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치열한 항일투쟁, 김원봉 정당한 평가를
[오마이뉴스] 2008년 02월 29일(금) 오후 09:39
▲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 오마이뉴스 이종호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을 만난 것은 지난 26일이다. 89주년 3·1절을 앞두고 있기도 했지만 그의 특별한 이력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2004년 <백범 김구 평전>을 시작으로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 등을 잇달아 출간했다. 또 최근에는 일제강점기 일제와 맞서 의열단 및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폭렬투쟁(暴烈鬪爭)을 벌였던 <약산 김원봉 평전>을 펴냈다.
김 관장은 여섯 번째 평전 인물로 약산(若山) 김원봉 선생(1898~1958?)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도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며 "정당한 평가를 받도록 일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방법에 대해 "올해는 김원봉 선생이 사망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라며 "남한에서는 재평가 작업과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고 북한에서는 김원봉 선생의 활동과 죽음의 과정을 소상히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해방 후 친일파들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망명하듯 월북했는데 이를 이유로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김 관장은 내년에는 안중근 의거 100주년에 즈음해 <안중근 평전>, 2009년에는 일본과 청나라간 간도협약 100주년에 맞춰 <잃어버린 간도 100년사>를 출간할 예정이다. 그는 89주년을 맞는 3·1절과 관련 "삼천리강산에서 220만 동포가 4천년 역사를 지키겠다고 일어선 날"이라며 "이후 모든 항일운동은 3·1운동이라는 저수지에서 발원했다고 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깊다"고 평했다.
한편 독립기념관은 3·1절을 맞아 최초로 우리나라 국기로 지정된 박영효의 태극기의 원형이 재현해 공개한 데 이어 3·1절에는 독립기념관에 이를 게양할 예정이다.
김 관장은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거쳐 성균관대에서 정치문화론을 가르쳤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친일파재산환수위원회 자문위원, 친일파인명사전편찬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인물 평전외에 <친일정치 100년사> <해방 후 양민학살사> <한국필화사> <곡필로 본 해방 50년> 등이 있다.
다음은 김 관장과의 일문일답.
▲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최초의 태극기 원형본. 3·1절에 독립기념관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독립기념관
올해 89주년 3·1절을 맞는데?
"삼천리 강산에서 220만 동포가 4천년 역사를 지키겠다고 일어섰다. 이는 민족 초유의 거사다. 거의 민족적으로 계층 성별 지역 종교를 초월한 것으로 세계사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는 중국은 물론 인도, 터키 등 세계 각국의 피압박 저항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모든 항일운동은 3·1운동이라는 저수지에서 발원했다고 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크고 깊다. 독립기념관에서는 3·1운동 90주년이 되는 내년부터 100주년이 되는 2019년까지는 <3·1운동 총서> 100권을 펴낼 계획이다."
우리나라 국기의 원형을 126년만에 처음으로 발굴해 공개할 예정으로 알고 있는데?
"박영효가 제작한 국기를 실사(實寫)하고 애초 크기까지 기입한 그림이 동봉된 일 외무성의 문서를 이달 초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했다. 영국 유학생 한승훈씨로부터 이 같은 사실을 제보받은 뒤 독립기념관이 한철호 동국대 교수와 함께 검증해 이를 확인했다. 이는 우리 국기의 본 모습을 찾았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독립기념관은 당시 문서에 적힌대로 정확하게 재현하고 3·1절을 맞아 독립기념관에 게양할 예정이다.
때 맞춰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 평전>을 출간했다. 약산 김원봉 선생을 평전 인물로 선택한 이유는?
"김원봉 선생은 일제감정기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다. 또 투쟁과정에서 일관된 애국심을 보여줬다. 해방 후에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하지만 해방 후 남과 북 모두로부터 홀대받아왔다. 늦었지만 정당한 대접을 받게 하는 노력에 일조하고 싶었다"
▲ 미소공동위원회 환영시민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발췌 시대의창
많은 독립운동가 중 김원봉 선생을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인물'로 단언한 이유는?
"의열단은 다른 조직단체의 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 등과는 달리 독립운동의 방안으로 직접 무력항전을 택했다. 단원들의 생명을 내걸고 폭압통치기구, 요인 암살 한다는 것 자체가 치열한 것이다.
또 그가 조직한 의열단은 1920~30년대 민족운동단체 중 임시정부를 제외한 가장 긴 활동단체다. 다만 열악한 무기로 인해 투쟁에 비해 성과가 미약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치열하고 엄청난 투쟁을 했다는 평가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북한에서 김원봉 선생을 숙청한 것으로 봤는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여러 근거가 있다. 하나는 김원봉 선생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남에서는 사회주의자로 평가했지만 그는 사회주의자와 입장을 달리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또 김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 후 박헌영 등 남로당을 숙청한 후 김원봉은 마지막 남은 라이벌 같은 존재였고 이 때문에 김원봉을 배제시켰을 개연성이 크다.
실제 김원봉은 평화통일중립화방안을 주장했다. 해방 직후 황용주 전 MBC 사장이 중국 상해에서 김원봉 선생과 상당히 긴 얘기를 나눴는데 증언에 따르면 그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북 애국열사릉에 김원봉 단장의 묘소가 없다는 점이다. 지난해 7월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을 방문해 보니 대부분의 월북, 납북 독립운동가들이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A급 항일투사인 김원봉 선생의 묘소는 없었다. 1947년 <약산과 의열단>을 쓴 작가박태원 선생의 묘소와 심지어 친일파로 낙인된 이광수 가묘까지 있었는데 말이다. 이는 김원봉 선생을 북 정권이 숙청했음을 반증한다."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 남과 북에서 해야할 일은 무엇이라고 보나?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떼고 항일투사라는 진면목을 새롭게 평가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또 서훈을 인정해야 한다. 북한에서는 김원봉의 활동과 죽음의 과정을 소상히 밝혀야 한다."
서훈'과 관련 국가보훈처에서는 월북해 북한정권에서 고위직을 맡았다는 점을 들어 서훈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해방 후 친일파들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망명하듯 월북했는데 이를 이유로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본 천왕을 처단하려 했던 박열 선생의 경우 해방 후 북한 조국통일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지만 서훈이 인정됐다. 또 박열 선생의 경우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선생의 아들은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준장까지 지냈다.
다른 한편 북에서 배제된 독립운동가에 대해 서훈을 줌으로써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식과 포용력을 확인시키는 것도 국익차원에서 필요하다고 본다. 남에서도 배제하면 북한과 무슨 차이가 있겠나."
▲ <약산 김원봉 평전>(시대의 창) 심규상
개인적으로 김원봉 선생 평전을 쓰면서 안타까운 점을 꼽자면?
"중국공산당이 조선의용대 주력과 김원봉 선생을 갈라 놓은 점이다. 만약 김원봉 선생이 조선의용대 주력을 모두 데리고 임시정부에 합류했다면 한국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은 앞당겨졌을 것이다. A급 항일투사가 정작 해방조국에서 총독부 악질 경찰 출신인 노덕술에게 체포돼 갖은 수모와 고문을 당한 것은 민족사의 아픔이다."
기존에도 김원봉 연구서가 여럿 있었다. 이번 평전에는 새롭게 발굴된 사료가 많이 들어 있는 것으로 안다. 새로 발굴된 사료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꼽자면?
"<민족혁명당보> 창간호다. 이 속에는 김원봉의 연설문이 들어있다. 또 일본총독부가 수집한 '사상정세시찰보고서'와 이 속에 들어있는 <민족혁명당 창당선언문>도 새로 발굴한 사료다. 이외에도 다수 사료가 있다."
자료수집은 어떻게 했나?
"신문사 재직할 때와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해외여행을 다니며 일본 고서점, 중국 북경과
길림성 등 당안관(국가기록보관소) 등에서 자료를 입수했다. 30여년간 꾸준히 모은 자료들이다. 지금까지 모두 2만권 정도의 자료를 수집했는데 그 중 인물관련이 4000권 정도다."
내년에는 <안중근 의사 평전>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는데?
"의병조직과 일제와 싸우고 안중근 의거 100주년에 즈음해 <안중근 평전>, 2009년에는 일본과 청나라간 간도협약 100주년에 맞춰 <잃어버린 간도 100년사>를 출간할 예정이다."
최근 들어 매년 평전을 출간하고 있다. 어떻게 매년 책 출간이 가능한가?
"과거 민주화운동·언론개혁운동·시민운동 등을 하며 60대까지 역사에 올 곧게 뚜렷한 족적을 남긴 20명의 평전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꾸준히 자료를 모았다. 일본 관련
자료의 경우 2만권 분량의 자료를 모았다. 남들은 어떻게 1년에 한 권씩 인물평전을 쓰느냐고 반문하지만 실상은 30년 간 축적해 놓은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
열등은 늘 왜곡으로 가기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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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가장 무서워한 김원봉, 우린 왜 모르지?
[오마이뉴스] 2008년 02월 25일(월) 오후 05:07
▲ 의열단과 김원봉 단장을 다룬 신문기사.<약산 김원봉 평전> 발췌 오나이뉴스 심규상
▲ 미소공동위원회 환영시민대회에서 연설하는 김원봉.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발췌
오마이뉴스 심규상
'의열단 단장, 혁명간부학교 교장, 민족혁명당 당수,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 약산(若山) 김원봉 선생(1898~1958?)이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며 얻은 직책들이다. 묵직한 그의 직위마다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의 열정과 투지가 묻어 나온다.
올해는 그가 사망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때맞춰 그의 평전이 나왔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최근 <약산 김원봉 평전>(시대의 창)을 펴낸 것. 김 관장은 평전에서 김원봉 선생 앞에 접두사 같은 몇 가지 수식어를 붙여 놓았다. '한국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대표적 혁명가',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운'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등이다.
실제 많은 학자들이 일제강점기 중국 관내에서 한국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우파의 백범 김구 선생과 좌파의 김원봉 선생을 꼽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김원봉 선생이 낯선 이유는?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인데 왜 우리에게는 그 이름이 낯설기만 한 것일까? 평전은 이 같은 의문을 추적한다. 우선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항일투쟁의 업적'을 확인시킨다. 그가 선택한 독립운동 방법은 '폭렬투쟁(暴烈鬪爭)'이다. '자유는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판단에서다.
그가 조직한 의열단은 1920~30년대 민족운동단체 중 임시정부를 제외한 가장 긴 활동단체로 기록된다. 그는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에 감격하면서도 무력항쟁이 아닌 비폭력 정신으로 전개된 데 대해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훗날 신채호 선생도 김원봉 선생의 간청으로 쓴 <조선의열단 선언>을 통해 '독립운동 한다면서 칼 한번, 총 한 방 쏘지 않고 편지질이나 하고 외국, 심지어 적국의 처분이나 기다리는 세력'을 성토하기도 했다.
이는 김원봉 선생이 폭력투쟁과 무력항쟁, 유격전 등을 벌이는 의열단을 조직한 이유이기도 하다. 외교론이나 실력양성론·위임통치론이 아닌 노동자 농민이 주체가 된 폭렬투쟁만이 일제를 몰아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칼 한번, 총 한 방 쏘지 않아도 독립이 올까?
이후 의열단은 폭탄 국내 반입의거, 부산경찰서장 폭사의거, 밀양경찰서 폭사의거, 종로경찰서 폭파의거, 일본 육군대장 저격의거, 일제 밀정 처단의거, 경북 의열단 사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 은행 습격 의거 등 항일운동에 큰 행적을 남겼다. 일제에게 의열단은 어떤 존재였을까?
"일제에게 의열단은 끔찍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본 외무대신은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경비는 외무성에서 직접 지출할 것'이라는 요지의 훈령을 상해 총영사관에 하달하기도 했다…(중략) …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됐다. 언제 어디서 의열단원이 나타나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이다"
민족혁명당 창당과 조선의용대의 창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조선의용대는 나라가 망한 뒤 국제 정규전에서 독립군이 직접 참전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에 자극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혁명가들 조차 '조선의용대를 학습하자'는 글을 게재했다.
이들은 "조선의용대는 중국항전을 지원하고 일본혁명가들과 관계를 형성했다"며 "이는 일본 혁명 투쟁운동 역사상 유례 없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 일"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 조선의열단 단원들. <약산 김원봉 평전>에서 발췌 오마이뉴스 심규상
"조선의용대 창설일, 고딕체로 기록해야"
김 관장은 평전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된 1938년 10월 10일과 관련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고딕체로 기록되어야 할 날"이라며 "근현대사 교과서나 대부분 독립운동사 자료에 이 날이 기록돼 있지 않은 것 자체가 반쪽짜리 독립운동사"라고 지적했다.
1942년 김원봉 선생은 조선의용대의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때는 조선의용대 주력이 중국 공산당인 연안 쪽으로 넘어간 이후였지만 이는 김구 중심의 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김원봉 중심의 좌파 민족주의 세력 간 대통합을 이루었음을 의미했다. 그는 한국광복군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맡아 싸우다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그를 소외시켰고 귀국 또한 김구 주석 등 다른 임시정부요인 15명 보다 열흘 가까이 늦게 2진으로 들어왔다. 이는 1진의 탑승자 선정을 놓고 논란이 일자 김원봉 선생이 스스로 2진으로 양보한 데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대중들로 하여금 1진으로 도착한 '김구=임정'이라는 등식을 구축하게 했다. '민혁당과 김원봉'은 자연스럽게 가려져 임정 내 2인자임에도 당시 4인자로 소개됐다.
김원봉 선생은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다. 임시정부 계열이 좌우합작을 거부하고 미군정에 협조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했다.
'해방조국'에서 3일간 통곡한 이유
▲ <약산 김원봉 평전> 오마이뉴스 심규상
하지만 그는 정작 해방조국에서 3일간 통곡해야 하는 기막힌 현실과 대면했다. 1947년, 김원봉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지시로 총독부 악질 경찰 출신인 노덕술에게 피체돼 갖은 수모와 고문을 당했다.
그는 "내가 일본 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냐"며 통곡했다 한다. 김 관장은 친일파들이 활개 치는 '해방조국'을 이백의 시 <만분사(萬憤詞)>를 내세워 힐난했다.
가시나무를 심고 계수나무를 뽑는다(樹?拔柱)
봉황새를 가두고 닭 따위를 귀히 여긴다(水鳳寵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월북해 조선인민공화당과 연합 전선을 구축하려 꾀했다.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본격화되자 북한에 남아 초대 국가검열상을 지냈다. 하지만 이 때문에 6·25 한국전쟁에서 9남 2녀의 형제 중 친동생 4명과 사촌 동생 5명이 보도연맹으로 죽임을 당했고 부친 또한 외딴 곳에 유폐됐다가 굶어죽게 되는 참혹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선생은 1957년 북한 노동상에서 해임된 후 이듬해 9월을 끝으로 이름이 사라졌다. 김 관장은 그의 숙청설과 은퇴설· 자살설 중 숙청설에 무게를 실었다. 저자는 외세의 간섭 없는 중세중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납북독립운동가들과 뜻을 모으다 처형당한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결국 그는 사인이 무엇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채 사라졌다. 해방 후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남과 북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었던 김원봉 선생.
평전의 끝자락에서 김 관장은 독자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그가 저승에서라도 '조국을 외면하지 않도록' 조국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김 관장은 답변대신 마지막 글귀를 이렇게 적었다. "조국은 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먹물들의 사대주의 근성"
또 다른 독립운동사 <약산 김원봉 평전>
▲ 약산 김원봉 선생. 해방직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약산 김원봉 평전> 발췌 오마이뉴스 심규상
<약산 김원봉 평전>은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의 6번째 인물평전이다.
김 관장은 <박열 평전>을 시작으로 <백범 김구 평전> <단재 신채호 평전> <만해 한용운 평전> <심산 김창숙 평전> <녹두 전봉준 평전>등을 펴냈다. 하나같이 한국근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김원봉 평전>은 김 관장이 기자 신분으로 김원봉 의열단장을 만나 가상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속에서 김 관장은 체 게바라에 못지않은 그의 삶이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을 '먹물들의 사대주의 근성'이라고 꾸짖는다.
평전은 김원봉 선생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데 그치지 않는다. 우선 길가는 나그네의 목을 적시는 옹달샘처럼 글 곳곳에 시가 들어 있다. 선생을 '그림자 같은 혁명가'로 칭하면서 김소원의 시 <그림자>를 배치한 경우가 그것이다. 특히 선생이 3일간의 통곡의 사연을 전하면서 허균의 <통곡헌기>를 소개한 대목은 평전읽기의 재미를 더한다.
이 책은 또 다른 독립운동사다. 주인공뿐만 아닌 함께 의열단 활동을 했던 동지들의 삶을 부족하지 않게 수록해 놓았다. 누구나 책장을 덮을 때쯤 신흥무관학교, 임시정부와 의열단, 민족혁명당, 황포군관학교, 조선의용대는 물론 항일무장투쟁사, 해방전후사 등 해외 독립운동사를 자연스럽게 정리하게 된다.
이 책에는 그동안의 연구결과외에 일본 정보기관의 자료 등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자료가 많이 들어 있다.
김 관장은 지금도 밤잠을 줄여가며 자료를 찾고 또 다른 글을 쓰고 있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앞두고 <안중근 평전>을 준비 중이란다. 내년에 나올 <안중근 평전>을 기다리기에 앞서 적어도 <약산 김원봉 평전>을 미리 읽어 두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일 듯싶다.
심규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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