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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황현(黃玹)의 詩心과 의혼上

한부울 2008. 5. 4. 13:17
 

애국지사 황현(黃玹)의 詩心과 의혼上

[경향신문] 2008년 05월 02일(금) 오후 05:47


“망국에 한 사람도 자결않는다면 되겠는가”


문장으로 유명한 사람이 태어난다던 곳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石沙里)의 서석(西石)마을은 지리산 줄기의 문덕봉(文德峯) 아래에 자리잡은 아늑한 마을이다. 그곳은 예전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인물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그 전설을 사실로 증명해 줄 때가 왔으니, 1855년 음력 12월11일 그 마을에서 매천 황현(梅泉 黃玹·1855~1910)의 탄생이 바로 그 때였다.


 

                              광양시 석사리의 매천이 태어난 집. <사진작가 | 황헌만>


황현은 조선왕조 최후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문장가이며, 나라가 망하는 비참한 때를 맞아 선비로서의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고 말았던 탁월한 애국지사였다.


산과 들에 봄꽃이 가득하고 온갖 수목에 새잎이 돋아나 천지가 가장 아름다운 봄날, 봄의 햇살을 가득 안으며 우리 일행은 매천 황현의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섬진강의 굽이굽이에 은어가 뛰놀고, 한창 참게가 커가며 미식가들에게 구미를 돋우는 4월의 하순, 강변의 꽃길을 돌고 돌아 석사리의 서석마을, 초가지붕으로 새롭게 단장해 복원된 매천의 생가에 이른 때는 오전 10시가 다되어 찬란하게 햇살이 비추던 시각이었다.


필자는 20년 전인 겨울에 최초로 그곳을 찾았었는데, 그때는 매천이 태어난 안채는 없어지고 사랑채 한 칸이 겨우 남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최근에 시청에서 제대로 복원하여 덩실한 매천의 생가가 우람하게 서 있으니 얼마나 다행하고 기분이 좋은가. 더구나 초가집의 원형대로 다시 세웠으니 더욱 보기에도 좋았다.


‘매천황현선생 생가’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기둥에는 주련까지 새겨 걸어서 운치가 더욱 빛났다. 기분이 좋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큰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부터 골목마다에 간판을 세워 매천의 생가를 자세히 가리켜주어 찾아가기도 쉬웠으니, 잘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일은 그런 데서도 돋보이기만 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뒷산의 황씨 선산 매천의 묘소를 찾아가는 데도, 곳곳에 안내 푯말을 세워 찾기가 쉽기만 했으니 얼마나 친절한 행정인가.


매천이 누구인가

                                    매천의 절명시 4수(친필). <사진작가 | 황헌만>


뛰어난 시인이던 매천은 당대의 훌륭한 역사가였다. 한말 최고의 역사책인 ‘매천야록’은 매천의 높은 사안(史眼)과 통찰력 때문에 최근 세사의 연구에 높은 평가를 받는 저술인데, 그 역사책에는 황현 자신의 약전(略傳)이 실려 있어 간단하게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대한(大韓)은 망하고 전 진사(進士) 황현은 독약을 마시고 죽다. 현의 자는 운경(雲卿), 그의 선대는 장수인(長水人)이다. 임진왜란 때 충청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무인공 진(進)의 후손으로 호가 매천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슬기가 있었으며 노사 기정진(奇正鎭)을 찾아뵙자 선생이 기특하게 여겨주었다. 어른이 되자 서울로 올라가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 등과 좋은 벗으로 사귀었다. 34세 때인 고종황제 무자(戊子·1888)년에 진사가 되었다. 담론을 잘하고 기절(奇節)을 좋아했으나, 세상이 잘되어갈 수 없음을 알고서 고향집으로 돌아와 시와 글에 자기의 뜻을 맡겨 훌륭한 작품을 지어냈으며,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융희 4년 8월3일 합병령을 군청에서 마을까지 반포하자 그날 밤에 아편을 마시고 다음 날에 목숨이 끊어졌다. 유시(遺詩) 4수를 남겼다”라는 이 처절한 기록이 ‘매천야록’의 맨 끝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유시 4수를 그대로 옮겨놓았다.


매천은 세종 때의 명정승 황희의 후손이지만 임진왜란 때의 이름난 장수 황진의 10대 후손이었다. 진주성 싸움에서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 장수의 의혼이 매천의 피에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망국의 소식을 듣자 비탄에 빠진 선비 황현은 참다운 선비가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 처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선비정신은 제대로 살리기만 하면 그렇게 멋있구나 하는 본질을 보여준 자결이 바로 매천의 죽음이었다.


그의 짤막한 유서(遺書)는 떨리는 손으로 쓰여졌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못하고 아래로 평소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 눈을 감고 영영 잠들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지어다”라는 유서는 비장하기보다는 오히려 담담한 선비의 일상적인 담론으로 느끼게 해준다.


충(忠)이 아니라 인(仁)을 이룸이다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유시에서 같은 뜻을 밝히고 있다.


큰 집을 지탱함에 서까래 반쪽의 공도 없었으니 曾無支厦半椽功

다만 인을 이루려 함이지 충은 아니라네 只是成仁不是忠

겨우 윤곡(尹穀)을 쫓는 데에 그쳤을 뿐이니 止竟僅能進尹穀

당시의 진동(陳東)의 행동 실천 못함 부끄러워라 當時愧不陳東


이렇게 읊어서 죽는 이유를 또 설명했다. 나라에 벼슬하여 정치에 관여한 일도 없고 녹을 받아 생활한 적도 없으니 나라에 충성하려는 생각보다는 인간된 도리, 선비된 도리를 이루려는 인(仁)을 실현하려는 뜻에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북송 때의 진동처럼 간신들을 처단하자는 독한 상소를 올려 죽음당한 일을 못하고, 겨우 남송 때의 윤곡처럼 나라의 망함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나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고 한탄하는 대목에서 그의 의기는 더욱 굳세게 보였다.


새나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오 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우리나라 이미 망했구려 槿花世界已沈淪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 역사 회고하니 秋燈掩卷懷千古

글자나 아는 사람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難作人間識字人


이 절명시는 글자나 아는 사람, 즉 지식인의 책무가 얼마나 무겁다는 것을 통절히 읊어준 시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역사의식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가는 일반인들처럼 글을 몰랐다면 왜 죽을 이유가 있겠는가.


옛 성현들의 글을 읽어 인생이 무엇이고 역사와 세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지식인이기 때문에, 나라가 위기를 당해서 괴롭고 아프다는 내용이 가슴을 떨리게 해주고 있다.


4대의 무덤이 있는 매천의 묘소


매천의 절명시(絶命詩)를 읊으며 생가를 등지고 마을 뒷산 아래의 황씨의 선산을 찾았다. 매천의 선대는 본디 남원에서 세거하였다. 매천의 할아버지 직()이라는 분이 광양으로 내려와 석사리에 자리 잡고 살면서 가세를 일으켰는데, 선산의 맨 위에 있는 무덤이 바로 할아버지의 묘소였다. 그 묘소 아래 오른쪽의 묘소가 매천의 아버지 황시묵(黃時默)의 묘소이고 왼쪽이 ‘애국지사 황현의 묘’라는 초라한 비가 서있는 매천의 묘소다. 아버지 묘소에서 더 아래쪽 오른편의 묘소가 매천의 큰아들 황암현(黃巖顯)의 묘소였다. 이렇게 4대의 묘소가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고, 그 아래에는 문중의 제각(祭閣)이 서있었다.


위인의 묘소라서 반드시 웅장하고 근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애국지사라는 빗돌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게 매천의 묘소는 정말로 초라했다. 내년이면 거기 묻힌 지 100년째, 그 다음해인 2010년이면 매천 서세 100주년이 된다. 그런 무서운 의혼과 시심이 묻혀 있는 무덤이 꼭 그렇게 보잘 것 없어야 하는지는 모두가 다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생가를 볼품 있게 복원하여 의젓하게 보여주는 정신으로 묘소에 대한 무엇인가가 거론되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망국에 자결한 의인 중의 최고 문학가


망국 무렵의 큰학자 박문호(朴文鎬)는 ‘매천황공묘표’라는 이름의 매천의 일대기를 담담한 표현으로 서술하였다. 평생토록 매천과 가장 친했던 동지이자 문우였던 창강 김택영은 ‘본전(本傳)’이라는 이름으로 매천의 역사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 글의 끝부분에서 창강은 당시 나라가 망하자 의분에 못 이겨 자결한 당대의 의인을 모두 열거하였다. 조선에 선비의 혼이 살아있고, 애국심을 지닌 투철한 의혼의 인물이 즐비했음을 알리는 뜻이기도 했다.


금산군수 홍범식, 판서 김석진, 참판 이만도, 참판 장태수, 정언(正言) 정재진, 승지 이재윤, 의관 송익면, 감역 김지수, 무인 전주의 정동식, 유생 연산 이학순, 전의 오강표, 홍주 이근주, 태인 김영상, 공주 조장하 및 환관 반씨 성을 가진 사람 등 15인을 열거하고는 그중에서 매천이 문학가로서는 가장 저명했던 분이라고 했다.


이런 의인들에 대하여 역사는 너무 무정하다. 홍범식·이만도·김석진·황현 등은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세상에 이름이 전하지만 대부분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자결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500년의 조선이 선비를 기른 유교 국가였는데, 겨우 그만한 분들만이 망국에 즈음하여 목숨을 끊었던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그만한 의인들이 그렇게 역사에 묻히고 마는 일은 더욱 서럽다. 탁월한 시인, 희대의 애국자가 묻혀 있는 쓸쓸한 묘소를 떠나오며 동행했던 순천대 조원래 교수도 그 점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경향신문 & 경향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