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고려, 조선시대 대마도 정벌

한부울 2008. 7. 13. 22:46
 

고려, 대마도를 정벌하다


1. 고려, 왜구의 침탈을 받다


대마도對馬島 정벌은 조선이 처음 한 것이 아니다. 고려 말에 이미 원정이 있었다.

물론 왜구의 침입 때문에 일어난 원정이었다. 왜구에 대한 첫 기록은 고려사 고종10년(1223) 5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갑자(甲子)에 왜(倭)가 금주(金州)에 침구(侵寇)하였다.


금주는 김해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마도와 가까운 이곳이 첫 침입지로 기록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마도는 땅이 척박해서 그곳의 물산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고, 그 때문에 해적질에 나섰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후 왜구의 침입에 대해서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종 13년(1226) 1월 : 왜(倭)가 경상도(慶尙道) 연해 주군(沿海州郡)에 침구(侵寇)하므로 거제 현령(巨濟縣令) 진용갑(陳龍甲)이 주수(舟帥=수군)로 사도(沙島)에서 싸워 2급(級)을 참살(斬殺)하니, 적(賊)이 밤에 도망하였다.


고종 14년(1227) 4월 : 갑오(甲午)에 현성사(賢聖寺)에 행차하였다. 왜(倭)가 금주(金州)를 침구(侵寇)하므로 방호 별감(防護別監) 노단(盧旦)이 군사를 발(發)하여 적선(賊船) 2척을 포착(捕捉)하고, 30여 급(級)을 베고 또 노획한 병장(兵仗)을 바쳤다.


고종 14년(1227) 5월 : 경술(庚戌)에 왜(倭)가 웅신현(熊神縣=김해 안의 현))에 침구(侵寇)하므로 별장(別將) 정금억(鄭金億) 등이 산간(山間)에 잠복(潛伏)하였다가 뛰어나와 7급(級)을 참살(斬殺)하니, 적(賊)이 도망하였다.


원종 4년(1263) 2월 : 계유(癸酉)에 왜(倭)가 금주(金州) 관내(管內)의 웅신현(熊神縣) 물도(勿島)에 침구(侵寇)하여 여러 주현(州縣)의 공선(貢船)을 약탈(掠奪)하였다.


이렇게 초기 왜구는 대체로 김해 지방에만 출몰했다. 1231년부터 몽골군과 싸우고 있던 고려(살리타이의 침공)는 왜구에 대해서 수동적인 방어 이상의 조치를 취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기록상 고종 대의 왜구 침입 기사 이후 고려가 몽골에 항복한 1259년까지 사이에는 왜구에 대한 내용이 없는데, 이것은 그들이 침입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저 거기까지 고려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사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원종 즉위년(1259) 7월 : 경오(庚午)에 감문위 녹사(監門衛錄事) 한경윤(韓景胤)과 권지 직 사관(權知直史館) 홍저(洪貯)를 일본에 보내어 해적(海賊)을 금(禁)하도록 청하였다.


사신을 보내 해적을 금하게 해달라고 한 것은 그 전에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기록에 없을 뿐이다. 고려는 고종14년의 왜구 침입 때도 일본 조정에 해결을 요청했고, 일본 측은 해적 토벌에 앞장선 전례가 있었다.


이들 왜구의 본거지가 대마도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 조정의 요청으로 일본은 왜구 토벌에 나섰는데 그 결과에 나타나는 곳이 바로 대마도다.


원종 4년(1263) 8월 : 무신(戊申) 삭(朔)에 홍저(洪泞)·곽왕부(郭王府)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해적(海賊)을 궁추(窮推)하니 이것이 곧 대마도(對馬島)의 왜(倭)인지라. 미곡(米穀) 20석(石)과 마맥(馬麥) 30석(石)과 우피(牛皮) 70령(領)을 징수(徵收)하여 왔나이다.”

라고 하였다.


원종 10년(1269) 3월 : 신유(辛酉)에 흑적(黑的)과 신사전(申思佺) 등이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러 왜인(倭人) 2명을 잡아 돌아왔다.


이렇게 김해 지방에만 출몰하던 왜구는 점차 영역을 넓혔다. (원종 1년(1260)에 왜를 대비하여 제주에 방호사를 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역시 고려가 몽골과 싸우던 중에는 왜구에 신경쓸 수 없었다는 방증이 될 것이다.)


원종 6년(1265) 7월 : 정미(丁未) 삭(朔)에 왜(倭)가 남도(南道)의 연해주군(沿海州郡)에 침구하거늘 장군 안홍민(安洪敏) 등에게 명하여 삼별초 군(三別抄軍)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고려는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274년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다.


2. 고려의 1차 대마도 정벌


원종 15년(1274)에 고려는 원(1271년 몽골은 원으로 국명을 고쳤다)에 의해서 일본 정벌에 동원된다.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게 대선 300척을 포함하여 총 900척의 전선을 만들게 한다.


기술자 3만 5백명을 동원해서 급히 배를 만들라고 재촉한 까닭에 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고려는 원의 감독 홍다구洪茶丘를 달래서 절반은 농사를 짓게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 배들은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고려 식으로 만들어졌는데, 1월 보름에 시작하여 5월 그믐에 모두 만들어냈다. 실로 엄청난 공사였을 것이다.


이 일로 노심초사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종은 6월에 자리에 눕더니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세자는 원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는 국왕이 없는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그러나 원의 출정 명령은 시급해서 7월 김방경金方慶은 선발대로 출발해야 했다. 원은 일본정토 도원수日本征討都元帥 홀돈忽敦, 동정 부원수東征副元帥에 홍다구洪茶丘, 좌부원수左副元帥에 유복형劉復亨을 임명했다.


일본 원정군은 합포合浦(마산)에서 출발했다. 그 규모는 다음과 같았다.


몽한군蒙漢軍(몽골과 한인 연합군) 2만 5천.

고려군 8천.

초공(梢工 키잡이), 인해(뱃길잡이), 수수(水手 뱃사공) 6천7백.

총 3만9천7백 명에 전함 9백척.


고려군의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삼익군(三翼軍)

도독사(都督使) - 김방경(金方慶) : 중군 통솔

              지병마사(知兵馬事) - 박지량(朴之亮) 김흔(金忻=金綬)

              부사(副使) - 임개(任愷)

좌군사(左軍事) - 김신(金侁)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지병마사(知兵馬事) - 위득유(韋得儒)

              부사(副使) -  손세정(孫世貞)

우군사(右軍使) - 김문비(金文庇) 상장군(上將軍)

              지병마사(知兵馬事) - 나유(羅裕), 박보(朴保)

              부사(副使) -  반부(潘阜)


여기에 본래 여진군도 포함될 예정이었으나 여진군이 기일에 대지 못한 관계로 바로 출발하였다. 이들의 일차 목표는 당연히 대마도였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에는 이 상황이 매우 간단하게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진군(女眞軍)을 기다리니 여진군(女眞軍)이 기일(期日)에 늦을까 하여 이에 발선(發船)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서 쳐서 죽임이 심히 많았다.


그동안 왜구에게 쌓인 원한이 꽤나 깊었을 것이고 당연히 대마도 초토화로 보복했을 것이다. 의외로 대마도 정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전투ㅡ 즉 여몽원정군의 대마도 정벌을 이야기하지 않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일본 측도 대마도 정벌로 여몽원정군의 위세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들은 일기도一岐島에서 설욕전을 노렸다. 이 일기도 전투를 보면 대마도 전투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으므로 이 전투를 조금 자세히 보자.


일본군은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여몽원정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봉에 선 것은 고려군이다. 선봉에 나선 장수는 박지량朴之亮과 김방경의 사위인 조변趙抃이었다. 왜군은 일패도지한 후 항복을 청하다가 불시에 기습을 꾀했다. 그러나 홍다구가 박지량과 조변과 더불어 왜군을 몰아쳐 천여 명을 격살했다.


여몽원정군은 일기도를 휩쓴 뒤에 일본에 도착했다. 구주(九州 큐슈) 박다만(博多灣 하카다만) 삼랑포三郞浦에 상륙했다. 당시 일본군은 대포도 본 적이 없어 포성이 울리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여몽원정군은 상대가 되지 않는 일본군을 여지없이 격파했다. 그러나 일본군도 손을 놓고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김방경의 중군을 노리고 좌우협공을 가했다. 김방경의 중군을 노렸다는 이야기는 이 전투에도 선봉을 고려군이 맡았다는 증거라 하겠다.


일본군의 돌격이 살벌했지만 김방경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김방경은 효시(소리가 나는 화살로 군사 지휘용으로 사용함)를 쏘아 올려 장수들을 부르는 한편 크게 고함을 내지르니, 왜병은 놀라 달아나고 말았다.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新奕 등이 왜군을 파죽지세로 수수깡 넘어뜨리듯이 쓸어버리니 몽골 도원수 홀돈도 "몽골인이 싸움에 익숙하다 하지만 고려군에 비할 바가 아니로다."라고 감탄하고 말았다. 해가 진후에야 전투가 끝났다.


김방경은 승세를 몰아 계속 싸우기를 원했지만 홀돈은 좌부원수 유복형이 유시에 맞아 다친 것을 핑계로 무리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하며 배로 돌아갔다. 그날 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통에 전함이 암벽에 부딪쳐 상당수가 파손되었다. 고려군 좌군사 김신도 배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다.


11월 여몽원정군은 합포로 귀환했다. 3만9천700 명 중 1만3천5백여 명이 수중고혼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전투를 문영지역(文永之役 분에이노에키)이라고 부른다.


여몽원정군은 충렬왕 7년(1281)에 다시 한 번 출동한다. 김방경은 3월에 합포에 도착하였고, 4월에는 충렬왕이 직접 합포로 행차하였다. 5월 1일에 다시 원정군이 떠났다. 이달 26일에 일기도를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조정에 들어왔다. 이것은 대마도를 정벌하고 일기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때 대마도는 재차 정복되었던 것이다.


본 주제와는 관계없지만 잠깐 이때 여몽원정군이 어찌 되었나를 간략히 적어보자.


일본은 적들이 또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이들은 선공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원은 사신을 보내 항복을 재차 권했으나 일본은 사신을 참수해 결전의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코케닌(御家人)이라 불리는 영주들을 동원해 방비에 나섰다. 이들은 배가 상륙하기 힘들게 방루防壘를 쌓았다.


여몽원정군은 5월 26일 일기도에 상륙했다. 일기도의 지휘관 소이자시(少貳資時 쇼니 쓰케토키)는 19세의 나이로 항전 끝에 사살되었다. 일본 측 기록을 따르면 적군은 부녀자를 강간하고 손에 구멍을 뚫어 밧줄로 묶어 끌고 다니는가 하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문제는 일본에 도착한 날짜가 너무 일렀다는 점이었다. 6월 15일에 합류하기로 한 강남군(중국 강남에서 출발하여 오기로 한 10만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은 이미 6월 6일에 박다만(博多灣 하카다만)에 도착해 버렸다. 첫 전투가 벌어져 김방경의 고려군은 3백여 급의 수급을 얻었으나, 홍다구는 대패하고 말았다. 일본측 기록에는 천여 명을 죽인 것으로 나오며, 고려 측 기록을 보아도 진중에 역병이 돌아 3천여 명이 죽었다고 나온다. (전쟁에서 진중 역병이란 전사자의 다른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강남군은 예정보다 보름 늦은 7월 초에야 일본에 도착했다. 강남군과 합류한 여몽원정군은 상륙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그러나 상륙작전을 펼치기로 한 7월 30일 태풍이 불어닥쳤다. 수많은 배가 침몰했다. 고려배 일부만이 돌아올 수 있었다. 이 태풍으로 고려군도 7천여 명이 익사했다. 원과 강남군 역시 대부분 수장되고 말았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홍안지역(弘安之役 고안노에키)이라고 한다. 일본 땅에 상륙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일부는 노예가 되기도 했었다.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충렬왕 8년(1282) 12월 : 병신(丙申)에 상장군(上將軍) 인후(印侯)를 원나라에 보냈다. 동정(東征) 때에 봉성(峯城 파주(坡州))땅의 백성들이 왜(倭)에 몰입(沒入)되었다가 도망하여 원나라의 명주(明州)에 이르렀더니 황제가 이름을「갱생(更生)」이라 하사하고 백호(百戶 벼슬)를 주어 돌려보냈다.


이 뒤에도 일본 정벌은 꾸준히 추진되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왜구에 대한 기록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충렬왕 16년(1290) 1월 : 정미(丁未)에 대장군(大將軍) 원경(元卿)을 원나라에 보내 일본이 변방(邊方)을 침범한 것을 아뢰었다.


이 뒤 한동안 왜구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약간 애매한 기록이나 충렬왕 28년(1302)에 원이 요양성과 고려를 하나로 합한 뒤 수도를 요양으로 옮기고자 할 때, 고려는 일본을 방비하기 위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한다. 이때, 일본해적을 잡아서 바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아직 왜구가 출몰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튼 충렬왕 시기에는 왜구는 거의 보이지 않는데 아무래도 이것은 대마도가 일본 원정으로 정벌되었던 여파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구에 대한 기록은 한세대 후인 충숙왕 때 다시 등장한다.


충숙왕 10년(1323) 7월 경자(庚子)에 내부 부령(內府副令) 송기(宋頎)를 전라도(全羅道)에 보내니 왜(倭)과 싸워 100여 급(級)을 참(斬)하였다.


3. 고려, 왜구에 거덜나다


충숙왕 10년(1323)에 있은 왜구의 전라도 침공에 이어 충혜왕 후즉위년(1339)에도 그들의 변란을 걱정하는 상주가 있었다. 공민왕 즉위년(1351) 11월에 왜구는 남해현에 침입했다. 그후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 된다. 고려는 1350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우왕 3년(1377) 6월에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알 수 있다.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안길상(安吉祥)을 일본에 보내어 해적(海賊)을 금지할 것을 청하니 글에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당신 나라와 더불어 이웃이 되어 비록 큰 바다를 끼고 있으나 혹 때로 통호(通好)하였는데 경인년(庚寅年 1350)으로부터 해적(海賊)이 처음으로 일어나 우리 도민(島民)을 어지럽게 하여 각기 손상됨이 있으니 매우 안타깝도다. 이로 인하여 병오년(丙午年1366=공민왕 15년)에 만호(萬戶) 김룡(金龍) 등을 보내어 이 일을 보고하여 곧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금지하겠다는 약속을 얻어 조금 편안한 휴식을 얻었다. 근래에 갑인년(甲寅年 1374=우왕 즉위년)으로부터 그 도적(盜賊)이 또 방자하게 창궐하므로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나흥유(羅興儒)를 보내어 자문(咨文)을 가지고 온 당신 나라의 답신에 의하면 말하기를 이 도적(盜賊)은 우리 서해(西海)의 일로(一路)인 구주(九州)의 난신(亂臣)이 서도(西島)에 할거(割據)하여 무지하게도 구적(寇賊)이 됨에 원인이 있는 것이며 사실은 우리의 행한 것이 아니므로 곧 금지하겠다는 약속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니 이로 자세히 알게 되었거니와 백성을 다스리고 도적(盜賊)을 금지하는 것은 나라의 상전(常典)이니 앞에서 말한 해적(海賊)도 다만 금약(禁約)만을 좇지 아니할 수 없으니 두 나라의 우호(友好)와 바닷길의 안정이 귀국(貴國)의 처리 여하(如何)에 있다.”


확실히 왜구는 공민왕 대에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중앙 조정의 인식을 말하는 것이고, 그 이전에 왜구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공민왕 대에 이르러 왜구는 경상, 전라 연해를 벗어나 강화도, 강릉까지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침입은 고려의 조운선을 노리는 것도 많아서 고려는 왜구 때문에 조세를 제대로 거둘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공민왕 3년(1354) 4월 왜(倭)가 전라도(全羅道)의 조선(漕船) 40여 척을 노략하였다.

공민왕 6년(1357) 9월 녹봉(祿俸)을 지급하는데 때에 왜(倭)로 말미암아 조운(漕運)이 통하지 아니하므로 9품의 녹과(祿科)를 지급하지 아니하였다.


왜구의 침탈 때문에 조운창을 옮기기도 했다.


공민왕 7년(1358) 4월 정유(丁酉)에 왜(倭)가 한주(韓州 한산(韓山)) 및 진성창(鎭城倉)에 침구(侵寇)하니 전라도(全羅道) 진변사(鎭邊使) 고용현(高用賢)이 연해(沿海)의 창고를 내지(內地)에 옮기기를 청하거늘 이를 청종(聽從)하였다.


왜구는 식량뿐만 아니라 배도 약탈했다.


공민왕 4년(1355) 4월 신사(辛巳)에 왜(倭)가 전라도(全羅道)의 조선(漕船) 200여 척을 약탈하였다.


왜구는 연해뿐만 아니라 점차 내륙으로까지 침입하기 시작했다.


공민왕 7년(1358) 8월 기묘(己卯)에 왜(倭)가 화지량(花之梁 수원)을 불태웠다.


공민왕 13년(1364) 3월에는 왜구가 불과 한 달 동안 다섯 군데를 약탈하기까지 했다. 공민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공민왕 15년에 일본에 검교 중랑장(檢校中郞將) 김일(金逸)을 보내 왜구 근절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결과 공민왕 17년(1368) 1월에 일본은 승려 범탕, 범류를 보내왔으며 7월에는 일본 사신과 대마도의 도주 종경(宗慶 조케이)의 사신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기도 했다. 공민왕도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보내 화친을 도모했다. 그해 11월에는 대마도에 쌀 1천석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거제도에 왜인들이 거주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왜구를 근절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공민왕 18년(1369) 11월에 왜구는 대대적으로 침공을 재개했다. 천안, 예산, 당진의 조운선을 약탈한 것이다. 이때부터 왜구의 침입은 다시 활발하게 일어났다. 또한 공민왕 21년(1372) 부터는 그동안 침공하지 않았던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약탈을 시작했다. 왜구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불행한 선택이었는데, 이 약탈로 인 해 왜구의 악몽이라 불릴 이성계가 전선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공민왕 21년(1372) 6월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화령(함흥)부윤으로 삼아 왜구를 막게 했다.


왜구는 공민왕 대에 115회, 우왕 대에 278회 침입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고려는 왜구에 의해 거덜나고 있었던 것이다. 왜구가 이렇게 설치고 일본 막부가 이들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것은 일본 내부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1336년부터 1392년(이 해는 조선이 건국된 해이기도 하다)까지 일본은 남북조로 나뉘어 내전이 진행 중이었다. 천황도 둘로 나뉘어졌다. 이런 상황이어서 정상적으로 경제가 돌아가지 않았고, 물론 정치적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신흥국가 명도 왜구 때문에 골치가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명은 일본 실정막부室町幕府(무로막치 막부)의 3대 쇼군 족리의만足利義滿(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조공무역을 허용하였고, 막부는 이를 위해 왜구 단속에 나섰다. 이로써 왜구 토벌에 대한 실마리가 잡혀나가기 시작했다.


4. 이성계의 활약


우왕 3년(1377) 6월 일본에 왜구 근절을 요청했으나 일본 측은 그들을 잡기 어렵다는 회신을 보냈다. 다급한 고려는 9월에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 근절을 요청했다. 이때 사신으로 간 사람은 무려 정몽주鄭夢周! 고려가 이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쯤 되자 일본도 성의를 보여야 했을 것이다.


우왕 4년(1378) 6월 왜구가 청주를 침입했을 때, 일본은 원군 69명을 보내오기까지 했다. 생색내기에 불과한 숫자지만 일본으로서는 자신들과 왜구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했어야 했던 모양이다. 10월에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 근절을 요청했으며 우왕 5년(1379) 5월에도 일본에서 군사 약간 명이 건너왔던 것 같다. 일본 막부는 아무튼 성의를 보여 잡혀간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등의 일을 했지만 왜구의 침입은 그치지 않았다.


한편 이성계는 우왕 3년(1377) 5월 지리산에서, 8월에는 해주에서 왜구를 쓰러뜨렸으며 우왕 4년(1378) 4월에는 김포에서, 우왕 6년(1380) 9월에는 황산에서, 우왕 11년(1385) 9월에는 함흥에서 왜구를 물리쳤다.


이중 1380년의 싸움이 바로 그 유명한 황산대첩이다. 1380년 8월 왜구는 5백여 척의 배를 가지고 충청도 금강 어귀에 상륙했다. 이때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하여 적선을 모두 격침시켜버렸다. 돌아갈 배를 잃은 왜구는 내륙으로 들어가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는데, 그 피해가 극심했다. 이성계는 함양을 향해 집결하고 있던 왜구들과 황산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고 말 1,600 필을 노획했다. 조선 선조때 이 사실을 기려 황산대첩비를 세웠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부서졌다가 다시 세워지기도 했다.


이렇게 전국에서 활약을 하니 이성계의 위명이 천하에 떨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을 통해 이성계는 정권을 손에 넣게 된다.


5. 고려의 2차 대마도 정벌


그러나 국왕 즉위는 이성계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민수와 이색이 힘을 합해 창왕을 즉위시켰으며, 창왕 원년(1389) 2월에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박위朴葳가 대마도를 공격했다.


이미 대마도를 치자는 의견은 우왕 13년(1387)에 있었다. 정지鄭地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대마도와 일기도에 일본의 반민叛民이 웅거하고 있어 그들이 늘 침략해 오니 이곳을 쳐야 근본적인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정지는 전함을 건조해 왜구를 막았던 인물이라 배를 몰고 대마도를 정벌할 생각을 쉽게 했던 것 같다.)


박위는 전선 1백척을 동원하여 대마도를 들이쳤다. 김종연金宗衍, 최칠석崔七夕, 박자안朴子安 등이 종군했다. 정지상鄭之祥의 아들 정종鄭從도 군사 백여 명을 거느리고 참전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정지상 사후 홀로 지내다가 왜적들에게 참살되었던 복수를 위해서 종군했던 것이다.


박위는 정박해 있던 왜선 3백여 척을 불태웠고, 해안가에 있던 집들도 모두 불살랐다. 잡혀가 있던 본국인 남녀 백여 명을 찾아내 구출했다. 창왕은 크게 기뻐하여 "국가의 수치를 씻고 신민의 원수를 갚았다"라고 말하며 포상했다. 그러나 박위가 포로를 잡지 못한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실제로 박위의 원정은 충렬왕 때의 원정과 같은 효과가 없었다. 원정 이후에도 왜구의 침입은 계속 되었다. 박위는 위화도 회군 때 이성계와 뜻을 같이 해 개국공신이 되었으나, 왕자의 난 때 정안대군 이방원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이제 공은 조선이 이어받게 되었다. 태조 5년 조선의 첫 대마도 정벌이 있었으며 세종 원년에 두 번째 대마도 정벌이 있었다. 두 번째가 유명한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다.


그러나 박위의 정벌이 아무 효과도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런 일도 생겼기 때문이다.


창왕 1년(1389) 8월 : 처음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보고(報告)하기를,

“유구국왕(琉球國王)이 우리나라가 대마도(對馬島)를 토벌(討伐)한다는 말을 듣고 사신(使臣)을 보내어 순천부(順天府)에 이르렀다.”


또한 창왕이 기뻐했던 것처럼 늘 상 적의 침탈에 당하고 있다가 공세로 전환한 것 역시,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박위가 대마도 정벌을 했을 때 이방원의 나이는 스물 셋. 그는 30년 후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게 될 것을 그때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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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마도 정벌


대마도 정벌은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중국과 한국을 침략하던 일본인 해적인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한 사건이다. 역사적으로 제1차 대마도 정벌은 1389년 창왕 1년 박위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제2차 대마도 정벌은 1396년 조선 태조 5년에 있었다. 가장 유명한 제3차 대마도 정벌은 1419년 세종 1년에 이종무에 의한 정벌로, 조선에서는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오에이노가이코 라고도 한다.


1418년에 대마도는 흉년이 들고, 당시 대마도 도주인 사다시게가 죽고, 아들 사다모리가 뒤를 잇게 되는 사건이 있었으며, 식량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대거 명나라의 해안지방과 조선의 해안지방을 약탈하게 되었다. 조선은 이때 승계한 사다모리가 왜구를 선동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직접 대마도를 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때 기록을 보면, 중국으로부터 돌아오는 왜구를 중간에서 공격하는 방법과 대마도의 본거지를 치는 두 가지 방법을 논의한 것으로 나온다.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아직 군사에 관한 결정을 직접하고 있었다. 태종의 주도 아래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명하고, 우박, 이숙묘, 황상을 중군 절제사, 유습을 좌군 도절제사, 박초와 박실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와 이순몽을 우군절제사로 삼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에 있는 병선 227척과 병사 1만7천 명을 거느리고 음력 4월에 출병하도록 명하였다.


1419년 6월 19일 주원방포를 출발하여 20일에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이종무는 도주 사다모리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를 수색하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000여 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131명의 명나라 포로들을 찾아내었다.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대마도 도주가 물러갈 것을 애원하여 7월 3일에 거제도로 철군하였다.


이 원정은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인명 희생이 따랐으며 분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원정대가 돌아온 후 다음 원정을 논의하였으나 사정상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정 이후 대마도 도주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 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고,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이 정벌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통상을 허락하여 일본인들로 하여금 평화적으로 무역과 내왕을 하도록하는 정책을 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대 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 도주 사다모리는 항복을 하고 신하로서 조공관계를 이루었으며 이후에는 조선에 복속되기를 청하였다. 조선은 이전에도 대마도를 신라시대 이후 국토로 보았으며 이때 대마도를 경상도의 관할 아래 두고 직접 서울에 보고하지 말고 경상도찰사를 통하여 보고하게끔 하였다.


광복 이후 1949년 1월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1] 또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 작성 과정에서 1951년 4월 27일 미국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요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였다


[제1차 정벌〕


이 때 동원된 군대의 규모·장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전함이 1백척 이상 되었던 것으로 보아, 1만 정도의 군대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박위는 대마도에 도착해 왜선 3백여 척과 가까운 언덕에 있는 관사와 민가를 다 불태웠다.


또, 원수 김종연(金宗衍)·최칠석(崔七夕)·박자안(朴子安) 등과 함께 공격을 감행, 고려인 남녀 1백여 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 정벌에 대한 기사는 너무 간략해 자세한 내용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전과가 컸던 것으로 보아 왜국의 피해도 매우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이들의 개선은 왜국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이에 창왕도 그의 공을 찬양하고 큰 상을 내렸으며, 그 뒤 공양왕 때 왜구가 많이 줄어들고 유구국(琉球國)에서 사신을 보내온 것도 모두 대마도 정벌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정벌〕


조선의 대마도정벌은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에 있었다. 태조는 향화왜인(向化倭人)과 사절의 내왕을 환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왜국에 대한 소탕과 변경의 방어를 엄중히 하였다. 그러나 사절·향화왜인·흥리왜인의 내왕이 빈번해진 반면, 침입도 1393년부터 1397년까지 모두 53회나 되었다.


정벌의 발단은 특히, 1396년 8월 9일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는 120척으로 동래·기장·동평성을 함락, 병선 16척을 탈취하고 수군만호를 살해하였다. 또, 같은 달 18일 통양포에, 23일 영해성을 침략했으며, 11월에도 5회나 침입하는 등 이 해에만도 13회나 침입함으로써 이에 대한 강력한 응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태조는 12월 3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을 5도병마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에 임명하고, 남재(南在)를 도병마사, 신극공(辛克恭)을 병마사, 이무(李茂)를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 이키도(壹岐島)와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 때 동원된 5도 병선의 수와 군대의 규모나 정벌의 결과 등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한편 많은 왜구들이 투항하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던 점을 주목해 실행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김사형이 1월 30일에 돌아올 때까지 약 2개월간의 사정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1419년 이종무(李從茂)의 대마도정벌이 주원방포(周原防浦)를 출발해 거제도로 귀환할 때까지 14일 걸린 것을 미루어보면 김사형이 그 동안에 대마도를 정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김사형이 귀환할 때 태조가 친히 흥인문 밖까지 나가 노고를 치하했고, 서대(犀帶)를 하사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 때의 정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정벌은 반드시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으나 조선 최초의 대마도정벌이었다는 데 의의가 크다.


[제3차 정벌〕


왜구를 근절시키고 이들을 평화적 내왕자로 만든 것은 1419년의 기해동정(일본에서는 應永의 外寇라 함.)이었다. 1398년 1월 대마도의 사절이 조하(朝賀)에 참예한 이후 거의 매년 와서 예물을 바치고, 대가로 쌀과 콩을 받아 갔다.


이들 사절은 도주 소(宗貞茂)와 그 아들 및 도내의 각포만호(各浦萬戶)가 보낸 자들이었다. 이에 따라 상인들도 급증해 항구에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자 여러 가지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부산포(釜山浦)와 내이포(乃而浦)에 한해 출입하도록 하고, 그것도 행장(行狀 : 통항증명서로 文引 또는 路引이라고도 함.)을 소지한 선박에 한해 기항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는 많은 왜인이 거주하였고, 그들 가운데에는 풍기를 문란하게 하거나, 국가의 허실을 살피는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1418년(태종 18) 3월 경상도의 염포(鹽浦 : 지금의 울산광역시 동면)와 가배량(加背梁 :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시)에 왜관을 설치하고 왜인을 분치시켰다.


이렇게 왜인에게 편의를 제공했으나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태종대에는 작은 규모였지만 60여 회나 되었다. 그러나 대마도주 소는 조선의 요구에 응해 흥리왜선을 통제하고, 왜구를 금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에 정벌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소가 죽은 후 아들 소(宗貞盛, 都都熊丸)가 아버지의 직을 이었으나, 도내의 실권은 산미(三味多羅 : 대마도 만호 혹은 早田萬戶라 함.)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번 조선과 통교한 적도 있지만, 왜구의 두목으로 동족과 함께 도내에 일대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근이 들어 생활이 궁핍해지자, 대마도의 왜적이 명나라에 약탈하러 가는 도중 조선의 연안을 약탈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기해동정이 결행되었다. 태종은 재위 18년 만에 세종에게 양위하고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군무(軍務)만은 계속하고 있었으며, 기해동정도 태종에 의해 시행된 것이었다.


동정의 직접적인 원인은 1419년 5월 5일 왜선 39척이 명나라에 가던 도중 비인현(庇仁縣) 도두음곶(都豆音串 : 충청남도 서천군 동면 도둔리)을 침탈한 때문이었다. 이 싸움에서 병선 7척을 잃었고, 도두음곶 만호 김성길(金成吉)와 그의 아들, 아군의 태반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같은 달 12일 왜선 7척이 해주를 침입, 약탈했고, 13일 황해도조전절제사 이사검(李思儉) 등이 병선 5척으로 왜구를 토벌하러 갔다가 해주 연평곶(延平串)에서 적선 38척에 포위되어 식량을 요구받는 등 대규모의 왜구가 연안을 침입하였다. 이에 태종은 14일 대신회의를 열고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해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禹博)·이숙무(李叔畝)·황상(黃象)을 중군절제사로, 유습(柳濕)을 좌군도절제사로, 박초(朴礎)·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로, 김을화(金乙和)·이순몽(李順蒙)을 우군절제사로 삼아 경상·전라·충청의 3도 병선 2백척과 기선군정(騎船軍丁)을 거느려 왜구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6월 8일 각 도 병선을 견내량(見乃梁)에 모이도록 하는 한편,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3군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이를 총감독하게 하였다. 또, 정벌에 앞서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에 대한 조처를 취하였다.


즉, 대마도주의 사신을 함길도(咸吉道)로 보내고, 흉악한 왜인 21명의 목을 베었으며, 경상도에 거주하던 왜인 591명을 경상도에 355명, 충청도에 203명, 강원도에 33명을 분치시켰다. 이 때 죽은 자와 자살한 자가 136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준비를 마친 다음 이종무는 9절제사를 거느리고 정벌길에 올랐다. 그 때 동원된 병선은 모두 227척이며, 군사는 1만 7285인으로 65일간의 식량을 준비하였다. 정벌군은 6월 19일 주원방포를 출발, 20일에 먼저 10여 척이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이에 이종무는 지문(池門·望沙門 : 태조 때 항복해 귀화한 자)을 시켜 도주 소에게 글을 보내어 항복을 권했으나 대답이 없자. 정벌군은 길을 나누어 수색하였다. 그 결과 적병 114명을 참수, 21명을 포로로 했으며, 1,939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또한, 129척의 선박을 노획해 쓸만한 것 20척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태워버렸으며, 131명의 중국인을 찾아내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또, 이종무는 적이 내왕하는 중요지점에 책(柵)을 세워 오래 머무를 뜻을 보여주고, 29일 두지포(豆知浦)를 수색해 가옥 68호와 선박 1척을 태우고, 적병 9명을 참하고 중국인 15명과 본국인 8명을 찾아내었다.


한편, 이로군(尼老郡)에서 좌우군을 이끌고 수색하던 좌군절제사 박실이 복병을 만나 편장 박홍신(朴弘信)·김해(金該) 등 장수와 군사 백수십인이 전사하였다. 일본사료 ≪조선통교대기 朝鮮通交大紀≫에는 이 때 아군 1,500인을 죽이고, 배를 불살랐다고 하나, 과장된 말이라 하겠다.


이러한 박실의 패전이 있은 데다가 대마도주 소는 아군이 오래 머무를까 두려워서 퇴사(退師)해 수호하기를 애원하므로 7월 3일 거제도로 철군하였다. 동정(東征) 이후 대규모의 왜구가 없어지고, 평화적 내왕자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죄는 묻고, 약탈행위를 방지하고자 한 정벌의 본래 목적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기해동정은 왜구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능동적으로 변한 것을 의미하며, 또 강력한 무력시위로 왜인들에게 적지 않은 위협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3일 왜구가 재침하므로 다시 정벌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중지하였다.


대마도주는 1420년 정월 지오(時應界都)를 보내어 항복의 뜻을 전해왔다가 뒤에 번복하자, 같은 해 11월 항복하지 않으면 다시 정벌하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성심껏 귀순하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또한 1421년 4월 대마도주가 통상을 허락해 주도록 애원하자, 왜구를 평화적 내왕자로 바꾸기 위한 정책으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기해동정은 왜구를 종식시킨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동정 후 즉시 왜구가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계기로 대마도를 비롯한 서부 일본 각지의 도둑들이 차차 평화적 내왕자(商倭·客倭)로 변하게 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3차에 걸친 대마도 정벌은 수십년간 계속되던 국가의 근심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대일외교사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海東諸國記, 東史綱目, 東國通鑑,

萬機要覽-軍政篇- 朝鮮前期 對日交涉史硏究(李鉉淙, 韓國硏究院, 1964)

韓國水軍史硏究(崔碩男, 鳴洋社, 1964) 韓國軍制史-朝鮮前期篇-(陸軍本部, 1968)

高麗末期의 對日關係(申基碩, 社會科學 1, 1957)

여말선초의 왜구와 그 대책(申奭鎬, 국사상의 제문제 3, 1959)

朝鮮前期의 對日貿易性格(金柄夏, 亞細亞硏究, 9-4, 1968)

高麗末期의 倭寇(孫弘烈, 史學志 9, 1975)

麗末·鮮初의 對馬島征伐(孫弘烈, 湖西史學 6,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