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 광서제, 비상에 독살됐다… 100년만에 과학적 입증돼
[조선일보]2008.11.02 22:06
▲ 유해에 대한 독극물 실험을 통해 독살 사실이 100년만에 드러난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의 생전 사진/두산백과사전청나라 말기 비운의 황제 광서제(光緖帝)가 독살(毒殺) 당해 숨졌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일 보도했다. 광서제는 1875년부터 1908년까지 청나라의 11대 황제였던 인물.
문회보는 “고도의 과학기술이 100년 수수께끼를 풀다. 광서제가 비상(砒霜·비소로 만든 극약)으로 독살 입증돼”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청나라 말기의 광서황제의 사망 원인에 대해 ‘정상적으로 병사(病死)했다’는 설과 ‘음모에 의해 살해됐다’는 설이 많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었는데, 그의 사망 100년 기일(忌日)을 며칠 앞두고 과학기술에 의해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보도했다.
문회보는 “중국의 국가중점문화공정팀이 현대의 과학기술을 이용해 광서제의 유골과 모발에서 독극물 화학실험 결과, 광서제의 모발과 위(胃)에서 치명적인 분량의 비소 성분(예전엔 비상·砒霜으로 불림)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이를 토대로 ‘국가 청사(淸史·청나라 역사)편찬위원회’가 금명간 ‘청(淸)광서황제 사인 보고회’를 가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자연사가 아닌 독살로 확인됨에 따라 과연 누가 독살에 가담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의문이 새로 생기게 된 것.
<다음은 문회보 요약>
1871년 8월14일 태어난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저녁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바로 그 다음날 서태후(慈禧太后)도 74세를 일기로 숨졌다. 하루 사이에 나이 차이가 두 배인 두 핵심 인물이 죽자 세상에는 추측이 난무했다.
어떤 이는 “서태후가 자신이 죽은 뒤 광서제가 권력을 잡는 것을 원치 않아 사람을 보내 광서제를 독살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무술년 변법 때 위안스카이(袁世凱)가 광서제를 배반했는데, 서태후 사후에 광서제에게 보복 당할 것이 두려워 환관을 시켜 독살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환관 리롄잉(李蓮英)이 독을 탔는데, 그 이유는 광서제가 자신의 일기장에 ‘서태후가 죽고 나면 위안스카이와 리롄잉을 주살할 것이다’고 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광서제가 신체가 허약해 병사했다”고 말한다. 지난 100년간 광서제의 사인에 대해 장황하고 지루한 논문은 많았지만 정론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에 중국 국가문물국이 1930년대에 도굴된 채 방치됐던 유물들을 정리하다가 청서릉(淸西陵)의 창고 안에 있던 광서제와 융유(隆裕)황후의 관과 유해를 찾아냈다. 이후 두 사람의 모발과 유해를 추출해 최근 5년간 고도의 과학실험을 거쳤다.
곧 발표될 ‘광서제 사인 보고서’에는 최신의 법의학적 실험을 한 청서릉문물관리처, 중국 원자력연구원, 베이징시 공안국 법의(法醫)감정센터 관계자들이 서명했다. 이들이 최후에 낸 결론은 “광서제의 모발에서 높은 함량의 비소가 검출됐는데 이는 외부로부터 감염된 것이다. 다량의 비소화합물이 광서제 시신의 위(胃)에 잔류하고 있고, 시신의 부패 과정 등으로 인해 유골과 의류 등에도 녹아 내려 분포한다. 과학적으로 계산한 결과 광서제가 체내에 흡수한 비상(砒霜)의 총량은 치사량에 이르렀음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병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돼 있는 중국 정사(正史)도 독살 당한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광서제는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함께 변법유신을 일으켰지만 최종적으로는 수구파와 서태후의 역공을 당했고, 죽을 때까지 서태후에 의해 영대(瀛台)에 감금됐다. 비소 성분으로 이뤄진 극약인 비상은 냄새가 없고 맛도 없는 백색 가루다.
홍콩=이항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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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제 (光緖帝 ; 1871~1908)
청(淸)나라의 제11대 황제(재위 1874∼1908)로서 휘는 재첨(載雋)이며 묘호는 덕종(德宗)이다. 그리고 시호는 경황제(景皇帝)로서 제 8대 황제인 도광제(道光帝;1782. 9. 16 ~1850. 2. 25 )의 제7자 순현친왕(醇賢親王) 혁현(奕辰)의 아들이다.
청나라 말기의 격동기에 비극적인 운명을 겪은 황제로, 사실상의 정권은 서태후(西太后)가 장악하여 평생 동안 서태후의 전횡(專橫)에 시달렸다. 치세하는 동안 이리사건(伊犁事件) 및 청 ·불전쟁, 청 ·일전쟁 등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서구열강과의 관계로 가장 다사다난한 시대였다. 깊어만 가는 청나라의 고민과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의 주장대로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본받은 변법자강책(變法自强策)을 받아들여, 1898년 무술(戊戌)변법을 시작하였다.
이 개혁은 당시의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 세력의 쿠데타로 실패하였다. 즉, 이렇게 되자 보수적인 관료들이 반발했다.
제국군대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영록(榮祿:1836~1903)의 도움을 받아 서태후는 다시 수도로 돌아와 황제를 황궁에 유폐하고 나서, 그가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황제의 죽음이나 폐위를 바라지 않았던 외국열강이 그의 생명을 구하기는 했다. 그리고 변법파의 캉유웨이 등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운동이 일어나 열강의 군대가 베이징에 입성하자, 황제는 서태후와 함께 시안[西安]으로 피하였는데, 그러한 탈출의 혼란을 틈타서 서태후는 황제가 사랑한 진비(珍妃)를 죽였다.
1901년 화약(和約)이 성립되어 베이징으로 귀환하였다. 그 뒤에도 유폐생활을 하다가 1908년에 죽었고, 다음 날 서태후도 갑자기 죽었다. 광서제의 3살 난 조카에게 황위가 넘겨졌고, 새로운 황제는 선통(宣統)이라는 연호로 즉위했다.[두산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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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에 황제 된 光緖帝
[중앙일보] 2007.06.10 03:49
짜이톈(오른쪽)짜이펑 형제. 짜이톈은 광서제가 됐고, 짜이펑은 마지막 황제 푸이의 아버지가 됐다. 사진=김명호 제공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이 황제를 칭한 이래 494명의 황제가 있었다. 추증(追贈)된 73명을 빼면 421명이었다. 이들 중 29명이 열 살이 안 돼 황제에 올랐다. 어린 황제가 가장 많았던 왕조는 청(淸ㆍ1636∼1911)이었다. 12명의 황제 중 창업기 2명(順治ㆍ康熙)과 말기 3명(同治ㆍ光緖ㆍ宣統) 등 모두 5명의 어린 황제가 있었다. 순치와 강희는 6세와 8세 때 황제가 됐다.
동치는 6세에 즉위했다. 함풍(咸豊)의 유일한 아들로 서태후(西太后) 소생이었다. 서태후는 아들이 황제가 되는 바람에 태후가 됐지만, 함풍이 8명의 대신에게 동치를 보좌하게 했기 때문에 실권은 없었다. 서태후는 시동생인 공친왕(恭親王)과 순친왕(醇親王)을 동원해 고명대신들을 제거하고 수렴청정을 폈다.
동치는 19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형제 중에서 황위 계승자를 정해야 했지만 서태후는 순친왕의 둘째 아들로 갓 3세를 넘긴 짜이톈(載<6E49>)을 황제로 지명했다. 청의 11대 황제 광서제(光緖帝)다. 서태후는 수렴청정에 복귀했다. 광서는 황제의 아들이나 동생이 아닌 사람 중에서 최초로 황제가 된 이다. 또 황제로 세상을 떠난 마지막 황제였다.
광서의 재위기간은 34년이었지만 친정은 중간 10년에 불과했다. 마지막 10년은 감금 상태였다. 광서는 1908년 서태후보다 하루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서태후는 광서의 동생이며 순친왕을 계승한 짜이펑(載豊)의 아들 푸이(溥儀)를 황제로 지명하고 세상을 떠났다. 짜이펑은 아들이 황제가 된 이후 1911년 혁명으로 청이 멸망할 때까지 섭정왕이었지만 혁명에 저항하지 않았고, 푸이가 괴뢰 황제로 있던 만주국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 덕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어느 정도 대접을 받다가 1951년 세상을 떠났다.
개국 황제들은 자기 분수가 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되는 일은 없어도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건달기와 용의주도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들이었다. 시세를 꿰뚫어 볼 줄 알고 판단이 서면 차마 못할 짓도 거리낌없이 해치워버리는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온갖 풍상을 다 겪은 그들이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 있다면 어린 황제와 수렴청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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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조선사연구회 댓글]
현상태
정말 과학적으로 입증이 된 것인지 .. 참으로 의문이 가시지가 않습니다. 08.11.02 22:31
김재만
비소가 나왔다고 하네요... 08.11.02 22:33
이 청-만주족의 상징은, 붉은 색의 모자를 쓰는 전통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위의 광서제의 그림도 그러하고, 서쪽의 오스만투르크의 Leader도 붉은색의 '스키타이 모자'를 쓰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두 세력이 분명히 관련이 있습니다. 08.11.02 22:38
윗 기록대로라면, 광서제의 생존연도는 '1875년~1908년'까지입니다. 이 당시 한국의 왕은 고종이죠... 그러나, 다음과 같이 여러가지의 연호를 사용합니다. 08.11.02 22:40
김재만
1) 고종 33권, 32년(1895 을미 / 청 광서(光緖) 21년) 8월 23일(신묘) 2번째기사 페서인 민씨에게 빈의 칭호를 특사하다. 08.11.02 22:41
2) 고종 35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건양(建陽) 2년) 3월 2일(양력) 5번째기사 대행 왕후의 시호를 명성으로 개망하다. 08.11.02 22:42
3) 고종 36권, 34년(1897 정유 / 대한 광무(光武) 1년) 11월 6일(양력) 1번째기사 빈전에 시호를 올린 것에 대하여 조서를 반포하다. 08.11.02 22:42
이처럼 같은 고종시절에도 다른 연호를 쓰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건양과 광무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정확하게 아직도 저는 연호를 사용하는 이유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연호라는 것은 주종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지?... 08.11.02 22:44
현상태
연호는 황제만이 쓸수 있는 달력의 기준인데 고종에 광서 건양 광무의 순서대로 바꾸었다는 것은 청조, 즉 조선의 중앙조정이 붕괴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시기와 맞물린다, 할 수 있습니다. 광서제는 조선의 황제이지 , 만주족,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청나라는 원칙적으로 연호를 쓸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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