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여운형이 과도정부를 이끌었다면?
[조선일보] 2008년 05월 03일(토) 오전 10:04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이정식 교수는 식민지 시대 이래 겨레의 합작과 통일을 위해 몸을 바친 몽양 여운형의 행적을 되돌아보면서 긍지를 갖는다고 했다. 몽양은 한국 근·현대사의 지평을 남들의 몇 배나 더 넓혔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그가 완전한 사람도 아니고 그의 사상을 추종하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 중에서 여운형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지용(智勇)과 기개가 뛰어난 호걸 중의 호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여운형이었지만 인생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예를 들어 1946년 여름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3당이 합동하여 '남조선노동당'이라는 북조선노동당(북조선공산당과 북조선신민당이 먼저 합당하여 만들어짐)의 형제정당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몽양은 박헌영의 전횡에 맞서 인민당 당수를 사임하고 종적을 감추는 등 정면으로 저항했다(남로당은 사보타지라고 공격했다). 7월말 박헌영은 인민당의 공산당 프락치에게 3당 합당의 지령을 내렸으며 김오성 선전부장(공산당 프락치)은 8월 3일 인민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격론 끝에 여운형과 상의 없이 몽양 명의의 합당 제의 서한을 공산당과 신민당에 발송했다. 백남운은 몽양에게 야유조로 공산주의자들에게 정치적으로 강간당했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수세에 몰려 허탈감에 빠진 여운형은 9월 평양을 방문하여 협조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몽양은 김일성과의 9월 26일 대화에서 박헌영의 횡포와 3당 합당이 소련군과의 사전 교감에 의한 것임을 확인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방안을 돌며 분을 식힌 다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합당을 완수해 낼 것이다"라며 백기를 들었다. 또한 입법의원에 좌익이 참여하지 말라는 김일성의 권고에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서울로 돌아가 노동당 창립을 위해 애쓰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근로인민당 창당을 시사했으며 이 당의 "향후 전술은 미국인들에게 미소 지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을 치는 것이어야 한다"는 야릇한 언사를 구사했다. 다음 날 북한 주둔 소련군 민정담당 부사령관 로마넨코와의 면담에서 몽양은 "미국인들의 신경은 일본인들만큼 약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며 우리는 이 시기에 스스로의 사업을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미국을 변호하는 듯한 말을 했다. 이에 로마넨코는 "미국의 상품으로 인도하는 자들과 함께 해서는 안 된다"며 미 제국주의를 비난하고 "인민들이 지지하는 다른 민주주의적인 인사들과 동일한 대열에 있어야 한다"고 권유했다. 입법의원에 참여하지 말라는 권고를 되풀이했던 것이다.
소련군 고위실력자의 언사는 좌익에게는 일종의 지령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몽양은 귀경 후 남조선과도입법의원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좌우합작에는 적극 참여하여 10월 7일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 7원칙을 이끌어냈다.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스티코프는 로마넨코에게 좌우합작이 계속되지 못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로마넨코는 몽양과의 대화에서 좌우합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에 몽양은 소련군이 입법의원은 반대했지만 좌우합작에는 반대하지 않았다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미군정 문서에도 "몽양이 대미협조와 좌우합작에 대한 평양의 승인을 얻고 돌아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구절이 있어 이를 방증한다는 것이다.
몽양의 평양행 목적이 "대미협조와 좌우합작 진행에 대한 동의"라는 미군정의 분석은 아마 여운형이 직접 미군정 당국에 말했거나 아니면 정보수집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몽양은 평양행에 앞서 미국과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협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몽양은 미소 점령 하에서 양국과 교통하면서 양다리를 걸친 유일한 유력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이미 냉전이 가시화되던 상황에서 이런 양동작전(非美非蘇의 자주적 노선)이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자 자신의 생활근거지인 남한의 지배자인 미군정에 다소 기울게 되었다. "남로당은 미군정청과 투쟁하는 정당이며 근로인민당은 미군정청과 협력하는 정당"이라는 몽양의 1947년 5월 경 인식이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1947년 7월 19일 남조선 과도정부 민정장관 수락을 논의하는 약속지로 향하다가 암살당했다.
만약 그가 민정장관에 올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정식 교수는 1947년 3월 28일 국무부에 의해 승인된 5억 4000만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대한 원조안이 실제로 집행되었더라면 몽양이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실제 그렇게 되지 않았으므로 여운형은 이승만, 김구의 비협조와 좌익의 배신감에 휩싸여 또 다른 좌절감을 맛보았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몽양은 외세를 의식한 현실주의적 노선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숱한 일본 정계의 실력자와 교우하면서도 친일파의 나락으로 타락하지 않았으며 레닌, 트로츠키 등 소련 최고 실력자는 물론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 등 중국 최고지도자들과도 면담했던 유력 인사였다. 해방 직후 박헌영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 결성에 참여하여 미군정의 미움을 샀지만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무기 휴회 이후 미국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좌우합작을 김규식과 함께 주도하여 미군정과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안재홍이 민정장관으로 참여했던 남조선과도정부와는 비교적 거리를 두었다.
이정식 교수는 몽양을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당시 우파들은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으며 좌파와 소련군 당국은 미국의 이익을 암암리에 보장해주는 기회주의자라고 매도했다. 이 교수는 사회주의냐 자유주의자냐는 이분법적 시각을 버리고 평가해야 불가사의한 몽양의 사상과 노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몽양은 일부 지식인 그룹을 빼곤 조직적인 지지기반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무능과 책임을 반성하면서 여러 번 은퇴를 선언했다. '근로인민'이라는 지지기반이 겹치는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으므로 여러 번 테러를 당했으며 결국 암살당했다. 남로당이 유사 이래 가장 성대한 장례식을 주관했던 것은 테러와 암살의 배후에 대한 은폐기도가 아니었는지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더 읽을 만한 책
몽양 여운형에 대한 책은 한결같이 사연이 있다. 먼저 이만규의《여운형 투쟁사》(총
문각·1947)는 몽양의 사돈이 쓴 책이며 여운홍의《몽양 여운형》(청하각·1967)은 동생이 형을 회상하며 낸 것이다. 이기형의《몽양 여운형》(실천문학사·1984)은 열혈청년으로 몽양을 흠모했던 저자가 이전의 책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모두 애틋한 정이 묻어있다.
이에 반해 한민성의《추적 여운형》(갑자출판사·1982)은 친일파, 기회주의자, 빨갱이를 고발한 책이다. 몽양기념사업회가 중심이 된《여운형노트》(학민사·1994)와 몽양여운형전집발간위원회가 편집한《몽양 여운형전집》(전2권·한·1991~1993) 등도 있다.
《여운형을 말한다: 몽양학술심포지엄 논문자료집》(아름다운 책·2007)은 논문과 몽양의 글을 한권으로 모았다. 몽양의 딸 여연구가 구술한《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2001)도 있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의《몽양 여운형 평전》(한울·1995)은 본격적인 평전으로는 최초의 것이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한국정치사]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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