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동양의 비행기-비차(飛車)

한부울 2008. 11. 1. 20:23

동양의 비행기-비차(飛車)

[파이낸셜뉴스] 2008년 10월 12일(일) 오후 08:20


세계 많은 민족의 창조 신화엔 하늘에서 내려온 탈 것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새나 날개 달린 뱀, 불수레, 마차, 배 등 그 모양도 다양하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현재 지구인의 1%는 우파누이(거문고자리 알파별 베가)에서 왔다고 믿고 있다. 일본 북해도의 아이누족은 조상이 신타라는 비행물체를 타고 지구에 왔다고 한다. 또 북극 근방의 이누잇족은 조상이 거대한 쇠로 만든 새를 타고 북극지대로 왔다고 믿고 있다.


이처럼 하늘을 나는 것에 대한 인류의 동경은 전설과 신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으며 하늘을 날려는 노력들은 문명이 발전하며 조금씩 현실화되었다.


15세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나사처럼 생긴 헬리콥터를 고안했고, 1849년에 케일리는 무동력 유인비행에 성공했으며, 1783년에 인류는 몽골피가 만든 기구로 땅에서부터 날아 하늘로 오르는 데 성공했다. 이 기록들은 인류가 하늘을 날기 위해 노력한 역사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하늘을 날려는 시도가 한 번도 없었을까.


실제로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기록을 보면 서양보다 더 오래 전에 하늘을 난 기록들이 존재한다.


중국 진나라의 갈홍이 쓴 책에는 프로펠러에 대한 묘사가 있다. “대추나무의 속 부분에서 목재를 취하여 비차(飛車)를 만들었는데 소가죽 띠를 회전하는 날개에 연결하여 기계가 작동되게 했다…” 고 돼 있다.


또 고대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에 의하면 한나라의 천문학자이자 기술자였던 장흥이 ‘나무로 된 새’를 만들었는데 뱃속에 어떤 기계장치가 있어서 약 1600m를 날았다고 전해진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동양은 서양보다 하늘을 난 역사가 근 2000년이나 앞서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기록은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있다. 우리나라 비차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실학자 신경준(1712∼1781)의 ‘여암전서(旅庵全書) 책차제(策車制)’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 내용은 “임진왜란 때 김제 사람 정평구가 영남의 읍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성의 우두머리에게 비거의 법을 가르쳐 이것으로 30리(지금으로 12㎞) 밖으로 날아가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인 ‘왜사기(倭史記)’에도 기록돼 있다. 왜사기에서는 “전라도 김제에 사는 정평구가 비거를 발명하여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실학자 이규경이 19세기 중엽에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비기변증설(飛車辨證說)에는 “임진왜란 때 정평구란 사람이 비차를 만들어 진주성에 갇힌 사람들을 성 밖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그 비차는 30리를 날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엔 비차의 정확한 그림자료가 없어 모양은 알 수는 없으나 그 비행모습을 기록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 기술을 모방하려면 먼저 하나의 수레를 만들어 나는 연처럼 깃과 날개를 단다. 그리고 그 속에 기구를 설치하고, 수레에 탄 사람이 헤엄치는 것처럼 또는 자벌레가 굽혔다 폈다 하는 것처럼 하여 바람의 기운을 내게 한다면, 두 날개가 자연히 날아서 한순간에 천 리를 가는 형세를 짓고, 그것을 줄로 가로세로 엮어 매어 신축성이 있게 하고, 비차 속에서 풀무질하여 규칙적으로 센 바람을 일으켜 대기 위에 뜨게 한다면 그 형세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조금은 추상적인 내용이지만 이 기록을 토대로 실제로 한 방송사에선 당시의 재료인 대나무, 광목, 또 그 시대에 쓰였던 매듭을 사용해 정평구의 비차를 복원해 시험비행해 보기도 했다. 이 시험비행 결과 20m 높이에서 70m까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비차의 추진장치까지 복원하진 못했지만 비행에는 성공해 정평구의 비차가 실제로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무동력 유인비행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1849년 케일리의 비행보다 약 260년 앞서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날틀을 기록했던 때와 비슷한 시기로 우리나라의 앞선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신이 직접 그린 설계를 남겼고 정평구의 비차는 남에 의해 비행 사실만을 남겼다. 이 때문에 정평구의 비차는 인류의 하늘에 대한 도전으로 기록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만약 정평구가 직접 비차의 설계도와 그 원리를 제대로 기록하고 남겼다면 우리나라는 세게 최초의 무동력 유인비행에 성공한 나라로 기록될 수 있었을 것이다.


글=박영기 과학칼럼니스트·자료제공=한국항공우주연구원 파이낸셜뉴스

************************************
조선시대의 비차(飛車) 연구 

 

일제 때의 한국의 항공교통에 대한 사정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근대과학의 총아로 등장한 비행기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사고는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비행기를 연구 개발하게 된 것은 인간도 새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았으면 하는 소망에서 착상되었다. 이 소망을 이루고자 해서 인류사상 처음으로 갖가지 기구를 만들어 창공에 도전한 것은 르네상스시대의 화가인 레오나르도 · 다빈치(1452∼1519)였다. 그는 벌써 이 때에 날개 달린 비행기, 글라이더, 낙하산 등을 고안해서 하늘을 날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 한민족은 어떠했는가? 우리 한민족에 있어서도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이 소망은 레오나르도 · 다빈치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기구를 만들어 구체화 시킨 일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서 엿볼 수가 있다. 이 기록은 조선 정조(1776∼1800) 때의 학자인 이규경(李圭景)의『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볼 수 있다. 이 저서에는


「임진왜란 당시 영남의 어느 성(城)이 왜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그 성주(城主)와 평소부터 친분이 두텁던 어떤 사람이 「날으는 수레」곧 비차(飛車)를 만들어 타고 성중(城中)으로 날아 들어가 성주를 태워 30리 밖에 이르므로써 인명을 구했다.」 고 하였다.


또 이규경 자신의 기록으로


「자신이 강원도 원주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비차에 관한 책을 소장하고 있거니와 이 비차는 4명을 태울 수 있으며 모양은 따오기(혹(鵠))와 같은 형(型)으로서 배를 두드리면 바람이 일어서 공중에 떠올라 능히 백장(百丈)을 날 수 있되 양각풍(羊角風)이 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광풍(狂風)이 불면 추락한다 하더라.」 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이규경은 전주부인(全州府人) 김시겸(金時謙)에게 들은 말도 곁들여 기록해 놓고 있다.


「호서(湖西, 충청도) 노성(魯城)에 윤달규(尹達圭)라는 사람이 있거니와 그는 기물(器物)을 잘 만드는 재주가 있어 비차를 만들어 가지고 있으나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하더라.」 고 하였다.


이규경의 기록을 통해 보면 우리 조상들은 레오나르도 · 다빈치 보다는 날틀(비행기) 연구가 비록 100년 가까이 뒤지고 있기는 하나, 레오나르도 · 다빈치는 시도(試圖)에 그치고 만데 반해 우리 조상들의 날틀은 실제로 하늘을 날았다는 사실에 무한한 긍지와 자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어느 민족보다도 앞서 성공했던 비행기 연구 개발이 보다 고도(高度)한 진보(進步)를 가져오지 못하고 기록상으로나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특별시 조선600년사]

**************************************

[공군사관학교 박물관 비차(飛車)모형-1/2 크기로 축소제작 전시]

 

 

                                                  [제이와 사랑만들기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