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北京-Beijing

한부울 2008. 11. 9. 22:37

北京-Běijīng

 


베이징(중국어: 北京, 병음: Běijīng 듣기 (도움말·정보) 한국어: 북경)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이다. 허베이 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동쪽으로 톈진 시와 붙어 있다. 인구는 중국에서 상하이 다음으로 많다. 자금성, 후통 등을 둘러 볼 수 있다.


명칭


베이징(北京)은 말 그대로 '북쪽의 수도' 인데,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수도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다른 도시들인 일본의 교토(京都, 경도), 대한민국의 서울(漢城,한성)이 단순히 수도를 뜻하는 것처럼, 중국의 난징(南京, 남경)은 남쪽의 수도를 의미하고, 일본의 도쿄(東京, 동경), 베트남의 통킹(東京: 오늘날 하노이)은 둘 모두 ‘동쪽의 수도’를 의미한다. 여기서 베이징과 난징은 중국 내륙에 있는 장안(시안)을 중심으로 지은 이름이다.


Peking은 우정식 병음에 따른 베이징의 이름이고, 영어로는 전통적으로 Beijing이라고 불린다. 그 용어들은 400년 전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서 유래되었고, [kʲ]에서 [tɕ]의 변화는 표준 중국어에서 나타나는 과거의 발음과 일치한다([tɕ]는 병음으로 j다). 그리고 여전히 몇 언어에서 사용된다. (이를테면, 포르투갈어는 Pequim이다) 중국에서 베이징은 많은 이름을 가졌었다. 1368년부터 1405년 사이, 그리고 1928년에서 1949사이에는 Beiping(北平)으로 알려졌었고, 이는 ‘북쪽의 평화’라는 뜻이었다. 두 경우 모두 난징으로 수도가 변했던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 변하였다. 첫 번째는,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립하면서 수도를 난징으로 옮길 때 변했고, 그리고 두 번째는, 중화 인민 공화국의 국민당 정부 때 바뀌었다. 중국의 공산당은 1949년에 다시 Beijing이란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다시 Beijing으로 수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대만에 있는 중화민국 정부는 그 이름의 변화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950~1960년대에 대만에서 Beijing을 Beiping으로 부른 것은 중국 공산당 정부의 불법성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만에서는, 몇몇의 중국 지도들이 여전히 1949년 이전의 정치적 배경때문에 예전 이름을 사용하긴 하지만, 정부를 포함해서 대부분 Beijing이란 이름으로 쓰고 있다.


'연경(燕京)’은 지금도 다른 베이징의 비공식적 이름으로 사용된다. 이는 베이징이 전국시대 연나라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지리


NASA의 Landsat7(미국의 지구자원 인공위성)에 의해 베이징이라는 도시의 색을 볼 수 있다. 베이징은 도시의 남쪽과 동쪽으로 열려있는 허베이 평원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 북서쪽, 서쪽의 산맥들은 도시를 둘러싸고 있고, 이 산들은 중국 북부의 농업 핵심지역이 주변의 사막으로 변하는 것을 막아준다. 이 도시의 북서쪽, 특히 옌칭현(延慶縣), 그리고 화이로우구(懷柔區)는 쥔두산(軍都山)이들어서 있고, 반면에 서부지역은 서산(西山)이 그 골격을 이루고 있다. 베이징의 북부 지방을 가로질러 뻗어있는 만리장성은 대초원의 유목민들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이 거친 지형을 이용하엿다. 서산 지역의 허베이 경계 지역에 있는 동링산은 그 지역의 가장 높은 산이고, 해발 2303미터이다. 이 지역을 흐르는 주요 강은 하이허강(海河)줄기의 일부인 융딩강(永定河), 차오바이강(潮白河)이고 남쪽으로 흐른다. 베이징은 또한 화북 평원에서 항저우를 이어 지어진 대운하의 북쪽 끝에 있다. 미윈(密雲)댐은 차오바이강의 상류에 지어졌고, 베이징의 가장 큰 댐이며 물 공급의 핵심적인 곳이다.


베이징의 도심 지역은 북위 39도 동경 116도 해당되며 도시의 중남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시에서 작은 부분이지만, 도시 확장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도심 지역은 몇몇 위성 도시를 통하는 가장 먼 육환(六環)의 벨트로 뻗어있다. 티옌안먼과 그 광장은 베이징의 중심부에 있고, 중국 황제의 이전 거주지 였던 자금성의 남쪽에 위치한다. 티엔안먼 서쪽으로 중난하이(中南海)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장들의 거주지이다. 베이징의 동에서 서쪽으로 가로질러가면 장안가(長安街)가 있고, 베이징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다.


기후


베이징시의 기후는 냉대 기후에 속하며, 여름은 고온건조, 겨울은 한랭건조한 특징을 갖는다. 겨울의 기온은 보통 섭씨 1도 내외이고, 여름의 가장 높은 기온은 섭씨 37도 내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베이징 및 허베이지역의 봄에는 심각한 모래바람이 자주 불어 베이징 일대에 손해를 입혔다. 2008 하계 올림픽에 알맞는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국가는 내몽고 초원, 황토고원, 허베이 지역 등 지역 환경 관리에 관계되는 지역에 큰 힘을 기울이고, 최근 몇 년 동안은 베이징의 모래바람 현상에 대한 좋은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2008 하계 올림픽에 대한 준비로 베이징의 청결화에 대한 노력하였다.


인구 및 주민


2007년 말에, 베이징 시에 사는 인구는 17,430,000 명에 달했다. 2004년 말에 비하여 453,000명이 증가하였고,2000년 말에 비하여 1,744,000 명이 증가하였다. 공안 부문 통계에 근거하여, 연말 전체 시의 호적 인구는 11,807,000 명이고, 2004년에 비하여 178,000명이 증가하고. 2000년에 비하여 732,000 명이 증가하였다. 2005년 베이징 시 인구 평균 밀도는 937명/km²이며, 2005년 전체 시의 인구의 출생률은 6.3%, 사망률은 5.2%이다. 베이징은 전체 중국의 56개의 민족이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한족이 95.7% 를 차지하며, 1322.9만 명(2000년 제5차 전국 인구 전면조사)이 있다. 회족, 만주족, 몽고족의 인구는 평균만을 넘는다.


베이징 인구 중 11,940,000명 의 사람들은 베이징 호적이 있고, 그 밖의 사람들은 임시의 거주 허가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수의 이주 노동자가 공식적인 거주 허가증이 없이 불법으로 살고 있다. 베이징의 도시 중심부의 인구는 약 75,000,000명이다. 그리고 베이징의 거주자 중 95%는 한족이다. 다른 소수민족은 만주족, 회족, 몽골족, 티베트족등이 포함된다. 그 중에 티베트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티베트 계통의 청년들은 공부를 목적으로 베이징에 거주한다.


상당히 많은 수의 국제기관이 베이징에 있으며, 대부분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외국 기업, 무역 분야와 접하고 있고, 많은 인구가 베이징 도시 지역인 북부, 동북, 동부 지방에 빽빽히 모여 살고 있다. 근래에는 사업과 공부의 목적으로 한국인이 베이징에 사는 것을 눈에 띄게 볼 수 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왕징(望京)과 우다코우(五道口) 지역에 살고 있다.


2000년의 베이징의 민족 조사

민족

주민

 %

한족

12,983,696

95.69%

만주족

250,286

1.84%

후이족

235,837

1.74%

몽골족

37,464

0.28%

조선족

20,369

0.15%

투자족

8372

0.062%

좡족

7322

0.054%

먀오족

5291

0.039%

위구르족

3129

0.023%

티베트족

2920

0.022%


성씨


2006년 인구 통계수치에 의하면, 베이징 인구 가장 많은 10개의 성씨를 순서에 따르면, 왕(王)(10,35%), 장(张) (9.4%) 리(李)(8.54%), 류(刘) (6.91%), 조(趙) (3.45%) 양(杨), 진(陈),서(徐)、손(孙)、마(马) 씨 순이다.


역사

 

 

The Pagoda of Tianning Temple, at 13 stories and 57.8 m (189 ft) in height, built in 1120 during the Liao Dynasty

 

                                         A corner tower of the Forbidden City

                                                       Inside the Forbidden City

                                                 The Old Beijing Observatory

 

                                    A Chinese cloisonné dish from the Qing dynasty

                                                    Classical gardens in Beijing

 

                                        A German postcard of Beijing from 1900

 

                                                      Wangfujing Cathedral

기원전 1000년 경 춘추전국시대의 나라 중 하나인 연(燕)의 수도인 계(薊)가 오늘날 베이징(北京)이 있는 곳에 건립되었다. 연의 멸망 이후 계속해서 진(秦), 한(漢) 그리고 진(晋)왕조가 이곳에 지방 현을 설립했다.


당(唐)대에는 현재 허베이(河北)의 북쪽 지역에 실직적인 군 통치자인 범양(范陽)절도사 본부를 설치하였다. 755년 이 곳에서 안사의 난(安史之乱)이 일어났기 때문에 보통 이 지역을 당 왕조가 중앙정부로써의 전 지역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전환점으로 여긴다.


936년 후진(后晋)은 현재 베이징을 포함한 북부의 넓은 영토를 거란의 요(遼)에게 대부분 빼앗겼다. 938년에 요(遼)는 지금의 북경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고 그것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1125년 여진의 금(金)왕조는 요를 합병하고 1153년 수도를 요(遼)의 남경으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앙수도인 중도(中都)라고 불렀다.


1215년에 몽골이 중도를 불태우고 1267년에 금(金) 수도의 북쪽으로 다시 재건하였다. 중국의 전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로 원(元)왕조의 시조 쿠빌라이 칸은 이곳을 汗八里(Khanbaliq)(위대한 칸의 거주지라는 뜻) 혹은 대도(大都) 라는 이름으로 수도로 건립했고 이위치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 속에 Cambuluc 로써 잘 나타나 있다. 확실히 이곳이 그의 힘의 근간인 몽골과 가까웠기 때문에 중국황제가 되기를 원했던 쿠빌라이 칸은 중원의 좀 더 전통적인 곳을 대신해 이곳에서 그의 수도를 설립했다. Khanbaliq는 현대 중앙 베이징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1368년 원의 멸망 후 도시는 명(明)조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고 순천(順天)지사 관저가 도시의 주위 지역에서 설립되었다. 1403년 3번째 명나라 황제였던 문황제(文皇帝)는 수도를 남경(南京)에서 북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북쪽 수도란 뜻으로 개명한 북경(北京)으로 옮겼다. 수도는 또한 경사(京師)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단순히 수도라는 뜻이다. 명(明조) 동안 베이징은 현재의 모양이 잡혔고 명나라의 성곽은 현대에 그것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얼환루(二環路)가 세워질 때까지 베이징의 성곽 역할을 하였다.


베이징은 1425~1650년 그리고 1710~1825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금성은 천단(天壇)과 다른 많은 공사 계획들과 함께 1406~1420년 당시에 건설되었다. 천안문(天安门)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상징이 되었고 이것은 명나라 때 두 번 불에 탔던 것이 1651년에 마지막으로 재건된 것이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이 그곳에서 청나라를 번성시킨 뒤에도 베이징은 청의 통치 기간 동안 중국의 수도로 남아 있었다.


청의 황제 지배체제를 벗어난 공화국을 목표로 한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원래는 남경(南京)에 수도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베이징에서 일어난 청의 고위관리인 원세개(袁世凱)의 청 황제의 퇴위 강요 후 혁명의 성공을 확실히 한 뒤에 남경의 혁명가들은 원세개가 새로운 중국공화국의 대표자이고 수도는 베이징으로 유지하기로 합의하였다.


원세개(袁世凱)의 점차 강화된 힘은 그 자신이 1915년 말 황제로써 행한 중국황국의 선언에서 절정에 달하고 그 뒤로 점차 그의 평판은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원세개가 한 해가 채 안 되어서 죽게 되자 짧았던 통치가 끝을 맺고 중국은 지방 군벌들의 통제 아래로 떨어지고 가장 세력 있는 무리들은 베이징에서 수도의 통제력을 갖추기 위해 빈번한 싸움을 일으켰다.


국민당(中國國民黨)의 북벌(北伐) 성공에 따라서 1928년에 남경이 공식적인 중국공화국의 수도가 되었고 북경은 북부의 평화 또는 북부의 평화를 회복시켰다는 뜻의 북평(北平)으로 이름을 바꿈으로써 베이징에서의 군벌 정치는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제2차 중일전쟁(中日戰爭)당시 1937년 7월 29일에 북평이 일본에게 정복된 기간 동안 도시는 그 이전의 이름인 북경으로 돌아갔고 이 곳에 일본에게 점령된 화북의 일부 한인들이 설립한 괴뢰정부인 중화민국임시정부(中華民國臨時政府)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 중화민국임시정부는 이후에 남경에 근간을 둔 남경국민정부(南京國民政府)로 흡수되었고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항복과 함께 북경의 이름은 다시 북평으로 바뀌었다.


1949년 1월 31일에 국공내전(國共内戰)동안 공산주의 세력은 싸움 없이 베이징에 들어갔고 같은 해의 10월 1일, 중국 공산당은 모택동(毛澤東)의 지휘아래 천안문에서 베이징에서의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 설립을 발표했다. 그 바로 며칠 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에서 북평이 새로운 정부의 수도가 될 것이고 그 이름을 다시 북경으로 바꿀 것임을 결정했다.


인민공화국 설립 당시에 베이징 시당국은 단지 도시지역과 바로 인접한 교외로 이루어져 있었고 도시지역은 얼환루(二環路) 안에서 많은 작은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그 뒤 주변의 몇몇 현(县) 들이 이 곳으로 편입되면서 베이징 시당국은 베이징의 경계를 여러 번 넓혔고 오늘날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베이징 성곽은 1965~1969에 얼환루(二環路)의 건설을 위해 허물었다.


등소평(邓小平)의 경제개혁 후에 베이징의 도시지역은 매우 넓어졌다. 이전에는 얼환루(二環路)와 싼환루(三環路)에 한정되어 있던 베이징의 도시지역은 이전에는 경작지였던 많은 지역들이 개발되어 거주지나 상업적인 곳으로 발전하면서 최근 건설된 우환루(五環路)와 리우환루(六環路)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새로운 상업 지역이 국무(國貿)지역에서 발전하면서 왕푸징 (王府井大街)과 시단(西单)은 번성한 쇼핑구역으로 발전했고 쫑관춘(中关村)은 중국의 중요한 전자중심가가 되었다.


최근 몇 년 내에 베이징의 확장은 교통 혼잡, 공기오염 그리고 가난한 지역 특히 시골에서 온 이주자들의 유입 같은 몇몇 도시화의 문제를 가져왔다. 2005년 초, 정부는 베이징의 무질서한 발전을 멈추는 계획을 승인했다. 중국 수도의 개발은 원형도로 안쪽보다는 도심 외부(서쪽과 동쪽)쪽에서 진행될 것이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