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무릎 꿇어 앉히고 결박해 놓은 채 근접 사격했다

한부울 2008. 8. 25. 19:11

무릎 꿇어 앉히고 결박해 놓은 채 근접 사격했다

[오마이뉴스] 2008년 08월 11일(월) 오후 04:48

 

                                             ▲ 외공리에서 나온 유골.  ⓒ 통일선봉대 

 

                                           ▲ 외공리에서 나온 유골.  ⓒ 통일선봉대 


한국전쟁 당시 집단 학살된 지리산 외공리 소정골에서 유골이 대량으로 나왔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에서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경남대 박물관 발굴팀(팀장 이상길 교수)은 대량의 유골이 나왔다고 11일 밝혔다.


경남대 박물관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아래 진실화해위)로부터 의뢰받아 지난 7월 20일부터 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다. 경남대 박물관은 2000년 발굴해 재매장한 1기를 포함해 총 6기의 대형 무덤을 발굴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5기의 무덤 가운데, 2기에서는 유골이 나왔지만, 3기에서는 유골이 나오지 않았다. 또 추가로 1기의 대형 무덤을 발견해 발굴했다.

 

                                           ▲ 외공리에서 나온 유골. ⓒ 통일선봉대 

 

외공리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서봉석 실행위원장은 "당시 사람들의 증언 등에 의해 대형 무덤 6기가 있는 줄 알고 발굴 작업을 벌였는데 위치 등에 있어 다소 변동이 있다"면서 "2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위치에서 조금 벗어나 있을 가능성이 있어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새로 발굴한 3기의 무덤에서는 유골이 대량으로 나와 수습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상길 교수는 "발굴과 유골 수습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면서 "조만간 발굴된 상태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어 현장 설명회를 열 계획이다"고 말했다.


서봉석 실행위원장은 "1기의 무덤에서 나온 유골의 형태를 볼 때 무릎을 꿇어앉힌 상태에서 결박해 놓고 총으로 근접 사격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아직까지는 희생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만한 결정적인 단서를 나오지 않았고, 유골과 검정색 옷, 단추, 탄피 등이 나왔다"고 소개했다.

 

 

                                            ▲ 외공리에서 나온 유골. ⓒ 통일선봉대 


발굴팀은 2000년 '외공리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에서 발굴해 재매장했던 무덤을 발굴해 유골을 수습하고 있다. 서봉석 실행위원장은 "2000년에 발굴할 때는 발굴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굴삭기 등을 동원해 발굴하다보니 유골이 일부 훼손되었다"면서 "유골을 담을 용기를 마련해 이번에 같이 수습하게 된다"고 밝혔다.


한편 민주노총 경남본부 조합원으로 구성된 통일선봉대는 지난 10일 이곳을 찾아 관계자들로부터 설명을 듣기도 했다. '외공리 사건'은 1951년 2~3월 사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트럭 3대에 분승한 군인들이 11대의 버스에 타고 온 민간인들을 총살한 사건을 말한다.


지금까지는 이곳에서 집단으로 학살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왜 이들이 여기까지 와서 학살을 당했는지에 대해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번 발굴을 통해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지리산 외공리 소정골에서 한국전쟁 당시 집단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이 나왔다. ⓒ 통일선봉대 

 

 

                                          ▲ 외공리에서 나온 유골. ⓒ 통일선봉대 

 

                                            ▲ 외공리에서 나온 유골. ⓒ 통일선봉대 

 

                                           ▲ 외공리에서 나온 유골. ⓒ 통일선봉대 

 

                               ▲ 외공리에서 유골과 함께 검정색 옷이 나왔다. ⓒ 통일선봉대 

 

▲ 경남대 발물관 발굴팀은 2000년 민간단체에 의해 발굴된 외공리 대형 무덤 1기를 다시 발굴해 유골을 수습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 통일선봉대 

 

        ▲ 2000년 발굴해 재 매장했던 외공리의 무덤 1기에 묻혀 있는 유골의 모습. ⓒ 통일선봉대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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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 한 사람 머리를 쏘아가며 학살

[오마이뉴스] 2008년 08월 25일(월) 오후 03:37


'지리산 외공리' 경남대 박물관 발굴팀 중간보고... 무덤 5기, 유해 227구 발견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민간인 학살지에서는 두개골을 포함해 상당수 유골이 나왔다. ⓒ 윤성효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에서 유해와 유품이 숱하게 나왔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발굴작업을 의뢰받은 경남대 박물관(발굴팀장 이상길)은 25일 오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골에서 발굴조사 중간보고회를 열었다. 이곳에는 모두 6기의 대형 무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발굴팀은 지난 7월 18일부터 발굴에 착수했다.


발굴팀은 2000년에 발굴해 재매장했던 무덤에다, 4기의 무덤을 새로 발굴해 총 5기의 무덤을 발굴했다. 1기의 무덤은 아직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유해는 총 5기의 무덤에서 227구가 나왔다. 2000년 발굴했던 무덤에는 총 142구의 유해가 나오고, 나머지 4기에서는 16구와 25구, 23구, 11구가 나왔다.


새로 발굴한 4기 무덤 속 유해는 대부분 고꾸라졌고, 몇몇은 옆으로 쓰러졌다. 구덩이를 판 뒤 손이 뒤로 묶였고, 차례대로 구덩이 안에 들어가 꿇어 앉혀졌으며, 손을 묶은 끈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칡넝쿨과 같은 것을 현지에서 조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유해의 배치는 매우 정연한데, 허리가 꺾여 반으로 접혀진 상태다. 긴 구덩이를 따라 2열로 매장되어 있었는데, 경사면이 낮은 쪽이 먼저, 높은 쪽이 나중이었다. 노출상태로 보아 당시에 모두 손이 뒤로 묶인 채 구덩이에 꿇어앉은 상태에서 총을 맞아 앞으로 쓰러진 것으로 보인다.


이상길 교수는 "구덩이에 사람을 넣은 채로 한 두 지점에서 지속적으로 사살을 가한 것으로 보이며, 탄피와 매장자의 수가 비슷하다는 게 하나의 특징이다"라고 설명했다.

 

      ▲ 경남대 발굴관팀이 이번에 새로 발굴한 한 대형 무덤에서 유골이 사당수 나왔다. ⓒ 윤성효

 

유품도 상당수가 나왔다. 군용 탄피 82개, 탄두 26개, 옷 19개, 단추 276개, 허리띠 7개, 고무줄 22개, 지퍼 5개, 신발 8개, 숟가락 8개, 빗 2개, 구두주걱 2개, 잔(그릇) 2개, 유리조각 5개, 동전(일본화폐) 1개, 깡통 3개, 멜빵고리 1개 등이다.


군용품은 탄피와 탄두가 출토되었는데, 모두 카빈소총용 실탄이다. 이상길 교수는 "일반적으로 민간인 학살지역에서 M1, 카빈 등 여러 종류의 소총 탄피가 발견되는 것과는 다른 현상으로, 이곳에 왔던 군인들이 일률적으로 카빈소총을 소지한 매우 정제된 부대였음을 보여주는 단서"라고 말했다.


단추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仁商'(인상)과 '京農'(경농), '金中'(금중)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인상은 현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상업학교이며, 경농은 서울시립대학교의 전신인 경성농업학교이고, 금중은 무슨 학교인지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


버클에는 태극마크가 그려진 수상비행기가 양각되어 있고, 그 우측 하단에는 'Korea Haebang'(코리아 해방)이 새겨져 있다. 이에 대해 이상길 교수는 "해방을 영어로 표기한 점과 태극마크 등으로 보아 외국인이거나 인민군이 아닌, 남한 사람의 소지품임이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비녀는 은제 비녀로 정교한 꽃문양이 조각되어 있어 평범해 보이지는 않고, 지퍼는 여러 종류가 출토되었고, 고무줄은 골반에 걸쳐져 있었는데 바지용이 분명해 보인다.

 

▲ 이상길 경남대 교수가 지리산 외공리 민간인 학살지에서 나온 유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윤성효 

 

피해자의 성격에 대해, 이상길 교수는 "현재까지 피해자의 신원을 알 수 있거나, 적어도 이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를 확인할 만한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단추에 새겨진 글자는 학교와 관련이 있지만, 교복 그 자체는 아닐 수 있으므로 신분이 학생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가해자의 성격에 대해, 이 교수는 "가해자에 대한 몇몇 증언이나 보도가 있었지만 사실관계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며 "발굴 내용으로 보면 권총 외에 모두 카빈 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정규군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외공리 민간인 학살사건은 학살과정 전체가 매우 은밀하게 이루어진 게 하나의 특징이다. 이상길 교수는 "한 사람씩 머리에 총을 쏘아 절명시킴으로써 아무도 살아 돌아간 사람이 없었다는 점도 다른 학살사건과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이상길 교수는 "당초 외공리를 지나 올라갔다가 차를 돌려 다시 내려왔다는 증언으로 볼 때, 현지 사정에 어두운 그들이 은밀한 장소를 물색하고자 하는 행보였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경찰을 포함한 현지인을 전혀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 학살사건을 외부에 전혀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발굴작업은 앞으로 계속된다. 현재 드러난 유골 아래에도 유골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외공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에서 유골이 많이 나왔다. ⓒ 윤성효 

 

               ▲ 지리산 외공리 민간인 학살지에서 나온 유해가 수북히 쌓여 있다. ⓒ 윤성효 

 

                       ▲ 지리산 외공리 민간인 학살지에서는 많은 유해가 나왔다. ⓒ 윤성효 

 

                             ▲ 지리산 외공리 민간인 학살지에서 나온 탄피. ⓒ 윤성효 

 

▲ 외공리 민간인 학살지에서는 태극 문양과 '코리아 해방'이라는 영문이 새겨진 버클이 나왔다. ⓒ 윤성효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에서 나온 은비녀. ⓒ 윤성효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