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사건

고종의 을사늑약 원천 무효 밀서

한부울 2008. 2. 20. 11:28
 

그렇다면 이보다 더 중요한 사료가 세계 강국들에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러한 것들을 여태까지 스스로 밝히지 않고 숨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진한 역사적 의혹이 있으며 한편으론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말 서세동점 시기에 여러 가지 사한들을 보더라도 분명한 것은 우리 한민족이 모르는 역사가 산재되어 있으며 그들이 덮어 둘 수밖에 없는 거대한 역사적 음모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점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한 때 중국이라고 칭하면서 지방정부를 다스리고 통제한 중앙정부가 분명하게 존재하였고 그러한 주체가 바로 대륙조선이었다는 사실은 가설이 아니라 진실이다.

대륙조선을 한반도조선으로 만들고 한반도조선을 대한제국이라고 하면서 전통성을 끊어 조선이란 거대한 역사를 깡그리 사라지게 하면서 대한제국까지 끝내 망하게 한 거대한 음모가 있었고 그러한 음모는 근대화산업부흥을 동양보다 먼저 이룬 서세가 있었으며 또한 서세의 사주 받은 일제가 있었다.

이 기사에서 보면 대륙조선의 황제가 비참하고 가련한 신세가 되어 다급하게 독일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자신의 수족을 다 잘라버리고 나약한 제왕으로 전락하게 한 원수 같은 서세에게까지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서 보면 그 당시 나라가 얼마나 다급하고 위급한 처지에 있었던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차제에 이러한 중요문서가 독일에 있다고 하니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귀중한 사료들도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엽 동점한 세력인 영국과 프랑스, 독일, 네델란드, 포르투칼, 러시아 그리고 동양에서는 일본이 있었다.

그들 나라에는 위와 같은 사실에 비추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있는 무수히 많은 귀중하고도 소중한 역사적 자료들이 비밀리에 보관되고 있거나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하고 그냥 내버려 둘 순 없다는 사실이다.

이젠 좀 더 적극적으로 국가와 모든 개체들이 합심하고 동참하여 환수요구하거나 반환 요청을 지속적이고 끊임없이 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것이 바로 위대한 역사를 되돌리는 첫걸음이고 천명에 이르는 길이 아니겠는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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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을사늑약 원천 무효 밀서

[중앙일보] 2008년 02월 20일(수) 오전 04:42

 

 

[중앙일보 정용환]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고종 황제의 외교 발자취를 입증하는 사료다.”


고종의 친서를 연구해온 서울대 이태진(국사학·사진) 교수는 고종이 을사늑약 이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교수는 ‘고종의 밀서가 1906년 1월 30일로 예정된 일제의 통감부 설치를 앞두고 구국을 위한 외교 노력을 펼쳤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을사늑약의 원천 무효를 주장한 고종의 친서는


▶1906년 1월 29일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 22일 헐버트 특별 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 22일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왜 독일 황제에게 보냈나.

“황제 어새가 찍힌 이친서는 1906년 1월 유럽 각국 정부에 보낸 국서와 짝을 이루는 문서다. 두 문서는 고종의 외교 노력이 입체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서에서 고종은 일제의 강점을 피하기 위해 서구 열강의 5년 기한 공동보호도 수용하겠다는 카드를 던졌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의 수교국이었던 독일의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 지원을 호소한 것이다. 문서를 읽어보면 국권 침탈의 벼랑 끝에서 몸부림친 군주의 고뇌가 읽힌다.”


국서에는 어떤 도장이 찍혔나.

“대한제국 황실의 공식 국새인 ‘대한국새’가 찍혀 문서의 내용이 황제의 뜻이라는 것을 공인했다.”


어새 위에 적힌 한자는 무엇인가.

“고종의 이름이다. 경이라고 읽는다.”


어새가 찍힌 문서의 성격은.

“어새가 찍힌 문서는 지금까지 6개가 발굴됐다. 이번에 한 건이 더 추가된 것이다. 어새는 주로 밀서에 찍혔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비해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조·러 연합작전을 제안하는 등 특급 국가기밀을 다룬 문서에만 찍힌다. 어새와 함께 ‘한성에서 이경’ 또는 ‘경운궁에서 이경’ 이런 사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이번에 발견된 문서에서도 같은 형식을 취했다.”


또 다른 고종의 친서가 나올 가능성은.

“국서가 영국 기자에게 전달됐다는 점에서 당시 유럽 수교국이었던 프랑스·벨기에에도 친서가 보내지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당시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는 조선 정부가 추진한 중립국의 모델이었다.”


정용환 기자


◇을사늑약(乙巳勒約)=1905년 11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고종과 정부 대신을 위협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쌍방의 조건이 대등하지 않은 상태에서 힘 있는 강자의 강요에 의해 체결됐기 때문에 ‘늑약’이라고 부른다.


◇헤이그 밀사 사건=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1907년 고종이 이준 열사 등에게 친서와 신임장을 주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한 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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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서 찾아낸 정상수 교수, 독일 문서보관소는 대한제국 자료의 보고

[중앙일보] 2008년 02월 20일(수) 오전 04:44

 

 

[중앙일보 정용환] “독일 역사가 대한제국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습니다.”


독일제국 빌헬름 2세 황제에게 보낸 고종 황제의 밀서를 발견한 정상수(44·사진) 명지대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발견 당시의 감동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독일 뒤셀도르프대에서 1897~1902년 시기 독일의 동아시아 제국주의 정책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떻게 고종의 밀서를 찾게 됐나.


“독일에서 독일사를 연구하던 1994~95년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에서 1년 동안 방문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 관련 사료가 예상 외로 많아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예를 들면 대한제국 선포를 축하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영문 축사가 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었다. 어쩌면 고종의 친서도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지나치듯이 생각해 봤는데 마침 지도교수도 다음 연구 과제로 대한제국의 외교문서를 연구해 볼 것을 추천해 줬다. 그때 계획을 세웠지만 생업에 쫓기면서 미루다가 10년 만에 첫 단추를 끼우게 된 것이다.”


문서 복사가 가능했나.


“200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하는 한국 관련 독일 외교문서를 번역·해석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때 독일 외교문서의 소재지와 소장 문서 목록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는 보고서를 썼다. 편찬위는 그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국 외교부의 협조를 얻어 베를린 정치문서보관소에서 1만5000여 장 분량의 외교문서를 복사해 왔다.”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는.


“2007년 ‘한국 관련 독일 외교문서 수집정리’라는 주제로 연구 과제를 신청해 학술진흥재단 기초 연구에 선정돼 문서를 뒤질 수 있었다.”


당시 독일 문서에는 어떻게 소개됐나.


“고종의 측근이었던 프랑스인 정무 고문 트레믈러가 1906년 5월 초 독일 외교부에 전달해 외교부 중앙국 담당 관리들이 이 문서를 검토했다. 중앙국에선 정부 비밀자문관인 포르케 교수의 자문과 감정을 거쳐 보고서를 작성했다.”


독일 외교부는 왜 황제에게 이 친서를 보고하지 않았나.


“1905년 3월 빌헴름 2세가 모로코를 방문해 모로코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선언했다. 이 사건이 불씨가 돼 이듬해 4월 알헤시라스 국제회담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열강들이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를 인정했다. 이 때문에 독일은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고종의 친서는 이런 미묘한 국제 정세 속에서 전달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용환 기자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