 접할 것이다.


다시 정화 선단의 항해로 돌아가 보자.


정화 선단의 항해가 최근 세계적 관심사로 부상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계기는 영국의 연구자 개빈 멘지스(Gavin Menzies)에 의해서 비롯되었다. 멘지스는 2001년 영국왕립지리학회의 심포지엄과 그 이듬해 출판하여 일약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저서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서 명나라 영락제 시기의 정화 선단이 유럽에 훨씬 앞선 시기에 세계 곳곳을 항해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위해 무려 14년이란 시간동안 세계 각지의 200여 도서관과 박물관, 또 정화 선단이 발길이 닿았을 곳곳의 현장을 탐방했다.


사실 정화 선단의 세계주항에 대한 주장은 비단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학계 일각에선 1970년대부터 제기된 문제로, 다만 서양의 주류학계에서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멘지스의 주장이 세계적인 조명을 받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그의 특이한 경력 때문이다. 그는 비록 주류학자가 아닌 일개 연구자에 불과하지만, 어느 학자보다 설득력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 즉 그는 영국 해군의 잠수함 함장 출신으로, 세계 곳곳의 바다를 직접 항해한 경험에다, 전 바다에 걸쳐서 계절에 따른 해류의 흐름과 바람의 특성은 물론, 과거의 천문항법, 지도 및 해도의 제작 능력까지 지식을 겸비한 항해에 관한 가히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란 점이다.


그런 그는 중세 유럽의 지도가 정화 선단의 산물이라 주장하며, 각 지도들을 예로 들어, 어느 계절의 어느 시간에 어느 방향으로 항해하여 지도를 작성한 것인지, 또 당시 바다의 상태는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런 배경과 설득력 있는 논리로 인해 그의 주장은 세계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세계 곳곳에서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왔고, ‘내셔널지오그래픽’과 ‘디스커버리’ 등의 TV 채널 등이 앞 다투어 관련 프로를 방영한데다, 할리우드에선 그의 저작물에 대한 영화제작권을 사들이기까지 했다.


필자가 볼 때 멘지스의 저작은 그 내용의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서양인이 그렇듯이 동양과 중국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동양의 성과물은 죄다 중국의 성과로 인식하는 서양 일반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지스가 정화 선단 이전의 동양 지리지식을 설명하면서 지적한 중요한 근거의 하나가 조선의 지도라는 점이다.


그것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란 이름의, 1402년 조선의 개국공신인 이회와 이무, 김사형에 의해 제작되고, 권근의 발문이 씌어진 지도인데 흔히 혼일강리도라 불리고 있다. 아래 지도를 보자.

▲ 1402년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흔히 혼일강리도라 불린다.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모사본 4본이 일본에 남아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엔 4본 중의 일본 교토, 류코쿠 대학 소장본의 모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위 지도는 당시 중국의 직방세계관이 잘 표현되고 있다. 중국과 조선을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시킨 데에 비해, 아프리카나 유럽 등의 상대적 크기가 터무니없이 작다. 또한 인도 반도(대륙)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지도가 지닌 놀라운 점은 멘지스가 주목했듯이 아프리카 대륙의 동서해안과 유럽 일대가 나타나는 지도란 점이다.


지도상의 아프리카를 보라. 비록 위경선의 비율이 어긋나지만 동서해안의 윤곽이 매우 사실적이다. 더하여 지도상엔 아프리카 지명이 35여 곳, 유럽 지명이 100여 곳이나 나타나기까지 한다. 조선 개국 10년 만에 그려진 지도에 아프리카와 유럽에 대한 정보가 이 정도라면 우리로선 당시 조선의 세계인식에 대한 놀라움이자, 중상주의를 표방했던 해양국가 고려를 인식하는 데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지도는 1992년 콜럼버스의 첫 항해 500주년 기념행사에서 각광을 받은 지도이며, 멘지스의 저서에서 아프리카가 묘사된 세계 최초의 지도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멘지스가 말한 ‘세계 최초’는 사실이 아니다. 일전에 멘지스의 연구팀에서 필자에게 혼일강리도에 대해 문의해올 때까지도 멘지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래는 중국 명나라 초기의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1389년)이다.

  ▲ 1389년의 대명혼일도, 세계 최초로 아프리카가 나타나는 지도이다. [자료사진 - 서현우]  

                  ▲ 1389년의 대명혼일도, 세계 최초로 아프리카가 나타나는 지도이다.  

 

위 지도는 얼른 보기엔 앞서의 혼일강리도와 매우 흡사한 것으로, 혼일강리도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지도제작상의 기풍인 직방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상대적 크기 등 세부적으로 볼 땐 혼일강리도완 분명 다른 지도임을 알 수 있다.


어쨌든 필자가 굳이 혼일강리도와 대명혼일도를 한꺼번에 소개한 이유는 이들 지도의 관계 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알리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혼일강리도에 대한 학계 대부분의 설명은 혼일강리도가 대명혼일도를 참조로 제작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혼일강리도에 씌어진 권근의 발문과,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陽村集’엔 원나라 이택민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1330년?)와 승려 청준의 ‘역대제왕혼일강리도’(1328~1392년)를 참조하여, 조선과 일본 부분을 보강하여 작성한 것이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외 어디에도 대명혼일도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럼에도 대명혼일도를 참조했다고 하는 이유는, 필자가 보기에 두 지도의 유사성 때문이라 생각된다.


아쉽게도 위 원나라의 성교광피도와 역대제왕혼일강리도는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의 추정으론, 조선의 혼일강리도와 대명혼일도의 유사성으로 볼 때 아마 위 원나라의 두 지도 및 대명혼일도 모두에 영향을 준 모본이 따로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혼일강리도엔 고려 중기의 문인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언급된 ‘만국삼라와 우리나라가 함께 그려진 화이도華夷圖’, 그리고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 말 나흥유의 ‘고려와 중국이 그려진 지도’ 등에 나타난 축적된 지식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 글의 다른 장에서 거듭 다루어 나가겠지만, 필자는 위 가상의 원나라 모본지도라던가, 고려의 지도들 모두가 실제 천하전여총도의 제작자와 같은 정체성을 지닌 집단의 산물이란 것임을 확신한다. 중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이외의 그러한 지도를 작성할 해상집단은 없기 때문이다.


더하여 위의 인도 대륙 부분이 누락된 혼일강리도와 대명혼일도의 모본지도를 가정한다면 애초에 누군가가 중국지도에다, 아프리카 부분이 따로 그려진 지도를 인도로 오인하곤 두 지도를 함께 이어 작성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장으로 천하전여총도를 주제로 한 1장이 마감된다. 다음 장엔 놀라운 우리 해양사의 자취들을 살펴보겠는데, 이 장에서 고지도 한 종류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이 지도는 ‘천하도’란 이름의 지도인데 같은 종류의 지도가 국내외에 아마 백여 본이 넘게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들 지도는 거의 태반이 조선의 것으로, 조선 중기까지 조선에서 대유행한 우리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 우리의 지도라 할 수 있다.

                                               ▲ 천하도1. [자료사진 - 서현우]  

                                                ▲ 천하도2. [자료사진 - 서현우]  


위 지도엔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가 중심에 놓인 가운데 그 외곽을 하나로 이어진 대륙이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중세의 세계관이 반영된 지도임을 알 수 있는데 문제는 그동안 우리 학계에선 지도에 나타난 외곽의 대륙을 상상의 산물로 보아왔지만, 최근 서양 일각에선 동양이 일찍이 태평양이나 대서양 너머의 대륙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종류의 천하도 하나가 2005년 5월 챨로테 리즈(Charlotte H. Ree's, 女)란 이름의 미국인에 의해 미국의회도서관에 소개되어 강연회를 가진 적이 있다. 강연의 내용은 위에서 말한 그대로이다. 중세 동양이 서양에 앞서 세계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말이다. 리즈가 소개한 지도는 지금은 고인이 된 그녀의 아버지 헨던 해리스(Hendon M. Harris) 박사가 1972년 서울의 한 골동품 상점에서 구입한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현 우리나라의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하도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지도에서 보듯이 우리의 조상들이 일찍부터 아프리카 대륙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그렇고, 또 어떤 근거로 대양 너머의 대륙을 가정하여 지도상에 그려놓았는가에 대해서 더욱 그렇다.


이제 이 장의 마지막으로 천하전여총도에 대한 현재의 상황을 알아보고, 앞장에서 살핀 위작론자인 와데 박사의 15C 동양에 대한 인식의 오류를 드러내어 보자.


천하전여총도에 대해선, 2006년 3월 뉴질랜드 와이카토 대학의 분석결과 공개 이후, 일각에서 1418년의 원본지도의 존재여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고 있긴 하지만, 전반적인 논쟁은 가라앉은 상태이다.


그리고 와데가 말한, 원본지도의 제작 당시에 중국의 어떤 지도에서도 지구가 구형이란 사실을 반영하지 못하며, 구형을 표현할 수 있는 수학적 능력이 없었다는 지적에 대해 당시 조선의 관점에서 논박해 보자.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실록엔, 오늘날 세계에서 당대 최고수준의 수학자이자, 이론천문학자로 평가받는 이순지가 당시 도성인 한양의 위도를 ‘북위 38도 강强’이라고 세종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강强은 거의 근접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서울의 위도가 북위 37.34도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관측 및 계산능력의 한계로 인해 현재의 계산 값과 오차를 보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가 남긴 저서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의 분석을 통해 그 차이가 결코 오차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차이는 칠정산내편은 천구를 365.25도로 나눠 방위를 365.25도, 1도를 100분율로 정한데 비해, 아라비아 과학을 흡수한 칠정산외편은 오늘날과 같이 천구를 360도로 나눠 방위를 360도, 1도를 60분율로 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오늘날의 서울의 위도 값인 37.34도를 365.25도에 적용하여 얻은 계산 값은 37.91이 된다. 바로 이순지가 말한 38도 강强에 이르는 것이다.


또 그는 천구의 주기를 오늘날의 그것에 소수점 이하 6째 자리까지 정확히 일치하는 계산 값을 남기기도 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조선의 과학수준은 서양에 비해 백여 년 이상이나 앞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단지 그런 지도가 현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의 동양과학을 평가절하 할 순 없는 것이다.


필자는 천하전여총도야말로 그에 대한 지도학 상上의 증거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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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 - 1 

2007년 01월 30일 (화) 12:02:33 서현우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6> 

 

 

2장. 해상왕의 세계


1.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


우리는 그동안 육지를 중심으로만 우리 역사를 생각해 왔다. 전 지구적 차원으로 보아도 지표면의 70퍼센트가 바다이며, 그나마 우리역사가 오늘에까지 단절 없이 이어온 무대로서의 한반도 또한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말이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이는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바다엔 수많은 해양종족이 존재하며, 수많은 민족이 바다를 무대로 부침을 반복해왔다. 우리 역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니, 실상 우리 민족은 자연조건에서만이 아니라, 바다를 육지 이상의 활동무대로 삼아온 바다의 민족이었다.


이제부터 독자들과 더불어 우리 조상들의 바다를 찾아 머나먼 항해를 시작하자.


1410년대 중순, 이베리아 반도.


700여 년 지속된 아랍(무어인)의 통치가 황혼에 접어든지 오래, 이베리아 반도 전역엔 폭풍전야의 긴장 국면이 지속되고 있었다. 반도 남단의 그라나다에 간신히 버티고 앉은 마지막 사라센 왕국 나스르 왕조를 한 축으로 하고, 이에 대항하여 이교도 왕조를 몰아내려는 카스티야와 아르곤의 두 왕국 및 대서양 연안에서 국력강화에 고군분투하는 포르투갈 왕국 등의 기독교 세력이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한 형세였다. 카스티야와 아르곤 사이에 끼여 명맥 유지에 급급한 바스크인의 나바라 왕국은 세력균형에 큰 의미가 없었다.

                      ▲ 15C 초.중반 통일 직전의 이베리아 반도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그즈음 한 무리의 이방인들이 이베리아 반도 남단에 나타났다. 이방인들은 반도의 주민들이 여태 본 적이 없는 낯선 인종들이었다. 그들은 무어인도, 베르베르인도, 니그로도, 투르크인도, 페르시아인도 아니었다. 단지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에다, 찌들대로 찌든 초췌한 모습에도 형형한 눈빛과 구리 빛 얼굴이 바다의 용사임을 알리고 있었다.


저마다 말하길, 말로만 듣던 키타이인이라 하기도 하고, 인디언이라 하기도 하고, 또 지팡구인이라 하기도 했지만, 정작 그들을 안내해온 무어인은 그들을 신라인이라 했다.


“신라, 신라가 어디 있지?”

이구동성 궁금증을 나타내자, 한 노인이 나섰다.

“신라는 동방에 있는 황금이 넘치는 나라요.”

노인은 학자풍의 무어인이었다.


이방인들은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서 온 뱃사람들이었다. 아랍세계에선 여전히 신라인으로 불리고 있는 이들은 일찍이 대양을 누벼온 백제-신라의 후예들이자, 백제의 패망 이후, 중국대륙 동안을 거점으로 황해-동중국해의 동아지중해와 인도양을 넘나들던 해상왕들이었다.


그런 이들은 원명元明 교체기의 20여 년 해란과 명 제국의 해금정책으로 인해 대륙을 탈출한 50여만 해이海夷들의 일부로서 동남아 파림빙(巴林憑-팔렘방)과 인도 고리(古里-캘리컷), 아라비아의 자비드(예멘의 수도)를 전전하다, 유라시아의 서쪽 끝까지 흘러든 것이었다.


이들은 강수(綱首-선장), 소공(梳工-키잡이), 도장(都匠-기사장), 선공(船工-목공), 단공(鍛工-대장장이), 번장(番匠-도목공), 암해자(暗海者-항해사) 등으로 뭉친 해상결사의 일원이기도 했다.


머나먼 타향에 이른 이방인들은 곧장 낙담하고 만다. 나스르 왕조의 수도 그라나다에 몰아닥친 정치적 혼란 때문이었다. 기독교 세력에 의한 왕조 존망의 위기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술탄 유스프3세가 죽자, 술탄 계승을 둘러싼 끊임없는 궁전암투에 접어든 것이다.


아랍계 무어인 왕국에선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인도양 연안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명나라 대선단(정화 선단)이 인도양 제해권을 장악한 이상, 명 조정에 반기를 들었던 그들로선 인도양에서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했다. 인도의 고리古里(캘리컷)에서 접한 소문도 있었다. 함께 중국대륙을 탈출한 후 파림빙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진조의陳祖義가 명나라로 끌려갔다는 내용이었다. 진조의는 필경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논의 끝에 이방인들은 무어인의 왕국을 벗어나, 기독교 진영으로 건너가는 모험을 감행한다.


모험은 기대 이상이었다. 기독교 진영에선 가는 곳마다 이방인들을 환대했다. 이방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바다의 얘기는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방인들이 들려주는 바깥세계는 온통 놀랍고 흥미로운 것으로 가득했다. 오로지 지중해 세계에다, 간혹 바람에 실려 오는 인도와 기타이의 몇 가닥 편린만이 세상의 전부이던 그들에게 동방제국諸國과 넓고 넓은 바다의 얘기들은 듣고 또 들어도 지루한 줄 몰랐다.


이방인들이 보여준 세련된 나침반(신라침반), 항해용 물시계(동호銅壺) 등의 물건은 그들보다 우수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암해도와 양갱(洋更-항법서)만은 비밀로 취급했다. 그것은 그들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신라, 신라! 이방인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가는 곳마다 인파로 넘쳐나고, 주빈의 자리를 차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방인들에게 권력의 손길이 닿았다. 최초의 손길은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코에 의해서였다. 아비스 왕조의 초대 왕인 동 주앙 1세의 셋째 아들로서 역사상 항해왕자로 유명한 그 엔리코 왕자였다.


이로서 조선의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지리지식이 최초로 유럽에 전해졌다. 그러자 포르투갈은 이듬해 대서양의 마데이라 제도에 이어, 몇 년 후 아조레스 제도를 발견하곤 식민정책을 서두른다.


또한 그 와중에 싸그레스 해양학교가 문을 연다. 이로서 동방의 지리지식에 눈 뜬 포르투갈은 아랍세계 각지로 신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정보원을 파견하는 한편,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인도 항로를 개척하기 위한 장기 계획에 착수한다. 당시 지중해 중개항로는 오스만투르크의 발흥으로 인해 차단당해 있었다. 어쨌든 포르투갈의 이러한 노력은 아라비아를 통해 중국 정화 선단의 항해 성과를 일부 흡수하기까지 한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베리아 반도의 신라인들은 각각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갈리시아 등에 정착하고, 누군가는 프랑스 발로아 왕조의 사절인 짠 니코에 의해 프랑스로 건너가는가 하면, 이탈리아 및 지중해의 여러 나라에까지 그 흔적을 남긴다.


그러한 와중에 지도학 상에 수수께끼 같은 일이 일어난다. 1400년에 이르기까지 고작 지중해 중심의 세칭 T-O지도 수준에 머물던 것이, 갑작스레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을 담은 지도가 제작되는가 하면,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카리브 해의 섬들과, 또 그린란드가 뚜렷이 묘사된 지도가 출현하기도 한다.


이어 세기 말에 이르자, 포르투갈의 궁전도서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마틴 베하임(독일)에 의해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전모가 담긴 최초의 지구의가 제작된다. 선박에 있어선 기존의 갤리선과 캐러벨선 수준을 뛰어넘는 카략선이 건조되고 침경항법이 등장한다.


1469년 아르곤의 페르디난드 왕자와의 결혼동맹을 발판으로, 1479년 카스티야-아르곤 통합 국왕에 오른 이사벨라 여왕은 1492년 1월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국왕 아부 압달라 무아마드 12세(보아브딜)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어 2월에 스페인의 통일을 완성한다.


이사벨라 여왕은 통일과 동시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당시 야전 사령부 겸 임시 궁전이던 코르도바의 알 카사르로 불러 미뤄왔던 서인도로의 항해를 승인한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1492년 8월 항해 준비를 마친 콜럼버스는 3 대의 선박과 90여 명의 승무원으로 세비야의 팔로스 항을 출항하여 역사적인 신대륙 항해에 나선다.


신라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 뿌린 씨앗은 두어 세대가 지난 뒤, 그렇게 열매를 맺는다. 그렇지만 항해의 주역은 유럽인이었고, 그 무렵 신라인들은 이미 그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위의 내용은 필자의 상상이자, 가설이다. 아마 독자들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로선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는 것인데, 지금부터 그 근거를 하나씩 드러내어 역사의 개연성을 음미해 보자.


먼저 15~16C 중세 유럽에서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지도상의 수수께끼를 들 수 있다. 우리는 1장에서 이미 남극대륙의 존재가 나타나는 16C 지도를 확인한 바 있다. 그렇기에 여기선 논외로 하고, 15C 초부터 나타난 여타 지도의 수수께끼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15C 이전의 시기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세칭 T-O지도가 그 주류를 이룬 가운데, 14C 후반에 이르러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지도상의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아래는 T-O 지도의 기본 구도와, 14C 후반의 한 지도이다.

▲ T-O 지도의 기본구도, 동서방향을 수직 축으로 하여 구성한 지도인데, T자의 수평선은 소아시아를, 수직선은 지중해를 묘사하고 있다. T자를 이루는 두 선이 교차하는 부분이 예루살렘이고, O자는 구형을 나타낸다. [자료사진 - 서현우]  

▲ 1375년 아브라함 크레스쿠 지도. 당시 알려진 세계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자료사진 - 서현우]  

  

위와 같은 수준의 지도제작에서, 15C에 접어들자 이해하기 힘들 만큼의 비약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한 변화를 아래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 1424년 주아네 피치가노 해도. 붉은 색의 부분이 오늘날의 푸에르토리코 등이 위치한 카리브 해의 안틸레스 제도라고 한다. [자료사진 - 서현우]  

 

▲ 1440년 빈 랜드 지도. 그린란드 섬의 윤곽이 오늘날의 지도와 거의 흡사하다. [자료사진 - 서현우]  

 

  

▲ 1459년 프라 마우로 지도. 남반구를 위로 하여 그려진 지도로 당시까지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남단이 나타난다. [자료사진 - 서현우]  

 

우리는 위 지도들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정설에 대해 심한 혼란을 느낀다. 콜럼버스의 첫 항해(1492년) 이전의 지도에 카리브 해의 안틸레스 제도라니 말이다. 또 그린란드를 보라. 실제의 지형 윤곽이 거의 생생히 담겨 있다. 그것은 비록 최근에 와서 인정되기 시작한 콜럼버스 이전 시기, 북유럽의 바이킹 족에 의해 그린란드가 알려져 있었다손 치더라도 당시 바이킹 족의 성과를 훨씬 뛰어넘는 지도가 아닐 수 없다. 확실히 현재까지 알려진 15C 유럽의 보편적 지리지식을 뛰어넘는데다, 무엇보다도 바이킹 족의 항해 영역은 그린란드 섬의 남쪽 일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하여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프라 마우로 지도에 나타난 아프리카 대륙의 전모와, 동시에 포르투갈이 보인 아프리카 남단 항로에 대한 집요함이다. 이 지도가 나오기까지의 14C 유럽은 앞서 살펴본 대로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 대해선 완전히 무지했다. 그리고 실제 희망봉을 발견한 때는 그로부터 30여 년 뒤인 1488년으로,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에 의해서였다.


또한 프라 마우로 지도를 직접 확인한 영국의 연구가 개빈 멘지스에 의하면 지도상엔 중세 중국의 선박인 정크선과, 아프리카 남부에서만 서식하는 새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사실 중세 지리상의 발견을 낳은 유럽의 초기 탐험가들엔 공통적으로 비밀이 숨어 있다. 여기서 수세기에 걸쳐 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을 몰두하게 만든 마젤란과 콜럼버스의 비밀 하나씩을 소개하겠다. 마젤란의 전기에서 주로 ‘마젤란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과, 콜럼버스의 항해일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때 무명의 보잘것없는 함장 마젤란이 존재의 어두움으로부터 몸을 일으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선언한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통로는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고 있다. 나에게 함대를 달라. 그러면 내가 그 통로를 가르쳐 주고 동에서 서로 지구를 일주해 보이겠다.”

그는 포르투갈 왕궁의 비밀서고인 테소라리아에서 훔쳐본 극비지도를 떠올리며 확신하듯 말했다.


‘내가 본 지도에 의하면 그 섬이 이쯤에 존재하고 있었다.' -항해 도중 나타나지 않는 육지에 초조함을 달래며. 도대체 마젤란과 콜럼버스가 본 지도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위대한 선행자는 대체 누구이며, 누구에 의해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지도들이 마젤란과 콜럼버스에 전해졌단 말인가?


여기에다 16C의 포르투갈 역사가 안토니오 갈바웅(Antonio Galvao, ~1557)의 언급과, 지난 2004.5.7자 CBS노컷뉴스 기사를 덧붙여 보자.


1428년 포르투갈 왕의 장자인 동 페드루가… 로마와 베네치아까지 여행했다. 그곳에서 그는 세계 곳곳과 지구의 모양이 그려진 세계지도를 한 장 챙겼다. 마젤란 해협은 ‘용의 꼬리’라 불렸으며….


지난 1539년 발간된 해양지도가 21세기 인공위성을 이용, 촬영한 지구표면의 온도를 나타내는 지도와 모양이 일치해 학자들이 놀라고 있다.… 미국 제임스포드 벨 박물관이 소장중인 북대서양 지도인 카르타 마리나(해양지도)를 조사하던 로드아일랜드 대학의 톰 로스비 교수는… 항로에는 용이 불을 뿜으며 선박을 덮치는 것으로 묘사한데 주목했다.… 용이 선박을 공격하는 것은 이 항로가 대단히 험해 해난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것으로 해석했다.


필자의 생각으론 용이라면 동양적 사고의 산물이지, 결코 유럽의 것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모본 지도를 모사한 것이거나, 그 영향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여겨져 중세 유럽지도의 기원을 짐작하게 한다.

개빈 멘지스는 이러한 15C 유럽 지도상의 갑작스런 변화를 외부의 요인, 즉 정화 선단의 항해 성과라고 확신했다. 필자의 판단 역시 그 점에선 별 차이가 없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세계사의 전개에서 정화 선단 외에 안틸레스 제도와 그린란드를 지도에 남길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멘지스는 그의 저서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서 정화 선단의 6차 항해(1421년 출항)에 주목하며, 그 항해야말로 최초의 세계주항이었다고 주장했다.(천하전여총도의 모본인 1418년의 천하제번식공도는 세계주항이 그보다 앞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면 수수께끼의 위 지도들과도 시기적으로 전혀 무리가 없다. (멘지스는 베네치아 상인인 니콜로 다 콘티의 1434년 출판 여행기를 언급하며, 콘티가 인도 캘리컷에서 정화 선단에 승선하여 호주 대륙을 거쳐 중국으로 갔음을 확신했다.)


어쨌든 독자들은 이쯤에서, 그렇다고 해서 스페인의 신라인을 끌어들인 이유가 될 수 있느냐며 의문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앞장에서 본 1402년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혼일강리도)를 기억할 것이다. 그곳엔 희망봉을 지나는 아프리카 동서해안을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원나라 지도와 혼일강리도를 비교한 것이다.

 

             ▲ 원나라 지도와 혼일강리도(1420년 수정본)의 아프리카 부분. [자료사진 - 서현우]  

 

우리는 위 지도를 통해 아프리카 남단의 해안선에 대해 앞장의 대명혼일도보다 100여 년 앞선 동양의 지리지식을 새로이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지도들과 시기적으로 연결되는 시기에 나타난 갑작스런 유럽지도의 변화도 보아왔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정황은 단지 필자가 스페인의 신라인을 들먹인 첫 번째 이유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근거는 이제부터다. 독자들은 아래의 발렌시아 지도에서 Silla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스페인 발렌시아 주州 소재, 발렌시아 시市와 그 인근 지도. 발렌시아 시 남쪽에 Silla가 보인다.(붉은색 테두리는 필자) [자료사진 - 서현우]  

 

위의 지도에서 독자들은 한편으로 놀라면서, 다른 한편으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일단 의문을 던져보자.


현재 스페인엔 위 Silla와 다른 스펠링의 Sila가 각각 카탈루니아 주의 바르셀로나 시 북부인근과, 갈리시아 주 오렌스 시에 존재한다.


필자가 처음으로 Silla와 Sila에 주목한 것은 칠레의 유명한 Silla 천문대에서 비롯되었다. Silla 천문대는 칠레 북부 아타가마 사막의 남쪽 끝 무렵, 안데스 산맥의 지류와 합류하는 지점의 Silla 산에 위치해 있다. 1960년대 유럽 10여 개국이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건설한 뒤 현재까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천문대로 오로라 관측에 있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Silla란 이름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이곳만이 아니라, 컬럼비아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멕시코에도 존재한다. 또한 스펠링이 다른 Sila 또한 몇 군데 존재하는가 하면 심지어 Corea 지명도 존재한다.


주지하다시피 라틴아메리카는 브라질을 제외하곤 스페인어 언어권 지역이다. 그런데 같은 지명이 넓은 분포를 나타낸다는 것은 이 지명이 남아메리카 인디오의 것이 아니라, 스페인어에서 이입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필자는 즉시 스페인의 지명을 뒤지기 시작하다, 결국 위의 Silla와 Sila의 두 지명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중 Silla가 현대 스페인어(국어인 카스텔라노)의 어휘로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다민족국가인 스페인엔 현재 여러 언어가 공존하는데 공용어로서 대표적 언어가 국어인 카스텔라노(카스티야어)와 카탈란(카탈루니아어), 갈레고(갈리시아어) 등인데, 카스텔라노의 Silla 외에 어떤 언어에도 Silla나 Sila, 또 Corea란 어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즉 Sila나 Corea는 오로지 지명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스페인은 8C 초에서 15C 말까지 800여 년 아랍에 의한 피지배의 역사를 안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현대 스페인어엔 아랍의 영향이 많이 배어 있는데 특히 국어인 카스텔라노가 더욱 그러하다. 더불어 아랍의 영향은 지명에까지 영향을 미쳐 수도인 마드리드나, 과달라하라, 그라나다 등이 모두 아랍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심지어 멀리 영국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도 아랍어에서 유래한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 Silla가 스페인의 국어인 카스텔라노에서 어떤 뜻으로 쓰여 지고 있는가를, 또 아랍어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독자들은 그 연관관계를 통해 이들 Silla와 Sila가 갖는 우리 역사 속의 신라新羅와의 관련성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더하여 스페인의 신라인이란 또 다른 근거를 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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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 - 2 

2007년 02월 02일 (금) 12:28:21 서현우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7> 

 

2.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


우리는 지난 장에서 스페인의 지명에 Silla와 Sila가 있음을 알았다. 또 이들 지명이 Corea란 지명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도 존재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알다시피 라틴아메리카는 19C에 접어들기까지 수백 년간 스페인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는데, 이들 지명들은 이 시기에 스페인에서 라틴아메리카로 이입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신대륙에서 수도 없이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의 라틴 아메리카에서만이 아니라, 북 아메리카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으로 나타난다. 독자들은 미국의 뉴욕(New York)이 단지 뉴(New)가 붙은 것일 뿐, 영국의 York지명이 이입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Corea 지명의 경우, 필자가 스페인 지도에서 Corea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필자는 이 지명 역시 분명 스페인에 존재할 것이라 확신한다. 비록 아주 작은 규모의 지명일지라도 말이다.


필자가 확인한 바, Silla, Sila, Corea란 이들 지명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성姓씨로도 존재하고 있었다.


상당수 독자들은 1990년 우리나라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지방의 코레아Corea 성씨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의 알비(Albi) 마을이란 곳에 Corea 성씨를 지닌 22가구 80여 명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우리 언론에선 이들이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의 후예라 간주하여, Corea 씨족의 대표를 한국에 초청하는 등 야단을 떤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후의 유전자 검사 결과, 이들 Corea 성씨와 한국인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드러남으로서 한바탕의 해프닝에 그치고 말았다.


이 Corea 성씨에 대해, 당시 부산대학교 사학과 곽차섭 교수는 이탈리아 남부 지방이 고대 그리스의 영향 하에 있었으므로, 고대 그리스어 ‘코레아스’에서 유래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견해를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달리 Corea 성씨의 기원이 스페인이라 확신한다. 필자의 추측으론 곽차섭 교수가 스페인의 Corea 성씨, 그리고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Corea 지명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탈리아엔 Silla와 Sila의 두 지명도 모두 존재하는데, 그 유래는 이들 지명이 Corea 성씨와 함께 스페인어 언어권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데다, 무엇보다 16C에 이르러 해양대국이자, 세계제국으로 성장한 스페인이 지중해의 여러 도서島嶼 및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한 데서 비롯되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필자는 Silla와, Sila, Corea가 우리 역사속의 신라新羅, 고려高麗와 관련 있다고 판단하는데, 현재까지 연구결과 적어도 Silla와 Sila는 분명히 그렇다고 확신한다.


우선 Silla와 Sila는 발음상으로 신라와 같은 소리를 낸다. 물론 Corea도 예외는 아니다, Corea의 -a는 라틴어에 따르는 일반적 접미사임을 전제할 때, 어디까지나 원음은 Core이다. 그렇다고 단지 발음상에 근거하여 우리 역사와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Silla란 어휘에 대해서 알아보자. 스페인의 국어인 카스텔라노(카스티야어)에서 silla의 뜻은 아래와 같다.


silla: 명사로서, (현대) 의자.

역경, 불행, 불운.

(중세) 여왕 또는 귀빈이 앉던 의자.

동사로서, 놀라게 하다. 감정적으로 쇼크를 주다. 크게 동요시키다.

* (현대 멕시코에서) 의자. 말이나 자전거의 안장.


그 외 sila나 corea에 대한 어휘는 스페인의 어떤 언어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위의 내용만으로 silla가 바다와 관련 있다고 볼 수도 없다. 그래서 필자는 지중해 연안의 여타 언어들에 주목했다.


그러다, 사르디나 섬과 시칠리아 섬에서 사용하는 언어인 에밀리오-로마그놀로어語에서 의미 있는 발견을 하게 되었다. 사르디나 섬과 시칠리아 섬은 현재 이탈리아령領이지만 과거 한동안 스페인의 지배 하에 놓였던 곳인데, 그곳의 언어에서 silla의 뜻은 ‘바다 파’, 속어론 ‘바다 사람’이란 뜻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제 독자들은 앞에서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의 내용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확인한 sila의 뜻으로 다시 한번 앞의 내용을 읽어보길 바란다.


그럼 여기선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랍어로 시선을 돌려보자. 스페인의 Silla,와 Sila 지명들이 우리의 신라와 관련 있다면, 틀림없이 아랍의 언어나 지명들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로서 아랍은 한반도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지리적 위치에다, 또 중세 시기까지 신라에 대한 많은 문헌을 남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랜 시기에 걸쳐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는 동안 아랍문화는 스페인문화의 젖줄 역할을 했던 것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놀랍게도 필자의 추정은 현실로 나타났다. 비록 자신의 고유한 문자인 아랍문자로 표기하고 있지만, 우리의 신라와 발음이 같은 어휘가 언어와 지명, 모두에 나타난 것이다.


아래는 아랍에미리트 연방의 영문판 지도이다.

     

 

▲ UAE 지도, 왼쪽 끝에 Sila가 보인다. Sila는 현재 작은 항구로서, Sila 반도에 위치해 있다. 빨간 테두리 표시는 필자. [자료사진 - 서현우]  

 

위에서 보듯이 항구로서 Sila가 나타난다. 아랍 에미리트 두바이의 지인이 필자에게 알려온 바에 의하면, 이것 외에도 sila나 silla, silah로 발음되는 지명이 오만과 사우디아라비아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하여, 이들의 아랍어 뜻은 ‘~을 취하다,’와 ‘상품, 물건’이란 것이다. 필자로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아랍 표준어인지, 아랍에미리트에서만 쓰는 방언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음)


아래는 신라에 대해 남긴 아랍의 문헌들인데, 여기선 간략히 나열하고 자세한 내용은 다른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슈라이만(Sulaiman)의 ‘중국과 인도 소식’(851년)

알 마소디(Al-Masou야, ?~965)의 ‘황금초원과 보석광’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 820~912)의 ‘제諸도로 및 제諸왕국지’(845년)

알 마끄디시(Al-Maqdisi)의 ‘창세와 역사서’(966년)

알 이드리시(Al-Idrsi, 1100~1166)의 ‘천애횡단을 갈망하는 자의 산책’(1154년)


위의 문헌들의 신라에 대한 공통점은 놀랍게도 신라를 ‘동방의 이상향’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다, 당시 장보고로 상징되는 신라의 해양활동으로 볼 때 위의 Sila항과 ‘상품, 물건’이란 뜻의 아랍어 sila(혹은 silla, silah)는 분명 우리 신라의 자취임에 틀림없다고 보아진다.


더하여 아랍어의 영향을 가득 담고 있다는 스와힐리어語의 sila 또한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스와힐리어는 오늘날의 소말리아에서 탄자니아에 이르는 아프리카 동부에서 사용되고 있는 언어인데, 스와힐리어의 sila에 대한 뜻은 ‘배에 물 퍼내는 사람, 양동이, 물통’ 등이다.

그 언젠가 신라의 선박이 그곳 연안에서 침수된 것인가? 하여튼 그런 상상을 일으키게 하는 뜻이다.


10C 초의 어떤 아랍 문헌엔 극동지역의 터어키계 인간들이 상아와 해구갑 등을 구하기 위해 아프리카 해안을 들락거렸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신라선이 아프리카에까지 이른 것이라 추정되기도 한다. (필자는 신라가 망한 후의 상당한 시간에 걸쳐 극동의 해상활동인을 아랍에선 여전히 신라인이라 불렀다고 본다.)


참고로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엔 Sila, 또는 Sila-란 접두어가 포함된 지명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열거해 보면 스리랑카(3곳), 태국(2곳), 필리핀(6곳), 인도네시아(10여 곳) 등인데, 심지어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도 한곳이 존재한다.


이들 지명에 대해선 이 장에서 필자의 연구결과를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우리 역사와의 관련성은 다음 장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 지명에 이어 이번엔 sila란 어휘를 갖고 있는 여타 언어와 그 뜻을 소개해 본다.


필리핀: (7개 언어 중의 국어인 타갈로그어를 포함한 4개 언어에서) 그들, 그 사람들.

말레이시아어: 요청, 청구請求.

인도네시아어: 토대, 기반 바탕, 덕목. (힌두어와 관련 있음)

통가어: 역병, 골칫거리.

이누이트 에스키모어: 하늘, 세상을 둘러싼 기운, 기후.


통가어의 뜻은 마치 18C에 백인이 남태평양에 진출하면서 가져간 바이러스에 아무런 면역이 없던 남태평양 주민들의 상황을 말하는 것 같다.


이제 독자들은 필자가 앞장에서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이라 한 데에 대해 일정 정도나마 수긍할 것이다. 더하여 그곳의 Silla나 Sila가 우리역사의 신라와 관련 있다면 Corea 역시 분명 그럴 것이다.


처음에 필자는 스페인의 Silla(혹은 Sila) 지명들이 거저 아랍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가정했다. 즉 우리역사의 ‘신라’가 아랍을 거쳐 스페인에 스며든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그러던 필자가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이라고, 즉 신라인이 스페인에 직접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을 달리한 이유는 결정적인 근거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자연과학의 결론이었다. 자연과학은 실증의 학문이다. 오늘날의 역사학은 방계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그 지평을 한층 넓혀왔다. 고작 문헌의 해석에 맴돌던 역사학이 이제 고고학뿐만 아니라, 유전학, 고천문학, 고기상학 등의 도움으로 실증 범위를 한층 확장해온 것이다.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은 바로 이러한 자연과학에서 유전학의 성과에 의해 귀결된 것이다. 앞서 이탈리아 알비 마을의 Corea 성씨가 우리 한국인과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힌 것도 유전학이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유전학의 어떤 내용에 의해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이 성립될 수 있었는가?


바로 면역유전학의 ‘인간백혈구 항원유전자(HLA B-59)’의 분석에 기인한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되는 인간유전자는 약 2~3만 개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중에서 오늘날의 한국인을 결정짓는 가장 특징적 유전자가 바로 위 HLA B-59인 것이다. 이 유전자의 분포 지역은 한반도와 남만주(중국 북부 일부), 일본, 중국남부 일대, 인도 수라스트란 반도(구자라트 주州) 등인데, 특이한 점은 이 외에 스페인과 북미대륙에 극소수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아프리카인이나, 유럽 백인에서는 이 유전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유럽인 중에 유독 스페인 사람에게서만 극소수로 나타난다는 것이다.(2003.12.2 제13차 국제학술 및 워크샵의 최종 updated 자료)


과학이 가져다준 이러한 결과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이란 필자의 결론은 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Silla와 Sila 지명(그리고 Corea)에다, 아프리카 동서해안선이 나타난 동양의 고지도,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수수께끼의 유럽 고지도, 콜럼버스와 마젤란의 숨겨진 비밀, 그리고 HLA B-59 등의 여러 정황과 증거들이야말로 그러한 결과 외에 달리 생각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 필자는 확신한다.


덧붙여 이탈리아 알비 마을의 Corea씨 혈족들은 비록 혈연적으로 한반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라도 과거 어느 시점에서 ‘스페인의 신라인 혹은 고려인’과 문화적 유전자를 공유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사실 역사의 계승은 혈연만이 아니라, 문화적 요소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집단의 정체성, 정신적 지향성, 사유체계 등이 그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여러 민족이 정치적으로 하나의 집단을 이룬 뒤 혈연, 문화적으로 용해되어 하나의 민족으로 발전하는가 하면, 또 그 역으로 하나의 민족이 어느 시점에서 분화되어 오랜 시기가 지나 각기 정체성을 뚜렷이 달리함으로서 다른 민족으로 발전해간 예를 우리는 역사에서 허다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장에선 우리 해양사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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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의 세계 -1 

2007년 02월 13일 (화) 17:39:37 서현우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8>

 

 

1.‘라’의 세계


우리 역사의 고대국가 신라新羅. 그 신라를 실제 발음으론 ‘실라’라고 발음한다. 우리는 앞장에서 신라와 같은 발음을 지닌 Silla나 Sila(또는 Silah)가 동남아시아와 아라비아, 지중해 연안에서 지명으로서, 또 언어의 어휘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의 사서들엔 신라와 같이 ‘~라羅’로 끝나는 옛 지명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신라 외에 삼국의 사서들에 나타나는 ‘~라’ 지명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다라多羅, 탁라托羅, 탐라耽羅, 담라憺羅, 섭라涉羅, 가라加羅, 아라阿羅, 안라安羅, 아슬라阿瑟羅, 보라保羅, 발라發羅, 말라末羅. 담모라聃牟羅, 탐부라耽浮蘿, 섬라暹羅 등’


위 지명들 중 탁라, 탐라, 담라, 섭라, 담모라, 탐부라는 오늘날 학계의 정설로서 모두 제주도를 일컫는 것이라 하지만, 탐라 외엔 정확히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다. 여러 이견이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섭라涉羅는 현재 오키나와 섬을 포함하는 류쿠 열도라 보기도 하고, 또 원광대학교 소진철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담모라聃牟羅는 지금의 타이완 섬으로, 당시 백제의 속국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정확한 위치 비정이 어려운 것은 사료의 부족과 함께, 위 지명들이 조선시대에선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껏 제주도를 탐라라 병행하여 부른 것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런데 위 지명들 중 맨 마지막의 섬라暹羅는 논란의 여지없이 오늘날의 태국을 뜻한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이유는 섬라가 조선왕조실록에 수차례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까지 태국을 일컫는 지명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처음에 한국인 대부분의 인식이 그렇듯이 섬라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지명이라 보았다. 그러다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의문은 바로 섬라의 ‘라羅’ 지명에서였다. 비록 섬라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지명일지 모른다 하더라도, ‘라’는 위에서 보았듯이 우리 동이계 지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명의 유래가 중국이 아니라, 우리로부터 비롯되었는 게 아닌가?


필자는 지금까지 3차례에 걸쳐 태국을 다녀오면서, 태국의 지명들에 ‘~부리’란 지명이 허다함을 알고 있다. 칸차나부리란 도시의 이름도 그렇고, 펫차부리란 방콕의 거리 이름도 그렇다. 현재 태국엔 ‘~부리’란 지명이 무수히 많다.


지난해에 타계한 문화탐험가이자, 태국 치앙라이 주립대학 교수를 역임한 김병호 선생은 태국의 ‘부리’가 백제의 지명과 연관 있음을 주장한 바 있다. 백제의 부리 지명은 도읍지 소부리所夫里(사비)를 비롯, 고사부리古沙夫里, 미동부리未冬夫里, 모량부리牟陽夫里 등이 있다.


김병호 선생은 백제의 ‘부리’가 신라에선 ‘벌’로 변화되었다며, 그 예로 서라벌을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견해 중 놀라운 것은 이 ‘부리’, ‘벌’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과 터키의 이스탄불에서의 ‘불’과도 언어적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 데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탄불의 옛 이름인 콘스탄티노플과 영국의 리버풀 등의 ‘플’이나 ‘풀’ 등과도 연결된다고 본 점이다.


필자에게 김병호 선생의 견해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우리문화가 중국보다 오히려 그리스나, 페르시아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필자는 단재 선생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나 페르시아는 우리와 인종적으로부터 다르다는 단순한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던 필자는 삼국유사에서 중근동 아라비아 세계의 언어학적 증거를 발견하곤, 단재 선생의 선견지명에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삼국유사의 언어학적 증거는 바로 신라향가 처용가에 보이는 ‘라후덕羅候德’이란 글귀이다. 라후덕의 ‘라羅’는 태양(햇님)을, 후候는 제후나, 후작에서와 같은 존칭의 뜻을, 덕德은 은혜나, 덕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뜻은 ‘태양의 은덕’이란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태양을 뜻하는 ‘라羅’이다.


독자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신을 ‘라Ra’라고 일컬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다. 중근동 지방에서 ‘라’는 태양신뿐만 아니라, 신성하거나, 존귀함을 뜻하기도 한다.

이슬람교의 유일신 ‘알라(Al-Rah)'를 보자. Al은 단지 정관사일 뿐, 신을 뜻하는 말은 바로 Rah이다. 또 이슬람 역법을 ’히쥬라‘라 칭하는 것이나, 성지인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말인 ’키브라‘의 ’라‘도 모두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더하여 ’라‘는 대지大地라는 뜻도 갖고 있어, 우리와 ’~라‘와 같이 여러 지명에서 쓰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사하라 사막이라 부르는 ‘사하라The Sahara’를 예로 들어 보자. 사하라는 영어식 발음이고, 원음은 첫음절에 엑센트가 놓인 ‘사라Sahra’인데 사막, 또는 불모지, 황무지란 뜻이다. 더하여 중세 유럽인들이 아라비아의 여러 나라들을 통칭하여 사라센 제국諸國이라 했을 때의 사라센은 바로 사막의 사람들을 뜻했다. 이 이외에도 이라크 최대의 항구도시 ‘바스라’나, 이슬람교의 한 종파인 시아파의 성지로 유명한 ‘카르바라’, 몽골제국 일칸국의 수도였던 아제르바이잔의 ‘마가라’ 등 오늘날 중근동 지방엔 무수한 ‘라’ 지명이 산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중근동의 ‘라’가 태양을 뜻함과 동시에 대지를 뜻하는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니? 그것은 우리 고대사에 보이는 무수한 ‘~라’와 처용가에서 나타나는 ‘라후덕’의 ‘라’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근동과 한반도가 고대의 어느 시기에 관련성을 맺고 있었다는 말인가? 더불어 처용가로 유명한 처용은 학계에서조차 아라비아나, 페르시아 출신이라 추정하고 있는 인물이다. 필자는 이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세계에서 ‘라’ 관련 지명을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무수한 ‘~라’들이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발견한 곳은 남부 인도였다. 남부 인도의 고대국가 ‘촐라’와 ‘체라’가 필자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각기 인도 반도 남쪽 끝의 동과 서의 해안에 나란히 자리잡은 촐라국과 체라국은 모두 해양국가였다. 이들 국가는 기원 전 2~3C의 어느 시기부터 기원후 10C가 넘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왕국을 유지했는데, 특히 촐라국은 한때 강력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멀리 중근동에서부터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인도양의 광활한 지역에 걸쳐 해상무역권을 장악한 국가였다. 촐라는 자신들을 ‘태양국’이라 칭했는데, 이 사실에서 우리는 촐라의 ‘라’가 인도 지역 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촐라와 체라 왕국 지도. [자료사진-서현우]  

 

위 지도상의 촐라와 체라가 위치한 인도 남부는 오늘날 주로 타밀족의 분포지역이다. 타밀족은 그 옛날의 드라비다 족에서 갈라진 일파인데, 드라비다 족은 오늘날 인도인의 주류를 이루는 아리아인이 인도 대륙에 진출하기 전, 인도의 선주민으로서 인더스와 하라파의 위대한 문명의 주인공들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약 5천만 명에 육박하는 타밀족 중의 일부가 스리랑카에 2백6십여만 명이 존재한다. 그곳의 타밀족은 소수민족으로 스리랑카 사회의 주류인 아리안계 싱할리족에 대항하여 분리운동을 전개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유명한 게릴라 조직 타밀호랑이가 그들이다.


필자가 여기서 타밀족을 자세히 소개하는 이유는 최근 대두되기 시작한 타밀문화와 우리문화의 상호관련성 때문이다.


일찍부터 인도문화와 우리문화의 관련성이 제기되어 왔지만 그동안 크게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그 중 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다어와의 친연성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구한 말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로, 그는 자신의 저작 '조선어와 인도 드리비다어의 비교문법’(1905)과 ‘The passing of Korea’(1906)에서 40여개의 어휘를 비교하여 그 유사성을 지적하면서, 한국어와 만주어의 유사성은 한때 가까웠지만, 한국어와 드리비다어는 아직도 친족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대 드라비다어는 현재 4종류의 언어로 파생되어 발전해 왔는데, 타밀어, 말라얄람어, 텔루구어, 칸나다어가 그것이다. 이 중의 타밀어와 텔루구어는 과거 촐라국의 언어로서 오늘날 인도 타밀나두주州에서, 말라얄람어는 체라국의 언어로서 오늘날 케랄라 주州에서 사용되고 있다.


우리와 고대문화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일본에선 1970년대부터 ‘드라비다어와 일본어’ 또는 ‘타밀어와 일본어’ 등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진행되어 일본어와의 유사성을 밝혀왔다. 그런데 아래에서 보듯이 한국어와 타밀어의 관계가 일본어와 타밀어와의 관계보다 훨씬 친연성이 높다.


한국어 타밀어 일본어

엄마 엄마 하하

아빠 아빠 치치

나 나 와따시

너 니 아나따

하나 아나 히토추

둘(두) 두 후타추

셋 셋 미추


한국어: 타밀어:

나는 너와 한국에 왔다. 나누 닝가룸 한국 완돔

나는 그런 것 모른다. 나누 그런 거 모린다.


위의 비교표는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이렇게 놀라운 유사성은 과거 우리 조상들과 타밀인이 상당한 기간 접촉을 했다는 언어학적 증거이다. 이외에 두 언어간엔 유사한 어휘가 셀 수 없이 많지만 여기선 생략하기로 하고, 최근에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내용을 소개해 본다.


아래는 지난해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남아시아 연구센터와 토론토의 타밀인협회, 등이 자료들을 추적한 결과를 근거로 한, ‘신라4대왕 석탈해는 인도인’(뉴스메이커, 2006.8.11)이란 제하의 기사를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석탈해昔脫解: 자신을 “숯과 숯돌을 사용하는 대장장이 집안 출신”이라 함.

성씨 석(Sok): 타밀어로 대장장이란 뜻의 ‘석갈린감(Sokalinggam)'의 줄인 말. 석갈린감이나, 줄임 말의 석 또는 ’석가(Soka)' 등은 현재도 타밀인의 남자 이름으로 남아 있음.


탈해(Talhe): 타밀어로 ‘머리’, ‘우루머리’, ‘꼭대기’를 의미하는 ‘탈에(Tale)'나, ’탈아이(Talai)'와 거의 일치.


단야구鍛冶具: ‘대장간 도구’란 뜻인데, 당시 타밀어의 ‘단야구(Dhanyaku)’와 발음이 와벽히 일치.


니사금尼師今: ‘임금’의 어원. 타밀어의 ‘니사금(Nisagum)’으로, 일반적인 왕보다 상위 개념의 황제나, 대왕을 뜻함.


대보大輔: 석탈해가 처음 맡은 국무총리 격의 벼슬이름. 타밀어에서 ‘신의 다음 자리’, 또는 ‘막강한 사람’이란 뜻의 ‘데보(Devo, 남성)’와 ‘데비(Devi, 여성)’에서 비롯됨.


위에 실은 내용은 지명 관계상 극히 일부일 뿐이다.


두어 가지 덧붙인다면, 석탈해가 자신의 출신지를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 하였는데, 다파나는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타밀어로 태양을 뜻하는 다파나(Tapana) 또는 다파난(Tapanan)과 일치해 다파나국은 ‘태양국’, 즉 당시 타밀인의 촐라왕국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석탈해가 가져온 동물 뿔로 만든 술잔인 각배角杯인데, 각배는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와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발생한 것으로, 그동안 우리 학계에선 중앙아시아를 거쳐 전해진 것이라 보았지만, 정작 고구려나 백제에선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바다를 통해 신라에 전해진 것을 알리고 있다.


필자는 위의 견해들을 지지한다. 더불어 바다야말로 당시엔 육지에 비할 수 없는 문명교류의 고속도로였다고 확신한다. 누가 봐도 위의 증거들은 그것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필연적으로 독자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에 국내에 알려진 캐나다 타밀협회의 연구 성과들엔 석탈해 관련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야 허황후의 출신지가 기존에 의견이 분분하던 인도 북부의 아유타가 아니라, 촐라국 영토에 위치한 ‘아요디야 쿠빰’이란 것과, 박혁거세를 옹립한 신라 6촌장 모두가 타밀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등인데, 여기선 그러한 내용이 있다는 사실만 간략히 전한다.


이제 여기서 우리 민족의 기원을 유추해 보기 위해 현대 과학의 성과에 눈을 돌려 보자. 우리는 앞 장에서 인간 유전자 중의 가장 한국적 특징을 지녔다는 조직적합성 항원체 HLA-B 59의 분포 영역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한국인에 고유한 유전자이므로, 극소수 스페인인을 제외하곤 유럽에선 전무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유전자가 인도의 일부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드라비다계 인도인과 우리는 문화만이 아니라, 유전적으로도 관련이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다음은 지난 해 동아일보(2006.7.21)에 소개된 단국대학교 김욱 교수의 연구결과로, ‘한국인, 아버지는 농사꾼, 어머니는 기마민족’이란 제하의 기사를 정리한 것이다.


‘남성염색체(Y염색체) 분석결과 한국인 남성은 농경민족에게 많이 나타나는 ’M122‘와 ’SRY465‘라는 남방계통 고유의 유전자를 가진 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Y염색체는 부계로만 유전되고 다른 염색체와는 섞이지 않기 때문에 순수 ’부계‘ 조상을 찾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모계의 경우 몽골과 중국 중북부 등 동북아시아에 분포하는 북방계 성향이 뚜렷하다. 미토콘도리아 DNA 조사결과 한국인의 60% 가량은 북방계 모계혈통을 따른다. 한반도로 이동한 북방계 민족과 남방에서 유입된 민족이 섞이면서 오늘날의 한국민족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앞서의 HLA-B 59와, 위의 연구결과에서 우리 민족의 뿌리가 50% 이상 그 기원이 남방과 관련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다의 한국사는 우리 민족의 기원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장의 마지막으로 인도양의 또 하나의 ‘~라’ 지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의 고지도에서 마라碼羅라고 기록된 오늘날의 몰디브 섬이 그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몰디브 섬이, 동북아 한자문화권의 어떤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는 촐라와 체라와는 달리, 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필자의 판단에 이 점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바로 마라碼羅에서의 ‘라羅’의 발음에 있다.


우리가 중근동의 여러 지명에서 확인한 현지 발음의 ‘라’를 중국어로선 결코 ‘羅’라 기록할 수 없다. 왜냐하면 羅는 보통어인 북경어론 ‘루어’라 발음되고, 또 광동어에선 ‘로’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오늘날의 한국인만이 羅를 정확히 ‘라’라고 발음하고 있다. 앞에서 확인한 태양을 뜻하는 처용가의 ‘라후덕’의 라는 역시 태양을 뜻하는 중근동의 ‘라’와 완벽히 일치하는 발음이 아닌가?


뒤에서 다루겠지만 중국 한족漢族은 결코 해상민족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중국의 옛 문헌에 나타나는 ‘~羅’ 지명은 기실 중국 한족 고유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의 해상활동의 성과를 반영한 것이란 사실이다.


한 가지 덧붙여, 백제가 망한 후, 왜국이던 일본이 백제로부터 자립했음을 나타내기 위해 국호를 태양을 상징하는 일본日本이라 제정한 것과, 역사서인 고사기古事紀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면서 자신들의 기원을 천손족天孫族의 하강에서라고 한 것은 ‘라’와 태양과의 상관관계로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알다시피, 고대 일본은 야요이 시기 한반도에서 건너간 집단에 의해 역사가 시작되었고, 실상 우리와 동일한 민족적 기원을 두고 있음이 아닌가? 그 사실은 오늘날의 유전자가 말해주고 있다.


일본의 고대 수도의 하나인 ‘나라’ 역시 필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나라’는 오늘날의 한국어로 국가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나라’의 기원이 원래 모국을 뜻하는 ‘나의 라’에서 기원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나의 라’에서 ‘나’는 언어의 변천에서 가장 보수적인 인칭대명사이다. 고대에도 ‘나’는 1인칭 대명사로 쓰여 진 데다, 더불어 ‘나’에다 지명이나, 국호에 쓰이는 ‘라’가 붙은 걸로 보아, ‘나라’의 기원이 모국을 뜻했을 가능성이 한층 크게 느껴진다.


어쨌든 우리의 지명인 ‘~羅’는 아시아 바다의 여타 곳곳에서 발견되는 데, 다음 장에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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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의 세계 -2 

2007년 02월 23일 (금) 12:22:26 서현우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9> 


2. '라'의 세계


우리는 앞장에서 우리 역사에 나타나는 무수한 ‘~라’ 지명이 중근동과 관계가 있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해 보았다.


이집트의 태양신 라(Ra)와 이슬람교의 유일신 알라(Al-Rah), 또 술탄협의체를 칭하는 ‘슈라’ 등에서 알 수 있는 신성함이나, 존귀함의 뜻에다, 우리의 ‘~라’와 같이 여러 지명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하여 근래에 와서 남부인도의 문화와 우리문화의 친연성이 거듭 확인되고 있음에 따라, 남부인도의 고대국가 촐라국과 체라국의 국호에 따른 ‘~라’가 우리의 지명 ‘~라’와의 관련성이 있음에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고지도상의 마라碼羅(오늘날의 몰디브 섬)를 통해 ‘~라羅’라는 우리의 한자음 표기가 실제의 발음을 반영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장에선 이러한 ‘~라’ 지명이 한반도에 이르기까지의 동남아시아에 남긴 여러 자취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앞장에서 오늘날의 태국이 우리역사에선 섬라暹羅라 지칭했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 섬라란 지명이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확실치 않다. 단지 명사明史에서 초대황제 홍무제(주원장) 시기에 섬라가 최초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 시기부터 쓰였음은 분명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섬라暹羅란 지명이 비록 중국의 사서에 시기적으로 앞서 나타나긴 하지만, ‘라羅’에서 알 수 있듯이 지명의 유래는 우리의 것이란 사실이다.


섬라는 흔히들 태국의 옛 이름 시암Siam(또는 샴)의 음역이라 한다. 필자의 견해 또한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필자의 관심은 Siam의 음역을 暹羅란 한자어로 나타낸 점에 있다. 오늘날 정확한 유래는 확인할 수 없지만 학계에선 Siam의 유래를 대략 ‘흑인의 나라’란 설과, ‘나무에 뒤덮인 산, 즉 흑산黑山의 나라’란 설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섬라에서의 섬暹의 뜻은 ‘햇살이 치미다’, ‘해가 돋다’이다. 즉 섬라暹羅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론 ‘햇살 돋는 땅’으로 시암Siam의 본래 뜻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기서 필자는 두 가지의 의미를 발견한다. 하나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아침의 땅’이란 뜻의 ‘아사달’을, 또 그것과 연관되는 태양국 ‘촐라’와 일본이란 국호를, 또 하나는 섬라와 신라의 중국 보통어 발음상의 유사성이다. 중국 보통어 발음으로 섬라暹羅는 시엔루어(xian-luό)이고, 신라新羅는 신루어(xin-luό)로 매우 흡사하다. 그런데 오늘날의 중국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종류는 무려 57여종이다. 이 중에서 우리의 언어와 친연성이 깊다는 절강이나, 복건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에는 위 섬라와 신라가 완전히 동일한 발음으로 읽히는 언어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점은 필자가 앞으로 확인해 나갈 일이다.


기록으로 볼 때 태국인(타이인)이 정착한 태국 땅에 중국 대륙인이 대거 이주했을 때는 명나라 개국 직후이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명나라의 개국과 동시에 초대황제 주원장은 중국역사상 가장 강고한 해금정책을 실시했는데 이에 반발한 해상세력이 대거 대륙을 탈출하면서 태국 땅에까지 이른 까닭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섬라란 지명이 명사明史에 최초로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섬라란 지명은 늦어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지해야할 점은 앞서 살펴본 오늘날 태국에 남아 있는 ‘부리’란 백제의 지명과, 태국의 신라 관련 지명이다. 아직 필자가 그 기원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방콕 인근에만도 안그 실라 사원(Wat Ang Sila)이 있다.


더하여 타이인이 오늘날의 태국 땅에 정착한지는 9C 이후부터란 사실이다. 타이인의 유래는 오늘날 학계에서 두 가지 학설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티벳 고원에서 유래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양자강 이남에서 남하하였다는 것인데 현재까지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백제의 지명인 ‘부리’는 타이인이 오늘날의 태국 땅에 이주하기 시작한 9C 이전의 지명이 아닌가? 게다가 신라 관련 지명마저 남아 있다. 그렇다면 타이인의 이주 이전에 백제의 해상력과, 신라선단의 활동영역이 오늘날의 태국 땅에까지 미쳤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점은 단순히 가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상당수 독자들은 백제의 담로계 지명이 동남아시아 일대와 스리랑카와 인도 동쪽에 분포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더하여 필자는 앞장에서 스리랑카에 신라 관련 지명이 3곳이나 있다고 밝혔다. 이 담로계 지명과 신라 관련 지도는 방글라데시에서도 발견된다. 이와 함께 독자들은 이제 한반도와 태국 사이의 또 다른 ‘~라’ 지명의 확인을 통해 고대 우리 해양사에 대한 확신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태국의 섬라를 지나 말레이 반도로 시선을 돌려보자. 말레이시아의 수도 콸라룸푸르는 콸라Kuala와 룸푸르Lumpur란 두 어휘의 합성어이다. 말레이시아어로 콸라(영어식 발음으론 쿠알라)는 해구海口란 뜻이고, 룸푸르는 진흙이란 뜻이다. 이로서 우리는 ‘콸라’가 바다와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자들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신밧드의 모험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신밧드가 4번 째 여행 중에 도착한 ‘카라’는 콸라룸푸르 북서쪽에 위치한 현재의 페낭Penang이다. 최근에 필자가 본 일본의 해양서적엔 여전히 그곳이 ‘카라’라 표기되어 있다.


이제 콸라룸푸르와 카라가 위치한 말라카 해협을 지나 남중국해로 접어들어 보자.


독자들은 백제의 부흥운동을 이끈 무장이자, 백제의 유민으로 당나라에서 무공을 세운 흑치상지 장군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래는 1929년 중국에서 발견된 그의 묘비명의 일부이다.


‘부군府君은 이름이 상지常之이고 자字는 항원恒元으로 백제인百濟人이다. 그 조상은 부여夫餘씨로부터 나왔는데 흑치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씨氏로 삼았다.’


위의 내용은 상당수 독자들엔 익히 알려져 있을 것이다. 내용의 핵심은 흑치상지가 본래 부여상지였는데 흑치지역에 봉해져 흑치를 성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 흑치 지역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학계에서 흑치지역을 둘러싼 여러 주장이 제기되어 왔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중국의 학자 량자빈梁嘉彬 등이 제기한 ‘필리핀’ 설이다. 이 주장은 저명한 백제사학자 이도학 박사에 의해 수용되었고, 최근에 이르러 필리핀 혹은 보르네오일 것으로 일반화되고 있다.


위 주장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우리가 배워온 역사에서 백제는 삼국 중 가장 허약한 나라였다. 그러던 것이 근래에 학계에서 수용되기 시작한 일본의 국가기원으로서의 백제와, 또 그 강역에 대한 위의 이러한 견해들은 우리로 하여금 백제사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어쨌든 필자에겐 흑치 지역에 대한 위의 견해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이유는 필리핀이나, 보르네오 또한 우리의 ‘~라’ 지명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 점에 대해 논의해 보자.


자, 이제 우리들의 관심을 동남아시아의 보르네오 섬으로 돌려보자.

 

                                     ▲ 칼리만탄(보르네오) 섬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보르네오 섬은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섬으로 전체 면적의 70% 영역의 남부지역이 인도네시아령이고, 나머지 북부는 대부분이 말레이시아령을 이루는 가운데 작은 면적의 보르네이 왕국이 말레이시아령에 둘러싸여 있다. 보르네오란 이름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에 네덜란드인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며, 현재 인도네시아에선 칼리만탄이라 불리고 있다.


필자가 여기서 칼리만탄을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 역사와 관련되는 몇 가지 문제 때문이다.


하나는 칼리만탄 섬의 서부도시, 폰티아낙Pontianak 일대가 20C 전반기까지 중국에서 서파라西婆羅라 불렸다는 점이다. 서파라西婆羅라면 우리의 지명이 아닌가?

 

                                   ▲ 서파라(서부칼리만탄)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독자들은 혹시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란방蘭芳(란팡)공화국에 대해 들어보았는가? 1777년, 미국 독립선언이 발표된 그 이듬해에 칼리만탄의 서파라에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란방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초대 대총장(대통령 격)을 역임한 라방백羅芳伯(뤄팡보, 1738~1796)에 의해 시작되어 1884년 네덜란드에 의해 동인도 식민지에 병합되기까지 107년의 역사를 이은 공화국이었다.


란방공화국의 수도는 폰티아낙 인근의, 세계에서 4번째로 긴 강이라는 카푸아스 강 연안의 도시 만도르Mandor(중국에선 동만률東萬律)이고, 주민 구성은 중국에서 이주한 객가客家인들로 이뤄졌다 하여, 학계에선 객가공화국, 혹은 화교공화국으로 알려져 있다.


(객가客家: 북경어 커자, 객가어 학가로 발음. 유명한 객가인 싱가포르의 이광요 전 총리의 조부와 증조부는 란방공화국 출신으로 알려져 있음)


이 란방공화국이 유명해진 것은 1961년 홍콩에서 출판되어 국제학술계에 파문을 낳은 홍콩역사학자 라향림羅香林의 저서 ‘서파라주 라방백 등이 건립한 공화국에 대한 고찰’이란 저서 때문이었다. 그러다 지난 2005년 인도네시아 출생의 화교 전기 작가인 장영화張永和, 장개원張開源 공저의 ‘라방백전’이 인도네시아에서 출간된 바 있다.


그런데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위 저술에도 언급된 바,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서부칼리만탄 일대를 서파라란 지칭과 함께 파라이婆羅夷라고도 불렀다는 점이다. 파라이라면 파라에다, 동이족의 이夷를 말함이 아닌가?


더하여 필자는 란방공화국을 건립한 라방백羅芳伯의 본명은 방백芳栢인데, 새로운 성씨 라羅는 파라의 ‘라’에서, 이름은 본래의 방백芳栢의 백栢에서 존칭을 나타내는 백伯으로 바꿔 방백芳伯이라 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란방공화국의 란방蘭芳은 네덜란드의 음역인 화란和蘭의 ‘란’과, 본래 성씨인 방芳의 조합이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한 네덜란드는 당시 서부칼리만탄의 영유권을 주장하던 중이었음)


서파라西婆羅와 파라이婆羅夷라?


이에 자극받아 필자는 서부 칼리만탄 폰티아낙 일대의 문화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그러자, 의미 있는 발견들이 뒤따랐다. 난생설화, 옹관묘(독무덤), 홍살문 등은 모두 우리 문화와 연결되는 요소들이었다. 또 이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인 다약족은 외모상으로 우리 한국인과 별반 차이를 느낄 수 없다고 한다. 여기에다, 란방공화국의 수도였던 만도르 인근의 시다스Sidas에서 삼바스Sambas에 이르는 지역엔 현재까지 기원이 확인되지 않은 왕묘급 고분군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더불어 빠뜨릴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이 지역이 백제의 담로계 지명으로 불렸다는 점이다. 중세 중국의 항해서書 ‘순풍상송順風相送’에는 ‘오서浯嶼(복건성)에서 제갈담남諸葛擔藍(칼리만탄 남부)까지의 항로에 담물란주부淡勿蘭州府가 있다’고 하였는데, 중국의 학자 시앙따(向達향달) 씨 등은 담물란주부를 서파라로 비정한 바 있다. 담물란주부의 담물이 바로 백제의 담로계 지명인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서부 칼리만탄 지역은 분명한 우리 해양사의 무대이다. 중국의 기록에 나타나는 파라이婆羅夷란 동이계 지명과, 또 담물淡勿이란 백제의 지명은 단지 우리와 문화적 친연성을 지닌 인도의 촐라, 체라와는 달리 우리 민족사의 영역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한 가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파라’가 아닌 ‘서西파라’라면 혹시 東파라 등의 또 다른 파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궁금증을 말이다. 이 궁금증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제 또 다른 ‘파라’를 찾아가 보자. 독자들은 아래 지도에서 팔라완 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팔라완 섬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위 지도엔 필리핀 루손 남부에서 보르네오(칼리만탄) 섬 북쪽으로 길게 잇는 띠 모양의 섬이 보인다. 바로 팔라완Palawan 섬이다. 이 팔라완 지명의 유래에 대해선 4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그 4가지 설은 다음과 같다.


1. 팔 라오 유: 중국어로 ‘아름다운 항구’란 뜻.

2. 팔라완스: 인도어로 ‘영토’란 뜻.

3. 팔와: 원주민이 부르는 식물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설.

4. 파라구아의 변형: 스페인어에서 ‘접힌 우산 모양’에서 유래한다는 설. (남아메리카의 파라과이는 여기서 유래)


독자들은 어느 설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가?


필자의 생각엔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팔라완이 실제론 서파라의 파라와 관계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다음의 남중국해 지도를 통해 판단의 근거를 들어보겠다.

 

                      ▲ 파라셀 군도, 스프라틀리 군도, 팔라완 섬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지도상엔 위아래로 두 개의 사각형이 둘러져 있는데 위의 것은 파라셀(Paracel) 군도이고, 아래의 것은 스프라틀리(Spratly) 군도이다. 이들은 흔히 서사군도西沙群島와 남사군도南沙群島로 더 알려져 있으며 현재 국제적으로 영유권 분쟁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들 섬의 명칭 또한 팔라완과 마찬가지로 유래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면 여기서 이들 섬의 이름을 한번 나열해 보자.


- 파라셀, 스프라틀리, 팔라완.-


무엇인가 공통성이 발견되지 않는가? 필자는 이들 고유명사가 모두 ‘파라’와 관계가 있다고 판단한다. 즉 파라셀에서 파라를, 스프라틀리에서 서파라를, 팔라완에서 파라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확신하건대 스프라틀리의 어근語根인 ‘스프라’는 분명 ‘서파라’의 변형이며, 팔라완의 ‘팔라’ 또한 ‘파라’의 변형이다. 여기서 팔라완의 ‘완’은 장담할 순 없지만 만灣을 말하는 게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臺灣(대만)을 타이완이라 발음하듯이 말이다. 이 점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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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의 세계-3 

2007년 03월 13일 (화) 22:10:37 서현우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10> 

 

 

3. ‘라’의 세계


우리는 앞장에서 파라婆羅 또는 서파라西婆羅란 우리 지명이 지금의 보르네오 서부의 폰티아낙(중국 기록은 쿤티안坤甸) 일대와 팔라완 섬, 또 파라셀 군도와 스프라틀리 군도임을 살펴보았다. 이 중의 팔라완 섬을 포함하여 필리핀 남부 섬들과 보르네오 북부 일대는 사마족族이라 불리는 종족의 생활 터전이다. 이 장은 사마족에 대한 소개로 시작하고자 한다.


몇 년 전 일본의 각 TV방송이 앞 다투어 사마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여러 채널의 민영방송이 한 종족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표한 것은 필자에겐 좀 유별나게 다가왔다. 필자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로 정리된다.


하나는 종족 이름이 ‘사마’라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팔라완 섬 일대에 대량 분포하는 독무덤(옹관묘) 때문이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요소는 고대 일본 및 백제문화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먼저 ‘사마’에 대해 살펴보자.


‘사마’는 섬을 뜻하는 것으로 오늘날 한국어의 ‘섬’ 및 일본어의 ‘시마’의 원형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즉위년(501년) 대목을 보면 왕의 휘諱(생전의 이름)가 사마斯摩라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이 섬에서 태어남으로 인해 ‘사마’라 이름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의 묘지석에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란 글귀가 발견되어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이란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생전엔 사마왕으로 불리다, 사후에 무령武寧이란 존호가 붙여진 것이다.


이번엔 독무덤에 대해서 알아보자.


독자들은 전라남도 영산강 유역의 독무덤군群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흔히 아파트식 고분으로 유명한 나주 일대의 독무덤은 지금까지 우리 고대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어떤 사서의 기록에도 언급되지 않은 나주 고분군은 규모면에서나, 출토품에서나 경주의 신라 왕릉급 고분에 필적하여, 고분 조성의 추정시기인 4~5C 무렵에 영산강 일대에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수수께끼 고분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독무덤 묘제는 일본에도 존재한다. 일본 규슈의 야요이 시대(BC 5C~AD 4C) 유적인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엔 약 3천기의 독무덤군이 발굴되었는데 한일 학계에선 그동안 영산강 유역과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논쟁을 벌여왔다. 즉 한국 학계에선 영산강 유역이 규슈에 영향을, 일본학계에선 그 반대로 규슈의 요시노가리 문화가 영산강 일대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일본 학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들이 내세우고 있는 임나일본부나, 삼한정벌론의 고고학적 증거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 독무덤 묘제가 영산강 유역과 일본 규슈 일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독무덤은 해양 문화의 묘제로서 아시아 해양의 광대한 영역에 걸쳐 분포한다.


한반도에선 영산강 일대 및 해남, 강진을 비롯하여 가야와 신라 영역이던 경상도 각지에서도 발굴되고 있다. 지난해 10월엔 경부고속철도 경주 구간 공사 중에 발굴된 초기 신라(사로신라) 시대 유적(경주시 내남면 덕천리)에선 무려 65기의 독무덤이 출토되기도 했다.


여기에다 아시아 해역으로 시야를 넓혀보면 앞장에서 다룬 인도 남부의 촐라국 영역이던 타밀나두주州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와 태국은 물론, 나아가 란방공화국의 영토이던 보르네오 일대, 또 팔라완 섬을 비롯한 필리핀 각지와 인도네시아 열도의 전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필자의 견해로는 한일 학계의 위 논쟁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아시아 해양의 독무덤 자체가 한국과 일본에 존재하는 독무덤의 공통 기원이란 것이다.


주목되는 점은 한반도 독무덤이 시기적으로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후기 유형이랄 수 있는 영산강 일대의 왕릉급 고분들엔 독무덤의 크기가 시신을 담은만큼 크며, 주로 두 개의 항아리(독)를 이어 사용한데 비해, 남해안 일대의 초기 독무덤은 시신을 담을 수 없는 작은 항아리들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초기 양식이 시신을 담은 것이 아니라, 1차 장례를 마친 후 뼈만을 추려 항아리에 안치한 2차 장례의 흔적이란 것이다. 흔히 세골장洗骨葬이라 하는 초기 양식은 앞서 말한 필리핀, 보르네오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해역의 독무덤의 일반적 형태이다. 세골장의 기원은 시신을 새에게 내맡기는 조장鳥葬 관습이 남아있는 히말라야와 서남아시아에서 기원한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독무덤은 서남아시아의 묘제인 세골장이 해양을 통해 한반도까지 전파된 후 토속묘제인 토광묘나, 목관묘, 또 목곽묘와 결합하여 영산강 일대에서 볼 수 있는 시신을 직접 담는 대형 독무덤으로 변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사마족과 팔라완 섬으로 돌아가 보자. 필자가 인터넷의 영문사이트를 통해 검색해본 ‘사마족’의 유래에 대한 내용은 간략히 이렇다.


‘바다의 부족, 기원후부터 시작되어 9C 경에 확대된 중국인 교역의 결과로 북부의 여러 섬(민다나오 남서부)에서 남(술라웨시와 보르네오 해안)으로 흩어진 종족.’ 필자는 위의 내용에서 당시 교역의 주체가 중국인이라 함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른 장에서 밝힐 것이다.


어쨌든 위에서 소개한 일본방송의 사마족에 대한 관심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사마’란 어휘에다, 사마족의 거주영역에 대량으로 존재하는 독무덤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는 Sama-란 접두어를 사용하는 지명이 사마족 분포지역의 여러 곳에 존재함을 확인한 바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의 국가기원이 한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알고 있다. 이와 함께 일본문화의 기원 또한 고대 한반도 문화의 아류라 보고 있다. 물론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한국과 일본 학계의 시각은 차이가 있다. 그동안 한국 학계에선 한국인과 한국문화가 북방의 시베리아에서 기원한다고 간주해 왔는데 반해, 일본 학계는 일본인과 일본문화의 기저가 남방에서 원류한다고 보아 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일본 학계는 그들의 문화가 북방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한국과는 그 기원을 달리 한다고 주장해 왔다.


우리는 우리의 그것과 모순되는 일본 학계의 주장을 애써 외면해 왔다. 단지 일본 학계의 근거 없는 강변이라고만 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일본학계의 주장이 설득력 있는 것이라 확신한다. 그와 함께 양국 문화의 동일기원설도 사실로 인정한다.


한국과 일본의 상반된 관점에서 어떻게 동일기원설이 성립될까?


그것은 한반도 문화 또한 일본과 마찬가지로 그 기저에 남방 원류의 요소를 띄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근래에 와서 집적되고 있는 연구결과들이 알려주고 있는데 신화나, 민속, 유물, 유적 등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 중에 주목되는 부분은 독무덤의 분포지에서 공히 확인되는 문화적 요소로써 고인돌과 난생설화를 들 수 있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이들 요소는 앞서 말한 남부인도에서 동남아시아 해역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독무덤과 함께 존재한다.


필자의 기억에, 1980년대 일본의 어느 학자가 ‘일본 신화와 그리스 신화의 비교연구’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논문의 내용은 양 신화가 상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필자에게 있어서 이 주장은 단지 허무맹랑하게 다가왔을 뿐이다. 그러다 후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 ‘우리문화는 중국보다 오히려 그리스와 페르시아에 더 가깝다’는 대목을 접하곤 그 논문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과 위 일본학자의 견해는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필자는 여기서 독자들이 알고 있을 삼국유사의 얘기 하나를 들어보겠다. 아래는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편의 제48대 경문대왕에 관한 내용이다.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의 귀처럼 되었는데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장幞頭匠(복두는 귀인이 머리에 쓰는 관) 한 사람만은 이 일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평생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죽을 때에 도림사道林寺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를 보고 외쳤다.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 그런 후로 바람이 불면 대밭에서 같은 소리가 들려오곤 했는데 왕은 이 소리가 듣기 싫어서 대를 베어버리고 그 대신 산수유山茱萸 나무를 심었다.’


다음은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의 벌을 받아 길어진 귀를 넓은 수건을 둘러 감추었다는 미다스 왕의 얘기이다.


‘미다스 왕의 비밀은 왕실 이발사가 갈대숲에 판 구멍에 입을 대고 속삭임으로서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흘러나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위 두 설화의 모티브는 누가 봐도 동일한 것으로 복두장과 이발사, 대밭과 갈대숲은 단지 환경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근동의 ‘라’와 우리의 ‘~라羅’의 상관관계를 재차 확인하며, 단재 신채호 선생의 선견지명, 그리고 일본학계의 앞선 학문적 시야를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로만글라스가 거저 우연이 아니며 고대 우리 조상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 범위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임을 알려주고 있다.


일본이란 국호는 태양(天)을 뜻하며 그들 스스로 천손족天孫族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가까이는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의 천손신앙과 밀접한 것이자, 앞서 확인했듯이 멀리는 중근동의 ‘라’에 닿아 있다.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국가인 야마타이코쿠邪馬臺國의 여왕인 히미코卑彌呼의 이름에서 이름의 의미를 확인해 보자. 卑彌呼(한국음은 비미호)란 한자漢字는 단지 일본식 한자음의 차용일 뿐, 그 뜻은 히미코란 말 자체에 있다. ‘히’는 태양을 뜻하는 ‘해’의 고대어로 오늘날 일본에선 여전히 ‘히’라고 한다. ‘미’는 ‘~의’라는 현대 일본어의 の(발음은 ‘노’)에 해당하고, ‘코’는 현대 일본어에 남아 있는 ‘코(子)’로 아들 또는 자식이란 뜻이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히미코는 ‘태양의 자식’이란 뜻으로 훗날의 천황이란 용어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위 히미코에 대한 2006.9.15자 뉴스메이커 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기사는 히미코가 가야국 김수로왕의 딸인 묘견妙見 공주란 학계의 주장과, 히미코를 나타내는 우리식 한자음 비미호卑彌呼는 기원전 6C 남부인도의 비자야(Vijaya, 재임BC543~504)란 인물이 바다를 건너가 스리랑카에 수립한 싱할리 왕국에서 그 흔적을 찾았다는 것이다. 즉 비미호는 싱할리 왕국에서 총리를 의미하는 ‘비미호Pimiho’ 또는 ‘비미크Pimiku’에서 비롯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제 발음이 우리식 한자음(비미호-히미코는 일본식 한자음)으로 쓰인 것으로 볼 때 고대 해양문화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더하여 위 기사에서 경악할 일은 가야의 여러 작은 나라를 지칭하는 가라, 안라, 다라, 고차, 자타, 산반하, 졸마, 걸찬, 사이기, 염례, 탁순, 탁기탄 등 12개 소국 이름이 비자야 왕과 타밀출신 야쇼다라Yashodhara 왕비 사이에 낳은 12자녀 이름과 일치한다는 내용이다.


12자녀의 이름을 영어로 표기하면 Kara, Anla, Tara, Kocha, Chata, Sanbanha, Cholma, Kolchan, Saigi, Yomryu, Taksun, Takkitan이다.


기사는 덧붙여 가야지역 12개 소국의 이름이 비자야 왕의 자녀 이름과 일치하는 것은 당시 가야인이 비자야 왕의 이야기를 금과옥조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분석하고 있다.


히미코에 대한 기사의 소개는 여기서 그치고 다시 본론을 이어가자.

앞장에서 필자는 신라 관련 지명을 논하면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의 Sila 지명을 소개한 바 있다. Sila는 수도인 수바가 위치한 비티레부 섬의 해안가에 있는 지명이다. 지명뿐만 아니라, 원주민 이름에도 Sila가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전 피지 행정청 수장이던 Kotobalavu Sila씨를 들 수 있다.


그런데 피지는 아시아 해역을 넘어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섬나라이다. 그럼에도 피지의 Sila가 지금까지 보아온 ‘라’와 관련하여 우연이 아님은 피지보다 더 먼 곳에 위치한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오리족의 태양신 또한 ‘Ra’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찌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있겠는가?


더하여 인근의 통가(Tonga) 왕국을 보자. 국호 통가는 통가어語의 탕가야르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뜻은 태양을 의미한다. 이처럼 ‘라’ 및 태양과 관련된 지명이 인도양과 태평양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다.


이제 이 장의 중심 내용인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의 Siladen이란 지명을 소개하겠다. 아래 지도를 보자.

 

                              ▲ <지도1> 술라웨시 섬의 마나도 위치. [자료사진 - 서현우]  

 

                                       ▲ <지도2> 술라웨시 섬. [자료사진 - 서현우]  

 

                              ▲ <지도3> 마나도 만과 Siladen 섬. [자료사진 - 서현우] 

 

위 술라웨시 섬은 보르네오 섬 동쪽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령으로 거의 한반도 면적만큼의 넓이를 가진 큰 섬이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에 술라웨시는 셀레베스Celebes로 와전된 까닭에 현재도 셀레베스라 일컬어지기도 하나, 정식 이름은 어디까지나 술라웨시이다. 그런데 술라웨시는 ‘술라’와 ‘웨시’의 합성어이다.


이 글을 쓰기까지 필자가 국내의 인도네시아 관련 학자 몇 명에게 확인을 시도했으나, 지명의 유래에 대해선 알 수 없었지만, 필자의 판단으론 ‘술라’ 또한 분명 ‘~라’ 지명의 하나이다. 어쨌든 이 술라웨시 섬의 북부 마나도 일대는 필자가 보기엔 분명 옛 우리 해양사의 무대인데. 아래의 내용은 필자가 확인한 근거들이다.


첫째, 위 지도에 보이는 Siladen 섬을 들 수 있다. 영어식으로 ‘실라덴’으로 읽혀지나, 이 역시 술라웨시를 셀레베스라 부른 포르투갈인에 의한 것으로 현지인들은 ‘실라단’ 또는 ‘실라당’에 가깝게 발음한다. 필자는 이 ‘실라단’이나 ‘실라당’이 ‘신라땅’으로 연상되는 것 같아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다.


<지도3>에 보이는 사각형으로 둘러쳐진 섬이 부나켄 섬으로 위 지도 상에선 나타나지 않지만 섬의 남쪽 해안에 휴양지로 유명한 셀라셀라Selasela가 있다. 이 셀라셀라 또한 포르투갈식 표기로 필자는 원래 ‘실라실라’란 발음의 변형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위 Siladen 섬은 스킨스쿠버 장소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인데 지도 상에 보이는 실라덴포인트Siladenpoint가 그 중심이다.


둘째, 마나도 일대의 주민의 인종 구성과 문화적 특성이다. 현지를 여행해 본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특이하게도 마나도 지역의 주민들은 대다수가 외모 상으로 우리와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극동계 인종이다. 당연 남아시아 인종에서 볼 수 없는 몽골반점이 나타나고, 부계로 이어지는 Y-염색체가 한반도의 우리와 친연성을 지닌다.


또한 이 지역의 주민들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개방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는데다, 포르투갈 식민지의 영향으로 대다수가 기독교를 믿고 있다. 이 지역은 인구의 90%가 넘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인도네시아에서 유독 기독교 세력이 강해 현재 종교분쟁으로 가끔 뉴스의 국제 면에 등장하기도 한다.


술라웨시 북부 일대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포르투갈 식민지에 편입된 곳인데, 그 이유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즉 이곳 자체가 향로 산지이자, 동쪽에 위치한 향로제도로 유명했던 말루쿠 제도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문화적 요인으로 살펴보면 우리와 같이 매운 음식을 선호하고, 정월대보름을 기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고인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인돌의 존재는 이곳이 보다 이른 시기에 아시아 해양사의 무대였다는 반증이다.


셋째, 필자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 이곳 일대 미나하사 족에 전승되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에 관한 전승이다. 다소 길지만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옛날 옛적 어느 호젓한 산골짜기에 조그만 연못이 있었다.


달 밝은 밤이면 이 연못에 어여쁜 아홉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 그리고 새벽이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이 아름다운 선녀들이 노는 것을 근처 숲속에서 숨을 삼켜가며 황홀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인근 마을에 사는 떠꺼머리총각 나무꾼. 하룻밤은 이 나무꾼 총각이 중대한 결심을 한다.


그는 선녀들이 목욕을 하며 노는 사이 살금살금 기어가 선녀 옷 하나를 감춘다. 목욕을 끝낸 선녀들이 옷을 찾아 입는데 한 선녀의 옷이 없다. 결국 여덟 선녀는 다시 하늘로 올라갔지만 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다. 그때 나무꾼이 나타나서 혼자 남아 어찌할 바 모르는 선녀를 위로하고 자기집으로 데려가서 아내로 삼는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나무꾼은 자초지종을 고백하고 감추어둔 옷을 자기의 아내가 된 선녀에게 되돌려준다. 그런데 아내는 옷을 입자마자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나무꾼은 매일같이 괴로워하며 연못 주위를 배회하지만 한번 하늘로 올라가버린 자기의 아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나무꾼의 아내였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다가 자기의 남편이었던 나무꾼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는 마침내 동료 선녀들과 함께 그 연못으로 다시 내려온다. 그리고 연못 주위에 지쳐 쓰러진 나무꾼을 일으켜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


위 설화는 지금은 고인이 된 태국 치앙라이 대학의 교수이자, 문화탐험가였던 김병호 선생의 탐사기 ‘우리문화 대탐험(황금가지 출판, 1997)’의 인도네시아 마나도 탐사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금강산을 무대로 한 우리의 그것과 완벽히 일치하는 내용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넷째, 위 미나하사 족의 언어에 있다. 이 또한 김병호 선생이 채집한 것으로서 미나하사 족의 언어 중에서 발견한 기본 어휘를 살펴보자. 미나하사 족은 1인칭 대명사를 ‘냐’, 2인칭대명사를 ‘니’라 한다. 이 또한 의미심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남아시아 일대의 문화를 탐방해오던 김병호 선생은 오로지 ‘선녀와 나무꾼’ 설화의 확인을 위해 마나도를 방문하느라, 짧은 일정으로 마나도 일대를 심층 취재하진 못했다. 앞으로 우리 학계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미나하사 족은 또한 우리와 같은 묘비석을 갖는 무덤양식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지도를 통해 확인하면 술라웨시 북부 지역은 극동과 호주 대륙을 직선(가장 단거리)으로 잇는 중간지역에 위치해 있다. 필자가 앞서 언급한 중국 수당隋唐 시대의 사서에서 캥거루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점으로 볼 때 이미 우리의 삼국시대 이전부터 극동과 호주는 바닷길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술라웨시 북부는 그 교통의 거점이며, 위에서 확인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해양항해의 중심 주체는 중국의 한족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었음이 분명하다.


근거를 더한다면 술라웨시와, 보르네오, 필리핀 남부 해역에 걸쳐 있는 지명중엔 분명한 우리의 지명이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확인한 지명만으로도 다물란Damulaan과 다무로그 Damurog 등 담로계 지명과, 실라브 Silab, 실라고 Silago, 실라그 Silag 등 신라계 지명이 각기 수십 군데 존재한다. 아래는 필리핀 술루제도의 지도이다.

 

                              ▲ <지도4> 술루제도(붉은 색 표기). [자료사진 - 서현우]  

 

술루제도는 팔라완 섬에서 마나도를 잇는 바다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다. 필자는 술루Sulu란 말이 술라의 변형이라 생각하는데 어쨌든 술루제도의 홀로 섬이란 이름의 섬을 소개해 본다.


영어식 표기론 Jolo라 하고 실제 발음은 ‘홀로’이다. 홀로 섬엔 최대종족인 타우수그 족과 바자우 족, 시나마 족이 거주하는데 타우수그 족은 필리핀 무슬림의 최대 종족으로 12~13C에 민다나오 북부에서 이주해온 종족이고, 바자우 족은 사마 족 계통의 종족이다.


여기서 흥미 있는 점은 사마.바자우 족의 언어의 방언인 바랑깅지어語로 ‘홀로’는 ‘심심한’, 또는 ‘외로운’이란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우리말의 홀로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홀로 섬엔 Silat란 지명이 있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다음 장에선 무대를 한반도와 중국 대륙으로 옮기기로 하고 이 장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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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신화의 이면

2007년 06월 01일 (금) 12:16:34 서현우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11>

 

87년 '북한공작원 김현희'에 의해 공중폭파됐다고 발표된 KAL 858기 실종사건을 다룬 소설 『배후』(창해, 2003)의 작가 서현우. 울산 토박이인 그는 부산에서 대학을 나왔고 민주화운동으로 옥살이를 한 바 있다.


그는 줄곧 진중한 책읽기와 풍부한 여행 경험을 쌓아왔고, 특히 세계사와 한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기성 학계의 정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 위해 발로 뛰는 독특한 탐구의 길을 걸어왔다.


통일뉴스에 연재하는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는 이같은 그의 각고의 노력의 산물이다. 기존의 주류 사관을 뒤엎는 그의 참신한 반란에 한번 빠져들어가 보도록 하자.


최근 필자의 사정으로 연재가 미뤄졌던 점에 대해 사과드리며 앞으로 매주 금요일에 연재하도록 할 예정임을 알린다. /편집자 주

 

3장. 황해-동아지중해 세계


1. 장보고, 신화의 이면


지금까지 필자는 독자들과 함께 천하전여총도,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여러 학문적 파편을 따라 우리 역사에서 그동안 소홀히 취급해온 해양사의 궤적을 추적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그 기원과 전개를 더듬어보면서 우리 해양사의 전모에 다가가 보자.


이 장에선 우선 우리 해양사의 상징적 인물인 장보고를 통해 필자의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해상왕 장보고. 9C 동아지중해 세계의 지배자로 세계사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오늘날 한국사의 신화적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한국사의 영웅으로 등장한 시기는 극히 최근인 20C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필자와 같은 40대 중반의 세대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초에서야 장보고는 국사 교과서에서 주요 인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미국 하버드대학 동아시아연구소의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1910~1990) 교수의 공헌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라이샤워 교수의 공헌은 1955년 자신의 논문 ‘엔닌圓仁의 당唐나라 여행(Ennin's travels in Tang, China)’에서 장보고에 대해 ‘해상상업제국의 무역왕(The merchant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이란 평가와 극찬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라이샤워 교수는 오늘날 미국학계에서 동아시아학의 아버지라 불리기까지 하는 인물이기에 그의 평가는 우리 한국인들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케네디 행정부 하에서 자신의 유일한 공직생활이었던 주일대사(1961~1966) 직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동아시아학과 함께 그가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특이한 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라이샤워 교수의 공헌이 있기까지 장보고는 우리 역사의 주변적 존재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식민지 사학의 유산과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학계의 더딘 행보에도 있었겠지만, 연구 인력과 연구비의 부족이라는 학계의 현실적 풍토도 분명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해방이후의 수십 년간의 한국사는 일제하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가 정립한 이른바 ‘조선사’를 가감 없이 이어받은 ‘한국사’였다는 것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도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하여 장보고란 역사상의 인물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총독부 어용학자들에 의해 제대로 주목받았을 리도 없었다.


그러므로 1960년대 말까지에 있어서 장보고에 대한 연구는 고작 진단학회의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선생의 논문. ‘고대의 무역형태와 라말羅末의 해상발전에 취取하여(하)’(진단학보-권2, 1935년)와 위 라이샤워 교수의 논문만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나마 위 김상기 선생의 식민지하 진단학보를 통한 연구발표와, 또 그의 장보고에 대한 ‘해상왕국의 건설자’란 평가에서 다소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오랜 역사의 망각을 뒤로 하고 장보고는 이제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실체와 그가 활약했던 9C 해양사에 대한 이해는 아직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장보고,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이 문제는 우리 해양사는 물론 우리 역사의 전모에 다가가는데 중요한 열쇠이자 연결고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선 9C 황해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바다로 항해하여 장보고와 그를 낳은 역사적 배경인 당시의 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하자.


9C의 황해는 동아지중해 세계의 중심적 무대였다. 더불어 세계사적 시각에서 바라보아도 황해에서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의 동아지중해와,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로 이어지는 인도양 세계는 가히 세계사의 중심무대라 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의 서양지중해 세계는 동서 로마제국의 분열과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급속히 쇠퇴한 뒤, 신흥 사라센 제諸국의 영향 하에서 예전의 활력과 현저한 거리가 있었다. 또한 지중해 북쪽의 유럽 내륙의 상황은 오늘날에 중세암흑기라 평가할 만큼 오랜 정체기로서 역사적 기여가 미미한 상태였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는 당唐 제국의 문화수준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당대 최고수준의 문명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더불어 이 시기는 사라센 세계의 동아시아 행 러시의 시대라 할 수 있는데, 당시 세계사 전개의 또 하나의 축이랄 수 있는 사라센과의 접촉은 가히 동아시아를 문명집산과 융합의 용광로로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바다와 육지에 걸쳐 넘쳐나는 활력의 9C 동아시아야말로 당대 세계사의 중심축이었다.


이 시대에 대한 라이샤워 교수의 평가를 그의 논문인 ‘엔닌의 당나라 여행’을 통해 들여다보자.


'…유럽에 있어서 경제적 성장 및 그에 따른 정치.사회적 변화는 15~16C 서유럽 사람들에 의하여 재빨리 이룩된 세계의 바다에 대한 제패와, 수세기 동안 이 바다 위에 존재하였던 해상무역에 의하여 촉진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현재 서양의 시작을 그 시기로부터 잡는 것이 옳다. 그러나 널리 세계사적 견지에서는 "현대"를 당나라 때 세계 무역의 성장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에도 상당한 정당성이 있을지 모른다.…' <라이샤워의 ‘엔닌의 당나라 여행’에서>


이 위대한 시대에 당당히 바다의 역사를 담당한 주역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장보고로 상징되는 ‘재당신라인’ 집단이었다.


필자가 위에서 ‘신라인’이 아니라, 굳이 ‘재당신라인’이라 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장보고가 신라 출신인지, 아닌지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 없기 때문이며, 또 과연 9C의 신라가 해운정책을 주도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보고로 상징되는 재당신라인의 근원에 대한 문제이자, 장보고 집단의 정체성에 대한 핵심적 의문이라 할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의문은 장보고에 대한 한.중.일 삼국의 사료에 나타난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다. 필자는 사료의 어디에도 장보고가 신라 출신이란 뚜렷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장보고는 신라출신’이란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 왔다. 그것은 왜일까?


다음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두 인용문을 살펴보자.


'장보고張保皐(신라기엔 궁복弓福)와 정연鄭年(연은 連이라고도 함)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皆新羅人) 다만 고향과 조상은 알 수 없다.(但不知鄕邑父祖)… 두 사람이 당에 참가하여(二人如唐)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달리고 창을 쓰자 능히 대적할 자가 없었다. 후에 보고가 환국하여(後保皐還國) 대왕(흥덕왕)에게 말하기를…,' <삼국사기 열전, 장보고.정연 편>


'여름 4월에 청해대사 궁복, 성은 장씨(일명 보고)가 당의 서주로 들어가(入唐徐州) 군중의 소장이 되었다가(爲軍中小將) 귀국하여 왕을 뵙고(後歸國謁王)…'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조條>


위의 내용이 한.중.일 삼국의 사서 중 장보고의 출신에 대해 언급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다. 장보고가 신라출신이란 지금까지의 정설은 그에 대한 기사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신라관련 내용에 등장하는데다, 위 삼국사기의 ‘여당如唐’이나 ‘입당入唐’, 그리고 ‘환국還國’이나 ‘귀국歸國’ 등의 구절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장보고의 출신에 대해 갖는 의문은 다음의 이유들에서이다. 독자들과 함께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열전의 ‘신라인’이란 기록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향과 부조父祖를 알 수 없다는 대목이다.


그런데 장보고가 누구인가? 신라 45대 왕인 신무왕을 세운 1등 공신이 아닌가? 이 공로로 장보고는 신무왕으로부터 감의군사感義軍使로 봉해지고 식읍食邑 2천 호戶를 하사받는다. 또한 신무왕이 죽자 그 아들인 문성왕으로부터 진해장군鎭海將軍에 봉해지고 장복章服을 받기도 한다. 비록 장보고가 이후 신라왕실과 척을 지고 역사의 죄인으로 전락했다손 치더라도 고향과 가계(부조父祖)조차 알 수 없다는 사서의 기록은 납득하기 어렵다.


둘째, 위 인용문 열전의 ‘당에 참가하여(여당如唐)’란 대목이 신라본기의 ‘입당入唐’과는 어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다. 즉 ‘신라에서 당으로 건너갔다’라는 직접적 표현이 아닌 것이다. 더하여 ‘신라인’이란 구절도 신라출신이라고만 단정할 수도 없다고 보아진다. 한마디로 ‘당에서 출생한 신라인(반도인 또는 삼한인)’이라고도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셈이다.


셋째, 위 인용문 신라본기의 ‘입당서주入唐徐州’란 대목이다. 여기서 ‘입入’의 직접적 대응이 ‘당唐’이 될 수도 있지만 ‘당서주唐徐州’가 될 수도 있다. 이 경우 해석의 차이가 있는데, 즉 ‘(신라에서) 당에 들어간 뒤 서주로 향했을 경우’와 ‘(신라나 당의 다른 곳에서) 당의 서주에 들어갔다는 뜻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환국還國‘과 ’귀국歸國‘은 삼국사기 편찬 시 신라출신임을 전제로 한 착오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장보고에 대한 삼국사기의 열전의 내용은 신당서新唐書 및 두목杜牧의 번천문집樊川文集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위의 글에서 독자들은 필자가 장보고를 신라출신이 아니라, ‘재당신라인’ 출신이라 보고 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더불어 앞서의 ‘신라인’과 ‘재당신라인’을 구별한 이유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9C 한반도와 중국의 동북 일대는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였다. 이에 당시 중국대륙의 동안에 삶의 터전을 영위해 오던 옛 백제 및 신라의 후예들은 당연히 신라인으로 불려졌다. 비견한 예로 일제식민지 시절 일본이나 미국으로 건너간 교포들이 오늘날 조선인이 아니라 한국인(혹은 한국계)으로 불리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더구나 백제를 멸망시킨 당唐 조정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영토내의 백제의 후예들을 백제인이라 칭하는 것은 만부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내용 정도로 장보고가 신라출신이 아니라 단정할 수는 없다. 고작 그 정도로 필자가 장보고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가질 리가 있겠는가?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7년 봄 3월에 청해진 대사 궁복의 딸을 맞이하여 차비(次妃)를 삼고자 하니 조신(朝臣)이 간하기를, “부부의 도는 사람의 대룬大倫입니다. 그러므로 … 지금 궁복은 섬사람인데(今弓福海島人也) 그 딸이 어찌하여 왕실의 배필이 되겠습니까?”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성왕 조條>


‘… 궁파(弓巴)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매 여러 신하들이 힘써 간한다. “궁파는 매우 미천한 사람이오니(巴側微) 왕께서 그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왕은 그 말을 따랐다.’ <삼국유사, 신무대왕과 염장, 궁파 편>


이 두 인용문이 앞서의 것과 함께 장보고의 출신, 또 그와 관련된 신분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의 전부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여타 사료들은 장보고의 활약상이나 인물됨을 전할 뿐 출신에 대해선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위 내용의 해도인海島人과 파측미巴側微에서 독자들은 장보고가 원래 신라 주류사회와는 관련이 없던 인물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장보고가 신라 신분제도의 골간인 골품제骨品制의 골제(성골과 진골로 나뉨)는 차치하고, 6두품제의 가장 하층(1두품)에도 끼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다룰 장보고의 정체성에 대한 중요한 단서이다.


독자들은 또 장보고의 이름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엔 궁복弓福, 삼국유사엔 궁파弓巴라 했음을 보았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학계 일각에선 그의 원래 이름이 궁복 또는 궁파였는데 입신출세한 이후에 장보고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이는 어불성설이다. 궁복 또는 궁파는 우리 사서의 기록일 뿐 중국에선 장보고張保皐라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고, 특히 일본에선 이름의 뜻을 높여 장보고張寶高라 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장의 재당신라인에 관한 논의에서 장보고와 관련되는 또 다른 장씨張氏 성姓의 인물을 보건대 위 일각의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궁복과 궁파라 한 위 두 사서의 태도는 장보고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아진다. 즉 신라왕실로부터 반역자로 낙인찍힌 장보고에 대한 신라왕실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에 반하여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은 신당서의 편찬자인 송기宋祁의 평가를 인용하여 장보고의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높이고 있다.


‘송기가 말하기를(宋기曰), “원독으로도 서로 꺼리지 않고 국가의 우환을 앞세운 자를 든다면 진(晋)나라에 기해(祁奚)가 있고, 당(唐)나라에 분양(汾陽)과 보고(保皐)가 있다(원문, 唐有汾陽保皐).” 하였으니 그 누가 이(夷)에 사람이 없다 하겠는가(원문, 孰謂夷無人哉).’ <삼국사기 열전, 장보고.정연 편>


위 열전의 내용은 신라본기와 달리 당대 중국의 평가가 반영되어 있어, 일본 측 사료의 시각과 더불어 오늘의 우리에게 장보고의 진면목을 알려준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 한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독자들은 위 인용문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길 바란다.


송기는 장보고를 일컬어 우리 민족을 뜻하는 이夷족임을 알리면서도 ‘신라나 동이東夷에 보고保皐가 있다’ 하지 않고, ‘당唐에 보고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필자의 판단으론 장보고는 신라가 아니라, 오히려 당나라 사회에 기반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또한 장보고가 신라 출신이 아님을 알려주는 정황증거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자, 이제 위에서 제기된 의문점에 대해 한 걸음씩 다가가 보자.


독자들은 위 글의 내용에서 장보고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군중소장軍中小將을 역임했음을 알았을 것이다. 무령군 군중소장은 사료에서 확인되는 장보고의 행적 중 가장 앞선 시기의 행적이자, 그가 입신하게 된 기반이었다. 여기서 서주의 무령군이란 무엇인가?


서주徐州는 오늘날 강소성의 서주로서, 당시 동서와 남북을 잇는 대운하의 교차점에 위치한 요충지이자, 초한전쟁 시기 초楚의 패왕覇王 항우項羽가 도읍했던 팽성彭城이다. 그리고 무령군은 805년 서주에 설치한 군진軍鎭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무령군이 설치된 배경은 무엇일까? 우리의 눈을 당시의 정치정세로 돌려보자.


8C 후반 당 제국을 혼란에 빠뜨린 안록산의 난 이후, 당 조정은 급격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여 무령군이 설치되는 9C 초반에 이르기까지 위기상황의 연속이었다. 이른바 번진발호藩鎭跋扈의 시기라 일컬어지는 이 시기는 지방의 군진책임자들인 각지의 절도사들이 중앙정부에 대해 공공연히 반半독립의 태도 또는 대립을 획책해 나가던 양상이었다. 한마디로 지방군벌의 시대였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시기 가장 강성한 번진이 고구려 유민 출신의 무장, 이정기(치세 765~781)가 다스리던 평로치청平盧淄靑(이하 치청)이라는 사실이다. 치청은 오늘날의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북과 하남, 안휘와 강소성의 일부를 포함하는, (전성기엔 한반도보다 더) 넓은 영역을 장악한 뒤 국호를 제齊라 표방하곤, 이정기에서 아들 이납李納(치세 781~792)과, 2명의 손자 이사고李師古(치세 792~806)와 이사도李師道(치세 806~819)에 이르기까지 4대 54년간 당 제국의 심장부를 거점으로 자립을 유지한 나라(당의 시각에선 번진)였다. 치청은 당 제국의 도성인 장안으로 이어지는 대운하를 포함한 조운선 교통로를 모조리 자신의 판도에 둠으로서 당황제 덕종德宗(재위 779~805)은 한 때 도성을 버리고 피신하는 상황까지 맞기도 했다. 그만큼 치청은 당 조정의 입장에선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 과정에서 당 조정은 이정기와 그의 아들, 손자에 대한 회유책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직책을 내렸는데, ‘평로치청절도관찰사 겸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海運押渤海新羅兩蕃使’, 또 요양군왕饒陽郡王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는 치청이 평정된 이후 신임 평로치청절도사가 그대로 이어받게 되는데, 장보고는 이러한 배경 하에서 한 때 황해무역권을 독점했던 치청의 해운력을 이어받은 것이라 보아진다.

 

                            ▲ KBS 역사스페셜에서 다룬 치청 판도. [자료사진 - 서현우]  

 

                                            ▲ 오늘날의 중국 지도. [자료사진 - 서현우]  

 

당 조정에 의한 무령군의 설치는 바로 이 평로치청 때문이었다. 필자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을 발견하곤 그것에 주목했다. 바로 무령군의 무령武寧이 백제 무령왕武寧王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직 학계에서 제기된 바 없어 뭐라 단정할 순 없지만, 필자에겐 무령군의 군진 명칭이야말로 당시 대륙에 흩어진 백제계를 규합하는데 있어 가장 안성맞춤의 명칭으로 판단되었다. 무령왕이 누구인가? 백제의 전성기를 풍미한 왕이 아닌가?


그러므로 무령군의 설치는 고구려계인 평로치청에 대한 대응에 있어 당 조정의 전통적 정책인 기미羈靡정책, 즉 이이제이의 일환이라 판단되었다.


필자의 이러한 판단의 근거로 아래의 인용문을 들어보겠다.


‘(헌덕왕憲德王) 11년 7월에 당의 운주절도사 이사도가 반역하자 (당唐황제) 헌종憲宗은 쳐서 토벌하려고 양주절도사 조공趙恭을 보내어 우리 병마를 징발하니, 왕은 칙지를 받들고 순천군順天軍 장군 김웅원金雄元에게 명하여 갑병甲兵 3만 명을 거느리고서 돕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조條>


위의 내용은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신라군의 대륙파병에 대한 기록이다. 헌덕왕 11년은 치청이 멸망한 해인 819년이며, 이사도는 이정기의 손자이자 치청의 마지막 군왕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당 조정의 치청 토벌에 무려 3만의 신라군이 동원되었다는 것과, 치청 멸망의 해에 파병된 신라군이 치청 멸망에 큰 역할을 했으리라 어렵지 않게 추정하게 된다.


더불어 위 사실에서 우리는 당의 이이제이 정책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바, 신라군의 징발은 무령군의 설치와 동일한 의도이자, 그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당시의 세력구도를 놓고 보면 신라와 당의 동맹이 한 축을 이루고 발해와 제(평로치청)의 동맹이 또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어쨌든 당 조정이 자신의 판도 내에서 전개된 평로치청의 도전에 대해서까지 신라군대를 끌어들인 것으로 볼 때 필자는 무령군의 성격 또한 그와 같은 차원이었음을 확신한다.


무령군이 대륙의 백제 세력을 규합한 것이라는 또 다른 근거는 대륙백제의 존재를 들 수 있다. 대륙백제는 요즘에 와서 국사교과서에 백제의 요서진출이란 내용으로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지만, 아직 그 전모에 대한 정립에까지 이르진 못한 상태이다. 대륙백제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기에 이 장에선 무령군의 성격과 관련한 필자의 판단 근거로만 삼기로 한다.


참고로 독자들이 치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치청을 멸한 후의 중국 측 기록을 인용하여 소개한다.


‘산동지역의 풍속이 너무 달라 관리를 파견 예속을 교육했다.’ <신당서新唐書>

‘야만의 풍속으로 살았기 때문에 교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령華令>


위 내용들을 통해 볼 때 치청은 저들 한족漢族의 생활문화와는 상이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정기 가문만이 아니라, 치청의 지배세력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다른 장에서 언급하겠지만 치청의 중심지 산동山東은 고대 중국인에게 있어서 동이東夷로 불리어온 데다, 우리 민족과 관련된 유적, 유물, 풍습, 설화가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당시까지 산동은 한족보다 동이의 문화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었고 그것이 이정기 집단의 기반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특이한 점은 치청에 대한 중국 측의 대부분의 기록엔 치청을 일러 저들의 이민족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인 호인胡人이 아니라, 고구려인이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정기 집단이 가졌던 자기정체성의 강한 반영이었으리라.


아쉽지만 다음 장에서 계속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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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신화의 이면 -2

2007년 06월 08일 (금) 22:55:05 서현우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12>


2. 장보고 신화의 이면


필자는 앞장에서 지금까지 확인되는 사서의 기록에 의거하여 장보고의 고향과 조상을 알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최근에 이 문제에 대한 하나의 낭설이 마치 정설인양 널리 퍼지고 있어, 이 장에서 우선 그것부터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필자는 이 문제를 굳이 다뤄야할지 쉬이 판단하지 못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잘못된 견해에 대한 학계의 반응이 미미해 보이는지라, 그냥 지나치기엔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역사는 학계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과 함께 숨쉬는, 대중에게 있어 정신적 공기空氣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고증과 상호비판을 거쳐 객관성을 담보하여야 하고, 또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공기의 신선도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제기하는 장보고에 대한 잘못된 견해란 무엇인가? 그것의 일반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보고의 부조父祖는 장백익張伯翼으로 중국 절강성 소주부蘇州府 용흥리龍興里에서 출생한 중국인이었으며 신라국에 여러 차례 왕래하다가 귀화하여 현재의 완도읍 장좌리에 정착하였다.’


필자가 위 내용을 처음 접한 계기는 지난해 인터넷을 통한 모 교수의 역사 강의 동영상에서였는데, 인동장씨仁同張氏 대종보大宗譜에 근거한 것으로 그 강의에서 마치 진실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때에야 필자는 같은 내용이 전국문화원 연합회의 웹페이지와 고등학교역사모임, 또 완도관광정보 등에서 출처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사실로 다뤄지고, 심지어 2001년 장보고에 관한 한 저작물에서까지 인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 위 내용을 접하는 순간 필자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위 내용의 소주蘇州야말로 당시 신라방이 위치한 곳이자, 재당신라인의 활동거점이었던 송강구松江口란 포구가 자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의 신라방과 송강구가 여러 문헌에 나타남을 필자는 알고 있었다.


필자는 관련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곧장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확인한 인동장씨대종회 사이트엔 이상하게도 장백익과 장보고에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인동장씨태상경공파 사이트에서 문제의 족보원문을 찾을 수 있었다. 아래는 그것을 직접 인용한 것이다. (편의상 띄어 씀)


‘張伯翼장백익, 字大號자대호, 官中郞將右僕射관중랑장우복야, 本中原浙江省蘇州龍興府人본중원절강성소주용흥부인, (장백익, 자는 대호, 벼슬은 중랑장우복야, 본래 중국 절강성 소주용흥부 사람이다.) 張保皐장보고, 字正集少字弓福자정집소자궁복, 唐祖(?-필자)右丞相來東國來淸海鎭大使당조우승상래동국래청해진대사, (장보고, 자는 정집, 어렸을 때 자는 궁복, 당나라 우승상을 지내다 청해진 대사로 왔다.)’ 〈인동장씨 대종보 권1, 구보舊譜〉


대종보는 이어 장보고의 증손인 장원張源이 당말唐末의 혼란기를 틈타 한반도로 망명하고, 그의 아들 장정필張貞弼이 고려 태조 왕건에 입조하여 공을 세움으로서 그를 시조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원문을 확인하자,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절강성소주용흥부’에서 절강성浙江省의 성省은 기실 원나라에서 시작된 지방행정단위이며, 소주는 예나 지금이나 절강성이 아니라, 강소성에 속한다는 점이다.


둘째, ‘용흥부龍興府’의 부府는 당의 지방제도(주현州縣제도) 하에서 당 현종 대에 대도시를 중심으로 몇 곳에 설치되었으나, ‘용흥부’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부府는 송나라(북송) 시기부터 주州와 현縣을 거느리는 행정단위로서 일반화된 것으로, 이 경우에도 단위가 바뀐 ‘소주州용흥부府’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셋째, ‘당조우승상’에서 조祖는 조朝의 오기라 하더라도, 승상은 우리의 정승에 해당하는 관직인데 장보고가 우승상을 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점이다. 이 글의 본론에서 다루게 되겠지만 청해진대사 장보고는 당나라의 군진절도사 하의 직급인 대사大使 직급에 그쳤을 뿐이다.


넷째, 장보고에서 장원張源에 이르기까지의 2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중에서 마지막 문제점이 가장 결정적 결함이라 판단하고, 인동장씨대종회에 연락을 취했다. 그것은 혹시 추가내용이 있을지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결과를 정리하자면, 장보고의 후손이라는 위 장정필張貞弼은 인동장씨가 아니라, 안동安東장씨의 시조란 것이다. 인동장씨 측에선 여태 자신들이 안동安東장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간주해 왔으나, 근래에 이르러 분파사실에 대해 종문 내부에서 의문이 제기되었다며, 한 마디로 장보고와의 관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위 내용의 근원인 안동安東장씨 측의 기록을 확인해 보았다. 아래는 안동장씨중앙대종회 사이트에 실린 내용이다.


‘자字는 정집正集이요, 어릴 때 이름은 궁복弓福인데 또 다른 이름은 궁파弓巴라고도 하였다. 관官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감의군사感義軍使, 진해장군鎭海將軍이시고, 장군의 아버지는 중국 절강성 소흥부蘇興府 용흥龍興사람이신데 당나라에서 중랑장우복야中郞將右僕射를 지냈으나 750년경(경덕왕) 신라로 귀화하였고 장군은 신라에서 태어났다. …’ 〈안동장씨중앙대종회 사이트〉


먼저 위 내용 중에 (자는 정집 제외) 전반부와, ‘장군은 신라에서 태어났다’고 한 후반부는 삼국사기를 인용하고 유추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원문에 있을 우승상이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운데에 보이는, 장군의 아버지가 ‘절강성 소흥부蘇興府 용흥龍興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안동장씨의 다른 기록에서도 일관적으로 확인되는데, 앞서 본 인동仁同장씨의 소주용흥부蘇州龍興府완 완전히 다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절강성엔 소흥부蘇興府는 물론이고 소흥蘇興이란 지명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만 글자가 다른 소흥紹興이 존재하는데, 소흥紹興은 현재 항주 만灣에 위치한 도시로 당시 재당신라인의 거점 중 하나였다. 그런데 소흥紹興은 당시 월주越州로 불리웠으며, 앞서의 소주蘇州완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서 8~9C 당시 부府를 설치하기엔 변두리 성읍城邑에 불과했다.


마지막으로, 안동安東장씨대종보의 기록 역시 장보고와 시조인 장정필을 잇는 중간의 2대가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선대先代의 자세함에 비해 후대後代의 휘諱(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소주용흥부’든 ‘소흥부용흥’이든 장보고의 원적지로서의 지명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장보고의 부조父祖로 기록된 장백익張伯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그동안 아무런 검증 없이 강단에서, 또 저서에서 진실인양 오도되어온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벌어졌다. 필자가 이 장의 서두에서 타 종문宗門에 대해 결례를 무릅쓰고까지 이 글을 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거저 두 종문에 양해를 구할 뿐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이다.


필자는 앞장에서 장보고가 입신하게 된 무령군武寧軍 군중소장軍中小將 직위를 두고 무령군이 실상 백제계의 규합일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더불어 신당서新唐書의 편찬자인 송기의 말을 근거로 장보고가 기실 신라가 아닌 당나라 사회에 근거를 둔 인물일 가능성도 언급했다. 이제 여기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들을 통해 논의를 이어가자.


우선 장보고와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이다.


알다시피 장보고는 평로치청이 멸망한 지 9년 만인 828년 오늘날의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신라본기와 열전에서 각각 ‘귀국歸國'과 ’환국還國‘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시각은 당唐에서 성공한 장보고가 금의환향한 후 신라조정을 설득하여 당시 황해에서 발흥하던 해적소탕을 위해 청해진 설치와 함께 청해진 대사大使에 임명되고 군사 1만 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엔 중대한 결함이 존재한다. 더불어 이러한 해석은 그동안 장보고의 실체에 대한 이해에 장벽이 되어 왔다. 어떤 점에서 그런 것인가?


우리는 앞장에서 인용한 삼국사기(신라본기 문성왕 조)와 삼국유사(신무대왕, 염장, 궁파 편)로부터 신라조정의 장보고에 대한 시각의 일단을 확인한 바 있다. 바로 ‘해도인海島人’과 ‘파측미巴側微’가 그것이다. 이는 일개 ‘섬사람’과 매우 ‘미천한’이란 뜻으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결정적 명분이었다.


이를 근거로 필자는 앞장에서 장보고의 신분이 신라 주류사회는 고사하고 골품제도의 바깥에 위치했음을 논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보고와 청해진에 대한 기존 해석에 이해할 수 없는 점을 발견한다. 즉 신라조정은 어떻게 이런 미천한 신분의 인물에게 청해진을 맡기고 대사大使라는 관직에다, 1만의 병권을 맡겼는가?


당시 신라 귀족사회의 신분적 배타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신라조정의 입장에선 장보고는 어디까지나 당唐에서 공을 세웠을 뿐, 자신들과는 생면부지의 관계에 있었다. 그런 인물이기에 신라조정의 행위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이것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것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장보고의 직함인 대사大使라는 칭호이다. 대사大使는 신라의 관등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17관등 중의 12관등에 대사大舍가 있긴 하나, 문자도 다를뿐더러 하위직이라 장보고의 직위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학계 일각에선 대사大使 직위가 장보고에만 한시적으로 수여된 신라의 특수직위라 보아 왔다. 그 어떤 근거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에 오류가 있음이 드러났다. 대사大使란 직위가 당唐의 관등인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문을 보자


‘대체로 군진의 대사大使와 부사는 모두 겸인을 거느린다. (범제군진대사부사개유겸인凡諸軍鎭大使副使皆有傔人)’ 〈대당육전大唐六典, 권5 병부조兵部條〉


여기서 우리는 대사大使가 당의 절도사 휘하의 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보고의 직함인 대사는 기존에 알려져 온 신라의 특수 직위가 아니라, 당唐 조정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제수 받은 것인지, 아니면 당에서부터 대사 직위에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필자의 판단으론, 치청 토벌 후 장보고가 당 조정으로부터 치청이 지배하던 문등현(오늘날의 산동성 내)의 땅을 하사받아, 적산포와 법화원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당에서 이미 대사大使 급의 직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보고가 신무왕을 옹립한 공으로 신무왕과 문성왕에 의해 각각 봉해진 감의군사感義軍使나, 진해장군鎭海將軍 직함에 대해 건국대 김광수 교수는 자신의 논문(장보고의 정치사적 위치)에서 ‘당나라 풍의 관작’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필자의 판단으로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이전이나 이후의 중국의 역대조정이 삼국이나 고려의 국왕에게 내린 칭호에서 숱하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전제한다면 또 하나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신라조정이 청해진을 설치하면서 장보고에게 당의 관작을 수여하거나, 계승토록 한 것이 되기에 말이다. 이에 우리는 청해진의 성격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에 대한 중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주장의 내용은 청해진은 신라조정의 관할영역이 아니며, 청해진대사의 직위는 당의 치청절도사 휘하의 관직이란 것이다.


일찍이 비류백제설을 주장한 김성호 박사는 그의 저서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맑은소리, 1996)’에서 청해진의 성격을 당唐에 의한 조차지라 규정했다. 즉 치외법권의 영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 근거로 왕위다툼에 휘말렸던 김우징金祐徵(후의 신무왕)이 신변의 위험을 느껴 도망간 곳이 청해진이란 것이다. 이에 신라조정은 일개변방의 군진인 청해진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여기에다 김성호 박사가 밝힌 결정적인 근거는 따로 있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開成三年秋七月(개성3년 추칠월) 新羅王金祐徵(신라왕김우징) 遣淄靑節都使奴婢(견치청절도사노비) 帝矜以遠人(제긍이원인) 詔令却歸本國(조령각귀본국), (838년 가을 7월 신라왕 김우징은 치청절도사에게 노비를 보냈지만, 황제는 멀리서 온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도록 조서를 내렸다)’ 〈책부원구冊府元龜 권980, 외신부통호조外臣部通好條〉


여기서 주목할 점은 838년 7월이면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시기인데, 당나라에선 김우징을 신라왕이라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근거하여 김성호 박사는 김우징이 청해진 시기에 이미 당 조정으로부터 신라왕으로 책봉을 받았으며, 그 배경에 장보고가 있었다고 본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위 내용에 대해 김우징이 신무왕으로 즉위한 후인 839년 7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 달에 김우징이 죽었다는 점과, 구당서舊唐書 천문조天文條 및 일본의 엔닌圓仁일기 등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신라본기가 장보고와 청해진의 정치사적 무게를 말살하기 위해 기년을 조작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도 위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지면상 다 다룰 수 없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장보고에 대한 기록엔 이 외에도 중국의 기록과 기년이 다른 경우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청해진의 치외법권적 성격은 신라본기 문성왕(신무왕의 아들) 조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일길찬 홍필弘弼이 모반하다 발각되어 해도로 도망갔는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의 해도가 바로 청해진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청해진은 신라조정의 입장에선 매우 부담스런 존재였을 것이다. 알다시피 김우징은 청해진에서의 신변안전은 물론이고 군사를 일으켜 왕위에 오르기까지 장보고의 결정적 도움에 힘입었다. 이러한 사정이 장보고가 암살되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더하여 무엇보다 장보고와 청해진의 성격에 대해 빼놓을 수 없는 점은 장보고 사후(841년)에 발생한 나당간의 외교분쟁이다. 무려 5년간이나 외교가 단절된 것이다. 결국 신라사신의 당唐입조(846년)로 외교가 재개되긴 했지만, 신라는 장보고의 죽음에 대해 변명부터 늘어놓아야 했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엔 장보고가 그해(846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여 장보고로 인한 외교적 교착상태를 은폐하고 있다. 위의 내용들을 통해 우리는 신당서新唐書의 편찬자인 송기가 왜 ‘당에 보고가 있다’고 한 것인지 그 배경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다.


이번엔 장보고의 성씨인 장張씨를 통해 장보고가 ‘백제계 재당신라인’이란 근거에 접근해 보자.


현재 우리나라의 장張씨는 위에서 언급한 인동仁同 및 안동安東이 다수를 이루는 가운데 흥성興城과 목천木川 등 30여 본本이 존재한다. 이 중에 덕수德水와 절강浙江 본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안동 본을 연원으로 한 것이라 알려져 왔다. 덕수와 절강은 각각 고려조와 조선조에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귀화한 것이 매우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인동仁同 측에선 안동安東과의 혈연적 관계에 의문을 제기한 데다, 조선 중기의 백과전서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엔 인동의 유래를 따로 밝히고 있다. 어쨌든 여태까지 안동安東을 연원으로 한 것이라 알려짐으로서 우리나라 장張씨는 모두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되어, 흔히 장張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라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엔 문제가 있다. 바로 백제의 성씨姓氏에서 장張씨의 존재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1960년 중국 하남성(노산현 대왕촌)에서 발견된 백제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난원경難元慶의 묘지석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이다. 연구의 결과로 위 난難씨를 포함한 장張씨와 왕王씨 화和씨 등이 백제의 성씨이며, 이들 성씨가 부여족 계통의 성씨임이 드러났다. 이로서 우리는 왕인王仁 박사의 왕씨가 백제의 일반적 성씨 중의 하나임과, 기존의 중국사서의 기록에 나타난 백제의 성씨에 더하여 백제엔 실로 다양한 성씨가 존재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732년 발해 해군을 이끌고 당의 등주登州(산동성 북단)를 공격한 발해 장군의 이름이 장문휴張文休이다. 또 장보고와 재당신라인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기록엔, 재당신라인으로서 장영張詠, 장종언張從彦, 장지신張支信, 등의 장씨들이 보인다. 이러한 점 등으로 볼 때 본래 성이 없던 궁복弓福이 후에 입신하여 성과 이름을 얻어 장보고라 한 것이란 기존의 시각엔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장張씨 성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일반의 생각도 잘못된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우리나라 성씨족보들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시조의 기원이 까마득한 옛날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중국의 신화시대의 인물인 삼황오제에까지 연결하여 기록된 것도 허다하다.


물론 한국사는 아시아동북사의 일부이며 그에 따라 씨족의 이동이 빈번했다. 그렇지만 족보의 기원은 중국 북송北宋 시기에서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일반화되기 시작한 때는 고려 말에서 조선조에 들어서면서였다. 그럼에도 시조의 기원을 무조건 멀리 잡아 중국에 연결시킨 것은 필자의 판단으로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기초하여 소중화小中華를 쫓던 조선 후기의 사대부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아진다. 한편으로 우리 고대사 사료가 워낙 망실된 결과가 그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만이 장보고가 ‘백제계 재당신라인’이란 근거의 전부는 아니다. 다음 장에선 ‘재당신라인’의 활동을 통해 우리 해양사의 전모와 기원에 다가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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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와 장지신

2007년 06월 16일 (토) 12:17:32.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13>


3. 장보고와 장지신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위는 인도의 시성詩聖으로 평가받는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의 동방의 등불에서 첫 문단을 발췌한 것이다.


여기서 아시아의 황금시대는 언제일까?


바로 장보고의 시대에서 수 세기에 걸쳐 아시아 바다에서 전개된 항해의 시대라 보아진다.


이즈음 고려 선단이 동아지중해와 인도양의 해상 실크로드를 수놓을 때, 멀리 아라비아에서, 인도와 동남아시아, 동중국해를 가로질러, 고려의 벽란도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의 항구들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더불어 아시아 내륙, 사막의 곳곳에선 오아시스 문명이 만개했다.


고려의 개성은 중국의 광주, 항주, 장안이 그렇듯이 국제문화로 넘쳐났고, 인도의 캘리컷과 스리랑카 연안의 포구에선 고려의 무신정변과 십자군 전쟁의 전황들이 함께 화제로 오르내렸다.


이 시기 아시아는 일찍이 없었던 번영을 구가했다. 이 기간 아시아에서 전개된 교역량은 동 기간 세계 총 교역량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오늘날 세계경제의 견인차라는 아시아 경제도 세계 총 교역량과의 대비에서 아직 이 시대를 뛰어넘지 못한다.


필자는 이 시대를 아시아의 황금시대라 일컫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장보고는 천재다.’


이는 9~10C 동서교역사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 어시누스 대학의 휴 클라크 교수가 1992년 전라남도 완도 일대의 장보고 유적지를 직접 둘러보고 한 말이다. 클라크 교수의 이러한 평가엔 바로 9C의 시대상황이 배경으로 자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클라크 교수의 평가는 어딘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만약 클라크 교수가 장보고를 9C 동아시아 해상활동의 상징으로 간주했다면 합당한 평가가 되겠지만, 전적으로 장보고란 한 인격체에 대한 평가라면 역사적 평가로선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시대상황과 유리된 존재로서의 개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후자의 평가야말로 전형적인 영웅주의 사관의 반영일 뿐인 것이다. 즉 장보고의 활동과 그의 청해진 설치는 시대상황과 시대적 요구, 그에 따른 시대정신의 차원에서 바라봐야만 응당한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9C는 이미 오랜 해양활동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던 데다, 동아시아 정치정세의 안정에 따라 그 활동영역의 확장이 요구되던 시대였다. 달리 말하면 장보고의 천재성은 시대를 뛰어넘은 독창성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동력으로 하여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장보고는 한 사람의 재당在唐신라인이자, 그 일원일 뿐, 재당신라인 자체는 아니었다. 더구나 신라방, 신라촌, 신라원 등은 장보고의 휘하에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상호 수평적 협력관계의 재당신라인 네트웍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진정한 해상왕은 장보고가 아니라, 재당신라인 전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장보고에게 붙여진 ‘해신海神’은 어디까지나 문학적 시각일 뿐, 결코 역사적 평가가 될 수 없다. 역사엔 신神이 개입할 틈이 없지 않은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필자는 앞서, 오늘날의 장보고가 있기까지 미국의 고故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그가 몸담았던 하버드 대학 동아시아연구소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따 라이샤워 센터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장보고에 대해 라이샤워 교수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장보고와 동시대의 인물이자, 9C 일본불교 중흥의 기틀을 다진 일본천태종 승려 자각대사慈覺大師 엔닌圓仁이다.


엔닌은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가 남긴 유명한 ‘자각대사慈覺大師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이른바 엔닌일기圓仁日記 덕분이다. 이 엔닌일기는 문자 그대로 불법을 얻기 위해 당나라를 순례한 여행기인데, 10여 년간(838.6~847.12)에 걸친 일기형식의 기록이다.


라이샤워 교수는 엔닌일기에 대해 ‘극동역사에서의 가장 위대한 여행기’라 평가했고, 일본의 두 학자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당나라 승려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더불어 세계 3대 여행기의 하나로 간주했다.


어쨌든 실로 이 엔닌일기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장보고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연히 라이샤워 교수가 장보고를 처음 접한 것도 바로 이 엔닌일기에서이다.


그런데 이 엔닌일기를 들여다보면 무대만 당나라였지, 마치 신라를 여행한 듯, 기록된 인물의 대부분이 재당신라인이다. 그만큼 당대 재당신라인의 활동상과 진면목을 오늘에 전하여 우리에게 재당신라인의 역사적 위상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또 일기 형식이라 나날의 상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더하여 당시 동북아의 정치, 교통, 문화 및 생활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기까지 한다.


이에 비해 중국 측의 기록인 (구)당서나, 신당서, 자치통감 등은 동시대의 기록인 엔닌일기에 비해 1~2백년 후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재당신라인사회에 대해선 거의 언급이 없다(구당서엔 장보고에 대한 기록조차 전무). 동시대의 기록으로 장보고에 대해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두목杜牧(803~853)의 번천문집樊川文潗이 있으나, 이 역시 재당신라인사회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장보고에 대한 신당서의 기록(권220, 동이전, 신라전)과 삼국사기 열전의 그것은 모두 번천문집의 기록(권6, 장보고․정년전)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당시 재당신라인에 대한 최고수준의 기록을 남긴 엔닌일기는 우리 해양사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 있어서 가히 보물과 같은 1급 사료인 셈이다.


이제 엔닌일기를 통해 당시의 재당신라인사회를 들여다보자.


당시 재당신라인사회는 오늘날의 산동에서 하남, 강소, 안휘, 절강에 이르기까지, 해하海河, 황하黃河, 회하淮河, 양자강揚子江, 전당강錢唐江과 그 지류를 잇는 대운하 교통로의 요지마다 신라방이나, 신라촌을 형성하여 상호 연결되어 있었다. 유명한 문등현 적산포(현재의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를 비롯하여 유산포, 묵주, 숙성촌, 연수현, 초주, 양주, 소주, 항주, 월주, 명주 등이 모두 재당신라인들의 거점지역이었다.


재당신라인들은 단순히 운송교역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다. 숯이나, 소금과 같은 당시 부가가치가 높은 황금산업을 직접 생산하는 등 생산과 물류의 전반에 걸쳐 독자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에 비교하면 종합상사의 역할을 한 셈이다.


한편으로 재당신라인 거주지로서 도시지역엔 신라방坊이, 시골교외엔 신라촌村이 있었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자치기구로서 신라소所가 설치되어 책임자로 대사大使가 있었다.


독자들은 앞서 대당육전을 근거로 대사大使 직위가 당나라의 관직임을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방과 신라촌의 행정책임자인 신라소대사를 통해 대사란 직위를 다시 확인한 셈이다.


어쨌든 이처럼 재당신라인이 당나라사회에서 독자적인 자치를 꾸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배경으로 당나라의 전통적인 정책인 기미羈糜정책을 들 수 있다. 기미정책은 이민족에 대한 간접통제정책으로서 이민족에 의한 이민족의 관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당나라 초기 당 태종의 화이관華夷觀에서 유래하는데, 당 태종 자신이 수隋황실과 더불어 선비족의 척발拓拔씨에서 유래한 만큼 화이華夷를 크게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측천무후를 거치며 이민족에 대한 정책의 폭은 더욱 확대되었는데, 고구려의 멸망 후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을 요동주도독조선왕遼東主都督朝鮮王에 봉하거나, 또 그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요동도독에 봉하여 고구려유민을 통제하게 한 것이 그 예이다. 더하여 유명한 고선지와 흑치상지 장군, 또 앞에서 언급한 난원경과, 최근에 묘지석 발견사실이 국내로 전해진 또 한 명의 백제유민출신의 무장 예식진 등도 같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령군의 설치나, 신라소 설치 등이 모두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다 재당신라인사회에 대해 외면한 중국의 사서가 굳이 장보고와 정연을 따로 기록한 이유를 엿 보게 된다. 바로 장보고와 정연 두 사람은 무령군의 장수로 활약한 데다, 나란히 청해진을 맡았기 때문이다. (신당서는 번천문집을 인용하여, 장보고가 신무왕을 세운 뒤 신라의 재상이 되었으며 정연이 청해진을 맡았다고 기록함) 즉 당唐조정의 시각에서 두 사람은 당나라의 관리로 당나라에 공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볼 때 당나라는 중국의 역대통일왕조 중에 가장 개방적인 왕조였다. 그러한 요인이야말로 9C 동아지중해 바다를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역사의 전개는 당나라의 몰락 후, 열국 시대를 거치며 등장한 조광윤趙匡胤의 송宋나라 한족정권에 의해 중화주의가 급격히 강화되고, 이를 계승하여 강고한 중화사상을 체계화한 명나라는 급기야 바다와 단절을 선언한다.


또한 명나라에 뒤이어 탄생한 신생국 조선은 고려의 중상주의를 포기하고, 스스로 명나라 주도의 중화질서에 몸 담으로서, (비록 시간적 간격을 두지만) 사실상의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장보고와 청해진, 그리고 당시의 해상활동을 들여다보자.


오늘날 우리들 중 누군가에게 장보고를 왜 해상왕이라 하는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반응은 단지 이럴 것이다.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의 활동을 방지하고, 황해를 지배하여 한반도를 중심으로 일본열도와 중국을 잇는 삼각무역으로 부를 쌓았다’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시대를 앞서나가 바다를 통한 무역의 중요성을 몸소 구현해 보인 인물이다’ 정도일 것이다. 사실 그 외에 뚜렷하게 설명할 것이 없다. 우리 사서에 기록된 장보고 관련 기사의 대부분은 해상활동에서가 아니라, 신라의 정치적 정변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의 장보고를 이해하기 위해 청해진과 당시의 항로에 대해 알아보자.


장보고의 청해진은 그의 당나라 내 근거지인 문등현 적산포와 일본의 규슈를 잇는 교역로, 이른바 적산赤山항로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청해진은 동중국해를 가로질러 양자강 하구의 양주揚州나, 항주만의 명주明州에 이르는 사단斜斷항로 및 그에 부속되는 탐라항로와의 교차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 고대항로. [사진-서현우]


엔닌일기를 통해 확인되는 당시 재당신라인의 해상항로는 위의 적산항로와 사단항로에다, 일본규슈에서 탐라 남단의 동중국해로를 거쳐 직접 명주로 이어지는 명주항로가 그 주축을 이루었다. 그리고 필경 발해만이나 유구열도, 동해 연안을 따라 연해주로 이어지는 또 다른 항로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다 중국내륙을 사통팔달로 연결한 운하망이 더해져 가히 바다와 육지가 하나의 교통망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명주와 양주에서 동중국해 연안을 따라 산동 적산포를 잇는 동중국해 연안항로는 매우 침체되어 있었는데, 이 항로는 암초 등으로 항해하기가 불편했고, 연안지역이 낙후되어 경제적 가치도 낮은데다, 무엇보다 내륙 운하의 개통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더하여 엔닌일기엔 엔닌이 일본 규슈를 출발하여 양자강 하구의 해능현海陵縣을 통해 당나라에 불법 입국한 뒤 입국허가에서부터 적산포를 통해 귀국선에 오르기까지 여행의 전 과정에 이르는 10여 년간을 재당신라인의 도움에 의해서 가능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엔닌일기를 통해 당시 재당신라인들이 위 항로와 당나라 내 운하물류의 중심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장보고와 그의 시대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아래는 중국 항주만 초입에 위치한 주산군도舟山群島의 지도이다.

 

                                                ▲ 주산(舟山)군도. [사진-서현우]


주산군도는 오늘날 중국 최대의 군도로 섬의 기준에 따라 적게는 150에서, 많게는 600여 섬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요 섬은 주산도舟山島를 비롯하여 보타도普陀島, 대산도岱山島, 주가첨도朱家尖島, 도화도桃花島, 육횡도六橫島 등이다.


그런데 이 주산군도는 인근의 명주明州(지금의 영파)와 더불어 재당신라인의 주요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상 빈번했던 해상반란의 근거지로서, 중국사의 전개 속에서 우리와 관련하여 계속적으로 주목되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곳은 보타도이다. 보타도엔 중국불교 4대성지의 하나이자, 관음신앙의 산실인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이 자리하고 있다.


불긍거관음원은 원래의 이름이 관음사로 장보고의 적산법화원과 마찬가지로 당시 재당신라인의 항해사찰이었다. 또한 적산법화원이 엔닌이 머물렀던 곳이라면 동시대 이곳의 관음사는 일본승려 에가쿠(혜악惠萼)가 머물며 그와의 인연을 남겨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오늘날 적산법화원과 이곳의 불긍거관음원엔 일본관광객이 발길이 넘쳐난다고 한다.

 

                                              ▲ 보타도의 불긍거관음현. [사진-서현우]


보타도는 또한 고려 시대 충숙왕(1294~1339)과 문장으로 이름 높았던 이제현李齊賢(1287~1367), 그리고 나옹화상懶翁和尙(1320~1376) 등 당대 고려의 엘리트지식인이 다녀간 곳으로, 당시 고려인 여행자의 순례 코스이기도 했다.


어쨌든 당시 이곳을 거점으로 활약한 재당신라인 중에 필자가 주목하는 한 인물이 있다. 장지신張支信이란 이름의 인물인데, 필자에게 있어서 장보고보다도 더욱 크게 느껴지는 인물이다. 이제부터 독자들과 함께 이 인물에 대해 알아보자.


장지신은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후기續日本後記, 일본기략日本紀略, 삼대실록三代實錄 등과 엔닌일기를 비롯한 안상사가람연기자재장安祥寺伽藍緣起資財帳, 입당오가전入唐五家傳, 평안유문平安遺文의 사찬사료에 그 이름을 전해오는데, 실로 그는 장보고를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수차례나 일본을 왕래하는 동안 명주항로를 한번은 3일 만에, 또 한 번은 4일 만에 주파하여 오늘의 사가史家들로부터 명주항로의 베테랑 또는 쾌속항해가라 불리기도 한다. 또 일본에서 선박 한 척을 건조해서 돌아갔다는 기록을 통해 그는 항해술뿐만 아니라, 조선술에서도 일가견이 있음을 말해준다.


어쨌든 이 인물은 장보고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그 근거는 그의 근거지인 보타도와 장보고의 근거지인 청해진과의 연관성에 있다. 아래에서 그것을 확인해 보자.


보타도               완도                  석도진(산동)         제주도


상왕봉象王峯     상황봉象皇峯      적산赤山

법화동法簧        법화사法花寺      법화원法華院       법화사法華寺

관읍사觀音寺     관음암觀音庵                                관음사觀音寺

조음동潮音洞     조음도助音島

신라초新羅礁


독자들은 위의 비교를 통해 당시의 해상 네트웍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보타도와 완도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볼 수 있다. 즉 청해진이 자리했던 완도가 정작 장보고의 원근거지인 산동 석도진에 비해, 오히려 보타도와 더 많은 지명을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닌가?

 

                         ▲ 완도지도. 법화사와 관음사가 확인된다(가운데). [사진-서현우]


위 지명들은 오늘날에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단지 완도의 조음도만 전해지지 않는데, 삼국사기 ‘지志, 제사祭祀’조의 ‘청해진조음도淸海鎭助音島’란 구절에서 고려시대까지 완도가 조음도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위에 보이는 제주도의 두 사찰은 조선 중․후기를 지나면서 불교의 쇠퇴와 사찰정비로 모두 사라진 뒤 20C 초에 관음사가, 중기에 법화사가 재건되어 현재까지 사맥寺脈을 잇고 있다. 이와 관련해선 다른 장에서 쿠빌라이와 백제사신을 통해 다시 언급될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위 지명의 비교를 통해 보타도와 청해진의 관련성을 확인하게 된다. 한마디로 둘 관계는 형제의 관계이다. 그것은 단지 정체성의 공유에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진다. 


이러한 생각을 더해주는 근거가 장보고와 장지신의 공통의 성씨인 장張씨이다. 나아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장보고에 대한 시각, 즉 ‘해도인海島人’에 이른다. 여기서 해도인은 삼국유사의 ‘파측미巴側微’와 연관해 볼 때 확실히 출신지를 뜻한다. 그렇다면 장보고의 출신지로서의 해도는 어디일까? 지금까지 보았듯이 그 어디에도 장보고가 청해진 출신이란 근거는 없다. 더구나 장보고가 신라출신이 아닐 가능성을 전제할 때 장보고와 연관되는 유일한 ‘해도’는 바로 보타도를 포함한 주산군도이다.


과연 장보고가 주산군도 출신일까? 이에 대한 정황적 뒷받침을 하나 소개한다. 산동성 적산법화원 인근의 사찰인 무염원無染院에 전해오는 무염원중수비의 내용인데, 김성호 박사의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맑은소리, 1996)’에서 인용한 것이다.


‘鷄林金淸押衙(계림김청압아) … 身來靑社(신래청사) 資誼鄞水(자의은수) ….’


위의 계림김청압아鷄林金淸押衙에서 계림鷄林은 신라를 달리 부르는 말이며, 압아押衙는 관직명인데 엔닌일기에선 주로 신라역어(통역관)를 지칭했다. 그 다음의 신래청사身來靑社는 ‘몸이 청사에서 왔다’는 뜻으로 출신지를 의미한다. 여기서 이 청사靑社가 문제의 핵심인데, 다른 장에서 확인하겠지만 이 청사가 바로 주산군도이다. 마지막의 자의은수資誼鄞水의 자의에서 자資‘는 일반적인 재물 외에 ‘주다’ ‘취하다’ ‘쓰다’란 뜻을 담고 있는데다, 의誼는 ‘정情’이나 ‘의논하다’란 뜻으로서, 자의資誼는 ‘노닐다’, ‘활동하다’의 뜻이라 하며, 은수는 명주明州(현재의 영파) 남쪽의 강 이름으로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성) 봉화현 은현鄞縣을 발원으로 한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뜻을 정리해보면 ‘신라인 압아 김청은 … 청사(주산군도) 출신으로 은수에서 활동했다.’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명주는 항주만에 위치해 있으므로 명주와 은수는 모두 주산군도와 지척의 거리에 있다.


무염원중수비의 위 내용은 무염원 창건(901년) 당시의 비문을 인용한 것으로, 우리는 당시 적산법화원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김청이 무염사 창건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장보고와 적산법화원, 적산법화원과 김청, 김청과 주산군도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장보고와 주산군도 보타도와의 관계를 여기서 거듭 확인하게 된다.


다음 장에서 이어가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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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군도

<서현우의 바다의 한국사 14>


4. 신라군도


주산군도는 재당신라인의 활동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곳이다. 어쩌면 청해진보다 더욱 그럴 것이라 여겨진다. 그 근거로 크게 3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것은 존속기간과 정치적 성격, 또 지리적 위치이다.


우선 존속기간에 대해서 살펴보자.


알다시피 청해진이 설치된 때는 당나라에서 번진발호가 종식된 지 9년 후인 828년이다. 그 9년간 장보고는 적산항로의 유용성을 인식하고 적산법화원을 건립하는 등 해상활동의 기반을 구축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해진은 불과 23년만인 851년 신라조정에 의해 폐지되고 만다. 더구나 이 기간은 장보고가 피살된(841년) 후의 유명무실했던 존속기간 10년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문성왕 13년(851년) 봄 2월 청해진의 폐지와 그곳의 백성을 벽골군碧骨郡(지금의 김제)으로 옮겼다’는 기록에서 청해진이 폐지된 때를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주산군도는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수 세기에 걸쳐 동아시아 해상활동의 중심 영역에 있었다.


다음으로 당시 주산군도의 정치적 성격을 살펴보자.


필자가 주산군도의 중요성에 있어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주산군도는 당唐의 관할지역이 아니었다. 즉 당의 행정구역 밖에 위치하여 당 조정에 대해 독립적이었다는 말이다. 아래는 819년 당唐 조정에 의해 지방행정 정비령이 시행될 때 절동관찰사(절강성 동부 관할) 설융薛戎이 당唐황제 헌종에게 올린 품의의 내용을 인용하고 해석한 것이다.


‘今當道望海鎭(금당도망해진) 去明州七十餘里(거명주칠십여리) 俯臨大海(부림대해) 東與新羅日本諸蕃接界(동여신라일본제번접계) 請據文不屬明州(청거문불속명주), 許之(허지).’ 〈당회요唐會要, 권78 제사잡록諸事雜錄(상上) 원화元和14년 8월조條〉


‘현재 우리 도道의 망해진은 명주에서 70여리 떨어져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동쪽의 신라와 일본 제번諸蕃이 서로 경계를 접하고 문서를 통해 명주에 속하지 않겠다고 청원해 왔습니다. 이에 (황제는) 허락하다.’


위에서 망해진은 현재의 진해鎭海이고 명주는 현재의 영파寧波인데, 바다 동쪽의 신라일본제번이 바로 주산군도이다. 그리고 819년은 이정기의 치청이 무너지고 번진발호가 종식된 해이다. 이로서 우리는 장보고와 장지신이 활약할 시기의 주산군도는 당나라의 통치권 밖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우리는 2가지 사실을 더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주산군도에 대한 정치적 성격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설융의 시각인 제번諸蕃이다. 중국의 전통적 화이관華夷觀에서 번蕃은 황제의 통치권 밖의 지역, 즉 외국을 일컫는 말이다. 그에 반해 통치권 내의 외국인 거주지는 번방蕃坊이라 하여 따로 구분하였다. 그 예로 당시 양주와 명주에 거주하던 수십 만 명의 아리비아인과 페르시아인들의 거주지는 반드시 번방이라 지칭했음을 들 수 있다. 그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라방의 경우엔 번방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신라번방이라 하지 않고 신라방이라 한 것은 당시 재당신라인이 외국인이 아니라, 고선지나 흑치상지와 같이 당나라 국적자로 취급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주산군도의 신라번에 대해선 일본의 사서에서도 확인되는데 속일본기 보구寶龜 연간의 ‘근래 신라번 사람들이 빈번히 내왕한다.(比年新羅蕃人비년신라번인 頻有來者빈유래자)’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리는 위 당회요와 속일본기의 기록에서 당시 주산군도가 신라번으로 당唐에 대해 독립적인 집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머지 사실의 하나는 설융이 주산군도를 신라일본제번이라 하여 마치 주산군도에 일본번이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했으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어떤 사료도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지 주산군도가 명주항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일본인의 내왕이 잦았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일본번은 당시 명주불속을 실현하기 위한 주산군도 주민의 세勢의 과시로 판단된다.


그런데 당시 당唐조정이 주산군도의 명주불속 청원을 허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나름의 배경이 있다. 그것은 주산군도의 역사이다.


역사적으로 주산군도가 중국 역대왕조의 통치영역에 들었던 때는 사실상 당唐현종 시기 주산군도에 옹산현翁山縣을 설치한 738년의 일이다. 이것이 주산군도에 설치된 역사상 최초의 행정기구이며, 그때서야 비로소 이전의 명복상의 지배에서 실제적 통치를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옹산현은 불과 25년 만에 폐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을 거점으로 일어난 원조袁晁의 반란(거병) 때문이었다. 원조의 반란은 무려 20여만의 병력이 동원된 대규모 반란으로, 원조가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표방한 연호 보승寶勝은 당시 당 황제 숙종의 연호인 보응寶應에 대항한 것이었다. 즉 당唐을 꺾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거병의 규모나, 성격에서 볼 때 단순한 지방 차원의 반란이 아니었다.


위 거병이 오늘날 중국사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우리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은 원조의 기반이 절동지방의 해상세력에 기반한데다, 절동지방은 과거 백제의 해외영토였기 때문이다. 즉 원조의 거병은 백제를 무너뜨린 당唐에 대한 복수이자, 백제 재건의 시도일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또한 당시 북방에서 일어난 안록산.사사명의 난과 맞물려 결과적으로 당唐제국을 번진발호 사태로 이끄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 요인이야말로 간신히 번진발호를 수습한 당 조정이 주산군도의 명주불속 청원을 받아들인 배경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원조의 거병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거병의 후예들은 재당신라인으로 변모하여 9C 동아지중해 해상무역을 지배하며 힘을 구축한 뒤, 당唐 멸망시기 절동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왕국을 건설하는데 이 왕국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자유무역국가이자, 당대當代 중국의 한족 왕조들에 의해 동이東夷계 국가로 지목된 오월국吳越國이다. 이에 대해선 다른 장에서 다시 논할 것이다.


이제 주산군도와 청해진의 위치를 놓고 주산군도의 상대적 중요성을 논해 보자.


우리는 앞 장에서 항주만 어귀에 위치한 주산군도의 지도를 확인한 바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보타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앞 장의 지도에서 보타산普陀山이라 표기됨)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보타도는 중국불교 관음신앙의 산실이자, 주산군도의 중심이다. 보타도란 이름과 관음신앙은 인도남부의 보타락가산普陀落迦山에서 유래하는데, 우리나라 강화도의 보문암普門庵, 여수 금오산의 향일암向日庵, 남해의 보리암菩提庵, 강원도 낙산사의 홍련암紅蓮庵 등이 모두 관음도량이다. 관음신앙은 항해 및 해양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타도의 불긍거관음원과 마찬가지로 섬이나 해안가에 위치한 우리나라의 관음사찰도 원래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항해사찰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앞서 ‘라의 세계’에서 촐라국과 체라국을 통해 만난 남부인도를 이번엔 관음신앙의 시원始原인 보타락가산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어쨌든  장지신은 당시 이곳 보타도와 관음사를 활동거점으로 하고 있었다. 그가 근거지로 한 주산군도는 동중국해 연안의 한가운데에 위치한데다, 명주나, 양자강 하구의 양주를 지척에 둔 항로의 기로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명주와 양주는 거대한 중국시장의 해상관문으로 아라비아 및 페르시아와의 교역의 접점이었다. 더구나 이들 도시는 배후생산기지로서의 역할까지 맡았는데, 당시 명주 인근의 월주도요지는 청자의 집산지로 이름이 높았고, 의복기술로도 유명했다. 이곳의 의복기술의 역사는 역대 황실과 모택동, 주은래의 전담 재봉사를 배출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재봉사들의 명성은 ‘홍방紅帮’이란 이름으로 오늘에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므로 장지신은 당시 이러한 생산품을 동남아와 인도,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에 공급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장보고는 상대적으로 커다란 만灣에 불과한 황해를 뒷무대로 하여 산동과 일본을 잇는 적산항로를 담당하는 데에 그쳤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고작 13년간을 말이다.


더구나 장지신은 앞서 살펴본 주산군도의 정치적 성격이 말해주듯 독립적인 입장에서 활동이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장보고의 청해진은 당唐과 신라조정을 그 배경으로 한 만큼 활동의 제약이 따랐다. 장보고가 신라의 정변에 가담하고, 또 자신이 옹립한 신라조정과 갈등국면을 초래하다 암살당한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장보고와 장지신.


황해를 가로질러 한반도 남해연안을 따라 일본 규슈로 이어지는 적산항로를 지배한 장보고. 그리고 명주와 보타도에서 동중국해를 가로질러 일본 규슈에 이르는 명주항로의 달인 장지신.


일본의 사료엔 장지신의 해운력과 함께 당시 발해 선단의 활동 법위가 광동에까지 이르렀음을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산군도를 거점으로 한 장지신의 활동역역은 필경 필리핀과 보르네오, 말라카 해협의 동남아 일대에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 지역은 이미 수백 년 전 백제선단의 무대였음에 더욱 그럴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인도양과 아라비아 해를 거쳐 아프리카 동부 연안에까지 이르렀을 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와크와크’라 불린 극동계 선원들이 상아와 해구갑을 구하기 위해 동아프리카를 들락거렸다는 아랍의 기록이 그것의 희미한 흔적이리라.


필자가 지금까지 장지신에 주목해온 이유가 위의 이러한 점들 때문이다.


우리는 앞장에서 청해진과 보타도의 친연성을 확인한 바 있다. 여기에다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즉 청해진이 배후기지라면 보타도는 전진기지라고. 달리 말해서 장보고가 황해의 지배자라면 장지신이야말로 동아지중해의 지배자라고 말이다.


다른 장에서 따로 논하겠지만 우리는 해당 시대時代를 잣대삼아 선인들의 능력과 지혜를 가늠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시대가 과거로 멀어질수록 무조건 후대에 비해 그 능력을 저급하게 인식하는 고정관념을 말이다. 이는 서양 역사학이 낳은 오류이다.


엔닌일기에 의하면 신라의 내부 사정이 산동 적산법화원에 알려지기까지 고작 10여 일 남짓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보전달 속도에 필자 또한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재당신라인 네트웍은 이러한 능력에 기초하여 당대 동아지중해 무역권을 주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일본의 기록을 보면 당시 재당신라인에 의한 명주항로의 평균 항해일은 6~7일이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장지신은 2차례나 3~4일 만에 일본에 도착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에 비해서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장지신은 이러한 인물임에도 오늘날 크게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요인은 장지신이 장보고와 달리 당唐이나 신라에 대해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당의 기미정책의 밖에 존재함으로 인하여 이민족인 그에게 후대의 중국사가史家들이 주목할 일이 없었을 것이며, 송宋이나 명明의 통일한족漢族정권에서 반복하여 행해진 이른바 역사공정은 자신들의 통치권 내부의 이민족의 역사를 은폐하기에 급급했을 뿐이다.


우리 해양사는 정확히 그 기원을 알 수 없을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앞장에서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 걸쳐 우리 해양사의 궤적들을 더듬어 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조선造船 역사도 그만큼 오래되었음이 틀림없다.


이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2년 전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견된 통나무배이다. 원래 길이가 4m 정도로 가늠되는 이 배는 소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8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알려진 바, 세계에서 가장 앞선 시기의 배이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이제 9C 당시 해운력의 기반인 선박의 규모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본의 기록에 전해오는 9C 신라선의 규모는 전장 20m 전후에 장폭비(전장/폭)가 4 정도였다. 그런데 일본의 학계에선 명주항로를 취항하는 선박의 규모를 전장 30m, 전폭 8.5m, 배수량 280톤, 적재량 150톤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다 사찬사료인 입당오가전入唐五家傳의 두타친왕입당략기頭陀親王入唐略記엔, (847년 7월) 장지신이 명주로 돌아가기 위해 일본에서 건조한 선박의 승선인원이 60여 명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는 이보다 무려 650여 년 뒤인 1492년 신대륙을 향해 닻을 올렸던 콜럼버스의 선단이 3대의 선박에 총인원 88명이었음을 감안할 때 장지신의 선박이 승선인원에서 무려 2배나 되는 셈이다.

 

                                              ▲ 신라선의 구조. [사진자료 - 서현우]

 

                                          ▲ 복원 신라선 모형. [자료사진 - 서현우]


선박의 구조는 평저선으로 상판과 하판의 비율이 2대 1이며, 하부엔 격자식의 칸막이 구조, 이른바 수밀격벽의 구조였다. 이는 일부가 침수되어도 항해할 수 있는 내구성이 강한 구조로서 대양항해에 용이했을 것이다.


참고로 콜럼버스의 주선主船인 산타마리아 호는 전장 29m에 배수량 233톤이었다. 그보다 몇 년 후 희망봉을 통과하여 인도에 도착한 바스코 다가마의 주선 카브리엘 호는 산타마리아 호 규모의 반半에 불과했다. 이 당시의 서양의 선박은 신라선에 비해 장폭 비율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폭이 좁다는 말이다.


지난해 중국 산동성 봉래蓬萊시 앞 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선(봉래3,4호) 중 비교적 형체가 많이 남은 봉래선 3호는 현존 전장 17.1m, 선폭 6.2m인데, 신라선의 장폭비에 대비하면 실제 전장 25m 정도로 추정된다.


이 선박의 발견에 대해 언론들은 고려선의 먼 바다로의 항해의 증거라고 앞 다퉈 보도한 바 있다. 한편으로 어느 교수는 ‘한선韓船이 확실한데 한선에 없는 수밀격벽 구조가 흥미롭다’라고 평한 바 있다. 필자의 판단으론 수밀격벽 구조가 원래 우리 조선술의 전통인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양항해를 포기함으로서 불필요하게 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유명한 신안선에 대해 주의를 돌려 보자. 신안선은 1975년 전라남도 신안 앞바다에서 8천여 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원元나라 시기의 중국 선박이다.


이 선박의 구조는 전장 34m, 최대 폭이 10.3m로 추정되며, 첨저형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선박에서 출항지를 나타내는 경원慶元이란 글자가 발견되었는데, 이 경원이 바로 9C의 명주로, 오늘의 영파이다. 다른 장에서 논하겠지만 영파는 명明나라의 개국으로 해금정책이 시행되기까지 재당신라인 후예들의 활동 거점이었다.


현재까진 신라선의 구조에 대해선 기록에 의한 추정일 뿐 실물이 발견되거나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다. 더하여 신라선이 모두 평저형이란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신안선에 대해 면밀히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아진다.


이제 신라와 아랍의 관계로 주의를 돌려보자.


필자는 앞 장의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의 두 번째 장에서 아라비아 반도에 sila나, silah 등의 신라와 관련되어 보이는 지명들과 함께, 그 지명들이 아랍어의 어휘로도 존재함을 소개한 바 있다. 필자는 이들 지명과 어휘가 신라 선단의 아라비아 내왕의 증거들로 간주했다. 당시 신라 선단의 해상활동 능력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은 장보고와 장지신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양주와 명주에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이 수십 만 명이 거주한 것에 의해 뒷받침된다.


중국의 사서는 황소黃巢의 난(875~884) 때 황소군에 의해 살육당한 무려 10만 명이 넘는 외국인 중에 거의 대다수가 아랍 및 페르시아인이었다고 하니, 당시 중국에 진출한 아랍 및 페르시아인의 총 수를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필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879년(헌강왕 5년) 개운포(지금의 울산)에 처음 나타난 처용處容이 시기적으로 볼 때 황소의 난을 피해 당나라를 탈출한 아랍 또는 페르시아인이라 추정하고 있는데, 아마 이 무렵 처용 외에도 다수의 이방인이 신라에 정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로 아라비아나 페르시아를 내왕한 신라인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신라선船은 규모면에서나, 항해능력에서나 아라비아의 다우선船에 비해 우수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장보고나 장지신보다 100여 년 앞선 시기에 이미 해로海路로 인도와 아라비아 세계로 향한 신라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승려 혜초慧超(704~787)이다. 그는 723~727년간 인도와 아라비아 세계를 여행한 뒤 육로로 당나라에 귀환했다. 만약 그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그의 여행에 대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아라비아 세계로 이어지는 바닷길은 그보다도 더 오래전부터 열려 있었다. 혜초보다 200여 년 앞선 시기의 백제 승려 겸익謙益은 바닷길을 왕복하여 인도를 다녀왔다. 이 외에도 당나라 승려 의정義淨이 인도에서 돌아오는 귀로에 689~691년간 수마트라 섬에서 찬술한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엔 자신과 같이 인도와 서역 세계를 여행한 7명의 신라승에 대한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이 바닷길을 왕래한 인물들은 다른 장에서 또 만나게 될 것이다.


위의 예들을 통해 우리는 아라비아 세계를 왕래한 뱃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음을 확신할 수 있다. 단지 기록으로 전해오지 않을 뿐이다. 이제 이 장의 마지막으로 주산군도가 독립적인 정치․해운 집단이었음을 또 다른 근거를 통해 확인해 보자.


우리는 앞장에서 신라가 아랍세계에서 이상향으로 기록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전설의 섬 아틀라티스에 비유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이상향으로 아틀란티스를, 사람이 사는 현실의 이상향으로 신라를 꼽았다. 그들에게 신라는 어떤 나라일까? 다음은 그들이 남긴 신라 지도이다.

 

                                                ▲ 신라군도1. [자료사진 - 서현우]

 

                                            ▲ 신라군도2. [KBS 자료사진 - 서현우]


놀랍게도 아랍인들은 신라를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보고 있었다. 위 지도의 신라군도가 그들이 남긴 신라지도이다. 그런데 신라군도는 비단 이 지도만이 아니다. 아래는 저명한 이슬람 학자인 정수일 박사의 논문에 소개된 14C 아랍의 문헌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동방의 맨 끝에 동쪽을 에워싼 바다가 있는데, 그 빛깔이 너무 검푸른 색이라 지프트(瀝靑력청) 해海라고 부른다. … 이 바다 속에 6개의 섬이 있는데 이곳을 신라군도라 한다.’ 〈앗 다마시키의 ‘대륙과 대양의 경이에 관한 시대적 정선精選’〉


우리는 위에서 6개의 섬으로 된 신라군도를 확인한다. 신라군도에 대한 아랍의 기록은 이미 장보고와 장지신의 시대인 9C의 문헌에서부터 나타난다. 슐라이만의 ‘중국과 인도 소식(851)’이 그것이다. 여기에다 10C 알 마스오디, 13C 알 까즈위니, 14C 앗 누와이리가 남긴 문헌에로 이어진다.


이들 아랍의 문헌이 말하는 신라군도가 바로 주산군도이다. 이 외의 아랍문헌들은 신라군도라고 적시하진 않았지만 신라의 위치가 주산군도임을 알리고 있다. 신라번이나, 보타도 불긍거관음원 앞바다의 신라초가 거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신라군도를 중국과 구별하여 인식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주산군도의 정치적 성격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군도라 기록한 최초의 시기인 9C와, 당시 주산군도를 거점으로 삼았던 장지신이란 인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앗 다마시키의 문헌은 14C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 말에 해당되는 이 시기까지 아랍에선 여전히 신라와 신라군도를 말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앞장의 ‘스페인에 나타난 신라인’이 전혀 이상할 리가 없는 것이다.


장지신. 그는 주산군도를 거점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여 장보고의 청해진과, 중국 대륙 내의 재당신라인 네트웍, 그리고 명주항로를 통한 일본을 배경으로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무역권을 지배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오늘날 세계에 산재하는 silla, sila, silah 등이 그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 역사의 해석에 있어 소극적이었고 수동적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은 우리의 이러한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일 지도 모른다. 때로는 역사에 대한 적극성과 능동성이 요구될 때가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현재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에서 진행된 모든 역사는 주권국 자신의 역사라 간주하는 것은 과거 그곳에서 시원하여 오늘날 그곳을 정체성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이웃 민족에 대한 난폭한 유린이다. 또한 그것은 전쟁에 비할 바 없는 정신에 대한 폭력이자, 힘의 논리이고 결과론적 논리이다.


우리는 중국당국이 티벳과 내몽골에 가한 오만함을 똑똑히 보아왔다. 동북공정은 티벳과 몽골역사에 대한 그들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또한 동북공정은 역대 한족漢族통일정권이 반복해온 역사공정의 현대판이자, 중화주의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중화주의는 동양의 전통사상인 유교, 불교, 도교와도 전혀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당국이 내세우는 그들의 이념인 사회주의와는 완전히 적대적인 논리임을 그들은 알아야할 것이다.


동북공정의 논리를 우리의 관점에서 동아시아 역사에 적용한다면 고대 시대 오늘의 중국 동북 3성省은 물론이고, 중세 어느 시기까지, 아니 어쩌면 근세에 접어들기까지 주산군도를 비롯한 중국대륙 연안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고대사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확실히 그렇다. 만약 백 번을 양보한다 해도 최소한 한중역사가 혼재했던 무대였다. 이것이 바로 동북공정의 논리이다.


이상으로 이 장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