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도사로 한국사회를 논하려 하는가?
[프레시안] 2008년 04월 01일(화) 오전 09:17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 사회에서 역사 인식은 주로 소위 국사를 통해 형성되어 왔다. 그런데 그마저도 식민과 분단, 그리고 내전과 독재의 과정을 거쳐 오면서 매우 불편하고 왜곡된 모습으로 만들어져 제대로 된 보편적 역사 인식이라 말하기 곤란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 안에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등의 영향이 과도할 정도로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 인식이 그 사회를 불편부당하게 평가하고 성격을 규정하는 잣대로서 매우 부적절한 상태다. 이 사회 내에서 만연한 역사 인식이 얼마나 '우리' 안의 특수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다른 나라의 역사를 두루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국사와는 물론 다르고 중국사나 유럽사와도 다른 역사를 통해 역사가 갖는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도 현재 이 사회는 그렇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시민들이 국사의 세계를 벗어나 보다 넓고 다양한 역사의 세계를 접하고, 그를 통해 또 다른 종류의 역사 인식을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닌 '남'의 역사를 통해 찾은 역사 인식을 통해 '우리'를 한 번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은 그 '우리'의 역사 인식과 다른 역사 인식을 인도사에서 한 번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인도사를 통해 새로운 또 하나의 역사 인식을 가져 그 천박한 한국 사회를 고칠 수 있는 일에 조금이나마 역할을 할 수 있다면 학자로서 그보다 더 보람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내 논문 내가 쓰고, 내가 읽는 논문 몇 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연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필자>
1. 왜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려 하는가?
천박스러운 한국 사회, 오로지 돈과 승리밖에 모르는 한국 사회. 돈과 힘에서 승리한 소수만이 기를 펴고 사는 한국 사회. 연구도 안 하고, 강의도 안 하고, 오로지 자리만 탐하거나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 사는 것과 무슨 관계냐고 목에 힘주어 말하고 다니는 교수들이 각 대학마다 득시글거리고,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 할 때 미국 사람들보다 더 그 침략 전쟁을 옹호하는 목사들이 교회마다 득시글거린다면, 이 사회, 할 말 다 한 사회 아닌가.
독도 문제만 터지면 왜들 그렇게 호들갑이면서 중국에서 건너 온 독립 운동가 후손 재중 동포에게는 왜 그렇게 무관심하고, 무시하는지.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일용잡급직으로 분류되는 그 비정규직 교수는 당연한 경쟁 사회의 결과라고 인식하고, 중학교 1학년 교실에 드디어 0교시와 '야자' (야간 자율학습)가 생긴 것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정책'으로 인식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감히 서울대도 스카이 출신도 아닌 상고 출신이 10년이나 이 나라를 통치하다니' 라는 한탄이 이 시대 기득권의 심성을 대변한다면 거의 절망 수준에 이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 경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사진은 최근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대해 자살로 항거한 한 비정규 교수를 추모하기 위해 국회 앞 천막 농성장에 모신 빈소다. ⓒ이광수
나는 전공이 인도사이고 아시아평화인권연대 라는 작은 반전평화 시민운동 단체의 공동 대표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인도, 파키스탄, 네팔, 아프가니스탄, 캄보디아 등을 방문해 그 역사와 사회에 대해 관심 있게 지켜보거나 생각해 본 기회를 조금 가져 왔다. 그 때마다 느낀 것이 하나 있다면, 참으로 한국 사람들은 역사와 사회에 관해 독특하거나 이상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반화시켜서 말하기는 곤란하겠지만, 한국이 다른 나라, 적어도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비교해 볼 때 보편적 사회의 모습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져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한국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정상이고, 다른 나라들이 비정상적인데, 그것은 우리가 성공해서 잘 살고, 다른 나라는 못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 사회가 아프가니스탄이든, 캄보디아든, 네팔이든 그 사회를 이해하는 기준은 모두 한국식 돈과 힘의 승리 이데올로기뿐이다.
한국의 신문같이 미국, 중국, 일본 등 소위 주요 몇 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사 다른 나라를 다루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 '해외토픽'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과 같이 아시아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한 아시아의 나라는 없을 것이다.
한국은 오로지 돈 있고, 힘 있고, '우리'와 가까이 있는 미국, 중국, 일본밖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프리카나 중남미는 차치하고라도, 지리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관심을 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황사로 인해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 제국주의의 틀 안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 나 있기 때문에 바깥세상을 왜곡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조차 갖지 못한다.
도대체 뭐가 문제고, 왜 이 모양으로까지 됐을까?
일반화해서는 곤란하겠지만, 이는 잘못된 역사 인식으로 인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본다. 역사는 사회를 평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각을 제공해주는 학문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역사학이 다른 어떤 학문보다 사회의 모든 부문을 포괄하고 연계하는 종합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가, 사회 현상을 평가하고 그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그 필수적인 사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갖는 역사 인식은 주로 한국이라는 매우 독특한 공간에서 발생한 역사를 통해 만들어졌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치우쳐 있어 다른 역사 공간과 상대적으로 격리되어 있었고 그 결과 중국 혹은 동아시아와의 관계에 너무 치우친 역사적 사실과 관계가 있다. 게다가 한국에서의 근대적 의미의 역사 연구는 식민과 분단 그리고 내전과 독재의 과정을 거쳐 오면서 매우 불편하고 왜곡된 모습으로 전개되면서 역사학의 한계가 너무나 많이 만들어졌다.
역사는 항상 힘 있는 권력층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는데, 특히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으로 인해 이데올로기가 심하게 왜곡돼 과거를 보는 불편부당한 시각으로서의 역사학이 크게 훼손되어 왔다. 그래서 유독 민족주의, 국가주의, 자본주의 등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고, '국사' 중심의 역사가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역사 인식은 곧 국사로부터 받은 역사 인식이 되어 왔다. 그래서 역사가 사회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성격을 규정하는 잣대로서 매우 부적절하게 되어버렸다.
잘못된 역사 인식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이것 말고도 또 있다. 한국 사회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이 또 한 번 - 이미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서 한 번 겪은 적이 있다 -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다. 역사적 평가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오로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만 하면 되는 이데올로기 그 안에 역사라는 세상을 보는 잣대는 파묻혀버렸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리 썩 중요하지 않는 물음이 되어 버렸다. 세상이 오로지 이윤을 추구하고, 결과만 보는 것에 미쳐 날뛰고 있다. 대학에서 역사와 인문을 논하며 인생을 거슬러가면서 살아가려는 학생은 이제 멸종되어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 그런 교수도 이제는 드물다. 교수가 거의 말라 비틀어져 버린 곳에서 싱싱하고 거침없는 학생이 어떻게 나겠는가?
더군다나 현재의 역사학은 교육 기관인 대학에 종사하는 연구자의 전유물로 굳어져 가고 있다. 그래서 역사학은 사회와 대중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다. 여기에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사라는 게 균질적이고, 실증적인 것으로 가르치는 경향이 그 안에서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이 일제의 식민 잔재의 모습인지, 역사학 하는 학자들의 학문적 환경이 치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사학의 그런 경향은 대중으로부터의 외면과 소외의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 잘못된 역사 인식은 학살과 테러를 낳는다. 사진은 현대인도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종교 공동체 사이에 벌어진 학살과 갈등의 악순환 속에서 터진 1993년 뭄바이 연쇄 폭발 테러다.
역사학자가 대중과 소통하는 쉬운 글을 쓰거나, 창의적이고 재기발랄한 방법론을 사용하면서 강의를 하면 가볍고 인기에 영합하는 사람으로 몰리게 되는 것이 일쑤다. 그러니 오로지 연구를 위한 연구밖에 할 수 없고, 논문을 위한 논문을 쓰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연구자들은 자기가 쓰고 자기만 읽는 논문을 쓰느라 몇 년씩 죽을 고생을 하는 안쓰러운 일을 하곤 한다. 슬픈 일이지 않는가?
연구를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연구를 치열하게 하자는 것이다. 내가 쓴 글 나만 읽는 풍토일지라도 연구하는 사람은 꾸준히 연구를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역사학이 오로지 사료의 치밀한 고증과 검증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 중심 풍토에 함몰되어 있다 보니, 고대사 하는 사람은 오로지 고대사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영국사 하는 사람은 오로지 영국사 이야기만 하고, 중국사 이야기 하는 사람은 오로지 중국사 이야기만 하는 풍조가 만연하다.
인도 고대사 하는 사람이 한국 현대의 사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이명박 정부가 영어 몰입 교육에 있어서 큰 착각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해 영어 수준을 높여야 된다 할지라도 - 이 자체에 찬동할 수 없지만, 찬동하다 할지라도 - 그 영어 수준 높이기를 위한 교육을 왜 모든 학생들이 다 받아야 할 필요 없듯이, 역사학에 있어서도 역사학을 전공으로 계속 하고자 하는 학생에게만 치밀한 학자적 훈련을 시키는 게 옳다.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역사 인식과 대중적인 역사 활용의 훈련을 하는 게 옳지 않겠는가?
그 안에 문학, 철학, 인류학, 고고학, 예술 등이 차지하는 자리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역사학이 다루는 대상 공간도 마찬가지로 다양화해야 하는 것이다. 국사 중심은 말 할 것도 없고, 중국사 중심의, 동아시아사만 하는 풍토를 바꿔야 한다. 인도사도 배우고, 서아시아/중동사도 배워야 한다. 오해해도 할 수 없지만, 내 밥그릇 주장이 아니다. 교수는 일차 사료를 가지고 직접 연구하지 않고, 다른 연구자의 연구물을 공부해서 그 역사를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에 공감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보다 다양한 세계에 대한 역사 교육이 이루어져 한국 사회의 시민들이 더 이상 애국애족 시민으로만 성장하지 않고, 더불어 사는 세계 시민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학을 학문적으로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역사 인식으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한 번 평해보자 것이다. 그것을 인도사라는 생소하지만,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줄 수 있고, 역사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분야를 통해 해보자고 하는 것이다.
내가 제시하는 역사의 평을 통해 한국 사회의 모습을 재구성한다든지, 현실의 알레고리로 작용하게끔 한다든지 하는 건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다만, 협소해질 대로 협소해진 한국 사회의 시민들에게 - 대학에서 이러한 기회를 제공해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 이런 신문 공간을 통해 역사 인식의 다양함을 제시해주고 그를 통해 그 독자들이 더 넓은 역사와 사회의 분석 혹은 해석의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심정뿐이다. 그러면서 역사학이 교실 밖으로 나와 사회를 바라보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그것이 살아서 작용하여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책문에 답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 주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럴 때 역사학도 살아나고 더불어 사회도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대중화든, 인문학 살리기든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내가 개의하는 것은 오로지 편협한 역사 인식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넓고 다양한 역사 인식을 갖추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회를 건강하게 평가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뿐이다. 그런데 나는 인도사를 하는 사람이니 인도사를 통해 이야기 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사나 중국사 혹은 유럽사를 통해 얻은 역사 인식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역사를 통한 역사 인식을 한 번 접해보게 하였으면 하는 소망도 물론 있다.
인도사는 잡사(雜史) - 부산의 어느 대학 사학과 및 역사교육과 초청 특강을 갔다가 들은 우스개다 - 에 속한다. 그런 역사는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려 하지도 않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우리' 아니면 힘세고 돈 있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 유럽사 이외는 역사 취급도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인도사를 전공하는 정규직 교수가 인도사를 가르치는 사학과는 단 한 군데도 없다. 그러다 보니 비록 아주 적은 양이라 할지라도 인도사를 일선 학교에서 가르쳐야만 하는 중고등학교 역사 교사들이 대단히 곤혹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다는 불만을 많이 들었다.
결국 이 연재는 두 가지를 위해 기획되었다. 우선은 한국 시민들에게 역사 인식의 다양함을 제시해주고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도사를 쉽게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불어 의도하는 바가 있다면, 역사학의 내부 소통과 그 이후 대중화를 꾀하는 데 일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 대중화를 통해 한국 사회 안에 팽배해 있는 인식을 한 번 바꿔보고자 하는 것이다. 물리적인 병은 메스를 들이대면 금방 고칠 수 있지만, 인식의 병은 그렇게 한다고 금방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인식의 병은 그 전염성과 충격의 정도가 매우 깊어 그로 인한 결과가 치명적인 수준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전쟁, 학살, 테러는 모두 그러한 잘못된 인식의 결과다. 펜이 칼보다 무서운 정도가 아니라 역사 인식에 관한 문제가 핵보유에 관한 문제보다 더 심각할 수 있다.
글쓴이 약력
인도 델리대학교 대학원 역사학과 박사 (역사학 박사)
현, 부산외국어대학교 러시아인도통상학부 교수 (인도사 전공)
현,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
저서로는 《인도문화. 특수성과 보편성의 이해》 (서울: 웅진출판사, 1998), 《카스트. 지속과 변화》 (서울: 소나무, 2002), 《인도사에서 역사와 종교 만들기》 (부산: 산지니, 2006) 등이 있고, 역서로는 《고대 인도의 정치 이론》 (서울: 아카넷, 2000), 《성스러운 암소 신화: 인도 민족주의의 역사 만들기》 (서울: 푸른역사, 2004), 《테러리즘, 폭력인가, 저항인가》 (서울: 이후, 2007) 등이 있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인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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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신화로 물들고
[프레시안] 2008년 04월 08일(화) 오전 09:41
과거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고대 유럽에서는 과거를 표현하는 것으로 신화와 역사를 꼽았다. 그리고 역사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고, 신화는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역사는 - 적어도 신화에 비하여 -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실제로 있었던 것 혹은 그렇게 논리적 추정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객관적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근대 이후 역사는 과거의 사건을 원인과 결과의 질서 정연한 전후 관계 속에 배열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실제로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사나 중국사에서도 역사는 이러한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이러한 역사 인식에 크게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는 역사란 대개 이러한 방식으로 기술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인도에서는 이와는 전적으로 다른 역사 인식이 있었다. 고대 인도의 브라만 사상가에게 과거는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 즉 실제로 어떠한 모습이었는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과거를 '그리 하였을 것 같은 것' (이띠하사 itihasa)으로 인식하여 그것을 몰가치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현재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것이 과거와 어떠한 인과 관계가 있는지는 고민의 주요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파악하고자 한 것은 인간이 어떻게 실재하는 인과 관계를 만들어 내면서 그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실행되는지가 아니고 어떤 절대적인 우주 법에 의해서 우주의 질서가 이 사회 안에서 운행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그들은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아니 하였다.
따라서 정치권력이 특정 영역을 통치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 통치 방식은 반드시 그 절대적인 우주법 위에서 해야 했다. 그 절대적 우주법은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이자, 의무이고 동시에 그것이 진리였으니 그것이 어떻게 지켜지지 않는지에 대해선 기록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 진리를 따르고 지키는 것을 제외한 모든 현실의 세계에 대해서 그들은 별 가치를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치 권력자가 동아시아와 유럽에서와 같이 어떠한 뜻을 가지고 나라 이름을 세운다거나 연호를 세워 새 기원으로 삼는다거나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런 일을 하려 들지 않았고, 그래서 그러한 역사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 브라만 사상가들에게 그 절대적 진리란 무엇이었는가? 흔히 생각하듯, 탈물질적이고, 정신적이며 관념적인 성찰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물질적이었고, 사회적이었다. 그들은 오로지 모든 관심과 가치를 사회 질서에 두었던 것이다. 이른바 카스트 체계를 중심으로 둔 사회 질서다. 그들의 카스트 질서를 향한 일념은 결국 브라만 최고주의와 제사 절대주의였다. 브라만 이하 모든 카스트는 반드시 우주 법을 형상화한 제사에 물질을 바쳐야 하고, 그 제사는 브라만만이 관장하니 그 물질은 고스란히 브라만 몫일 수밖에 없다. 왕 또한 이 제사를 지내는 행렬에 동참해야 하고, 제사를 통해 사원에 물질을 헌납해야 한다. 그러면 브라만의 축복과 신화를 통한 권력의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브라만이 국가나 민족을 유한한 것으로, 그리고 그러한 유한한 것은 어떠한 권위도 받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그래서 그와 관련된 왕조의 유래나 계보 등은 별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고대 인도의 역사에서 어떤 당위적 행위를 한 주인공이 실제로는 인간이지만 선인(仙人)이나 신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와 관련해서이다.
예를 들어, 고대 인도에서 사회 질서의 모본이라 할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 가운데 하나인, 《마누법전》은 마누가 편찬한 법전이 아니고, 마누라고 하는 선인이 내려 준 (말씀을 누군가가 편찬한) 법전이라는 것이다. 그 말씀을 실제로 들었는지, 들었다면 누가 들었는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사실은 그 법을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서 만들어냈겠지만, 고대 인도의 맥락에서는 그 법을 만든 사람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경전이나 법전의 저자 혹은 편찬자가 실제 인물인지 아닌지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실제의 역사가 모두 신화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신화로 표현되고 그 신화에 나타난 행위는 사실 여부보다는 당위성의 의미를 가지면서 규범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실재하는 역사가 무의미하고, 그것이 갖는 신화만이 의미를 갖는 것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비일비재하였다. 그 유명한 아홉 살의 이승복 어린이가 실제로 "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는지 아니면 조작되었는지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된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그가 아홉 살 난 이승복이든, 아흔 살의 홍길동 할아버지든 그 사실 자체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여부보다는 그 이야기가 향하는 그래서 의도하는 사회 규정이자 그 이념만이 '우리'가 지키고 따라야 하는 진리였기 때문이다. 문제의 <조선일보> 기자가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는지 아니면 서울에서 작문을 했는지에 대해 문제를 삼아서는 아니 되었다. 그 영원회귀의 신화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일 뿐이었다.
▲ 언론은 역사를 신화로 만드는 일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은 소위 이승복 어린이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 한국 사회는 최근까지도 그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으로 강요하는 신화적 세계에 동참하고 있다.
역사를 신화로 만드는 역할은 5공화국 전두환 시절에 특히 활발하였다. 그리고 그 활발한 신화 만들기의 중심에 대학의 교수가 있었다. 교수들은 난국에 처해 있는 이 때 인권은 잠시 유보하여 국가에 맡기고, 국가를 중심으로 일심단합 해 이 난국을 헤쳐 나가는 것이 대학생의 본분임을 가르치도록 종용 당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수는 이러한 신화 조작의 작업에 기꺼이 혹은 물질의 노예로서 동참하였다. 정부에게는 데모하는 대학생이 가장 큰 골치 덩어리였지만, 그 대학생을 통제할 수 있는 자는 교수였으며, 그 교수를 통제하는 자는 재단이었고, 그 재단은 돈에 굶주려 있어 그 배를 채워 줄 수 있는 것은 정부였다. 그래서 군사 정부는 대학생 인원을 대폭 늘려 대학 재단에게 돈 보따리를 안겨 주었고, 재단은 다시 그 교수들에게 돈 보따리를 풀어 주면서 충성스러운 애국 어용 학생을 양성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는 고대인도 사회에서의 사제 그 자체였다. 그들은 실재하는 역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여야 했고, 마땅히 가야 할 영원불멸의 원초적 신화에만 뜻을 두는 사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고대 인도가 정치적 권력 구조나 경제적 실생활의 모습 혹은 카스트 구조의 변화 등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오로지 그들의 관심이 실제보다는 당위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관심을 둔 것은 오로지 브라만은 모름지기 이러이러 해야 하고 끄샤뜨리야는 저러저러, 바이샤는 또 이러이러 해야 하며 슈드라는 이런저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둔 가장 큰 관심은 그 카스트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행위였고, 그 차원에서 맨 아래 계급인 슈드라가 절대적 보편법을 관장하는 브라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중죄로 다스려야 했다.
예를 들어, 《마누법전》에는 '브라만에게 그 다르마를 거만하게 가르치려 드는 자에게는 왕이 그 입과 귀에 뜨거운 기름을 붓게 해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만큼 브라만이 카스트의 사회 질서를 지키고자 심혈을 기울였고, 그 일에 왕이 적극 동참했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역설적으로 슈드라의 브라만 중심의 권력 구조에 대해 상당한 반발과 갈등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강력한 제재 조치가 법전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너무나 많은 슈드라의 반발이 있었고, 그 반발로 인해 사회 갈등이 첨예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고대 인도에서 브라만 사상가가 그러한 역사관을 가지고 당시의 세계관을 지배했다고는 하나 실제 역사가 전적으로 법전이나 경전에 표현된 것과 같은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법전이 발달하였다는 사실에서 그러한 당위성의 역사가 실재하는 역사가 되지 못하였다는, 즉 실제 사회에서는 그러한 당위성에 대해 반발하는 세력과 그러한 당위성을 지키려는 세력 사이에 상당한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왕이 브라만 중심의 당위성의 체제를 즉 카스트 체제를 부인하거나 그것을 개혁하려는 갖가지 행위를 할라치면 그는 브라만의 엄청난 공세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
고대인도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다양한 악마가 항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 불경한 행동을 하거나 진리를 따르지 않는 야만적인 행동을 하여 참다못해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악마를 심판한다는 신화의 구조는 바로 그 땅에서 브라만적 질서에 대해 강력하게 도전하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로 해석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신화를 가지고 구체적인 역사 재구성 작업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은 그것을 항상 기억하는 - 인도에서는 신성한 이야기는 원래 기록하지 않고 구전으로 전한다 - 것이 브라만만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 역사적 실체를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실제 사회에서 정치권력이 의례적 권위보다 막강한 힘을 갖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자연의 이치다. 인도 또한 사람이 사는 세상인데, 브라만이 - 중세 유럽에서와 같이 교단의 조직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 왕보다 더 강한 권력으로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마찬가지 논리로 실제 권력은 항상 브라만이 가지고 있는 의례 권위로부터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따라서 고대 인도에서 '모든 왕은 끄샤뜨리야'라는 사실은 끄샤뜨리야만이 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로써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실제로 무력으로 권력을 잡는 자는 그 출신이 어떠하든지 간에 왕이 될 수 있었으나 왕이 된 이후에 그들은 모두 끄샤뜨리야로 족보를 고칠 수밖에 없었음을 읽어내야 한다. 그러한 경우 브라만에게 왕은 그 대가로 많은 토지와 재물을 하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 라마(Rama)는 악마를 물리치고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복원하는 신이다. 이 신의 이야기가 정권의 위기를 맞이한 1989년 여름 인도 전역의 티브이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변화는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 인도사의 중요한 사료 가운데 하나인 법전은 당위성을 표현하는 것이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될 수가 없다. 이러한 해석은 고대 인도의 역사 인식 즉 브라만적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하면 얻어낼 수 없는 것이다. 법전이라고 해서 중국이나 다른 문화권에서의 그것처럼 해석하여 그것을 사료로 이용하면 고대 인도는 사회 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정체된 사회일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가 인도 사회를 그렇게 본 것은 바로 그가 고대 인도인의 역사 인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법전이나 경전을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인도 사회 정체론이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였다고 한다면 그건 과연 역설적이기만 한 것일까? 자신이 살아 온 사회에서 형성된 역사의 인식 위에서 다른 문화권의 사료를 편협하게 이해함으로써 인도의 역사는 씻을 수 없는 왜곡의 덫에 빠져 들었고, 결국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이는 역사 인식의 일방적 해석을 하는 것이 인류사에 큰 죄를 짓는 것과 연결될 수 있다는 무서운 교훈을 주는 일이기도 하다.
브라만의 역사가 인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정도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한국 사회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들이 규정해 놓은 권위에 대해 반발하고 저항한 노무현은 인도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악마와 같이 규정되었다. 그리고 그 악마를 규정하는 조중동은 브라만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조중동이 또 다른 '브라만'인 일부 종교 권력과 결탁하여 그 '악마'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모습 또한 고대 인도에서 보던 그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하지만 가장 닮은 것은 그 '악마'에 대해 조중동과 종교 권력이 무차별 공격을 가할 때 그 가진 자의 보편적 신화를 분별하지 못하고 함몰된 채 같이 욕하고, 핍박하는, 그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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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사를 누가 기술하였는가?
[프레시안] 2008년 04월 15일(화) 오전 09:29
인도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근대 유럽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한다. 유럽 사람들은 16세기부터 시작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의 삼각무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은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축적된 자본 덕에 18세기 이후부터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인도 면제품을 수입하는 무역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인도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으니, 인도와의 무역이 본격화되고, 벵갈에 대한 통치권이 확립되는 18세기 말부터였다.
처음 인도를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막스 뮐러는 모든 유럽어의 모어인 라틴어와 고대인도 언어인 산스끄리뜨가 동일한 어족에 속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언어를 사용한 사람들을 아리야(Arya; 고귀한)인이라고 하면서 동일한 종족으로 간주하였다. 사실 아리야인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어족일 뿐 그 안에 있는 여러 인종을 같은 종족으로 볼 수는 없는데도 당시의 초기 학자들은 그 아리야인을 모두 동일한 종족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고대인도 문화와 자신들의 고대 문화 사이에 뭔가 친연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 초기 학자들은 그 아리야인이 인도아대륙으로 건너와 원주민을 제압하고, 노예화하여 점차 그 선진 문화를 이 땅에 보급하면서 살아왔고, 그들의 유산이 바로 베다(Vada) 문학이고 산스끄리뜨 문학이며, 브라만이야말로 순수 아리야 혈통을 보존한 귀한 지식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인도 고대 문화는 선진 유럽 문화에서 떨어져 나가 잃어버린 한 쪽 날개로 간주되었다.
이러는 가운데 이들 동양학자들은 당시의 유럽 문화에서 찾을 수 없는 전혀 새롭고 높은 가치의 문화를 인도의 고대 문화에서 찾아내었다. 막스 뮐러는 유럽의 고대 문화가 능동적이고 호전적이며 탐욕적인 데 비해 인도의 고대 문화는 수동적이고 명상적이고 목가적이라 하면서 그 본질은 항상 진리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높이 치켜세웠다. 그는 인도의 과거가 수천 년 동안 이러한 성향을 지닌 채 그 전통이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고 했다. 이런 평가는 사실 그렇게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니었어야 했음에도 당시 인도인들이 그런 평가에 만족했던 것은 그 힘 센 자들에 대한 비굴한 경외심 때문이었다.
▲ 인도는 오랫동안 명상의 나라로 묘사되어 왔다. 명상의 문화가 인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인도는 명상의 나라는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국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다. 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차치하고, 우리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소개에 빠지지 않는 것이 송광사 선방인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이는 일부 선교사와 외국인이 역사가 정체되어 있고 문화가 신비하다는 오리엔탈리즘으로 채색한 왜곡된 이미지에 한국인 스스로가 물들어버린 결과다. 그 정체된 오리엔탈리즘에 스스로 뿌듯해 하는 한국인의 모습이 인도와 많이 닮았다. 엄밀하게 볼 때 한국 사회는 좋게 말하면 역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무한경쟁적인 사회다. 이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쉽게 알고 있다. 어디를 봐서 한국 사회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인가?
한국인 스스로 빠져 들어 있는 오리엔탈리즘이 힘의 논리와 섞이면서 때로는 참으로 괴이한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푸른 눈의 외국인이 한국 불교의 참선에 매료되어 한국 땅을 밟는 일이 간혹 있다. 그걸 가지고 좋네 나쁘네 하고 평가를 내릴 일은 아니다, 그 사람들의 세계관에 따른 본인들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그 경우에까지도 그 사람의 학력이 하버드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치켜세우는 사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힘과 승리의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참선을 하러 온 사람이 하버드 출신이면 호들갑을 떨지만, 부랑아 출신이라면 누가 받아주기라도 했을까? 한국인의 학력 콤플렉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꼴이 참 우습다.
사실 한국인의 인종 차별이 악명 높은 것은 이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흑인을 차별하고 백인을 숭모한다지만 사실은 그것도 아니다. 사실은 흑인 가운데서도 돈 많고 영어 잘 하는 미국에서 온 흑인에게는 더 이상 비굴할 수 없고, 돈도 없고 영어도 못하는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은 사람 취급도 안 해 주는 걸 보면 그것은 단순한 인종 차별이 아니다. 오로지 힘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런데 힘의 이데올로기가 돈과 결합하면서 매우 변태적인 파시즘의 형태와 위력을 보인 것이다.
동양학자들은 인도를 연구하면서 애써 그들 이론에 맞는 즉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브라만 전통의 사료만을 수집했다. 그리고 인도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불교, 자이나교 혹은 비(非)브라만 전통의 물질론에 입각한 자료는 일부러 무시하였다. 그리고 식민 지배자들과 궤를 같이 하는 일련의 공리주의 학자들은 피식민지의 법률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었다. 피식민지 인도의 법률은 전통적으로 브라만이 만든 관습법이었고, 그 안에는 관습, 풍속, 의례, 신화 등이 모두 연계되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동양학자들은 브라만 전통에 입각한 카스트의 구조를 설파하는 법전과 경전만을 주로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사실 인도는 그 어떤 다른 사회보다 그 문화의 성격이 훨씬 이질적이라 할 수 있다. 세계관을 놓고 볼 때도 세상 포기 혹은 초월을 주장하는 사상이나 신앙이 있는 반면 세상 중심의 물질 숭배 혹은 기복 신앙도 매우 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볼 때도 브라만의 카스트 사회론도 있지만 그에 반발하는 카스트 무용론도 있고 실제로 그 움직임도 매우 활발하다. 그것이 관습에 관해 당위적인 모습을 보이는지, 실재의 모습을 보이는지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카스트에 따라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사회에서 브라만의 힘이 가장 강력한데다가, 그 권력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학자들이 접할 수 있는 자료는 대부분이 그 브라만 중심의 세계관 즉, 초월 중심이나 카스트 구조와 관습법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실재한 사회의 갈등이 브라만적 사료를 통해서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러한 갈등은 브라만적 사료에도 은밀히 담겨 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든 경전을 통해 말세의 조짐을 한탄하거나 저주 혹은 경고하고 있고, 이 맥락의 행간을 읽어내면 그러한 갈등을 포착해 낼 수 있다. 그런데 그 갈등이 신화나 법전 속에서 현세의 현상이 아닌 우주적 현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처음 이를 접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간파하기가 어렵다. 결국 브라만 세계관의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 채 자료의 행간을 읽어내는 일에 실패한다면, 인도 고대는 수동적이고, 목가적이고, 명상적이고, 초월적이고, 카스트에 고착된 채 한 점 변화 없이 내려온 - 그것이 이상향이든 아니든 -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고대 인도를 초기 동양학자들이 본 것과 같이 항상 이상향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옥스포드 인도사》를 통해 근대적 의미에서 인도의 역사를 처음 기술한 제임스 밀에게 있어서 인도의 문화는 결코 그 동양학자들의 눈에 비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초기 동양학자들과는 달리 인도의 문화를 저주하였고 야만스럽게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식민 지배 당시의 인도는 말할 것도 없었고, 고대 인도의 문화 즉 인도인의 종교 체제, 정부 형태, 법률 제도, 사회 제도 등 모든 것이 야만적이었다.
단지 초기 동양학자와 제임스 밀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인도 사회가 수천 년 동안 그 본질이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 왔다는 것이다. 동양학자들이 인도사회를 목가적인 눈으로 보고 순수 형태로서 그것이 보존되어 내려왔다고 본 반면에, 제임스 밀을 비롯한 공리주의 사학자들은 인도 사회는 강력한 전제 군주 아래에서 사회가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변화를 일으킬 수 없었다고 본 것이다.
이른바 동양사회 정체론이다. 그래서 제임스 밀을 비롯한 공리주의 사학자들은 19세기 당시 인도를 매우 후진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기준 즉 합리성을 인도 문화가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임스 밀이 인도 문화를 이렇게 평가한 것은 결국 오로지 영국의 합법적 통치만이 인도 사회를 진보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제임스 밀은 당시 인도를 방문하고 온 사람들의 기행문에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많이 찾았다. 이 점에서는 마르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식민 지배를 하기 위해 혹은 그와 유사한 계몽주의 사상에 물들어 인도 땅을 밟은 당시의 유럽인에게 인도는 자신들이 최근 이룩해 놓은 문명의 세례를 전혀 받지 못한 야만의 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인도에서 당시 그들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고 있는 사유지, 민주주의, 입법 등의 개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인도의 문화는 야만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행객은 철저히 자기 주관을 가지고 관찰자적 시선으로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상을 객관화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그 여행기는 이미 동양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인도에 함몰되어 있던 사람들이 작성한 것이라 그 안의 인도는 결국 동양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인도일 수밖에 없고, 그들이 남긴 여행 스케치를 자료로 삼아 내 놓은 역사서 또한 실재하는 인도의 역사가 아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에서도 인도를 연구하는 학자의 영향력보다는 대중에게 영향력 있는 문필가나 예술인 혹은 여행객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 이 시대의 스승 가운데 한 분이신 법정 스님이 그렇고, 여론 매체에 막강한 힘을 가지면서 불교에 대해서 해박한 - 불교에 대해서 잘 안다고 해서 인도를 잘 안다고 볼 수는 없다. - 도올 김용옥이나 뛰어난 마술적 언어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 시인 류시화가 그렇다. 그들이 보는 인도는 그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혹은 브라만 문헌이나 불교 경전에 나오는 혹은 유럽의 동양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인도로부터, 아는 듯 모르는 듯 하는 사이에, 영향을 받아 그린 인도거나 시인의 마음으로 보는 인도 혹은 경전 속에 있는 인도다.
이 점에서 특히 시인 류시화의 문제는 심각하다. 대상이 개든, 걸인이든, 성자든, 여관 주인이든, 뱃사공이든, 그 사람이 힌디어를 쓰든, 따밀어를 쓰든 벵갈어를 쓰든 시인이 누구하곤들 대화를 못 나누고, 무슨 말이든 못 알아먹겠는가? 글쓴이는 시인이기 때문에 그곳을 '하늘 호수'라고 규정하면 모든 왜곡과 편견에서 양해를 받을 수 있지만, 독자들은 그 시인의 말로 인해 그곳을 실제로 존재하는 인도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인도에 사업을 하러 나가는 기업인이 그 책을 인도 안내서로 가지고 가는 일마저 발생한다. 이 정도면 할 말 다 한 것이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내는 세상이 이 뿐이 아니니, 그리 애달파 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 시인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은 한국에서 인도의 모습을 가장 크게 왜곡시켰다
역사란 인간의 삶을 언어로 옮겨놓은 것인 만큼 그 언어 기술 안에 주체의 시각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기술해 놓은 역사를 읽어내는 일에 있어서도 그 주체의 시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법전이나 경전만을 보면 고대 인도는 아시아적 정체 사회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브라만이 만든 사료를 낭만주의와 식민주의에 물든 유럽의 동양학자들이 읽고 만든 가상의 모습이다.
그러한 유럽의 전통은 비단 식민주의자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고, 마르크스나 그 이후 좌파 학자들에게도 해당된다. 마르크스는 영국의 제국주의를 철저히 비난하였지만 영국의 도래만이 인도의 전제주의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이후 많은 좌파 연구자들이 그를 답습하였고 이는 결과적으로 영국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한 한 결과를 가져 왔다. 그들 모두가 유럽 중심 오리엔탈리즘에 함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베트남 '처녀'를 사서 결혼하는 사실을 다룬 <조선일보> 식의 르포는 한국식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인들이 만들어 놓은 유럽 중심 오리엔탈리즘의 논리는 이제 한국으로 들어 와 한국 중심 오리엔탈리즘이 되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 남성들은 물건 사러 오는 것처럼 베트남에 와요. 사실 기사만 문제가 아니지요. 베트남 '처녀'와 국제결혼을 하는 방식의 문제가 더 근본적이에요. 한국 남성은 왕자고 베트남 여성은 신데렐라인가요?" 2006년 4월, 한국 사회를 부끄럽게 만든 《조선일보》의 베트남 결혼 중개업 르포로 인해 '우리' 중심의 인종주의 사건에 대해 베트남 유학생들이 던진 말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베트남 '처녀'와의 결혼은 매매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국인 남성은 수십 명의 여성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을 어항 속에서 물고기 고르듯 고른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과정을 《조선일보》는 중계방송 하듯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 기사 제목으로 "한국 왕자님들, 우리를 데려가 주오"로 달렸다. 이러한 사실이 베트남인에게 얼마나 모욕적일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신문은 일언반구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인도 사회의 진보를 위해 영국이 지배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가난한 베트남 '처녀'를 위해 부자 한국 남성과 결혼해야 한다는 논리로 되었다. 한국이 강대국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주 노동자 친구의 말이 귓가를 맴돈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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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문명을 둘러 싼 역사전쟁
[프레시안] 2008년 04월 22일(화) 오전 09:07
인도의 역사는 인더스 문명으로부터 시작한다. - 사실, '문명'이라는 용어는 '야만'에 대한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가치중립을 표방하는 용어로는 옳지 않다. 그래서 역사학에서는 '다양함'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문화'를 선호한다. 게다가 그 '문명'이 꼭 인더스 강과 관련이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학계에서는 첫 발굴지인 하랍빠의 이름을 따 '하랍빠 문화'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은 대중과의 소통에 더 초점을 맞추므로 그냥 보다 친숙한 '인더스 문명'으로 쓰기로 한다. - 인더스 문명은 소위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유일하게 전체가 땅 속에 파묻혀 있다가 어느 날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때는 1921년 영국 식민 통치 시기. 식민 지배자들은 지금의 파키스탄에 있는 어떤 지역에서 철도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인부들이 땅 속에서 벽돌을 꺼내 온 것을 우연히 지켜 본 관리들이 영국 본국에 연락을 해 대대적인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발굴이 시작된 지 약 10년 만에 어느 정도 작업이 대개 마무리 되면서 문명에 대한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었다.
여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역사의 정체성은 당대의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이는 인더스 문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920년대 인도에서는 영웅 간디가 등장하여 비로소 아래로부터의 민족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가고 있었고, 영국 세력은 타오르는 민족 운동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곳곳에 분열의 씨앗을 뿌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 분열의 씨를 뿌리는 일에 역사학을 교묘하게 활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식민 지배자들은 인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인도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그러는 과정 속에서 인도가 서로 다른 언어가 매우 많다는 사실과 그것을 구별해 보면 크게 둘로 나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를 기준으로 하여 인도 민족을 분열시키고 그 위에서 통치할 것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식민주의 학자들은 아리야인과 드라비다인이 마치 별개의 인종인 것처럼 간주하여 역사를 아리야인의 역사와 드라비다인의 역사로 나누고 문화나 풍속 기타 모든 것을 아리야인과 드라비다인의 그것으로 나누었다.
그러한 작업이 진행되어 가고 있던 때, 서양 사람들에 의해 이미 인도의 아리야인은 세계 최고의 정신문명의 주인으로 자리 잡았고, 유럽 선진 문명의 잃어버린 날개 한 쪽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면서 졸지에 드라비다인은 세계 최고의 문화 '민족'과는 너무나도 다른 '미운 오리 새끼' 꼴이 되어버렸다.
인더스 문명이 아리야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판명되던 때가 바로 이 즈음이었다. 이 사건은 남부 인도 사람들에게는 한낮의 스콜과도 같은 반가움을 선사했다. 이후 남부에서는 역사에 좀 관심 있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인더스 문명과 드라비다인과의 관계를 잇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아무리 파헤쳐도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이 남부에 살고 있는 드라비다어를 사용하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이 확실하게 규명되지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이 인더스 문자를 드라비다어와의 관련 속에서 수십 년 연구를 해 오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만족할 만한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이 문명이 몰락한 후에 들어 온 아리야어 즉 산스끄리뜨어와 관련을 지어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만족할 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인더스 문명의 여러 유물을 통해 현재 힌두 최고의 신인 쉬바의 원형이 인더스문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규명되었고, 그와 같은 맥락에서 부처의 깨달음과 관련되는 보리수 숭배의 기원도 인더스 문명에 있고, 힌두교에서 가장 널리 퍼진 신앙 형태인 세정 의례 또한 그 기원을 이곳에 둔다는 등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규명되었다. 그러면서 문자가 해독이 되지 않아 그렇지 여러 가지 맥락에서 볼 때 인더스 문명의 유물에 기록된 언어는 드라비다어이고, 그 문명의 주인공은 그 드라비다어를 사용한 남부의 드라비다인일 것이라는 설이 아직도 가장 유효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후 그들은 왜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곳에서 문명의 몰락을 맞고, 이곳 남부까지 이주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문제가 집중적으로 대두되었다. 맨 먼저 인더스 문명의 몰락 원인으로 제기된 것은 아리야인의 침략이었다. 아리야인은 기원전 1500 년경 인더스 문명의 가장 중심지인 현재의 파키스탄의 신드 지역을 통과하여 인도아대륙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아리야인들이 남긴 신들에 대한 찬송집인 《리그베다》의 신화를 보면 아리야인이 누군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떤 원주민과 싸우고, 그들을 복속시키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그 싸우고 복속시킨 대상이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일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래서 아리야인이 인더스 문명을 멸망시켰다는 주장이 크게 힘을 얻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문명이 전쟁으로 멸망을 당할 정도였다면, 성채가 파괴되었다거나, 전쟁에 의해 신체가 크게 손상당한 흔적의 유골이 대규모로 발굴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아리야인 침략으로 인한 몰락설은 한 때 힘을 얻었으나 이내 폐기되어 버렸다.
이후 새롭게 제기된 학설이 강의 범람으로 인한 몰락설이다. 인더스 강은 다른 소위 4대 문명과 함께 범람이 잦은 곳이다. 그래서 그 유적지를 가보면, 잦은 범람으로 인해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을 했다가 다시 돌아 와 우물을 다시 축조하고 도시를 다시 정돈한 흔적이 많이 나온다. 당시 사람들은 각 지역끼리 뭍은 물론이고 강을 통해 교역을 하였고, 지금의 인도양 연안을 통해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무역을 할 정도로 천문과 지리에 밝았다. 그래서 설사 엄청난 크기의 범람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것을 다른 곳으로 전혀 이식시키거나 강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동을 하지 못 하였을 리는 없을 것 같다는 게 전반적인 학계의 의견이다.
그래서 다시 제기된 설이 환경 변화로 인한 몰락설이다. 나는, 모헨조다로와 하랍빠를 답사한 1983년 현장에서 큰 의구심에 쌓였다. 모헨조다로를 가기 위해서는 인도의 델리에서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삼륜차 타고, 마차 타고 등등 온갖 교통수단을 다 타야만 했다. 그 정도로 그 지역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도착해보니 정말 완전한 황무지였다. 그런데 강물은커녕, 나무 한 포기 없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저 많은 불로 구운 벽돌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심하게 혼란스러웠다. 바로 여기에 수수께끼의 열쇠가 숨어 있었다.
인더스 문명의 벽돌 건축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보다 문명보다 더 발달된 수준이었다. 그것은 그곳 사람들은 태양에 말려 벽돌을 만들어 사용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불에 구워 벽돌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당연히 나무가 많이 있었던 숲이 상당했지 않았을까? 그런데 지금은 숲은커녕 나무도 없다. 그렇다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환경이 크게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구운 벽돌을 만드는 바람에 숲을 황폐화시켜 버렸을 거라거나, 지금과 같은 황무지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점차 확장되어 인도아대륙의 신드, 라자스탄 지역까지 확대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만나게 된다. 물증은 없다. 그렇지만 현재로서는 이 이론이 그래도 가장 납득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불로 구운 벽돌로 만든 대욕탕
▲ 불로 구운 벽돌로 만든 하수구. 인더스 사람들은 유독 세정 의례에 예민했고, 이러한 문화가 숲을 황폐시켰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 지역에 강이 말라붙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이 이론이 힘을 얻는 데 더욱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사실이 인도 현대 정치에서 엄청나게 큰 정치적 소용돌이와 연계되었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인더스 문명이 이후 힌두 문명의 모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 최고의 고대 문명 가운데 하나임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그 유적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던 파키스탄 정부가 이곳이 세계 최고의 문명의 발상지이면서 경쟁국 인도의 힌두 문명의 젖줄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이래로 이런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힌두 문명의 근원지이지만 지금은 남의 땅에 속해 있는 그 사실이 인도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럽게 되어버렸다. 힌두 문명을 과시하면 할수록 그 문명의 요람인 파키스탄은 더욱 더 빛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문명국으로서의 인도의 자존심은 크게 상처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 학자들이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인더스 문명의 원래 발생지가 지금의 파키스탄에 있는 모헨조다로나 하랍빠와 같은 곳이 아니고 현재는 말라서 사라져 버리고 없지만, 지금의 인도 영토 안에 있는 사라스와띠(Saraswati) 강 유역이라는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이론은 힌두 근본주의가 한창 그 기세를 올리던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확대 재생산 되었다. 당시는 인도 정치가 힌두주의에 입각하여 반파키스탄, 반이슬람, 힌두 복고의 기치를 건 수구적 성격의 반동 정치가 득세하던 때였다.
역사에서 수구 반동의 움직임은 항상 들불같이 순식간에 불붙는다. 히틀러의 나치주의가 그렇고,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이 그랬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빈 라덴과 알카에다의 이슬람 근본주의와 그에 입각한 테러 전쟁이 그러하다. 이에 맞서는 부시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과 대테러 운동 또한 마찬가지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군사 대국화 움직임이 일본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도 그렇고, 한국에서 전쟁 불사를 주장하는 개신교 집단의 위세가 하늘을 순식간에 찌를 듯한 것 또한 같은 현상이다.
결국 1990년대 인도에서는 힌두 민족주의의 광풍이 불고, 상당수의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사라진 사라스와띠 강 문명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면서 힌두 민족주의의 광풍에 자극을 받은 반이슬람 힌두 광신도들이 무슬림을 핍박하면서 집단 폭력을 일으키고 결국 학살로 이어지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이에 양심적인 학자들이 나서서 힌두 민족주의자들과의 일대 전쟁을 치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이 일이 단순히 역사의 문제 즉 학문의 영역 안에서만 다룰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역사라는 것은 특정 '사실'을 두고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해석'을 이미 못 박아 두고 그에 맞춰 '사실'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역사학이 학문의 장을 넘어 정치 도구로 거처 이동을 한 현상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그 고유의 성격상 역사학 (특히 고대사)은 특정 이데올로기와 만나게 될 때 대단히 무서운 폭발력을 갖게 된다. 특히 최근에는 많은 나라에서 국가주의가 이데올로기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역사는 국민국가를 둘러 싼 정치의 한 가운데 서게 되었다.
그 좋은 예로 중국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중국은 미국이 호시탐탐 자기 나라를 사분오열 시키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고 그러한 국가 존재의 위기를 역사학을 통해 극복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티베트의 문제나 동북공정의 문제 모두 고유한 의미의 역사학의 문제가 더는 아니다. 역사학을 정치의 영역이 아닌 학문의 영역에서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동북공정이나 고구려사의 문제를 정부에서 주도하는 체제나 방식 안에 들어가 풀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에 있다.
▲ 한국인들은 티베트에 대해 식민지의 '독립'이라는 동병상련을 느끼지만 그건 자의적 민족 감정일 뿐 올바른 역사적 이해는 아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선 고구려사나 발해사에 대한 민족주의적 역사학은 민족 사이의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분열의 씨앗이 뿌려져 있는 곳에서 특정 민족/종족 중심의 역사학을 계발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은 분규와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러한 민족/종족 중심의 역사학 계발은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에서는 민족 분규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번지고, 서아시아와 '중동'에서는 국가 폭력과 테러로 인한 전쟁의 일상화로 자리 잡으며, 동아시아에서는 국가주의의 발호와 그로 인한 국민들의 충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역사학자가 갈등을 부추기고, 내전을 부추기고, 학살을 부추기는 데 앞장서게 되어 버린 것이다.
가혹한 식민 지배와 분단과 내전의 민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한국에서 역사학자가 민족주의에 기울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전에 역사학자가 어떤 역사학을 하든지 그건 개인 사상의 자유다. 하지만 그러한 민족정신을 조장하는 역사가 민족의 자긍심을 일으키기는 하겠으나 결국엔 남북한 사이의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 안에서의 적대 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민족 분규와 민족 사이의 분규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한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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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 역사의 시원이 갖는 역사성
[프레시안] 2008년 04월 29일(화) 오전 07:51
고대사 해석의 문제는 근대성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그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님에도 역사학계에서는 그 둘이 마치 별개의 것인 양 간주한다. 그래서 한국 대학의 사학과 대부분에서는 고대사와 근현대사를 하나로 강의하는 교과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그 둘 사이에 생각보다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인도사에서 역사의 시원성을 그 정체성으로 가지고 있는 베다에 관한 근대의 해석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하자.
현대 인도가 안고 있는 여러 비극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 가운데 하나는 종교 공동체주의로 인한 -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신념으로 이것이 투표를 비롯한 많은 정치 행위의 판단 기준이 되고 있다.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이 이 종교 공동체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지역주의와 유사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 충돌과 그로 인한 분단, 학살, 테러의 악순환의 문제다. 그런데 이 비극의 역사가 인도 고대사의 시원이라 하는 베다 시대와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베다(Veda)란 기원전 1500 년경부터 서아시아로부터 이주해 들어 온 아리야인이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을 지나 인도아대륙 땅으로 들어와 북부를 중심으로 점차 동쪽으로 이동해 나가면서 제사장 브라만이 바라보는 신과 우주의 질서를 찬양한 찬송집이자 기도문집이다. 유목민인 그들의 주산업은 목축이었고, 말과 마차를 이용해 이동 생활을 하면서 청동제 무기로 토착민들을 정복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이주해 오기 전에 이미 그 땅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과 싸우고 동화하면서 인도 민족을 형성하였다. 그 이동은 기원전 600 년경, 갠지스 강 중상류 유역에 정착을 하면서 그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이때까지의 약 1000 년경의 시기를 학계에서는 베다 시대라 하는데, 유목을 가장 주요한 생업으로 삼으면서, 정착하지 않고 이동을 했던 시기다. 그러다보니 가장 중요한 재산은 땅이 아닌 소와 말이고, 그래서 유목을 하면서 동시에 말을 타고 소를 빼앗는 일, 즉 전쟁을 하는 일이 가장 주요한 생업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전쟁에 큰 영향을 끼친 폭풍우, 바람, 비, 불, 물과 같은 자연물을 숭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였고, 그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 종교 행위의 중심 자리에 서게 되었다.
제사가 종교에서 막중해지고 거기에 공물을 바치고 그것을 제사장이 수확하는 일이 점점 커지면서 제사장인 브라만의 사회 문화적 지위가 날로 비대해지고 결국 독점적 최고 위치에 자리 잡게 된 시기가 바로 이 시기다. 그러다 보니 후대 힌두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는 카스트에 따른 불평등법, 브라만 독점 체계, 제사 즉 의례 중심 사회, 업과 윤회 사상, 이상적 관념론 등이 모두 이 시기 말에 형성되었다.
그러다 보니 베다 시대는 인더스 문명이 발굴되어 그 연도가 현재 알려진 것과 같이 기원전 2500 년경부터 기원전 1500 년경까지의 약 1000 년경이라고 밝혀지기 이전인 1930 년경까지만 해도 실제 인도 역사의 시원이었다. 인더스 문명은 베다 시대보다 약 1000년 정도가 더 오래된 것이지만, 그 문명이 땅에 묻히고 사라져버려 1930년대에야 그 정체가 밝혀졌기 때문에 전체 역사의 흐름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인도 사람들은 베다 시대 이후부터 자신들의 문명의 원천을 항상 베다에 두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베다에 나오는 말씀과 그 세계관의 이행을 업으로 삼는 브라만은 힌두 문명의 원천을 베다에 두었고 그 영향력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오다 보니까 실로 고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도 문화의 모든 정통성은 베다에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인도에서 어떤 문화나 체계가 베다에 기원을 두거나 연계되면 정통성을 부여받게 되지만, 베다에 기원을 두지 않거나 베다를 부인하면 그것은 이단이나 사회적 불구로 낙인 찍히면서 사회에서 처참한 취급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처참한 취급을 당한 사람들조차 자신들을 그렇게 취급하는 논리의 원전이 되는 그 베다의 위압에 눌려 말 한마디, 시비 하나 걸지 못하고 오로지 베다를 우주 질서를 관장하는 유일한 법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베다의 그러한 절대 권력의 위치는 중세는 물론이고, 가치관과 사회 구조의 변동이 심하게 전개되는 근대 이후 지금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 인도에서 베다는 모든 권력의 시원이다. 처음 편찬될 때는 성스러운 언어인 산스끄리뜨로 구전되어 오다가 1000년 정도가 지난 기원전 2세기경부터 필사본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기원 후 11세기의 것이다
베다라는 어휘는 '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다시 말해 세상을 보는 지혜에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여느 종교의 시원적 말씀이 다 그렇듯 그 지혜를 진리로 삼은 후대 사람들이 그 진리를 부인하거나 따르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부여된 사회적 권력이 막강해졌다. 결국 누구든 그 시원에서 멀어질수록 사회적으로 배제에 배제를 당하고 그러다 보면 사회적으로 더욱 가혹한 폭력을 받을 수 없게 됨을 알게 된다. 특히 그로부터 1차적으로 배제된 사람일수록 그 시원에 의존하고 자신을 그 시원의 정당성을 보유하고 있는 집단과 그 집단이 만들어 놓은 체계와 가치에 순응하고 일체화해야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배제와 폭력의 변주곡은 학벌에 의해 연주된다. 2007년 가을 한국 사회를 분노와 대리 배설의 가학의 난장판으로 만든 신정아 씨. 그가 세상을 그렇게나 뒤흔들었던 것은 절대적으로 한국인의 변태적 가학주의에 발 빠르게 편승한 황색 저널리즘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학벌을 매개로 하는 배제와 독식 그리고 폭력의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이 공유한 예일대의 가을 낙엽과 맨하탄의 커피향은 선민의식을 갖게 하였고 이는 다시 집단주의의 탐욕으로 연계되었다. 그리고 그 학벌 집단주의의 폭력에 힘에 도전할 만한 사람은 웬만해서는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근대 인도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식민주의에 관한 것이다. 인도는 동인도회사를 앞세운 영국 식민주의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약 100년 가까이 걸렸으니,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반식민 민족 운동이 일어났다. 민족 운동이 일어나게 되기에는, 동인도회사의 착취도 했지만 인도 사회 문화에 대한 자괴감 또한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영국 세력은 인도 사회를 근대 사회로 바꾸기 위해 인도의 사회 문화의 많은 부분을 악습으로 보고 타파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는 와중에 일부에서는 그러한 취지에 동조하여 인도의 사회 문화를 과감히 버리고 근대화로 나아가자고 주장을 했고, 그 과정에서 인도 사회 문화의 중심이 되는 카스트와 남성 중심의 전통 질서가 심하게 공격당했다. 이렇게 되자 브라만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 사회의 기득권자들이 심한 위기의식을 느꼈고 결국 그들은 "베다로 돌아가자"라는 주장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러자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극심한 핍박을 당할 때도 꿈쩍하지 않던 민심이 서서히 끓어오르면서 민족 운동이 들불같이 번졌다.
이후 인도의 민족 운동은 전체적으로 베다에 그려진 힌두 고대 사회를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전개해 나간 보수 진영이 근대화를 주장한 진영에 비해 훨씬 큰 힘을 확보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인도 민족을 '힌두'와 동일하게 간주하는 것은 결국 무슬림에 대한 배제의 논리였고, 이로 인해 무슬림은 크게 반발하였다. 그 반발은 점차 적대적인 감정으로 치달으면서 결국 인도아대륙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비극은 지금까지도 유효해 종교공동체 끼리의 갈등과 폭력, 학살과 테러의 문제로 비화되고, 그 정도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베다가 갖는 그 권위의 절대성 때문이었다. 베다의 권위가 이렇게까지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된 것은 결국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역사 해석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도사의 시원이자 근대 유럽사의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인 인종과 민족의 문제로 연결된다. 결국 이 문제는 아리야인의 기원 문제와 관련을 갖게 된다. 아리야인의 기원 문제는 18세기말 윌리암 존스, 막스 뮐러와 같은 초기 동양학자들은 산스끄리뜨, 그리스어, 라틴 그리고 다른 유럽의 여러 언어들 사이에 존재하는 친연성을 발견하면서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 조어인 '아리야어'가 존재하였다고 주장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후 아리야인은 카스피해 부근 중앙아시아 어디쯤에 살고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한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분명한 어족을 하나의 동일한 형질을 공유하는 같은 인종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인종으로서의 아리야인 개념은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그 동안 유지해 온 기독교의 성서에 의한 인류 연대기의 권위를 흔들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생물학적 인종 우월주의로 발전하였다. 그 인종 우월주의에 의하면 유럽의 인종은 아리야인과 셈족으로 나뉘는데 아리야인이 노아의 후손이며 백인종이고 더 우월한 인종인데 그들의 순수 혈통이 훼손되고 있다는 주장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면서 인도의 브라만은 아리야인 중에 아리야인이고 그들이야말로 선진 문화를 가진 유럽인들과 같은 혈통의 후손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베다는 인도의 오랜 역사 동안 주춧돌 중의 주춧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인류 최고의 보고로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니 그 권위에 대해 아무도 시비를 걸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식민 지배에 신음하던 인도의 민족 운동가들은 자기들이 선진 유럽인과 같은 족속에 속한다고 하는 주장으로부터 자기 정당성을 찾았다.
베다를 가운데 두고 벌어진 인종주의. 그 노력은 특히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권력의 경우에 잘 나타나는데, 최근 들어서는 과학을 동원한 즉 고고학적 발굴을 적극 활용한다. 앞 장에서 이야기 한 바 있는 사라져 버린 사라스와띠 강이 인도 역사의 시원인 베다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규명하려고 한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 정권의 권력 차원의 노력과 1970년대 이후 조선 사람이 인종적으로 한 갈래에서 유래한 단일한 주민 집단이라는 주장과 그 위에서 이루어진 권력 차원의 단군릉 발굴과 성역화는 결국 역사의 시원과 인종주의가 만나 낳은 일란성 쌍둥이인 셈이다.
▲ 북한 권력은 1993년의 단군 유골의 '발굴'과 단군릉 건립을 통해 남한보다 북한이 역사적으로 - 즉 민족적으로 - 정통성을 지님을 천명하게 되었다.
베다를 통해 표출된 지배자를 닮고 싶은 욕망과 그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대중 다수의 집단주의. 그것을 한국 현대사에서 목격한다. 5공화국이 끝장나고 있을 때, 김대중과 김영삼은 후보 단일화를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김대중은 오랫동안 핍박받은 야당의 대표격인 자신으로 단일화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반면 김영삼은 군부가 김대중을 추인해주지 않기 때문에, 즉 만일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또 다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이 단일화 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군정 종식을 군부의 추인에서 찾는 그 천박함에 끌려간 상당수 시민의 역사의식의 부재로 인해 결국 야권 통합은 실패하고 - 역사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다. 양 김씨의 욕심에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시민의 역사의식에 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 정권은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자 학살의 손인 노태우에게로 갔다. 쿠데타와 학살의 주역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12.12 쿠데타와 5·18 학살이 정치적으로 국민의 뜻에 따라 이미 면죄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후보는 군정종식을 외치고 나왔다. 그리고 낙선한 후 쿠데타와 학살의 품으로 들어갔다.
상대 (특히 가해자)에 의해 자기 존재가 결정된다고 의식하는 태도, 나아가 그 존재로부터 내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태도, 그것을 우리는 흔히 노예근성이라 한다. 그러한 노예근성은 역사 인식을 제대로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역사 속에서 한 경험을 버리고 언제나 집단이 규정해 놓은 규칙이나 의미에 자신을 끼워 맞춘다. 그 노예근성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은 그 집단으로부터 분리되기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면서 공범의 위치에 들어선다. 주인님의 노예든, 하나님의 노예든, 조폭 보스의 노예든, 국가의 노예든, 민족의 노예든 ... 그것이 좋든 싫든, 자랑스럽든 그렇지 않든, 노예는 노예다.
그 노예근성이 한국 사회의 중요한 지점에서마다 유령처럼 출몰하였다. 50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루고 난 후 10년에 걸친 나름의 개혁 정권 시절. 상고 출신 대통령이 둘씩이나 나오니 나라가 이 모양 아니냐는 말에 적극 동의하는 그 '상고' 출신의 아줌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들. 대통령이 그래도 서울대나 연ㆍ고대 정도는 나와야 취업 문제가 풀리지 않겠느냐는 말에 적극 동의하는 그 공부 못한다고 무시당하는 지방대생들. 국회의원이 우리같이 노동자 출신이면 되겠냐면서 그래도 하버드 대학 출신 정도는 돼야지라고 말하는 서울 상계동 사람들 ... 2008년 한국 사회의 슬픈 노예들의 군상이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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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역사에서 '포스트'의 의미를 읽다
[프레시안] 2008년 05월 06일(화) 오전 07:47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포스트(post)'에 대한 번역에 대해 생각해본다. 역사학은 당위가 아닌 사실을 시간의 틀 안에서 다루는 종합 학문이다. 따라서 탈(脫)과 이후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포스트를 역사학에서는 '후(後)'로 번역해야 한다. 그러니 post-colonial의 경우는 '식민 후(後)'가 되고, post-modern의 경우는 근대 후(後)'가 된다. 그런데 그 어휘가 너무 생경하다고 해서 다른 말로 사용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포스트'를 '후기'로 번역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후기'는 특정 시대의 성격이 끝나지 않고 엄연히 계속되는데 앞부분과 많이 달라졌다는 의미를 지닐 때 쓰는 어휘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의미를 갖는 post-War를 '전후'하고 사용하는 것에 이미 익숙해 있다. 그러니 생경한 것에 너무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쓰다 보면 생경함은 익숙함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잇다.
포스트'는 한 시대의 특징이 마감되고 난 후의 시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용어의 사용은 그 자체로서 상당한 역사의식을 표출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의 경우를 한 번 보자. 지금, '3김 시대'는 끝났는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지금은 '포스트 3김' 즉 '3김후' 시대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후기 3김'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3김 시대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3김이 현역 정치인으로서 활동하고 있을 때를 3김 시대라고 한다면 지금은 3김후 시대가 되겠지만, 지역주의, 보스 중심의 계파주의를 주로 하는 정치 문화가 널리 영향력을 끼친 시기를 3김 시대라 한다면 지금도 그것은 여전하다. 박근혜, 이명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문화는 3김적이지 않은가?
한 가지 더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한국 현대 대중음악의 시대 구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서태지를 기준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서태지 후(後) 시대인가? 후기 서태지 시대인가? 그렇다면 이 시대 대중음악의 아이콘인 효리는 어떤 면에서 서태지적이고, 어떤 면에서 서태지적이지 않는가? 이러한 생각을 자꾸 해보면 역사에서 특정 현상에 대해 의미 부여를 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그렇게 되면 내 개인은 역사에서 좀 더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존재로 살 수 있다.
인도사에서 '포스트'에 관한 역사적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곳 가운데 하나가 기원전 6세기이다. 기원전 8세기 경 인도의 북부에 철제 농기구가 도입되면서 농경이 점차 발달하였는데 기원전 6세기 무렵에는 잉여 생산이 매우 많아지고 그 위에서 상업과 교역이 크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도시가 북부 인도에서 크게 생겨났고, 정기적 생산이 중요하게 되면서 그 생산의 근원인 땅에 대한 중요성이 증가하고 이에 땅을 기반으로 하는 영역 국가가 북부에 열여섯 개나 만들어졌다. 생산량의 증가는 계급 (즉 카스트)의 발생으로 이어지고 이에 이전의 부족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진 법체계가 네 개의 카스트를 기준으로 하는 사회법 체계로 대체되었다. 그 안에서 제사를 담당하는 브라만에게는 모든 특권을 주고 노동을 하는 슈드라는 모든 사회 종교적 권리를 박탈하였다. 이제 베다 시대에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게 참여한 부족 회의는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를 브라만 회의가 차지하였다.
베다 시대 말기부터 사회가 카스트로 첨예하게 구분되자 그 체제 안에서 안정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고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는 종교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전의 베다 종교에서는 그 사회의 모습에 따라 수많은 평등한 신들이 가변적인 물질계에서 태어났다가 사라지는 모습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이 시대에 들어오면서 그러한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불변의 법과 진리가 차지하였다. 그리고 그 불변의 영원한 존재인 브라흐만이라는 최고 가치의 보편자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가 카스트 브라만이 되면서 사회를 지배하는 권리를 영원히 보유하게 되었다.
베다 시대가 끝났을 때 실로 모든 체계는 위계로 표현되어 있었다. 인간 세상은 물론이고, 신들이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베다 시대에 가장 인기 좋은 불의 신 아그니나 폭풍우의 신 인드라는 불변의 진리에 종속된 한낱 하찮은 신으로 전락했고 브라흐만의 인격적 실체로서의 브라흐마가 최고의 신으로 자리 잡았다. 또 여러 가지 직능을 담당하는 신들은 그 직능의 유사성에 따라 카스트와 연계되면서 그 서열이 정해졌다. 아그니가 브라만의 신으로 자리 잡은 것은 브라만의 주업이 제사이고 불의 신 아그니는 불이 제사에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에서였다. 같은 이유로 술의 신 소마와, 성스러운 언어의 신 바쯔는 각기 브라만의 신이 되었고, 인드라는 무장으로서, 바루나는 질서를 잡는 위정자로서 끄샤뜨리야 신이 되었다. 여럿이 모여 다니면서 생업을 담당하는 루드라, 아디띠야, 바수, 마루뜨 등은 바이샤의 신이 되었다. 소의 신 뿌샨이 슈드라의 신으로 자리 잡은 것은 소를 키우는 일 즉 유목이 농경 사회에서 더 이상 전대와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계급과 위계로 첨예하게 구분된 사회는 긴장을 초래하였고 이는 브라만 독점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종교 변화로 이어졌다. 그것은 카스트로 첨예하게 구분된 사회 구조에 대한 반발로서 재가 중심의 물질적 삶의 추구에 대한 세상 포기 운동의 성장이었다. 그들은 제사 중심의 물질세계를 부정하고 그 맥락에서 불살생ㆍ불쾌락ㆍ무소유 등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궁극적으로 영혼의 해탈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사회적으로는 브라만 계급의 독점적 위치에 반발하고 브라만을 중심축으로 하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였다. 그래서 베다후 시대가 되면 한편에서는 카스트 구조 안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세상 긍정의 삶을 사는 반면 또 다른 편에서는 세상을 버리고 밖으로 나가 카스트와 제사로부터 자유로운 세상 부정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세상 포기 현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불교 발생이다. 불교는 종교적으로 니르바나 즉 열반을 최고 목표로 추구하는 것이었다. 니르바나란 해탈 즉 윤회로부터 풀어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윤회란 이 세상에서의 행위가 인(因)이 되어 그것이 과(果)로써 응보(應報)를 받아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끝없는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즉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윤회 행위의 뿌리가 되는 인을 없애야 한다. 이 인을 부처는 이 세상에서의 사회 행위로 인식했다. 따라서 최고 경지인 니르바나를 추구한다는 말은 이 사회를 부정하고 그로부터 철수해야 함을 기본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로서는 사회에 머물러 있고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었으니 그를 따른다는 불교도는 무조건적으로 세상을 버리고 떠난 출가자일 수밖에 없다.
불교의 출가 수행자들은 철저히 혼자였고 주로 깊은 숲 속이나 동굴 혹은 시체 유기장이나 화장터 혹은 큰 나무 밑에서 사회와는 완전히 격리된 생활을 하였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종류의 경제 행위도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도 허용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바리때와 최소량의 옷 정도를 제외한 어떤 형태의 재산도 그 소유가 금지되었다. 그들은 주로 하루하루 보시에 의존하여 살아가야 했다.
▲ 세상을 버리고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해 바깥으로 나간 사람. 기원전 6세기 부처는 이런 비슷한 모습을 하였을 것이다. 그는 경제와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하였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대중 운동으로 이끌어냈다
이러한 급진적인 탈사회적 종교가 발생하게 된 것은 기원전 6세기 동북부 지역이 베다후 시대로 접어들면서 발생한 물질 체계 속에서였다. 베다 시대 말기부터 도입된 철기의 사용은 기원전 7세기경에 인도 북부의 갠지스 중상류 유역에서 널리 사용되면서 새로운 농업 경제를 일으켰다. 당시의 새로운 농업-도시 경제는 소의 사용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였다.
하지만 베다 시대의 소 살생 제사는 흔들리지 않는 전통으로 극심한 사회 변화가 일어난 이 시대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그것은 새로운 농업-도시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래서 새로운 농업 경제를 일으키거나 그것을 후원하는 자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제사에서의 소의 살생 금지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필요한 조치였다. 이러한 조치를 필요로 하였던 세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바이샤와 농업과 상업으로부터 나오는 세금과 토지로부터 나오는 여러 물질적 이익 위에서 세력을 형성하는 끄샤뜨리야 세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을 후원해줄 새로운 종교를 찾았고 여기에 불교와 자이나교가 적극 호응하였다.
더불어 새로운 물질문화는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 시켰고 많은 사람들에게 빈곤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인민들이 이전 시대의 보다 단순하고 재화로부터 떨어져 있는 그런 금욕적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원하였다. 산업혁명 이후 세상이 물질 중심의 세계로 급격히 변화한 유럽에서 청빈한 삶을 강조하는 청교도 운동이 크게 일어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부처가 불살생과 무소유를 크게 강조하고 탈 사회를 요구하였던 것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였다.
불교는 브라만을 정점으로 하고 불평등과 차별을 근간으로 하는 카스트 체계를 반대하고, 브라만에게 바치는 제사를 업으로 삼아 선업을 많이 축적하여야 다음 세계에 좋은 곳으로 가는 윤회의 체계를 부인하고 그 윤회의 거대한 고리를 풀어 탈출하는 해탈을 주창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브라만 세력이 극대화 된 베다후 시대의 역사적 맥락에서였다. 불교가 세상을 버리고 바깥으로 나갈 것을 요구한 것은 바로 이러한 구태의연한 전통과 체계가 새로운 사회에 맞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이자 항거였다. 이것이 곧 역사에서 다음 사회로의 변화 즉 '포스트'의 의미다.
베다후 시대에서 평등이 쇠락하고 불평등이 고착된 것은 무엇보다도 생산량의 증가 때문이었다. 역사상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그 증가한 양의 혜택이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간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생산이 증가하면서 불평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다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론 속에서만 가능하다. 마르크스 같이 인간을 선한 존재로 생각하는 이상주의자의 머릿속에서는 가능할 수 있겠지만, 실제 인간의 역사에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기원전 6세기. 인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부의 성장과 그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이 폭발하였다. 부처는 그 시대가 낳은 아들이었다. 부처는 재물이란 골고루 분배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가난이 모든 죄의 뿌리라고 하였고,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재산을 부자에게 빼앗기지 말고, 현명하게 부를 쌓으라고 했다. 물론 재물이라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바의 최종이 아님은 두말 할 필요도 없지만. 부처가 불살생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으니 그가 의미한 불살생이란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을 하라는 의미가 아닌 농사 짓은 소를 죽이지 말라는 말이었다. 가난한 인민들이 소를 브라만 제사에 바쳐버리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브라만 주도의 착취 구조에 빠져 들 수밖에 없음을 설파한 것이다. 부처가 지금 한국 사회에 산다면 그는 영락없이 부자에 대한 증오가 있는 사람으로 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조중동에 의해서.
기원 전 6세기 인도에서 발생한 생산량의 증가가 사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현상은 그로부터 2500 년이 지난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똑같이 발생하고 있다. 부에 대한 끝없는 탐욕으로 인한 사회 불평등과 양극화의 모습 그리고 그로 인해 계급이 첨예하게 나뉘는 현상이 너무나도 닮아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경제 불평등과 양극화의 문제는 경제 고유의 문제가 아닌 정치 논리의 희생양 꼴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면서 저소득층의 소득은 정체되고 소득 분배가 악화되었다. 사실 거시경제적으로 4~5% 성장률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지만 정치적 냄새가 다소 짙은 체감 경기 악화라는 경제 위기론이 저소득층 중심으로 민심을 악화시켜 버렸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 내내 경제적 근거나 논리 혹은 사회적 정당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고, 서울 강남으로 대변되는 반분배주의자들의 논리에 저소득층과 중산층이 감정적으로 동조를 하는 우스운 꼴이 나버렸다. 여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이기주의가 부동산 문제와 결합하였고, 저소득층과 중산층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세금 폭탄'이니 하는 따위의 정치적 술어에 포섭되고 말았다.
▲ '세금폭탄', 현대 한국 사회에서 부자가 만들어 내고 서민이 그 안에 포섭되어 버린 대표적인 정치적 술어.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왔다. 기원전 6세기 고대 인도에서는 유목 시대가 끝나고, 농경 시대가 왔고, 서기 2000년대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시대가 왔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카스트의 첨예한 대립 구조가 형성되었고, 한국에서는 비정규직 88만원 세대의 구조가 형성되었다. 비슷한 상황이지만 부처가 제사를 반대하면서 사회 바깥으로 나가 버린 가히 혁명이라 할 수 있는 그런 거사가 한국 땅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부처의 혁명적 실천을 믿고 따르면서 고대인도 사회의 구조를 뿌리 채 흔든 인민들의 거대한 움직임도 이 땅에서는 전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챙기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현란한 정치적 술어를 믿고 따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허다할 뿐이다. 경제의 문제를 넘어 사회 구조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역사적 시각이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개탄스럽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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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를 통해서 본 역사에서의 '발전'
[프레시안] 2008년 05월 13일(화) 오전 08:12
불교는 기원전 6세기 경 북부 인도에서 브라만의 최고 권력을 정점으로 하는 브라만교의 제사 의례주의에 반발하면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당시 인도 종교의 여러 분파 가운데 한 모퉁이 정도였으나 차츰 시간이 가면서 인도에서는 물론이고 세계 전역에서도 화려하고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는 막강한 종교이자 정치ㆍ경제ㆍ사회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았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불교는 인도에서 '발전'을 이루는 순간 스스로 '퇴보'를 하게 되었다. 신자가 많아질수록, 왕권으로부터 더 많은 후원을 받을수록, 사회로부터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수록 불교는 인도 땅에서 퇴보하다가 결국 소멸되었다. 어떻게 이런 모순이 있을 수 있을까? 발전이 퇴보고, 퇴보가 발전이라는 이 고민스러운 역사적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낼 수 있을까?
부처의 아들 이름은 라훌라(Rahula)다. 장애물. 한국어의 느낌을 살려 번역하면 '눈에 밟히는 놈' 정도가 되지 않을까? 부처는 왜 아들이 눈에 밟혔을까? 부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야 즉 환상이다. 환상, 존재하지 않는 것. 왜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고 하였을까? 부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두 사람의 이름을 통해 우리는 초기 불교의 성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초기 불교는 애초에 관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대단히 급진적인 종교였다. 부처는 세상을 고통이라고 보았고, 세상을 위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부처는 세상을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세상 밖에서 철저히 혼자 걸식하고 유랑하며 살았다. 주로 깊은 숲 속이나 동굴 혹은 시체 유기장이나 화장터 혹은 큰 나무 밑에서 사회와는 완전히 격리된 채 살았다. 그러면서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야만 하고, 신의 손에 의존하지 않으며, 일체의 숭배나 의례로부터 독립된 그 무언가를 찾아 가야만 했다. 부처에게 그 무언가를 찾는 일은 궁극 즉 해탈이고, 그 해탈은 인과응보의 윤회 메커니즘을 깨는 것이었다. 인과응보의 윤회를 깨려면 인(因)을 제거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인은 사회적 행위와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궁극 즉 해탈을 이루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완전한 포기를 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할 때만 가능하였다.
그래서 부처를 비롯한 초기 불교의 걸승에게는 생산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이나 경제 행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생산 행위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행위이기 때문에 사회를 버리고 나가야 하는 이치와 맞지 않아서였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바리때와 최소량의 옷을 제외한 어떤 형태의 재산을 소유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렇다면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갖지 않는 그들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들은 하루하루 남이 주는 보시에 의존하여 살아가야만 했다. 그러던 그들 앞에 난관이 닥쳤다. 북부 인도는 1년에 한 번 큰 비가 내리는 우기가 3개월 정도 계속된다. 따라서 그 우기가 되면 세상을 돌아다닐 수가 없어 걸식을 못하게 돼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그들은 우기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걸식 유랑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들이 버리고 간 사회 안에는 힌두교 신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그런 출가 수행자의 종교적 행위가 힌두교의 다양한 종교 행위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힌두교는 불교도와 같이 세상을 버리고 떠난 부분을 용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출가 수행자들에게 보시를 베푸는 것은 자기들의 세계관에 합당한 즉 좋은 곳으로 윤회하기 위해 선업을 쌓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시의 부유한 힌두 신자들은 초기 불교의 그 출가승들을 위해 자신의 사유지를 기부하여 우기 동안 그들이 편안히 기거하도록 베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해서 우기 동안의 안거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원래 우기 동안만 하기로 했던 일시적 안거 생활은 시간이 흐르면서 정착 생활로 바뀌어 갔다. 그러면서 교단이 만들어지고 사원이 세워졌다. 사원이 만들어지면서 불교는 그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내부의 법규를 만들어야 했고, 정기적으로 세상으로부터 기부를 받아야 했다. 결국 사회를 버리고 나간 불교가 사회 바깥에 또 다른 사회를 만든 셈이었다. 그것은 결국 사회 안으로 다시 들어온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사원이 사회의 물질적 기부 위에서 운영되면서 교단은 어쩔 수 없이 사회의 기부자와 타협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는 사회를 부정하고 나가는 전제 조건을 충족하는 자만 궁극의 목표인 열반을 추구할 수 있었고 따라서 사회 안에 존재하는 사람은 결코 불교도가 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들의 경제적 토대를 부인할 수 없게 되어서 사회 안에 있는 사람도 불교도로 받아주게 되었다. 이른바 재가 신자다. 이제 교단은 재가 신자로부터 물질을 받고, 재가 신자는 교단으로부터 영적 가르침을 받는다. 시간이 가면서 재가 신자가 바치는 기부물의 종류도 점차 다양해졌다. 처음에는 음식, 옷, 거주지와 같은 차원이었으나 점차 탑이나 묘와 같은 건조물은 물론이고 탑을 건조할 때 사리와 함께 부장될 보석 같은 것도 포함되었다. 이어 교단이나 승려가 사유 재산을 축적하는 일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교단이 사유 재산을 축적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재가 사회에 경제적으로 매우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불교계에서의 재가 사회의 위치 상승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원래의 철저한 출가승만을 위주로 한 불교의 교리도 그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미 교단이 경제적으로 매어 있는 재가 사회를 언제까지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이른바 출가자는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고, 재가 신자는 선업을 쌓아 윤회를 추구하는 이중의 목표가 설정되었다. 재가 신자가 추구하는 윤회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서쪽에 있는 극락 즉 서방정토로 가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공덕을 쌓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그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이미 이 사회를 떠난 출가승의 사원에 물질을 기부하는 것이었다.
당시 힌두교의 제사 의례 기계주의에 식상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추구하면서 그러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자신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왕생극락을 허용해주는 불교에 크게 매료되었다. 그리하여 불교는 많은 재가 신자를 거느릴 수 있게 되었고, 사원은 날로 번성하고 풍성해졌다. 그러면서 불교 교단은 세상을 떠나지 않은, 그렇지만 자신들을 물적으로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부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태어나서, 결혼하고, 죽고 하는 등의 통과 의례를 맡아주었고, 아픈 사람, 병약한 사람, 축복을 필요로 하는 사람, 불안한 사람 등을 위해 의례를 행사해줌으로써 그들과 더욱 밀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불교는 세상 안의 종교가 되고 있었다.
진리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버리고 떠나는 경우도 많지만, 세상 속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지쳐 살고 있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에겐 그 세상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푸념 속이나 동경의 대상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그들은 병들어 쓰러져 있는 노모를 두고 세상을 등질 수가 없다.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자식새끼를 팽개치고 떠날 수가 없다. 그들이 한 푼 두 푼 물질을 바치고 있고 그 위에서 구조화되어 버린 불교는 이미 그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 세상 안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불교의 원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 많이 벌고, 성공하고, 건강하고, 병 없이 오래 살고 하는 것은 이제 버려야 할 세상일도 아니고 무가치한 것도 아니다. 이제 그들이 바라는 바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은 신에게 간구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이런 신, 저런 신이 수도 없이 많아지고, 이런 의례, 저런 의례도 수도 없이 많아진다.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도록 기도회를 열거나, 전쟁 중에 죽은 장병의 혼을 위로하고 왕생극락 하도록 의례를 열어 주는 예는 인도에도 있고, 태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다.
불교 교리의 변화는 우선적으로 부처 관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제 부처는 애초의 인간 스승에서 신이 되었다. 부처에게 초능력이 부여되고 그에 대한 믿음과 숭배 의식이 널리 대중화되었다. 원래에는 세상일을 위하여 초능력 혹은 주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저급 행위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제 그들에게는 부처가 비를 내리고, 불을 끄고, 뱀에 물린 독을 치유하는 일을 하는 존재로 변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신 부처의 유골은 숭배 대상 중의 으뜸으로 자리 잡았고, 부처를 우상으로 만든 불상 또한 널리 숭배되었다. 바야흐로 불교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 탑은 성자의 유골을 숭배하는 힌두교의 전통이다. 부처는 애초에 이것을 부정하였다. 그렇지만 대중의 신앙은 결국 그 부처의 생각을 따르지 않았다. 탑은 가장 비(非)부처적이면서 가장 불교적인 것이 되었다. ⓒ이광수
이제 승려든 재가 신자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인의 노력에 의한 진리의 깨달음을 통한 부처되기는 더 이상 추구하지 않고, 공덕을 쌓는다거나, 도덕적인 삶을 산다거나 하는 것을 통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처의 사리를 숭배하거나. 탑을 세우거나 불상을 만드는 등의 행위를 통해서도 그리고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이 모래로 탑을 세우거나, 탑에 꽃을 바친다거나, 부처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더라도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아무 곳에서나 '성불하세요'라는 말을 아무런 부담 없이, 누구나 하고 듣게 된 것이다. 각고의 깨달음을 통해서 도달하는 부처는 이제 옛말이 되어 있었다.
종교의 본질이 '세상을 떠나는 것'에서,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바뀐' 것이다. 사실 이러한 '바뀜'을 두고 어떤 사람은 변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인도의 현상을 인도 바깥의 근대 유럽이나 기독교적 세계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결국 그러한 평가는 불교를 잘못 이해하거나 매도하는 것이 된다. 불교는 기독교와는 달리 그리고 부처 스스로 이야기 하였듯이 (석가모니) 부처의 종교가 아니다. 이는 기독교가 기독 즉 예수의 종교라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불교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자들의 종교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길을 택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 안에서 사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앞의 길도 지극히 불교적이요, 뒤의 길도 지극히 불교적이다.
그래서 제대로 표현하자면 '변화'가 맞다. '변질'이나 '왜곡'은 기독교와 같은 근본이 있는 종교의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곳에는 근본이 있지만 불교의 세계에는 근본이란 있을 수 없다. 정 있다면 근본이 없다는 것이 근본이라 할 수 있을까? 근본이 없다 함은 그 안에서 '유신'이나 '개혁' 혹은 '청산'이 성립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
불교에 미신적 요소가 있다거나 일제의 잔재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청산해야 한다고 하는 말은 지독하게 비불교적이다. 유신이나 개혁을 하려면 기준을 삼아야 하는데 무엇을 근본으로 삼겠다는 말인가? 석가모니 부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겠다고 한다면 - 그것이 철저히 비불교적이라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 불상, 탑, 명부전, 산신각부터 쓸어 없애야 하고, 극락이니 보살이니 하는 개념부터 모두 폐기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대중화에 성공한 불교는 이름만 다르지 그 바깥에 있는 힌두교와 똑같아졌다. 이제 세상을 부정하지 않고, 세상을 진리의 바다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출가하지 않는 승려는 브라만과 다를 바 없고, 불교의 여신은 생산을 추구하는 힌두교의 여신과 다를 바 없다. 힌두 사회에서는 부처가 이미 힌두교 최고의 신인 비슈누의 화신이 되어 있었고, 관음보살은 힌두교의 쉬바와 동일한 신이 되어 있었다. 불교도라고 해서 카스트가 없는 것도 아니고, 숭배나 의례 행위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로부터 지원을 안 받는 것도 아니라면 그 불교는 애초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다. 신도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나 애초에 가지고 있던 성격은 이제 대부분 사라지고 없어졌다. 불교는 초기 몇 사람에서 출발하여 대승 불교 시기에 들어오면서 국가의 비호를 받고 일부에서는 국교와 버금가는 위치에 오르기도 했다. 물적 규모도 커지고, 그와 관련된 예술이나 문학 작품도 수없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그럴수록 자신은 힌두교와 똑같아져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결국에 힌두교 안으로 흡수되었다. 결국 불교는 대중의 뜻을 따라 발전한 것이었는가, 퇴보한 것이었는가?
우리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 '발전'에 대해 생각해 본다. 국민 다수의 뜻이 경제 성장을 바란다고 해서 그러한 정책을 펴고 그 성과를 이뤄냈다고 해서 그것이 발전하는 것인가? 일인당 국민소득이 이만불이라고 해도, 그 땅에 방학이 싫은 그 배고픈 아이들이 부지기수라면, 88만원을 월급으로 들고 들어오는 이 땅의 아버지가 부지기수라면, 그것을 발전이라 할 수 있는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이 땅에서 아직도 베스트셀러로 읽히고 있는 사회, 그 사회는 그 난쟁이들이 살던 시대로부터 발전한 것인가?
보수적인 입장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의 고민을 찾을 수 있자. 다수의 뜻이 그렇고 역사가 진행하는 방향이 그렇다고 할 때, 쉽게 이혼하고, 성을 파는 것도 노동의 일환이 되고, 가족을 해체하는 따위도 과연 사회의 발전인가? 잘 먹고 잘 살게 되면서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식 세대수가 가장 적은 오이시디 국가가 되었다는 것도 발전인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럼 발전인가?
▲ 한국에서 경제 발전은 양극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이 사회의 가장자리로 내몰리는 양극화를 발전이라 할 수 있을까?
대중이 원하고,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규모도 커지고 성과도 화려하게 나온다고 해서 과연 '발전'이라 할 수 있는가?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성장하는 것도 발전이라 해야 하는가? 역사에서 '발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인문 정신은 간 데 없고, 이윤만 활개 치는 지금의 세상에서 곱씹어 볼 문제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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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까, 기득권에 도전하고 좌절하다
[프레시안] 2008년 05월 20일(화) 오전 07:18
북부 인도에서 국가가 발생한 기원 전 6세기로부터 약 200년이 지나면서 최초의 통일 제국이 등장하였다. 마우리야 제국. 개조 짠드라굽따 마우리야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인도아대륙의 남쪽까지 대부분을 무력으로 통일하여 명실상부한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 그렇지만 짠드라굽따 마우리야에게도 눈엣가시처럼 걸려 있던 게 하나 있었다. 인도 동부 지금의 오릿사 주와 비슷한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깔링가 왕국이었다.
깔링가는 짠드라굽따 마우리야 때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이자 2대 왕인 빈두사라 때도 건재하였다. 그렇지만 짠드라굽따 마우리야의 손자이자 빈두사라의 아들이면서 3대 왕으로 등극한 아쇼까는 이곳을 가만 두지 않았다. 아쇼까는 왕위에 오른 지 8년 만에 깔링가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그 전쟁으로 인해 10만 명이 죽고, 15만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그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실종되었다.
▲ 다민족으로 구성된 현 인도공화국은 단일한 국민국가 건설이 최대의 국가 과제다. 최초의 통일 군주 아쇼까가 각지에 세운 돌기둥의 머리를 국가 상징으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깔링가를 복속시킨 후 아쇼까는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다고 했다. 왜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해야 하는지 가슴이 미여진다고 했다. 자기 일에 열심히 살던 그 많은 보통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헤어지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미다고 했다. 그러한 아픔이 또 다시 일어나면 그 슬픔과 고통은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이니 이제 북소리 (즉 전쟁)에 의한 정복을 버리고 다르마 (즉 법과 도리)에 의한 정복을 하겠노라고 만방에 고했다. 아쇼까는 이런 심정을 깔링가를 정벌하고 그 자리에 세운 돌기둥에 새긴 왕의 칙령을 통해서 공포하였다.
이를 두고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아쇼까를 평화주의자라고 치켜세웠다.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동양만의 위대한 인물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아쇼까는 진정으로 폭력을 후회하고 그래서 그것을 멀리 한 가슴이 따뜻한 군주였을까? 아쇼까는 진정 그 전쟁에서 충격을 받아 삶의 태도를 바꾸었을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겪고 정말로 슬퍼하여 눈물을 흘렸을까? 진정 그는 깔링가 전쟁으로 인한 충격으로 전쟁을 포기한 평화주의자가 되었던 것일까?
아쇼까는 깔링가 전쟁을 치른 후 더 이상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이 사실만 보면 위와 같은 해석이 설득력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쇼까에 의해 인도아대륙의 모든 지역은 제국 정부 손 안에 들어 와 더 이상 정복의 대상으로 삼을 만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바깥 지역은 더 이상 영토 확장을 위한 무력 정복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만 해도 중앙으로부터 너무나 떨어져 있는 지역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제국의 효율적 통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그래서 그는 영토 내의 모든 백성에게 통일된 사상과 이념을 확립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국정의 과제로 삼았다. 기원전 6 세기경 인도판 '전국시대'와 '제자백가'가 요동을 치면서 20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처음으로 통일 제국을 이루다 보니 그 시절 제국 정부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통일된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였던 것이 기득권층이 유지하고 있던 사회 이데올로기를 깨고 그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사의 진시황의 경우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이룬 진시황이 사상을 통일하고 분서갱유를 통해 유가 사상을 분쇄하려는 것과 동일한 맥락인 것이다. 아쇼까나 진시황이나 모두에게는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이루고 기득권 세력을 누르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였던 것이다. 같은 목표를 두고 진시황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강공책을 사용하는 방식을 택했으나 아쇼까는 그들에 대한 탄압을 이이제이의 방식을 통해 실행에 옮겼다는 방식이 다를 뿐이었다.
진시황이 강력한 법가 사상을 통해 사상 통일을 꾀하면서 유가 사상을 압박했다면, 아쇼까는 당시 인도의 모든 사상과 종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다르마 즉 법과 도리를 통해 브라만의 독점적 지위를 약화시키려 했다. 아쇼까는 왕은 아버지고 백성은 자식이니 백성은 왕을 믿고 그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그것이 다르마 즉 도리라고 했다. 모든 백성은 브라만뿐만 아니라 불교 승려를 비롯한 모든 종교의 사제를 똑같이 섬기라고도 했다. 즉, 브라만에게만 물질을 바치지 말고 다른 스승에게도 물질을 바치는 것이 도리라고 한 것이다. 종은 주인을 섬기고, 각 카스트는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바로 법과 도리라고 했다. 그 안에는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되 브라만을 견제하고자 하는 뜻이 강하게 담겨 있었다.
이러한 아쇼까의 다르마 정책의 핵심은 제사 금지였다. 그는 살생을 금지하고, 불살생을 주창하면서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폈다. 그것이 곧 다르마의 정신 즉 법과 도리에 따르는 것이라 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브라만교의 제사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제사라는 것이 무엇인가? 제사란 브라만에게 살아 있는 제물을 바쳐 그것을 희생시키고 절차에 따라 사제에게 신도들이 공물을 바치는 창구다. 그 공물은 단순한 옷이나 음식뿐만 아니라 소, 돈, 토지 등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규모의 재물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제사는 브라만의 경제적 원천이다. 그리고 그 브라만은 통일 제국이 만들어진 그 당시 사회 제1의 기득권자였다. 그 브라만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였으니 브라만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아쇼까의 불살생을 기반으로 하는 제사 금지 정책은 브라만들에게 심한 타격을 주기 위한 브라만 억압 정책이었다.
아쇼까가 불살생을 천명하면서도 전쟁 포기를 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쇼까는 한 번도 군대를 해산하였다거나 무력 포기를 한 적이 없다. 만약 그가 깔링가 정복 후 칙령을 통해 밝힌 바와 같이 전쟁과 살육에 대해 후회를 하였다면 그곳으로부터 데려 온 15만의 포로를 풀어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60만 대군의 군대 또한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결국 그가 의도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외적으로는 더 이상 영토 확장 정책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내적으로는 왕에게 대항하여 그렇게 가슴 아프게 죽거나 다치지 말라는 뜻이었을 뿐, 어떤 조건에서든 폭력이나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아쇼까는 제사 금지의 정책을 확실하게 이행하는가를 감시하기 위해 정부 관리와 많은 첩보원을 두어 브라만을 비롯한 모든 백성들의 정책 시행 여부를 감시하였다. 그리고 그 정책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자는 심하게 처벌하였다. 아쇼까가 운영한 중앙 첩보 체제는 고대 세계에서 어떤 제국도 따라 오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조직이었다. 아쇼까는 이 조직을 통해 이 정책을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심한 형벌을 가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브라만이라는 기득권자에 대한 재갈을 물리고자 하는 최초의 통일 군주가 갖던 절박함 심정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아쇼까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마우리야 제국은 멸망했다. 도처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서였다. 진시황이나 아쇼까나 똑 같이 통일 군주이면서,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제국이 멸망한 것은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을 썼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은 항상 정부를 등에 없고 득세하는 탐관오리들이 득시글거리게 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국민들은 그들로 인해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한 백성들의 마음에 평소 왕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기득권 세력이 불을 지핀 것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그래서 실제로 마우리야가 멸망하고 그 뒤로는 브라만이 왕이 된 왕조가 연거푸 세워졌다.
아쇼까가 불살생을 앞세워 브라만에게 제사를 못하게 한 것은 요즘 같으면 과세 평등의 원칙을 앞세워 종교인에게 세금을 부과하고자 하는 움직임과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에서 대형 교회가 이미 기득권 세력의 중심부에 서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들의 힘의 원천인 물질에 대해 세금을 매긴다고 하는 것은 거대한 기득권을 견제하겠다는 의미일 수 있다. 지난 노무현 정권 시절에 개혁 시민 세력 사이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 문제가 단순한 과세 문제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포장은 그렇게 되었지만 실상 그 의도는 유신과 5공을 거치면서 25년 이상 지켜온 기득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대형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에 대해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고 그래서 본격적으로 그 운동의 배후라 생각하는 정부와의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그 기득권자들은 그 권력을 쓰러뜨리고 결국 다시 권력을 손에 쥐었다.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에서 한국에서의 지난 10년 정부 시절에 개혁 진영이 실패하였듯 아쇼까의 경우도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것은 그 때 당시나 지금이나 결국 그 두 권력이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자와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그 이데올로기 만드는 일을 담당하는 자는 당시 인도에서는 브라만이었고, 한국에서는 조중동과 세력화된 대형 종교 권력이었다. 그 브라만 이데올로기는 이미 500년 넘게 그 땅에 뿌리를 박고 있었고, 조중동과 대형 종교 권력이 분단과 내전 그리고 독재를 거쳐 오면서 만든 국가주의, 민족주의, 반공주의, 지역주의 그리고 그 위에서 만들어진 영웅 중심주의가 짧게 잡아도 1945년 이후 이 땅에 굳건히 뿌리 내리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한 이 시대의 신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결국 겉으로는 작게 보이지만 그 의도의 뿌리는 엄청난 그 싸움에 기득권자의 승리는 불을 보듯 훤하다.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 그대로이다.
아쇼까는 브라만 기득권자와 싸우다 패배한 철저한 현실 군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그를 고도의 평화주의자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그가 남긴 1차 사료를 역사적 맥락에서 분석하지 않고, 액면으로만 해석한 결과다. 사료를 액면으로만 분석하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을 통해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자, 때가 때이니 만큼 1980년 5월 광주로 한 번 떠나 보자. 본격적인 사료 분석에 앞서 한 가지 가정을 먼저 해보자. 앞으로 500년이 지난 후,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자료로 당시 발행한 어떤 관제 신문의 기사 하나밖에 없다고 가정해 보자. 고대인도 사회에서 남긴 자료는 보통 이런 식으로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 관제 신문 기사는 전두환 장군이 광주에서 흘린 피를 보고 너무나 가슴 아파 하고, 왜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고 싸우는지에 대해 괴로워하며 그래서 이 땅에 '민주'와 '정의'가 강같이 흘러내리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 한 몸 평화의 제단에 바쳐 이 땅을 바로 지켜낼 결심을 하였다고 써내려갔다고 가정해 보자. 자, 이 자료 하나를 액면으로만 해석하여 전두환을 평가한다면 우리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전두환은 뛰어난 평화주의자요 민주와 정의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고뇌한 철인 군주다.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 조선일보는 8월 28일자 「새 시대의 개막-전두환 장군의 대통령 당선에 제하여」라는 사설을 통해 "...전 대통령의 취임으로 바야흐로 새 시대 새 역사는 개막되고 있으며 국민들은 전 대통령 정부에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걸고.."라고 했다. 이 자료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역사를 읽어 낼 수 있을까?
그 사료를 가지고 전두환이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 것에 대해 슬퍼하였다고 보는 것은 몰역사적 해석이다. 역사적 해석이 되기 위해서는 그 유혈 사태의 원인 제공자가 본인임을 밝히고 그에 대한 죄과를 치르는 것이 우선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는 그 짐을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에 있는 검증되지 않은 '지역감정'에게 그 짐을 떠넘겼다. 비열한 짓이다. 자신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학살을 자행하였으면서 그 죄를 국민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전두환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그 작당이 이미지 조작을 매우 능수능란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는 '깡패'를 다수 엮어 삼청교육대로 보내고, 국민들에게 원성의 대상이던 부정부패 정치인들을 족쇄에 묶어 구국의 결단을 한 단호한 통치자의 인상을 심어주었다. 올림픽을 유치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발전하는 '우리나라'의 긍지를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그를 통해 그는 더러운 피의 권력을 전 세계로부터 추인 받았다. 금강산 댐 사건을 통해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면서 동시에 정부를 중심으로 국민 통합을 이루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함께 보았다. 대구와 광주 사이에 고속도로를 뚫어 자신은 '지역감정'을 해소하고자 애쓰고 고민하는 따뜻한 지도자임을 국민에게 널리 심어주었다.
전두환이 구국의 결단 운운하고, 동서 간의 화합 운운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내자고 그 세치 혀를 휘두를 수 있었고 그 현란한 조작에 국민이 쉽게 말려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언론을 장악하고, 정보 조직을 강화하여 한편으로는 조작과 숙청을 감행하면서 또 다른 편으로는 기득권자와의 일심단결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대오를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그 현란한 사술의 생명력은 의외로 끈질기다. 그래서 21세기 한국에서 아직도 전두환의 위세는 당당한 것이다. 29만원밖에 없다고 전 국민을 농락하고 있는 그의 위세는 결국 기득권자와의 권력 분점을 통한 사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국민이 역사 인식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 사술에서 깨어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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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의 역사를 통해 대중화의 힘을 읽는다
[프레시안] 2008년 05월 27일(화) 오전 08:17
마우리야 제국이 붕괴된 후 인도는 오랫동안 마우리야와 같이 거대한 제국의 탄생을 보지 못했다. 중부에서는 브라만들이 나라를 세워 아쇼까의 흔적을 지우려 애를 썼고, 남부에서는 마우리야가 문명을 전파해 준 덕에 갠지스 강 유역의 선진 철기 문명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이제 인도 전역에 카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 체계가 자리를 잡았고, 그 위에서 법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다. 바야흐로 브라만 문명화를 이룬 것이다.
북부와 서북부의 상황은 이와는 조금 달랐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이후 많은 외지 사람들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아대륙 안으로 밀고 들어 왔다. 침략과 이주의 물결은 알렉산드로스 이후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눌러 앉아 그곳을 통치하던 그리스 인들이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 족의 압박을 피해 인도로 대거 몰려들어 온 것이었다. 이는 중국이 만리장성을 쌓아 그 유목민들이 중국 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기 때문에 일인데, 스키타이 족들이 어쩔 수 없이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그리스 인을 압박했고, 마침 그곳에는 마우리야 이후 강력한 세력이 형성되지 않아 그들의 침략과 이주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인도로 들어 와 정착을 한 그들은 힌두쿠시 이남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델리 지역을 넘어 멀리 갠지스 강 중류 유역까지 세력을 뻗쳤다. 그 후 중앙아시아로부터 샤까 족이 들어오고, 또 이란으로부터 파르티아 인이 들어왔다.
이후 인도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꾸샨 족이 들어 왔다. 꾸샨 족은 중앙아시아에 살던 유예치 족의 일파로 중국 변경을 떠돌다가 카불을 거쳐 힌두쿠시를 타고 내려와 인도아대륙 북부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제국을 중앙아시아의 옥서스 강에서부터 인도아대륙의 갠지스 강까지 넓혔다. 꾸샨 제국은 현재의 타지키스탄,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인도를 걸쳐 형성된 고대 세계 최고의 코스모폴리탄 세력이었다.
그리스 인 이후 꾸샨 족까지 외래인은 하나같이 다시 돌아가지 않고 이 땅에 정착을 했다. 그들은 카스트를 받아 들여 인도의 사회 제도 안으로 들어 왔는데, 모두 끄샤뜨리야로 편입되었다. 그들은 왜 카스트 체계 안으로 들어 왔을까? 그들은 외래인으로서 무력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 온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정국을 안정되게 이끌어 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그 사회의 기득권자인 브라만과의 연합을 꾀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당시를 기록한 여러 사료에서 브라만이 이구동성으로 왕을 '카스트의 보호자'로 명명한 이유는 다 이런 이유에서이다. 왕은 카스트 질서를 지켜내고, 브라만은 공물을 받아 경제 사회적으로 세력을 축적하면서 두 세력은 연합해서 통치 하는 것이다. 기반이 없는 외래인은 브라만과 권력 유착을 하지 못하면 왕국을 편안하게 다스릴 수 없었다.
데칸 고원 이남으로 넓은 유역을 통치하던 사따와하나 왕국이 카스트를 받아들여 유지한 것 또한 같은 의미에서였다. 카스트는 원래 갠지스 중상류 유역에서 발생하여 애초 그 틀 안에 들어가지 못한 갠지스 유역 바깥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낮은 카스트로 편입이 되는 사실을 생각하면 굳이 사따와하나 왕국같이 토착민 왕국이 그런 제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남부 인도에 있는 사람이라도 힘이 있는 실력자 즉 왕이 처한 입장은 백성과는 크게 다르다.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하다면, 외부로부터 하루 속히 받아 들여 정권의 정당성도 취하고, 신화도 만들어서 권력도 강화하고, 사회 조직도 체계적으로 하고, 농업을 발달시켜 경제적 발전을 이뤄 국고도 채우고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북에서 내려 온 브라만들이 남의 실력자를 끄샤뜨리야로 삼아주는 것이고 남에서 나온 왕은 카스트를 보급하고 굳건히 유지하면서 브라만에게 물질을 안겨 주는 대신 브라만의 신화 만들기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서력기원 초기, 이 시대 외래인들은 카스트를 적극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나 힌두교와 같은 인도의 종교 또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실 그 외래인, 특히 그리스 인은 근본적으로 인도인과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눈으로 보지 않고, 손으로 만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대단히 영적이고, 직관적이며, 관념적인 힌두교와 불교의 세계관과 종교 문화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우리에게 불경을 통해 밀린다로 알려진 메난데르였다. 그는 우리에게 나가르주나 혹은 한자어로 용수(龍樹)로 널리 알려진 나가세나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불교 교리에 대해 물어 보았다. 이후 그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간 대화를 경전으로 편찬한 것이《밀린다왕문경》이다. 밀린다왕은 묻기를, 불교가 세상을 부인한다는데 그러면 이 사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왜 불교 신자인지를 물었다. 또 이 세상에 남아 궁극을 추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도 물었다. 사회에 남아 있는 사람과 사회를 떠난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결국 나가세나는 사회에 나간 사람은 나간 사람대로, 남아 있는 사람은 남아 있는 사람대로 각자의 종교적 궁극을 달성할 수 있다고 교리를 바꾼다. 파격적인 변화이자 실질적으로 새로운 종교의 탄생이다. 이것이 대승불교다.
그래서 이제 그 외래인들은 굳이 세상을 떠날 필요도 없고, 개념 파악도 쉽지 않은 해탈이나 깨달음 혹은 열반 등에 대해서 매달릴 필요도 없고,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해 다음 세상에서 보다 좋은 곳으로 윤회를 하도록 기원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 시대 외래인은 우상이 없이 신을 숭배하는 것에 대해 쉽게 이해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불상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것이 부처의 말씀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지만 근본을 중시하지 않는 인도 땅에서 그런 변화는 대수롭지 않았다. 원래 부처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숭배하는 움직임은 붓다가 죽은 직후 혹은 생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붓다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일은 없었고, 보리수나 수레바퀴의 형태로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 시기에 와서 보다 공격적으로 바뀐 것이다.
▲ 인도의 생각과 유럽의 생각이 만나 새로운 문화를 낳았다. 이것이 꾸샨 시대가 보여준 문화 발전의 정수다.
그것은 종교에 대해 물질적 후원을 하는 사람들이 갖는 생각을 교단에서 적극 수용하는 전통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불상에서 부처의 모습은 전적으로 그리스 사람과 같이 생기고 그리스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그레꼬-로망 풍의 미술은 그들이 주로 세력을 형성하던 간다라 지역 즉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에서 크게 성행하였고 그래서 우리는 이를 간다라 미술이라 한다.
▲ 인류 문명의 보고인 아프가니스탄에 전쟁의 일상화만 남아 있다. 문명화와 전쟁은 둘 다 세력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유사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시대 우리는 문화 통합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북쪽에서는 그리스,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문화가 들어 와 간다라 예술이라고 부르는 문화 통합이 일어났고, 남쪽에서는 아대륙 내의 지배적 문명 세력인 브라만 체계를 토착 세력이 받아들임으로써 문화 통합을 이룬 것이다. 이 시기에 중앙아시아와의 접촉을 통해 고대 인도의 문화는 한층 다양해졌다. 중앙아시아의 발달된 기마술 특히 안장과 발걸이, 터번, 외투, 두건, 투구, 장화 등이 널리 보급되었고, 대규모로 말이 보급되었으며 이로서 고대 인도의 군사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로마로부터는 주화 제조나 유리 제조의 발달된 기술이 도입되어 경제가 한층 강화되는 결과도 가져왔다. 꾸샨 제국은 한(漢)과 로마 사이의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였고 중앙아시아의 많은 금광을 확보하면서 많은 양의 함량 높은 금화를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남부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역에 광범위한 브라만 문명화가 이루어지면서 남부 여러 왕국과 사따와하나 그리고 꾸샤나는 모두 로마와의 왕성한 무역 교류에 힘썼다.
인도가 로마에 수출한 것으로는 향료를 비롯해 인도에서 나오는 진주·옥양목·보석·다양한 철제 식탁 용기 등과 비단과 같은 중국이나 중앙아시아로부터 들여와 전해주는 것들이었다. 인도는 이러한 물건들을 팔아 주로 금화·은화·토기 등을 사들여 왔다. 그로 인해 무역 수지가 일방적으로 인도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마침내 로마는 인도와의 무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의 수공업과 상업의 성장 및 화폐 사용의 증가는 많은 도시의 번영을 촉진시키고 경제를 매우 발전시켰다. 이 시기는 고대 인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시기다.
이러한 힘은 적극적인 문화 통합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시대는 마침 중국 한나라의 서역 경영이 열린 시대였는데, 이로 인해 인도와 중국이 직접 접하게 되었고, 두 제국의 문화적, 경제적인 교류가 활발히 행해졌다. 또 육로 뿐만 아니라 해로로도 중국과 인도는 로마제국과 교류를 활발하게 가짐으로써 인류 고대 문화가 훨씬 다양하고 성숙해졌다. 중국, 인도 그리고 로마 모두 고대에 가장 경제가 발달하고, 문화와 예술 또한 크게 발전한다. 인도에서는 이전 시기에 만들어진 강고한 카스트 체계에 많은 변화가 생기면서 보다 자유롭고 융통성 있는 문화가 융성해졌다. 중국과 로마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났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통합은 현대 사회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통합은 전통적 사회에서는 대척점에 있는 사이 즉 남녀, 노소, 사제, 권력자와 국민 등의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에서 첨예한 갈등의 관계에 있는 노동자와 사용자의 사이 또한 더욱 허물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용자가 더 양보해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도 마찬가지고, 국내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 사이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사고 체계에 안주하면서 기득권에 집착하면 양자가 모두 같이 도태될 수밖에 없음은 단호한 역사의 사실이다.
통합은 곧 대중화와도 통한다. 과거에는 돈 있는 사람들만 즐기는 문화였는데, 그것이 대중화되면서 문화 평등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외여행이 특권층만의 권리가 아닌 지 벌써 오래 됐다. 마찬가지로 최근 일고 있는 디지털 카메라의 대중화와 사진 열풍 또한 그렇다. 전문 사진작가 뺨치는 샐러리맨의 사진, 전문 평론가를 능가하는 샐러리맨의 비평은 가히 문화 반란 수준이다. 물론 해외여행이나 디지털 카메라 문화에 드는 비중이 만만치 않아 모든 국민이 그 대열에 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이 정도의 대중화도 그 동안 그 문화를 독점적으로 즐기는 일부의 권력을 많은 사람이 나눠 가지게 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고 그로써 사회 권력의 평등화도 한층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일고 있는 나이 어린 중고등학생들의 열렬한 광우병 파문 쇠고기 협상 반대 촛불 집회 참여에 대해서도 또 다른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그 중고등학생들은 과거 대학생이나 노동자들이 독점적으로 전유했던 이데올로기 정치의 독점 권력을 순식간에 같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 과거 광장에서는 그곳에서만 통용되는 구호만 난무했는데, 이제는 생활 속에서 배어나오는 생생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온다. 그것도 일률적이지도 않고, 일사분란하지 않은 채, 소위 지방 방송의 목소리가 중앙 방송보다 더 크게 나올 정도의 그야말로 난장이 한 바탕 펼쳐진다. 한 쪽에서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면, 다른 쪽에서는 교육 자율화에 대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건강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징표다.
▲ 인문학을 살리는 것을 어찌 돈과 의례로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다양하고, 이질적이고 지역적인 통합과 대중화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도 아직까지 요원한 것이 하나 있다. 인문학이다. 사실, 인문학을 하는 지식인 게릴라들이 사회 속으로 뛰어 들어간 지는 벌써 꽤 되었다. 주말이면 삼삼오오 모여 생각을 나누고, 인터넷을 통해 곳곳에서 토론의 광장을 만들고, 그러면서 시민이 함께 하는 문화적 공간을 만들어 간 지도 십 수 년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은 아직도 많은 학자들의 폐쇄적인 머리와 거미줄로 가득 찬 창고에서 나오지 못하고 완고한 틀 속에서만 갇혀 있는 실정이다. 그 폐쇄된 지식인들은 인문학 살리기를 하자면서 연구비 증액에만 혈안이 되고 있다. 오로지 그들이 유지해 온 것은 가져다주는 권력에 취해 있는 것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섞이는 것이 아름답고 강하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배우는 것, 사람 사는 세상 만드는 방편 아니겠는가?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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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따 시대 '황금기'의 주인은 누구인가?
[프레시안] 2008년 06월 03일(화) 오전 08:12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고대 인도의 굽따 제국이 세워진 것은 기원 후 320년 북부 인도의 정치 경제 중심지인 갠지스 강 중류 유역에서 시작하였다. 이전에 북부 인도는 꾸샤나가, 남부 인도는 사따바하나가 로마와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 번영을 이루면서 데칸 고원을 경계로 하여 북과 남을 둘로 나눠 통치하였는데, 굽따는 그 뒤를 온전히 이어받아 인도아대륙 내 그 두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이어받았다.
제국을 창시한 짠드라굽따의 뒤를 이은 사무드라굽따는 갠지스 강 중류 유역에서 출발하여 대대적이고 지속적인 영토 확장 사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서부의 일부 지역과 남부의 따밀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하고 복속시켰다. 그러나 광대한 지역의 행정 통치의 어려움 때문에 데칸이남 지역은 독립시켜 주어 그 곳에 다른 왕국이 세워졌다. 그 후 짠드라굽따 II세는 무역의 거점인 서부 지역을 확보하여 경제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00년이 넘는 오랜 동안 평화 시대가 계속 되었다.
그렇지만 많은 제국이 그렇듯 굽따 또한 약 초기 100년의 평화 시기가 지나면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이전 시기부터 이어져 오면서 북부의 꾸샤나와 남부의 사따바하나 모두에게 커다란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준 로마와의 무역의 단절 때문이었다. 로마는 인도와의 무역을 통해 실크, 옥양목, 향료, 보석, 철제 식탁 용기 등 귀족의 사치와 향락 생활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대거 수입하였고 그 대가로 금과 은으로 만든 주화를 크게 지출하였다. 그러자 무역 수지는 인도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그로 인해 로마의 경제가 크게 흔들렸다. 결국, 로마 정부는 인도와의 수출을 일방적으로 단절시켜버렸다.
로마와의 무역은 고대 사회 체제를 급거 흔들어버렸다. 우선,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오던 로마와의 무역이 단절되면서 벵갈만에서부터 남부를 지나 아라비아만까지 이어지는 긴 해안에 즐비하게 들어선 고대 도시의 경제가 쇠퇴하면서 급격하게 몰락하기 시작했다. 도시 경제의 몰락은 그 동안 안정되게 유지되어 온 카스트 체제의 균열로 이어졌다.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많은 장인과 상인의 동업조합이 몰락하면서 그들은 대대적으로 이어져 오던 직업을 버리고 농촌으로 이주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부분 낮은 신분 즉 슈드라 카스트로 강등되었다.
꾸샨 제국을 전후로 한 시기에 수많은 외래민이 대거 인도 땅에 들어 와 정착을 한 것 또한 카스트를 사회 체제를 흔든 또 하나의 원인으로 작동하였다. 그들은 대부분이 외래 정복자였으나 이 땅에 정착하고자 하였으니 카스트 체제 안으로 편입되었고, 대부분 끄샤뜨리야의 위치를 부여받았다. 굽따 초기에 각지로 문명이 본격적으로 전파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문명화가 일어난 것 또한 고대 카스트 사회 체제 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전까지는 농경 문명권 밖에 있던 부족들은 갠지스 철기 문명이 보급되면서 대거 그 체제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모두 최하위 카스트의 위치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여러 과정이 한꺼번에 진행되면서 네 개의 카스트로 조직되었던 고대 사회가 더 이상 그 넷만으로 운용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여러 새로운 카스트가 생겨났다. 또 사회에서 생산을 도맡아 하는 바이샤의 불만이 급증하였다. 바이샤는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과중한 조세 납부와 부역의 의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브라만은 사제니까 세금을 안 내고, 끄샤뜨리야는 무사 계급이니까 세금을 안 낸다. 또 슈드라는 천민이라 세금을 내지 않는다. 결국 농사와 장사를 하는 바이샤만 세금을 내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여기에 슈드라가 부역을 거부하는 일도 수시로 발생했다.
한 마디로 사회가 총체적으로 위기를 맞이하는 시기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약 1000년 동안 유지되어 온 네 가지 카스트 중심의 고대 질서가 흔들리면서 사회가 크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카스트 사회의 최고 지위를 누리던 브라만들은 그 동안 지탱해 온 카스트 사회 구조에 대한 위협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래서 브라만들은 사회의 실질 권력을 쥐고 있는 왕과 끄샤뜨리야와의 연합을 시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로부터 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브라만을 정점으로 하는 카스트 사회의 유지라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왕권 강화는 권력을 종교와 접목시키는 것을 통해서 시도되었으니, 굽따 왕들은 백성을 보호하고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힌두 최고의 신인 비슈누로 비유되었다. 왕 짠드라와르만은 자신을 비슈누 신의 첫째 종(僕)이라 칭하였다. 인간이 신에 대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그 이데올로기는 백성의 왕에 대한 충성 관계와 잘 조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신-인간 대 왕/브라만-백성 사이의 충성 이데올로기는 서로 다른 계급이나 계층 갈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굽따 왕조가 힌두교 신앙 행위를 통치권 차원에서 적극 장려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사실 모든 종교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다. 그것은 종교의 기본 원리가 신에 대한 복종이라는 사실 그리고 종교 교단이 물질적으로 독립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종교가 스스로 애써 권력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한 즉, 개인의 깨달음을 추구하거나, 권력 혹은 다수에 대한 저항을 소명으로 삼거나, 사회로부터의 벗어남을 그 조건으로 삼는 것을 끝까지 유지하거나 하지 않는 한, 그것은 절대로 이 사회에 대한 저항 기제로 작동할 수 없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참고, 기다리고, 기도하는 것이라 결국 그것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사회의 안정이다. 불교가 불살생을 추구한다지만 원광법사는 살생을 부추겼고, 자장법사는 전쟁을 독려하고, 사명대사는 전쟁에 앞장섰다. 기독교가 살인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낙태를 반대하고, 사형제 폐지를 주장한다지만, 한국사의 해방 공간에서 빨갱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람을 무자비하게 처단한 일에 앞장 선 것은 기독교 목사였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사랑과 자비의 이데올로기가 기본적으로 사회 유지와 연계되고 결국 그것은 권력과 밀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종교가 물질적으로 사회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다시 연결된다.
▲ 황석영의 소설《손님》은 한국의 해방 공간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학살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굽따 시대에 왕권과 브라만 권력이 협력 관계를 형성한 것은 주로 대규모 제사를 통해서였다. 제사를 통해 브라만은 절대 권력인 왕권을 선양하는 일을 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제사에서의 가장 큰 몫이 브라만 사제에게 돌아갔다. 특히 굽따의 왕은 토지를 브라만 사제에게 봉토로 대거 하사하였다. 그 봉토에는 물론 행정권과 납세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굽따 시기 이후 즉 고대 말기부터 인도 전역에 대규모의 사원 건축이 많이 일어나고, 사원에 대해 토지 하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인도에 중세가 시작된 것은 이런 역사적 상황 아래에서였다.
제사에서 브라만은 굽따 왕을 신으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브라만은 국가적으로 큰 제사를 열어 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 행위에 대해 영원한 축도를 하고, 점성술을 통해 권력을 찬양하고 그 통치를 운명적으로 신성시하였다. 대규모의 왕립 제사는 바로 이 왕권의 신성화와 그에 대해 선양하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그런 제사를 통해 왕은 브라만의 축복을 받아 좋고, 브라만은 왕으로부터 물질을 받아 좋다. 그리고 두 세력 사이의 조화는 자연스럽게 백성에 대해 더욱 큰 권력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어 좋다.
역사적으로 굽따 시대에는 마우리야 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온 문명의 확산으로 인해 각 지역에서 토후 정치 세력이 많이 성장하였다. 그래서 굽따 조는 사회적으로 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던 데다 지역 세력이 커가면서 권력 분점을 통해 통치권을 극대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치·행정적으로 제후들에게 많은 권력을 이양할 수밖에 없었고, 브라만 사제에게도 재정권과 행정권을 넘겨주는 봉토를 하사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브라만의 세 치 혀로 사회를 안정시켜달라는 것이 그 대가였다. 그 대가로 굽따의 왕은 원래 바이샤 출신이었으나 브라만들로부터 끄샤뜨리야 대접을 받았고, 신의 속성을 지닌 신성 군주로 칭송을 받았다.
왕과 사제의 협잡, 비단 굽따 시대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 한국에서도 혈기왕성하게 살아 있다. 1980년 5월 광주를 겪은 후 많은 기독교 목사들이 군사 쿠데타의 주역 전두환을 위해 기도를 하였다. 그들은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어차피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주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가 뭐가 문제냐고 했다. 그러는 그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하나님의 불의 진노를 주문했다. 그것이 이 나라를 살리는 구국의 길이라 했다. 그 차이는 단 한 가지, 오랫동안 유지해 온 기득권 (즉 교회 권력)에 대통령이 협잡하고자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 뿐이다.
전두환이 교회를 위해 엄청난 특혜를 주고 기득권을 인정하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를 기반으로 교회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에는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반면 노무현은 교회의 권위를 시도 때도 없이 깎아내렸으며 그들의 정신적 기반인 반공주의를 폐기하고 김대중의 평화 공존을 따름으로써 심각한 정신적 공황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개돼중, 놈현 등의 쌍소리를 그 성스럽다는 제단에서 시도 때도 없이 꺼내 뱉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키운 군대로 국민을 학살한 전두환에게 하늘이 내려준 인물이라는 찬양을 서슴지 않은 그들이 그렇게 하였다.
서기 5세기 인도 굽따 조의 그 브라만과 이 시대 그 목사들과 다를 바가 하등에 없다. 굽따 시대의 왕과 브라만의 세력 연합은 찬란한 귀족 문화를 꽃피웠다. 왕들이 물질을 통해 브라만 교육 체계를 후원해주고 그들의 문학과 예술 활동을 재정적으로 장려해주고 그들의 터전인 사원과 수도원을 세워주고 적극적으로 후원해 준 결과이다. 서사시 《마하바라따》와 《라마야나》, 신화와 전설 모음인 《뿌라나》등 종교 문학은 말할 것도 없고, 근대 유럽의 낭만주의 문학인들이 입이 마르도록 칭송한 깔리다사의 《샤꾼딸라》를 비롯한 많은 세속 문학이 크게 꽃 피었다. 사법 제도도 확립되어, 많은 법률서의 편찬이 이루어졌는데, 각 카스트에 따르는 법률은 말할 것도 없고 민법·형법이 확실하게 규정되고 구분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함무라비 법전》이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인《마누 법전》이다. 뿐만 아니다. 언어학·수학·천문학·과학·예술 등이 이 시기에 와서 크게 발달하였다. 그래서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고대 인도의 황금기라 평가하고 칭송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 굽따 시대의 힌두 사원. 사원 건축의 뛰어남이 곧 문명의 황금기'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좀 더 깊은 분석과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우선 이 시대에 법전이 많이 발달한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고대 인도에서 법이란 다름 아닌 카스트 질서다. 그런데 법이 발달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카스트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반동적으로 틀어막으려는 움직임인 것이다. 종교 문학이 크게 성행하고 그 가운데 특히 신화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민들의 사회 변화에 대한 움직임을 브라만이 세 치 혀로 틀어막으려는 움직임이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제 아무리 정교한 문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고, 제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을 썼다 할지라도 그것이 갖는 의미를 배제하고 평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언어학이 이 시대에 발달했다고 하는 평가 또한 다른 차원의 것은 아니다. 고대 인도에서 언어학이라는 게 성스러운 신의 말씀을 불경스럽게 문자로 적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정제된 언어 즉 산스끄리뜨로 성스러운 구조 안에서 대대손손 구전되어야 하기 때문에 언어학이 발달한 것이다. 천문학도 마찬가지이니 이 시대의 천문학이라는 게 다름 아닌 신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여러 학문이 모두 발달했다고 하는 것이 문화의 황금기라고만 평가할 수는 없지 않다. 그 발달이 인민의 삶의 질 향상과 - 물론 지금의 민주나 평등의 원리를 당시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 충돌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분석에 대해서는 온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굽따 시기는 경제가 침체해서 인민의 삶이 피폐해지고, 사회 질서는 일어나는 변화와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 간에 충돌이 자주 일어나고 그 맥락에서 브라만 문화가 꽃을 피웠다고 해서 그것을 고대 인도의 황금기라 칭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일방적인 평가다. 따라서 - 백번 양보해서 - 이 시기는 브라만 문화의 황금기 혹은 힌두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고대 인도의 황금기는 아니다.
고려 시대의 문학이 아무리 아름답고, 그 건축물이 뛰어나고, 그 축제가 화려해 널리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리고, 그 철학적 수준이 서양의 그것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고, 세계적 유산인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그 발달이 인민의 삶의 질 향상과 무관한 것이면서 귀족들의 놀이와 향락을 위해 존재했다면 그것은 그 뿐인 것으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나라가 전쟁에 시달리고, 경제가 어려워지고, 유민이 발생해 삶이 도탄에 빠졌다면 그것은 역사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아니겠는가.
▲ 국민의 분노가 들불같이 일어나고 있을 때 소위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까?
종교가 인민의 삶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자기 만족을 위한 신앙 행위일 뿐이다. 지금 한국에서의 종교는 어떠한가? 그 안에 있는 목사, 신부, 중, 그들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일인당 국민소득이 삼만 불을 향하고 있다는 지금, 88만원 세대가 나라 전체를 휩쓸고 있는 지금, 미국 쇠고기 수입에 관한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시작되어 사방으로 들불같이 타오르는 지금, 그들의 삶과 추구하는 바의 좌표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사람을 향하고 있는가? 권력을 향하고 있는가? 자위자족을 향하고 있는가? 그들이 국가 권력과 손을 잡고 인민이 외치는 변화를 세 치 혀로 누르는 모습이 굽따 시대 왕의 물질 앞에 세 치 혀를 나불거리는 그 브라만 모습과 너무나 똑같다. 데자뷔인가?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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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에서 실재를 추출해야 역사가 된다
[프레시안] 2008년 06월 10일(화) 오전 10:25
작년 겨울 인도에 가서 은사님을 뵈었다. 난, 한국의 대학에서 역사학을 배우지 않고 인도에 가서 역사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한국에는 역사를 내게 가르쳐 준 은사도 없는데다가 특별히 은사라고 할 만한 인간적인 관계를 쌓은 분도 없어서, 은사님은 인도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 난 인도에 가노라면 예의 은사님과 역사에 관한 이런저런 논쟁을 하고, 거기에서 듣고 배우고 하곤 한다.
그 날도 우린 오후에 인도식 홍차인 짜이를 한 잔 마시면서 사료가 갖는 신뢰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대뜸 은사님이 물으셨다. 왜 역사학을 하느냐고? 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믿거나, 사실인 것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믿는 신화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화와 실재를 역사학자가 분리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되물으셨다. 난 마땅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1 년여가 지난 지금도 신화와 역사를 분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선뜻 자신이 없다. 그것은 신화 또한 역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신화에서 역사를 추출해내고 가능한 데까지 그 둘을 분리해야 하는 것이 역사학자에게 주어진 소임이자 의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명백하게 사실인 것을 거짓이라고 주장하거나, 사기로 확실하게 드러난 것을 참이라고 믿는 것일까? 왜 전두환이 광주 학살을 주도한 것을 믿으려 들지 않고 여전히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무리들이 있는 것일까? 왜 소위 햇볕 정책은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정책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 북한과의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하는 목사가 버젓이 존재하고, 또 그에게 열광하는 신도들이 있는 것일까? 왜 황우석 박사는 과학적으로 거짓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만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할까?
단언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는 사람들이 그에 관한 신화에 익숙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역사를 분리하려는 이성적 노력을 포기하거나 유보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다. 신화는 어떤 의도를 표현하고 소통하기 위한 특정한 방편에 따라 만들어지고, 한 번 만들어진 신화는 그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사회 속에서 실재를 구성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미 실재로서의 효력을 행사하는 신화로부터 허구와 사실을 분리하여 읽어내기를 꺼려하곤 한다. 아는 듯 모르는 듯 하는 사이에 신화를 그냥 실재로 바꿔 이해하고 소화하고자 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사실(혹은 진리)로서 알고 믿고 있는 것을 의심하여 깨부순다고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에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그 신화와 연계되는 물질적 이익을 얻고 있는데다가 그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사회 내에서 여론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다면 그들이 이끌어가는 흐름으로부터 개인이 용감하게 빠져나오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인도사에서 신화와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실재하는 힘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두 가지의 이야기를 꺼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카스트의 기원에 관한 신화이다. 몇 년 전, 지금은 대학생이 된 아들 녀석이 중학교에 갓 입학 했을 때 심심풀이로 사회 과목 참고서 가운데 인도사에 관한 부분을 한 번 살펴본 적이 있다. 그러다가 눈에 번쩍 뜨이는 설명을 하나 발견했는데, 카스트의 기원에 관한 설명 부분이었다. 그 설명은 태초에 사람이 한 사람 살았는데, 그가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머리에서 브라만을 만들고, 팔에서 끄샤뜨리야를 만들고, 넓적다리에서 바이샤를 만들고, 발에서 슈드라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부산에서 고등학교 역사 과목 교사를 위한 연수에서 인도사를 강의할 기회가 있어 강의를 들으러 온 현직 교사들께 카스트의 기원에 관해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같은 종류의 대답이 나왔다. 이에 정색을 하고 내가 물었다, 정말 사회 계급인 카스트가 사람을 제사해서 만들어졌겠냐고, 그것이 아니라면 왜들 그렇게 이해하고 있느냐고,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현상이 끼치는 영향이 어떠한지를 아시느냐고.
이 신화는 인도 사회 구조의 기원에 관한 성스러운 재가의 역할을 한다. 신화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태초의 원인(原人)이 스스로를 제사 지내 그 몸 각 부분에서 네 카스트를 출생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언급된 몸의 각 부분은 철저히 상징적이면서 동시에 그 상징은 위계의 높낮이를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브라만은 머리에서 나왔으니 머리를 쓰는 일을 하면서 머리는 가장 소중한 것이니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끄샤뜨리야는 팔에서 나왔으니 싸움을 하는 일을 하면서 그 팔은 머리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니 그 다음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바이샤는 넓적다리에서 나왔으니 먹고 사는 일을 해야 담당해야 하며 여기까지는 그래도 지체 낮은 땅을 바로 대하진 않으니 그나마 사회에서 정상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에 마지막 슈드라는 발이 몸의 모든 부분을 떠받들고 섬기듯 섬기는 일만 하고, 천한 땅바닥을 대고 다니듯 가장 낮은 위치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이 신화를 통해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네 계급 가운데 위 세 계급은 사회적으로 정상인으로 인정을 받는 반면 슈드라는 사회적으로 불구로 규정되어 정상적인 사회 활동, 즉 교육을 받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세금을 내거나, 재산을 갖거나 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없게 규정해 놓았다.
고대 인도 사람들은 이 신화를 태초의 진리로 믿도록 강요받았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이렇게 신화 즉 태초의 말씀에 따라 규정되었기 때문에 이를 어기는 것은 엄청난 죄를 짓는 것으로 여겼다. 이것이 다르마 즉 세상의 이치요 인간의 도리요 우주의 법이니 이를 지키고 따르고 보존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목숨 부지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였다. 이를 잘 지키면 다음 세상에는 더 나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 불 못으로 떨어진다는 게 힌두 신화의 얼개다. 그래서 이 신화는 태초의 이야기요, 영원한 회귀의 고향이며, 모든 것의 근원이다.
이 대목에서 아주 쉬운 질문 하나 해보자. 이 신화는 실제로 카스트 체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만들어졌겠는가, 아니면 만들어진 후에 만들어졌겠는가? 두 말 하면 잔소리, 카스트 체계가 만들어지고 난 후에 만들어졌다. 마치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난 후 성리학자들이 그 창제의 맥락과 이치가 세상의 법도에 맞지 않는 불경한 것이라고 비판을 하니 조정 편에 선 정인지가 성리학의 논리를 끌어 당겨 해례본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를 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면 누가 왜 이런 신화를 만들어 유포했을까? 이 신화는 이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즉 브라만 중심의 카스트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 즉 그 체제의 고안자이자 작동자인 브라만이 만들었다.
처음 카스트 체계가 형성되었을 때는 이런 신화는 필요 없었다. 그것은 처음 카스트 체계가 발생할 당시에는 카스트 즉 계급은 각기 하는 일에 따라 역할 분담의 차원에서 고유한 일이 주어졌고, 그것이 신성한 영역도, 불가침의 영역도 아니었다. 하지만 농경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점차 생산이 많아지고, 브라만이 제사를 통해 그 생산물을 독점하면서 이미 주어진 사회적 기능을 서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 둘 필요가 생겼다. 이에 브라만은 각 기능에 제한과 규제를 두었고 나아가 이에 성스러움과 불경함이라는 종교의 색채를 덧씌워 영구불변의 신화로 만든 것이다.
이렇듯 인도의 고대 초기 사회에는 애초의 네 개의 카스트만 존재해 왔는데 느닷없는 이런 저런 사정이 생기면서 카스트가 자꾸 불어나기 시작했다. 카스트가 전혀 보급되지 않은 곳에서 문명의 바깥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문명화되면서 대거 이 체제 안으로 들어온다거나, 카스트 법을 위반한다든가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실제 사회에서는 슈드라 밑에 존재하는 새로운 카스트가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브라만 세계관에서 가장 오염되고 더러운 일 즉 땀 흘리고 막노동 하는 일, 즉 분뇨 처리, 시체 처리, 푸줏간 일, 세탁, 산파 일, 이발과 같은 일이 주어졌다. 그러한 일은 너무나 더럽고 불결해 카스트를 부여 받은 네 계급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실제로 그 일은 사회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불가촉천민에게 그 일을 시키도록 강요하고, 그 일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신화로 얽어매어 놓았다.
▲ 인도에서 사원이나 성스러운 곳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그 오염된 신발을 만지고 보관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불가촉천민이다.
그렇지만 그들을 기존의 성스러운 네 카스트 구조 안으로 편입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넷의 구조는 성스러운 신화에 의해 확고부동하게 정해져버렸기 때문에 수를 늘리는 일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불가촉천민의 개념이었다. 불가촉천민은 실제 사회에서는 존재하나, 신화에 등재하지 않음으로써 그 어떠한 법적, 사회적, 종교적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는 천형을 지닌 인간이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화석처럼 굳어져 내려온 봉건 시대의 신화와 현대에 만들어진 경쟁과 지배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에 의해 그 정당한 대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그것이 불가촉천민이라는 슬픈 이름이다.
인도 고대 사회에서의 불가촉천민, 지금 한국 사회에는 없는가? 동성동본으로 결혼한 부부, 그 사이에 태어나 할아버지나 할머니 혹은 다른 사람의 자식으로 호적이 올라가 있는 사람, 미군과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혼혈'의 굴레를 쓰고 사회의 온갖 박해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 온 우리의 형제자매, 남의 나라 베트남에 전쟁하러 갔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베트남 여인과의 사이에 낳았으나 두고 온 자식, 이미 몸은 여성임에도 호적은 여전히 남성인 사람, '간첩' 생활을 한 죄로 40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산 후 세상으로 나와 마음은 북에 있으나 몸은 남에 있는 사람, 능력은 있으나 지방대학의 여대생이라는 이유로 그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마저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는 수많은 학생들. 그들 모두가 이 시대 한국 사회의 불가촉천민이라면 너무 과한 비유인가?
▲ 베트남 호치민시에 거주하는 '라이따이한의 대부' 정주섭씨의 실천하는 인간애를 소개한 기사
힌두 신화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암흑기'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힌두 신화에 나오는 암흑기는 태초에 우주가 만들어진 이후 황금 낙원의 시기가 사라지고 도래한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현 시기를 말한다. 신화 속에서 그 암흑기는 더러운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고, 세속 권력이 감히 영적 권력의 영역을 침범하고, 세상의 도리가 무너지고, 그것도 모자라 제사를 소홀히 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약육강식의 질서가 판치는 시대로 묘사된다. 그런데 그 신화를 자세히 보면 그 장면은 농업과 상업으로 부를 획득한 바이샤와 국가 권력이 강대해지면서 세력이 커진 왕과 끄샤뜨리야 계급이 브라만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에 대한 적대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구체적으로 한 신화를 살펴보면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옛날 옛적에, 비나(Vina)라고 하는 왕이 살았는데, 그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 등 불경하고 불의한 짓을 하도 많이 저질러 현자들 손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 후 현자들은 비나의 오른 팔에서 정의로운 왕을 만들어 내 세상을 잘 다스리도록 하엿고, 태평성대가 찾아 왔다.
이 신화 이야기에서 비나가 사악한 자로 몰린 이유는 다름 아닌 제사를 수행하지 않음이고 또 그는 그의 백성들에 의해 쫓겨 난 것이 아니고 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여기에서 현자란 제사를 옹호하는 브라만을 가리킴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브라만을 배척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 실제 역사적으로 볼 때, 아쇼까의 경우에서와 같이 - 용납될 수가 없다는 메시지다. 더불어 브라만 그들만이 통치자를 갈아치울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다는 뜻도 이 신화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러한 메시지는 태초의 이야기 즉 신화를 통해 그 '무지몽매한' 백성들에게 깊이 각인된다.
이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에서의 신화는 무엇일까? 하도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겠지만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는 것으로 '라이온킹' 이야기를 한 번 해보도록 하자. '라이온킹'은 잘 알다시피 1994년 미국에서 만들어진 만화 영화다. 무파사라는 사자가 통치하던 왕국이 위험에 처하나 결국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한다는 줄거리다. 그런데 이 안에 녹아 있는 메시지가 심히 고약하다. 이 라이온킹에 의하면 무파사 왕이 죽은 뒤 왕권은 반드시 그의 아들에게 돌아가야만 한다. 그가 어리든지, 약하든지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적통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의 줄거리는 감히 적통을 넘보지 말라는 거다. 하이에나는 적통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아예 정해진 질서 바깥에 있는 세력으로 묘사된다. 그들이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결국 세상은 다시 그 적통이 평정을 하게 되어 있으니 까불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다. 이런 것이 신화다.
▲ 라이온킹 이야기는 현대 정치가 만들어 낸 대표적인 신화 가운데 하나다.
신화라는 게 옛날 옛적에 있던 이야기가 아니고, 옛날 옛적을 지향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신화에서 무파사와 라이온킹은 일차적으로 미국이고 스카와 하이에나는 중국이나 일본 혹은 중동 세력, 혹은 유럽일 수 있다. 백인 대 유색 인종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로 환원하면 서울 대 지방일 수도 있고, 서울대 대 비서울대일 수도 있다. 경상도 대 비경상도 일 수도 있고, 강남 대 비강남일 수도 있다.
그들만의 영원한 제국이자, 불멸의 신화를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그들의 모습이 처연하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신화의 틀 안에서 놀아나는 많은 지방 사람들, 비서울대 사람들, 비경상도 사람들 - 사실은 경상도 안에 포함되지만 그 또한 사실은 주류에 편입될 수 없는 못 살고 소외당하고 있는 그 경상도 사람들 -, 비강남 사람들이 더 처량하고 측은하다. 그들이야말로 이 나라는 적어도 SKY 정도의 대학은 나오고, 돈도 많이 벌고, 집안도 좋고 - 그 좋다는 말이 얼마나 봉건적이고 자신의 삶을 짓밟아 왔는지에 대해선 깊이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 하는 사람이 다스려야지, 자기 같은 못 배운 노동자가 뭘 알겠느냐고 하는 사람들이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국의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현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 후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지지를 받은 세력의 가장 큰 무기는 '경제'였다. 그런데 선거 직후 '경제'를 앞세운 그 대통령과 그 당이 만든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타결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그런데 그 반대하는 사람의 많은 부분이 그들을 지지했음직한 사람들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그들은 이른바 그 '경제'가 주는 신화의 실재를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개인의 '성공 신화' 그것도 영리를 제1의 가치로 추구하는 경영술로 만들어낸 신화에 함몰되어 공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자질과 덕목을 요구하지 못한 우를 범한 것이다. 신화에서 실재를 추출할 줄 아는 혜안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다는 교훈을 너무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셈이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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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 종교는 현실 도피처일 뿐이다
[프레시안] 2008년 06월 17일(화) 오전 09:10
굽따 말기로 접어들면서 인도 전역은 지난 1000년 동안 신화에 의해 성스러운 구조로 지탱해 온 카스트 기반 사회 구조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이민족의 광범위한 이주와 정착, 로마와의 교역 중단과 그로 인한 도시의 몰락, 카스트의 분화 등으로 인해 발생했는데, 곧 바로 사회 전체의 불안으로 이어졌다. 이에 왕은 무엇보다도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고 이에 브라만과의 세력 연합을 강화하였다. 그것은 브라만이 제사장이기도 하지만 사회 질서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고 전통 사회를 유지하는 교육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왕은 조세 징수권과 행정권이 딸린 토지를 브라만 개인 혹은 사원에 하사하여 유럽의 봉토 비슷한 것을 전국적으로 많이 만들어냈다.
토지는 주로 중심에서 벗어난 변방 지역에 하사되었는데 이 때 브라만을 따라 농민, 장인 등이 그곳으로 함께 이주하였고 그들에 의해 새로운 주거지가 널리 개척되었다. 인도 전역에 광범위한 농경 확장과 이주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 간 브라만은 여러 차원에서 갈등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적으로 브라만은 이미 그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 온 '미개' 부족민과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문명'의 힘을 가진 브라만은 그 부족민을 복속시켰고 그 위에서 새로 확보된 토지에 대해 재산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면서 그 토지 위에서 지금까지 실제 경작을 해 오던 그 부족민은 브라만 중심의 사회 질서에 통합되었다.
그렇지만 양자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통합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브라만은 '문명'의 기반이 되는 카스트, 남녀, 장유의 차별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 질서 이데올로기를 이곳에 세우려 하였다. 하지만 부족민들이 그러한 세계관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동의하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브라만들은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차원에서 딱딱한 의례나 난해한 이론을 배제하고 쉬운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 보급하였다.
쉬운 이야기란 베다에서 체계화 된 카스트 사회 구조론, 제사론, 우주론 등을 부족민들에게 친숙한 자연 환경이나 숭배물에 맞춰 변형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다 부족민들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의 토착 신앙을 모두 포함시켰다. 그 과정에서 적당한 변형이 일어난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브라만교에는 세상을 창조하는 브라흐마, 세상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비슈누, 세상을 징벌하고 파괴하는 쉬바 이렇게 세 신이 중심축을 이루었다. 창조라는 게 보존을 하기 위한 것이고 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파괴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파괴라는 게 새로운 창조라는 생각을 하는 그들은 결국 브라흐마가 비슈누고 비슈누가 쉬바고 쉬바가 브라흐마고 하는 식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 갠지스 강 유역에서 만들어진 삼위일체의 구조는 인도아대륙의 변방 및 그 바깥으로 힌두 문명이 확산되면서 각 지역의 신을 삼신의 성격에 따라 배치하여 통합하는 구조로 작동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지역의 부족이 멧돼지를 숭배한다면 그 멧돼지 신은 비슈누의 한 화신으로 - 요즘 젊은이들이 컴퓨터에서 자기 자신을 대신해서 내세우는 가상의 존재로 '아바타'를 사용한다. 이 '아바타'는 고대 인도어인 산스끄리뜨어로 '화신'을 뜻한다 - 편입을 시키는 것이다. 또 다른 부족이 뱀을 숭배하면 그 뱀은 쉬바를 따라 다니는 신으로 편입시키고 하는 이런 식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고대 인도가 행한 정복의 방식을 알 수 있다. 정복을 해가는 과정에서 브라만은 부족민을 자신들의 체계 안으로 편입시켜 공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 안에서 브라만은 정치경제사회의 주도권은 가지되 부족민의 신앙 공간은 허용해주면서 문화적으로 공존의 틀을 만든 것이다. 그들의 정복 방식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유럽인이 원주민들을 정복하면서 보여준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초기 유럽인들이 풍토병에 시달리면서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그들에게 작물 재배와 질병 퇴치의 방법 등을 가르쳐주었지만 돌아 온 것은 무력 정복과 학살뿐이었다.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공존을 할 수 있는 틈은 어디에서도 허용되지 않았다.
브라만교 신앙과 부족민들이 가지고 있던 신앙이 쉽게 통합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브라만교는 이미 우주를 상징적으로 축소해 놓은 제사를 중심으로 깨달음, 속죄, 구원, 윤회 등과 같이 관념화되어 있는 반면 하루하루를 생산이라는 실재의 세계에서 사는 부족민은 다산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보다 기복적이고 물질 추구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물질 추구의 근본을 여성성에 두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왜 여성인가? 우리는 세계 곳곳의 자료를 통해 농경이 정착한 신석기 시대 이후 여성은 생산의 원천으로 상징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씨를 받아들인 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생산물이 나온다는 메커니즘이 땅이 씨를 받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생산물이 나온다는 농경 생산의 원리와 동일하게 인식되었다. 그래서 여성은 그 땅이 가지고 있는 생산 메커니즘의 신성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인식되면서 다산의 상징이 되었다.
생산 숭배의 신앙은 비단 부족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슈드라에게도 해당되었다. 당시 슈드라는 도시가 몰락하고 도시의 카스트가 와해되면서 농촌으로 모이게 되고, 봉토가 넓게 형성되면서 농업과 수공업을 통해 생산의 근본을 담당해 그들의 사회적인 영향력이 갈수록 커갔다. 그들은 그 동안은 카스트 체계 내에서 유일한 생산 계급이었음에도 사회적으로는 소외된 계급이었지만,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결국 슈드라와 부족민들의 커진 영향력을 무조건 억누를 수만은 없었던 브라만은 그들에게 적당한 문화적 자리를 내주는 양보를 함으로써 통합을 이룬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여러 가지 이름의 모신, 성(性) 의례, 사당, 치병과 기복 의례 등이 브라만교 안으로 들어와 정당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하였다. 심지어는 모든 진리란 물질 혹은 육체 안에 있고 물질 혹은 육체를 벗어난 관념, 의례, 의식은 모두 허위이며 그 안에서 제사를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거나, 카스트를 기초로 하는 불평등과 그것을 대변하는 법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조차도 허용하였다. 브라만은 그들 스스로가 물질 기반을 다 확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반제사, 반카스트의 외침이 한낱 공허한 구호 내지는 그들의 자위 수단으로만 그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피지배층 인민의 급진적인 세계관을 브라만 지배층이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고대 사회가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사회적 갈등은 원만히 융합되었다. 그것은 생산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브라만이 커져 가는 사회적 불만을 껴안되 기존의 법과 도리 (즉 다르마와 카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산스끄리뜨 체계 안에다 일정한 자리를 내줌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사회 바깥 지대의 불안 세력으로서가 아닌 사회 안의 피복속 세력으로서 공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그토록 성스럽고 신성한 산스끄리뜨 경전 안에 불경스럽고 황망한 여신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 여신이 최고의 신인 비슈누나 쉬바까지도 발아래 두고 지존 위에 등극하는 일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역사가 벌어진 것이다. 이것이 밀교의 세계다. 관념이 아닌 물질의 세계를 찬양하고 그러다 보니 여성의 성적 원리가 궁극으로 추앙받는 세계관, 밀교. 그 안에서 이제 쉬바도, 비슈누도 여신의 발아래에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하고 애걸하는, 우주 최고의 지존무상의 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지존무상의 여신 가운데 대표적 존재로 '깔리'라는 여신이 있다. 깔리는 한 손으로는 칼로 잘라 낸 머리를, 또 다른 손으로는 그 머리에서 떨어지는 피를 받는 해골로 된 잔을 들고 있는 형상을 한다. 그리고 목에는 칼로 잘라 낸 머리들을 이어 만든 목걸이를 두르고 있고 허리에는 칼로 잘라 낸 손들을 이어 만든 치마를 걸치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항상 피를 갈구하는 검붉은 혀로 상징된다. 또 다른 지존무상의 여신 두르가는 악을 응징하는 여신으로서 모든 힘을 소유하는 존재다.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두르가는 백전불패의 전사이다. 또 다른 여신 락슈미도 마찬가지다. 악마를 향해 가차 없이 처단의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용맹스러운 것을 넘어 가히 섬뜩하기 이루 말 할 수 없다.
▲ 깔리는 핍박받는 인민에게 카타르시스를 주어 그들이 사회를 버리고 종교 안으로 도피하게 하기도 했고, 근대 일부 민족주의들에 의해서는 반영 운동에 활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잔인한 모습은 슈드라, 불가촉민, 부족민, 여성과 같은 생산에 직접 담당하면서도 생산물을 다 빼앗기고 핍박을 받으며 사는 피지배 계층의 인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에 충분하였다. 생산을 직접 담당하는 그들은 그 지존무상의 여신의 직접 보호 아래 있고 그들을 괴롭히는 모든 문명과 문화에 대해 그 여신은 처절하게 응징을 해준다는 종교적 행위가 바로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그 카타르시스는 환상 속으로의 현실 도피일 뿐이었다. 세상의 물질 구조는 변화하지 않은 가운데서 핍박 속에서 좌절당하는 사람들은 현실 사회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다만, 신화 안에서 카타르시스를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어지러운 약육강식의 질서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인도 중세의 철저한 계급 사회에 속박되어 있던 인민들이 무기력한 사회적 현실에서 이상적 세계로 도피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상주의 종교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지배자들에 의해 강화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대 말 중세 초기의 인도에서 깔리, 두르가, 락슈미와 같은 여신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지존무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모습이 사회에서 추앙받는 여성의 표본이 될 수는 없었던 사실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브라만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의 세계를 용납해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의 세계 안에서 뿐이었다. 그러한 용납이 신학의 불일치와 부조화를 발생시키긴 하겠지만 그 정도는 갈등없는 사회 통합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양보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비록 신학적으로는 불일치를 나타내겠지만 베다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는 카스트 사회 구조의 핵심은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화와 신앙의 세계에서는 반제사, 반관념, 반카스트의 세계를 허용해 주었지만, 카스트 사회 질서와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맥락에서는 사회 질서가 더욱 강화되었다. 브라만은 끊임없는 담론을 통해 여성성은 독립성이 아닌 모성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으니,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커서는 남편에게, 나이가 들어서는 아들에게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는 규정이 힌두 최고의 법전인《마누법전》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어쩌면 그렇게 한국의 경우와 똑같을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놀랄 수도 있겠지만, 양자가 본질적으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가 동일하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 일치하는 것이 그리 놀랄만한 것도 아니다.
이 사상에 따라 이상적인 여성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고, 남편이 살아 있어야 하고, 아들을 낳아 기르는 여성이다. 그러다 보니 실제 힌두 사회에서 여성이 추구하는 상은 남편에 복종하고, 집안에 복을 불러 오는 '착한' 여성이고, 가정에 질투와 악을 끌어들이면서, 남편과 가정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여성은 악의 화신이라는 딱지를 달아주었다. 결국 신앙의 세계에서 여성의 위치는 상승하였지만 실재 사회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차별적 사회 구조는 강화되고, 그 안에서 여성을 비롯한 차별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위치는 더욱 악화될 뿐이었다.
이상주의 이데올로기는 현실 포기일 뿐이다. 종교의 이상주의도 그렇지만 사회 운동의 이상주의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는 마르크스주의 (혹은 공산주의)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이념도 포함될 것이며 이슬람 신정 국가 건설도 포함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특정 이상주의에 함몰하여 진행하는 사회 운동은 결국 거대한 보수 사회 유지 메커니즘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 적어도 인도는 물론이고 전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 소위 좌파 운동 진영조차도 그 이상주의 이념의 유혹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웃지 못 할 이상주의의 비극은 90년대의 주사파 파동이었을 것이다. 분단, 미국의 독재 정권 지원, 12.12 쿠데타와 5.18 민중항쟁의 유혈 진압 등과 같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소위 운동권 진영에서 친북은 반미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다 보니 북한은 신성불가침의 구역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북한'은 엘리아데가 말하는 영원의 회귀이자 원초적 공간인 신화의 세계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그들과 동조하고 그들이 세운 이념 위에서 말하는 것은 가장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세력으로 이해되었다.
▲ 주체사상은 봉건 이념 위에 세운 이상주의 종교일 뿐이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그 신화는 깨져 가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일부에서는 그 사상을 바꾸지 않고 있다. 정말 그토록 날카롭고, 논리적이고, 양심적인 그들이 왜 아직도 이 사회에서 '민족해방'을 부르짖고 있는 것일까? 꿈꾸는 사회 변혁에 실패하고 좌절하여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자위의 카타르시스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영원 회귀의 공간 그 유토피아 세계 안의 카타르시스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보수 진영이다. 그것은 보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그 민족자주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진정성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에 국가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는 운동이 사회 전체에 큰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 때 소위 보수 진영에서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만약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누가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정일 장군 만세!"를 외치고 다니면 어떡할 것인가 라고.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어떡하긴 뭘 어떡한단 말인가? 가만 두면 그 혼자 미친 사람 취급받을 텐데. 아직도 한국 사회가 북한이 침투시킨 간첩 몇 사람으로 인해 봉기가 일어나고, 결국에 적화통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사회 변혁에 좌절당한 자가 갖는 이상주의의 카타르시스보다 권력욕에 눈 먼 자가 갖는 광기에 더 침울하게 된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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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사에서 중세의 문제
[프레시안] 2008년 06월 24일(화) 오전 09:53
중세 시대 구분 오류가 가지고 온 비극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세 시대로 나누어 생각하는 데 매우 익숙해 있다. 내 스스로도 별 깊은 생각 없이 그렇게 하고 있고,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곤 하는데,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일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시대를 구분하는 데 정치만 가지고 할 수도 없고, 경제만 가지고 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사회만 가지고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정치, 경제에서부터 문화, 예술까지 어떻게 일괄적으로 모든 부면이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 갈 수 있을까? 뿐만 아니다. 힘 있고 돈 있는 자와 힘 없고 돈 없는 자가 엄연히 따로 있을 텐데, 그들이 한꺼번에 같이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간다고 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닐까? 더군다나 인도 같이 그 큰 땅 덩어리가 일괄적으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갔다고 보는 것은 더군다나 비논리적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했을까? 역사를 생각하기 쉽고, 가르치기 쉬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습성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목요연한 역사, 체계적인 역사, 균질적인 역사에 오랫동안 물들어 있었던 터라 그런 타인의 시선에서 빠져나오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실, 내 경우에는 역사를 가르칠 때 가장 큰 중점을 두는 것이 있다면, 사회 변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작은 사회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해 보기도 하고 보다 큰 사회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해 보기도 한다. 작고 큰 여러 가지 변화에는 1987년 체제의 등장, IMF 외환위기와 같은 한국 사회에 관한 것도 있겠고 보다 지구적인 현상인 소련의 몰락, WTO 체제의 등장, 인터넷의 등장과 같은 것도 있다.
역사의 시대를 셋으로 나누는 구분이 갖는 문제는 단연 '중세'에 있다. '중세'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아시아는 왜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을까, 왜 유럽이 아시아를 지배하게 되었을까 하는 물음과 맞물려 있다. 그 물음에 대해 유럽은 중세라는 단계를 거쳐 근대를 이룰 수 있었고, 아시아는 중세라는 것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가 정체되어 결국 주체적으로 근대를 이룰 수가 없게 되었으며 그러했기 때문에 유럽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대답이 나온다.
그런데 이 이론의 근간은 마르크스의 사회경제적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시대 구분론이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아시아의 역사가 그렇게 정체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군주의 힘이 너무 막강하다는 데에 있었고, 그래서 그 안에서 인민들이 핍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로 인해서였는데, 결과적으로 이런 사실로 인하여 아시아는 필연적으로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귀결되어 버렸고 결국에는 역설적이게도 제국주의의 대척점에 선 마르크스주의가 제국주의를 역사적으로 추인해 준 셈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마르크스주의자 안에서 패가 둘로 나뉘어 버렸다. 한 패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이론을 신봉하는 쪽으로 중세가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과 또 한 쪽은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을 가지고 분석을 해보면 유럽의 중세 봉건 사회와는 다르지만 큰 맥락에서 보면 동일한 의미를 갖는 나름의 중세 봉건 사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사도 그렇고, 중국사도 그렇고, 인도사도 그렇다. 모두 이 두 쪽의 의견이 대립되어 있는데, 둘 다 마르크스 진영에 속해 있다. 여기에 인도사의 경우 또 하나의 문제가 겹쳐 있다. 시대 구분이 종교와 밀접하게 연계되고 그러다 보니 시대 구분에 관한 역사학이 현실 정치의 이데올로기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인도사는 대부분의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 진정한 의미의 역사 연구가 유럽 역사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모든 경우에서 그렇듯이 처음 연구를 한 사람의 후세에 대한 영향은 실로 막강한데, 처음으로 인도사를 연구한 제임스 밀(James Mill)이 인도사를 힌두 문명, 무슬림 문명, 영국 문명의 세 시대로 구분하여 버렸다. 통치자들의 종교를 기준으로 인도의 역사를 세 개의 시대로 구분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자세히 보면 꼭 일관되게 종교를 기준으로 한 것도 아니다. 고대와 중세는 종교를 기준으로 했고, 막상 근대는 종교가 아닌 즉 기독교 문명이 아닌 영국 문명이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 해석에 실패한 것이 아니고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역사 왜곡을 시도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제임스 밀은 영국이 들어오기 이전의 인도의 문화 즉 인도인의 종교, 정부 형태, 법률 제도, 사회 제도 등 모든 것을 야만적이라 했다. 그는 인도 사회가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 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된 사회의 영속성은 전제 군주 아래에서 계속된 사회의 폐쇄성 때문이라고 했다. 제임스 밀의 이러한 시대 구분에 의해 인도는 정체 사회가 되었고, 결국 그 위에서 제국주의 통치가 정당화되었다.
제임스 밀이 한 통치자 종교를 기준으로 한 시대 구분의 영향은 매우 심각하였다. 그의 이러한 삼단 구분은 인도사의 고대, 중세, 근대의 구분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정이 없이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대부분의 일선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와 교사들은 고대사를 무슬림의 침입이 있기 전까지로 구분하고, 중세사를 영국인이 들어오기 전까지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 태반이다.
그런데 그 이론이 한심한 것은 - 백 번 천 번 다 양보해서 즉 통치자의 종교를 기준으로 시대 구분을 한다 하더라도 - 인도 전역의 역사는 그 통치자의 종교에 따라 일괄적으로 시대 구분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소위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 통치자가 된 왕조가 인도아대륙의 통치를 시작한 연대는 각 지역에 따라 아주 다르다는 사실이다.
아랍계 무슬림이 신드 지역을 점령하여 그들의 통치를 시작하였던 시기는 8세기였지만 그 정치체가 끼친 영향의 지리적 범역은 인도 전역의 5%도 못 되는 수준이었다. 즉, 8세기에는 인도아대륙의 대부분 사람들은 무슬림이 이 땅에 들어왔는지 여부조차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 이후 11세기가 되면서 투르크계 무슬림이 뻔잡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무슬림 군주가 북부 인도 전역에 느슨하게나마 통치권을 확립하게 된 것은 13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데칸 지역에 무슬림 세력이 확립된 것은 14세기였고, 인도아대륙의 최남단 지역에 그들의 지배가 이루어진 것은 16세기 이후에서였다. 뿐만 아니다. 라자스탄과 같은 서부의 몇몇 지역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인도 지역은 지금까지 한 번도 무슬림의 통치를 받아본 적이 없다. 인도의 역사적 상황이 이럴진대, 어떻게 인도의 무슬림 통치가 8세기부터 시작되었고, 그래서 인도의 중세가 8세기부터 이루어진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역사의 이해는 논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시대 구분에 익숙해 있는 교육 환경에서 특별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이론이 잘못 되었으니 이 이론을 페기 처분하라고 한다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교육의 현장에서는 시대 구분에 이미 익숙해 있기 때문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그 이론이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냥 그대로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 역사의 시대 구분에서 대안을 제시하기는 무척 어렵다.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보더라도 지역마다 사회 변화의 정도가 달라 시대 변화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철기 문명 도래 이후 역사의 발전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된 갠지스 강 중류 유역과 최남단 혹은 동부 오지가 같은 범주로 일괄 처리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중고등 학교 학생들에게 각 지역마다 다른 중세의 변화를 다 가르칠 수도 없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의 교육은 여전히 문제가 있는 줄 알면서도 '중세 = 무슬림 통치'의 공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실, '무슬림 시대' 혹은 '무슬림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무슬림이 통치자로 있을 때도 그들은 백성들을 무슬림으로 개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카스트가 사회 질서의 유지에 꼭 필요한 것이라 판단하여 브라만을 적극 지원할 정도였다. 다만, 이슬람의 원리에 따라 - 그들은 같은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은 지역, 국적, 인종에 관계없이 다 형제로 여긴다 -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주민세를 면제해 주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를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세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렇게 해석하면 왜곡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역사적 사실을 제임스 밀 이후 많은 유럽의 역사학자들이 공공연하게 왜곡을 했다. 많은 유럽의 인도사가들은 무슬림 통치자들이 힌두 문명을 파괴하고, 힌두교를 탄압하면서 강제로 개종을 시켰다고 했다. 그래서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코란을'이라는 정체불명의 언사가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버젓이 횡행했다. 그래서 그들의 탄압에 못 이겨 힌두들이 카스트를 더욱 굳게 폐쇄하고, 그러다 보니 카스트의 위계가 더욱 엄격해졌고, 같은 맥락에서 조혼이나 사띠(즉, 남편이 죽어 화장을 할 때 아내도 함께 화장을 하는 풍습)같은 힌두 문화의 나쁜 관습이 더욱 굳건해졌다는 것이다. 모두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악마 만들기라는 역사 왜곡은 유럽인의 침략 전쟁인 '십자군' 전쟁 이후 본격화 되었다.
이러한 힌두 악습의 원인을 무슬림에게로 전가시키는 일은 암소 숭배와 채식주의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힌두에게 암소가 어머니로 존재한다는 것과 암소가 오랫동안 그들의 음식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은 전혀 모순적이지 않는 엄연한 별개의 역사적 진실이다. 그럼에도 보통의 인도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것은 무슬림이 이 땅에 들어와 힌두를 핍박하였다고 하는 왜곡된 역사에 보통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암소 숭배와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무슨 힌두교 제1의 정체성인 것 마냥 생각하고 있고 따라서 그에 대한 도전은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어 왔다. 델리대학교 사학과의 역사학자 자(D.N.Jha)가 힌두교 제1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베다가 편찬되던 때 쇠고기는 브라만들에게도 좋은 음식이었고 그 쇠고기를 먹는 관습은 18세기까지도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방대한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며 분명하고 단호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몇몇 우익 정치인들과 힌두교와 자이나교 광신도 집단들은 그 책을 신성 모독으로 매도하고 법원으로부터 판매 금지 처분을 확보하였다. 나아가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저자에게 사형 선고를 언도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영국에서 출판될 수밖에 없었다.
▲ 인도에서 쇠고기는 실로 오랫동안 음식으로 먹어 왔다는 사실은 엄연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역사적으로 밝힌 학자는 테러의 대상이 된다.
자, 그러면 보다 본질적인 문제인 인도사에서 중세는 있는지, 있다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중세를 봉건 사회가 형성된 시기라고 한다면, 문제는 인도사에서 봉건 사회가 형성되었느냐의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봉건 사회를 폐쇄적인 농업 경제 체제, 군주와 영주와의 쌍무 관계, 영주가 광범위한 경찰권, 사법권, 징세권을 갖는 봉토의 존재, 여러 가지의 제약을 당하는 농노의 존재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형태의 사회는 필히 각 지역에 시장이 형성되고 나아가 중세 도시가 성립하여 결국 근대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생각해보면, 아시아에서는 근대가 형성되지 못했고 그 이유는 봉건 사회가 없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이런 사고를 역으로 하지 말고 앞에서부터 차근차근히 생각해 보면 시야가 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인도 고대는 (앞 장에서 이야기 했듯이,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5세기 즉 굽따 말기부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면서 토지 하사와 폐쇄 경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사법권과 징세권을 갖는 브라만 혹은 사원이 광범위하게 등장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군주와 유럽의 경우와는 달리 쌍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권력 분점과 폐쇄 경제는 존재하지만, 그 토지를 봉토라 하거나, 그 브라만이나 사원을 영주 혹은 봉신이라 하거나 나아가 그 사회를 유럽에서와 동일한 봉건 사회라 한다거나 하는 문제는 해석하는 역사학자의 시각에 따라 달리질 수 있다.
문제는 - 우리가 이 자리에서 이야기 할 부분은 - 인도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변화해 왔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통치자의 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를 봉건 사회라고 해서 중세가 있다고 하든, 봉건 사회가 아니라고 해서 중세가 없다고 하든 관계없이 인도 사회는 근대 이전까지 꾸준한 사회 변화를 해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변화의 속도나 탄력성이 유럽의 경우와 같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갈 만큼인지 아닌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런데도 인도는 변하지 않은 영원한 본질을 가진 땅, 시간이 멈춘 곳 등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철저하게 자기 주관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몰역사적 사고의 결과다.
인도를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러한 착각에 깊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일수록 힌두 문화에 대한 사랑은 과도할 정도로 과장되거나 착각하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혐오는 소름 끼칠 정도로 끔찍하다. 그들에게 무슬림은 인류의 정신적 보고를 파괴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기는 암흑기이고, 그로 인해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되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인도가 갖는 비극의 모든 화근은 이슬람 통치로 돌아가고, 급기야는 나라가 둘로 분단되고 그 과정에서 셀 수 없는 학살이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도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테러와 보복 학살이 수 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인도사의 중세가 이슬람 문명기라고 규정한 제임스 밀의 역사적 판단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될 줄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역사에 대한 몰이해 내지는 왜곡을 통한 '악마 만들기'는 반공주의에서 잘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반공주의의 가장 피해자이자 그 상징이랄 수 있는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 이후로 10년이 흘렀으니 이제 그것은 크게 쇠퇴하였거나 효력이 그리 심각하게 작동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 않느냐고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언뜻 보면 일리가 잇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공주의는 이제 정치의 영역에서 우리 주변의 일상으로 확산되어 있다. 반공주의는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사회 구성원들의 뇌리에 주입되어 오다 보니 이미 한 개인의 정서의 일부분으로 체화되어 있다. 어린 십대들이 들기 시작하여 국민의 80% 이상이 찬동하고 있는 촛불까지도 '빨갱이'나 국가 안보론과 연결시키는 보수 집단의 행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런 시도가 상당수의 시민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안에 반공주의가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면서 이제 획일적이고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억압하는 권력의 기제가 되어 우뚝 서 있다.
▲ "친북 좌파가 촛불집회를 주도하고 있다"
그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정치 행태를 했는지, 그로 인해 우리가 안고 있는 손실이 얼마나 큰지는 이 자리에서 논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불을 보듯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몇몇 펜대 굴리는 사람들에 의해 조작되면 그 영향력은 상상 외로 커질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 인식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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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의 인도 침략, 그 신화와 역사 만들기
[프레시안] 2008년 07월 01일(화) 오전 09:55
아프가니스탄 가즈니(Ghazni) 출신의 술탄 마흐무드(Mahmud)는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상당한 영역을 통치하였다. 그는 11세기 초가 되면서 인도아대륙의 북부와 서부로 말머리를 돌려 부유한 사원들을 침략하여 약탈하였다. 왜 사원이었을까? 사원은 지금 신도들의 눈에는 예배를 드리는 성소이겠지만, 당시에는 돈이 몰려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안에서는 계(契)와 같은 자본주의 이전의 금융 행위가 성행하던 곳이었다. 7세기에 불교 사원인 날란다 같은 곳은 주변의 200 개의 마을에서 세금을 거둬들였다. 그 엄청난 돈이 모두 사원 안에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 돈을 거둬들이기만 한다. 물론 세금도 내지 않는다. 대원군이 서원을 -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사원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다 - 철폐한 것도 그로 인하여 국고가 비기 때문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마흐무드가 인도 북부와 서부로 치달려 들어와 약탈을 한 것은 군자금이 필요한 그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약탈하는 자가 점잖게 돈만 빼앗아 가는 것은 없다. 그런 건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역사상 모든 경우에 약탈자들은 그곳에 불을 지르고 파괴를 한다. 그렇지 않은 예는 없다. 무슬림의 약탈에 유독 민감한 반응을 보인 유럽의 기독교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독교도가 '성전(crusade)'이라고 미화한 '십자군전쟁'이 그 좋은 예다. 1차 십자군전쟁 때 40일 간의 포위 끝에 예루살렘을 차지한 기독교도들은 무슬림과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도망치지 못하고 성안에 남아 있던 무슬림과 유대인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 모든 전쟁은 학살과 파괴가 뒤따르는 잔인한 일이다. 그것은 무슬림의 전유물이 아니다. 침략 전쟁인 십자군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이슬람 사원은 불에 탔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사원을 불 지른 자의 입장에서는 적의 종교를 유린함으로써 적의 기를 완전히 꺾고 두려움을 퍼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우상 파괴자로서 자기 종교의 영광을 만방에 선포하였음을 자처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랬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그들이 예배 중에 있던 팔루자의 이슬람 사원을 파괴한 것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침략자의 우선적인 목표는 사원인 경우가 많다. 같은 불교도였지만 미얀마가 태국 아유타야를 침략했을 때나,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모두 마찬가지의 이유로 사원을 침략했다. 모든 침략은 돈을 빼앗고, 불을 지르고, 사람을 학살한다.
마흐무드 또한 이런 범주에 놓인 군주였다. 그런데 그가 행한 여러 약탈 가운데 하나가 최근 인도 정치의 첨예한 문제의 한 가운데에 등장하였다. 바로 그가 행한 1026년 구자라뜨 주의 소마나타에 있는 사원에 대한 약탈이다. 기록은 마흐무드가 소마나타 사원과 주변의 사원들을 연이어 대대적으로 약탈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록에 대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약탈을 기록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투르코-페르시아 계열의 문서로 가즈니 조와 그 이후 인도에 세워진 술탄 (즉, 무슬림 왕)조(朝)의 궁정 연대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록들에 의하면 그렇게나 엄청난 규모로 벌어진 소마나타 사원의 약탈 사건에 대해 그 지역의 토착 왕국 궁정 기록이나 기종 비문이나 전설 등에는 일언반구 언급조차 없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모든 침략 세력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떠벌이고 과장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무슬림은 우상 파괴라는 관점에서 자신이 행한 약탈을 사실보다 더 크게 떠벌이거나 과장하고 특히 그것을 우상 파괴라는 관점에서 기록을 남길 가능성이 크다. 가즈니 궁정에서 기록을 담당한 자는 자신이 믿는 알라를 찬양하고, 그 차원에서 자신들의 업적을 치켜세우고자 하는 차원에서 자신들이 행한 일을 훨씬 크게 떠벌임으로서 자신들을 매우 신실한 우상 파괴자로 자처하고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단순한 약탈이었던 사건이 기록을 남긴 자 손 안에서 '적들이 그 위용에 놀라 그 트라우마로부터 헤어 나오질 못했다'는 식으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스끄리뜨나 토착어로 된 사료들은 그 마흐무드의 약탈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약탈로 인해 힌두들이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언급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이 나중에 인도사를 재구성하고 해석하는 데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발단은 식민주의 역사학자들로부터 시작하였다.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은 인도의 역사를 고대 힌두와 중세 이슬람으로 설정해 놓았고, 따라서 이슬람 문명의 시작은 뭔가 엄청난 사건이 있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목적에 딱 들어맞는 것이 가즈니의 침략을 그린 투르코-페르시아 계열의 기록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기록들에 대해서 면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 그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는 차원에서 역사적 사실로 재구성을 했다. 따라서 그 사건은 실제로는 인도 서부에 국한된 한 사원에 대한 약탈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 전체의 역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할 정도로 엄청난 사건으로 과장되었다.
역사학자가 가져야 하는 첫 번째 의무는 사료 검증일 것이다. 역사학자가 사료를 가지고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할 때는 그 사료는 기록한 자가 누구인지, 그 사료를 기록한 목적은 무엇인지, 그 사료를 접하는 대상은 누구였는지 등에 대해서 반드시 최우선적으로 면밀한 검증을 해야 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소마나타 약탈에 대한 투르코-페르시아 계열의 기록이 사건에 대한 진정성 있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한 목적을 띤 기록일 수 있는지에 대해 보다 진지한 고민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인도의 역사를 처음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한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의 태도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우선 그들은 무슬림이 정복 군주로서 인도를 통치하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개 산스끄리뜨와 그 계통의 지역 언어로 쓰인 사료들을 활용하고, 무슬림이 통치자로 자리를 잡은 1200년 경 이후부터는 정복자로 들어 온 투르크어, 아랍어 혹은 페르시아어로 쓰인 사료들을 활용하는 전통을 스스로 만들고 고착화시켰다. 12세기 이후에도 분명히 산스끄리뜨나 인도의 토착 언어들로 쓰인 자료가 계속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료를 가지고 역사 재구성을 하려는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12세기 이후의 인도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항상 무슬림의 시각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식민주의자들의 이러한 역사 해석과 재구성으로 인해 이 사건은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내재된 적대감의 맹아로 투사되었다. 영국 식민주의자는 인도를 통치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인도 민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규정하지 않고, 인도 사회는 힌두교와 이슬람이라는 두 종교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공동체가 따로 있어 서로 분리되어 살고 있다고 역사를 기술하였다. 그리고 그 시발로 무슬림의 인도 침략과 약탈을 들었다. 그것은 무슬림의 침략으로 인해 힌두 사회에서 심한 트라우마가 발생하였고 이 트라우마가 근대 힌두와 무슬림 간의 공동체적 반목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론으로 연결되었다.
그러한 식민주의자의 역사 재구성에 의해 결국 의도대로 힌두와 무슬림 사이에 이전에는 없었던 종교 공동체가 만들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공동체를 중심으로 갈등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그 결과 인도-파키스탄의 분단이라는 비극이 발생했고, 그 후 두 나라에서는 다수의 소수에 대한 억압과 핍박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인도에서는 1990년대 이후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종교 공동체주의를 적극 이용하여 무슬림을 학살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고, 이에 대해 무슬림은 불특정 힌두에 대한 테러를 끊임없이 벌이고 있다. 어느덧 정사로 인정된 식민주의자들의 바로 그 독해가 한 가상의 역사를 창조해냈는데 그것이 실제 역사에서 트라우마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책임을 식민주의자들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는 식민주의자들의 상상적 독해를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 아래 있던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은 무슬림을 배척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민족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다수의 공통분모인 '힌두'를 강조하였다. 그러다 보니 그 안에서 민족주의와 종교 공동체주의가 겹치게 되었고, 그러한 진행 과정이 속도를 낼 때 그 견해를 뒷받침하지 않는 다른 목소리들은 일제히 침묵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도가 독립을 달성했을 때 독립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민족주의자들과 동일한 견해를 가진 힌두 민족주의자 진영에서 소마나타에 사원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당시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종교 공동체주의와 일정한 선을 긋고자 했다. 종교 공동체주의로 인해 나라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대 수상 네루는 독립된 인도 공화국의 국가 건설 목표를 세속 국가로 두었고, 그 연장선에서 소마나타 사원을 재건축하는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세속주의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 정부의 힘은 약화되었고, 힌두 민족주의의 힘이 강해졌다. 그러면서 소마나타 사원이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힌두 종교 공동체주의자들이 힌두교의 신화에 나오는 이상 군주인 라마(Rama)의 탄생지로 추정하는 아요디야를 다시 복원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곳에 서 있는 무슬림 모스크를 다 부숴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규모 군중 운동을 조직하였고, 급기야 북부 인도의 주요 부분을 돌고 난 후 아요디야에 도착하는 대장정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 출발지가 소마나타였다. 소마나타 사원이 힌두 민족주의 부활의 한 상징이 된 것이다.
▲ 소마나타 사원은 힌두 근본주의 정치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은 아요디야를 향해 대장정을 떠나면서 16세기 무갈 황제 바부르(Babur)가 모스크를 세우기 위해 원래 있던 라마 사원을 파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 바바르 모스크는 당연히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선동에 군중은 심하게 요동쳤다. 모스크는 결국 망치를 든 힌두 보수 집단들의 손에 의해 처참히 파괴되었고 그 과정에서 500 명이 넘는 무슬림이 학살당했다.
이제 역사는 더 이상 과거의 사실을 기술하거나 규명하는 학문의 한 장르가 아니다. 정치 전면에 활용되는 이데올로기 무기로 자리 잡은 지 꽤 오래 되었다. 역사는 더 이상 과거의 실체를 파악하는 학문으로서 머물러 있지 않고 이제는 현재의 지배 관계를 '과거의 힘'으로 정당화하는 강력한 정치적 무기로 기능한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세력 관계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갈등은 기존의 역사 시각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바꾸려는 세력 사이에 충돌을 필연적으로 야기한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유독 과거사 문제가 크게 불거진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학의 성격 변화와 관계가 있다. 정권 초기부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등에 의해 정부 차원의 과거사 진상 규명이 본격화되면서 학계와 시민사회의 논쟁이 뜨겁게 달궈진 것은 바로 역사학이 정치 행위에 대한 정당화 이데올로기로서 갖는 힘 때문이었다. 정권 탈환에 사활을 건 보수 진영에서도 《해방전후사의 재인식》등을 통해 과거사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모두 역사학이 현실을 통제하는 정치 무기로 자리 잡았다는 막중한 사실을 깨닫고 잇다는 증거이다.
▲ 역사학을 둘러싼 충돌은 이미 정치의 중심 현상이 되어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홉스봄(Eric J. Hobsbawm)이 역사학을 핵물리학만큼이나 위험하다고 했다는 말은 역사학의 이러한 정치 무기로서의 잠재성과 그 폭발성을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한 역사 전쟁은 인도아대륙에서 이미 진행 중에 있으니, 종교 공동체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인도 내부에서의 이러한 역사 전쟁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존재하는 핵전쟁에 대한 위협 못지않게 남아시아의 평화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 이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밑바닥에는 사실상 현재의 종교 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과 갈등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무슬림의 침략과 힌두 사원에 대한 약탈이 실제 역사에서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그들은 이미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은 그 역사를 활용하여 치르는 전쟁의 정치 공학 뿐이다. 그러므로 이 종교 공동체 간의 '역사 전쟁'은 과거의 역사적 실체를 사실적으로 구명한다고 해서 해소될 것은 아니다. 역사가 전쟁의 촉매 역할을 해 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는 우리가 인문학의 일부로서 이해하고 있는 그 역사가 아니다. 역사가 이미 역사학자의 손을 떠난 버린 상태다. 답답할 뿐이다.
역사가 무기로서 현재를 구성하는 일은 한국 사회의 언론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신문이나 뉴스에 나온 기사나 보도는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실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제인 동시에 현실이 아니다. 과거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때만 해도 언론은 사건 자체를 왜곡하면서 거짓으로 보도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치졸한 방법은 쓰지 않는다. 최근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를 보도하는 조중동의 태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른바 조중동은 사건 자체의 중심 진상은 보도하지 않고 그 주변의 자질구레한 것만 계속 보도하는 방법으로 사실을 왜곡한다.
그런데 그러한 방식의 사건과 기록의 역학 관계는 그 언론의 막강한 힘에 굴복한 정치인들에 의해 더욱 강력해졌다. 그 어떤 사건일지라도 기록과 전달에 있어서 전대미문의 막강한 힘을 가진 언론이 기사화 해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없고, 별 의미도 없는 사건이라 할지라도 언론에서 크게 다뤄 주면 대단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목숨 걸고 그렇게 열심히 '쇼'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가 기를 쓰고 언론 장악에 매진하고자 하고 야당은 또 기를 쓰고 그 시도를 분쇄하려는 것 또한 바로 언론이 갖는 이러한 무기가 된 역사로서의 막강한 힘 때문이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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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갈의 안정이 주는 역사의 의미
[프레시안] 2008년 07월 08일(화) 오후 03:31
이광수의 '인도사로 한국 사회를 논하다'-15
인도사에 관한 오해 내지는 왜곡 가운데 하나가 무슬림 정권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인도사에서 흔히 말하는 '무슬림 시대'나 '이슬람 왕조' 등은 역사적 의미로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통치자의 종교가 무슬림이라 해서 인도 사회가 무슬림 사회 혹은 이슬람 사회로 바뀐 적이 없기 때문이다. 통치자가 속한 무슬림은 다수인 힌두의 카스트 사회 안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섞여 살았고, 무슬림으로만 독립적으로 구성된 공동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의례나 축제 같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종교의 전통에 따라 행하였고 결혼, 이혼, 상속, 친족 간의 갈등 같은 경우는 각 종교가 규정하는 전통법에 따라 이행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나 시크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불교가 발생한 기원전 6 세기경부터 대승 불교가 발생한 기원 전후의 시기를 '불교 시대'라고 규정한 초기 학자들도 있는데 역사적 평가로는 온당치 못하다. 마찬가지의 논리로 18세기 뻔잡을 거점 지역으로 하여 형성된 세력으로 시크 왕이 통치한 왕국을 시크 왕국이라 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이 경우 뻔잡 왕국이라 해야 한다. 통치자가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고, 그가 설사 그 종교를 전폭적으로 후견하고 상당수의 인민이 그 종교를 따른다고 해서 종교를 그 시대나 왕국을 한정하는 어휘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도사에서 통치자의 종교가 무슬림인 정권 가운데 규모가 전국적인 것은 13세기의 델리 술탄 조와 16세기의 무갈 조다. 델리 술탄조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가즈니에 터를 잡은 세력의 무함마드 고리(Muhammad Ghori)가 북부 인도를 침략한 후 마믈룩(mamluk)으로 데리고 간 꿋뜹 웃딘 아이박(Qutb-uddin Aibak)이 돌아와 1206년에 델리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를 이슬람 군주 즉 술탄이라 칭하면서 시작한 마믈룩 술탄 조를 필두로 시작한 세력이다. 델리 술탄조는 다섯 조가 바뀌면서 때로는 북부 인도를, 때로는 인도아대륙의 거의 전역을 300여 년 동안 통치하였다.
무슬림 정복 군주들은 어디든 정복을 하면 피정복민 가운데 건장하고 머리 영리하고 '종자'가 괜찮은 것으로 보이는 남자 청년을 본국으로 데리고 가 통치자 계급으로 육성한다. 이런 사람을 마믈룩이라 한다. 그런데 이 마믈룩을 영어로 slave라 번역하는데 그 slave라는 어휘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노예'라는 뜻이 아니다. 굳이 하면 '복속민' 정도인데 수십 년 전에 일부 일본인 학자가 이를 '노예'로 번역해 사용한 것을 누군가가 이를 기초로 델리 술탄조 가운데 첫 번째 조인 마믈룩 조를 노예 왕조로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여 버렸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는 노예가 왕이 되었는가 보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다. 인도사 전공자가 너무나 적어 생긴,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없는 해프닝이다.
델리 술탄 조의 통치자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전제 군주였다. 그리고 그들은 개종하지 않은 힌두에게는 지즈야라는 인두세를 징수하고 무슬림에게는 그것을 면제해주었다. 이 지즈야를 두고 해석을 잘못 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근거로 해서 그런 통치를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것이라고 평가하는데,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만 종교에 대해서만 인두세를 면제해주었을 뿐, 종교 외의 사회나 문화에 대해서는 이슬람 방식을 고집하여 나라 운영을 하는 예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개종하지 않는 힌두들이 지즈아� 납부하면 무슨 신을 믿든, 어떤 전통을 따르며 살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통치자에 따라 우상 숭배와 같은 행위에 대해 상당한 압력을 행사한 경우도 있었지만 힌두 사원이나 사제의 종교 행위를 핍박한 적은 없었다.
그들의 이러한 통치 방식은 카스트에 관한 정책에서 무엇보다도 잘 드러난다. 그들은 카스트 구조 사회에 관해서는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이치다. 통치자로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 안정이었고, 인도에서 그 사회적 안정은 카스트 제도의 유지를 통해서 가능하지, 이슬람의 만민평등 사상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통치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경제적으로는 생산 체계의 안정적 유지와 그를 통한 안정된 세수 확보 및 노동력 확보이고, 사회적으로는 전통 사회의 안정적 유지라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마찬가지로 통용되는 보편사의 기본 원리다. 군주가 개인적으로는 특정 종교를 독실하게 믿고 따를 수는 있지만 그 종교를 나라 운영의 기틀로 잡아서는 국정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은 그들의 뒤를 이어 등장한 무갈 제국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무갈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몽골 제국과 티무르(Timur) 제국이 쇠퇴한 후 분할된 세 제국 가운데서 티무르의 후손임을 자처한 - 그 혈통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 바부르가 중앙아시아의 패권 다툼에서 밀리면서 인도로 들어와 세운 나라이다. 바부르는 당시 세계에서 최고의 군주 적통인 칭기즈칸과 티무르의 혈통을 모두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미 다른 경쟁 세력을 압도하였다. 게다가 바부르는 역경을 무릅쓴 후 성공을 해 백성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또 술과 사교를 좋아하고 시문에 능하며 예술과 학문을 사랑하는 등 아주 낭만적이고 백성과 부하에게는 어질고 자상한 군주였으면서도 귀족들에게는 매우 엄격하고 추상같은 무서움을 보여준 군주였다는 사실이 강한 카리스마를 만들었다.
무갈 제국을 건국한 바부르는 중앙아시아의 패권 다툼에서 밀리면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이주해와 자리를 틀고 있다가 기회를 잡아 인도아대륙으로 내려와 델리에서 제국 건설의 기틀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죽은 뒤 카불의 푸른 하늘을 보고 싶으니 그곳에 묻어달라고 해 그의 유해는 카불에 옮겨져 지금껏 묻혀 있다. 그의 아들 후마윤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프간 출신의 셰르 샤의 침입을 받아 이란으로 쫓겨났다가 권토중래하여 다시 인도로 돌아 와 제국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후 제국은 거침없이 200년을 달렸다.
▲ 30년이 다 되어 가는 아프가니스탄 내전 속에서 카불의 바부르 묘는 폐허가 되어 있다.
바부르는 델리 술탄 시대보다도 더 관용적인 정책을 썼다. 그 전통을 이어 바부르의 손자인 아크바르는 바부르의 힌두-이슬람 사이의 종교 융화 정신을 더욱 살려 지즈야를 폐지하고, 고위 관리직의 문호를 개방하여 그 자리에 많은 힌두를 기용하였다. 여기에 모든 종교의 사상을 존중하여 하나의 유일신 사상으로 묶어 보려는 정책을 택한 것은 이 시대 무갈 제국이 탈종교적이면서 사회 복지를 널리 추구하는 거대한 문화 융합체가 되는 초석이 되었다. 실제로 아크바르는 번역청을 설치하여 힌두 고전인 여러 베다, 《마하바라따》, 《라마야나》 등을 페르시아어로 번역시키기도 했다. 그가 이러한 행보를 한 것은 힌두 문화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는 제국의 안정적 유지를 위한 통합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무갈은 전체적으로 정치 세력으로서 각 집단끼리의 경쟁이나 싸움은 있었지만, 출신지나 출신 종족을 기준으로 하는 정체성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사를 전공으로 하지 않는 일부 동양사학자들이 가끔 무갈이 중국의 청나라와 같은 정복 왕조로서 피복속민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이는 인도사의 기본을 잘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중국사에서는 한족을 비롯하여 종족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역사의 주체로 나타나기 때문에 한족과 그 외의 북방 민족 사이에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나고 그 사이에서 '멸만흥한(滅滿興漢)'과 같은 구호가 표면으로 나타나지만 인도사에서는 전혀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종족 정체성 인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한 차원에서 민족 의식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힌두와 무슬림의 공동체 의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영국의 인도 식민 통치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전범으로 여기고 그와 유사한 다른 지역의 역사를 그러한 성격으로 비교하거나 비슷하게 이해하는 것은 그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거대한 세속적인 복합 사회로서의 무갈의 모습은 무슬림 군주가 통치하던 시대에 힌두교의 사회 체계인 카스트가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무갈 정부는 각 촌락의 사법 기구 역할을 하던 카스트 촌락 위원회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충분한 자치권을 부여하였고 이를 토대로 카스트 촌락 위원회는 벌금, 참회, 추방 등의 방법을 통해 힌두 사회에서 중요한 사회 규제의 대상이던 혼인과 음식에 관한 위반 행위를 강력하게 규제하였다.
이렇게 카스트 촌락 위원회의 권한이 막강해진 것은 무갈 정부가 카스트 체계가 가지고 있는 규제 기능을 통해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지즈야를 부활해 이슬람 근본주의적 통치를 한 것으로 오해를 받고 있는 아우랑제브에 의해서도 유지되었으니 무갈 전체에 걸쳐 이슬람 교리에 관계없이 카스트는 정부에 의해 장려되었던 것이다.
이는 통치자 개인의 종교 성향에 관계없이 사회의 안정적 유지와 카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생산 체계의 효율적 유지를 통해 세수와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도 때문에서였다. 바부르 이후 무갈 정부가 브라만을 관직에 널리 기용한 것도 브라만 중심의 사회 문화 체계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것은 힌두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 통치에 필요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죽으면 과부가 따라 죽는 사띠와 같은 것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한 못하게 하였고, 유아혼도 금지시켰다. 반면 과부 재혼을 합법화하였으나 이런 풍습은 워낙에 힌두 사회에 그 뿌리가 깊이 박혀 있어서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풍습을 강압적으로 금지하여 민의와 충돌하는 일은 벌이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아크바르 통치 아래에서 국가는 세속적이고, 종교적으로는 관용적인 성격을 갖추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도에서는 세계에서 성격이 가장 다른 종교인 힌두교와 이슬람에 기초를 한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통합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갈 정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농촌 사회의 안정이었다. 정부는 한 마을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지주이자 그가 속한 지배 카스트가 무토지 임노동자나 장인들을 과도하게 착취하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관리하였다. 국가는 지주가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경작 규모를 확장하거나 대토지 소유 경영을 시도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더불어 농촌 사회의 지배 계층과 적대 관계를 무릅쓰면서 정부의 경제력을 집중하는 따위의 일도 시도하지 않았다.
국가는 사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여전히 지주 체계의 소농업 경영을 유지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았고 그 안에서 국가의 비호를 입은 여러 단계의 중개인들만 배를 불릴 수 있었다. 따라서 농촌 사회의 지배층은 중앙 정부와 밀월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현상 유지의 조화 상태가 유지되었다. 전체적으로 지배층은 중앙 정부에 종속되어 있었고, 농민은 지배층에 다시 종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가 입장에서는 유럽의 중세 말기에서와 같이 귀족에 대한 견제를 위해 상업과 수공업에 대한 투자를 통한 시민 계급의 성장을 장려할 필요가 없었다. 지배층은 생산 확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하지 않았고 오로지 황제를 닮은 작은 왕으로서의 소비와 사치 향락 혹은 대금업이나 토지 저당 등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시가 발전하거나 자본의 축적이 대규모로 진행될 수 없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대지주가 국가 권력에 대해 독립적 관계를 유지하던 봉건 세력이었고, 그들이 국가의 규제로부터 벗어나 화폐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자본을 축적시킨 대상인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할 수 있었으나 인도에서는 지주가 국가 권력에 철저히 종속적인 위치였고, 농민은 지주에 대해 다시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사회 갈등이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세계사에서 그 유명한 소위 '무갈의 안정'(Mughal's stability)이 갖는 역사의 의미다.
▲ 무갈 시대의 귀족의 삶은 안정된 사회 위에서 사치와 향락으로 점철되었다.
왕조의 안정적 유지는 한국사의 경우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특히 조선 왕조 500년. 그 500년 동안 인민은 왕의 목을 단 한 번도 치지 못했다. 국가가 두 번의 큰 전란을 겪은 무능한 통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처단을 당하거나 왕조가 바뀌는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나라가 전란에 휩싸이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도 그 정권을 책임져야 한다는 역사의 당위성을 부르짖는 경우는 나타난 적이 없었다. 이는 그 '조선의 안정' 때문이었다.
이러한 보수적 사회 분위기는 왕조가 망한 후 독립 운동기에도 여전히 유효하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겨 그 울분에 처한 나머지 자결을 한다거나 항일독립군에 가담한 사람들 가운데 다수의 목표는 왕조의 복원이었지, 평등 사회의 건설은 아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보수 왕조 유지의 이데올로기는 거의 천명의 역할을 하였으니 일제 강점기를 지나 분단과 내전을 거치면서도 바뀔 줄을 몰랐고, 그 후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 독재 시기에도 여전하였다. 어떻게 그렇게나 많은 국민을 학살하고, 이후 국민의 힘에 의해 정권이 굴복하고 결국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그에 대한 처단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러한 역사는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독재는 세습되어 김정일 독재로 이어지고 있지만 인민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한국사에서 그나마 유일한 처단은 김재규가 저지른 박정희 암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 항간에 떠도는 미국의 CIA의 사주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관계없이 - 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개인 차원의 일이었다. 사회가 변화하려면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여 기존의 권력 구조에 대하여 저항하고 그 위에서 시대를 변혁시켜야 하는 건데, 김재규의 박정희에 대한 암살은 사회 변혁과는 연계될 수 없는 돌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근대 시민 세력이 성장을 해서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단을 하는 방식이든 영국에서와 같이 유혈 사태 없이 타협을 통해 왕을 권좌에서 물아내고 시민 권력을 이루어내는 방식이든, 새로운 세력이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내는 그런 역사는 조선에서든 대한민국에서든 북한에서든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 혁명 없이 새로운 시대가 오는 법은 없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노동자, 농민, 빈민이 경제적으로 심한 곤란을 겪고 있다. 가정 파탄, 가정 폭력, 자살, 기아, 노인 학대 등으로 이어진 사회 문제는 이 나라에서 항상 그렇듯 철저히 개인 문제로 치부되고 있다. 그만큼 이 사회는 안정되어 있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사회로부터 방치되어 있는 계층이 이렇게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나라는 없다. 이곳은 총기가 난무하는 5·18 때도 전당포 한 곳 털리지 않았고, 전국에서 100만이 모여 촛불을 밝히면서도 사건사고 한 건도 터지지 않았다.
갈등이 사회 변혁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시 안정의 기반이 되는 것은 퇴보로 가는 길이다. 그 만고의 진리는 16세기부터 17세기 유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반면에 인도의 무갈 제국과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한 번만 깊이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광수/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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