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왜란의 미스 테리
문상욱 (2008-07-03 11:38:11)
<아래의 글은 조선왕조 시대의“신경 (申 炅 1623-1653 )이란 분이 기록한 <재조번방지>속의 내용으로 반도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보기 어려운 많은 기록이 있으나 그 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 과연 선조대왕 시 일어났다는 임진년 왜란의 장소가 반도가 맞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조선의 영토에서 벌어졌던 사건일까를 알아보기로 합니다. (이 기록을 ”난중잡록“과 ”명사 열전“과 함께 비교하면서 설명하려니 너무 길어져 일단 ”재 조번방지“속의 내용만을 가지고 설명해야겠습니다)
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동서(同書)에 기록된 한 대목을 보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보십시다.
<上旣到義州.東向痛哭.西向四拜.將欲渡江.旣次畿甸.切宜相勢合兵.收復京師>
이윽고 상(선조대왕)이 의주에 도착하였다. 상(선조대왕)이 동(東)쪽을 향하여 통곡을 하고, 서(西)쪽을 향하여 사배를 올렸다.
선조는 의주에서 왜 동쪽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으며, 왜 서쪽을 향하여 사배를 한 것일까?
이윽고 다음에는 기전(황제의 직할 통치지방 : 경조 또는 경기)이며, 여러 세력들이 연합하여 경사(도읍지. 수도)를 수복했다.
반도 조선은 대륙의 중국(명나라)의 제후국이며, 충실한 번국(동번 東蕃)이었다고 하면서 천자 국이나 황제 국에서만 가능한 “기전(畿甸)”은 웬 말이며, 황제국의 수도를 말하는 “경사(京師)”가 웬 말인가. 조선사에서 말하는 “기전과 경사”가 조선을 말한다면 조선사에 나열되어 있는 “기전이나 경사”는 어찌 번역해야 할 것인가?
(1) [본문 : 가을 기운이 잠깐 일어나니, 변지(邊地)의 날씨는 일찍 차도다. 장강(長江)을 바라보니 또한 동으로 흐르는데, 돌아가고자 하는 일념(一念)은 강물처럼 도도하구나.
<원문텍스트 : 秋涼乍動.邊地早寒.瞻彼長江.亦流于東.思歸一念.如水滔滔>
교시가 이르면 너희 신민들은 반드시 나의 뜻을 가련하게 여기고 슬퍼할 것이다. 슬프다! 하늘이 이성(李 晟)을 낸 것은 성궐(城闕)을 다시 회복할 날을 기대하게 한 것이고, 날마다 장준(張 俊)을 바라는 것은 원릉(園陵)이 무사하다는 기별을 기다림이라. 하루 빨리 이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여 이슬과 서리를 맞는 나의 고통을 면하게 하기를 바라노라. 이에 교시하노니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가을바람이 잠시 부니 변지(평양 땅)의 날씨는 벌써 차가와 추위를 느낄 정도가 되었다는 말이며, 선조대왕께서 장강(長江 : 양자강)을 바라보니 강물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흘러가는데, 이 강물이 동쪽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듯 빨리 경성(都城)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염원을 말한 것이다.
이는 장강이 수천 년 변함없이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말한 것이 되는데, 반도에서 수천 년 왕조를 이어온 소위 “조선의 왕”이 반도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많은 강 즉 압록강, 대동강, 낙동강, 금강 등이 수천 년 변함없이 흘러가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제쳐두고 하필이면 자신의 영토가 아닌 남의 나라 땅에 있는 장강(長江)을 예를 들며 자신의 신경을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자신이 난을 피해 서쪽으로 피신해와 있으니 저 강물이 동쪽으로 흘러가듯 자신(선조)도 하루 빨리 동쪽의 황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문제는 의주가 서쪽지방일 수 없으며, 의주에서 황성(한성=한양)이 어떻게 동쪽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2) [본문 : 권율이 방어사로 하여금 대신 이치(梨 峙)를 지키게 하고 자기는 직접 전주에 이르러 도내의 군사 만여 명을 출동시켜 서쪽으로 서울로 향하였다.
<慄令防禦使代守梨峙.親到全州.發道內兵萬餘.西向京師>
이때 왜적의 괴수 행장(行長)은 이미 평양을 빼앗아 성을 점거하고 있었고, 장정(長 政)은 황해도를, 융경(隆 景)은 개성부를, 평수가(平秀嘉)는 제추(諸 酋)를 독솔하여 대병을 이끌고 경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병사를 풀어놓아 사방을 약탈하므로 서로(西路)가 이미 막혀 근왕하는 여러 장수들은 모두 강화도에 들어가 강을 요새로 적병을 피하고 있었다. 주상께서 의주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말하기를, ▶▶▶(54) “지금 평양 이남은 모두 적진인데 서울은 근본이 되는 땅이니, 서울을 먼저 수복하기만 못하다. 그리고 행장(行長)의 뒤를 끊어서 동쪽을 돌아보며 의심하게 하여 마음 놓고 서진(西進)하지 못하도록 하면 적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今平壤以南.皆爲賊壘.京城爲根本之地.不如先復京城.連綴行長恫疑東顧.使不得一意西進.則諸將無能爲也>
지금 만약 강도(江 都)로 들어간다면 적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수원의 독성(禿 城)에 진주하였다. 주상께서 권율이 독성에 진주하였다는 말을 듣고 차고 있던 칼을 풀어서 급히 내려 보내며 이르기를, “제장들 중에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다스려라.” 하였다.]
전라도 전주에서 당시 都城(京師)이었다던 “한양 또는 한성”이 <西>쪽이었다는 위의 말은 참으로 민망하다. ----------≫
경상도 대구나 경주쯤에서 “都城”을 말할 때 <서쪽>이었다면 그나마 조금 理解할 수 있겠으나 전라도 전주에서 “한양 도성”을 서쪽이라 했다는 말은 방향감각이 상실된 것이다. 이곳은 거의 정 북방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또 조선 팔도를 설명하면서 도읍지(한성=한양)의 남쪽에 전라도가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더더욱 헷갈리게 하는 대목이다.
한양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소서 행장의 뒤를 끊어 동쪽을 의심하게 하여 서진(西進)을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인데----------≫
이러한 기록 때문에 임진년에 있었다는 “왜의 난동”사건의 장소가 반도가 아니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한양(한성)을 점령 주둔하고 있는 왜군부대의 뒤를 끊는다는 말은 한양(한성의) 남쪽을 공격하여 경상도지방에서 올라오는 왜의 보급로 또는 뒤(남쪽지방)에서 올라오는 增員(증원)군이나 기타 전선(戰線)을 갈라놓아 더 이상의 전진을 막겠다는 전략인데, 이때 소서 행장의 부대가 목표로 하는 곳은 서쪽이 아니라 북쪽에 있는 평양이었으며, 실제 왜군이 북쪽으로 진격하여 평양을 점령한다.
권율 장군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한 사실일진대, 소서 행장의 뒤를 끊어 서(西)쪽으로 진격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말은 이들 왜군이 東쪽에서 西쪽으로 진격하여 한양(한성)을 점령했다는 말이며, 이들의 배후(후방 :동쪽)를 끊어 서쪽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말이기 때문에 이는 반도의 지형, 지리와는 너무도 부합되지 않는다.
(3)[본문 : 내 어찌 잊겠는가.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아! 예악의 나라에서 바다 오랑캐의 기운을 쓸어내고, 산이 숫돌처럼 되고 바다가 가는 띠가 되도록 봉토를 나누어 받는 영광을 누리도록 할지어다. 교시하니 자세히 알기 바라노라.
<予何忘也.爾其勉之.於戱禮樂提封.倘掃腥膻之氣.山河帶礪.可共茅土之榮.故玆敎示.想宜知悉>]
위의 글에서 “봉토를 나누어 받는 영광을 누리도록 할지어다.”라는 말에서 당시 “조선”은 중앙 집권적 왕조 체제하에 각 지방에는 제후(諸侯)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위의 글에서
[<封 土>를 나누어 받는 영광 (可 共 茅 土 之 榮)]이란 말은
침구한 왜적을 무찌른 자에게는 영토를 나누어 주겠다는 것이며, 이는 천자(天子)가 공이 많은 대신, 장군들에게 봉토를 주어 그곳의 왕으로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여기서 천자나 황제로부터 봉토를 나누어 받은 자는 제후의 왕이 되는 것이며, 이는 공(公)이며, 왕(王)이며, 제후국이 되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 이러한 제후국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조선 강토 내에서는 지금까지 그 어떤 제후국도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영토는 반도가 될 수 없으며, 봉토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는 “천자로 호칭되는 황제”였으므로 반도 조선에서 황제가 있었다는 역사해설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위에서 말하는 선조대왕은 황제일 수밖에 없으며, 반도 조선의 황제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선조대왕은 “조선의 황제, 중조의 천자, 중국의 천자”가 되어야 위 기록을 충족시킬 수 있다.
(4)[본문 : 대개 서울은 우리나라의 도회지로, 왼쪽에는 강원도, 오른쪽에는 황해도, 동쪽은 경상도, 남쪽은 전라도가 있으며 함경도와 충청도가 서로 호응하는 형세로 되어 있어 천연의 요지를 차지하였는데, 명나라 군사가 잇달아 이겨서 또한 적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가지니 사람들이 매우 근심하였다. 제독이 먼저 사 대수(査 大 受)를 보내어 앞길을 정찰하고 제독도 자신이 이어 떠나서 25일에 개성부에 들어왔다--------≫
<應暘旣去.上乃還平壤.接見提督稱謝慰喩.又請提督.進復王京.提督許之.蓋王京爲我國都會.左江原右黃海.東慶尙南全羅.咸鏡忠淸爲之猗角.頗據有天險.而天兵連勝.亦有輕敵之心.人頗憂之.提督先遣査大受.哨探前路.提督亦自繼發>]
참으로 답답한 기록이다. -------≫
반도 땅에서 이러한 지리적 배치가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는 明나라에서 朝鮮의 강역을 말 할 때 기록한대로 “東西 2천리와 南北 4천리”일 때 가능한 지리적 배치이다. 따라서 당시 朝鮮의 강역은 반도가 될 수 없다.
어느 나라이던 간에 자신들 국가의 중심지역을 기준하여 방향이나 거리등을 말한다. 이럴 때 반도에 있었다고 하는 “조선”의 왕도는 현재의 서울 즉 옛 한양(한성)이었다.
왕경(한양)은 우리나라의 도회지로, 왼쪽(東)에는 강원도, 오른쪽(西)에는 황해도, 동쪽에는 경상도, 남쪽에는 전라도--------≫
이 말은 가당치 않다. 이미 동쪽에는 강원도가 있기 때문에 강원도 동쪽에 경상도라는 말은 가능하나 동쪽에 강원, 경상 두 도가 함께 있을 수는 없다(강원도 동쪽 끝은 동해바다가 자리 잡고 있으므로).
함경, 충청도는 서로 호응하는 형세에 있다------≫
이 말은 가능하다. 그러나 경기의 남쪽지방에 충청도가 있기 때문에 충청도 남쪽에 전라도라는 것은 가능하나 왕경의 남쪽에 전라도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
이러한 기록이나 해설이 가능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반도의 지형, 지리 때문이다. 즉 명사에 “조선은 동서 2 천리, 남북 4천리”라 했기 때문이다. 즉 동쪽에 강원도, 또 경상도가 있을 수 있으며, 남쪽에 충청도, 전라도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서쪽에 황해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반도라는 한정된 땅에서는 8 도 배열이 불가능했다(당시)는 말이 된다.
(5)[본문 : 유성룡이 이때 동파에 있다가 종사관 신경진(辛 慶 晋)을 보내어 달려가서 제독을 보고, 퇴군할 수 없다는 의사를 진술하여 말하기를, (중략), 제독이 그 말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떠나갔다. <조정에서 좌의정 윤두수(尹 斗 壽)를 보내어 퇴병하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제독이 역시 듣지 않으니 윤두수가 간절하게 사연을 말하며 -동쪽으로 나가기를 청하면서 눈물이 말할 때마다 떨어지니 제독이 민망히 여기는 안색을 지었으며, 그래서 우는 각로(閣老)라는 칭호가 생기게 되었다.>
朝遣左議政尹斗壽.請勿退兵.提督亦不聽.斗壽苦辭請東.淚隨言發.提督爲之動色.遂有泣閣老之稱]
(64)의 기록을 보자. <벽제에서 명나라 구원병이 패하고 난 후에 이들은 평양으로 다시 돌아가려 했다. 이에 조정의 대신인 “윤두수”가 명 제독에게 애타게, 간절하게 사연을 말하면서 “동(東)쪽으로 나가기를 말하는데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니>
----≫ 이 얼마나 비참한 실상인가. 국가의 지도자나 그 지도자를 옆에서 보좌하는 자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일국의 대신이란 자가 왕사로 조선에 파견 나온 “제독‘에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철수하지 말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왜적을 물리쳐 달라는 사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이 눈앞에 선 하지 않은가. 당시의 사정이 오죽했으면 이럴 수가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자. 권력싸움에 눈이 멀어 국가의 안위나 백성들의 생사문제는 도외시한 채 자신들의 부귀와 영화와 명예를 탐닉한 자들에게 돌아가는 인과응보라 말하기엔 백성들이 당하는 고충이 너무도 비참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개성이나 임진강 또는 파주, 벽제등지에서 東쪽으로 進軍하면 강원도 홍천이나 원주지역이 된다는 점이다. 아래에 “진사 태 현(太 玄) 심 조환(沈 朝 煥)이 이러한 동쪽에서의 사실을 듣고 두 수의 율시(律詩)를 지어 탄식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참으로 답답한 내용이다.
동서(同書)에서 말하기를 ;
<총 병이 마침내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이때는 큰 병란의 나머지라 기근이 겹쳐 들어서 백성들이 흔히 자식을 바꾸어서 잡아먹고 사람을 죽여서 서로 씹어 먹을 정도였으며, 구렁에 굶어죽은 시체가 쌓이는 것이 하루에도 천여 구가 되었는데, 유 총 병이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봉(自奉)이 심히 간략하였고, 또 백성과 군사들이 굶어 죽는 것을 측은히 여겨 법령을 군중(軍中)에 내리고 남은 쌀이 있는 것은 모두 우리 백성에게 매매하게 하여 식량의 밑천을 마련해 주어 백성들이 힘입어 생활하였다>
국가의 지도자나 그 지도자를 보좌하는 관리들이 잘못할 때 백성들의 고통이란 죽지못해 살아가는 최악의 생활일 것이다. 위의 내용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먹을 양식이 없으니 자기 자식을 직접 죽여 먹지 못하니 대신 다른 집의 자식과 자신의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고, 또 낮선 사람을 잡아 인육을 서로 먹고 살았다는 것이다. 또한 굶어 죽는 사람의 시체가 하루에도 천여 구가 넘게 버려지고..........
백성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게 만든 장본인들은 누구이며 책임을 어떻게 질 수 있겠는가! 항상 당하는 것은 힘없는 민초(백성)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러한 실정은 똑같다.
(6)[본문 : 유정(劉 綎)은 자는 자신(子 紳)이요, 호는 성오(省 吾)인데, 강서(江 西) 남 창 부(南 昌 府) 홍 도현(洪 都 縣) 사람이다. 사천(四 川)ㆍ파 촉(巴 蜀) 지방 군사 5천 명을 거느렸는데 그 중에는 해귀(海鬼) 수십 명이 있으니 그 종족이 남 번(南 番)에서 생장하여 낯빛이 아주 새까매서 귀신같으며, 바다 밑으로 잠수하여 다녔다. 또 키가 큰 사람이 있으니 형체가 두 길은 되는데 말을 탈 수가 없어 수레를 타고 왔다. 또 미후(獼猴:원숭이)로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타고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데 적진 중에 들어가서 말굴레를 풀어놓기도 하였다.
<劉綎字子紳.號省吾.江西南昌府洪都縣人.領川蜀兵五千人.其中有海鬼數十名.其種出南番.面色深黑如鬼.能潛行海底.又有長人.形軆幾二丈.不堪騎馬.乘車而來.又以獼猴服弓矢騎馬前導>]
위의 글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유정은 “欽 差 統 領 川 貴 漢 土 官 兵 參 將”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는 자인데, 이 “유정”의 병사는 사천省과 귀주省의 병사들로 이루어진 한토(漢土)병이라는 것 같다. 문제는 이 “유 정”이 참장으로 있는 이 부대에 현대의 말로 표현한다면 해군의 “U D T" 정도라 할 수 있는 잠수특수부대원 수십 명이 함께 왔는데 이들은 남 번(南 蕃)출신으로 흑인(黑人)에 가깝다는 묘사를 하고 있고, 또 특이한 부대는 원숭이들로 편성된 미후(獼猴 : 원숭이)부대가 있어 이들 ”원숭이부대“는 말을 타고 선봉에 서서 진격하면서 아군의 진격 로를 열고, 공격명령이 떨어지면 선봉으로 진격, 적중에 들어가서 적들의 말굴레를 풀거나 화살을 쏘면서 진격, 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아군의 진로를 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해귀(海鬼)>---------≫
바다의 귀신 즉 현재의 잠수부를 말하는 것 같다.
<미후(??)>---------≫
원숭이를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이 세상은 넓다는 것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원숭이가 말을 타고 선봉에서 진군하면서 활을 가지고 활을 쏘며, 길을 인도하는데 적진으로 들어가서는 적군의 말굴레를 풀기도 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실은 대륙에서 기록된 것이 아닌 조선인이 기록한 것이다. 결국 조선 선조대왕 임진년에 벌어진 “왜의 난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진압군의 편성을 보면 사해(四海) 즉 호병(胡兵)을 위시하여 명나라 군사, 한 토병, 남 번의 군사, 남만의 군사, 광동, 광서, 절강, 복건, 사천, 강서, 귀주, 산서, 산동, 섬서, 호 남북, 안휘, 하남, 녕 하, 감 숙 등지의 대륙과 그 주위의 나라에서 차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도에 원숭이 부대가 출동하여 전쟁에 투입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요(遼)”나라 때 “고려”를 침략한 요군(遼 軍)의 보급품을 나르고 수송하기 위해 락타 부대가 왔었다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및 요사 본기, 열전 기록을 참고한다면 이러한 동물들이 하루 이틀 있었던 것이 아닌 수개 월 씩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격전장이 반도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7)[본문 : 동쪽으로부터 온 사람이 말하되, ‘너희들 백성들이 성중으로 들어가 사는 자가 가득히 많다.’ 하니, 너희들이 어찌 나를 버리고 적도를 좇아 부귀를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이겠는가? 이는 붙잡히고 갇혀 있는 노약자가 가난하여 조금이라도 얻어먹을 것만 생각하여 아직 구차하게 목숨을 던져 의탁한데 불과할 따름이다. 그 가운데에는 혹 적에게 생포되어 힘이 부족하여 빠져 나오지 못하는 자와 왕래하면서 적의 내용을 탐색하는 자와 이리저리 주선하여 어떻게 하면 기회를 타서 적의 원수를 갚을까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하니, 내 너희 실정을 살펴보건대, 듣고 보고 설명을 기다리지 않아도 자연히 환히 드러나는 것이다. 내 오랑캐의 침략을 막지 못하여 너희들을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나에게 죄가 있는 것이요 너희에게야 실상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從東方來者言.汝赤子入城中者滿都.汝豈欲舍予而從賊.有富貴念哉.是不過牢攣老弱.貧戀棧豆.呰窳投生耳.其中或有被擄而力難脫者.往來而探賊情者.周旋而想可乘之機者.予察汝情.不待自列.予失禦戎.使汝至此.是予有罪汝實何尤.卽者幸蒙聖天子德威>]
<동쪽으로부터 온 사람이 말하되, ‘너희들 백성들이 성중으로 들어가 사는 자가 가득히 많다.’ 하니>-------≫
조선 왕조의 군주였던 “선조대왕”시절에 벌어졌던 “임진년 왜란”사건! 알려하면 알려할 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위의 글을 보자. 倭가 쳐들어와 며칠 만에 都城이 점령되고, 선조대왕은 북쪽으로 파천하여, 임진강을 건너 대동강을 건너 “의주”까지 가 그곳에서 명의 구원병을 요청하여 우여곡절 끝에 “평양”을 수복하고 “왜”는 명과 조선의 군대에게 밀려 漢城(都城)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상황이다.
위의 내용은 선조대왕이 한성(都城)의 백성들에게 교시를 내린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기를 “동쪽에서 온 사람이 말하기를........”하고 있다. 이는 반도의 지형, 지리상 동쪽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의 말이래야 옳은 것이다. 즉 평양이 됐든 의주가 됐든 간에 반도의 상황으로 보면 都城 즉 한양(한성)은 남쪽지방이지, 동쪽지방일 수는 없는 일이다. 반도조선의 군주인 “선조대왕”이 동서남북도 구별 못하는 어리석은 군주는 아니었을 터!
이것은 반도조선을 설명한 글이 될 수 없다. 한양(한성)이 동쪽지방이 될 수 있으려면 선조대왕은 인천에서 배를 타고 백령도쯤으로 파천했어야 맞는 말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양(한성=都城)의 서쪽지방에서 동쪽에 있던 한성부를 보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도의 지형, 지리로는 불가능한 사건이며, 이 사건이 전개된 지역은 대륙의 중원에서 벌어졌던 것으로 봐야 한다.
위의 글은 ------≫
이에 다섯 수(首)의 시로써 불평한 마음을 �노라,
첫째 시에 이르기를,
용사(임진ㆍ계사년, 즉 임진왜란) 때 순수(巡狩)하러 나가던 날에는 / 曾在龍蛇出狩日
난여(임금의 수레)가 압록강 가에 황급히 헤매었네. / ?輿顚倒鴨江濱
명(본인 주 : 한(漢)황제)나라 황제의 혁혁한 천위가 아니었으면 / 若非漢帝天威赫
3천리 강산이 모두 살갗에 문채를 새긴 사람이 될 뻔 했네 / 千里皆爲鏤體
둘째 시에 이르기를,
태조 고황제의 웅장한 의도가 한낱 꿈같이 헛 되버려 / 高 帝 雄 圖 一 夢 空
산하가 반이나 개와 양의 무리 속에 들어갔구나. / 山 河 半 入 犬 羊 中
나 혼자 오늘날 한없는 원한을 가지고 / 獨 將 今 日 無 窮 恨
(101) 한가지로 백 굽이 강물 따라 동쪽으로 갈 꺼나 / 共 逐 江 流 百 折 東
위의 시 (101)에서 “한가지로 백 굽이 강물 따라 동쪽으로 갈 꺼나 / 共 逐 江 流 百 折 東”을 보자. 반도에서 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은 강원도 동쪽 해안가의 작은 하천밖에 없으며, 사실 강이라고 표현하기에 낯간지러운 조그마한 하천일 뿐이다.
<백번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함께 동쪽으로 따라(추종하여)갈 꺼나> 이 말은 반도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 없기 때문이며, 위에서 말하는 江이란 반도에 있을 수 없다. 이렇게 왜진 년 왜란 시에 기록된 대부분의 기록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격하고, 피란을 가고, 다시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격, 수복하는 과정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강물은 동쪽으로 흘러가고---------
이러한 지형, 지리적 관계는 반도라는 한정된 지역에서는 불가능하다.
(8)[본문 : 빈 풍(邠 酆 주(周) 나라의 도읍지)과 같은 옛 도읍을 내 차마 소홀히 버리지 못하며 관서지방인 이 황량한 한 모퉁이 변역에 내 어찌 좋아하여 멀리 왔 으 리오.]
<敎 書 曰; 自 予 西 遷.(中略) 從 東 方 來 者 言.(中略) 邠 酆 舊 都. 予 不 忍 乎 遽 棄. 關 西 荒 陬>-------≫ 빈 풍邠 酆 주(周) 나라의 도읍지)
옛 도읍을 내 차마 소홀히 버리지 못하며 관서지방인 이 황량한 한 모퉁이 변역에 내 어찌 좋아하여 멀리 왔겠는가.--------≫
위의 번역에서는 “빈 풍과도 같은 옛 도읍을”이라고 번역하였으나 분명 원문에는 <邠 酆 舊 都>라 하여 즉 <빈 풍의 옛 도읍지> 라고만 하였다. 예를 들어 주나라의 도읍지를 비유하여 말했다고 하면 유학을 왕조에 접목시켜 흥성했던 한(漢)나라의 장안(長安), 후한의 낙양을 비유해서 말을 했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도 있으나 조선과는 관계없는 대륙의 서쪽에서 온 주나라의 초 도읍지를 비유한다는 것은 조선의 도읍지를 말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다른 방향으로 이해를 할 수도 있는데, 주나라가 기자를 봉해 조선의 왕으로 봉 한데서 주나라에 사대한 결과로 이런 “빈 풍”에 대한 비유의 말을 했다고 한다면 그 기자의 조선국은 반도와는 관계없는 대륙의 동쪽지방 즉 동한(東 韓)일 수밖에 없고, 이는 은(殷)나라의 주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은(殷)의 풍속과 관리들의 명칭 등이 은나라와 같았다하는 데서 “동한(東 韓)”이라 한다면 이 또한 반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관서”와 “빈 풍”을 연결해 보면 이 “빈 풍”의 서쪽지방 즉 보계의 서관을 벗어나면 관서지방이다. 결국 선조대왕은 서쪽으로 피란을 갔으며, 바로 관서지방에 있었다. 장안의 서쪽에 우부풍이 있고, 그 서쪽에 기산이 있으며, 그 서쪽에 보계의 서관이 있다. 이럴 때만이 위의 기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9)[본문 : 삼가 엄숙하게 사직에 제사하던 날부터 호령이 팔과 손가락에 이루어졌으며, 수천 리 밖에서 쓰라린 고생을 하고 부지런히 노력한 것이 3~4년이나 되었도다. 구름을 헤치고 하늘을 보게 되니 곤룡포의 번쩍번쩍 빛남을 우러러 뵙게 되었고, 손을 이마에 얹으니 가뭄에 장마를 만난 듯이 기쁘옵니다. 여황(艅 ? 대형 전선(戰船)을 일컬음)이 하늘을 가렸으니 경예(鯨? 다른 나라를 침범하는 우두머리 즉 일본)가 어찌 죽음에서 도망할쏘냐? 무장한 병사가 햇빛에 번쩍이니 호리(狐狸 여우와 삵 괭이, 왜적을 가리킨 말)가 벌써 그물에 들어갔도다. 드디어 적의 총과 칼을 서호(西 湖)에서 꺾어버리고 잇달아 다시 전군(全軍)을 남 령(南 嶺)에서 무찌르니, 대를 쪼개는 것보다 쉬웠고 쏟아지는 물을 막기보다 어려웠다. 사로(四 路)의 기병(奇兵 꾀를 써서 적을 불의에 공격하는 군사)이 잠깐 나누더니 삼하(三 河)의 요개(? 凱)가 울리는구나. 마침내 적은 무리를 데리고 몰래 도망가게 하였고 망해가는 나라로 하여금 거듭 회복됨을 얻게 하였도다.]
위의 글을 보자. 이 글은 임진년 왜란이 마무리가 되고, <경략(經略) 형 개(邢 ?)가 요진(遼 鎭)으로 돌아갈 때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교(西郊)에서 전송하였고, 또 노래를 지어 그 잊기 어려운 공덕을 읊게 하니, 그 가사에 이르기를> 했으니 반도 조선의 선조대왕의 명으로 �은 시일 것이다. 天子국에서 번국의 위태로움을 구해줬으니 이 정도의 찬사야 당연하겠다, 할 수 있다. 문제는 위의 노래 가사 중에 나오는 지명이 반도에 있을 수 없는 대륙의 것이라는데 “반도 조선”의 함정이 있다는 것이다.
위의 글 <드디어 적의 총과 칼을 서호(西 湖)에서 꺾어버리고 잇달아 다시 전군(全軍)을 남 령(南 嶺)에서 무찌르니,>을 보면
<원문텍스트> :[遂能挫銃鋒於西湖.旋復摧全軍於南嶺.破竹未喩其易.建瓴何足爲難]----≫
<총과 칼을 서호(西 湖)에서 꺾어버리고(?), 全軍을 남 령(南 嶺)에서 무찔렀다>는 것이다. 여기서 ? 서호(西 湖)라는 湖水는 반도에 없으며, 반도에는 湖水라 할 만한 자연적으로 형성된 호수라고 칭하는 곳이 없다. 혹시나 “서호”를 한강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즉 행주산성에서의 권율군대와 왜군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가지고, “서호에서 선봉을 꺾어버리고(挫)”라고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이해를 할 수 있겠으나 한강의 하루 강물을 어떻게 서호(西 湖)라 부를 수 있겠는가. ? 남 령(南 嶺)을 반도 “남쪽의 산맥”의 높은 지대를 말할 수도 있으나 위의 서호(西 湖)라는 지형적인 지침이 있으므로 해서 “남 령” 역시 반도에 있을 수 없는 대륙의 “남 령”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래는 <다음 백과사전>에서 찾은 “서호와 남 령”의 내용이다.
西 湖 ----≫“西 湖”는 항주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유명한 미인 서시(西 施)를 기념하는 의미로 '서자 호(西 子 湖)'라고도 불린다. 서호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호수에는 소 영주, 호심 정, 완 공돈 등 3개의 섬이 떠있다. 호수의 총 면적은 60.8㎢이며, 그 중 수역의 면적은 5.66㎢이다. 서호는 안개가 끼었을 때나,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서호 안과 근처에 위치한 유명한 명소 10가지를 서호 10경(西 湖 10景)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단교잔설(斷橋殘雪), 평호추월(平湖秋月), 소제춘요(蘇堤春曜), 곡원풍하(曲院風荷), 화항관어(花港觀魚)등 이다.
항주(杭 州)는 중국 7대 고도 중의 하나로 浙강성의 성도이며 중국의 동남 연해에 위치한다. 인구 387만, 물고기도 그 미모에 놀라 해염 치는 것을 잊어 가라앉았다는 오월상쟁 시대의 미인 서시(西 施), 삼국지의 오나라를 세운 손권(孫 權), 시성(詩聖) 백거이(白 居 易) 등이 이곳 항주(杭 州) 출신이다. 5대의 오월국과 남송 왕조 14명의 황제가 237년 동안 이곳 항주(杭 州)를 도읍으로 하였던 국가적인 역사문화의 도시이다. 4천여 년 전부터 고대문화가 일어나 춘추시대에는 월(越)나라의 수도였고
후에 남송(南宋)의 수도가 된 역사 깊은 곳이다. 수나라 때 비로소 배 만들기에 좋은 나무가 많이 나는 항구라는 의미로 항주(杭 州)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나 서시빈목(西 施 嚬 目)과 같은 고사는 모두 오(吳)나라와 월(越)나라가 이 지역에서 자웅을 결하고 있을 때 나온 말이다. 항주(杭 州)는 북경에서 항주까지 수로를 낸 경 항 대운하(京 抗 大運河)의 끝자락인데 전 당 강(錢 塘 江)이, 이 대운하에 물을 보탠다. 북경에서 시작하여 항주(杭 州)까지 길이 1,794㎞, 河북성, 山동성, 江소성, 浙강성 등 4개 성(省)을 가로 지르며 해하, 황하, 회하, 장강, 전 당 강의 5개 수계를 연결하고 있는 경 항 대운하(京 抗 大運河). 땅을 파고 산을 깎아 세계 최초, 최장의 인공 젖줄을 만들어 天진, 揚 州, 无 錫, 蘇 州, 杭 州의 상업과 농업을 살찌웠다.
“南 嶺”-----≫ 북으로 湖南省, 江西省과 長江 유역, 남으로는 廣東省과·廣西성과 西江 유역의 분수계(分水界)를 형성한다. 한편 이 산맥은 차가운 북 대륙풍으로부터 중국 남부를 보호해주기 때문에 기후를 뚜렷이 가르는 분기점도 된다. 이 산맥 전체는 전통적으로 단순히 '령'[嶺:산맥이라는 뜻]으로 일컬어져 산맥의 남쪽 지역은 嶺外(산맥의 바깥쪽 또는 령 남(嶺南) 산맥의 남쪽) 으로 인식되었다.
12세기 또는 그 이후까지도 산맥 남부지역은 여전히 이국적인 반(半)식민 지역이었고, 南 嶺 산맥은 중요한 문화 경계선이었다. 상대적으로 규모는 작지만 인위적인 경계선으로 북쪽의 진령 산맥(秦嶺:서부 甘肅省에서 동부 陝西省으로 뻗어있음)만큼 중요한 구실을 했다.
산맥 전체길이는 약 1,400㎞이며, 우뚝 솟은 하나의 산맥이 아니라 여러 산들이 모여 띠처럼 이어진 산맥이다. 호남 성과 강서 성 남부의 경계에 있는 중앙부는 이 산맥 중에서 가장 넓고 복잡한 지형을 가졌고, 주축의 오른쪽으로 많은 작은 산맥들이 있다. 산맥은 비교적 낮아 거의 1,000m 를 넘지 않지만 지질은 지형처럼 매우 복잡하다. 주(主)산맥은 화강암과 오랜 기간에 걸쳐 심하게 변성된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측면은 백악기와 제3기에 형성된 붉은 사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맥 전체가 복합배수구조에 의해 심하게 침식되었으며, 넓은 석회암 지대가 전형적인 카르스트 지형으로 발전했다.
南령산맥은 오랫동안 주요광물생산지였다. 중세에는 은의 주산지였고, 현재는 주석·구리·울프람·아연·안티몬·텅스텐·철 등이 생산된다. 그 외에 산맥 중부에 있는 광동 성의 韶關 북부에는 작은 석탄산지가 여러 군데 있다. 계곡의 낮은 부분 외에는 거의 개간이 되어 있지 않고 토양침식이 심하다. 이 산맥에는 3개의 주요한 통로가 있다. 즉 靈渠와 연결되어, 호남 남부에서 계림과 광동 동부까지 쉽게 갈 수 있는 桂 林 路, 호남과 광둥 중 부을 잇고 武 漢 철도로 廣州까지 이어지는 북서부의 折嶺路, 남부 장시성으로 연결되며 19세기말까지 주요 남북 간 교통로였던 사오관 북부의 메이링로[梅嶺路:다위링(大庾嶺)]등이다.
(10)[본문 : 석성(石 星)은 왜국과 통래하여 화근을 빚어내고 나라를 팔아 위엄을 손상시켰으며, 조 학 종(曹 學 種)은 국록을 먹으면서 임금을 잊고 제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하는 일없이 자리만을 지켰으니, 어찌 함부로 위 학 증(魏 學 曾)의 옛 전례를 들어 은택을 팔아 고식적으로 구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두 전례에 비추어 처결하고, (중략)허 수은(許 守 恩)과 소 응 궁(蕭 應 宮)은 본디 중형으로 처치함이 마땅하나 우선 (99) 연 장지(煙 瘴 地 중국 남방에 풍토병이 있는 곳)로 귀양 보냈다가 먼 변방에 충군(充軍)시키되 사면령이 있어도 용서치 마라.’ 하시었습니다.]
<연장지(煙 瘴 地)>----≫ 장독(瘴 毒: 풍토병風土病)이 있는 大陸의 남방지대 즉 長江以南의 땅을 말한다. 그렇다면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한강을 넘으면 장독이 있다는 말은 무엇인가. 위의 글은 조선에 파견된 석성과 조 학 종, 허 수은, 소 응 궁 등을 중형으로 다스려야 하나 우선 유배를 보내라고 했는데, 유배 보내는 곳이 “장독(瘴 毒)”이 있는 곳 즉 “연 장지(煙 瘴 地)”로 보내라는 황제의 명령이다. 그렇다면 당시 “장독의 풍토병”이 있던 곳은 어디일까. 이는 장강(양자강)의 이남의 땅 즉 “강남”지방을 말한다.
여기서 반도의 왕조시절 역시 유배지로 “호남”지방이 애용되었으며, 왕조실록이나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의 유학자들이 기록한 문집 속에는 <한강(漢江)을 건너가니 장기(瘴氣 = 瘴毒)에 어찌 견디겠는가.>하는 내용이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장기(長技)=장독(瘴 毒)에 대해서는 이미 이 토론방에 올려 져 있음>
결국 대륙 측에서 설명하는 유배지 장기(瘴氣)라는 풍토병이 있는 곳과, 조선의 유배지 장기(?氣)가 있는 곳이나 모두 호남지방 또는 강남지방이라는 것이며, 이곳은 호(동정호)의 남쪽지방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조선(朝鮮)”이 바로 대륙의 왕조였으며, 대륙의 주인이었다는 것이다.
(11)[본문 : 왜적으로 말 하오면, 조선과 지경을 접하여 있으면서 범과 올빼미 같은 형세로 버티고 있으므로 우리가 험한 데를 의지하여 지키고 있다가 기묘한 방법을 내어 이기려면 조선의 도로의 이수(里 數)를 알지 못하면 불가합니다.
(원문텍스트 : 至于倭奴.與朝鮮接壤.虎勢梟張.吾欲據險而守.出奇而勝.則朝鮮之道里.不可不知)
<왜적으로 말 하오면, 조선과 지경을 접하여 있으면서 범과 올빼미 같은 형세로 버티고 있으므로 우리가 험한 데를 의지하여 지키고 있다가 기묘한 방법을 내어 이기려면 조선의 도로의 이수(里 數)를 알지 못하면 불가합니다.
----≫“至于倭奴. 與朝鮮接壤”; 倭奴(왜 즉 왜국)를 말할 것 같으면, “與朝鮮接壤”즉 조선과 왜노가 땅(壤:땅, 흙, 토지)이 접(接:잇다. 가까이 하다.접하다)하여 있으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과 현 열도에 있었다고 하는 왜와의 영토 관계를 알 수 있다.----≫
식민사관과 반도사관 입장에서 볼 때는 이해 불가능한 기록일 뿐이다. 현 반도와 열도사이에는 지리적, 지형적으로 분리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바다(海 :현대 의미의 바다)에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구주(규슈)로부터 132 km에 대마도가 있고, 이 대마도로부터 부산까지 50km가 떨어져 있다. 즉 구주로부터 182km(약 455 리)가 떨어져 있기 때문에 위에서 기록한 대로 “접양(接壤)”이란 문자를 사용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기록대로라면 “조선과 왜”의 영토는 땅(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의미다. 조선과 왜를 어떻게 지리적, 지형적 관점에서 분리시킬 수 있겠는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및 원사 열전을 보면 위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모두는 이미 이곳 토론방에 올려 져 있다.
(12) [본문 : 넷째 시에 이르기를-------≫
우리 동쪽 나라는 예의에 밝아서 그전부터 중화라 일컬었는데 / 吾東禮義素稱華 /
오늘날에는 도리어 부끄럽구나, 더러운 되놈에게 절을 하다니 (중략).
<우리 동쪽 나라는 예의에 밝아서 그전부터 중화라 일컬었는데 / 吾東禮義素稱華>----≫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동쪽에 있는 나라라는 것이지 그것이 반도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또 조선을 “중화”라고 했을 때 대륙의 옛 기록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다. 즉 위에서 말한 대로 “예의가 밝아서 화(華)라 했다.”는 말은 中國이 “華”라는 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華는 中華이며 朝鮮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조선은 華(화)이며, 중화(中華)라고 하며, 나라를 말할 때는 朝鮮(조선)이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록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 있는, 고증이 되는, 증거 되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결국 위에서 말하는 明이라는 나라의 자체가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태조 고 황제”란 “명 태조 주원장”을 말하는 것이 아닌 “조선 태조 이성계”를 말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13)[본문 : 남경(南京) 섬서 도어사(陝 西 道 御 史) 소 여송(蕭 如 松) 등이 아뢰어 봉공을 믿지 말고 무비를 엄밀히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 주문은 다음과 같다.]
<“南京陝潟御史蕭如松等.奏爲勿恃封貢.以嚴武備事.曰.>
<남경(南京) 섬서도어사(陝西道御史)>--------≫ 중원의 요충지 땅인 ”섬서도“에 <남경(南京)>이 있었다면 현 河북성에 있는 <북경(北京)>의 명칭은 무엇이었을까?
섬서道에 “南京”이 있었다면 현 河북성에 있는 북경은 “東京”이래야 맞는 말이며, “北京”은 섬서 북방의 영 하(寧 河) 지방이나 내몽고 또는 감 숙 지방에 있어야 맞는 말이다.
(14)[본문 : 마침 복건도어사(福建都御史) 김학증(金學曾)이 보고하기를, “평수길이 7월 초 9일에 죽었으므로 각 왜적 괴수가 벌써부터 돌아갈 뜻이 있었는데, 우리 군사가 바다와 육지에서 이긴 기세를 타서 교대로 공격하여 중로와 동로는 불리했으나, 수로는 크게 이겼습니다.” 하였다.]
위의 글 (93)을 보자-------≫
“복건도어사(福建都御史) 김학증(金學曾)이 보고하기를”----≫
만약에 현 열도에 옛 “왜” 집단이 있었다고 했을 때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소식은 당연히 지리적, 지형적으로 가까운 반도의 남쪽지방에서 먼저 알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어찌 그 먼 대륙의 복건省에서 먼저 알 수가 있었을까. “복건도어사 김학증”.......
이 사람은 반도의 복건省 도어사가 아니라 대륙의 동남지방의 복건省 도어사이다. 倭의 관 백이었던 “풍 신수길”이 죽은 것을 이 사람이 조선보다도 먼저 알았다는 것이 아닌가.
<김학증(金學曾)>이라면 이는 “김”이 아니라 “금”이어야 맞는 말이다.
(16)[본문 : 태복소경(太僕小卿) 장문희(張文熙)는 봉공을 허락해서는 아니 되니, “청컨대 절강ㆍ민ㆍ남직례(南直隷)ㆍ광동ㆍ네 성의 군사를 발동하여 곧장 일본을 들이쳐서 일면으로는 조선의 근심을 풀고 일면으로는 내지를 침범하려는 모의를 미리 방어해야 한다.” 하여 의(議)가 병부에 내려오자, 남경 병 과 서 과 사 형 과급사중 서 백(徐栢)이 아뢰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위의 글 (79)을 보면 ; <浙江. ?. 남 直隷. 廣東의 네 省의 군사를 發動하여 곧장 日本을 들이쳐서 朝鮮의 근심을 풀고, 내지(內地)를 侵犯하려는 모의를 미리 방비해야 한다.>---≫
이 말은 왜의 땅이 위에서 말하는 절강. 남 직례. 민. 광동 성 등지와 가깝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또 <섬라의 사신이 중국에 마침 왔을 때 그 사신(섬라)이 말하기를 섬라의 군사들은 수전에 강하므로 일시에 왜의 땅으로 쳐들어가 없애버리면 어떻겠습니까.>하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 위의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섬라에서 열도까지의 거리나 지리적 관점에서 볼 때 당시에 섬라(태국)에서 열도까지 진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섬라사신이 상국조정(중국)에서 헛소리를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또 위의 기록과 함께 보면 왜의 땅은 현 열도가 될 수 없다. 섬라와 가깝고, 광동. 보건. 절강. 강소(남 직례)등에서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왜는 주산群島 등지와 대만, 해남도 및 복건일부 및 광동. 광서. 안남남부(현 베트남 중북부) 일부등지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위의 내용 본문은 조선의 한양(도성=경사)인이었던 조선 사람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럴 때 조선 사람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지형, 지리, 방향도 몰라 남쪽을 동쪽으로, 북쪽을 서쪽으로 기록할리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대륙에서 구원 군으로 파견된 왕사나 장군들이 반도 조선의 지형, 지리를 몰라 “왜와 조선은 “至于倭奴. 與朝鮮接壤”이라고 했다면 이것을 기록한 기록자는 분명 “이것은 왕사가 조선의 지형, 지리를 말 몰라 잘못 말한 것이다. <조선과 왜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 조번방지“라는 책을 서술한 분은 당연하다는 듯 기록하고 있다는 말은 <왜 와 조선은 바다를 사이에 둔 것이 아니라 땅을 경계로 하였다>는 말이 당연한 것이니 대꾸조차 할 필요성이 없었던 것이겠지요.
또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三月右丞相燕帖木兒奏于皇太后皇太子曰: "≪高麗隣于倭境≫ 今其王久在都下請令還國." 制可. 이 기록에서 보다시피 <高麗接于倭國>이라고 했으니 생각을 해보면------≫
<隣은 이웃 인이며, 接은 “連也”이다. 즉 연 이어져 있다. 라는 뜻이다>. 바닷길 수 백리 또는 천리 길을 이웃하고 있다거나, 연 이어져 있다. 접하고 있다 등으로 표현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는 원사의 기록 역시 같습니다.]
“조선(朝鮮=中國=中朝)은 화(華)이며 四夷(사이)를 다스렸고, 경사(京師)는 한성부로써 경조(京兆)지방이며, 북쪽으로는 막북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신강의 소륵 서쪽까지, 남쪽으로는 바다, 동쪽으로 반도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황제국(皇帝國)이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사”는 재해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입니다.
2008. 07. 03.
필명 : 문무씀 [우리역사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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