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단재 신 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

한부울 2008. 10. 3. 00:50

단재 신 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   이만열                                                                              
 


1. 신채호는 누구인가?


최근 백여년의 역사를 돌이켜 볼때, 우리나라에는 참으로 위대한 많은 선조들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 분들 중에는 나라가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 자신의 한 몸을 던져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 한 독립운동가도 있고, 사상가로, 학자로 혹은 예술가로 활동한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그 자신이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조국의 광복을 위해 희생된 분이 있으니 신채호 선생이 바로 그분이다.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근대 우리나라가 낳은 위대한 선각자의 한 분이다. 그는 한말 민족적으로 대단히 불안한 시기에 태어나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교육 언론 역사연구 활동에 종사하였고,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빼앗긴 일제하에서는 해외로 망명하여 민족사 연구와 상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결국에는 감옥에서 일생을 마친 분이다.


그는 어린 시절 그의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였고 그의 총명함이 들어나자 서울로 올라와 당시 국립대학인 성균관에서 좋은 스승을 모시고 벗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 뒤 한때 시골에 내려가서 교사로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곧 서을로 올라와 주로 언론활동을 통해서 애국계몽운동과 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때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논설을 써서 백성들의 애국혼을 불러일으키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였다. 이 때 그는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된 많은 논설과 영웅들의 전기를 써서 백성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취하는 데에 힘썼다.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망하자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만주와 북경 상해 등 지와 한때는 연해주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망명 초기에는 만주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옛 유적지를 돌아보고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찬탄하면서 역사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또 상해와 북경 등지에서 상해임시정부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무정부주의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그가 남긴 역사연구는 구시대 지배자 중심의 왕조중심 사관(史觀)과 일제의 한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함께 부정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웅혼한 민족주의 역사학을 건설하였다. 그 때문에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은 신채호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방략에서 타협적이고 온건한 자치론이나 외교론을 배격하고 비타협적이고 무력에 의한 절대독립론을 주장하고 이를 몸소 실천한 불굴의 독립투사로서 우리 역사에 길이 빛나는 분이다.


2. 신채호의 생애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를 보이다.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현재 대전직할시 대덕구) 산내면 어남리 도림 마을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령 신씨로서 조선조 세종 세조 때 문신으로 활약한 신숙주(申叔舟)의 18대손에 해당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의 집안은 점차 몰락하여 그의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가 고종 초기(1867)에 문과에 급제하여 잠시 벼슬에 올랐을 뿐 양반가문으로서는 크게 행세하지 못하였다.


신채호는 8세에 아버지를 여의게 되자 할아버지를 따라 그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와 거기서 할아버지가 차린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다. 가난한 살림에 어린 시절을 거의 콩죽으로 연명하였지만, 신채호는 할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밑에서 9세에 <자치통감>을, 13세 때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재주가 뛰어났던 신채호는 이 때 '신동'이라는 별명을 들었으며, 이 무렵 <삼국지(三國誌)>와 <수호지(水滸誌)>를 애독하며 한시(漢詩)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졌다.


두뇌가 맑고 독서열이 높다는 것을 안 할아버지는 신채호를 그의 친우였던 신기선(申箕善)에게 소개하여 충청남도 목천에 있는 신기선 본가의 장서를 읽도록 하였다. 신기선은 뒷날 학부(현재의 교육부)의 대신 벼슬을 지낸 구한말의 관료였다. 그런 인연으로 신채호는 신기선의 추천을 받아 19세 때에 당시 국립대학격인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었다. 성균관에서 그는 변영만(卞榮晩) 같은 벗들을 사귀면서 동료들 사이에서 학문으로 곧 두각을 나타내었고, 성균관장이던 이종원(李鍾元)으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다. 그는 이 때 종로에 있는 서점에 나가서 그 전에 접하지 못했던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그의 독서열과 기억력은 대단히 놀랄만하였다. 그가 남긴 우리나라 역사 관계의 논문과 책들 중이는 이 때에 읽은 내용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쓴 것이 많다.


신채호가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있었다. 청년 신채호는 한학을 공부하였지만, 이 때 여러 개신유학자(改新儒學者)들과 함께 이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하였다. 만민공동회가 보수세력에 의해 해산당하자 신채호도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잠시 체포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신채호가 만민공동회운동에 참여한 것은 그의 인생에 큰 변화를 갖다 주었다. 유학을 신봉하던 그를 개화 자강론자로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무렵 한때 고향 마을에 설립된 문동학원에 내려가 계몽운동을 벌이기도 하지만, 1905년까지 성균관에서 계속 공부하여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언론활동과 역사연구로 국권수호운동에 나서다.


1905년 그는 장지연이 사장으로 있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기자로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신채호의 뛰어남을 들은 장지연은 노일전쟁으로 일제의 한국 침략이 노골화하자 언론으로 백성을 계몽하여 국권을 보전하고자 그를 초청한 것이다. 황성신문은 1898년에 독립협회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창간되었는데, 신채호가 입사할 당시에는 장지연과 박은식 등 개신유학파의 선배들이 있었다. 박은식은 서북지방 출신의 유학자였으나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계기로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게 되었으며, 이 무렵에는 황성신문의 기자로 날카로운 논설을 써서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는 한편 교육 역사 관계의 글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있었다. 박은식은 뒷날 <한국통사(韓國痛史)>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등의 훌륭한 역사책을 썼고 임시정부 마지막 대통령으로서 활동한 분이기도 하다.


신채호가 황성신문에 입사한 지 얼마 안되어 저 유명한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는데, 황성신문의 장지연이 이 사실을 폭로함과 동시에 사설에 '이 날에 소리놓아 크게 울리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어 백성들의 분노를 대변했던 것이다. 일제는 이 사건을 이유로 황성신문을 무기정간하고 신문을 압수했으며 장지연과 신문사 직원들을 구속하였다. 그 이듬해 2월 황성신문이 복간되긴 했으나 장지연은 사장으로 복귀하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신채호는 황성신문을 사임하였다.


황성신문을 사임한 후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로 옮기게 되었다. 이 때 박은식도 대한매일신보로 잠시 옮겼으나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그는 돌아갔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한국과 영국이 합작으로 창간한 신문인데 사장은 영국인 베텔(Ernest T. Bethell, 裵說)이었고 양기탁(梁起鐸)이 총무로 있었다. 발행인이 외국인이면, 일제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고도 신문을 간행할 수 있었다. 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용기있게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인의 항일운동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였다. 황성신문을 사임한 신채호는 양기탁의 권고로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신채호의 애국적이고 정열적인 호소는 일제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백성들을 감동시켰고 용기와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 활동하는 동안 신채호는 당시 많은 애국인사들과 교제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나라를 구하기 위한 활동에도 함께하게 되었다.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게 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신민회는,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쓰러져가는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전덕기 양기탁 등과 손잡고 조직한 비밀독립운동 단체이다. 신민회에는 이동령 이동휘 이승훈 이갑 유동열 노백린 김구 이종호 등이 참여하였고, 당시 언론활동을 통해 문명(文名)을 날리고 있던 신채호도 가입하여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전덕기가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던 남대문 근처의 상동교회와 양기탁이 총무로 있던 대한매일신보사가 신민회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사에 근무하면서 상동교회에도 자주 출입하며 신민회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신채호는 1905년 말부터 1910년 4월까지 대한매일신보에 근무하면서 주로 언론 문필 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펴 나갔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몇가지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첫째는 시대의 긴박성을 인식시키고 민족적 각성을 고양하는 한편 일제의 침략을 경계하고 물리치기 위한 언론구국 활동을 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활동은 주로 대한매일신보와 여러 종류의 잡지들을 이용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는 <이십세기 신국민(新國民)>을 비롯하여 <일본의 삼대충노(忠奴), 일본의 큰 충노 세사람>, <동양주의에 대한 비평>,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이십세기 신동국지영웅(新東國之英雄)>, <유교계에 대한 일론(一論)>, <영웅과 세계>, <국수보전설(國粹保全說)>, <'애국' 두자를 구시(仇視)하는 교육가여>,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學部)>, <가족교육의 전도(前途)>, <동화(同化)의 비관(悲觀)>, <진화와 퇴화>, <신 가 국 삼관념(身家國 三觀念)의 변천>, <西湖問答>, <정신상 국가>, <국민의 혼>,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한국과 만주>, <만주와 일본> <국한문의 경중>, <국문연구회 위원 제씨에게 권고함> 등의 많은 논설을 썼다. 또 대한협회월보 등의 잡지에도 <대한의 희망>을 비롯하여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대아와 소아> 등의 논설들은 실었다. 이러한 논설들은 이 무렵의 그의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던 때에 그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각계각층의 백성들을 깨우치려고 애쓰는 모습을 엿보게 해 준다.


한말 신채호가 본 우리 나라의 형편은 <대한의 희망>이라는 그의 글에 잘 나타나 있는데, 원래 국한문체로 된 그 글의 첫 부분을 쉽게 풀어 본다.


"오호라, 오늘 우리 대한에 무엇이 있는가. 국가는 있건마는 국권이 없는 나라이며, 인민은 있건마는 자유가 없는 백성이며, 화폐는 있건마는 주조권(鑄造權)이 없으며, 법률은 있건마는 사법권이 없으며, 삼림이 있건마는 우리 것이 아니며, 광산이 있건마는 우리 것이 아니며, 우전(郵電)이 있건마는 우리 것이 아니며, 철도가 있건마는 우리의 소유가 아니니, 그렇다면 교육에 열심하여 미래인물을 제조할 대교육가가 있는가 이것도 없으며, 그렇다면 식견이 우월하여 전국 민지(民智)를 계발할 대신문가가 있는가 이것도 없으며, 대철학가 대문학가도 없으며, 대이상가 대모험가도 없는지라. 비고 빈 나라에 갈팡질팡 허둥대는 사람들이 되어 그 참담한 광경은 배고파 우는 아이에 양식마저 깨끗이 치운 가난한 집의 궁상이며, 그 처참한 정상은 남편을 전장에 떠나보내고 외로이 잠자리에 든 여편네의 긴밤이요, 그 생활은 도탄의 물불이 바야흐로 깊은 날이며, 그 산업은 지리파멸됨이 이미 극심한 후이니, 오늘 우리 한국민의 소유가 무엇이라 말할꼬."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신채호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長物)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그는, 바로 이 희망을 가지고, 절망 좌절할 수 밖에 없는 한말의 저 비극적인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자신이 선두에 서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필봉으로써 백성들을 계몽 격려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한말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들 자신이 새로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처음에 그는 백성들이 영웅을 본받아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영웅이 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영웅을 기대하기 보다는 차차 새시대에 필요한 '신국민'이 되어 나라의 독립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그는 '신국민'을 설명하기 위해, "태고시대의 민족으로서는 중고시대에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중고시대의 민족으로서는 20세기에 제대로 버티지 못한다"고 하면서, 20세기의 신국민은 평등 자유 정의 의용(毅勇) 공공의 덕목을 갖추어야 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와 국민경제의 실시, 입헌국가의 건설, 의무교육의 실시 등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민적 국가'(국민국가)가 아닌 나라는 바로 입헌국이 아니고 한두 사람이 전제하는 나라라고 지목하면서, 그런 나라와 세계대세를 거스리는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한말 우리나라가 입헌국가로서의 국민국가가 변화되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한말 나라가 망한 것은 백성이 새국민으로 되지 못했고 제도를 국민(입헌)국가로 변혁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말 그가 언론인으로서 얼마나 예리한 예언자적 통찰력을 갖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둘째는 신채호가 이 기간에 우리 나라 역사연구를 통해 민족혼과 대외투쟁의식을 고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이때 많은 역사관계 논설과 논문, 단행본들을 써서 신문 잡지에 발표하였다.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와 같은 논설과 <독사신론>과 같은 논문 그리고 을지문덕전 최도통(영)전 이순신전 같은 영웅전 등, 이런 글들은 모두 그가 이때 저술한 것이다. 그의 역사연구는 일제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민족운동의 한 방편이자 민족독립운동 그 자체였다. 때문에 그는 우선 과거 김부식과 같은 '사대주의자'들이 서술했던 우리나라 역사를 노예적 사대적 자기멸시적인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런 역사는 철저히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처음부터 중국의 역사와는 다르며, 오히려 중국에 대결하거나 중국을 정복해 온 역사를 견지해왔다고 주장하면서 그 역사 속에 민족자주독립의 웅혼한 기상과 세계평화 실현을 위한 높은 이상을 담아내려고 하였다. 그 밖에도 그의 역사연구와 그 업적 영향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망명하여 여러 곳에서 국권회복의 기틀을 마련하다.


일제는 1904년-1905년의 일 로전쟁에서 승기를 제압하면서 한국에 대한 독점적 침략을 노골화한다. 1905년 11월에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두어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였다. 일제는 이어서 1907년에는 '헤에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는 한편 한국의 행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행정 각부의 한국인 장관 아래 일본인 차관을 두는 것을 골자로 하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였다. 일본인 통감에 일본인 차관이 들어서면서 한국의 내정은 일제 침략자의 손에서 좌우되었다. 일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1909년에는 '기유각서'로써 한국의 사법권을 빼앗아 갔고, 1910년 5월에는 경찰권까지 빼앗아 갔다. 그 해 8월 일제는 그나마의 대한제국의 황제조차 자리에시 내쫓고 그들의 총독이 들어섰다.


나라가 위기를 맞으면 온갖 거짓된 애국자들이 출몰하는 법, 이 때에 일진회를 선두로 벌써부터 조국을 일본에 팔아먹으려는 매국노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장인환 안중근 이재명 같은 열혈 애국자들이 목숨을 내놓고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을 벌였다. 1907년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활동은 병럭을 강화시켜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의병활동을 자세히 보도하였다.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의 이러한 활동에 발?춰 한층 예리하게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는 한편 일제의 앞잡이들인 이들 매국노들과도 싸웠다. 앞서 거론한 그의 글에 매국노를 신랄하게 응징하려는 내용들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다. 신채호는 점차 시들어가는 조국을 보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1909년 10월 안중근의사의 애국거사가 일어나자 일제는 신민회 간부들을 일부 체포했다가 그 이듬해 2월에 석방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민회 간부들은 해외망명을 논의 결행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31세되던 1910년 4월, 신채호는 이미 쇠잔해진 조국을 뒤로 하고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먼저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 도착, 여준 이광수 등의 환영을 받으며 '샌님'의 일화를 남겼고, 얼마 안있어 압록강을 건너 안동을 거쳐 청도(靑島)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같이 망명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만들어 앞으로 독립운동을 본격화하자는 것을 논의하였다. 이 때 독립군 기지를 위한 자금은 이종호(李鍾浩)가 그의 조부 이용익(李容翊)이 상해 덕화(德華)은행에 예치해 놓은 돈을 인출하여 충당키로 하였다. 즉 그 돈의 일부(약 3천 달라)로써 만주 밀산현(密山縣)에 있는 미국인 경영의 태동실업회사 소유의 토지를 매입, 개간하여 신한민촌(新韓民村)을 만들고 독립군기지로 활용하되 거기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1910년 9월에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약 3년간 그곳에서 신민회원들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12월에 그는 이곳에서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만들어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교민들의 권익을 옹호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광복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1913년에 이르러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간행이 어려워지자, 신채호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신규식의 초청으로 그곳에 갔다. 그는 상해에서 1년간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서 무장투쟁론을 전개하는 한편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신채호는,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의 양자로서 일찌기 미국에 유학한 바 있는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웠는데, 영어학습에서 뜻만 중요시하고 발음은 중요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는 '이웃'을 뜻하는 단어 'neighbour'의 발음이 '네이버'인 줄 알면서도 '네이 그후 바우어'라고 발음하였다는 것이다. 또 영어를 읽으면서 중간중간에 '하여슬람'이라는 소리를 섞어 한문 읽듯이 천천히 읽어갔다고 한다. 읽고 이해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는 있지만 발음까지 굳이 영국식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그의 고집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신채호식'으로 익힌 영어이지만 그는 기본(Edward Gibbon)의 <로마제국흥망사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와 카라일(Thomas Carlyle)의 <영웅숭배론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 같은 책을 영어로 읽었다고 하니 그의 재능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신채호는 대종교의 3대교주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 흥도천으로 가서 1년간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이자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지인 만주를 실제로 답사하게 되었다. 그는 이 답사를 통해 "집안현의 유적을 한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할 정도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역사연구에서 사적답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도 이때의 체험에서 느낀 점을 그대로 말한 것이다. 그는, 발로 걸어다니면서 역사적인 유적 하나하나를 확인해 가는 답사야말로 문헌상의 부족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 신채호는 윤세복의 부탁으로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국사를 가르치면서 이 학교의 국사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는데, 학자들은 이 때 집필된 것이 뒷날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그가 쓴 '조선상고사'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저술의 하나이다.


신채호는 1915년, 일찍 서울에서부터 개화운동가로 어울린 바 있던 이회영(李會榮)의 권고를 받아 북경(北京)으로 옮겨 3 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4년간 체류하였다. 북경에서 그는 주로 우리나라 역사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만주에서 우리 고대사의 유적지를 널리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 경험을 살려 아마 이 곳에서도 그는 때때로 북경 교외로 나가 조선고대사의 유적을 두루 답사한 듯하다. 1921년경 국어학자이기도 한 이윤재(李允宰)가 북경에서 신채호를 찾았을 때, 그는 북경 근처에도 '훌륭한 조선고적'이 있지마는 누가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중국은 우리 조선의 사료를 탐색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이것이 다 우리가 할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종래 우리나라 사대주의 역사가들은 안목이 좁아 사료를 반도 안에서만 찾으려고 했다. 그랬던 만큼 신채호는 북경에서 역사연구를 하면서 유적을 답사하고 사료를 찾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만리장성이 뉘 것이냐>라는 논문에서 보이듯이, 그가 만리장성을 언급하면서 우리 교대사와의 관계를 소개한 것이나 연개소문의 유적을 중국 동북지방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때의 답사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북경에서 국사연구에 매진한 결과 그는 상당한 분량의 원고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윤재가 방문했을 때, 신채호는 모두 다섯책으로 된 원고뭉치를 보였다고 하는데, 1)조선사통론, 2)문화편, 3)사상변천편, 4)강역고(疆域考), 5)인물고의 다섯편과 이 밖에 또 부록이 있을 듯하다고 전하였다. 아마도 이 원고의 대부분은 이 무렵 그가 북경에 체재하면서 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신채호는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중화보(中華報)'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글을 기고하였다. 그의 결벽성과 강직성은 원고의 한 글자도 고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중화보'에서 그가 보낸 원고의 토씨 한자(矣)를 고쳤다 하여 그 후에 집필을 거부하였던 것은 그의 성품의 일단을 알 수 있다. 신채호의 논설로 '중화보'의 발행부수가 4, 5천부나 늘어난 것을 감안하여 사장이 여러 차례 찾아와서 사과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야단을 쳐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신채호는 중국인들이 한국인을 무시해서 글자를 고친 것이라고 하고 생계를 위해서 집필한 자신을 두고 지조를 깨뜨린 것처럼 후회했다고 한다.


이렇게 소신을 굽히지 않고 생활하다 보니 이 무렵의 궁핍함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발보다도 큰 베집신을 끌고 다녔고 굶는 날이 많았다. 이 딱한 사정을 보다 못한 우응규라는 사람이 그를 찾아와 돈을 방석 밑에 두고 갔지만 방소제를 제대로 하지 않는 그는 그것도 모른 채 굶고 지냈다. 어쩌다가 그 돈을 발견할라치면 그것을 자신이 떨어뜨린 것으로 착각하였다고 한다. 신채호의 이같은 '괴벽스러운' 모습은 핀잔을 받기도 했지만, 뜻있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신채호와 깊은 교제를 나눈 바 있는 벽초 홍명희(洪命憙)는 북경시절의 단재 신채호를 이렇게 말했다. "북경서 달포 동안 단재와 교류하는 동안 비로소 그의 인물을 잘 알았읍니다. 단재가 고집세고 괴벽스럽다고 흉보듯 변보듯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나, 단재의 인물을 잘 알면 고집이 세고 맘에 거슬리지 않고 괴벽이 눈에 거칠지 않았을 것입니다."


타협하지 않은 독립운동가로 서다. - 임시정부와 신채호


1919년 3 1독립운동,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생존권을 박탈당한 우리 민족이 독립을 쟁취하려고 총궐기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이후 무단통치로 숨통을 죄고 토지조사사업으로 한국인의 생존의 바탕인 토지마저 빼앗아갔다. 생존권을 박탈당한 백성들은 남부여대(南負女戴)하고 만주로 시베리아로 새 삶의 터를 찾아가야 했다. 나라 안에 머물 수 밖에 없던 동포들은 일제의 철권통치 아래서 신음하며 곤고한 나날을 보냈다. 이렇게 고통받던 우리 민족이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사에 새 기운이 도는 기회를 이용하여 민족독립을 선언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이 한국사 뿐만 아니고 세계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중국 인도 필립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만 보아도 알 수 있다.


3 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2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戊午獨立宣言)>를 선포하자 신채호는 여기에 서명하였다. 북경에서 3 1운동을 맞아 감격하면서 그는 독립운동 방략에서 활동적이고 투쟁적인 점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3 1운동에서 힘을 얻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조직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보이자, 그는 상해로 가서 이 해 4월 '29인 모임'에 참여하여 임시정부를 발기하기 위한 회의(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를 성립시키고 이어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이들은 김대지 김동삼 김철 남형우 백남칠 선우혁 손정도 신석우 신익희 신채호 신철 여운형 여운홍 이광 이광수 이동영 이시영 이홍근 이회영 조동우 조동진 조성환 조소앙 조완구 진희창 최근우 한진교 현순 현창운 등이었다. 그들은 4월 11일 제 1회 회의를 개최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가결하고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뽑았으며, 각부의 총장과 차장을 선출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을 통과시키고 폐회하였다. 이 때 신채호는 과거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청원하였다 하여 그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당선되자 신채호는 그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초기에 임시정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신채호가 임정과 완전 결별을 선언하고 반(反)임정활동에 나선 것은 제 6회 의정원회의(8월18일-9월 17일)에서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통합임시정부를 1919년 9월부터 출범시키려고 결의했던 때다. 그 정도로 신채호는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1919년 10월, <신대한(新大韓)>이라는 주간신문을 창간, 임정을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신문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의 야만성과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안 제출, 독립운동 방략으로서의 외교론, 임시정부 독립노선의 불철저한 전투성, 임시정부의 무능과 파쟁, 여운형의 도일(渡日) 등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신채호는 이 무렵 이승만에게 <위임통치청원서>를 취하하라는 편지를 두번이나 보냈으나 회답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박은식 김창숙 등과 함께 이승만의 탄핵파면을 임시정부에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상해에서 임시정부 반대활동에 앞장 섰던 신채호는 1920년 4월 <신대한>의 발행이 중단되자 북경으로 옮겨갔고, 이어서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박자혜(朴慈惠)와 결혼하여, 이후 3년간 "활기에 넘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박자혜는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활동하던 중 3 1운동에 참가, '간우회(看友會)사건'으로 북경에 망명 유학 중이던 28세의 신여성이었다. 이듬해 신채호는 아들 수범(秀凡)을 얻었으나, 1922년말에는 아들과 아내를 귀국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신채호는 원래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서 무장군사활동을 중요시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이 방략에 따라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 발기하는 한편 '군사통일주비회(籌備會)'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다. 이는 분산된 독립군 부대들의 지휘계통을 통일하여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것으로, 그에 의하면 독립군이 1920년의 봉오동(鳳梧洞)전투와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시 참변 이후에 무장투쟁이 부진하게 된 것은 독립군단들이 분산되어 작전과 지휘에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21년 1월에 북경에서 독립운동 잡지로서 순한문의 월간 <천고(天鼓)>를 창간하여 다시 문필로써 독립운동에 나선 신채호는 김정묵(金正默) 등과 '통일책진회'를 발기하기도 하였다.


1921년부터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는 임시정부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 요구는 마침내 관철되어 1922년 4월 22일 의정원에서도 인민청원안의 심의 형식으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가결하였다. 이때 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다. 이 무렵 가족을 한국으로 보내고 의열단 선언을 작성하기 위해 상해로 왔던 그는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1923년 1월 3일부터 상해에서 70여 독립단체의 대표 123명이 모여 역사적인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지금까지 존속했던 임시정부를 완전 부정하고 노령 간도 등지에 새로운 임시정부를 '창조'할 것인가, 임시정부를 원칙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개조'할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안창호 등 초기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인사들과 여운형 등 신한청년당과 상해교민회의 인사들, 고려공산당의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일부(김동삼 등)가 개조파로서 활동하였다. 여기에 비해 창조파에는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일부와 북경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신채호 박용만 등 북경 군사통일회와 김규식 등 상해 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이 가담하였다. 신채호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6월 7일 새 헌법을 제정한 창조파는 이해 8월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으로 창조파의 임시정부를 옮겼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자국 영토내에서의 한국인의 임시정부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창조파의 임시정부는 활동이 중지될 수 밖에 없었고, 독립운동자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신채호 노선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미 1921년에 대한독립군단이 겪은 '자유시 참변'(흑하 사변)을 알고 있는 신채호는 이때 창조파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더욱 실망하게 되었다.


'조선혁명선언'에서 독립운동의 원칙과 방략을 밝히다.


신채호가 국민대표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기 전에 그는 독립운동의 방략으로서 무장군사활동을 이미 강조하고 있었다. 그럴 즈음 1922년 12월에 의열단(義烈團)의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 내용은 그들의 폭탄제조소가 있는 상해로 가서 이를 시찰하고 의열단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천명하는 의열단 선언문을 작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에서 폭력노선의 독립운동을 표방하면서 창립된 독립운동 단체로서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김원봉이 의백(義伯)으로서 이를 지도하고 있었다. 암살 파괴 폭력을 운동방법으로 택하고 있던 의열단은 이미 괄목할 만한 성과도 거두었고 결사적인 단원도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러나 그들의 운동방법은 은연중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의열단으로서는 자신들의 이념을 이론적으로 정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김원봉은 당대의 문필가로서 자신들의 무력투쟁의 이념에 가장 동조적이었던 신채호를 찾아와 이렇게 간곡하게 요청했던 것이다.


김원봉은 신채호에게 요청하면서 이 선언문 작성을 돕도록 무정부주의자 유자명(柳子明, 본명 柳興湜)을 같이 합숙토록 해 주었다. 수원 농림학교 출신의유자명은 3 1운동에 참가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북경대학 이석증(李石曾) 교수 등의 부정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1921년 의열단에 가입하여 가장 탁월한 이론가로 활약하고 있었다. 신채호는 이때 무정부주의 이론을 일부 수용하여 1923년 1월 전 5장 6,400여자로 된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때문에 이 때 작성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에는 그의 민족주의사상과 무정부주의사상이 혼재하고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의열단의 이념과 운동방략을 천명한 이 <조선혁명선언>은 항일민족운동사상 가장 강건 웅혼하면서도 정교하게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략을 체계화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문서로서 손꼽히고 있다.


자주적인 '국사' 연구는 바로 훌륭한 독립운동이다.


1923년 8월 창조파 임시정부가 러시아 영토내에서 해체되자, 신채호는 실의와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무정부주의와 다시 접촉하는 한편 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 신채호는 북경의 순치문(順治門) 안에 있는 석등암(石燈庵)에 들어가 구차스럽게 몸을 의탁하게 되었고, 1924년 3월에는 북경 교외의 관음사(觀音寺)에 들어가 61일간의 계를 마치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신채호는 불교사상의 깊은 진리를 이 때에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는 유마경(維摩經) 능엄경(楞嚴經)에 밝았고, 특히 마명(馬鳴)이 지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깊이 연구하여 친구에게 읽기를 권하기도 했다. 그의 승려생활은 그 이듬해까지 약 6개월간 계속된 듯하다.


수도생활을 통해 신채호는, 창조파 임시정부 운동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을 딛고 서서, 마음의 평정을 어느 정도 회복한 듯하다. 이 때 그는 임시정부운동 등 일종의 정치운동이 유생의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고 다시 국사연구를 계속해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하였다. 자신의 사명이 굳건한 민족사를 쓰는 것이며, 이 역사연구야말로 정치운동, 무장운동 못지 않은 독립운동임을 확신했다. 그에게는 깨달음과 행동이 일치했다. 1924년 여름 그는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의 초고를 완성했을 정도가 되었고, 가을에는 국사연구를 본격화하기 위해 6개월간의 승려생활을 마치고 하산하였다.


그는 국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북경대학 교수 이석증에게 편지를 써서 대학도서관을 열람하는 데에 편의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석증의 알선으로 그는 <사고전서(四庫全書)> 등에 출입하면서 선진(先秦)문헌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역사 관계 중국서적을 수많이 섭렵하였다. 신채호의 국사연구에서 보이는 100여종이 넘는 수천권의 참고문헌들은 대부분 중국의 대학도서관 등에서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문헌들을 독파한 시기는 이에 앞서 4년간 북경생활을 하면서 국사연구를 했을 때와 이 시기에 국사연구를 본격화했을 때로 보인다.


신채호는 이 무렵 중국의 역사가요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의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 1922>을 읽고, 그의 역사연구에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연구방법은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의 첫부분인 '총론(總論)'에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연구방법을 적용하여 썼을 것으로 보이는 논문들 중에는 뒷날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라는 책에 실린 것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무렵 신채호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조선상고사> 총론의 맨 첫귀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흔히 신채호의 역사관을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근거가 되는 귀절이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여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心的)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인류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신채호는 북경시절에 안질을 버릴 정도로 국사연구를 열심히 하였고, 논문과 저서도 남겼다. 이 때도 그에게는 많은 원고뭉치들이 있었다. 그는 1922년말에 한국으로 돌려보낸 그의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면서 이미 써둔 논문들을 국내의 신문들에 발표하여 그 원고료를 가족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 1월에는 동아일보(편집국장 洪命憙)에 <조선 고래(古來)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을 게재하였고, 그 뒤 1924년 10월부터 1925년 3월까지 계속 <상고사 이두문 명사해석법(上古史 吏讀文 名詞解釋法)> <삼국사기중 동서양자 상환 고증(三國史記中 東西兩字 相換 考證)>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三國志 東夷列傳 校正)>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등의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들은 1930년대에 <조선사연구초>라는 한권의 책으로 묶여졌다. 또 1926년 2월 2일부터 시대일보(편집국장 韓基岳)에 <부(父)를 수(囚)한 차대왕(次大王)>을, 5월 20일, 22일, 25일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년대에 대하여>가 발표되었던 것이다.


민족독립을 위해서는 무정부주의적인 운동방법도 수용하다.


국민대표회의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창조'하자는 신채호의 노선이 실패한 후, 1923년 후반기에 중국에 있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일부에서는 무정부주의의 방법을 공부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원로 이회영(李會榮)과 무정부주의 이론가 유자명 등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들은 중국의 무정부주의자 이석증(李石曾) 교수 등과 접촉하고 있었다. '의열단 선언(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면서 이미 무정부주의자 유자명과 합숙한 바 있는 신채호도 이 당시 북경 독립운동가들의 분위기에 따라 무정부주의 서적을 읽기 시작했으나, 그의 민족주의 의식이 강열하였으므로 쉽사리 빠져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4년 승려생활을 청산한 후, 이회영 유자명 이석증과 만나면서 무정부주의에 본격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다. 이 때 그는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바쿠닌(Mlkhail Bakunin),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의 저작들과 유사복(劉師復)과 이석증의 논설들, 행덕추수(幸德秋水)의 작품들을 읽었다. 1925년경에 발표된 그의 글 속에는 이미 크로포트킨에 동조하는 내용이 비쳐지고 있다. 지행(知行)이 좀처럼 분리되지 않는 그에게는, 이같은 지적 전환은 이미 행동을 수반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1927년 중국 천진에서 중국 일본 조선 대만 안남 인도의 6개국의 대표 120명이 모여 '무정부동맹동방연맹(無政府同盟東方聯盟,일명 A동맹연맹)'을 조직하였는데, 신채호는 대만의 임병문(林炳文)의 안내로 이필현(李弼鉉)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가하였다. 그의 무정부주의운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해에 본국에서 좌우합작의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자 그는 홍명희와 안재홍의 권유로 여기에 참가하였다. 이는 그의 무정부주의운동이 민족독립운동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무렵 그는 무정부주의 사상에 충만한 <대흑호(大黑虎)의 일석담(一夕談)> <용(龍)과 용의 대격전(大激戰)> 등의 글을 남겼다.


신채호는 1928년 4월에 한국인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는 데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회의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해 폭탄제조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신채호는 잡지발행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북경우무(郵務)관리국 외국위체계(外國爲替係)에 근무하는 대만 사람 임병문과 협의하고 외국위체(換)를 위조하여 그것을 찾으려고 5월 8일경 대만 기륭항(基隆港)에 상륙하려다가 수상서원(水上署員)에게 체포되었다.


대련(大連)으로 호송된 그는 7개월간 미결감에서 많은 고통을 받은 후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신채호는 위체를 위조한 '사기행각'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답변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도 그의 무정부주의운동이 민족독립운동의 한 방편임을 알 수 있다.


57세의 평생, 순국의 제물로 바치다.


그는 1929년 5월 9일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중사상범으로 다루어져 여순(旅順)감옥의 독방에 수감되어 복역하였다. 1935년 그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에서는 보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통고하였다. 친지들은 그의 친구이자 일가벌되는 친일파 부호의 보증으로 가출옥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옥중에 있던 그는 친일파에게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의 절의를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일화 한토막이다.


신채호가 수감 중에 있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의 국사연구 업적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홍명희 등은 1924-25년에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여러 논문들을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라는 이름으로 1930년 6월 15일에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출간하였다. 그리고 일찍부터 신채호의 학문과 절의를 흠모하고 있던 안재홍은 <조선사(朝鮮史, 뒷날 '조선상고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짐)>를 1931년 6월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103회에 걸쳐 당시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이어서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를 1931년 10월 15일부터 12월 30일까지, 그리고 1932년 5월 27일에서 31일까지 모두 40회에 걸쳐 역시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1936년 2월 18일, 그는 홀로 있던 감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다. 사흘 뒤인 2월 21일(음 1월 28일) 오후 4시 20분, 당대의 가장 위대한 근대민족주의 역사가요 행동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는 이국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 위에서 아무도 지켜보지 못한 채 외롭게 그의 평생을 순국의 제물로 거룩하게 바치니, 향년이 57세였다.


3. 신채호의 한국고대사 연구업적


신채호는 한말 젊은 시절에는 애국계몽운동가로서 주로 언론 저술 활동에 종사하였고, 일제하에서는 러시아 만주 북경 상해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언론 저술 활동과 함께 한 때는 행동적인 독립운동가로서 일선에서 활략하였다. 한국의 근 현대를 살아간 인물 중 신채호만큼 절의를 굳게 지키면서 지성과 행동을 일치시킨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는 신념대로 올곧게 살아간 민족주의적인 지성인이었다.


신채호의 일생의 업적은 크게 몇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첫째는 무엇보다 근대민족주의 역사가로서의 업적이요, 둘째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이며, 그 밖에 언론 교육 문학상에 끼친 공헌이 있다. 그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앞에서 이미 다룬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역할은 철저히 비타협적이고 무력혁명적인 요소가 강열하였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그의 민족운동가로서의 역할은, 그 자신도 솔직히 인정했듯이, 역사연구를 통해 강건한 민족사를 남기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역사연구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신채호가 힌국의 근대민족사에 남긴 공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채호의 역사관계의 저술들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역사관계의 논설을 다룬 것, 둘째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 등의 애국적인 무장들을 다룬 영웅전, 셋째 <조선사연구초>에 묶여진 학술적인 논문들, 넷째는 통사(通史)를 목적으로 하여 쓴 세개의 저술, 즉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등이다. 이 밖에도 역사를 소설체 형식으로 다룬 글들이 몇편 있으나 역사기록으로는 볼 수 없다. 이들 중에서 논설 중의 일부와 영웅전 중의 최도통(영)전이나 이순신전을 제외하면 지금 남아 있는 그의 역사관계 저술들은 대부분이 한국고대사에 관한 것들이다.


그가 남긴 한국고대사 연구는 다음과 같은 특이한 점을 갖고 있다.


첫째 한국의 상고사(上古史)를 새롭게 체계화하였다는 것이다. 종래에는 단군의 존재가 불확실했거나 일본학자들에 의해서는 부정되어 왔는데, 신채호는 단군의 존재를 분명히 하고 그로부터 우리나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단군을 '우리나라를 개창하신 시조'로 인식하고 숙신 조선 예맥 삼한의 여러 종족을 거느리고 만주와 한반도의 광활한 영토를 다스렸다고 하였다. 단군이 만주를 다스리고 있었다는 주장은 곧 부여와 고구려가 단군의 통치지역을 계승하는 정통적인 나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일제하에서는 독립운동의 기지였던 만주가 단군 이래 우리 땅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신채호는 단군왕조가 중국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중국이 과거 한때 우리 단군왕조의 식민지였음을 강조함으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청산하려고 의도했던 것이다.


둘째 한국고대사를 부여 고구려 중심으로 체계화시켰다는 것이다. 종래 한국고대사의 체계는 두가지로 정리되었다. 하나는 단군-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해하고 삼한을 위만조선에 부속시켰다. 다른 하나는 단군-기자조선-삼한으로 계승되는 체계를 정통왕조로 옹호하고 위만조선을 거짓왕조 혹은 참람(僭濫)된 왕조로 배척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채호는 부여 고구려가 단군왕조를 계승하는 것으로 고대사를 체계화하였는데,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체계화는 단군이 다스린 만주가 우리 영토였음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고 만주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고구려의 웅혼함과 대외항쟁의 승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고구려의 건강 웅혼한 역사를 가지고 중국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사대주의를 타파하자는 것이고, 또 그가 처했던 한말 일제하의 식민지적 상황을 철폐하려는 민족사적 과제와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그가 이렇게 역사를 새롭게 자주적으로 보려고 했을 때에 부여 가야 발해의 역사가 새롭게 조명될 수 있었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우리의 역사무대를 한반도내로 축소시킨 '김유신의 음모'로까지 혹평할 수 있었다.


셋째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이다. 종래의 역사인식으로는 한반도 안에 있었던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 밖에는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채호는 한반도 안에 삼한이 설치되기 전에 중국 동북지역에서부터 삼한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전삼한(혹은 북삼한)이라고 하고 거기에 비해 한반도 안의 삼한을 후삼한(혹은 남삼한)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그는 우리의 고대사에 전후 혹은 남북의 삼한이 있었다고 새롭게 주장함으로 중국의 고대 여러 문헌에 더러 보이는 삼한관계 기록을 해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의 '전후(남북)삼한설'은 우리 고대사 연구에 '민족 및 지명 이동설'이라는 중요한 연구방법을 제시하였다. 따라서 남쪽의 후삼한은 북쪽의 전삼한이 이동하여 이뤄졌다는 것이며, 북쪽의 민족이 이동할 때 그들의 지명도 이동시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그의 '전후(남북)삼한설'은 삼한문제를 비롯한 종래의 평면적인 고대사연구를 입체적인 연구로 전환시켰다.


넷째 단군 부여족의 중국식민론과 백제의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이다. 신채호는 일찌기 산동지방과 회하(淮河) 양자강 유역의 동이족(東夷族)의 활동과 서언왕(徐偃王)의 치적을 소개하였다. 그는 이 지역에서 활동한 동이족이 단군족의 후예인 부여족이라고 하였고 이들이 산동 산서 연(燕) 지역에서 식민활동을 전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 중 서언왕은 서국(徐國) 회국(淮國) 지역의 조선민을 영도하여 일대 강국을 형성하여 주(周) 나라의 목왕(穆王)으로부터 영토를 할양받았으며, 서언왕에게 조공하는 나라가 36국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그는 선진(先秦)문헌을 이용하여 단군 부여족의 혁혁한 승리와 영광을 소개했던 것이다.


신채호는 또한 중국측 문헌을 검토하여 백제가 요서 하북 산동 지역을 경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 전의 많은 학자들이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을 때에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였다"는 중국측 기록을 외면하였지만, 신채호는 이것을 포착해냈던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은 정설로서 확증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주장 속에는 역사를 통해 어떻게든 중국의 사대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는 의지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신채호는 백제와 신라가 일본을 경략하였다는 것도 주장하였는데, 이 또한 '고대일본의 남조선 경영설' 등의 식민주의사관을 부정하고 도리어 일본에 대한 한국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다섯째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존재하였다는 종래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종래에는 한사군 중 낙랑군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일대에, 진번군은 황해도 일대에, 임둔군은 함흥을 중심으로한 함경도 지역에, 현도군은 만주의 통구를 증심으로 하여 집안현과 평안도에 걸친 지역에 각각 설치되었다고 하였다. 신채호는 이에 반대하여, 첫째 한사군은 땅위에 실제로 설치된 것이 아니고 지도위에만 그은 실재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고, 둘째로 현도군과 낙랑군은 요동군의 한 모퉁이 지역을 임시로 빌려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 두가지 주장 모두가 한사군은 한반도 안에는 없었다는 주장이다. 신채호는, 종래의 한사군설이 일찍부터 한반도에 중국세력이 침입해 왔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사의 주체성을 파괴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보고 이러한 식민주의사학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그 대신 신채호는 '남북 양(兩)낙랑설'을 주장했다. 이것은, 요동반도에 낙랑군 즉 북낙랑이 있을 때에 평양 부근에는 우리 민족이 세운 '낙랑'이라는 거대한 국가 즉 남낙랑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 한반도에 중국의 침략세력이 들어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신채호가 주장한 고대사의 특이한 주장은 많다. 고구려의 연대는 원래 900년이 넘었는데 그것이 삭감되어 70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그 하나이다. 그 때문에 위만조선과 싸운 세력은 한 나라가 아니고 고구려의 대무신왕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신채호의 역사학은 이러한 고대사 연구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역사관(歷史觀)에서도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첫째 김부식 이래 내려오는 전근대적이고 사대주의적인 역사학을 부정 극복하였고, 둘째 식민주의사학을 철폐하는 데에 공헌하였으며, 셋째 우리나라 근대 역사학을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역사관은 '근대민족주의사관'이라 부른다. 그가 한국사에서 우뚝하게 돋보이는 것은 바로 그가 쌓은 역사학의 공헌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가 '식민주의사학'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한 부분만 언급하겠다.


신채호는 종래 일제의 어용학자들이 그들의 한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식민주의 역사관'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한국에 대한 그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정체성이론(停滯性理論)', '타율성(他律性)이론'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식민주의사관'의 핵심이다. '일선동조론'은, 한국과 일본은 같은 조상, 같은 민족, 같은 지역에서 출발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것은 침략행위가 아니라 나누어진 두 민족을 과거와 같은 하나의 민족 국가로 만드는 것이 됨으로 그들의 침략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 '정체성이론'은, 한국의 사회경제는 정체되어 자신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근대화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일본이 한국에 진출한 것은 한국을 침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를 도와주기 위한 것으로 합리화되어 그들의 침략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타율성이론'은, 한국사는 한국인의 자주적인 결단에 의해 이룩된 것이 아니라 외세의 간섭과 압박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한국사에 나타나는 이러한 타율적인 전통 때문에 이뤄진 것이지 일본이 침략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침략행위는 다시 정당화되는 것이다.


신채호는 역사연구를 통해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자주적이고 발전적인 민족사를 제시하였다. 특히 그는 고대사 연구를 통하여 '식민주의 역사관'이 갖고 있는 반민족적인 요소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자기 역사에 대해 긍지심 대신 좌절감을 갖고 있던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민족사의 긍지를 회복시키는 한편 그러한 긍지심을 바탕으로 민족자주의 강건한 민족의 앞날을 전개시키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신채호의 역사학은 한국 근대민족주의의 건강성을 이렇게 담보했던 것이다.


丹 齋 申 采 浩

이 만 열


1. 머리말--같은 시대 사람들의 그에 대한 평


신채호(1880-1936)는 한말 일제강점기에 언론 교육 역사연구 등 애국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민족독립과 민중해방을 위한 방편으로 아나키스트운동에 투신하여 끝내는 여순 감옥에서 최후를 마친, 한국 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그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여, 그가 최후로 사상적인 거점을 아나키즘에 두었다는 점 때문에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활동이 덜 평가되는가 하면, 그가 피맺치게 절규한 민족독립의 사상과 지칠 줄 모르는 운동의 열정 때문에 그의 독창적인 국사연구가 덜 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활략이 언론 교육 종교 독립운동 및 국사연구에 걸쳐 광범위한 만큼 그에 대한 연구도 그만큼 다양하게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역사가 신채호만 다루기로 한다.


역사가 단재에 대해서는 이미 같은 시대를 살고 있던 여러 분들이 높이 평가하였다. 1931년 옥중에 있는 단재를 회견한 申榮雨는, 단재가 <朝鮮四色黨爭史>와 <六伽倻史>만은 자신이 아니면 조선에서 능히 正鵠한 저작을 내놓을 수 없으리라는 말을 전하면서, 회견기 말미에 "단재가 조선사연구에 유의한 것은 24 5세 때부터인 듯하며, 그가 이래 수십년 전심경력하여 노력함으로써 금일 조선 역사대가의 명망을 듣는 것은 보통 학자로서의 탐구욕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고, 그가 기울어지는 천하대세에 대하여 깊은 감흥을 느끼고 뜨거운 애착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국어학자로도 명망이 높은 이극로는 단재를 추억하는 글에서 "역사가로서의 신채호는 才士로서의 신채호보다 이름이 더 높이 난 것이 사실이다. 그의 필봉이 향하는 자리에는 正邪가 절로 밝혀진다. 조선역사의 잘못됨을 바로잡기 위하여 선생은 늘 애를 썼다. 歷史談만 하게 되면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의 죄악을 痛論한다"고 썼다. 이극로의 이같은 평은 사실 단재의 저술 전편에 흐르고 있다. 단재와는 길을 달리 할 수 밖에 없었던 이광수조차 "白刃으로도 굽힐 수 없는 그의 절개와 김부식 서거정 이하의 賣閑的 史家의 頭上에 대철퇴를 나린 그의 사필을 잃은 것은 조선의 아픈 손실이다"라고 한 것은 이극로의 평을 잘 확인해 주는 것이다.


위당 정인보는 단재의 사학을 두고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명실상부한 巨擘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사학의 고증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첫째 고증하는 데 있어 다른 사람들 늘 보는 책 속에서도 형안이 한 번 쏘이기만 하면 이것저것을 비교하는 가운데 뜻 아니한 발견과 辨破가 있다. 혹 공허를 걸어가는 듯하다가도 한 곳을 짚은 뒤에 보면 뚜렷한 사실이 나온다. 우리도 늘 보는 것인데 거기에 이런 것이 있던가, 찾아 보면 환한 것인데 어째 그대로 지났던가. 여기서 단재의 天分을 거듭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하필 사서에서 史證을 얻은 것 뿐이랴. 가령 심상한 책자일지라도 단재가 한참 동안 뒤적거리면 거기서도 가끔 어떠한 확증을 얻을 때가 있다. 누구나 들으면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단재의 입에서 나온 뒤에야 말이지, 그 전은 누구나 보아 그러한 분명함을 찾을 길이 없던 것이다.


위당은, 단재의 고증안이 밝다는 것 외에도, 요점을 들어 복잡한 것을 잘 정리한다는 것과 진실을 밝히는 예리성을 가졌다는 것 등을 지적하고 있다. 당대의 한학자요 천재였던 위당으로부터 이러한 평을 들었다고 해서 정도 이상으로 평가할 것은 못되지만, 비슷한 사학정신과 방법론을 가졌던 '역사가' 위당으로부터 이러한 찬사를 받았다는 것은 단재의 사학이 결코 범상하게 보여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단재의 일념은 첫째 조국의 씩씩한 재건이었고 둘째는 그것이 및어 못될진대 조국의 민족사를 똑 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 두고 그 자유독립을 꿰뚫는 날을 맨들어 기대리게 하자 함이었다"고 술회한 민세 안재홍도 단재의 사학을 두고, 구한말에 낳은 천재적 사학자라고 설파하였다. 단재와 30여년간 교유하였던 海客은 단재의 학문과 사학을 두고, "漢書에 得力하여 사학의 독특한 炯眼으로 조선 4,5천년 동안 姑息因循하던 유습이 중국사가의 씹어 배앝은 대궁만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던 것을 破脫하고, 앞으로 세계와 천백대에 새로운 조선역사의 광휘를 드날렸으니 이 어떠한 안광이랴. 이것이 全히 專一한 癖性으로 남 유달리 보기 어려운 한서의 글밖의 뜻을 깨달은 것이니 여간 사학가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단재의 사학을 한두해 접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셀 수 없는, 정곡을 찌르는 평을 하고 있다.


1921년경 북경에서 단재를 만나 주로 역사연구와 자료문제를 두고 대화를 나누었던 이윤재는, 단재가 이때 이미 조선사통론, 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편 등으로 정리한 원고뭉치를 준비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것은 단재가 이미 그 때 역사가로 잘 알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망의 서름을 안고 이역만리에 가서 실제로 역사연구와 집필을 정력적으로 계속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재는 이렇게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사들이 그를 역사가로서 대접했던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역사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2. 단재의 역사연구 과정


단재가 역사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6세 되던 1905년경이다. 그 해 2월 성균관 박사가 된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의 국치에 발분하여 역사연구를 본격화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距今 16년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東國通鑑을 열독하면서, 사평체에 가까운 '讀史新論'을 지어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발포하며, 이어서 수십 학생의 청구에 의하여 지나식의 연의를 본받은 비역사 비소설인 '大東四千年史'란 것을 짓다가 兩役이 다 사고로 인하여 중지하고 말았었다.


이 독사신론은, 그 자신이 "그 논평의 독단임과 행동의 대담임을 지금까지 自愧"한다고 술회한 바 있듯이, 당시 민족의 어려운 현실을 보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의식을 환기시키자는 뜻에서 다소 조급한 심경으로 저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사신론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주목할 점이 보인다. 우선 檀君이 정복적인 영웅으로 나타나고 단군조선의 전통이 부여 고구려로 계승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종래 전통적인 사서에서는 단군-기자-위만의 체계나 단군-기자-삼한의 체계로 고대사체계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단재는 그것을 거부하고 단군의 전통이 부여 고구려로 계승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부여 고구려의 역사적 위치를 격상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가 儒家史學에서 돋보이던 箕子를 부여에 臣屬된 '一守尉'로 평가절하시키는 것이었다. 단재는 또 任那日本府說을 포함한 고대 일본의 한국경영설을 "신라시 임나부 설치의 설은 我史에 不見한 바니, 彼史의 운운한 자를 貿然히 信筆로 據함이 불가"라고 배격하였는데, 임나일본부설 등은 그 무렵 林泰輔의 <朝鮮史>를 비롯한 일본측 사서와 그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玄采의 글에서도 보였다. 이와 반대로 단재는 고대 한민족의 일본경영과 중국에 대한 식민활동을 강조하면서 대외적인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독사신론은 "사평체에 가까운" 글이었기 때문에 뒷날 그 상당한 부분이 수정되어 후속 연구에서는 원래의 내용 그대로 지속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역사연구 초기의 역사관의 일단을 분명히 드러냈고 또 그 중에는 계속 단재 사학의 기본핵으로 연면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독사신론에서 본격화된 그의 역사연구는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이순신전> <을지문덕> <동국거걸최도통전> 등의 전기와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국문의 기원' '西湖問答' '東國古代仙敎考' 등의 역사관계 논설을 계속 게쟤하였다. 그가 1910년 망명하기까지 국내에서 활동한 기간에 나타나는 그의 역사관은 첫째 자강사상에 기초한 영웅대망론 혹은 영웅사관이 나타나며, 둘째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고대사의 체계를 단군에서 부여 고구려로 계승시키고 있으며, 세째 주자학적 가치와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이 그렇게 철저하지는 않지만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한말 교과서에 대한 비판이 철저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1910년 4월경에 단재는 망명을 결행, 상해 북경 만주 연해주 등지를 전전하며 역사연구와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1914년 단재는 대종교의 제3대 종사 尹世復의 초청을 받아 서간도 환인현으로 가서 1년간 그곳에 머물며 東昌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만주 땅 옛고구려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집안현의 一覽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萬讀함보다 낫다"는 감격을 안고 <조선사> 집필에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단재가 집필한 <조선사>는 동창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뒷날 <조선상고문화사>로 개제되었거나 그 내용이 흡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조선상고문화사>가 대종교적인 색채를 많이 풍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앞서 박은식도 1911년 윤세복의 집에 기거하면서 <東明王實記> <夢拜金太祖> <明臨答夫傳> 등을 저술했던 적이 있었는데, 저술의 내용이나 과정이 단재의 경우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만주에 기류했던 시절을 전후하여 단재가 집필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앞서 언급한 <조선상고문화사>를 비롯하여 <檀奇古史>서문과 소설 <꿈하늘>이 있다. 발해 大野勃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는 <단기고사>는 重刊 서문에서 단재가 "그 진본됨은 의심이 없다"고 하였으나 그의 역사서술 어느 곳에서도 이를 인용한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료비판과 고증에 대한 그의 자세가 정취해지면서 <단기고사>를 더 이상 신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꿈하늘>은 1916년 3월에 집필한 '史談體의 자전적 소설'로서 한말의 <독사신론>에서 <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에 이르는 그의 역사인식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시절에 쓴 가장 중요한 단재의 역사서술은 <조선상고문화사>이다. 이것은 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대종교적 분위기를 짙게 풍기기 때문에 그것이 단재의 작품일까에 대해 의문이 없지 않았고 따라서 그 집필연대에 대해서도 정확을 기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단재가 망명한 후 한때 만주에서 윤세복과 같이 체류하며 대종교와 깊은 관계를 가졌고 또 그 책에서 보이고 있는, 韓 中 사서에 박통하지 않으면 그런 내용을 쓸 수 없으리라는 것 때문에 그 필자를 단재로 지목하고 있다. 문제는 필자를 단재로 지목한다 하더라도 이 책의 집필 시기가 언제쯤일까에 대한 의문은 그대로 남는다.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이미 類證 互證 追證 反證 辨證의 역사고증이론이 나오고 또 그의 <조선상고사>에 보이는 사상과 역사인식의 일부가 내비치는 것으로 보아 <조선상고문화사>의 집필시기는 1920년대초의 <조선상고사>의 집필시기에서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상고문화사>가 전통적인 유교윤리의 天命(天心)論으로 역사를 해석하려는 기존의 자세에 희의를 표하고 도리어 强權論을 주장하는 것은 주목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의리론과 정통론의 관점에서 인식하려는 주자학적 관념에서 벗어나 현실을 기초로 한 역사학으로 끌어올리려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단재는 한때 임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임정이 분열되자 군사통일촉성회를 발기하는 등 反임정 노선의 항일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그는 북경에서 순한문으로 된 '天鼓'라는 잡지를 간행하였다. 1922년 말 그는 김원봉으로부터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법을 천명하는 '朝鮮革命宣言'의 집필을 의뢰받았다. 이 집필 작업을 돕기 위해 김원봉은 柳子明을 단재와 함께 합숙시켰는데 柳는 북경대학 李石曾 등과 함께 무정부주의자였다. 그 이듬해 1월에 완성된 이 선언문의 선명 과격한 성격과 뒷날 단재가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무렵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략하던 단재는, 기대를 건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돌아가고 1923년 8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옮아간 창조파 계열의 임시정부가 소련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해산되자, 1924년 3월 머리를 깎고 북경 교외의 觀音寺에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維摩經' '楞嚴經' '大乘起信論' 같은 경전에 심취하게 되었으나, 6개월만에 승려생활을 청산하였고 이 무렵에 국사연구를 다시 본격화시켰다. 그는 이석증의 소개로 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며 <四庫全書> 등 중국 사료들을 섭렵하는 한편 1922년 梁啓超가 집필한 <中國歷史硏究法>을 열독, 역사연구방법론을 심화시켰다.


단재는 1924년 북경에서 '前後三韓考'를 완성하였으며, 이를 전후한 시기에 <조선사연구초>에 수록된 6편의, 당시로서는 매우 수준높은 논문들을 거의 완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사연구초>에 실린 논문 중 '上古史 吏讀文名詞 解釋法'과 '三國史記 中 東西兩字 相換考證' '三國志 東夷列傳 校正'은 그가 얼마나 치밀하게 사료를 다루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논문 중에 안정복과 정약용 등 선학들의 역사학하는 자세에 대한 촌평들은 그의 고증정신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저자가 시기를 얻으면 중국서적 중 일체 조선에 관한 기록의 是非誤正을 찾아 보려 하거니와 근래 著史者들이 매양 각종의 眞書 僞書 訛言 正言을 모두 조선사의 재료를 삼고, 洋文의 형식으로 篇章을 갈라, 新史學者의 지은 조선사라 함은 좀 부끄러운 일인가 하노라"고 한 데서는 신사학에 대한 그의 완곡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평들이 나타나고 있다. '平壤浿水考' '前後三韓考'는 한국고대사의 가장 난해한 부분이라 할 문제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에서 그의 역사학의 독특한 방법론이라 할 '민족 및 지명의 이동설'을 보여주고 있다.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은 단재가 그렇게도 비판한 소위 '사대사상'의 원류를 밝히려는 의도에서 시도된 논문으로서,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강건 웅혼한 '郎家思想'이 피폐되고 유교중심의 '사대사상'이 활개치게 된 계기는 바로 '묘청의 난'에서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낭가사상의 주창자들을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조선사연구초>의 논문들이 쓰여지던 시기에 <朝鮮上古史>의 '총론'도 완성된 듯하다. <조선상고사>의 본문은 그 내용으로 보아 대체로 '총론'에 앞서 집필되었다는 것이 순리일 것 같다. <조선상고사>는 '총론'에 보이는 역사연구방법론으로 보나 그 특이한 시대구분과 역사서술로 보나 한국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삼국의 말기까지를 하한선으로 한 이 책에서 단재는 한국상고사의 체계를 정리하려고 시도하였고, 또 한국고대사의 주체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상고사>를 비롯한 단재의 고대사 인식의 특징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단재는 1925년경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아나키스트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1923년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할 때 유자명과 접촉하고 그 뒤 북경대학 도서관을 출입할 때에 이석증 교수와 교제하면서 이미 아나키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 갔던 것이다. 그 후 1927년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였고 外國爲替사건으로 1928년 5월에 체포되어 1936년에 여순 감옥에서 돌아갔다. 그가 아나키스트 활동에 관여하면서 남긴 작품으로는 '용과 용의 대격전'밖에 없는데, 그 문학 작품상의 과격성은 그 전의 여러 작품들과 확연히 구별된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역사서술 중 아나키즘의 적극적인 영향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단재의 역사관계 논문과 저서들은, 한말의 <독사신론>과 몇몇 영웅전들을 제외하고는, 그가 아나키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1925년에 <조선사연구초>에 수록된 논문들이 동아일보에 연재된 이래, 1931년에는 조선일보에 <조선사>(조선상고사)가, 1931년에서 1932년에 걸쳐 역시 조선일보에 <조선상고문화사>가 각각 연재되었다.


단재사학에서 1923년경부터를 하나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의 역사학에서 몇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첫째 이 시기에 들어서서 주자학 및 유교적 사관에 대한 한계를 뚜렷하게 지적하는 한편 이를 극복하려는 反주자학적 사상이 그의 사학의 골격을 이루고 있고, 둘째 영웅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인식했던 영웅중심 사관이 극복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민중사관'이 나타나며, 셋째 단군에 관한 연구와, 단군이 부여 고구려로 계승된다는 고대사의 인식체계가 더욱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심화되고 체계화되며, 넷째 이 때에 와서 역사관과 역사방법론에서 그의 사학은 객관적인 역사과학의 단계로 진일보하여 근대사학의 면모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 등이다. 단재가 역사학을 편협한 의리론, 정통론과 이데올로기성에서 해방시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역사과학'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은 이 때다. 이 때에 이르러 그에게서,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지으한 것이요, 역사 이외의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 아니요, 詳言하자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을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첨부 혹 변개하라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근대적 역사학의 단계설정이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학사에서 단재가 유교적 중세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사학을 성립시켰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근대사학의 단계에 오른 단재는 "조선을 주체로 하고" "조선 민중 전체의 진화를 서술"해야 하는, '참조선사'의 길이 새로운 과제로 주어졌고 아울러 식민주의 사학을 극복해야 하는 자기시대의 새로운 사학적 과제도 떠맡아야 했던 것이다.


3. 단재의 한국고대사 인식


단재는 우리나라의 역사 전반에 걸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단재는 '六伽倻史'에 관심을 가져 <六加耶遷國考>를 연구하였던 것 같고, 발해사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쓴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는 고려 초중기의 사상사에 대한 해박한 식견이 풍기고 <崔都統傳>은 고려말의 국제관계 및 사회상황에 대한 넓은 안목을 보이고 있다. 그는 또 조선시대사와 관련하여 <國朝寶鑑>과 <朝野輯要>를 옥중에 차입해 주기를 원했는가 하면 '사색당쟁사'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한 적이 있으며 <리꽅신젼>과 <李舜臣傳>, <鄭仁弘公傳>(미간)을 저술하였고 또 조선조 시대의 인물인 朴象羲와 李适에 대해서는 거의 사실에 근거한 소설을 썼는가 하면 鄭汝立에 대해서는 혁명아로서 극찬하고 있다. 이윤재가 북경에서 보았다는 '조선사통론' '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및 부록도 아마도 한국사 전체에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단재의 역사이해는 어느 특정한 시기에 한정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그의 저술을 토대로 해서 본다면, 단재의 한국사 인식은 고대사에 국한되어 있다. 이 점은 그의 고대사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단재사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가 고대사에 관한 많은 연구를 남긴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단재의 저술로 현재 지목받고 있는 역사서술에는 단재의 원본에 타인의 것이 가필되어 제 모습을 찾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는 데다가, 그 자신은 당시 발표되고 있던 내용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기회가 주어지면 수정 보완하겠다고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 우리는 그가 남긴 주저라 할 <독사신론>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 및 <조선사연구초>를 중심으로 그의 고대사 인식의 특이한 면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3-1. 단군 인식의 문제; 단재 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단군 및 단군조선이다. 그가 역사연구를 시작할 때에는 이미 일제의 관학자들이 단군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런 풍토 속에서 그는 먼저 단군이 우리 나라의 시조이며 민족독립의 상징임을 확신하는 데서 그의 연구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단군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먼저 설정하고 그 위에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정황과 자신이 성취해 간 학문적 성과를 반영하면서 단군문제를 정립 보완시켜 갔다. 그의 단군인식이 저술에 따라 변화되어 갔고 저술에 따라 달리 표현되고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단군인식은 <삼국유사>에 언급된 정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의 단군인식은 정치 사회 군사 외교 등 한국고대사의 종합적인 체계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그의 단군인식이 체계적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독사신론>에서 '정복적인 영웅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는 단군을 "동국을 개창하신 시조"로 인식하면서, 추장시대에 장백산을 중심으로 건국한 단군이 각 부락과 지역을 정복하여 만주와 요동 한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숙신 조선 예맥 삼한의 여러 종족을 거느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군을 이렇게 영웅적인 존재로 부각시키고 있을 무렵에 그는 수많은 애국무장과 민족영웅을 역사의 주체로 확인해 가고 있었다.


1920년대 단재가 만주에서 대종교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을 때, 그의 단군관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앞서의 정복영웅상 대신 문화 및 종교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는 대종교운동과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이 때 단군은 조선문화의 원류와 연결되며, 그가 자주 강조하는 '낭가사상'의 본원으로서 신라의 화랑 국선 선랑과 고구려의 조의 선인 등과 연결된다. 단재는 상고시대부터 한국이 중국을 능가하는 우월한 문화를 가졌음을 강조하였는데, 문화 및 정치적인 측면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굴레를 벗겨내자는 것이 단재사학의 일관된 목표의 하나라면, 그는 단군을 통하여 이 과업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다. 단재에 의하면 중국고대의 문화뿐만 아니라 정치 제도 또한 단군조로부터 전파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단군 부여족의 중국에서의 식민활동을 상술한 것도 그 이면에는 무력적인 것 못지 않게 문화적 우월성을 깊이 인식한 데서 가능하였다고 본다.


1920년대에 와서 <조선상고사>의 집필을 통해 단재의 단군관은 약간의 변모를 보인다. 대종교와의 인연을 끊은 데다가 양계초의 근대사학 이론과 아나키즘에 접하면서 역사연구의 실증성과 과학성을 수준 높게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단군인식은 단군신화의 비과학적인 요소를 비판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여기서 단군설화의 불교적 요소와 단군 壽年의 비과학성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단군을 원시적인 종교신앙과 관련시켜 설명한다. 즉 원시공동체의 제단인 수두(蘇塗)에서 일종의 제주(하느님, 天神)로 종사하는 자를 단군으로 보았다. 이 단군이 종교적 권위를 이용하여 정치적 권력자로 등장하면서 대단군왕검으로 출현한 듯이 설명하고 있다.


단재의 단군이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은 단군조의 활동무대를 만주로 한 것과 단군조의 중국에 대한 식민활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만주중심의 단군조 이해는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체계화 및 발해사의 한국사화와 관련되고 또 만주 중시의 밑바탕에는 한말 일제하에 전개된 만주의 우리 국토화운동과 독립운동의 기지화운동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대외식민활동을 강조하는 단군관은 한말의 사대주의 청산작업과 자강독립운동, 및 일제하의 국권회복운동의 기반구축을 단군과 관련시키려는 데에 있었다. 단재가 <삼국유사>류의 전통적 사료들의 틀을 넘어서서 단군문제를 이해하려고 한 것은 단군문제가 한말 일제하의 민족주체성의 과제와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3-2. 상고사의 시대구분과 체계화; 단재의 한국상고사 인식에서 특이한 면은 우선 시대구분과 체계화에서 나타난다. 문헌사학의 범주에서 연구를 진행시켰던 단재는, 중국의 先秦문헌도 섭렵한 듯, 중국 고대사와 대비하면서 한국상고사의 골격을 세워 나갔는데, 이 점은 <조선상고사>에서 중점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우선 단군시대를 신수두시대로 설정하고, 그 후 解氏(신조선) 箕氏(불조선) 韓氏(말조선)의 3조선분립시대를 중국의 전국시대에 비정한다. 그 다음 단계를 列國爭雄時代 즉 對漢族격전시대라 하는데, 이 때에는 해씨의 후손이 부여(고구려)를 성립시키고 기씨의 후손이 위씨조선(한사군)으로 교체되며 한씨의 후손이 마한으로 계승되는 한편 그 전시대의 신조선과 불조선의 유민들이 낙동강 연안으로 이동하여 진한과 변한을 각각 성립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를 도표화하면 <표1>과 같다.


<표1> 단재 신채호의 한국상고사 체계도


신수두시대|삼조선분립시대(지나전국시대)| 열국쟁웅시대(對漢族격전시대)


| | +북부여-+

| | | +--고구려

| +-- 신 조선(해씨)-------+-| +-동부여

| | | | +동부여-+

| | | | +-남동부여

| | +----------------+--------------------진한--+

| | | |삼

단군조선 -+----+-- 불 조선(기씨)-------+- 위씨조선(한사군) |

| | | | |

대단군왕검| | | | |

| | +----------------+--------------------변한--+

| | | |한

| | | |

| +-- 말 조선(한씨)-------+------------------- 마한--+


3-3. 부여 고구려 중심의 체계; 한국상고사를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보인 바와 같이, 단재는 단군의 계통이 부여 고구려로 전승된다고 이해하였다. 단재가 이런 주장을 펴기 이전에 이미 여러 갈래의 주장이 있었다. 조선 후기 정통론이 제기되기 전에는 대체로 단군의 왕조가 기자를 거쳐 위만으로 계승되고 삼한은 위만에 부속된 존재처럼 이해되었다. 그러나 정통론이 제기되면서, 단군의 정통이 기자를 거쳐 마한(삼한)으로 계승되고 그 대신 위만은 기자조선을 찬탈한 僭僞의 존재로 폄하되는 듯이 정리되었다. 이는 역사를 대의와 명분의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한 조선 후기 정통론자들의 역사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비해 단재의 고대사 인식체계는, 종래의 단군-기자-위만조선으로 연결되는 것이나, 단군-기자-마한-신라로 연결되는 것에 거의 구애받지 않고, 단군-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것을 골간으로 하는 새로운 체계를 제시하였다. 이를 부여 고구려 主族說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 전 시대에 보였던 기자-마한의 체계나 기자-위만의 계승은 부여-고구려 주족설에 부수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부여 고구려 중심으로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한 것이 단재 자신의 발상이라기보다는 조선 후기의 소론계 학자인 修山 李種徽의 <東事>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단재는 일찌기 이종휘의 <동사>를 섭렵했고 그를 극찬했을 뿐만 아니라 <동사>에서 체계화한 한국고대사의 골격이 <표2>와 같이 단재의 것과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종휘가 제기했던 고대사 체계는 단재를 거쳐 더욱 정교하게 체계화했다.


<표2> 이종휘의 고대사 체계도


단 군-----------부여 고구려 (백제)--+

| +-마한 (삼한) | 삼 국

+------------- 기자 -+ |

+-위만 (사군)--+



단재가 부여 고구려 주족설을 주장했다든가 부여 고구려 중심으로 고대사를 체계화했다는 것은 단재사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인식의 촛점은 곧 만주를 중심한 고구려의 웅혼성과 대외항쟁의 승리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는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한 단재의 자강독립적인 사학정신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중국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사대주의를 타파하려는 의도일 뿐 아니라, 단재가 처했던 한말 일제하의 식민지적 상황을 철폐하려고 하는, 자기 시대의 민족적 과제를 역사학과 연결시킨 데서 가능하였던 것으로 본다. 단재가 이러한 관점에 섰을 때 종래 사가들이 삼국과 신라에 가려 보지 못했던 부여 가야 발해사에 대한 재조명이 가능했고, 아울러 대외항쟁의 주체였던 고구려와 해외경략에 앞섰던 백제를 멸망시켜 한국사의 무대를 반도내로 축소시킨 신라의 '삼국통일'을 "김유신의 음모"로까지 혹평하게 되었다.


3-4. 前後三韓說; 단재가 우리나라 고대사를 이해하는 특이한 면은 고대사의 체계화와 민족이동설에 있다. 그는, 앞서의 상고사 체계화의 도표에서 보인 바와 같이, 대단군왕검 중심의 단군왕조가 삼조선 즉 삼한으로 분열되었는데, 이것은 통설에서 말하는 단군 기자 위씨의 세 고조선과 또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과도 다르다는 설명이다. 단재에 의하면, 삼조선으로 부르는 이 삼한은 전삼한 혹은 북삼한이라 하여, 뒷날 한반도 안에 형성된 삼한을 후삼한 혹은 남삼한이라 부르는 것과 구분하고 있다.


단재의 '전후삼한설'은, 그가 고대사연구 방법론으로 취했던 '민족 및 지명 이동설'을 원용하여 성립되었다. 이 점은 삼조선(전삼한) 분립시대의 유민들이 남하하여 마한 진한 변한의 후삼한을 성립시켰다는 데서도 보인다. 단재의 이같은 '전후삼한설'은 고고학 등 인접과학과의 관련하에서 검토되어야 할 과제이며 쉽게 공식화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종래의 삼한에 대한 정적 평면적이었던 이해를 동적 입체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단재의 그같은 연구가 그 뒤의 삼한 연구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3-5. 단군 부여족의 支那식민론; 단재는 그의 <조선상고사>에서 산동반도와 淮河, 양자강 유역의 동이족의 활동과 이와 관련된 徐偃王의 치적을 소개한 바가 있다. 단재는 이 지역에서 활동한 동이족을 단군족의 후예인 부여족이라고 하였고 이들이 산동 산서 燕 지방에서 식민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周나라의 동래로 세력이 약화됐던 동이족은 管叔 蔡叔의 소위 '三監의 난'을 계기로 4,5백년간 중국과 극렬한 혈전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재는 회하와 양자강 유역에서 활약한 조선족의 위인으로 서언왕을 거론한다. 서언왕은 徐國 淮國 지방의 조선민을 영도하여 일대 제국을 건설하였고, 周의 穆王으로부터는 割地까지 받게 되었으며, 드디어 江 淮 漢 사이에서 서언왕에게 조공하는 제후가 36국이 되었다고 한다. 서언왕은 양자강과 회하를 잇는 운하까지 뚫는 등 세력을 떨쳤으나, 周 楚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였고, 江 淮 지역의 동이족 또한 한족에 의해 점차 동화되어 갔던 것이다.


일찍부터 민족사의 주체적 발전을 탐구하였던 단재가 先秦문헌을 섭렵하면서 중국과 대결하였던 단군 부여족의 혁혁한 승리와 영광을 소개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단재의 선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에 대한 후속적인 검토가 없었고, 따라서 단군 부여족이 중국에서 활동한 역사는 우리 학계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중국에서 활동한 동이족이 새롭게 근대학문의 방법을 원용하여 학계에 소개된 것은 1950년대의 김상기에 의해서다. 이것은 단재가 그 내용을 소개한 지 약 30년이 경과한 뒤였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여기서도 단재의 선구적인 연구가 인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근대 실증주의 계통의 사학자들에게 단재는 거의 외면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6. 백제의 해외경략설; 단재의 고대사 연구는 우리 민족의 해외진출과 대외투쟁을 빠뜨리지 않고 밝히려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는 단군 부여족의 '지나식민론'에 이어 <滿洲源流考> 등에 의해 신라가 길림 동북지방과 중국 복건성의 천주 장주 등지에까지 진출하였을 것이라고 추론하였다. 그러나 이 추론은 그 근거나 고증이 선명하지 않다.


단재는 중국측 자료에 근거하여 백제의 '遼西經略'을 심도있게 제기하였다. <宋書> 백제전에는 백제의 '요서경략'과 관련된 이런 기록이 있다. "백제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모두 요동의 동쪽 천여리 지점에 있었는데,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하자 백제는 요서를 점거하였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부른다." 단재 이전에 <海東繹史>가 <宋書>의 이 기록을 주목한 적이 있었으나, 韓鎭書는 이 기록을 이치에 맞지 않고 신빙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중국측의 이 기록이 백제의 '해외경략'의 일환으로 그 생동감을 가지고 역사가의 눈에 잡힌 것은 바로 단재에 의해서다. 그는 백제의 근구수왕(375-384) 때에 선비족의 慕容氏를 쳐서 요서와 북경을 빼앗고 요서 진평 2군을 설치하였으며 麗山(하르빈)까지 쳐서 부여의 서울을 점령하였고, 前秦이 소유한 산동 지방과 東晋이 소유한 강소 절강 등지를 자주 경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단재는 또 <舊唐書> 백제전의 "西渡海至越州 北渡海至高麗 南渡海至倭"의 기록을 인용하여, 동성왕(475-501) 때에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경략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월주'는 會稽니 회계 부근이 모두 백제의 소유이었으니 <문헌비고>에 '월왕 句踐의 고도를 環한 수천리가 다 백제지라' 함이 이를 가리킨 것이요, '고려'는 唐人이 고구려를 칭한 명사니 고구려의 국경인 遼水 以西, 今 봉천 서부가 다 백제의 소유이었으니 <만주원류고>에 '錦州 義州 愛琿 등지가 다 백제라' 함이 이를 가리킨 것이요, '倭'는 今 일본이니 上引한 <舊唐書>의 上兩句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 되었던 것이 無疑하니라"


<구당서>와 <문헌비고> <만주원류고> 등을 인용하여 월주와 봉천 서부를 백제의 소유라 한 것은 국사학계의 통설로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목되는 것은 백제가 倭를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일본의 聖德太子의 사적이 거의 근구수왕의 사적을 훔쳐다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라든가 신공왕후의 신라정복과 임나일본부 설치 등을 부정한 데서도 보이듯이, 당시 '日鮮同祖論'과 고대 일본의 '南鮮經營說' 등 식민주의 사관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던 단재가 백제와 신라에 대해 식민주의 사관 적용을 거부한 것일 뿐 아니라 오히려 고대 일본이 백제의 경략지였음을 제시함으로써 한국고대사의 주체적인 모습을 적극적으로 나타내 보이려는 것이었다.


단재의 해외경략설이 선구자적 공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증상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그 뒤 학계의 보완적 혹은 비판적 연구들이 나타나 백제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와 함께 백제의 '일본경략'이라는 단재의 주장도, 그 뒤 삼한 삼국계의 일본 진출에 대한 연구가 고고학적인 연구성과를 곁들여 심도있게 연구되어 왔던 데에 비추어 볼 때, 앞으로 더욱 확인해 가야 할 선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3-7. 고구려연대 삭감설과 거기에 따른 국제관계의 인식; 단재는 고구려의 초기연대가 100년 이상 삭감되었고 거기에 따른 국제관계의 전개도 상당한 부분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삭감되었다는 근거로, 첫째는 고구려가 망할 때에 "不及九百年"이라는 비기가 유행했다는 것, 둘째 광개토왕이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13세손에 불과하나 그 비문에는 17세손으로 되어 있다는 것, 셋째 <北史> 고려전에 莫來가 서서 부여를 쳐 대파하여 통속하였다(그는 이 사실을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것으로 보았다)는 것과 漢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사군을 세울 때에 고구려를 현이라 하였다는 것 등을 들었다.


단재는 위의 자료를 근거로 고구려 역사가 3대 이상, 백년 이상 삭감됨이 명백하다고 주장하였다. 연대를 삭감한 것은 신라의 소행으로 보았다. 고구려의 연조를 삭감시키고 보니 동부여 북부여는 물론 백제 가야 옥저 등도 상대적으로 삭감케 되었다는 것이다. 단재의 이러한 고구려 연대삭감설은 조선 후기의 '兩高句麗說'의 내용과 일부 상통하는 점이 있다.


단재가 고구려의 연대를 이렇게 상승시킨 결과, 고구려 내부의 역사적 사실은 물론 특히 국제관계의 위상정립이 새로이 재조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선 단재는 고구려가 한무제의 조선침략 이전에 건국되었다고 보았으므로 한무제가 창해군을 설치하였다가 9년만에 혁파한 사건은 '고구려와 漢의 9년전쟁'의 결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한무제를 상대로 이 9년혈전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 대무신왕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한무제가 위씨조선을 멸망시킨 것이 漢의 단독적인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고구려 등 조선의 열국과의 동맹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론하면서 고구려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3-8. 한사군의 위치문제와 南北 兩樂浪說; 단재사학이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중국에 대한 '사대'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지적한 단군 부여족의 지나식민 문제나 백제의 해외경략설 같은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범주에 속한 것이다. 한사군 문제도 그러한 관점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한군현의 위치문제는 그의 '사대주의' 청산에 대한 의지의 열도와 그의 역사학 방법(고증)론의 심화, 나아가 역사연구과정에서 접할 수 있었던 자료의 섭렵 정도에 따라 점차 변화되었다.


단재는 <독사신론> 단계만 하더라도, 기자와 위씨 조선 및 한사군의 위치를 평양과 관련하여 '북한 일대'에 비정하였다. 그의 역사연구 초기만 하더라도 한사군의 위치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한사군의 위치에 관해서 종래설을 답습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한사군의 위치문제가 한국사의 주체성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단재는,<조선상고문화사>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浿水=대동강'설을 부인하고 위씨국의 위치를 요동반도에 비정함으로써 한사군 또한 요동반도에 존치되었음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 때 한사군이 설치된 곳은 요동반도의 흥경 부근이며 뒷날 옮겨진 현도군의 위치가 봉천 지역임을 주장하였다. 초기의 북한 일대 존치설은 요동반도내 설치설로 바귀어졌던 것이다.


<조선상고사> 및 <조선사연구초>의 집필 단계에 이르게 되면 단재 사학의 고증이론이 심화되고 그의 사료 섭렵 또한 매우 넓어졌다. 이 무렵에 그는 한사군의 '實置說' 대신 '紙上假定說' 내지는 현도, 낙랑군의 요동군내 '僑設說'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지상가정설'은 "사군은 원래 土上에 그은 자가 아니요 紙上에 그린 일종 가정이니 --- 낙랑국을 멸하거든 낙랑군을 만들으리라 하는 가정뿐이요, 실현한 자가 아니다"라는 것이요, '교설설'이란 현도군과 낙랑군이 요동군의 한 지역을 빌려 임시로 거하였다는 것으로 그 지역은 海城 蓋平 등지에 비정하였다.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이같은 주장은 그의 獨得의 견해이긴 하지만 많은 검증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단재의 견해는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는 존치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인 학자들이 평양 부근에서 발굴했다는 소위 낙랑 유물을 가지고 평양 일대를 낙랑군으로 단정한 주장을 거부한 것이다. 그는 關野貞이 주도한 <朝鮮古蹟圖譜>의 가치를 일정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조사동기의 학문 외적 성격을 우려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단재는 평양 부근이 한사군 될 수 없음을 '南北 兩 樂浪說'을 통하여 주장하였다.


'남북 양 낙랑설' 또한 단재가 내세운 독특한 견해이다. 단재는 요동군 내에 교설된 '낙랑군'과는 달리, 한군현이 존재했으리라고 생각되는 그 기간에 오늘날의 평양 지방에 崔理를 최후의 왕으로 하는 '낙랑국'이 존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낙랑국'을 '낙랑군'과 구별하기 위하여 '南樂浪'이라 하였고, 요동반도의 해성 개평 등지에 교설되었던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을 '北樂浪'이라 하였다. 이 '낙랑국'은 "마한이 목지국으로 천도한 뒤에" 최씨가 평양을 중심으로 일으켜 25현을 거느리는 대국을 이루었는데, 이 나라가 곧 고구려 왕자 好童과 '낙랑공주'사이의 비운을 가져다 준 '낙랑국'이다. '양 낙랑설'의 문제를 그의 '고구려 연대 삭감론'과 관련시켜 보면, 그의 고대사 이해는 나름대로의 하나의 새로운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의 '남북 양 낙랑설' 또한 한국고대사 이해에서 몇가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종래 한군현이 한반도 밖에 있다고 할 때 당시 가장 최고의 문명을 가졌다고 하는 평양 지역의 역사가 몇 세기간 공백기에 들어가기 때문에 한군현의 반도내 존치설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견해가 있었는데, '남북 양 낙랑설'은 이러한 주장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또 그의 '양 낙랑설'은 낙랑 문제 인식에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종래 '낙랑'은 한사군의 하나로 간주되거나 아니면 미지의 어떤 실체로 방기해 버린 경우가 많았다. 단재는, 낙랑 문제를 음성학적인 방법론과 지명이동설에 의하여 풀어보려는 시도와 함께, '양 낙랑설'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4. 단재와 근대민족주의 사학


단재는 한국사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그는 전통사학과 근대사학, 식민주의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 영웅 사관과 민중 사관이 교차되는 그 접점에 서 있다. 따라서 그의 역사학의 위치 설정도 이런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역사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실학시대의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삼국사기> 이래의 유가적 사학과 非유가사학을 접목시키고 있다. 비유가사학은 仙家類와 佛家類의 사서들과 古記類를 포함한 일종의 在野史學系列로서 유가적 사학이 갖고 있는 '사대성'을 맹렬히 비판하고 나선 조류이다. 그는 사료면에서는 유교사학이 남긴 것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사료들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본원적 성격을 찾고 해석하려는 사학정신은 오히려 非유가사학을 계승하고 있다. 단재가 유가적 분위기의 한문 사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전통성과 주체성을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점과 관련이 깊다. 일반적으로 단재의 사학은,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의 역사학"이라 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방편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쪽으로 이해해 왔다. 또 대외투쟁을 강조하는 그의 강렬한 민족주의 정신은 역사연구에서도 교조적인 성격을 갖게 하여 얼마간은 국수주의적인 역사학으로 인식하게끔 되었다. 그 때문에 그의 역사학이 갖는 사학이론이나 방법론상의 근대성은 자연히 그의 '국수주의적' 성격에 가리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그의 역사학이 지닌, 중세성의 극복과 근대성의 시작을 지적해 왔다. 일찌기 김철준은 한국의 '근대적인 사관'이란 "일제 침략에 대한 부단한 항쟁과 자기 전통에 대한 굳은 신뢰와 근대적인 비판정신"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 세가지 조건을 고루 갖춘 이가 단재라고 하면서, "그러한 면에서 볼 때 한국의 근대사학은 단재의 민족사학을 통해서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정신적 시초를 얻었던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김용섭도 그의 사학을 두고 "근대역사학으로 훌륭하게 성취시킨 것"이며 단재사학에 이르러 "근대 역사학의 이론체계가 체계화된 것"이라고 하였다. 필자도 단재사학을 두고 "역사를 편협한 의리론 정통론적인 이데올로기성에서 해방시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역사과학'의 위치로 끌어 올렸으며 그리하여 유교적 중세사학을 완전히 청산하고 근대사학을 성립시켰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단재 사학의 근대성은 먼저 그의 역사방법론에서 나타난다. 그는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역사연구에 필수적인 고증 방법으로서 類證 互證 追證 反證 辨證의 5가지를 언급하고, <조선상고사>에서는 근대적인 역사이론 및 방법론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의 역사연구 이론은 舊史批判論을 비롯해서 사료의 선택과 사료비판, 고증론, 역사서술론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이론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 근대성이 뚜렷하다.


단재의 역사학에서 보이는 역사주체 인식도 그의 사학의 근대성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학을 연구하는 초기에는 영웅을 갈망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를 영웅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그는 新國民을 강조하였는데, 이 무렵 그는 영웅을 역사의 주역으로 보는 역사관에서 국민을 역사의 주역으로 보는 역사관으로 역사주체 인식을 바꾸고 있다. 나라가 망하고 그 자신도 망명길에 올랐을 때 그는 역사의 주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리하게 된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고 20년대에 들어서서 사회주의 사상에 의한 평등사상이 고양되고 독립운동에서도 민중지도자가 나오는 등 사회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이 때 단재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사상적인 용단은 1923년 초에 발표된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에서 극명하게 보인다. 따라서 그의 역사주체 인식은 영웅-국민-민중의 순서로 변환되어 갔다. 단재가 그의 主著인 <조선상고사>를 저술하는 시기에 이르면,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근대적인 사관의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리하여 단재에 이르러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사학이 시작된다. 단재가 근대 민족주의 사학을 일으켰고 또 그의 고대사 인식에 창조적인 혜안이 번득인다 할지라도, 그도 역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學人에 불과하다. 그의 투철한 민족애와 자주정신, 그의 치열한 삶이 시대를 넘어서서 두고두고 귀감이 된다 할지라도, 그가 남긴 역사연구 업적은 냉엄하게 비판받으면서 창조적으로 계승되어야 할 것이다.


(1993.12.13.完, 韓國史 市民講座 제 호)


丹 齋 申 采 浩

이 만 열


1. 들어가는 말


신채호(1880-1936)는 한말 일제강점기에 걸쳐 애국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민족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아나키스트운동에 투신하여 끝내는 여순 감옥에서 최후를 마친, 한국 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그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여, 그가 최후로 사상적인 거점을 아나키즘에 두었다는 점 대문에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활동이 덜 평가되는가 하면, 그가 피맺치게 절규한 민족독립의 이론과 지칠 줄 모르게 쏟은 운동의 열정 때문에 그의 독창적인 국사연구가 덜 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활략이 언론 교육 종교 독립운동 및 국사연구에 걸쳐 광범위한 만큼 그에 대한 연구도 그만큼 다양하게 확대될 수 있슬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역사가로서의 신채호에 관해서만 살피기로 한다.


역사가로서의 단재에 대해서는 이미 같은 시대에 살고 있던 여러 분들에 의해 銜이 평가되고 있었다. 1931년 옥중에 있는 단재를 회견한 申榮雨는 단재가 <朝鮮四色黨爭史>와 <六伽倻史>만은 자신이 아니면 조선에서 능히 正鵠한 저작을 내놓을 수 없으리라는 말을 전하면서, 회견기 말미에 "단재가 조선사연구에 유의한 것은 24 5세 때부터인 듯하며, 그가 이래 수십년 전심경력하여 노력함으로써 금일 조선 역사대가의 명망을 듣는 것은 보통 학자로서의 탐구욕에서만 나운 것이 아니고, 그가 기울어지는 천하대세에 대하여 깊은 감흥을 느끼고 뜨거운 애착을 가졌기 때문이라"(하 448)고 하였다. 국어학자로도 명망이 높은 이극로는 단채를 추억하는 글(西間島時代의 先生)에서 "역사가로서의 신채호는 才士로서의 신채호보다 이름이 더 높이 난것이 사실이다. 그의 필봉이 향하는 자리에는 正邪가 절로 밝혀진다.조선역사의 잘못됨을 바로잡기위하여 선생은 늘 애를 썼다. 歷史談만 하게 되면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의 죄악을 痛論한다"(하 477)고 썼다. 이극로의 이같은 평은 사실 단재의 저술 전편에 흐르고 있다.


위당 정인보는 단재의 사학을 두고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명실상부한 巨擘이다"(하 455)라고 하면서, 그의 사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첫째 고증하는 데 있어 다른 사람들 늘 보는 책 속에서도 형안이 한 번 쏘이기만 하면 이것저것을 비교하는 가운데 뜻 아니한 발견과 辨破가 있다. 혹 공허를 걸어가는 듯하가도 한 곳을 짚은 뒤에 보면 뚜럿한 사실이 나온다. 우리도 늘 보는 것인데 거기에 이런 것이 있던가, 찾아 보면 환한 것인데 어째 그대로 지났던가. 여기서 단재의 天分을 거듭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하필 사서에서 史證을 얻은 것 뿐이랴. 가령 심상한 책자일지라도 단재가 한참 동안 뒤적거리면 거기서도 가끔 어떠한 확증을 얻을 때가 있다. 누구나 들으면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단재의 입에서 나온 뒤에야 말이지, 그 전은 누구나 보아 그러한 분명함을 찾을 길이 없던 것이다.


둘째 그 분운복잡한 과거내외의 기록을 정리하며 나가는 데 마치 엉킨 실을 풀 때 어떠한 매듭 한 군데를 끌르면 확 푸리는 것같이 매양 일처의 要를 提擧하여 萬緖의 錯을 解하는 靈腕이 있다. 자기도 그 사론 중 '조선사의 열쇠'란 말을 쓴 일이 있거니와, 과거나 현재 幾多의 사가가 대개는 그 사실을 그 기록에서 찾아보려 하는 것이 통례언마는, 단재는 눈을 상하사방으로 굴려 이 주덩이가 어디에 얽히었나, 가령 이 문을 열려면 그애로 밀어야 할까, 아니 그려면 막 차서 깨뜨려야 할까, 아니다, 열쇠가 있으리라. 이렇게 얼마를 지난 뒤에 한 매듭을 푼다. 이 매듭이 풀린 다음에는 가리산이 없던 그 끄덩이가 일시에 홱 푸리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더우기 그 독보함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세째 여러 천년동안 구불덩거리며 내려오는 성쇠변천의 所自를 그 실제로조차 考索하되, 어떤 때는 문헌미미한 속에서 오래 두고 泛過한 것을 들추어 대관절의 약동하는 것을 보이기에 특장이 있다. 문헌이야 그 문헌을 통독하여 마지 아니하지만 '心迷法華轉 心悟轉法華'라는 말과 같이 내 안광은 언제나 내 안광이기 때문에 아무리 飜幻百出한 속애서도 그 너머의 眞을 바라봄이 이상히 예리하여 조금도 현란함을 받지 아니하며, 도리어 眞을 가린 번환을 가지고 眞을 드러내는 방증을 삼기도 하였다.(하 456-457)


약간 장황하긴 하지만 위당의 단재사학에 대한 평을 인용해 보았다. 위당은 단재를 두고 그의 고증안이 밝다는 것과 그 요점을 들어 복잡한 것을 잘 정리한다는 것,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예리성을 가졌다는 것 등을 지적하고 있다. 뒷날 비슷한 역사방법론을 구사한 위당으로부터 이러한 평을 들었다고 해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못되지만, 당대의 한학자요 천재였던 위당으로부터 이러한 찬사를 받았다는 것은 단재의 사학이 결코 범상하게 보여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1921년경 북경에서 단재를 만나 주로 역사연구와 자료문제를 두고 대화를 나누었던 이윤재는, 단재가 이때 이미 조선사통론, 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편 등으로 정리한 원고뭉치를 준비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것은 단재가 역사가로 알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망의 서름을 안고 이역만리에서 실제로 역사연구와 집필을 정력적으로 계속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재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사들이 그를 역사가로서 인식한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역사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2. 단재의 역사연구 과정


단재가 역사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6세 되던 1905년경이다. 그 해 2월 성균관 박사가 된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의 국치에 발분하여 역사연구를 본격화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距今 16년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東國通鑑을 열독하면서, 사평체에 가까운 '讀史新論'을 지어 대한매일신보 지상에 발포하며, 이어서 수십 학생의 청구에 의하여 지나식의 연의를 본받은 비역사 비소설인 '大東四千年史'란 것을 짓다가 兩役이 다 사고로 인하여 중지하고 말았었다.(상 47)


이 '독사신론'은, 그 자신이 "그 논평의 독단임과 행동의 대담임을 지금까지 自愧"한다고 술회한 바 있듯이, 당시 민족의 어려운 현실을 보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역사의식을 환기시키자는 뜻에서 다소 조급한 심경으로 저술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몇가지 주목할 점이 보인다. 우선 檀君이 정복적인 영웅으로 나타나고 단군조선의 전통이 부여 고구려로 계승된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종래 전통적인 사서에서는 단군-기자-위만의 체계나 단군-기자-삼한의 체계로 고대사체계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단재는 그것을 거부하고 단군의 전통이 부려 고구려로 계승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부여 고구려의 역사적 위치를 격상시키는 것일뿐만 아니가 儒家史學에서 돋보이던 箕子를 부여에 신속된 '一守尉'로 평가절하시키는 것이었다. 단재는 또 任那日本府說을 포함한 고대 일본의 한국경영설을 "신라시 임나부 설치의 설은 我史에 不見한 바니, 彼史의 운운한 자를 貿然히 信筆로 據함이 불가"라고 배격하였는데, 이는 그 무렵 林泰輔의 <朝鮮史>를 비롯한 일본측 사서와 그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한 玄采의 글에서도 보였던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단재는 고대 한민족의 일본경영과 중국에 대한 식민활동을 강조하면서 대외적인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독사신론은 "사평체에 가까운"에 가까운 글로서 뒷날 그 상당한 부분이 수정되거나 더 이상 지속되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역사연구 초기의 사상의 일단을 분명히 드러쟀고 또 그 중에는 계속 단재사학의 기본핵으로 연면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독사신론에서 본격화된 그의 역사연구는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이순신전> <을지문덕> <동국거걸최도통전> 등의 전기와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국문의 기원' '西湖問答' '東國古代仙敎考'등의 역사관계 논설을 계속 게쟤하였다. 그가 1910년 망명하기까지 국내에서 활동한 기간에 나타나는 그의 역사관은 첫째 자강사상에 기초한 영웅대망론 혹은 영웅사관이 나타나며, 둘째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고대사의 체계를 단군에서 부여 고구려로 계승시키고 있으며, 세째 주자학적 가치와 역사인식에 대한 비판이 그렇게 철저하지는 않지만 이미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한말 교과서에 대한 비판이 철저하다는 것이다.


1910년 일제가 나라를 강점하기 직전인 4월경에 단재는 망명을 결행, 상해 북경 만주 연해주 등지를 전전하며 역사연구와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하였다. 1914년 단재는 대종교의 제3대 종사 尹世復의 초청을 받아 서간도 환인현으로 가서 1년간 그곳에 머물며 東昌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만주의 옛고구려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집안현의 一覽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萬讀함보다 낫다"는 감격을 안고 <조선사> 집필에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단재가 집필한 <조선사>는 동창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뒷날 <조선상고문화사>로 개제되었거나 그 내용이 흡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愼 33)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조선상고문화사>가 대종교적인 색채를 많이 풍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앞서 박은식도 1911년 윤세복의 집에 기거하면서 <동명왕실기> <夢拜金太祖> <明臨答夫傳> 등을 저술했던 적이 있었는데, 저술의 내용이나 과정이 단재의 경우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만주에 기류했던 시절을 전후하여 단재가 집필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앞서 언급한 <조선상고문화사>를 비롯하여 <檀奇古史>서문과 소설 <꿈하늘>이 있다. 발해 대야발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는 <단기고사>는 重刊 서문에서 단재가 "그 진본됨은 의심이 없다"고 하였으나 그의 역사서술 어느 곳에서도 이를 인용한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료비판과 고증에 대한 그의 자세가 정취해지면서 <단기고사>를 더 이상 신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꿈하늘>은 1916년 3월에 집필한 '史談體의 자전적 소설'로서 한말의 <독사신론>에서 <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에 이르는 그의 역사인식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韓,629)


이 시절에 쓴 가장 중요한 단재의 역사서술은 <조선상고문화사>이다.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이 책은 주로 이 시대의 우리나라 문화가 중국의 것을 능가하는 웅혼한 것임을 강조하여 종래 중국에 대해 갖고 있는 문화사대주의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 이것은 1931년에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대종교적 분위기를 짙게 풍기기 때문에 그것이 단재의 작품일까에 대해 의문이 없지 않았고 따라서 그 집필연대에 대해서도 정확을 기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단재가 망명한 후 한때 만주에서 윤세복과 같이 체류하며 대종교와 깊은 관계를 가졌고 또 그 책에서 보이고 있는 韓 中 史書에 박통하지 않으면 그런 내용을 쓸 수 없으리라는 것 때문에 그 필자를 단재로 지목하고 있다. 문제는 저자를 단재로 지목한다 하더라도 이 책의 집필 시기가 언제쯤일까에 대한 의문은 그대로 남는다.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독일 사학자 랑케의 <세계역사>에 보이는 내용도 보이고 또 근대 역사학 관계 서적도 상당히 접근한 바 있을 뿐만 아니라 類證 互證 追證 反證 辨證의 근대적 역사고증 방법이 논의되고 있으며 또 그의 主著라 할 <조선상고사>에 보이는 사상과 역사인식의 일부가 내비치는 것으로 보아 <조선상고문화사>의 집필시기는 1920년대초의 <조선상고사>의 집필시기에서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저자가 前後三韓說을 "뒤에 따로 논술하고자 한노라"라고 한 것은 <朝鮮史硏究草>에 수록된 '전후삼한고'라는 방대한 논문으로 정리되었고 같은 내용이 <조선상고사>에 요약형태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상고사>와의 저자 및 시대적 상관성을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조선상고문화사>가 집필되는 시기의 단재의 역사학은 다음 몇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종래의 유교사학에서 보이는 유교적인 天命(天心)論으로 역사를 해석하려는 윤리적 역사이해에 강한 회의를 제기하고 도리어 强權論의 입장에서 역사를 이해하려는 자세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의리론 정통론 등의 주자학적 윤리를 기초로 인식했던 역사이해에서 벗어나 대세론에 입각한 현실적인 논리를 기초로 한 역사학으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로 보인다. 이 점은 같은 시기의 작품인 <꿈하늘>에서 仁厚亡國說을 주장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단재는 이 무렵에 이미 "帝王과 逆賊은 成敗의 別名뿐이라" "正論 邪論은 多寡의 差異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다음 단계의 <조선상고사>의 '총론'에서는 종래 유교적 가치관으로 폄하시켰던 王莽 淵蓋蘇文 弓裔 鄭汝立 등을 주자학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이들을 새롭게 평가하는 데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그의 역사학에서 중세성이 극복되고 근대성이 시작되는 것과 일접히 연관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만주에서 여려 고적을 답사한 단재는 우리 고대문화의 웅혼성을 재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언문일치의 평이한 국한문 문체로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또 문헌사학의 방법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앞서 말한 5가지 역사연구 방법론이 소개된 것은 이 때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이 무렵의 그의 역사인식에는 대종교적 분위기 탓인지 문화적 국수주의 특히 단군조의 문화가 중국을 능가하는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음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단재는 한 때 임정에 깊이 관여한다. 그러나 임정이 창조파와 개조파로 분열, 노선을 달리하게 되자 그는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략하게 된다. 1922년말 그는 김원봉으로부터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을 천명하는 '조선혁명선언'의 제작을 의뢰받았다. 최근세에 이만큼 강건한 문장을 대할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힘찬 기개와 민중의 혁명의지를 천명한 이 선언문은 무정부주의자 유자명의 도움을 받아 1923년 1월에 완성되었는데, 이 선언문의 선명, 과격한 성격은 뒷날 단재가 무정부주의에 관계하게 되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1923년 8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간 창조파 계열의 임시정부는 소련이 인정해주지 않자 해산되어 버렸는데, 이때 단재는 극도의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24년 3월 머리를 깍고 관음사에 들어가 '維摩經''楞嚴經' '大乘起信論' 등의 불경에 심취한다. 그는 6개월간의 승려생활을 끝내고 다시 국사연구를 본격화하게 되는데, 당시 북경대학 교수 이석증의 소개로 四庫全書를 열람하며 조선사관계의 많은 자료들을 섭렵할 수 있었다. 이 무렵 그는 1922년에 간향된 梁啓超의 <中國歷史硏究法>을 독파, 근대적 역사연구방법론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 근대적 역사연구법을 심화시키고 있던 단재는 그 방법론을 직접 논문작성에 활용한다. 그의 <조선사연구초>에 수록된 논문들은 그가 근대적인 역사연구방법을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직접 원용하여 집필한 것이다. 이 논문집에는 '上古史 吏讀文 名詞解釋法' '<三國史記>中 東西兩字 相換考證' '三國志 東夷列傳 校正' '平壤浿水考 上,下' '前後三韓考'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 등, 그의 사학의 관심분야와 정취한 학문방법을 잘 보여주는 주옥같은 논문들이 실려 있다. 이 중 앞의 몇개의 글은 그의 사료이해 정도와 고증이론의수준을 잘 보여준다. 1924년에 북경에서 완성한 '전후삼한고'는 자료상으로 중국동북 지역에서 한반도 남부지역에까지 어지럽게 나타나 그 실체를 그려내기가 매우 어려운 '삼한'을 "삼한이동설'이라고 하는 일종의 민족(지명)이동설이라는 가설을 이용하여 파악해 보려고 한 대단히 독창적인 논문이다. 그가 제창한 지명이동설은 '평양패수고'에서도 일정하게 보인다.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은 고려 인종조의 '妙淸의 亂'을 사상사적인 면에서 다룬 것으로, 단재가 유교사상에 근거한 전통적 역사학과 儒,佛,仙 등 정신사적 흐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자주적인 소위 '郞家思想'이 '사대적'인 유가상에 의해 어떻게 단절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밝히면서, 김부식의 사학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단재가 이러한 논문들을 집필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현존하는 그의 저작 중 주저라 할 수 있는 <朝鮮上古史>가 완성된 듯하다. 이 저작은 1931년 6월 10일부터 103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돤 <조선사>를 해방 후에 <조선상고사>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상고사>는 단군시대에 해당되는 '수두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까지를 다룬 우리나라 상고사로서, 앞에서 언급한 <조선상고문화사>가 문화적 측면에서 중화적 사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노작이었다면 <조선상고사>는 대외관계적인 측면에서 중국에 대한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저술되었다고 할 정고로 사료해석 및 중국상고사와 관련된 그 시대 이해와 상황설정이 독특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 상고사를 다룬 본문의 내용 못지 않게 서론격인 '總論'이 중요한데, 이 총론은 본문과는 별도로 쓰여졌다가 뒷날 합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단재가 민족독립운동 방략의 하나로 아나키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1925년부터라는 점에 유의해 본다면, 역사를 다룬 단행본으로서는 가장 늦게 저술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상고사>를 포함하여 현존하는 그의 역사연구물들은 대략 1925년경에는 거의 완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 후 단재는 민족독립운동을 위해 아나키즘과의 관계를 강화한다. 그가 아나키즘과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앞서 '조선혁명선언' 작성 때에 유자명과의 접촉과 북경대학 출입 때에 이석증 교수와의 접촉을 통해 이미 상당한 부분 성립되어 있었다. 그 후 그는 1927년에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였고, 그 이듬해 1928년 5월에 체포, 1936년에 여순 감옥에서 장렬한 일생을 마쳤다.


3. 단재 사학의 연구방법론


'단재 사학' 하면 흔히, 그의 <조선상고사> '총론'의 첫머리에 언급한 역사란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에서 풍기는 바와 같이, 우리 민족의 대외투쟁을 강조하는 강열한 민족주의 정신과 그것이 바탕이 된 국수주의적 성격을 거론하게 된다. 그래서 얼마간은 고리타분한 성격의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도 없지 않다. 여기서 당시로서는 그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단계의 역사학 이론을 이해하였고 그 이론에 입각하여 우리의 고대사 연구를 진행하였다는 것은 쉽게 간과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동안 학계에서는 단재 사학이야말로 우리나라 역사학을 "근대 역사학으로 성취시킨 것"이며, 그의 사학에 이르러서 "근래 역사학으로서의 우리 역사학의 이론 체계가 체계화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또 단재 사학이 우리나라 역사학을 편협한 의리론 정통론적인 이데올로기성에서 해방시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힐 수 있도록 하는 '역사과학'의 위치로 끌어 올렸고 따라서 유교적 중세 사학을 청산하고 근대 사학을 성립시켰다고 논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역사학의 근대성이 역사연구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별로 논의된 적이 없었다. 그가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역사학을 성립시켰다고 하는 데에는 그의 사학에 깔려 있는 학문정신이나 민족주의의식 외에 그의 사학의 방법론도 그러한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단재의 역사관계 논설들과 그의 역사저술들을 대하면 역사방법론에 관한 그의 주장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일찌기 고증의 방법으로서 유증, 호증, 추증, 반등, 변증의 5가지를 제시한 바 있었다. 특히 <조선상고사> '총론'은, 양계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일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저술이다. 그는 이 총론에서 舊史에 대한 비판과 사료 수집과 그 선택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3.그의 역사 연구의 특징--전사에 대한 비판, 고대사에 한정, 방법론,

4.그의 고대사인식과 현재적 평가

5.단재사학의 사학사적 위치


1) 전통적인 유교사학(사료)과 비유가사학(정신)의 통합적 계승

2) 근대민족주의 사학의 효시--근대성과 민족주의적 성격,역사주체 인식

3) 계승할 점과 지양할 점


丹齋 申采浩의 古代史 認識

李 萬 烈


목 차


I. 머리말

II. 古代史의 새로운 體系化

III. 壇君認識의 問題

IV. 고대사의 영역문제

V. 漢四郡 問題와 高句麗 年代削減論

VI. 古代文化의 認識

VII. 맺는말

I. 머리말


단재 신채호(1880-1936)는 한말 일제하에 걸쳐 역사연구 언론 교육 정치활동을 통하여 애국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을 벌이다가 순국한 강직한 지성인이었다. 그가 한평생 남긴 많은 업적 중에서는 역사연구가 가장 돋보인다. 그는 신문 잡지 등 언론매체들을 통하여 일반 논설과 史論 역사관계 논문을 남겼고, 또 우리나라 영웅들의 전기를 쓰는 한편 몇몇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저술들도 남겼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에서 파악할 수 있는 특징의 하나는 단재의 역사 연구가 거의 한국고대사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단재 사학의 체계가 그의 고대사 인식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피력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단재의 사학 사상이나 한국사 인식은 한말 일제하라고 하는 격변기에 그 자신의 시대경험의 확대와 민족모순에 대한 의식의 진전에 따라 변화해 갔다. 여기에 따라 한국고대사에 관한 인식체계도 그의 역사의식의 변화에 따라 서서히 정리되어 갔다. <<讀史新論>>(1909)의 발표에서 <<朝鮮上古文化史>> 및 <<朝鮮上古史>> 저술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대사 인식이 분야에 따라서는 상당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고대사 인식에 관한 고찰도 위의 세 책을 중심으로 하여 시대를 따라 먼저 비교, 추적한 후에 그 내용이 어떠한가를 살펴보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된다.


단재의 위 세 저작이 집필 시기가 <<독사신론>>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의 순서로 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저서들에 나타난 그의 고대사 인식의 특징은 그의 역사연구의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세 저술의 역사인식의 특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독사신론>>은 20세기 초, 한말의 그의 자강주의적 역사인식을 대변해주고 있다. <<조선상고문화사>>는 國亡 이후 1910년대 그가 대종교에 관여하고 또 만주의 고대사 현장을 답사하는 동안 단군으로부터 시작되는 한국상고사에 깊은 자신감을 가지면서 저술했던 것으로, 그 내용이 문화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한편 특히 중국관계에서 정치, 문화, 제도적인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상고사>>는 그의 역사학이 근대적 역사연구법을 수용하여 과학적인 고증과 합리적이고 종합적인 서술을 강조하던 시기에 저술된 것으로, 그 전의 역사인식을 대폭 수정 혹은 발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몇가지 전제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그의 고대사 인식의 세계에 광범하게 접근해 보려고 한다. 이 글에서는 그의 세 저술에서 서술한 내용을 근거로 하여 고대사의 체계문제, 단군에 대한 인식문제, 고대사의 영역문제, 한사군 문제와 고구려 年代削減論 그리고 우리나라 고대문화의 인식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II. 古代史의 새로운 體系化


단재의 고대사 인식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공헌의 하나는 고대사를 체계화함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것이다. 단재가 구상했던 한국 고대사의 체계는 그 이전의 역사인식에서 보여준 체계와는 상당히 달랐다. 과거의 고대사 인식이 대부분 고식적인 입장을 견지하거나 정통론같은 大義名分論에 입각하여 三韓正統論을 주장하고 있었던 데에 비해 단재는 민족주의적 시각과 통시대적인 시각에 서 있다. 그는 상고시대에 중국에 있던 조선족의 활동을 새롭게 한국사로 수렴하는 한편, 그 전에는 제대로 과학적인 연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던 한국의 상고사를 여러가지 논증을 들어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사와 연결시키는 문제에서도 종래와는 다르게 새롭게 체계화했고, 부여족을 主族으로 파악하고 단군의 世係가 夫餘, 高句麗로 계승된다는 인식을 보였다. 그 결과 조선 후기의 삼한정통론 이후 삼한 신라로 이어지는 반도 중심의 한국사 이해의 체계를 대담하게 거부하였다.


1. 上古史 體系化의 試圖


단재의 역사학은 자강, 독립주의에 기초한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있으며, 그의 역사학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는 한국사의 웅혼한 모습은 이미 삼국 이전의 역사에서 보여졌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단군으로부터 시작하여 三朝鮮에 이르는 이 기간에 우리 민족사의 웅혼한 모습이 이미 강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우선 단군 및 단군조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기자의 단군계승설을 부정하였다. 그는 또한 기자문제 못지 않게 對中國 문제에서 조선사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夫가 단군의 아들로서 途山會에 참가하여 夏禹에게 조선의 문화를 전해주어 禹가 이를 받아들여 治水에 성공하였다는 것, 彭吳가 단군의 신하였다는 것, 산동 산서 지방에 단군 부여족의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이들이 齊의 管仲과 오랫동안 대결하였다는 것, 江 淮 지역의 徐偃王이 조선족이었으며 그 서언왕이 36국을 병합, 조공을 받고 周穆王으로부터도 割地받았다는 것, 또 뒷날 백제가 遼西 등 북중국 지역을 경략하였다는 것 등을 한국 상고사 및 고대사의 체계로서 구축했던 점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그는 또 단군조 이후의 불분명했던 상고사를 前後三韓說로 체계화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래 이 기간에 한반도를 衛滿이 지배했다고 주장해온 학설이나, 아니면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설치되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주장, 또는 고대의 일본이 남조선을 지배했다는 '고대일본의 남조선경영설'(任那日本府說 포함) 등, 외세의 침략세력이 우리 고대사의 영역을 지배했다고 주장한 종래의 학설들을 부정해 버렸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우리의 의식세계에 막강한 영킢력을 미치고 있던 역사학의 두 조류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 하나는 <<삼국사기>> 이래 전통적으로 답습되고 있던 유교주의적인 역사이해요, 다른 하나는 근대 사학의 탈을 쓰고 접근해 오던 植民主義 史學이었다. 유교주의 사학은 단군을 우리 역사의 서두에 올려놓긴 하였으되 역사도 설화도 아닌 애매한 존재로 취급하고는 곧 중국으로부터 온 기자를 단군조로 이어 받는 문화의 시조로 부각시켰다. 한편 일제 官學者들에 의한 식민주의 사학은 전통적인 유교사학에다 근대적이라는 소위 그들의 합리성을 가미하여, '단군신화'의 '신화'는 역사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면서 단군을 우리 역사에서 제거하였다. 그 대신 그들은 箕子 衛滿이 조선으로 이주하였다는 것을 비롯하여,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 안에 있었음을 比定하고 나아가 일본의 神功 王后가 신라를 침공하여 남조선을 경영하였다는 주장과 任那日本府說 등을 주장하는 등 비주체적인 역사인식을 강조하고 있었다.


단재가 조선상고사의 새로운 체계를 세웠다는 것은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천착하려 했다는 점 외에, 이렇게 당시 식민주의 사학이 한국상고사를 마치 비주체적, 타율적 역사의 표본이나 되는 것처럼 내세우고 있었던 연구방향과 대조시켜 보아야 그 진실한 의의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단재의 한국 상고사 체계화는 그의 저서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그가 여러 논문과 저서에서 제시한 상고사 체계는 서로 다르기도 다소 모호한 점도 없지 않다.


<<독사신론>>에서 그는 단군시대를 酋長政治 시대로 파악하고 단군조선이 분열되어 동부여 북부여로 나누어지고 그 북부여가 고구려라고 하는 나라를 세웠다고 체계화하였다. 그는 또 '夫餘 高句麗 主族論'을 주장하면서 조선후기 이래 주장되어 오던 반도 중심의 '三韓(馬韓)正統論' 및 '신라중심주의'를 거부하였고 그 대신 '부여 고구려 주족론'의 당연한 결과로서 고구려의 후예인 渤海를 역사에 부각시켰다.


한편 <<조선상고문화사>>와 <<조선상고사>>에 이르러서는 앞서 <<독사신론>>에서 제기한 방향과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그 때 드러내기 시작한 그의 상고사 체계를 더욱 구체화시키고 정밀하게 다듬어 갔다. 우선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단군으로부터 시작되는 부여족의 대외식민활동을 강조하는 데에 그 초점을 두고 있는데, 이 식민활동이 특히 중국의 동 북 지역에서 그들을 정복하는 부여족의 활약으로 그리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조선상고문화사>>가 성립된 시기로 보아 단재가 중국에 대한 사대적인 역사상을 타파해야 하겠다는 그의 역사의식이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조선상고사>>에서는 三韓 三朝鮮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여 한국 상고사의 중추적 골격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재는, 상고사를 신두수시대, 삼조선분립시대, 열국쟁웅시대 등의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용어로 시대구분하였는데 그가 구상한 상고사의 체계를 도표화하면 <표1>과 같다.


<표1> 丹齋 申采浩의 韓國上古史 體系表


2. 前後三韓說


단재에 의하면, 대단군왕검 중심의 단군조는 三京을 중심으로 하여 三韓(汗)으로 자체분열되었다는 것이다. 이 분립시기는 중국의 戰國時代에 해당되는 기원전 4세기경이며, 이 때에 대단군조는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으로 三分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에 분열된 조선을 그는 三朝鮮 혹은 三韓이라 불렀다. 이것은 통설에서 말하는 단군, 기자, 위씨의 삼조선과 다르며, 또 <<三國志>> 魏志 東夷傳 등에 보이는 반도안에 형성된 辰韓 弁韓 馬韓의 삼한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단재는 한반도 안에 뒷날 형성된 삼한을 後三韓 또는 南三韓이라 불렀다. 여기에 단재의 독특한 삼조선 삼한설 혹은 전삼한 후삼한(전후삼한)설이 있다.


단재는 전후삼한설을 그가 역사연구방법론으로 취했던 민족이나 부족 및 지명의 이동설을 이용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삼조선분립시대의 삼조선 즉 전삼한의 유민들이 남하하여 이룩한 것이 진한 변한 마한의 후삼한을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단재에 의하면, 전삼한의 일국인 '신조선(신한)'은 대단군왕검의 자손 解氏에 의해 계승, 발전한 것으로 지금의 봉천성의 동북 및 서북지방과 길림성 흑룡강을 거쳐 연해주 남단을 포함한 일대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후일 북부여와 동부여로 분립된다고 하였다. '불조선'은 기자의 후손 箕氏에 의해 건립된 왕조로, 지금의 요동지방의 개원 이남과 흥경 이서 지방에 해당하는 영역을 갖고 있었다. '말조선'은 韓氏에 의한 왕조로서 압록강 이남 평양을 중심으로 이룩되었다가 그 후에 국호를 '말한(마한)'이라 고치고 남방의 月(目)支國으로 천도하여 '불조선'의 왕 箕準에 의하여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삼조선은 그 뒤 對漢族激戰時代에 해당하는 列國爭雄時代에 이르면 소위 삼한을 성립시키게 된다고 하였다. 즉 ① '신조선'이 북부여와 동부여로 분열되고 '신조선'의 일부 유민이 낙동강 연안의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진한부 즉 진한을 성립시키고, ② '불조선'의 箕氏는 衛滿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가 마한을 탈취하고 그 유민의 일부는 변한부 즉 변한을 결성하며, ③ 韓氏의 '말조선'은 기씨의 '불조선'보다 먼저 남쪽 월(목)지국으로 천도하여 마한이라 하였고, 이 마한은 후일 '불조선' 기씨의 준왕에게 일시 정복당했으나 마한 제국이 共起하여 準王을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단재의 이같은 삼한에 대한 이해는 종래의 정적, 평면적이었던 삼한에 대한 이해를 동적, 입체적인 이해로 옮아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삼한 이해에서 민족 부족 및 지명 이동설을 도입함으로 한국고대사에서 숙제로 되어 있던 여러 난제들을 풀게 되는, 방법론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3. 夫餘, 高句麗 중심의 體系


단재가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려는 방향은 단군으로부터 계승되는 왕조가 어디로 계승되고 있는가를 모색하는 점에서도 종래의 고대사 이해체계와는 다르다. 종전에는 단군에서 계승되는 왕조가 箕子, 衛滿(혹은 삼한), 新羅로 연결되는 것으로 파악한 데 비하여, 단재는 그것을 부여, 고구려 중심으로 계승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한국고대사 인식체계는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체계라고 할 수 있다.


단재가 단군왕조가 부여로 계승된다고 파악한 것은 그의 초기 저작이라 할 수 있는 <<독사신론>>에서 이미 보이고 있다. 거기에는 단군의 태자로 夫가, 治水賢臣으로 彭吳가 등장하고 있으며, 夫餘에 대하여는


甚矣哉라, 我國史家의 ***識이여, 我國 文獻의 殘缺하이 雖甚하나 檀君嫡統의 傳次한 夫餘王朝가 昭在하니 設或 당시 我東에 百國이 有할지라도 主族은 夫餘가 是며, 千國 億國이 有할지라도 主族은 夫餘가 是니, 夫餘는 堂堂히 檀君의 正統을 受한 者어늘 一字一句에 言及도 無하고 箕子만 謳歌하니 嗚呼라, 其**識이 어찌 此에 至하뇨.


라고 하여, 부여야말로 단군의 전통을 잇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나아가 단군이 곧 고구려 血統의 直祖라고까지 주장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단군의 태자로서 滄海使者가 되어 途山에 가서 夏禹에게 治水術 및 <中經>을 가르쳤다는 부루의 존재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다. 단재는 '우리 古史' 혹은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이 태자 부루를 지나의 途山에 보냈다고 하였고, <<吳越春秋>>, <<東國史綱>>, <<西廓雜錄>> 등의 기록에 의거하여 부루가 治水術 및 中經을 하우에게 가르쳤다고 결론내린 것 같으며, <<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해서 부루가 단군의 아들이며 바로 그 부루가 解氏로서 부여(북부여, 동부여)왕이라고 이해했다. 그런 까닭에, 대단군왕검이 解氏에 의한 '신조선'을 거쳐 부여로 그 정통이 계승된다고 체계화시켰던 것이다.


단재의 이러한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체계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史學史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재 이전의 고대사 인식체계와 비교하여 보지 않으면 안된다.


現傳하는 가장 오래된 史書인 <<三國史記>>를 비롯하여 그 뒤의 <<三國遺事>> 등에는 그들의 역사인식을 제대로 체계화시켜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선 초에 이르러 우리 나라의 역사를 체계화시켜 인식하려는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國初의 정권담당자들이나 지식인들이 조선조 건립의 정통성을 확립시키는 문제는 역사체계화의 방법이 가장 설득력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동국사략>>과 <<동국통감>>을 거쳐 조선 초 중기까지 형성된 한국 고대사의 인식체계는 <표 2>와 같이 단군-기자-위만(四郡二府)으로 체계화되고, 삼한이 위만에 附한 상태에서 다음 단계의 삼국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표 2> 檀君 → 箕子 → 衛滿(四郡二府) →+-高句麗

| +-百濟

+----> 三韓(附) ------> +-新羅


단군-기자-위만조선으로 연결되던 한국고대사의 인식체계는, 17 18세기에 이르러 正統論 思想이 심회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역사학에도 三韓(馬韓)正統論이 대두하였다. 삼한정통론에 따라 한국의 고대사는 단군-기자-마한(삼한)으로 체계화되는 한편 위만조선은 삼한과 비교해 볼 때 ***僞의 국가로 낙인찍히는 그러한 한국고대사의 체계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정통론을 거치는 동안 한국 고대사의 체계는 <표 3>과 같이 정리되었다.


<표 3> 檀君 → 箕子 +-> 馬(三)韓 → (三國) → 統一新羅

+-> 衛滿(僭僞)


이러한 삼한정통론을 깔고 17 18세기의 한국의 역사학을 집대성한 것이 安鼎福의 <<東史綱目>>이다. 정통론 사상에 따른 한국고대사의 인식체계화는 한말 崔景煥 鄭喬가 撰한 <<大東歷史>>를 거쳐 단재의 시대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같이 보인다.


이러한 시대적인 풍조에도 불구하고 단재는 단군-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한국고대사의 새로운 체계를 제시하였으며 종래에 논란이 많았던 기자니 마한이니 위만, 삼한 등은 부여, 고구려에 부수되는 것으로 체계화시켰다. 史學史的으로 본다면 단재의 그러한 부여 고구려 중심의 한국고대사 인식체계는 18세기 말, 修山 李種徽가 그의 <<東史>>에서 이러한 체계를 이미 제시한 바가 있었다. 이종휘의 고대사 인식체계는 다음의 <표 4>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표 4> 단군 → 부여 → 고구려(백제) -+

+-→ 기자+-→ 마한 (삼한) | 三國

+-→ 위만 (사군) -+


그러면 단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은, 부여 고구려 중심의 한국고대사 인식체계를 수립하려 한 의도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그의 사학사상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역사를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한 단재의 자강독립주의 사학 정신이 고구려를 내세워 중국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사대주의를 타파하려고 의도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가 처하고 있던 한말 일제하의 식민지적 상황을 철폐해야 하겠다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III. 壇君認識의 問題


단재사학의 체게화에 가장 중요한 위치에 점하고 있는 문제의 하나가 단군 및 단군조선에 관한 것이다. 단군 인식에 있어서도 <<독사신론>> <<조선상고문화사>>를 거쳐 <<조선상고사>>에 이르는 동안, 다른 역사인식에서와 같이, 변화와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1. 征服英雄象으로서의 壇君認識 - <<독사신론>>에 보이는 檀君


단재의 단군인식이 처음으로 체계화되는 것은 <<독사신론>>에서이다. <<독사신론>>의 단군인식은 단군이 추장시대에 장백산을 중심으로 조선을 개창하였으며, 각 부락과 지역을 정복하여 만주와 요동, 한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숙신, 조선, 예맥, 삼한의 여러 종족을 거느렸던 존재로 집약된다. 주목되는 것은 단군의 정복사업이 강조되어, 단군이 마치 정복군주 내지는 전쟁영웅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단군조가 쇠퇴하여 동부여와 북부여로 양분되어 부여가 단군의 정통을 잇게 되었고, 따라서 단군은 북부여인 고구려의 血統直祖도 되었다고 단재는 주장하였다.


이같은 <<독사신론>>에서의 단군인식은 몇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우선 첫째로 단군문제를 非神話化시키고 역사화시카는 최초의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韓末이라고 하는 시대상황에 비추어서 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이때 단군문제가, 학문적으로 수용, 정리되는 것은 단재 등의 역사가들이 단군에 관해서 연구했기 때문이지만 운동적 측면에서 力動化되는 것은 大倧敎運動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주목할 점은 양자가 거의 동시에 나타나 接點化된 것은 민족운동의 구심점으로서 단군에 관한 열기가 이때에 고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사신론>>에서의 단군인식이 민족의 구심점으로서의 단군을 역사화시킴으로써 그동안 축적된 역사적, 민족적 역량을 민족주의운동으로 역동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自主文化의 象徵으로서의 壇君認識 - <<조선상고문화사>>에 보이는 壇君


<<조선상고문화사>>에 보이는 단군인식은 초기의 웅혼한 왕조로서의 단군 혹은 단군조의 모습 대신, 문화와 종교(仙敎)와 관련하여 인식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것은 <<조선상고문화사>>가 집필되었던 시기가 만주에서 대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조선상고문화사>>에 나타난 단재의 단군인식을 몇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단재는 첫째, 단군 때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였고 그것을 다스리기 위한 정치조직이 일종의 공화적이었음을 주장하였다. 그가 단군 때부터 부여, 진한, 변한, 마한, 낙랑, 대방, 진번, 임둔, 신라, 가락, 고구려, 백제, 진, 발해, 마진, 태봉, 고려 등의 나라들이 있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그는 이 때에 광범한 영역을 소유했던 단군조를 상정하고 있었다. 또한 이렇게 넓은 영토와 수많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하여 단군조가 동 서 남 북 중의 五部에 大加를 두고, 중부의 대가가 정권을 맡되 삼년에 한 번씩 갈리며, 동 서 남 북 四部의 諸加가 교대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五部大加의 별명을 '지'라 하였고, 이것이 支那上古의 '帝'로 되었다는 것이며, 공화정부의 장관인 조선의 오가가 支那에 譯轉하여 독재군주의 칭호로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단재의 단군조선 인식에서 보이는 특이한 면의 하나는, 문화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조선문화의 원천으로서의 단군조 문화에 대한 인식이다. 그는 뒷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체계화시켜 피력한 이른바 郞家思想의 본원을 단군과 관련시키고 있다. 단재는 신라의 '花郞' '國仙' '仙郞'과 고구려의 '早衣' '先人' '仙人'의 시조를 단군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그 전에 이미 나타났던 단재의 仙敎에 관한 인식과 맥을 같이하는데, 그의 仙敎觀은 "대체로 仙敎에 대한 大倧敎的 해석을 따르고 있는" 점으로 보아 대종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지적된다.


셋째, 단군시대에 관한 문화인식과 관련, 단재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특기하고 있는 것은, 상고시대의 조선문화가 중국문화를 능가하는 우월한 문화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일종의 비교우위론적인 입장에서 중국상고시대의 三皇五帝 중 伏羲, 神農, 舜 등이 조선(東夷)인이며 순이 치수를 위해 우를 등용하고, 우는 단군조선 황제의 聖經인 <<황제중경>>을 단군의 태자인 부루로부터 받아 치수에 이용하였다고, '我史'와 <<오월춘추>> 등을 들어 주장하면서 한국의 상고문화가 중국에 전파되었음을 강조하였다. 단재의 이러한 자세는 사대주의론에 대한 맹렬한 비판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그는 한국인의 중국에 대한 사대성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문화적인 데 있음을 간파하고, 그 문화적 사대성과 노예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의 우월성과 중국 문화의 원류로서의 한국상고문화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폭을 인식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3.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종교적 존대로서의 壇君인식 - <<조선상고사>>에 보이는 壇君


단재의 壇君觀은 시대를 따라 변모하여, <<독사신론>>에서는 단군의 정복군주로서의 모습이 보이다가,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웅혼한 단군조의 영역과 행정 정치제도 및 찬란한 고대 문화 등에 대한 인식과 그러한 제도와 문화가 중국 상고사에 미친 영향을 조명하는 방향으로 발전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 와서 대종교와의 인연을 끊고, 梁啓超 등의 근대사학이론 및 아나키즘과 접하게 되면서 그의 사학 전반에 걸친 변화가 오게 되었고, 그에 따라 단군에 관한 인식도 다시 변하게 되었다.


<<조선상고사>>에 나타난 단군 인식의 특징을 간단히 말한다면, 단군연구를 과학화하고 있다는 것과 단군인식의 발상을 종교신앙과 관련시키고 있다는,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단재의 <<조선상고사>>집필이 梁啓超의 <<中國歷史硏究法>> 등 근대사학이론을 광범하게 섭렵하는 전후의 시기였던 만큼 이때의 그의 역사 서술의 자세가 보다 냉정해지고 과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상고사>>의 단군인식은 단군 신화의 비과학적인 요인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단재는 우선 단군 신화내용이 실려있는 <<삼국유사>> 所載 古記 내용이 지나치게 불교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한편 단군조선의 歷年, 혹은 단군의 壽年과 관련하여, "중국에서도 周召共和 이후에야 연대 고증이 가능하기 때문에 단군원년을 的指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종래의 단군신화의 비과학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단재는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조선상고사>>에서 몇가지 독특한 단군론을 전개하였는데, 우선 주목되는 것이 단군을 조선족 최초의 공동의 신앙의 대상으로서 원시적인 종교 신앙과 관련시켜 민족사의 출발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즉, 조선족이 '아리라'를 중심으로 '불'을 개척하면서, 공동체의 일반신앙이 형성되었는데, 이 공동체의 제단인 수두에서 일종의 祭主(하느님 천신)로 종사하는 자를 단군으로 보았던 것이다. 아마도 고대 조선족의 이러한 종교를 그는 '수두교'라고 불렀고, 후일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선배'라 칭하는 '수두'교도의 일단이 그 전통을 이어갔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단군 인식의 출발을 종교적인 측면에서 시도한 단재는, 단군이 종교적 권위를 이용하여 정치적 권력자로 등장하는 것같이 설명하였다. 즉 종교적 권위에 정치적 권위가 덧입혀진 대단군왕검은 <<초사>> <<사기>> <<한서>> 등에 散見되는 이른 바 삼신, 오제의 神說로써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인간세상의 일반제도를 정했다는 것이 단재의 주장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단군연구의 과학화의 입장에서 볼 때, 단군인식의 출발점으로서의 종교적 관점과 그 이후의 정치적 군장으로서의 단군왕검의 성립에 관한 주장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다만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단군시대의 중국에 대한 문화적 우월성의 표현이 <<조선상고사>>에서는 퍽 약화되었고 중국에 대한 식민활동의 설명도 소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동안의 단재의 역사 연구태도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주목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군조선 성립 이후의 <<조선상고사>>의 단군관계 인식은 <<조선상고문화사>>와 기본적으로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이 특히 단군조선의 계승으로서의 삼조선 삼한 문제에 관계될 때에는 거의 일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단재의 단군연구의 의의


우리는 지금까지 단재의 단군연구가 그의 연구시기와 저서에 따라 한결같지 않다는 점에 유의하여, 우선 시대별로 그의 저서를 중심으로 단군인식을 살펴보았다. 그의 단군인식에는 저서별, 시대별로 많은 차이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단재의 고대사연구에서 사료섭렵이 확대되고 연구방법론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기에 와서 내용이 다른 것은 그의 단군관이 수정된 것을 뜻할 수도 있지만, 기존의 주장에 대한 보완 내지는 수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단군인식의 폭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만주와 한반도 및 그 주변의 상고사를 망라하는 듯한 광대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정치 종교 군사 문화 등의 여러가지 분야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사신론>>에서는 단군이 만주를 중심무대로 하여 정복활동을 벌였으며 그 世系가 부여 고구려로 계승된다는 것을 주장하여 그의 단군론의 개괄적 서론적인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고,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단군의 문화적 성격과 단군조선의 중국식민활동이 중점적으로 부각되어 있는 데에 비하여, <<조선상고사>>에서는 단군조의 발생론을 민족신앙적인 측면에서 고찰하는 한편 그의 진보된 역사방법론을 원용하여 종래의 신화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전통적인 단군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단군론을 발전 정립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단군론은 단계적으로 발전되면서 보완되어 갔다고 생각된다.


단재의 단군론은, 그것이 제기된 시점 등을 고려할 때, 몇가지 특징과 의의을 갖고 있다.


그의 단군인식은 첫째 <<삼국유사>>류의 전통적 사료들이 제시하는 단군 이해를 거부하고 있다. 우리 사학사를 볼 때, 단재 이전에도 물론 시대의 흐름을 따라 단군인식이 점차 발전하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 예로서 실학시대 사서인 <<海東繹史>>와 <<東史綱目>> 등은 단군 시대 인식배경으로서 東方九夷를 거론하여 그 폭을 넓혔고, 최경환, 정교의 <<대동역사>>는 단군조선의 계통이 부여, 고구려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하는 한편, 夫가 夏禹에게 간 것을 "제후로서 천자에게 朝會한 것이 아니라 대등한 입장에서 往會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단재가 단군연구를 시작하면서 나타낸 단군 부여 고구려 계통설이나 부루의 途山往會說 등은 한말 <<대동역사>> 등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겠지만, 단재의 단군인식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들보다 훨씬 체계적이었으며, <<삼국유사>> 所載 古記類의 인식의 한계성을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역사 연구 방법론을 과학화하고 역사인식의 폭을 확대하려 했다는 데서 더욱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둘째로 단재의 단군인식이 종교신앙, 문화일반과 관련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상고사>>에서 단재는 단군을 '수두'교 신앙과 관련하여 설명하였고,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단군조 문화에 대하여 조선문화의 원류로서 중국 상고문화에 큰 영향력을 미친 고급의 문화로서 인식하고 있었다. 단재가 단군인식에서 문화적 측면을 강조한 것은 당시까지 현존하고 있던 중국에 대한 문화사대와 문화식민주의를 타파하고자 함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 문화의 폭과 깊이 및 연원을 확실히 인식하고 그런 근거 위에서 문화사대의 대상국인 중국문화와의 위상 혹은 관계를 정립하고자 한 것이었다.


단재의 단군인식은 셋째로, 단군조의 주된 활동무대로서의 만주와 단군의 대외정복 활동을 부각시켰으며, 단군조의 중국 식민활동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만주중심의 단군조 이해는, 단군조의 부여 고구려 계승과 발해 중시 등 그의 한국사 체계의 수립과 상통하는 것이며, 그러한 만주 중심주의의 밑바탕에는 한말 일제하에 전개된 만주의 우리 국토화 운동과 독립운동 기지화 운동의 역사적 연원으로서의 단군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또 대외식민활동을 강조한 것은 한말의 자강독립운동과 일제하의 국권회복운동이 민족사적 기반을 단군에서 찾아, 중국의 문화식민주의는 물론 일제의 침략 강점 수탈을 거부하는 반식민운동의 역사적 이념표상으로서의 단군을 설정하려는 데 있었다.


더구나 19세기 말의 林泰輔의 <<朝鮮史>>를 비롯한 일본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건국시조로서의 단군을 말살하려는 분위기에서는 단재에서 시작되어 민족주의 역사학에로 이어지는 한말 일제하의 단군연구는 바로 자강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독립 운동 그것이었다고 생각된다.


IV. 고대사의 영역문제


단재가 새로 제시한 한국고대사 인식의 중요한 과제는 고대사의 역사무대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상고사의 새로운 체계화 및 부여 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가 체계화하려 했던 한국 상고사의 웅혼한 모습과 부여 고구려 중심의 역사 인식은 과거 유교적 사가들과 식민사관론자들이 애써 강조해 온 한반도 중심의 역사무대를, 만주 요동반도 및 요서지방과 중국 동북지방에까지 뻗치게 한 활달한 역사무대로 확대시켰다.


金富軾의 <<三國史記>>나 그 후의 유교적인 역사가들은 삼국 이후를 한국 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로 인식했던 까닭에 그 역사무대도 한반도와 만주 일부에 국한시킬 수밖에 없었다. '滿鮮史觀' 등을 제창하면서 한국사의 他律性論을 강조해온 식민주의사관론자들도 결국 고구려 발해 등 만주에서 활약한 국가들을 韓民族史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였으므로 필연적으로 한국사의 활동 영역을 한반도로 축소시키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단재의 역사인식은 삼국 이후보다는 그 이전의 상고사를 강조하며, 이 시기를 한민족의 성장 발전에 불가결한 시기로 인식하기 때문에 이 때의 역사무대를 또한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재가 인식한 고대사의 영역을 추적하게 되면, 북으로는 북만주, 흑룡강 유역에까지 미치며, 서남으로는 요서, 발해만, 直隸省, 산동, 산서 및 淮河, 楊子江 유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고대사의 영역에서 본다면 서남쪽에 해당되는 이 지역은 중국의 북 동북지역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지역으로 진출한 것을 두고 단재는 단군 부여족의 支那植民論이라 하였다. 우리는 먼저 단재의 이 주장을 소개하고 이어서 백제의 해외경략에 관한 것도 아울러 검토하겠다.


1. 단군, 부여족의 지나식민론


단재는, <<周書>> 및 <<史記>>를 근거로 하여 弗離支國을 거론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서기전 5,6세기경에 弗離支라는 자가 조선의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직예, 산동, 산서 등의 지역을 정복하고 代縣 부근에다 자기의 이름을 따라 '弗離支國'을 세웠으며, 그가 산동을 정복한 뒤에는 조선의 모피와 금단 등의 직물을 수출하여 발해를 중심으로 상업이 진흥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또한 주목하는 것은 단재가 일찍이 그의 <<조선상고문화사>>에서 산동반도와 淮河와 양자강 유역의 동이족의 활동상황과, 이와 관련된 徐偃王의 치적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단재는 이 지역에서 활동한 동이족들이 부여족이었으며, 이들이 산동, 산서, 연계(지금의 직예성에 있었던 周代의 나라) 등지에서 식민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산동지방에서는 萊, 奄, 우 및 전**, 根矣 등의 동이족의 나라가 있었는데, 周나라가 초기에 서쪽에서 東進하자 周에 대결하였으나 결국 정복당했다. 周는 종래의 이 동이지역인 엄국 지방에는 齊(姜太公)를, 우국 지방에는 魯(周公의 아들 伯禽)를 봉하였다. 연계지방에서는 孤竹國과 令支國 등의 동이족의 나라가, 산서지방에서는 赤國, 白國 등이 있었으나 춘추 전국 시대에 철기 문화를 발전시킨 한족에게 복속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나라에 일시 정복당했던 동이족은, 殷나라 紂의 아들 武庚과 殷의 舊民을 통감하던 管叔 蔡叔 등이 소위 '三監의 亂'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드디어 사,오백년 동안의 극렬한 혈전을 겪게"되었던 것이다.


단재에 의하면, 淮河 楊子江 유역에서 활약한 조선족의 위인으로 徐偃王이 거론되는데, 단군 1,330년경에 金卵에서 태어난 서언왕은 徐國, 淮國 지방의 조선을 영도하여 일대제국을 건설하였고, 周의 穆王으로부터는 영토를 割地받았으며 드디어 江 淮 漢 사이에서 서언왕에게 조공하는 제후가 36국이나 되었다고 한다. <<博物續志>>의 기록에 따라 단재는 서언왕이 이러한 힘을 기반으로 양자강과 회하를 뚫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언왕은 한족의 철기문화의 급속한 발전에 대응하지 못했음인지 周 楚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였고 따라서 江 淮 지역의 동이족 또한 한족에 점차 동화되었던 것이다.


2. 百濟의 海外經略說


단재의 사학이 대외항쟁을 강조하는 만큼, 그의 역사서술에서도 이 점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때문에 단재는 조선족의 해외경략 혹은 식민활동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주시하였다. <<조선상고사>> 전편에 흐르는 고구려의 대외항쟁 및 대외 정복은 돋보이고도 남는다. 여기서는 고구려의 대외정복은 접어두고 신라와 백제의 해외경략 관계만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신라와 관련, 단재는 眞興王의 업적을 소개하면서 순수비에 나타난 왕의 업적마저도 <<三國史記>>의 本紀에서는 탈락되었다고 비판하고, <<滿洲源流考>> <<吉林遊歷記>> <<燕巖集>>에 의거하여 신라가 길림 동북 지방과 중국 복건성의 泉州 장주에까지 진출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백제의 해외경략에 관한 기록은 거의 중국측 사료에 의존할 뿐이다. <<해동역사>>가,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을 때에 백제는 요서지역을 점령했다는 이같은 기록을 주목하기는 하였으나 중국측의 이같은 기록이 이치에 맞지 않고 고증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중국측의 이 기록에 주목하여 백제의 해외경략이라는 차원에서 처음 거론한 것은 단재에 이르러서였다.


단재가 주장한 백제의 해외경략설은 시기적으로 近仇首王(375-384)과 東城王(475-501) 때의 것이요, 경략 지역으로는 중국과 일본이라 하였다.


단재는 먼저 <<梁書>> <<宋書>> 및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백제의 요서지역 경략을 주장하였다. 백제는 근구수왕 때 鮮卑族의 慕容氏를 쳐서 요서와 북경을 빼앗고 요서 진평 2군을 설치하였으며 鹿山까지 쳐서 부여의 수도를 점령하였고, 前秦이 소유한 산동지방과 東晋이 소유한 강소, 절강 등지를 자주 경략하였다는 것이다.


또 동성왕 때는 중국 뿐 아니라 일본까지도 해외식민지로 삼았다고 주장하였다. 고대 일본이 백제의 해외경략지역이라는 주장은 일본의 聖德太子의 사적이 거의 백제 근구수왕의 것을 훔쳐다가 만든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단재의 일본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단재는 당시 일본인 학자들이 <<日本書紀>>에 의거하여 주장하던 神功王后의 소위 신라정복과 任那日本府 설치 등을 부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백제의 해외경략지로서의 일본 고대사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식민주의 사학의 이론을 꺾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단재의 해외경략설이 선구자적 공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경략설 자체는 고증상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의 요서 산동반도 지역에 대한 백제의 해외경략설은 그간에 보완적 연구들이 있어 학계의 진지한 반응을 얻게 되었고, 그로 하여 백제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 지역에 대한 백제의 해외경략설을 삼한, 삼국계의 일본진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후학들에 의하여 보다 진지한 검증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V. 漢四郡 問題와 高句麗 年代消滅論


종래 한사군 문제는, 漢 武帝가 동방 침략정책의 하나로 위만조선을 치고 그곳에 B.C. 108-107년경에 漢의 직할 식민지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을 설치하고, 오늘날 평안 황해 강원도 북부 함경도 남녘 및 압록강 중류의 지역을 직접 다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고시대에서부터 중국에 대한 한민족의 문화적 정치 군사적 우월성을 주장해 왔던 단재는 한사군문제에 대해 종래의 기록이나 주장을 부정하고 新說을 내세웠다. 이것은 그의 역사학에서 일관되게 추구되었던 것으로, 이미 단군조 때에 한국문화가 중국에 이식되었다는 것과 중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단재는 종래의 한사군설을 거부하는데, 그의 주장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高句麗가 漢과 9년간 전쟁을 치루었다는 것과 고구려의 歷年이 삭감되었다는 것, 나아가서는 한사군의 위치 문제까지도 제기하게 되었는데, 우선 '高句麗 漢 九年戰爭說'부터 검토해 보자.


1. 高句麗 漢 九年戰爭說


단재의 상고사 인식체계에 의하면 '신수두' 시대인 단군 조선은 중국의 戰國時代에 해당하고 삼조선 분립시대를 거쳐 列國爭雄時代로 이행되는데, 그 시기가 대략 기원전 200여 년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단재는 열국쟁웅시대를 對漢激戰時代라고 하였는데 즉 기원전 190년 전후의 수십년 동안에 조선 내에서는 동부여가 분립하고 南北曷思, 南北沃沮의 兩 동부여가 분립되었으며, 동북부여와 고구려와의 사이에는 알력이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漢族 사이에는 격렬한 전쟁이 전개되었는데, 다음에서 볼 고구려와 한 사이와 九年戰爭아 그 하나이다.


단재가 고구려의 구년전쟁이라고 명명한 이 전쟁은 조선의 남북열국이 분립하던 때에 漢武帝의 侵寇로 개시되었다는 것이다. 종래 국사학계에서는 이를 한 무제의 滄海郡 설치와 혁파로 기술하는 데에 그쳤지만, 단재는 이 전쟁을 조선과 중국 사이의 한 때의 정치상 대사건일 뿐 아니라 조선민족 문화의 消長에도 비상한 관계를 가진 대사건이라고 했다.


단재의 '高句麗 漢 九年戰爭說'은 한 무제가 침구한 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고 주장하는 데서 출발한다. 두 조선 중 하나는 <<史記>> <平準書>와 <<漢書>> <食貨志>의 기록에 근거하여 "彭吳의 穿한 穢貊朝鮮"이라 하였고, 다른 하나는 <<史記>> <朝鮮列傳>에 보이는 소위 '위만조선'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9년전쟁'이란, 한 무제가 衛 右渠를 멸하기 전에 앞의 '예맥조선' 즉 東夫餘를 쳐서 군현으로 삼으려고 일으킨 것으로, 이에 대항하여 고구려는 9년간 혈전하여 漢을 패배시켰다는 것이다.


단재가 주장하는 '고구려 9년 전쟁'이란, 보통 28萬口를 거느린 族長 南閭가 漢에 투항하자 한 무제가 그곳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가 9년만에 철폐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단재는, 창해군을 철폐한 것이 漢의 자의대로 돈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의 9년간의 전쟁이 있은 후에 하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려 하였다.


단재는 그의 '高句麗 漢 九年戰爭'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추가하였다. 하나는 구년간이나 양국 간에 血戰이 있었는데도 司馬遷의 <<史記>>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단재는 그 해답으로 孔丘 <<春秋>> 이래의 '爲中國 諱恥'(중국을 위해서는 수치스러운 것은 기록하지 아니한다)의 編史 자세를 들었다. 즉 한 무제의 패전을 수치로 여겨 역사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와 함께 <<三國志>> <王肅傳> 所載의 司馬遷의 처형당함을 들어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또 하나는 漢武帝에 대한 구年血戰의 고구려측 주역으로 大武神王을 거론한 것이다. 단재는 그 근거의 하나로 <<三國史記>> 권14 대무신왕 27년 기사인 後漢 光武와의 전쟁을 漢 武帝와의 싸움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2. 高句麗 年代消滅說


위의 고구려 구년 전쟁설에서 제기되는 의문이 있다. 그것은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는 고구려가 기원전 128년경에 置廢되었다고 전해지는 창해군을 둘러싸고 한 무제와 구년간 혈전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우선 시간적인 간격으로 보아 통설에서 말하는 고구려 건국연대(기원전 37년)에서 거의 90여년 전의 사건이므로 양측의 연대가 조정되지 않는 한, '高句麗 漢 九年戰爭說'은 우선 역사적 사건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단재는 對漢血戰의 고구려측 주역이 대무신왕(<<삼국사기>>에 의하면 A.D. 18-44년 재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만큼, 종래의 통설에 다르면 창해군 置廢事件인 고구려 9년 전쟁과 대무신왕 간에 약 150-170여년간의 시간적인 차이가 나타나게 됨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단재는 고구려의 건국초기의 연대를 비롯한 "열국의 연대가 삭감되었다"는 대담한 주장을 내세웠다. 그는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고구려 멸망후 唐 高宗의 질문에 대답한 侍御使 賈言忠이 '高句麗秘記'를 인용하여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六將滅之 高氏自漢有國今九百 勣年八十矣"(9백년이 채 되지 않아 마땅히 86세의 장군이 이를 멸망시킬 것이다. 고구려는 漢 이래 나라를 가지고 지금 9백년이 되었고 장군 이적의 나이는 8십입니다)를 들고 또 文武王이 安勝에게 말했다는, "공의 태조는 덕을 쌓고 공을 세웠고 자손이 相傳하여 천리의 땅을 열었고 년조는 8백년이나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가 705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미 당시의 사람들이 '8백년' 혹은 '9백년'을 말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고구려의 '8백년설'이나 '9백년설'은 조선 후기에도 주장된 적이 있는데, 그 때에는 '兩高句麗說'과 함께 제기되었다. 그는 또 拓拔氏의 <<魏書>> 고구려전을 인용하고 <<魏書>>와 <<三國史記>> 등을 종합, 비교하여 주몽 이후의 世系를 閭達=慕本王, 宮=太祖大王이라 한 후에 삭감된 世系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三國史記>>에는 慕本王이 被殺하고 태자는 被黜하여 琉璃王 子, 再思의 子(太祖)가 그 位를 續하였다 하나, 右에 述한 '慕本子孫 至裔孫宮'의 語로 보면 太祖가 곧 慕本의 자손이요, 모본 이후 태조 이전에 若干의 世代가 있음이니, 이 若干의 世代를 本國에서는 新羅 史家가 消滅하고, <<魏書>>에는 王號와 年代를 記치 안하여 지금에 發見할 곳이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단재는 당 賈言忠의 보고와 광개토왕 비문 등을 종합하여 고구려의 삭감된 연대가 代數로 三世이상, 년수로 백년 이상 됨이 "명백"하다고 주장하였다.


단재의 이러한 주장이 기존의 통설적인 한국사 이해체계에 수정을 요하는 점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첫째 고구려 건국초기의 삭감된 年祚를 상승시키고 나아가 당시의 전반적인 한국사 편년 조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고구려의 건국이 백 수십년 이상 앞당겨짐으로 기원전 2세기경의 고구려와 중국 관계의 전개과정이 통설과는 달리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단재의 주장에 따르면, 고구려는 漢 武帝 侵寇 이전에 건국되었고, 한 무제의 창해군 설치 戰役은 곧 고구려와의 九年 血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때 정복군주 한 무제를 상대하여 구년간의 혈투 끝에 승리한 고구려의 주역이 대무신왕이라는 것이다. 결국 단재가 주장하는 대로 고구려의 삭감된 연대가 수정될 수 있다면, 우리 역사는 漢 武帝에 匹敵하는 민족 영웅 大武神(大朱留)王을 탄생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衛氏國 滅亡 異說


고구려의 年祚를 백 수십년 상승시키고 모았을 때, 국제 관계의 새로운 위상정립이 요청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씨조선'의 멸망을 둘러싼 동북 아시아의 국제관계의 설명도 그 하나로서, 단재는 <<史記>> <朝鮮傳>類의 이해에서 보여지는 漢 魏氏朝鮮 간의 투쟁관계를 단순히 漢 위씨조선의 관계로서보다는 한 고구려 위씨조선 동부여 간의 보다 광범위한 국제관계에서 파악하려 하였다. 따라서 우선 단재는 위씨조선의 멸망과 관련된 한 무제의 戰役을 통설과는 달리 설명하고 있다.


<<조선상고사>>의 설명에 따르면, 한 무제가 위씨국을 원정할 당시의 상황과 경위는 (1) 한은 기원전 128년 濊君 南閭 문제로 일어난 구년간의 혈전에서 고구려의 대무신왕에게 참패하였으나 그 뒤에도 계속 조선열국을 침략할 기회를 엿보았으며 (2) 한은 위씨조의 將相들까지 이용하여 조선열국을 잠식하는 先導를 만들려고 공작을 꾸몄으며 (3) 漢은 위씨에게 길을 빌려 濊 즉 동부여를 구하고 그 종주국인 고구려를 치려고 의도하였으며 (4) 길을 빌려달라는 漢의 요청을 衛의 右渠가 거절하였다는 것이며 (5) 漢의 사신 涉河가 漢 武帝의 密旨대로 조선국 장군을 살해하고 본국으로 달아났다는 것 (6) 그 뒤 섭하가 요동군 동부도위로 到任하자 전일 섭하의 소행을 분히 여긴 조선측에서 섭하를 襲殺하니, (7) 이를 구실로 한 무제가 5만병력으로 위씨국 정벌에 나섰다는 것이다.


단재가 설명하고 있는 한 무제의 위씨국 침략사건 중 漢使 涉河의 위씨국과의 교섭이후의 전개과정은 <<史記>> <<漢書>> 등의 <朝鮮傳>의 기록과 일치되고 있으나 한 무제의 위씨국 침략원인을 밝히는 데에는 다른 점이 있다. 단재의 그 원인론에는,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상고사>>에 비록 일치되지는 않더라도, 고구려가 가장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단재가 고구려의 삭감된 연대 백 수십년을 환원시킨 데서 가능했던 것으로, 여기에서도 우리는 단재사학의 특이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漢四郡의 位置問題 - 北韓一帶 存在說에서 遼東郡內 僑設說까지


종래 한사군의 위치에 대하여는, 韓百謙의 <<東國地理志>> 이후 현재 주장되고 있는 반도 내 존재설이 유력하게 되었고 安鼎福의 <<東史綱目>> <朝鮮四郡三韓圖>에서는 반도 내로 명기하였던 것이며, 일제의 官學者들도 소위 樂浪遺物이라는 것을 발굴함으로써 漢郡縣 중 樂浪郡이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존재하였다는 것으로 굳혀지는 듯했다.


그러나 단재는 전통적인 유가사학자들이 가졌던 한군현의 반도 내 존재설이나 소위 평양중심설을 모두 거부하였다. 그가 한사군에 관하여 처음으로 언급한 <<독사신론>>에서는 한민족과 支那族 간의 對峙 交爭을 논하면서 箕子가 무리 오천 명을 거느리고 東來하여 평양 일부에서 主治하였고, 그 뒤를 이어 위씨조선이 들어섰다고 설명하였다.


그 이후 한사군의 위치문제가 한국고대사에서 주체성의 문제와 깊은 관련을 가진 것이라고 깨닫게 된 단재는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먼저 한사군의 위치를 설정하는 데에 관건이 되는 위씨조선의 疆域을 설정하는 데에 먼저 정력을 기울였다. 그는 종래 '水=대동강, 王儉=평양'설을 비상한 망발이라고 비판하고, 위씨조선의 위치를 요동반도에 못박았으며 따라서 한 사군이 요동반도의 興京 부근의 存置되었음과 기원전 75년에 이설된 현도가 지금의 奉天省城임을 주장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단재는 한사군의 '北韓一帶 存置說'을 부정하고 요동반도 내 설치설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단재의 역사연구가 1920년대 <<조선상고사>> 집필기에 이르게 되면,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 사학이 한국고대사를 타율적 비주체적인 성격의 것으로 몰아가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 한편 단재 스스로는 사료 열람의 기회를 확대한 데다가 역사연구 방법론을 심화시키면서 역사의식의 전환기도 맞게 되었다. 그는 일제 관학자들의 史書와 당시 평양 등지에서의 발굴소식은 들으며, 식민주의사학자들의 한국고대사 파괴작업에 대해 학문적인 대결을 꾀하였다. 그 작업이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에 실린 일련의 논문으로 나타난다.


이 무렵 단재는 한사군의 위치문제가 삼한연혁의 문제 못지 않게 중요한 쟁론임을 제기하면서 위씨국의 근거지를 海城 蓋平 등지에 比定함으로써 이미 <<조선상고문화사>>에서 한사군의 위치가 興京 부근이었다고 주장한 자신의 견해를 일부 수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사군의 위치가 요동반도 내라고 하는 종래의 입장이 기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한군현의 위치문제와 관련, 단재의 역사학에서 주목되는 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로 단재는 사군 위치에 대한 다양한 일설의 원인을, (1) 지명의 同異를 잘 구별치 못한 것과 (2) 기록의 眞僞를 잘 辨別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주장하였다. 둘째로 역사연구 방법론을 심화시킨 바탕 위에서 광범하게 사료를 섭렵할 수 있었던 단재는 이제 한군현 문제에 대한 일대 결단을 선언한다. 즉 그가 종래까지 견지해 왔던 한사군의 實置說 대신 紙上假定說 내지는 현도 낙랑의 요동군내 僑設說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사군은 원래 土上에 그은 것이 아니요, 紙上에 그린 일종 假定이니.... 樂浪國을 멸하거든 樂浪郡을 만들리라 하는 假定뿐이요, 실현한 자가 아니다"라고 한 데서 단재는 한사군의 지상가설설을 내세웠는가 하면, 낙랑과 현도가 요동군내의 한 모퉁이에서 일종의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는 '僑設說'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것은 검증을 필요로 하는 주장이지만, 단재 獨得의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로 단재의 한군현의 요동 설치설(교설설) 혹은 한반도 外 존재설은, 일본인 학자들이 평양부근에서 발굴했다고 하는 소위 낙랑유물을 가지고 평양일대를 낙랑군으로 단정한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제 관학자들이 출간한 <<朝鮮古蹟圖譜>>를 보고 그 유용함을 언급하면서도, 그 책의 어떤 부분은 학자적인 견지에서 이뤄졌다기보다는 "政治上 他種의 作用"이 적지 않은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 책의 고고학적인 내용이 학자적인 양심에 입각하지 않았음을 지적했던 것이다.


넷째로 한사군의 설치와 고구려의 삭감연대 환원에 따른 양국간의 관계이다. 통설에 의하면 108=107 B.C.에 사군이 설치되고 그 후에 고구려의 對漢투쟁이 전개되어 B.C. 82년에 진번 임둔군이 혁파되고 B.C. 75년에는 현도군이 移置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단재는 고구려와 한의 전쟁이 위씨가 멸망하던 기원전 108년에 시작되어 기원전 82년까지 계속되었고, 이 싸움에서 한이 패배하여 四郡實設의 희망이 영원히 좌절되었으므로, 진번 임둔 양군은 그 명칭마저 폐지하고 현도 낙랑 양군은 요동군내에 僑設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단재의 고구려 연대삭감론은 고구려의 건국연조를 <<三國史記>> 등의 통설적인 편년보다 백수십년 높이고 그에 따라 삼국 중 신라의 건국연대보다 앞서게 했다는 편년상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史記>> <,漢書>>의 <朝鮮傳> 이래 정설화되다시피 한, 漢의 조선침략과 漢의 직할영지로서의 사군설치론에 수정을 요하는 한편 고구려의 對中國 항쟁주체로서의 모습을, 통설에서 말하는 隋 唐과의 대결에서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보다 훨씬 이전의 漢과의 대결과 그 승리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5. 南北 兩樂浪說


한사군의 위치문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의 하나는 단재가 남낙랑, 북낙랑의 兩낙랑설을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한군현이 존재했으리라고 생각되는 그 기간에, 오늘날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통설에서 말하는 낙랑군 지방에는 崔理를 최후의 왕으로 하는 낙랑국이 존재했다는 것인데, 이 낙랑국을 한군현의 낙랑군(북낙랑)과 구별하기 위하여 남낙랑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동반도 海城 蓋平 등지에 교설되었던 한사군의 하나인 요동의 소위 낙랑군은 남낙랑에 해당하는 낙랑국의 이름을 가져다가 이름 붙였는데, 이것을 북낙랑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재는 남 북 두개의 낙랑이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三國史記>>에 보이는 낙랑국과 낙랑왕은 바로 남낙랑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三國史記>>에는, 이 낙랑국의 마지막 왕 崔理가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好童을 사위로 삼았으나, 그의 딸이 호동의 음모에 따라 武庫의 鼓角을 깨뜨림으로써 낙랑국은 고구려 대무신왕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써 놓았다.


낙랑국에 관한 견해는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가 비슷하다. 두 저서에서 단재는 낙랑군을 비롯한 한군현이 반도 내에 설치되지 못했을 근거의 하나로, 소위 낙랑군이 위치했다고 하는 평양 지역에는 최씨의 낙랑국이 건재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설에서 평양 부근에 낙랑군이 존재했다고 인식하는 것은 최씨의 남낙랑국을 한사군의 낙랑군으로 혼동한 데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단재의 양낙랑설은 한국고대 및 인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하나는, 한군현이 한반도 밖에 존재했다고 하면 당사 평양지역의 역사가 몇 세기간 공백기에 들어간다고 보고 한군현의 반도내 존재설을 합리화시키려는 주장에 대하여 하나의 간접적인 반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재의 이 양 낙랑설에 의하면, 최씨 낙랑국이 이 시기에 평양을 중심으로 일대 연맹 종주국을 이루었기 때문에 몇 세기간 공백기가 있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낙랑문제의 역사적 인식을 위한 하나의 새로운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三國史記>>를 비롯하여 고대에 관한 韓 中 史書에는 '樂浪'이 빈번히 등장하는데, 그 문제를 한사군의 하나로서 간주해버리거나 아니면 未知의 실체로 放棄해버린 것이 그 동안의 실태였다. 단재는 낙랑문제를 그의 독특한 음성학적인 방법론과 地名移動說에 의하여 풀어보려고 하는 한편 남북 양낙랑설에 입각하여 해결해 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신라 고구려 백제와 관계를 맺었던 <<삼국사기>> 소재의 낙랑은 평양을 중심으로 연맹국을 형성한 남낙랑이었음을 밝혀 내었다. 이 점은 그 후의 낙랑의 역사적 인식에 중요한 시사를 던졌던 것이다.


VI. 古代文化의 認識


단재의 고대사 인식의 저변에는 자기 문화에 대한 신뢰와 긍지가 깔려 있었다. 그가 단군 이래의 훌륭한 정치 사회 제도를 말하고 또 고대 중국을 능가하는 사상과 문화를 논하며 고유의 사상적 맥락을 仙家類에서 찾으려고 한 것은 전통문화의 인식기반이 두터웠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는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한국의 전통이 가지는 잠재적인 문화능력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거기에다 그 못지 않게 "전통문화에 대한 강렬한 비판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김부식을 매도하고 한국의 腐儒들을 비판할 수 있었던 정신적 기반은 전통문화의 연원으로서의 고대문화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대문화에 대한 신뢰는 중세를 극복하고 근대를 개창하기 위해 古典古代 문화에 대한 깊은 인식을 전제로 했던 서구의 저 인문주의자들의 자세와도 같았다.


한국 고대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의 일단은 1910년 3월 대한매일신보에 <東國古代仙敎考>를 발표함으로써 이미 나타났다. 그 뒤 단재는 아마도 한국의 문화사에 대한 몇가지 저술을 시도했던 것 같다. 이윤재의 증언 가운데 1921년경에 단재가 준비한 5권의 책 원고 중에는 문화편 사상변천편이 있었다 하니 여기서도 단재의 문화에 대한 관심의 비중을 엿볼 수 있다. 現傳 저작 중에서는 거의 단편적으로밖에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고대문화 인식에 대해 다음 몇가지로 간략하게 살펴본다.


1. 우리나라 上古文字起源說의 問題


단재는 일찍부터 "문자가 인류문화와 사회진화에 補益"됨과 문자생활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가 한국 고대문자에 대한 통찰력을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상고문화사>>에서였는데 그는 단군 때의 사관으로 지목한 神誌의 역사와 예언을 언급하면서 (1) <신지> 이전에 조선에 글이 있었고, 신지가 이 글로 <신지>의 史를 썼을 것이므로, 글 낸 시조는 신지가 아니며, (2) 우리나라에서 문자를 처음 만든 사람은 <八卦>와 <書契>를 지은 風部人 伏羲와 <三皇內思文>을 중국에 전했다는 紫府선생으로 지목하는 듯하였다.


단재의 이러한 견해는 뒷날 수정되었는데, 그는 조선에서 최초로 사용된 문자가 한자라는 전제에 서서 문자 변천을 吏讀文 口訣 諺文의 삼기로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우리나라 상고의 문자기원설을 이렇게 의심 내지는 부인하게 된 것은 늦어도 1923년말경으로서 이는 단재가 1920년을 전후하여 大倧敎를 떠났고, 梁啓超의 <<中國歷史硏究法>>(1922) 등에 의해 그의 사학연구방법에 사료비판과 고증이 한층 강조되어졌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2. <神誌> 문제


단재는 태고 때의 문자기원설과 함께, 단군시대의 고유문자로 <신지>를 이미 남겼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의 <신지>에 관한 논의는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먼저 보인다. <<조선상고문화사>>에 의하면, 신지는 본래 단군 때의 사관을 일컬었으나 그와 함께 그 사관이 남긴 책(역사)을 의미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신지> 등의 고기류가 현재에 전해지지 못한 이유를 春秋筆法의 노예가 된 김부식이 <신지> 등을 비롯한 고기류 등을 몰아다가 궁중과 내각에 비장시키고 민간에는 영세 금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조선상고문화사>>에서 보였던 위와 같은 단재의 <신지> 이해는 <<조선상고사>>와 <전후삼한고> 등에서는 변화를 보인다. 즉 종래의 인명, 사관으로서의 신지설은 부정되고, '신치'설이 주장되고 있다. 단재에 의하면, '신치'는 수두임금(단군)의 首佐官名 혹은 단군조 五加의 수석대신이라고 한다. 신치는 '신수두' 祭日에 致語를 남겼는데, 그 내용은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과 산천지리의 名勝과 後人의 鑑戒할 일"과 "우주창조의 신화화와 영웅 용사 등의 행사와 예언류의 경계담" 등이었다. 따라서 신지는 '신치'이기도 하지만, '신치' 등이 남긴 致語를 모아 吏讀文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神誌의 이해는 단재의 역사인식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그는 <신지>의 망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만일 그 전부가 다 남아 있으면 우리의 고사 연구에 얼마나 大力을 주리오"라고 했고, 우리가 오늘에 本國史冊에 의지하여 말하는 壇君朝의 역사가 모두 神誌의 恩을 잊으리오"라고 하였다. 이는 그가 단군연구에 신지의 자극을 얼마나 받았는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단재 사학의 중요한 흐름의 하나로 간주되는 非儒家史學의 연원이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되며, 그런 점에서도 단재의 <신지> 이해가 얼마나 깊이 그의 사학(체계)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신지>에 관한 이해가 그의 고대사 인식체계 형성에서, 앞에서 본 단군문제와 뒤에서 볼 郞家思想의 문제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도 아울러 엿볼 수 있다.


3. 古代의 風俗理解


단재의 고대 풍속 이해는, 10월 3일을 단군의 탄생일로 보고 이 날에 제례를 올리고 각종 대회를 개최함이 고대의 각국에서부터 "오늘까지 민간에 유행하는 바"라고 하는 전제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는 <<文獻備考>>에 이른 바, "馬韓 濊 高句麗 駕洛이 다 10월에 大祭를 행한다"고 한 것이나, "고구려는 10월제를 東盟이라 이름한다"로 한 것이, 10월의 단군 탄일의 제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고대 제천풍속의 이해가 단군인식과 함께 발상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단재는 단군시대 제천일에는 각 지방의 대표가 와서 장엄한 예식을 행하고 수십일 동안 큰 경기회를 열었는데, 후세에도 전국의 인민이 크게 모여 소장의 기술을 발휘하여 승부와 명예를 겨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고려사>>에 이른바, 팔관회 끝에 "신라의 古事대로 백기와 가무를 習한다"고 한, 전통 풍속으로 잔존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 百技 歌舞가 단군조 때부터 전승되어 풍속화되었는데, 그 종류로서 寒盟 手搏 劍術 弓矢 擊球 金丸 走馬 會獵의 8가지를 밝혀냈던 것이다.


단재의 고대 풍속에 대한 이 정도의 체계적 이해는 <<조선상고문화사>>에만 보이고 그 후의 그의 저작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고 단편적으로만 보인다. 이것은 그의 다른 부문의 역사인식이 시간을 따라 변화된 것을 감안한다면, 풍속에 관한 그의 견해도 그 뒤에 보다 냉정하게 실증적으로 되었을 것 같은데, 그 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혹시 그의 저술 가운데 현전하지 않는 <<문화편>>에서 이 문제의 해답을 제시해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4. 仙敎, 郞家思想의 이해


단재가 그의 한국사 연구를 통해 추구하려 했던 사상사적 과제는 한국인을 사대주의의 노예로 만든 외래의 사상을 극복하고 독립적 자유인으로 만들 조선 고유의 주체적 사상을 탐색 정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강독립을 부르짖던 한말부터 민중폭력혁명을 부르짖던 1920년대까지 일관했던 그의 사학의 과제요, 그의 學人으로서의 임무이기도 했다.


사상사에 대한 관심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東國古代仙敎考>에서였다. 그는, 동국 고대에 성행한 선교를 문헌의 缺亡으로 그 원류를 상고키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支那 道敎가 東入된 것으로 認知하는 종래의 견해에 반대하고, 동국의 고유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과 함께 단군 明臨答夫 김유신 온달 金欽純 金仁問 官昌 金令胤 金欽運 등의 인물과 天仙 國仙 조의 大仙 大兄 仙徒 仙人 등의 명칭을 거론하는 한편 선교창립의 祖로서의 三神과 화랑의 世俗五戒 등을 고대선교와 관련시켜 소개하고 있다.


단재의 선교관은 <<독사신론>>에서는 나타나지 않다가 1910년대 大倧敎와 관련을 맺으면서 집필된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선교에 대한 인식이 체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1) 단군이 仙人 조의 先人 화랑의 시조요, (2) 화랑 仙人 조의 先人은 우리의 국교요, 무사도로서 國粹의 중심이 되며 (3) 고구려의 조의 仙人 先人과 신라 화랑 국선 선랑은 그 연원이 三郞을 거쳐 단군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4) 先人 仙人은 선비의, 徒領(화랑)은 도령의 음역이며 (5) 조의 선인 在家和는 동일한 것이며 (6) 화랑의 연원사를 곧 仙史라 한다고 밝혔다.


1920년대에 이르러 단군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킴에 따라 단재의 仙敎觀도 변화되고 있다. 그는 <<조선상고사>>에서 단군을 수두교와 관련시켜 수두교도의 일단을 선배(선비) 혹은 先人 仙人이라 부른다고 하고, 고구려 太祖王 次大王 대에 선배제도가 창설되었다고 하였다.


단재가 仙敎를 郞家로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에서이다. 그는 조선에서 유교의 사대사상이 결정적으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된 것이 고려 중기까지 전승되어 오던 전통적 독립적 기개를 가졌던 郞家가 '妙淸의 亂'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종래 사용하던 선교라는 말 대신에 郎派 郞家 郞敎徒로 대치하고 있음이 보인다.


단재가 규정한 '郞家'는 (1) 단군 수두제단의 무사요 (2) 선비라 불렀으며 (3) 고구려에서는 이 선비(선배)를 조의선인이라 불렀고 (4) 신라에서는 화랑 또는 국선 선랑 풍류도 풍월도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단재에 의하면 郞家는 시간적으로 단군조부터 三國을 거쳐 高麗代까지 이르렀고, 지역적으로는 고구려, 신라 등 여러나라에까지 널리 확대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단군시대 수두제단 중심의 각종 제의와 대회, 공동체신앙을 토대로 하여 성립, 발전된 郞家思想은 列國爭雄時代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사회성장에 알맞게 변화하면서 전승되었다. 고대국가의 성장에 따라 종교 무사단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상고의 蘇途祭團의 무사제도는 국가적인 차원의 제도로 발전, 개편되었다. 고구려가 태조 차대왕 때에 선배제도를 창설한 것과 신라 진흥왕이 화랑제도를 설치한 것은 바로 낭가제도를 국가적인 차원으로 개편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신라의 화랑제도가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단재는 우리나라 고대사의 전개과정을 낭가사상의 동태화과정으로 파악했다 할 정도로 우리 역사에서의 그 동적인 역할을 중시하였다. 단재는 낭가사상의 동태화현상을 대내적으로는 사회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대회적으로는 대외항쟁을 통해 국가의 자주독립을 확보하고 영토를 확장하였다는 측면에서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와 관련, 그는 고구려의 낭가제도인 '선배'제도가 고구려의 강성을 가져왔고 신라의 낭가제도인 '화랑'제도가 신라발흥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낭가사상은 대외항쟁에서 승리를 가능케 한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고 하면서, 그 예로서 고구려가 對中國對決에서 승리한 것은 그 원인이 고구려의 선배(낭가)제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단재가 대외항쟁의 원동력으로서의 낭가사상을 신라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데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는, 화랑을 "조선이 조선되게 하여온 자"라고 하였고 또 小國인 신라가 "마침내 문화상 정치상 고구려와 백제를 대항"하게 된 것이 화랑제도로 말미암았다고 지적하면서도, 화랑의 헌신적 희생이 가장 돋보이는 통일전쟁의 서술에서는 그것을 아예 무시해 버렸다. 그 이유가 낭가사상의 動態化를 민족 내부의 갈등에는 적용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는지 혹은 "고구려 영토를 완전히 병합하지 못한 신라의 불완전한 통일에 낭가사상을 적용 서술할 수 없었던 데 있는" 것이었는지 분명치 않다. 이 점은 그의 역사서술에서 편향성을 드러낸 단적인 예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VII. 맺는말


우리는 단재의 현존 저작들이 주로 서술하고 있는 분야가 고대사라는 점에 유의하여 가능한 한 그의 기술을 중심으로 고대사 인식을 살펴보았다. 현존 저술들이 단재의 기술 그대로인가에 대한 의문과 옥중의 단재가 당시 발표되고 있던 자신의 저작들에 대해 많은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은, 현존 저술들을 중심으로 그의 고대사 인식을 파악하려 하는 우리들의 노력에 한 가닥의 불안을 던져주고 있다.


이 글을 끝맺으면서, 우리는 앞에서 거론한 내용들을 간단히 요약하고, 그 다음 단재의 고대사 인식이 차지하고 있는 의의를 말하고자 한다.


단재는 종래의 전통적인 史書와는 달리 우리나라 고대사를 체계화시키고 있는데 (1) 단군 부여 고구려 중심의 인식체계를 근간으로 하여 馬韓正統論을 부정하고 (2) 한국고대사를 대단군시대, 삼한(삼조선)의 분립시대, 열국쟁웅시대로 시대구분하며 (3) 종래 삼한의 한반도 남부 존재설 대신 전후(북 남)삼한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단군 문제의 인식은 우리의 역사에서 차지해야 할 당위적 위치설정을 시도한 후 그것을 기반으로 초기의 <<독사신론>>에서는 정복영웅적인 단군상을, 중기의 <<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정치 제도 문화적인 존재로서 그리고 對中國 우월문화의 창건자로서의 단군상을, 후기의 <<조선상고사>>에서는 합리적 역사연구방법을 기초로 우리 민족의 종교적 始源으로서의 단군상을 제시하고 있었다.


고대사의 영역문제에서는 고구려의 年代消滅說과 관련하여 한사군의 紙上假定說, 遼東僑設說, 南北樂浪說 등을 제기하였고 단군 부여족의 在中國 植民地設置說 및 일본에 대한 진출 등을 주장하였다. 이는 식민주의 사학자들의 他律的 史觀을 거부하고 한국고대사의 주체적 모습을 示顯하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한국 고대문화 인식은 고대사의 체계와 한국고대사의 주체성을 뒷받침하는 문화적 기반을 파악하는 작업이었다. 그의 상고문자 기원설과 神誌 문제의 인식, 고대풍속의 이해는, 그 확실한 자료적 근거가 박약함에도 불구하고, 조선문화의 원류를 밝히려는 그의 의지의 소산이었다. 또한 郞家思想의 발견과 그 사상의 動態化過程의 강조는 중국문화를 능가하는 우리의 고유 정신이 있었음을 강조함과 동시에 거기에 기반하여 민족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한 대외항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끝으로 단재의 고대사 인식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간단히 지적함으로써 이 글을 끝맺겠다.


단재의 고대사 인식은 종래의 전통적 儒敎史家들이 가졌던 半島中心的, 編年體的인 인식을 거부한, 당시로서는 새로운 고대사 이해의 충격이었음에 틀림없다. 이는 前人未踏의 경지를 새로이 개척하는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에 대결하는 歷史民族主義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단재의 고대사 인식은, 뒷날 그의 歷史硏究方法論에서 강조한 것과는 달리 典據와 考證이 불확실한 부분이 있고, 착실한 고증 전개에 앞서 성급한 결론에 도달해 있다는 점에서 그 한게성이 지적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대사 인식은 "후학들에게 많은 깨우침과 과제를 안겨주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한국고대사 이해에는 그의 先驅的 假說的 問題提起들을 구체적으로 검증하는 단계에 있는 것도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고대사 인식의 문제점을 補完하면서, 그가 제기한 고대사의 여러 문제들을 비판적 발전적으로 구체화시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고대사 인식을 포함하여 丹齋史學이 이 시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역사광복운동본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