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자금성(紫禁城, Geoded Verzet 1900-1903)모습

한부울 2008. 11. 8.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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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紫禁城] Geoded Verzet 1900-1903年 모습

자금성궁전의 역사 

 

1 명 이전의 북경

 

거란족은 지금의 요녕성 서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이었다. 10세기에 거란족은 주변을 정복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더니 AD 916년 드디어 요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오대가 지난 후 당에서 따로 연운16주를 차지하여 요는 화북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936년 유주를 부도(지역의 도읍지)로 정해 명칭을 남경 석진부라고 불렀다. 그 후 남경은 다시 연경으로 불리웠고 연경은 그 이후 영원히 북경의 옛 이름이 되었다.


요나라의 도읍은 상경림황부, 중경대정부, 동경료양부, 서경대동부, 그리고 남경석진부 다섯을 두었는데 그중 남경은 제일 규모가 컸으며 요의 통치지역내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요의 남경은 현재 북경시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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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京皇城 紫禁城 옛 모습

1900-1903년 1901年皇帝太后回銮之前拍摄的(1901년 황제태후 회란(환궁)전 촬영)

 

正陽門,俗稱前門,是明淸兩朝北京內城的正南門。1900年,城樓和箭樓爲八聯軍所毁。1903年和1906年分別重建。照片上是重建前的前門。

                    

大淸門,民國改爲中華門,是眞正的“國門”,位于天安門正南,50年代擴建天安門廣場時柝除。照片上是大淸門的內側,自天安門廣場拍攝。

                午門,紫禁城正門,只有皇帝出入正門,文武大臣出入左側門,宗室王公出入右側門。

 

太和門:紫禁城內最大的宮門,也是外朝宮殿的正門。淸代初年的皇帝曾在太和門聽政、賜宴,后來“御門賜政” 改在乾淸門。

               中和殿:紫禁城三大殿之一,是擧行各種大典前,皇帝接受執事官員的朝拜的場所。

 

                               保和殿:紫禁城三大殿之一,是擧行 “殿試”及盛大宴會的場所。

 

 乾淸門:紫禁城内廷的正宮門,是連接內廷與外朝往來的重要通道,淸代的“御門聽政”、齋戒、淸宝接宝等典禮儀式都在乾淸門擧行。

 乾淸宮:紫禁城內廷正殿,是皇帝批阅奏章、召見官員、接見外國使節以及舉行內廷典禮和家宴的場所。

                                                                乾淸宮內

 

 翊坤宮:紫禁城內廷西六宮之一,是明淸兩代后妃居住的地方,慈禧爲貴妃時居住于此。后來慈禧住儲秀宮時,每逢節日就在這里接受妃嬪們的朝拜。


                                                          自景山俯瞰紫禁城

       大淸門迎銮,조동(當然)是1901年慈禧、光緖自西安回鑾時進大淸門時的情景,遠外是天安門。

 

                          崇文門:指“文敎宜尊”,走酒東,城外是酒道,俗稱“哈德門”,“海岱門”。

                                                                       崇文門西

                                                               崇文門北大街

 

                                                            崇文門西北

                                                              崇文門西北

 

                                                               崇文門西北

 

                                                               崇文門西南

 

                                                                崇文門西南

                                                          前門與崇文門之間的城墻

 

                                      

                             東便門角樓,1900年8月初,八國聯合被攻占,損壞嚴重。

 

                                                             東便門角樓遠景

              

                                                            公使館區玉河橋

 

北海大西天,1900年,八國聯合侵入北京后,放火燒毁万佛樓,1919年,大佛殿及大圓境智宝殿等又一次失火燒毁,至此,呼稱大西天的建筑群化爲灰燼。

                                                                 北海白塔

                                         琼島春云:京師八景之一,位于北海琼島。

                                                 雙塔寺,1955年修西長安街時拆除

                                                                 万壽山附近景色

                                                                 頤和圓玉帶橋


 宣武門,又稱順直門),指“武烈宜揚”,宣武門外爲菜市口刑長,囚車從此門經常出入,人稱“死門”。

                 東岳廟牌樓,東岳廟是中國北方最大的正一派道觀,有“華北第一道觀”之稱。


                                                             附凡張同時期照片

                                                           南口附近的万里長城


                                          避暑山庄,原名熱河行宮,俗稱承德離宮。


淸東陵:15座陵寢,埋葬着5位皇帝。(第一帝順治,第二帝康熙,第四帝乾隆,第七帝咸豊,第八帝同治),15位皇后,136位妃嬪,3位皇子,2位公主,共161人。

 

易見淸西陵:埋葬着雍正、嘉慶、道光、光緖4皇帝,9個皇后,56個妃嬪及王公、公主等共80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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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20km,높이9m의 성벽으로 둘러져 있던 도성은 남쪽의 開陽門을 위시하여 사방에 여덟개의 문을 내고 성내의 시가는 26조방으로 구분 하였다. 원의 大內는 정문인 宣敎門을 비롯하여 元和殿, 昭慶殿, 嘉寧殿, 臨水殿등의 궁전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황실의 어원과 과수원도 황성 내에 있었다.


번영을 누렸던 남경도 드디어는 북방에서 일어난 김의 침공으로 멸망하는데 금의 군대는 남경성을 침공하여 대량의 재물과 주민 30만을 북방으로 끌고 가 버렸다. 그리하여 폐허가 된 남경을 북송에 넘겨 버렸고 북송은 이 도성을 연산부라 하였다.


금과 북송의 세력 다툼은 정강원년(1126년) 금이 북송의 국도였던 변경(개봉)을 함락시켜 北宋을 멸망시킴으로써 끝났다. 금의 세력은 화북 전체와 회하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으며 이 영토를 통치하는 데는 북쪽변방에 있는 상경은 국도로서는 적당치 않기 때문에 貞元원년(1153년)에 요의 국도였던 남경으로 국도를 옮기게 되었다. 남경은 그 때 이름을 중도로 개칭하였다. 그 당시 건설된 中都는 후일 원, 명, 청의 3왕조를 잇는 국도로서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던 것이다.


금도 13세기 초가 되면서 강력한 몽고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된다. 몽고제국의 제5대 칸 쿠빌라이는 1271년 중국대륙에 元을 창시하여 남송을 멸하면서 전 국토를 정복하게 되었다. 그 이전 1264년 그는 금의 中都를 大都라고 개명하고 여기에 중국대륙을 지배하기 위한 중앙정부를 설치한다. 그리고 나서 이전의 도성 북쪽에 몇 배 더 큰 대도성을 조영하였다. 그 규모는 명대의 북경성과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원 말기인 14세기경에는 한족의 반항이 몹시 격렬해짐과 동시에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났으며 이곳저곳에서 滅夷興漢을 내걸고 군웅이 활거했다.


명의 초대 황제 홍무제 (본명 주원장 : 재위 1368 - 1398년)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출가하여 중으로 지내다가 반란군인 홍건족에 투신했는데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면서 大武將이 되어 화중, 화남의 군웅을 전부 평정하였다. 1368년 그는 금릉(지금의 남경)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명`이라했다. 즉위 후 그는 원의 세력을 토벌하기 위하여 대군을 몰아 진격하니 원은 대도를 포기하고 사방으로 패주하여 본향인 몽고고원으로 피해버렸다. 명은 초기에 잠시 국도를 금릉으로 정하였으나 3대 영락제때 다시 원의 대도로 국도를 옮겼다. 그때 금릉을 남경, 대도를 북경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이 지금까지 불려지게 된 것이다.


영락제 때 완성된 북경성은 동서 약 7Km, 남북 약5.5Km의 성벽으로 둘러졌으며 거의 장방형이다. 성벽의 높이는 10M이상이고 성벽 주위의 해자는 폭이 약20M였다. 성내의 중앙에 약간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황성이 있는 데 역시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다. 이 황성 가운데의 약간 위쪽에 성벽과 해자로 방어한 자금성궁전이 있다.


자금성은 3중의 성벽으로 철저히 방호되어 있고 각 성문들은 주야로 경계를 하였다. 자금성 내에는 황제와 그 가족 및 수천명의 궁녀, 대신들이 있으며 그들을 위한 주거건물, 의식용 건물, 집정소 등이 있다. 자금성을 둘러싼 황성 가운데는 관청, 역소 등이 있었다. 이 자금성을 둘러싸고 있는 북경 성내에는 정부관계 건물과 관리들의 주택, 兵舍가 배치되고 일반민가는 성 밖으로 배치되었다.


상점가도 성 밖의 남쪽에 거의 다 형성되어 있었다. 1554년 이곳 신시가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북경성 남쪽을 성벽으로 둘렀는데 이것을 외성이라 하였다. 반면 전부터 있던 북경성은 내성이라 하였다. 


2 자금성 궁전의 건축연혁

 

자금성궁전은 명의 3대 황제인 성조(본명은 朱樓)의 재위 중에 건립되었다. 명나라 태조인 朱元璋(1368-1398)은 건국당시 국도를 금릉으로 정하고 남경이라 불렀다. 그때 그의 제 4자였던 주태를 연왕에 봉하고 북평부(북경)에 주둔 시켰다. 주원장이 재위 31년에 타계하고 그의 손자인 건문제가 황제를 계승했으나 주태는 무력으로 남경을 공략, 연호를 영락으로 바꾸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북방으로 패주한 원의 잔존세력이 계속 위협을 가해왔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정권강화가 필요하여 영락4년(1406년)북경 천도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1년 후인 영락 5년 5월에 궁전, 단묘 및 자신의 능묘(장릉)건설을 시작 하였다.


주태는 우선 신하들을 멀리 사천, 호남, 광서, 강서, 절강, 산서 등의 지역에 파견하여 건축자재를 조달시키는 한편 泰寧侯 陳珪를 자금성궁전 개축조영계획의 총지휘자로 임명하였으며 구체적인 계획은 당시 건축기술자로 평판이 높은 吳中을 그 책임자로 임명 하였다.


자금성궁전 조영계획에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첫째, 자금성궁전은 원의 수도였던 대도를 기반으로 하여 건설 되었다는 점이다. 건축계획에 책임을 맡은 설계자들은 원의 대도에 대한 전체상황을 파악한 후에 계획으로 연결하였던 것이다. 자금성에는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태액지의 물을 성의 서북모퉁이로 끌어들여 남쪽으로 돌렸고, 오문내의 정원에는 아름다운 금수하가 동남방향으로 흘러 菖蒲河, 御河, 通惠河와 연결 되도록 하였다.


둘째, 역대 도성의 훌륭한 성과를 충분히 숙지하여 원의 대도보다 궁전배치를 더욱 장대하게 개조 하였다. 원나라 대내의 정문인 숭천문(현재의 오문)에서 대도의 정문인 여정문까지의 거리가 비교적 짧기 때문에 북송 변량의 궁전앞 천가(주교의 남과 북을 가르킴)와 같은 웅대하고 심원한 기백을 볼수 없었다. 그래서 변량의 천가를 모방하여 남측에 현재의 정양문에서 자금성까지 직선으로 연장시킨 중축선을 형성 하였던 것이다. 명대에 승천문(현 천안문)밖 증축선 양측에 千步廊과 관서가 배치되었는데 문내 동서조방의 양측에는 이른바 左廟右社(周禮에 의하여 좌측에 宗廟, 우측에 社稷壇을 배치하는 것)에 따라 太廟와 社稷壇이 배치되었다.


셋째, 明代 北京城의 경우 元의 궁전과는 달리 황후, 비빈들의 궁실 전부를 紫禁城내에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폭 52m의 해자(護城河)를 파서 방어 하였다. 그러나 元때의 궁전은 瓊島(현재 북해공원에 있는 작은 섬)를 중심으로 興聖宮,隆福宮, 그리고 대내 3개소의 궁전군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높이 약 49m의 景山은 紫禁城 주위에 해자를 팔때 나온 흙으로 만든 인공산이며 분량은 약 100만㎥나 되었다. 이러한 구상은 南京宮殿의 후방에 萬歲山을 만들어 배후의 장벽으로 삼았던 것을 모방한 것인데 이는 많은 량의 흙을 멀리까지 운반해야 하는 공사량을 절감하는 효과도 있었다.


지금과 같은 紫禁城이 있기 까지는 당시 永樂帝를 보좌했던 한 스님의 꿈에서 비롯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밤 중은 天帝가 살고 있는 天上의 都市를 꿈꾸고 나서 이와 똑같은 首都를 만들 것을 황제에게 진언했다.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황제는 지상에 세계의 중심으로서 천제의 도시를 재현할 것을 마음먹게 되었던 것이다.


고대 중국의 천문사상에 의하면 北斗星 北쪽에 있는 小熊座를 주축으로 하는 성좌군을 紫微垣이라 하며 그 가운데 天帝의 居所가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紫禁城의 '紫'는 紫微垣에서 '禁'은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지하는 뜻으로, 이른바 황제의 거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태조 홍무제가 14세기 南京에 건설했던 궁전 紫禁城이 있었으며 北京으로 천도한 후에도 그 명칭과 건물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현재 紫禁城은 영락제 때 조영된 건물이지만 완성된 다음해 제일 중요한 奉天殿, 華蓋殿, 謹身殿의 外朝 3殿이 화재를 당했고 그 다음해에는 황제의 어좌소였던 乾淸宮이 소실된 것을 비롯하여 빈번한 화재가 발생했다. 여기에다 1644년 明을 멸망시켰던 반란군의 수령 李自成이 淸軍과 강화를 맺었던 明軍의 사령관 吳三桂에게 패하여 北京을 철수하면서 궁전에 불을 질러 중요한 건물의 대부분을 태웠다. 그러나 그때마다 다시 재건을 했는데 淸代에는 건물의 명칭만 변경 하였을 뿐 지금도 창건 때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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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紫禁城)은 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는 명(明)·청(淸)시대의 궁전으로서 자금(紫禁)이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말로, 베이징의 내성(內城) 중앙에 위치한다.


1407년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명·청 시대를 통하여 궁전과 궁문을 여러 차례 보수·개축하였으며 명칭도 바뀌었다. 남북 약 1,000m, 동서 약 760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1구획으로 둘레에 도랑을 파놓았다.


성벽 주위 4곳에 각각 1개씩의 궁문이 있는데,  남쪽의 오문(午門)이 정문으로서 특히 웅대하며, 동쪽을 동화문(東華門), 서쪽을 서화문(西華門),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이라 부르며 네 모퉁이에 각루(角樓)가 서 있다.


성내는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으며, 남쪽은 공적(公的)인 장소의 바깥부분으로 오문에서부터 북쪽으로 태화문(太和門)·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 등의 전각(殿閣)이 배치되어 있다.


명·청 500년을 통치한 24명 황제의 거처


자금성은 명·청 때 500여 년간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전이다.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는 권좌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1406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만리장성 이후 중국 최대의 역사라 불리는 자금성 쌓기에 나섰다. 이후 14년간 100만 명의 인부가 이 공사에 동원됐다. 사용된 건축 자재의 양도 상상을 초월해 벽돌 1억만 개와 기와 2억만 개가 사용됐다.


기둥에 쓰일 나무는 사천지방에서 조달된 것으로 운송에만 4년이 걸렸다. 전각의 받침대와 부조에 쓰인 돌은 50km 떨어진 채석장에서 날랐다. 돌은 하나의 무게가 200톤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당시 부역자들은 겨울철 길에 물을 뿌려 빙판을 만든 뒤 돌들을 날랐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자금성에는 황제 일가를 위해서 9천 명의 시녀와 1천 명의 내시도 함께 살았다.


하늘의 아들, 황제를 위한 자색


자금성을 가득 메운 자색은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빛깔이며, 동시에 우주의 중심인 북극성을 상징한다. 북극성은 하늘의 궁전이 있는 곳. 하늘의 아들 즉 천자인 황제가 사는 궁전 역시 그 하늘을 상징하는 자색으로 지었다. 남과 북의 긴 축 위에 놓인 자금성의 건축물들은 모두 남향이다. 이는 남쪽의 양기를 받고 북쪽의 바람과 음기로부터 황궁을 보호하려는 의도다.


성 내부는 정무 처리를 위한 구역(외조)과 황제의 주거 구역(내정)으로 크게 나뉜다. 남쪽에 있는 외조는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에서 시작된다. 북쪽 방향으로 태화문·태화전·중화전·보화전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무영전 등의 전각(殿閣)이 있다. 높이 35m, 면적 2377㎡의 웅장한 태화전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당나라 때에는 주요 의식이 치러지던 곳이다. 태화전의 앞마당에는 병사 9만 명이 모일 수 있는 넓은 뜰이 있다. 외조의 북쪽으로 내정이 펼쳐진다. 내정의 주요 건축물로는 건청궁·교태전·곤녕궁 등이 있다.


자금성은 철통같은 보안으로 황제를 지켰다. 바닥에는 걸을 때 경쾌한 발소리를 내는 특별한 벽돌이 갈려 있다. 이 벽돌의 효과는 음향만은 아니었다. 땅 밑에서 뚫고 올라올지 모를 침입자를 막기 위해 40여 장의 벽돌을 겹쳐 쌓았다. 성 내에는 후원을 제외하고는 나무가 전혀 없다. 암살자가 나무에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자의 거처지만 어쩌면 금으로 둘러  싸인 감옥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금성은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에야 비로소 일반에 공개됐다. 과거의 궁전이라는 뜻에서 공식 명칭은 ‘고궁’이 되었다. 왕조는 사라졌지만 해마다 600~80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자금성은 여전히 중국 문화의 중심으로 위용을 떨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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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門

 

天安門

端門

午門:平面呈倒「凹」字型,分上下兩部分。下部為敦台,正中開三門,兩側各有一掖門。上部正中為門樓一座,面闊9間,進深5間,重檐廡殿頂。兩側有重檐攢尖頂的方亭。

太和門

玄武門:清朝康熙帝(諱玄燁)即位後易名神武門。

東華門

西華門


外朝

 

三大殿

內金水河

太和門:面闊9間,進深3間,重檐歇山頂。

弘義閣

體仁閣

太和殿:面闊11間,進深5間,為中國古代殿宇最高等級的重檐廡殿頂。檐角有10個走獸,為中國古建築之特例。為「前三殿」之第一殿,面積2381平方米。

中和殿:面闊、進深各3間。四角攢尖頂。

保和殿:面闊9間,進深5間。重檐歇山頂,明清皇帝曾經在此舉行殿試。

歷代藝術館


紫禁城東南部

文華殿

精一堂

恭默室

九五齋

玉食館

省愆居

主敬殿

本仁殿

集義殿

傳心殿

  治牲所

文淵閣

鑾儀衛所

地和庫房

國史館


上駟院、南三所

上駟院

南三所

擷芳殿

御茶、御膳總房


內閣

滿本房

漢本房

蒙古房

漢票簽房

滿票簽房

大學士堂

侍讀擬寫草簽處

中書繕寫真牽處

收儲本章檔案處


紫禁城西南部

武英殿

凝道殿

煥章殿

敬思殿

浴德堂

咸安殿(寶蘊樓)

清字經館

三通館

實錄館

文穎館

南薰殿

外瓷器庫

御書處

內務府

廣儲司

會計司

掌儀司

都虞司

慎刑司

營造司

慶豐司


內廷


後三宮

{乾}清門:清朝御門聽政在此舉行。

{乾}清宮:連廊面闊9間,進深5間,重檐廡殿頂。明思宗崇禎於此宮內迫周皇后懸樑自盡;至清康熙時為康熙幼年時代寢室;內有「正大光明」匾,清朝雍正帝設「祕密立儲」制度後傳位詔書藏此匾後。故宮「後三宮」之第一宮。

交泰殿:面闊進深勻為3間,單檐攢尖頂。故宮「後三宮」之第二宮。

坤寧宮:面闊連廊9間,進深3間,重檐廡殿頂。紫禁城內最具滿族住宅風格宮殿。明及清朝雍正帝之前的皇后寢宮。雍正後,西暖閣為滿人的信仰——薩滿的祭祀地,東暖閣為帝後成婚的大婚喜房。故宮「後三宮」之第三宮。


內廷西側

 

養心殿:清朝自雍正之後,皇帝在故宮內的實際居所。慈禧、慈安二太后垂簾聽政就在養心殿東暖閣。


東六宮

景仁宮

承乾宮

鍾粹宮

延禧宮

永和宮

  同和齋

景陽宮

  古鑒齋

  靜觀齋

  御書房


西六宮

永壽宮

太極殿(啟祥宮)

  體元殿

長春宮

  承禧殿

  綏壽殿

  履綏殿

  平安室

翊坤宮

  元和殿

  延洪殿

儲秀宮

  體和殿

  麗景軒

咸福宮

  同道堂


內廷東側

齋宮

毓慶宮:清朝皇帝十歲以後自立生活之寢宮。

  繼德堂

  味余書室

  知不足齋

  宛委別藏室

奉先殿


紫禁城西北部─養老宮區

慈寧宮

壽康宮

  長樂敷華殿

壽安宮

  春禧殿

  福宜齋

  萱壽堂

英華殿 


紫禁城東北部─寧壽宮區

皇極殿

寧壽宮:乾隆宣布退位後當太上皇養老皇宮,花費巨資一百一十萬兩銀修建,宮門前兩座鍍金銅獅,造價尤為不貲。 

  金昭玉粹殿

養性殿

樂壽堂

頤和軒

景祺閣

暢音閣

  閱是樓

尋沿書屋

古華軒

遂初堂

  延趣樓

  翠賞樓

  養和精舍

符望閣

  玉粹軒

  竹香館

倦勤齋


景福宮

  佛日樓

  梵華樓

  慶壽堂

  兆祥所


乾東五所

古董房

四執庫

敬事房

壽藥局

如意館


重華宮區

崇敬殿

重華宮:乾隆皇帝修建,是篤信藏傳佛教乾隆信仰佛堂:[重華]是古代典籍對舜帝敬稱,大臣張廷玉建議以此為宮區命名,乾隆欣然採納。 

  芝蘭室

  葆中殿

  雨花閣:位在重華宮西南端 是紫禁城內最具喇嘛教風格建築,內為喇嘛佛堂菩薩佛像數尊


翠雲館

浴德殿

漱芳齋

  靜憩軒

  金昭玉粹殿

  隨安室


附屬建築 

太廟

太社稷

西苑

萬歲山(景山)

皇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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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事記


1416年(永樂十四年),明成祖頒詔遷都北京,下令仿照南京皇宮營建北京宮殿。

1420年(永樂十八年),北京宮殿竣工。次年五月遭雷擊發生大火,前三殿被焚毀。

1440年(正統五年),重建前三殿及乾清宮。

1459年(天順三年),營建西苑。

1557年(嘉靖三十六年),紫禁城大火,前三殿、奉天門、文武樓、午門全部被焚毀,至1561年才全部重建完工。

1597年(萬歷二十五年),紫禁城大火,焚毀前三殿、後三宮。複建工程直至1627年(天啟七年)方完工。

1644年(崇禎十七年),李自成軍攻陷北京,明朝滅亡。李自成向陝西撤退前焚毀紫禁城,僅武英殿、建極殿、英華殿、南薰殿、四周角樓和皇極門未焚,其餘建築全部被毀。同年清順治帝至北京。明末清初任職工部40年官員周九依十分之一縮小比例模型,重建紫禁城成功,此後歷時14年放大原比例復建,將中路建築基本修復。

1683年(康熙二十二年),開始重建紫禁城其餘被毀部分建築,至康熙三十四年基本完工。

1735年(雍正十三年),清高宗(乾隆帝)即位,此後六十年間對紫禁城進行大規模增建和改建。

1813年(嘉慶十八年),天理教教徒林清率起義軍攻打紫禁城。

1860年,英法聯軍佔領北京

1900年,八國聯軍攻陷北京。

1911年,武昌起義爆發,清帝退位。但按照與民國簽訂的優撫條件,仍然居住於紫禁城內。

1923年,建福宮發生火災。

1924年,馮玉祥發動「北京政變」,驅逐清帝溥儀。

1925年10月10日,在原紫禁城的基礎上建立故宮博物院。

1933年,故宮博物院文物南遷,以躲避日本侵略。

1948年,故宮博物院南遷部分文物約有2/3運往台灣。

1949年1月,北平局勢穩定後,故宮得到了修養。

五六十年代,陸續有人提出故宮改建計劃,後因種種原因擱置。

1961年,經政務院批准,北京故宮被定為全國第一批重點文物保護單位。

1987年,北京故宮被聯合國教科文組織列入「世界文化遺產」名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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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Gate of Divine Might, the northern gate. The lower tablet reads "The Palace Museum" (故宫博物院)

 

 

                    The Forbidden City as depicted in a traditional Ming Dynasty painting

        The East Glorious Gate under renovation as part of the 19-year restoration process

 

                        The Forbidden City, viewed from Jingshan Hill to the north

 

 Plan of the Forbidden City. Labels in red will be used to refer to locations throughout the article.

A. Meridian Gate

B. Gate of Divine Might

C. West Glorious Gate

D. East Glorious Gate

E. Corner towers

F. Gate of Supreme Harmony

G. Hall of Supreme Harmony

 H. Hall of Military Eminence

J. Hall of Literary Glory

K. Southern Three Places

L. Palace of Heavenly Purity

M. Imperial garden

N. Hall of Mental Cultivation

O. Palace of Tranquil Longevity

 

 

           Meridian Gate, the front entrance to the Forbidden City, with two protruding wings.

                                                   The northwest corner tower

 

                                                     The Hall of Supreme Harmony

 

                                        he throne in the Hall of Preserving Harmony

 

              The Hall of Central Harmony (foreground) and the Hall of Preserving Harmony

 

                                                  The Palace of Heavenly Purity

 

                                          The throne in the Palace of Heavenly Purity

 

                    The Nine Dragons Screen in front of the Palace of Tranquil Longevity

                               Location of the Forbidden City in the old city of Beijing

 

                                        Beihai - the White Dagoba is in the distance

 

Imperial roof decoration of highest status on the roof ridge of the Hall of Supreme Harmony

                               A gilded lion in front of the Palace of Tranquil Longevity

 

The Jade Cabbage, formerly at the Forbidden City and now at the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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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궁전의 조영계획-건축재료 수급계획

 

1) 목재


중국고대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목재이다. 자금성 조영에는 목재의 질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건물의 목조가구와 제작에 사용된 목재는 [향남]이나 [金絲楠]등의 최상급 楠木(樟木,녹나무과)이 선정 되었다.


이와 같은 재료는 사천지방에서 생산되었는데 먼 사천의 산간에서 벌채한 거대한 나무를 北京까지 운반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운반방법은 벌목한 목재를 계곡으로 굴려 뗏목을 만들었다가 우기에 이것을 강에 띠워 목적지까지 보내는 것이었다.


목재를 운반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運河나 通惠河를 이용해 北京의 목재공장인 神木廠에 도착시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山西省桑乾河에서 永定河로 들어와 大木倉으로 운반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심지어 3-4년이 걸려 北京에 도착되는 경우도 많다. 이와 같이 각 지방에서 생산된 목재는 양질의 최고급 거목이기 때문에 그 당시는 이것을 "神木"이라 하였다.


자금성궁전이 한창 공사중일 때 북경성내에 있는 동서 2개소의 목재 저장소에는 대량의 목재가 저장되어 있어서 자금성 조영중 한 번도 목재가 부족한 적이 없었다 한다. 특히 서쪽의 대목창은 그 규모가 3,600칸에 달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정통2년(1437)에 이르기까지 근38만본이라는 목재가 저장되어 있었다.


2) 벽돌과 기와


자금성궁전에 사용된 벽돌과 기와는 형태도 다양 하거니와 양도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건물의 수가 많고 성벽이 크며 또한 여러 종류의 특수한 장식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례로 중정 바닥에 깐 벽돌은 최소 3겹, 많을 때는 7겹까지도 깔아 여기에 깔았던 벽돌은 약 2천만개 이상이 사용되었다. 또한 성벽과 담, 삼대전의 기단에 사용된 벽돌은 약8천만개 이상이 사용되기도 했다.


벽돌은 규격과 질에 따라 城塼, 澄漿塼, 方塼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城塼은 停泥城塼이라고도 하며 성벽이나 담등에 주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澄漿塼은 벽면의 표면에 붙이는 화장벽돌로 사용되었다. 方塼은 결이곱고 견고하며 두드리면 쇠소리가 난다 해서 '金塼'이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궁전내의 중요한 바닥에 깔았다.


기와 또한 그 재질에 따라 세 종류로 구분된다. 특정한 건물에 사용되었던 금속기와(金屬瓦), 일부건물에 사용되었던 청기와(靑瓦, 黑瓦 또는 布瓦라고도 함),그리고 대부분의 건물에 사용되었던 黃色琉璃瓦가 있다. 유리기와는 규격과 종류가 다양해서 맞춰 끼우기가 매우 복잡하다.


기와를 제작하는 데는 공정이 복잡하다. 바탕문양의 삽입, 소성, 유약칠등 품과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렸다. 전문기술자가 건물의 치수, 집의 형태에 따라 기와 견본에 번호를 붙여두면 琉璃廠에서는 그 번호에 따라 각종 기와를 굽게되는 것이다. 기와가마의 설치에 대해 明,淸의 乾隆年間에 [수로 북쪽 5리 이내에 가마를 설치해서는 안된다]라는 규정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 이유는 많은 量의 기와와 벽돌을 굽기 때문에 바람방향에 따라 성내의 공기가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3)석재


자금성궁전 조영에는 엄청난 양의 석재가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규격도 보통기준보다 엄격히 규제했는데 예를 들면 기단표면에 붙이는 階條石은 '長同間廣' 즉 柱間과 길이가 같은 석재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특히 건청궁의 중앙주간은 7m이기에 길이7m이상의 장대석이 필요하게 되었다.


궁전 앞 御道에 쓰인 석재 또한 거석으로서 무게 1만근이나 되었다. 자금성궁전의 전면을 제외하고 오문에서 단문, 천안문에 이르는 어가의 포장에도 대형 석재가 이용 되었다.


이와 같이 1만근 이상의 거석이 자금성궁전 건설에 사용된 것은 약 1만개 이상이었으니 원석을 채취, 가공하는 규모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삼대전 기단 앞뒤의 御路석판은 길이 16.57m, 넓이 3.07m로서 무게는 250톤이다. 가공하기 전에는 약 300톤 이상이었으며, 만력년간에 삼대전을 재건할 때 태화전 앞의 어로는 길이 약 19.8m, 넓이 약 6.6m, 두께 1.5m로서 무게는 약 180톤이나 되었다.


이같이 거대하고 육중한 재료를 운반하기 위해서는 주로 수레와 산륜을 사용하였다. 운반시기는 겨울을 택하여 연도 1리마다 우물을 한곳씩 파서 노면에 얼음을 깔아 그 위를 미끌어지게 하여 옮겼다. 마찰저항을 감소시키기 위해 당시로서는 매우 유효한 방법이었다. 이것을 운반하는데 약2만명이상이 필요했고 북경에 도착할 때까지는 약 28일 정도가 걸렸다.


이러한 대형석재는 北京서방 房山縣 大石窩와 門頭溝 靑白口에서 채굴하였다. 이곳에서 생산된 석질은 견고하고, 색깔이 청색과 백색의 중간이어서 '청백색' 또는 '艾靑葉'이라 불렀다. 방산에서는 청백색 외에 백석도 대량으로 생산되었는데 그중에는 유연하고 견고한 옥석과 같은 漢白玉도 있었다. 이밖에 성밖 동북의 順義縣 牛欄山과 門頭溝 馬鞍山에서 靑砂石, 白虎洞에서는 豆渣石, 曲陽(하북성)에서는 화강암이 생산되었다.


재료의 사용에 있어서 백석은 기단 난간에, 청석은 기단에, 두 사석은 배수구의 바닥면과 도로포장에 , 화강암은 마모가 심한 바닥면에 , 청사석은 부속건물의 초석과 기단에 사용하였다.


4) 기타 건축재료


자금성궁전에는 대량의 석회가 사용되었다. 석회암 산지와 가까운 곳에 석회요를 설치하여 대량의 석회를 생산하였다. 방산현의 주구점과 자가무(현재도 이근처에 石灰廠이라는 지명이 있음), 順義縣의 于欄山, 懷柔 등지는 석회산지로서 유명하다.


궁전의 벽은 적색으로 되어있는데 황색유리기와의 來瓏灰가운데도 석회를 물에 용해시켜 紅土를 혼합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紅土의 사용량도 많았다. 홍토는 산동성의 노산에서 채굴하여 근처의 박산에서 가공하였다. 궁전 실내벽에 바르는 생석회를 包金土라하며 하북성 宣化의 煙筒山이 그 산지이다. 그 밖에 금칠한 보좌와 실내외의 彩色金箔은 실제로 금을 박아넣어 사용하기도 하여 금박이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금박은 성분이 다른 庫金과 大赤金의 두 종류가 있다. 이밖에도 많은 재료가 사용되었다.


시공과정 

 

자금성궁전은 시공에 앞서 오랜기간 동안 치밀하게 시공계획과 자재수급계획을 세운 후 영락15년(1417년)드디어 공사를 착공하였다. 3년간 대역사를 거쳐 영락 18년(1420)9월에 준공하였는데 공사규모, 준비, 공정, 공사기간등 모든 것이 건축사상 유래없는 기록들이었다. 건설에는 10만여명의 전문공장과 100만인부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전국각지, 심지어 외국에서 선발된 우수한 장인도 있었다.


陸祥, 楊靑, 괴 祥등은 紫禁城造營에 우수한 재능을 발휘한 名匠이었다.


陸祥은 선조대대의 석공으로 어릴 때부터 부친의 기술을 배워 南京城造營에도 참가했었다. 그의 기술은 아주 뛰어났으며 그가 담당했던 궁전과 廟壇石은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었다. 수치도 정확할 뿐만 아니라 공정계산도 정확했다. 欽安殿 백석기단과 3 대전 기단에 세긴 천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낼 수 있도록 만든 세공등 그의 기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紫禁城宮殿 조영에서 그는 工期를 단축하기 위하여 미리 성 밖 석공방에서 조각을 완성한 다음 현장으로 운반하여 민첩하게 맞춰 설치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瓦工의 楊靑은 적산에 뛰어나 품의 수와 재료배분에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많은 양의 기와를 굽는데는 작업량뿐만 아니라 인부수도 많기 때문에 자칫하면 공사의 혼란을 가져오기 쉽다. 그러나 楊靑은 인부의 배치, 재료의 수급, 賃金의 지출, 재료비 지출등 어느 하나라도 공정에 차질 없이 공사를 진행하였다.


?祥은 蘇州 吳縣사람으로 집안대대로 목공이었다. 그의 부친 ?福은 풍부한 경험과 기술로 남경성 궁전조영때 감독을 맡았던 적이있다. 괴상은 어린시절 부친에게서 그 기술을 배웠고 젊어서 남경으로 나와 목공제품 제작에 대해 경험을 쌓으므로써 우수한 大木匠으로 성장했다. 그의 부친 괴복이 은퇴한 후 괴상은 南京宮殿의 목공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 세 사람이 자금성 조영에 있어서 石工, 瓦工, 木工의 대표적인 명장이었다. 이 공사에는 장인뿐만 아니라 泰寧侯 陳珪, 工部侍郞 吳中, 太監 院安등 전체계획을 맡은 행정책임자의 공적에 관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금성 조영계획에 가장공이 큰사람은 蔡信이었다. 그는 瓦工이나 木工에 관한 풍부한 지식뿐만 아니라 설계에도 뛰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각 전문공장들과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설계안은 여러 전문공장들의 경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영락18년(1420년) 9월 9일 자금성궁전이 낙성될 무렵 영락제는 신년하례를 새 궁전에서 행한다는 칙서를 공포하고 북경을 국도로 결정했다. 같은 해 12월 단묘와 궁전 전체를 낙성했다. 그로부터 100여일이 지난 그 다음 해 4월 奉天殿, 華蓋殿, 謹身殿이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南京으로 다시 국도를 옮길까 했지만 제6대 영종은 정통4년(1439년)12월궁전을 수복하고 3대전을 재건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때 공부상서 오중을 수복공사의 감독관으로 명하고 괴상을 설계와 시공의 책임자로 하였다. 수복공사는 정통5년 3월에 착공하여 근2년 만에 완성하였다. 괴상의 기예는 더욱 세련되어 당대 최고의 수준에 달했다.


이 재건으로부터 120년 후 가정36년(1557년)4월 어느 저녁 심한 뇌우로 奉天殿, 華蓋殿, 謹身殿, 文樓, 武樓, 左順門, 右順門,午門, 內外朝房 등 三大殿 2樓 15間이 모두 타버렸다. 그해 10월 奉天門 재건을 시작으로 겨울동안 주요 건물들을 수복하고 이듬해봄 기와를 올리고 단청을 함으로써 7월에 준공을 하고는 그 이름을 大朝門으로 바꾸었다. 그 후 3대전도 嘉靖41년 (1562년)에 수복되었다.


만력25년(1597년) 6월 또다시 3대전에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귀극문에서 발생하여 황극문과 문소각, 무성각을 위시, 주위의 회랑등 순식간에 모든 건물을 전소시켰다. 그 후 18년 후인 만력43년(1615년)에 겨우 재건을 시작하여 천계5년에서 7년 사이 (1625- 1627)에 3대전과 주요 건물들을 준공하였다.


당시 수복공사에 참가했던 공장사 馮巧는 훌륭한 대목장이었다. 만력년간에서 숭정년 간에 걸쳐 馮巧는 궁전수복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대목장 梁九에게 자신의 기술을 전수시키는 한편 축척 10분의1 모형을 이용해서 설계하는 방법을 지도함으로써 그의 상세한 기술을 전수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배운 梁九는 淸의 康熙34년(1695년) 太和殿 재건공사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大殿의 造形, 構造, 形式, 値數등 세부에 이르기까지 10분의 1 모형을 만들어 그 건물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현재의 太和殿은 그 당시 梁九가 설계했던 것이다.

 

자금성궁전 공간의 조형성-고대사상의 건축적 응용

 

자금성은 대부분 중국 궁전건축의 전통적인 규칙에 따라 건축되어졌다.


중요한 건물은 남북의 중심선상에 병립되고 부속건물은 그 평행선상에 서로 대칭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정연하게 놓여 있는 집중적인 구성은 우주의 질서를 표현했고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을 과시하는데 효과적인 역할을 했었다. 건물 수, 크기, 형태, 높이, 색깔, 장식, 방위는 거의 전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북쪽은 나쁜 방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北虜]라는 말로서 표현된다. 異民族이 침략하는 것은 항상 북방으로부터 이기때문기도 하지만 북쪽은 춥고, 암울하고, 有害한 夷國의 요소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물은 거의 대부분 남향으로 세워져 있지만 황제의 用濟에 붙어있는 居所만은 北向으로 건립되어 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간에 자살율이 높은 것은 추운 북풍과 北에 대한 금기의 풍속 때문이라 생각된다. 고대사상이 건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서 음양오행설이 있다.


음양설이라고 하는 것은 역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지만 역의 {계사전}에 그에 관한 설명이 대강 나와 있다.({是故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八卦定吉凶 吉凶生大業})


역은 길흉화복을 점치는 복서의 일을 가진 것이기에 우주의 변화를 지시하는 것이라 믿었다. 유명한 의학전적인 {황제내경}에 {음양이란 천지의 도다}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사물을 상호대립,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는 {음}과 {양}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즉 양의라고 하는 것은 음양으로서 자연현상을 인간 활동에 대한 근거로 삼는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방위의 상·하, 전후, 수에 있어서 奇數·偶數, 正數負數를 보면 모든 것이 2개의 속성으로 이루어 졌다. 上·前·奇數·正數는 {陽}, 下·後 ·偶數·負數는 {陰}이 되는 것이다. 만물은 바로 이와 같이 陰陽의 대립과 통일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皇帝內徑}에는 또한 陰陽의 2字를 일컬어 {만물의 網紀이다}라고 하였다.


자금성은 바로 이 음양설을 응용하여 설계하였다.


외조는 {양}, 내연은 {음}에 속한 까닭에 외조의 중요한 궁전에는 기수를 채용하였다. 이것을 {오문}{삼조}의 제라 칭한다.


한편 내정의 궁전에는 우수가 많이 채용되었다. 예를 들면 {兩宮六朝}의 兩宮은 乾·坤兩宮이고(交泰殿은 후에 증축된 것임) {六寢}은 東西六宮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偶數에 따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음양설에는 다시 {양중의 양},{음중의 음}이 있다. 태화전은 {양중의 양}이고 건청궁은{음중의 음}이기 때문에 이 두 대전에는 공통점과 동시에 차이점도 있다. 공통점으로는 두 건물 모두 중층우진각 지붕에 실내의 천정은 藻井이며 전면에 御路를 설치했다. 月台와 그 위의 일구(해시계), 嘉量(계량표준기)등이 병렬되어 있는 것이다.


차이점은 외조 태화전은 백석의 삼중기단을 하고 있는 반면 건청궁에서는 기단의 전반부는 須彌檀式으로 白石 高欄으로 되어있고 우측에는 靑塼基檀으로, 상면에는 高欄대신에 한 등급 낮은 琉璃澄籠塼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서로 다른 차이점이다. 자금성에는 음양설뿐만 아니라 오행설도 설계에 응용되었다.


오행이라는 자는 {尙書}(書經이라고도 하며 儒家의 經典으로 五經중의 하나이다. 58편으로 되어있고 虞書, 夏書, 商書, 周書등 唐虞 3代에 걸친 중국 고대의 기록이다. 尙書라고 하는 것은 上古의 책으로 숭상해야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甘誓篇에 이미 기록되어 있으며 周書 洪範篇에서는 구체적인 오행의 성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순서를 수, 화, 목, 금, 토로 되어있다.


오행은 인간의 생활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접촉하는 물질을 분석해서 5가지 종류로 귀납시킨 것인데 예를 들면 방위로는 동, 남, 서, 북, 중의 5방위가 있고 색채로는 청, 황, 적, 백, 흑의 5색이 있다. 音階에는 5音, 인체에는 5臟, 그밖에 5味, 5金, 5氣 등이 있다.


오행에 관련한 각 사항의 구체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오색 중 청색은 온화한 봄을 상징하며 방위는 동이다.


자금성의 동쪽에 있는 文華殿은 원래 황태자의 講學所였던 까닭에 전에는 綠色琉璃 기와로 덮어져 있었다. 그 후 明代 嘉靖年間에 용도가 변경되어 黃色琉璃기와로 바뀌었다. 또한 청대 건륭년 간에 건립되었던 南三所는 皇子들의 宮室이었는데 幼年은 五行의 木에 해당되며 生化過程은 生으로 방위는 동이다. 이 까닭에 이 역시 綠色琉璃기와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태후, 태비의 생화과정은 收, 五行은 金, 방위는 西에 해당되기 때문에 한 대 이래 태후의 궁실은 서측에 배치되었던 것이다. 그 후의 역대 궁전건축 조영리론은 모두 이 배치법을 적용하였으며 자금성궁전에 있어서도 壽安宮, 壽康宮, 慈寧宮이 전부 서쪽에 배치되었던 것이다.


자금성과 동시에 건축되었던 사직단도 오행 중에서 오색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한 것 중 하나이다. 사직단은 기단위에 방위를 나타내는 오색의 흙으로 쌓았을 뿐 아니라 기단 사방의 낮은 단에도 오색의 정해진 색을 따랐다.


동방은 청, 남방은 적, 서방은 백, 북방은 흑 중앙은 황색이다. 이것은 고대 사상에 나타난 방위와 색채의 고나계를 나타낸 것이다. 자금성 궁전에 있어서의 색채는 오행의 오색, 오지와 깊은 관계가 있다.


오행설의 {적}은 喜를 상징하기에 紫金城의 外周성벽과 여러 곳의 건물벽은 특히 赤色을 사용하였고 궁정의 문(扉),창, 기둥, 敷鴨居도 전부 적색 또는 주홍색을 채택하고 있다. 坤寧宮 실내의 적색은 한층 더 선명하게 되어있고 주홍색 벽이나 바닥에 {囍}이라는 문자를 표시해 두고 있다.


자금성이외에 주홍색을 사용한 건물은 친왕의 저택과 寺廟뿐이다. 자금성 남쪽에 있는 午門은 기단, 기둥, 벽, 문, 창을 적색으로 칠 하였을 뿐 아니라 색채도 다른 것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색을 칠할 때 축부에는 적색등의 난색계, 회랑에는 청록색의 한색계를 대비시켜 칠한 것이 많다. 그러나 오문은 자금성의 진남에 있고 방위로는 {화}에 속하기 때문에 적색을 위주로 한 {吉祥草三寶珠}식 채색을 하였다. 또한 진북방향은 오행으로 {수}에 속하기 때문에 자금성 제일 북쪽에 있는 欽安殿 배면 중앙의 高欄 腰羽目板에는 {波壽水紋}의 조각을 나타나게 하였다. 이밖에 走龍의 꽃을 세겨 넣은 문양도 있다.


오행의 황색은 중심, 武己로서 {土}를 나타낸다. 土는 만물의 근원이고 금색, 황색은 부귀를 상징하므로 황제나 황후의 옷에는 이와 같은 金色 黃色이 많이 사용되는 것이다. 청대에는 黃色馬掛(승마할때의 예복)를 공신에게 하사하는 것이 최고의 명예이기도 하였다. 또한 거의 모든 궁전 지붕의 황색유리와로 덮어져 있는것 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음양오행설을 기호로 표시해 볼 때 一은 양, 이것을 반으로 나눈 --는 음으로 표시된다. 이 2개를 3행으로 병열시켜 8개의 종류로 짝을 맞추면 이것이 각각 8방위를 표시한다. 또한 8종류의 自然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8개의 기호를 기초로 다시 8x8=64 종류를 짝을 맞추어 배치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八卦}라 한다. 이것은 5行에 있어서 4방위(木 火 金 水)에 4방위의 대각선 방위를 증가 시키면 이른바 {4正4偶}로서 전부 8방위로 된다.


바람과 물은 건축설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에 속한다.


바람에 따라 건물의 향이 결정되니 겨울에는 追風으로 일조를 좋게 하고, 여름에는 역풍으로 시원하게 함으로서 방위를 최대한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입지의 선정에 있어 산을 뒤로하고 물을 앞으로 두는 것이 중요한 배치법중의 하나이다.


북경은 북으로 太行(燕山), 東으로는 滄海(渤海)에 임하게 되며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형으로 되어있어 일조와 排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 자금성 또한 그 지세가 북경의 지세와 같이 배치되어 있다.


북쪽은 남쪽보다 1m정도 높고 궁전 앞에는 물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전방의 물은 金水河이고 후방의 산은 万歲山(景山)이 되는 것이다. 궁전 앞에 물을 끓어 들임 으로서 환경을 아름답게 하는 동시에 우수의 배수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물을 중히 여기는 {來龍去脈}의 배치방법이 중요한 설계방법이었다.


풍수에서 물(水)은 乾(북서)에서 시작하여 巽(남동)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자금성 내의 하천은 처음에 西(乾)에서 인입되어 內廷宮殿의 담 서측을 끼고 남으로 흘러 武英殿 앞에서 동으로 굽돌아 外朝太和門 앞으로 흘러서는 동쪽으로 빠져 나갔다. 이 물의 출구는 자금성의 東南에 있으며 팔괘의 巽 방위에 해당된다. 오행에서 서방이 금이며 자금성 내를 흐른다고 해서 이 하천을 {內金水河}라고 부른다.


거대한 건축공간의 조화

 

자금성궁전의 공간구성은 그 변화가 풍부하다. 건축과 건축, 건축과 인간과의 관계를 교묘히 처리하였고 개개의 공간에도 여러가지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오문은 자금성궁전의 정문으로서 전방에 연결된 통로는 궁전과 통하는 간선이며 '天街'라고 한다. 午門의 양측에 회랑이 연결되어 긴 지붕을 형성하고 있는데 天街에서 바라보면 마치 의장대가 사열하는 것과 같은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해 준다.


午門을 들어서면 지금까지의 분위기와는 달리 대단히 넓은 중정이 눈앞에 전개된다. 중정 가운데는 다섯 개의 아치교가 놓여 있고 마치 요대를 두른 듯 內金水河가 지나간다. 金水橋를 지나 太和門을 들어서면 웅대하고 화려한 太和殿이 나타난다. 이 太和殿은 자금성궁전을 구성하는 공간중 제일 중요하고 또한 궁전내 공간의 조형성이 최고조에 달하는 곳이다.


太和殿이 웅대한 것은 건축 그 자체가 크고 높기도 하지만 太和殿을 형성하고 있는 기단과 주위 건물이 더욱 그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때문이다. 3중기단위에 2층 우진각지붕의 거대한 太和殿은 전면에 중정이 있고 주위에는 낮은 회랑이 둘러져 있어 그 화려한 기술적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太和殿과 동일 기단에 太和殿 뒤로 中和殿과 保和殿이 있다. 기단의 평면은 [干]자형이고 이것을 둘러싸고 회랑과 각종 문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것을 '三大殿'이라 한다. 이 3대전의 면적은 약 25,000 m2이다. 3대전 뒤로 後三宮이 배치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乾淸宮, 交泰殿, 坤寧宮이 있고 그 주위를 또한 회랑과 각종 문들이 배치되어 있다. 3대전과 후3궁을 비교해보면 배치와 건축형식은 비슷하지만 3대전에 비해 공간의 규모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공간구성에 있어서 3대전이나 후3궁 공히 從으로 긴 장방형이며 이 두 공간을 구분하기 위하여 사이에 옆으로 길다란 광장을 두고 있다. 3대전은 건물 인동간격이 크지만 후3궁은 밀접하게 배치되어 있어 심오한 후궁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자금성궁전의 공간구성은 종횡의 교차, 疎.密의 적당한 배합, 기복의 변화가 특징이며 이는 중국 고대건축 예술의 진수를 집약시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구조와 장식의 조화

 

중국고건축에 나타난 장식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구조적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장식적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장식예술은 최고의 수준에 달하게 된다. 자금성궁전 에서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일치시킴으로써 다채로운 장식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궁전의 문에 박은 못(門釘)은 금색으로 되어 있어 장엄하고 고귀한 감을 주는 중요한 장식요소이다. 문 하나에 9단9열로 전부 81개의 못이 박혀 있는데 "영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못은 덧 판과 가로살을 고정시키는 구조적 역할과 장식적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지붕 용마루 양쪽 끝과 추녀마루 끝에는 치미와 잡상 등의 장식이 있다. 치미는 구조상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장식부재도 되고 또한 단조로운 지붕의 윤곽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지붕의 합각마루는 물매가 아주 급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지붕구조상 큰 약점이다. 이 약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합각마루 끝에 瓦釘을 추녀목에 박고 그 위에 잡상을 설치하여 은폐시켰다. 이 잡상은 구조적 기능을 갖고 있는 장식요소인 것이다.


3대전 기단에 돌출시켜 붙쳐 둔 石彫璃首는 기단에 고이는 雨水를 멀리 분출시켜 아래 단부를 더럽히지 않을 뿐더러 기단의 분위기를 한층 더 우아하고 신비스럽게 해준다. 맑은 날 3대전기단에 1,000여개의 이수가 선명한 그림자를 드리우면 마치 화려한 한 폭의 그림이며 비가 올때면 1,000여 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내는 것과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 이것이 바로 기능과 예술의 결합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결정체인 것이다. 紫禁城宮殿에 있어서 장식예술의 특징은 구조체를 그대로 노출시켜 여기에 예술적 가공을 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느끼도록 한 것이라 하겠다.


外朝 

 

外朝는 明, 淸時代 황제가 정무를 보던 곳이다. 紫禁城 중심축선상에 배치된 3대전과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文華殿, 武英殿을 중심으로 남측성벽에 붙여 지은 사무공간인 내각 및 공문서고인 當案庫와 鸞儀衛와 커다란 창고가 포함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朝廷의 공식적인 의식을 거행하며 면적은 약 85,000 m2(약 26,000평)에 달한다. 웅대한 규모, 위엄있는 품격, 호화로운 창호, 신비스러운 색채등 모든 면에서 紫禁城宮殿중 최고의 품위를 나타내는 건축군이다.


3대전 입구는 太和門 인데 정면 9칸, 측면 4칸의 2층합각지붕(重詹歇山頂)으로 되어있다. 궁내에서 제일 큰 문이다. 명나라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신하의 진상을 받고 칙령을 내렸으며 정령을 공포하였다. 그래서 이곳을 '御門聽政'이라고 했다. 太和門의


좌우에 昭德門과 貞度門, 東西兩翼에 協和門과 熙和門 및 남측의 午門이 回廊과 연결, 광장을 에워싸고 있다. 광장을 들어서면 太和殿 앞에서 體仁閣과 弘義閣이 마주보고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1) 太和殿


정면 11칸(60.01m), 측면 5칸(33.33m)으로 높이는 35.05m이다. 바닥면적은 기단부를 포함하여 2,377 m2이다. 이 건물은 중국고건축 중에서 정면 칸수가 가장 많으며 나아가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지붕은 2층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중국에서는 지붕형태중에서 우진각을 가장높은 품격으로 여긴다. 내부에는 2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으며 이중 寶座양측에 蟠龍이 묘사된 거대한 금박기둥 6개가 서있다. 전내 중앙에는 隱畵수법의 금칠로 장식한 寶座가 있고 보좌 바로 상부에는 寶珠를 물고 있는 蟠龍을새긴 藻井으로 되어 있다. 조정을 제외한 부분은 전부 금색룡을 도안한 우물천정(格天井)으로 되어 있다. 지붕의 잡상(走獸) 수는 보통 9개인데 여기서는 行什이 추가되어 추녀마루의 잡상으로서 유일하게 제일 많다. 바닥은 0.62m×0.62m의 전을 깔았다.


2) 中和殿


정면 5칸, 측면 5칸의 방향평면이며 단층모임지붕으로 되어있다. 지붕정상에는 銅에 금도금을 한 寶頂을 얹혀 놓았다. 명대초기에는 華蓋殿이라 불렀으나 嘉靖年間(1522∼1566년)에는 中極殿이라 불렀다. 그 후 淸初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 되었다.


황제가 太和殿으로 나가기 전 잠시 머무르면서 상소문을 열람하고 조정대신들의 배례를 받던 곳이다. 淸代에는 10년에 한번 황제의 계보인 玉牒 편찬을 이곳에서 하였는데 이것을 황제가 열람 할 때에는 장중한 의식이 거행 되었다. 전내에는 황제의 寶座가 있고 기둥은 太和殿보다는 화려하지 않으며 모두 단홍색으로 단장되었다.


3) 保和殿


명대초기에는 謹身殿이라 불렀고 嘉靖년간에는 建極殿이라 불렀다. 청대에 들어와서는 황제가 왕공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즐기는 곳으로 사용했고 建隆5년(1789년) 이후에는 殿試(과거의 최종시험)를 거행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午門의 中樓와 칸수가 같다. 정면 중앙 5칸은 출입문이 달려있고 양측면 2칸씩은 창호로 되어있다. 양측면은 벽으로, 뒷문은 중앙 3칸을 제외하고 전부벽으로 처리하였다.


지붕은 2층 팔작지붕이고 전내의 창호와 진열품에는 단홍색을 칠하여 화려하고 고귀한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內廷 

 

3대전 후방에는 황제와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있다. 이곳을 내정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宮殿, 樓, 台, 亭, 閣 등이 밀집 배치되어 있다. 내정은 전부 여섯 개의 공간으로 구분되는데

①後3宮(皇帝,皇后의 寢宮)

②東西6宮(皇妃의 宮室)

③養心殿(淸의 雍正帝이후 皇帝의 寢宮)

④寧壽宮(建隆帝 퇴위를 대비하여 건립한 太上皇 宮殿)

⑤황후, 황비의 궁전

⑥황태자의 궁실로 구성되어 있다. 내정의 중요한 건물은 乾淸宮과 坤寧宮으로서 황제와 황후의 침궁으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이 양궁은 외조의 3대전과 같이 紫禁城의 중심축선에 배치되어있다. 明의 嘉靖年間에 이 양궁사이에 정방형 평면의 모임지붕으로 된 交泰殿이 새로 추가되어 그후로 후3궁이라 부른다.


1) 乾淸宮


명대부터 청대에 걸쳐 황제가 생활하던 공간이며 명의 永樂19년(1421년)에 창건되었다. 그 후 앞의 건축연혁에서 밝힌 바와 같이 화재로 인한 여러 번의 증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乾淸宮에 사용된 건축부재의 대부분은 청대 嘉靖2년(1797년)에 재건된 것이지만 배치는 건립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정면 9칸의 2층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乾淸宮 주위에는 40칸의 회랑이 둘러져 있는데 동회랑에는 황제가 책을 읽고 상소문을 열람하는 懋勤殿이 있다. 남회랑 동쪽 끝에는 翰林院의 책임자가 황제에게 자문하는 上書房이 있고 그 서쪽 끝에는 황태자의 독서실인 南書房이있다. 북쪽 끝 문내에는 壽藥房과 總監, 太監 등 대신들의 방과 창고가 있다.


2) 坤寧宮


乾淸宮, 交泰殿과 함께 工자형 동일기단 위에 배치되어 있으며 乾淸宮보다 약간 소규모의 대전이다. 원래 이곳은 황후의 생활공간이었는데 청의 順治13년(1656년), 만주족이 만든 審陽의 淸寧宮을 모방하여 개축한 것이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2층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坤寧宮 동측에 있는 東暖閣은 황제의 신혼 궁침이며 康熙帝, 東治帝, 光緖帝의 대혼때에도 이곳에서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