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여순사건 좌파폭력에 우익 피의 보복…‘반공’ 뿌리내리는 계기로

한부울 2008. 8. 28. 14:32

여순사건 좌파폭력에 우익 피의 보복…‘반공’ 뿌리내리는 계기로

[중앙일보] 2008년 08월 15일(금) 오전 01:19


1948년 10월 19일 한반도 남쪽의 항구 도시 여수. 이곳에 주둔했던 육군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무장 봉기했다. 신생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던 이른바 ‘여수·순천10·19사건’이다.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신생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가 받은 충격은 막대했다. 국가를 보위해야 할 군인들이 총부리를 돌린 ‘무장 반란’이란 점에서, 정부 수립 이전에 있었던 다른 단선·단정 반대운동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군대는 좌파 세력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여순사건의 핵심 주동자인 지창수·김지회 등은 남로당 조직원이었다. 군인들의 반란은 지역 내 민간 좌파 세력에 의한 대중 봉기로 이어졌다. 19일 여수에 이어 20∼21일 사이 사건은 순천·광양·구례·곡성·보성 등 전남 동부 지역 일대로 확산됐다. 정부의 대응 차원도 달랐다. 초토화 작전이 전개됐다. 일주일 만에 여수는 함락됐다. 그러나 여수 함락이 반란의 끝은 아니었다.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신생국 정당성 흔들=10월 19일 오후 8시 지창수 등 14연대 하사관들이 회식 중이던 장교들을 사살하고 무기고를 접수하면서 사건은 시작됐고, 20일 날이 다 새기도 전에 여수 전역으로 확산됐다. 20일 오전 1시쯤 부대를 빠져나온 군인들은 여수의 주요 관공서와 경찰서를 점령했다. 여수의 좌익 세력은 사전에 군인들의 반란 계획을 알지는 못했지만 사건 발생 후 곧바로 인민위원회를 재건하며 반란에 동조했다. 오후 3시 대판동 사거리(현 중앙동 로터리 광장)에서 열린 인민대회에선 다음과 같은 6개 항의 결정서가 채택됐다.


“인민위원회가 여수 지역의 행정기관을 접수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 /대한민국의 분쇄를 맹세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법령을 무효로 선언한다. /친일파 민족 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 개혁을 실시한다.”


주동자나 동조자 입장에서는 일종의 해방구가 생긴 것이겠지만 신생 독립국 정부로서는 존재의 정당성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사건이었다. 사건 초기 3∼4일간 반란군 치하 지역에서 친일 협력자, 경찰, 우익 청년단원 등이 처형당했다. 정부는 21일 광주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한 데 이어 22일에는 여수와 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미 임시군사고문단의 도움을 받으며 강력 진압작전을 펼쳤다.


◇비극의 악순환=여수 탈환 직후 진압군은 주민들을 지역 국민학교 등에 소집했다. 반란군 잔당과 좌익 부역자를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부역자 색출·처형 과정에 비인간적 ‘국가 폭력’이 자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좌익의 폭력에 우익의 보복폭력이 이어지는 비극의 악순환이 전개된 것이다. 당시 여수군청에 근무했던 고 김계유(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2008년 7월 19일 타계)씨의 증언에 따르면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만행이 저질러졌다”(‘역사비평’ 1991년 겨울호). 부역한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판별할 여유도 없이 곳곳에서 즉결 처형이 잇따랐다고 한다.


강력한 진압작전을 거치며 여수 시가지는 잿더미로 변했다. 막대한 인명·재산 손실이 발생했다. 당시 전남도 발표에 의하면 11월 11일 현재 여수와 순천 두 지역의 사망·행방불명자가 각각 4800명과 1953명이다. 사망·행불자가 많았던 이유를 밝혀내는 일은 역사의 몫으로 남아 있다. 김일영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는 “좌익 테러와 우익 테러를 평면적으로 비교하기보다는 짧은 기간 동안 좌익이 점령한 이후 계속 우익이 점령했다는 점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해 평가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죽임을 당한 이들에겐 ‘빨갱이(공산주의자)’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유족들에겐 연좌제의 굴레가 덧씌워졌다. 여순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각인시켰다. 여순사건 연구로 첫 박사 학위를 받은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를 민족에서 분리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는 중요한 계기였다”며 “반공으로 무장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됐다”고 설명했다.


◇국가보안법 등장=국가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은 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 49년 11월 계엄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은 경찰력을 강화하고 분산돼 있던 청년단체를 대한청년단으로 통합하는 한편 학도호국단을 창설해 반공교육을 강화했다. 여순사건 이후 반공주의는 이승만 정권의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사건은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미군 철수와 한국 정부 수립 계획이 구체화하면서 주한미군은 48년 초부터 한국군 병력을 급격하게 증강했고, 이 와중에 병력 지원자에 대한 면밀한 조회 없이 좌익 청년들을 받아들인 게 문제였다. 여순사건의 여파는 군대 내 좌파의 숙청으로 이어지며 4800여 명을 솎아 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으로 군번 1번부터 100번까지의 최고급 장교 중 약 4분의 1이 좌파 혐의로 숙청됐다. 숙군 대상자 가운데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육사 2기 박정희도 포함돼 있었다. 육사 6기는 281명 가운데 60명이 숙청됐다.


여순사건 없이 6·25전쟁이 발발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의 안보 기반을 단단히 하는 계기가 됐다. 48년 말로 예정됐던 미군 철수도 49년 6월로 연기됐다. “미·소 양군 철퇴하라”는 주장이 반란군의 구호 속에 포함돼 있음을 상기하면 이 또한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당성에 도전했던 사건이 가져온 역설적 결과였다.


◇도움말 주신 분=여수지역사회연구소 김병호 이사장·박종길 여순사건위원회 위원장· 이오성 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득중 편사연구사,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 연세대 박명림 교수, 건국대 신복룡 석좌교수, 연세대 국제학 대학원 유영익 석좌교수


특별취재팀 = 배영대·원낙연·임장혁 기자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