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산수유람 누정대(樓・亭・臺)

한부울 2008. 1. 3. 23:27

기존 사학 지식자들에게 아시아고려와 대륙조선사를 말하면

아무것도 모른다면서...아예들으려 하지 않는다. 

무엇을 모른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알고 습득하고 있는 정제된 지식일 것이다.

불순물(?)을 제거한 정제된 지식은 진실을 말하는 것과는 상관없다.

그들만의 지식으로 강제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사실처럼 믿고 싶겠지만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다만 언제까지고 그들의 것으로 남아 자리를 지키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자리가 바로 기득권이고 그곳에서 파생되는 영달이다.

무엇이 진실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다.

이치를 따지는 것도 쓸데없는 짓이다.

오직 믿고 따르면 된다.

그렇지 못할 때 그렇게 따르지 않을 때 그들은 일방적으로 모른다고 비아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습득하고 있는 정제된 지식에는 이기와 영욕이 있을망정 하늘의 이치가 없다.

시대와 환경이 변하면 언제든지 변해야 하는 지식이고 끝내 사라지고 말 신기루 같은 것이기도 하다.

진정한 지식자란 지식위에 양심을 지킬 줄 아는 양식을 말하는 것인데 바로 그들의 지식이 그릇된 것임을 알고 판단 될 때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용기 또한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지식자 즉 학자가 가져야 하는 마지막 양심을 지키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기존 기득권을 과감하게 포기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나라 지금같은 혼란기에는 바로 이러한 양식을 가지고 하늘의 이치를 볼 줄 아는 지식자들이 필요할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날 뛰긴.

 

조선시대 말까지 樓. 亭. 臺의 갯수가 전국에 3,000개 정도였는데 현재 누정대가 과연 얼마나 남아 있는가 한번 따져 볼 일이다.

그리고

금강산의 금강대(겸제 정선의 실경산수화),

거창안음송대,

관동팔경 총석정,

청간정(진경산수화)의 실체 풍광이 한반도에 과연 있는 것인가 의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의상대(겸제 정선) 산수화에서 그려진 큰 절이 낙산사인데 지금의 강릉 경포대 낙산사와 규모면이나 분위기면에서 너무나도 현격한 차이를 두고 있어 누구든지 얼마간에 관심만 두고 보면 금방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또한 그 옆에 이화대(梨花臺)가 있고 관음굴이 있었다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 과연 그림과 같은 것이 실제 존재하는가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림을 보면 하나같이 한반도 내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기암괴벽이 곳곳에 그려져 뛰어난 경관뿐만 아니라 굉장하다고 생각 할 정도의 풍경과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 모두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해 부정적이다.

아니 한반도에는 실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 가슴 아플 뿐이다.

여기 산수화 그림 몇 점의 자료가 올라와 있다.

그 자료가 주는 정확한 실체를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한다.

상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선조화가들이 실체 보기를 반복하면 그린 그림인 것이다.

우리 풍경과 상당한 괴리가 있다고 하면 개념 없는 어떤 이들은 모사하였다고 하고 상상하여 그렸다고 하는 그런 무치들도 있다.

대륙 풍광과 똑같거나 비슷하다면 그곳에 다녀와서 그렸다고도 한다.

형편이 이러니 대륙화풍에 뛰어난 우리선조 화가들이 어찌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말이다.

반도역사 기록에 없는 것이라면 아예 믿으려 하지 않고 두 눈으로 보아 뻔하게 보이는데도 그저 보이지 않는다고 하고 있으니 어찌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참 답답하고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높은 지식과 많은 책을 습득하여 유명해지고 존귀해지면 무엇 하겠는가.

엉터리 지식만 가지고 있는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하다.

역사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가 더 낮다 할 수 있다.

역사학자와 고화전문가들은 그 위치에 맞게 사리를 분별할 줄 알고 어떠한 경우에도 진실된 지식을 바탕으로 바르게 가르치고 거짓이 없어야 한다.

더군다나 잘못된 역사와 사실을 알고서도 바르게 고치지 않고 그대로 따르려 한다면 그것은 민족적인 면에서도 결코 죄값을 벗어 날 수 없는 것이고 양식을 가진 사람이 할 행동이 아니라고 본다.

아무리 높은 지식일지라도 진정 이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닌 거짓 지식이라면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고 무지렁이 신분에 하찮은 생각이 더 귀하고 소중할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그들은 영역 지키기와 눈뜬장님 노릇만 하고 있을 것인지 그저 한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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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람 정원의 거점, 樓・亭・臺

The Base of Landscape-strolling Garden 

안계복


Ⅰ. 연구의 목적 및 배경


인간으로서 자연을 보면, 자연은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곳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아낌없이 주고, 감싸주며, 의미 없는 투정도 말없이 받아주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 옛 선조들은 세속을 떠나 樓・亭・臺에 찾아가 머무르면서 자연을 즐기기를 즐겨했다.


자연환경이 좋은 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한국에 살다보면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 앞에서 누구라도 자연을 찾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또한 사는 것이 답답하고 지칠때면 누구라도 자연을 찾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신라시대부터 사절유택이라는 것이 있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한국의 樓・亭・臺는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서경원 2002, p. 16). 경관적인 측면에서 비교한다면 한국은 외부지향적, 중국은 내 외부를 모두 중요시 하는 양면지향적, 일본은 내부지향적인 경향을 보인다. 한국에서는 외부의 자연경관을 중요시하는데 비해, 중국은 정원에서 건물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측면과 건물 안에서 밖을 어떻게 내다보도록 만들 것인가를 고려하기 때문에 내 외부를 중요시하는 양면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樓・亭・臺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울타리 속에 가두어진 정원이 아니다. 자연인 듯 인공인 듯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 철학적이면서도 동시에 아름다운 공간인 것이다. 물론 창덕궁과 같은 궁궐이나 소수서원과 같은 서원에도 樓・亭・臺가 있어 울타리 속에 가두어진 정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관동팔경과 같이 명승지를 지정한 한국식 팔경에 지정되어 있는 樓・亭・臺를 생각하면 가두어진 정원이 아닌 것이다.


본 연구는 한국전통정원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樓・亭・臺가 산수유람의 거점 역할을 했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우선 역사적인 기록부터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주요 분석자료이지만, 이미 연구된 안계복(1991), 안계복(1993), 김영숙 안계복(1995), 이정화(1998), 박준규(1995) 등의 연구결과도 활용할 예정이다. 樓・亭・臺가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르게 발달해  왔다는 것이 하나의 논증 자료가 될 수 있다. 또한 누정대가 도별로 다르게 분포하는데, 이러한 분포적 특징이 또한 산수유람의 거점이 되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예를 들면 강원도는 다른 도에 비해 臺가 유난히 많은데 이것은 강원도가 금강산과 관동팔경의 주 대상지가 된 臺가 많아 산수유람의 거점이 된 까닭이다. 한국의 관동팔경은 신라시대부터 유명한 유람의 장소이었다. 이 유람의 장소와 樓・亭・臺와의 관계를 고찰해 봄으로써 樓・亭・臺가 산수유람의 거점 역할을 한 논중 자료로 삼고자 한다.


Ⅱ. 樓・亭・臺의 역사적 맥락


1. 역사적 기록

 

                       그림 1) 백제시대 조룡대 : 강에 살고 있던 용을 낚시하던 대(臺)다.


한국에서도 臺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누정(樓亭)보다 약 500년이 더 빠르다. 정사(正史) 기록에서 臺의 기록이 樓亭보다 500년이 앞선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동명성왕(B.C. 28년) 때 「난새(鸞)가 왕대(王臺)에 모여들었다(鸞集於王臺)」고 기록되어 있다. 난새가 구체적으로 어떤 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좋은 징조를 가져다주는 조류로 보인다. 동명성왕은 고구려를 어렵게 개국한 왕으로 이 기록 이후에 주변 국가들을 복속 시킨 것을 보면 좋은 의미로 기록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관계 서적을 보면 오녀산성 배치도에 “장대”가  있다. 이 장대가 바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대일 것이다. 이 王臺는 주변 평야보다 모자 모양으로 약 600m나 높이 솟아 있어 사방을 관찰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더 없이 좋은 전략적 요충지로 보인다.

 

                                                    그림 2) 백제 자온대


개로왕(475)때에 궁실 누각(樓閣) 대사(臺榭)를 화려하게 지었다는 기록을 보면 궁궐을 조영하면서 대(臺)도 함께 조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삼국시대에 기록된 대(臺)를 보면 동양에서 제일 오래된 천문 관측소인 첨성대(瞻星臺),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을 수중왕릉에 장례를 지낸 다음 용으로 바뀐 모습을 보게 된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백제시대 때 백제 패망과 관련된 설화가 있는 조룡대(釣龍臺 용을 낚던 바위),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부르게 된 ‘자온대(自溫臺)’, 오대산(五臺山)의 다섯 봉우리(臺)인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中臺)에 50,000 보살이 나타났다는 삼국유사의 기록들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삼국시대의 대(臺)에서는 아직 유람(遊覽)이나 유상(遊賞)의 개념이 포함되지 않은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상 개념은 고려시대가 되면 나타나기 시작한다.(김영숙 안계복 1995, p.127-128)


한국에서의 臺는 이렇게 군사, 불교적인 목적으로 일찍부터 발달한 양식이다. 이에 반해 이보다 약 500년이 뒤진 누정의 기록은 470∼480년대에 나타나지만 유상(遊賞)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한국에서 정(亭)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라 소지왕 때의 일로 천천정에 거동(幸)하였다는 기록이다. 천천정은 서출지(書出池: 문서가 나온 못)와 관련 있는 亭이다. 왕이 천전정에 갔을 때 쥐와 까마귀에 의해 거문고를 넣어 두는 상자에 활을 쏘게 되어(사금갑: 射琴匣) 궁주(宮主)와 간통하던 중을 발견하여 왕의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두고 볼 때 임금이 천전정을 간 것이 어떤 목적으로 간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또한 신라 진평왕(579~632) 때 고석정(孤石亭)에서 유상(遊賞)했다는 기록이 있다.


누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전술한 개로왕(475년) 때 기록, 백제 무왕(636년)에는 바다를 바라다보는 누(樓)란 이름을 갖는 망해루(望海樓)에서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역시 유상의 개념이 들어가 있다. 이렇게 삼국시대에 대(臺)는 군사와 불교적인 목적이 들어가 있었으며 누정(樓亭)은 유상의 개념이 들어가 있었던 장소이었다. 이러한 대(臺)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면 유상의 개념이 확실하게 들어가게 된다.


2. 樓・亭・臺의 정의

 

그림 3) 금강산 금강대 : 사람이 올라가 볼 수는 없지만 독출하게 높은 臺다(자료 : 겸제 정선의 실경산수화)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는 사륜정기에서 樓・亭・臺에 대한 구분을 하고 있다. 누각을 2층으로 된 집(重屋也)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정자는 개방되도록(作豁然)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허창(虛敞)한 공간적 성격을 갖는 것1)이라고 되어 있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정자는 백성들이 쉬는 곳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 반면에 이규보는 臺란 판(板)을 대어 높이 쌓은 것2)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의는 臺가 3가지 유형(안계복 1993, p. 27)이 있기 때문에 세가지 가운데 한가지 만 설명한 것이다. 설문해자에 나오듯이 사방을 볼 수 있는 높다란 곳(觀四方而高者也)도 臺이고, 사람이 올라가 볼 수는 없지만 독출하게 높은 곳도 臺이다. 樓・亭・臺의 차이점은 정의에 나타나듯이 건물과 비 건물로 나뉘어진다. 누정은 건축물이고 臺는 비 건축물이다. 물론 판축을 쌓은 臺 위에 건축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없는 경우가 75%로 더 많다(안계복 1998, p.216).


이 정의를 원야(園冶)와 비교해 보면 한국과 중국의 차이점을 발견 할 수 있다. 원야(계성 1634, p.43)에 의하면 臺는 돌로 높이 쌓되 위를 평탄한 것이거나, 혹은 나무를 엮어 높이 만들어 평판을 깔되 지붕이 없는 것이거나, 혹은 누각 앞에 일보(一步) 나오게 하여 시원하게 해놓은 것이 다3). 계성은 臺에 대해서 세 가지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공통점은 평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정의처럼 나무구조물인데 상부에 판재를 깔고 지붕이 없는 구조 같은 것은 인위적인 臺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臺는 자연에 있는 높다란 바위(상부가 평탄하거나 혹은 절벽 같은)를 의미하는데 반해 중국은 인위적인 평탄한 구조물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점이 바로 한국과 중국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표 1. 조선시대 樓. 亭. 臺의 도별 분포(%)

 

누각

정자

소계

경기도

  21(  6.6)

  43( 18.1)

   8(  7.3)

  72( 10.8)

충청도

  33( 10.4)

  30( 12.7)

  15( 13.6)

  78( 11.8)

경상도

 108( 34.1)

  56( 23.6)

  20( 18.2)

 184( 27.7)

전라도

  71( 22.4)

  44( 18.5)

  20( 18.2)

 135( 20.3)

황해도

  19(  6.0)

  12(  5.0)

   5(  4.5)

  36(  5.4)

강원도

  30(  9.5)

  21(  8.9)

  23( 20.9)

  74( 11.2)

함경도

  16(  5.0)

  13(  5.5)

   7(  6.4)

  36(  5.4)

평안도

  19(  6.0)

  18(  7.6)

  12( 10.9)

  49(  7.4)

소계

 317(100.0)

 237(100.0)

 110(100.0)

 664(100.0)

자료 : 안계복(1991), 안계복(1993)을 밑바탕으로 재구성

 

3. 樓・亭・臺의 분포


표 1은 1530년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누정대를 도별로 집계를 내어 분포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만든 표다. 우선 누정대의 전체적인 숫자를 보면 누각이 317개소로 제일 많고, 정자가 237개소, 臺가 110개소로 누각의 1/3 정자의 1/2 수준이다.


표 1의 樓・亭・臺의 도별 분포를 보면 현재의 대한민국에 해당하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에는 樓・亭・臺가 10% 이상 많이 분포하는 道이다. 그 반면에 북한 지역인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는 10% 미만으로 적게 분포하는 道이다. 또 다른 특징은 일반적으로 누각과 정자가 많은 道가 역시 臺도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臺가 일부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樓・亭・臺의 전체 분포에는 큰 변화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에 맞지 않는 道가 강원도이다. 강원도는 樓亭의 구성비가 10% 미만임에도 불구하고, 臺의 구성비는 20.9%로 8개 道 가운데 제일 높다. 타도에 비해 강원도에 臺가 제일 많은 이유가 곧 臺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강원도에 제일 많은 이유는 강릉 경포대와 허이대(許李臺), 간성 무송대, 삼척 릉파대, 양양 비선대, 의상대와 같이 동쪽으로 향한 해안에 절벽이 발달하여 일출 절경을 보기 좋은 경우가 많고, 또 금강산의 금강대 백운대와 같은 산악 경관이 뛰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려시대 안축(1330)은 관동의 경관을 노래한 관동별곡이 있고, 조선시대 정철(1580)이 금강산과 동해의 절경을 유람하고 지은 관동별곡이 있다.

 

표 2. 조선시대 樓. 亭. 臺의 변화(%)

 

樓閣

亭子

 1530

 317(47.7)

  237(35.7)

  110(16.6)

  664(100.0)

 1871~1899

 715(24.6)

 1168(40.2)

 1023(35.2)

 2906(100.0)

 

조선시대 樓・亭・臺의 변화는 표2와 같다. 조선시대 전기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자료이며 후기(1871~1899)는 邑誌 자료이다. 누각의 숫자는 317개소에서 715개소로 2배 이상 늘었지만 전체 구성비는 오히려 47.7%에서 24.6%로 낮아진다. 亭子는 237개소에서 1168개소로 5배가량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亭子의 전체 구성비는 큰 차이가 없지만 전체적인 숫자는 亭子가 제일 많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유교가 한양 중심에서 지방 중심으로 바뀌면서 지방유교문화경관이 형성되면서 亭子의 숫자가 늘어 난 점도 있고, 누각의 경우는 지방행정 부서에서 건립 하거나 서원에서 건립되는 누각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숫적 증가에 한계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臺가 조선후기에 많이 기록된 이유는 군사적인 용도의 봉대(烽臺), 장대(將臺), 연대(烟臺)기록이 349개소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 樓・亭・臺는 664개소에서 2906개소로 4배 이상 늘었지만 樓閣 보다도 亭子와 臺의 숫자가 4~5배 늘어났다.


Ⅲ. 산수유람정원으로서의 樓・亭・臺


1. 자연문화경관으로서의 樓・亭・臺


흔히들 유교문화경관이라고 하면 한국의 전통마을 경관에 樓亭이나 서원이 들어가 있는 마을경관을 일컫는다. 그러나 문제는 樓・亭・臺가 마을이나 도읍지에만 있는 것이 아닌데 문제점이 있다. 즉 樓・亭・臺가 자연 속에 들어가 있는 경우이다. 이것을 “유교문화경관”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자연경관”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분명한 것은 이 둘 모두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을 즐기고 자연과 일치되는 양식으로서, 자연을 적절히 잘 이용 할 수 있는 지점에 樓・亭・臺를 두는 한국의 전통정원 양식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자연문화경관」이라는 개념이다. 분명 자연경관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문화경관도 아니다. 산수화 속에 작지만 핵심적으로 들어가 있는 樓亭처럼 그러한 경관을 바로 자연문화경관이라고 정의 하자는 것이다.

 

                                                 그림 4) . 경남 거창 강선대


또한 이 「자연문화경관」 안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이지 않는 문이 있다. 예를 들면 강선대(降仙臺)와 같은 곳이 바로 그러한 곳이다. 부산시에는 8景과 같이 8臺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매년 음력 11월11일이면 신선이 내려와 쉬어간다는 강선대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충북 단양, 충북 영동, 충북 괴산 갈은 구곡, 경남 거창, 전북 무주 등에도 강선대가 있다. 강선대는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9¾ 플랫홈과 같은 곳이다. 단지 차이점은 대도시의 기차역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것이다. 옛 한국 사람들은 깎아지른 듯 한 절벽 경치는 곧 신선이 내려오는 곳이고 그곳에서 자신이 놀고 있으면 자신도 곧 신선처럼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현실과 이상과 상상이 바로 이 臺에서 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경관을 자연문화경관라고 정의하자.


2. 산수유람의 거점으로서 樓・亭・臺


대한민국에서 경관이 수려한 곳에 가면 으레 樓・亭・臺가 있기 마련이다. 樓亭은 드러나고 튀어나게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조금 높은 언덕에 깊숙하고 그윽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바위나 나무 그리고 물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 있다. 비록 누정이 인공 환경이지만 이런 동화된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선조들은 거부감 없이 오를 수 있었다. 거부감 보다는 오히려 “어떤 자연경관이 펼쳐질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오르게 되었다.

 

그림 5) 관수루 : 약 1000년 전부터 낙동강을 따라서 안동 영호루, 낙동 관수루, 밀양 영남루, 남강 촉석루가 유명한 4대 누각이었다


이 기대감이 인간과 자연, 즉 주(主)와 객(客)의 상호 일치를 위한 준비 단계인 것이다. 그런데 서거정, 정인지, 권근 등과 같은 선조들은 “한 고을의 뛰어난 경치들이 모두 이 누각에 모여 있다”, 혹은 “한 고을의 뛰어난 경치들을 독차지하고 있다”, 혹은 “멀리 있는 뛰어난 경치들이 모두 주렴과 책상 사이에 다 모였다”고 했다(안계복 1991, p.5). 즉 이러한 경치를 갖고 있으니 그 경치를 보는 순간 자연과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과 자연이 일치하고, 주와 객이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樓・亭・臺가 한 고을의 좋은 경치를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산수유람의 거점이 된다. 다른 곳을 일일이 가 볼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한국전통정원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림 6) 부소산 정상부에 있는 백화정


東文選(서거정 1473)에서 신숙주(1460)는 ‘유관(遊觀)하는 장소로서의 樓, 榭, 臺’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榭는 “정자 사”자로 亭과 같은 글자이다. 다만 정자를 이용하는 목적이 좀 더 학문적일 때 이 榭자를 붙인다. 그러므로 신숙주의 기록은 樓・亭・臺가 유관하는 장소라는 정의와 같은 말이다.


또한 동국여지승람(1486)의 서문에 노사신(1427∼1498) 등은 편목의 순서를 “건치연혁”부터 마지막 “제영”까지 어떻게 나누어 기술하게 되었는지, 각 편목을 나누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 누대에 대한 편목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누대는 사신이 왔을 때 대접(待)하기 위한 곳으로 시간이 있을 때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기(遊觀) 위한 곳이다(樓臺所以時遊觀而待使臣也)”.

 

           그림 7) 거창 안음송대 : 그림과 실제 사진. 풍류를 즐기는 두 선비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첫 번째 생기는 의문은 왜 본문에는 거의 대부분 “樓亭”이라고 기록하면서 왜 서문에만 “樓臺”라고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올리는 글인데다가 노사신 혼자서 작성한 것이 아니라 서거정 등 당시 쟁쟁한 선비들이 함께한 글이므로 틀림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樓臺와 樓亭은 혼용해서 쓰더라도 큰 무리가 없는 유사한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숙주와 노사신에 정의에 의하면 樓・亭・臺는 遊觀하는(시간이 있을 때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는) 곳이다.


樓・亭・臺가 산수유람의 거점 역할을 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논문 결과가 이를 증명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이정화(1998 pp.132-133.)는 퇴계가 樓・亭・臺에 대해서 쓴 한시(漢詩)를 연구한 결과 ‘한국 한시 작가들은 대체로 시를 읊는 풍류의 장소로 누정을 애용하다가 경치묘사 위주의 서정시를 창작하였다. 그러나 퇴계의 누정 한시는 단순한 경치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연속적 인식과 공존의 모습을 보여주는 관조적 시를 이룬다’라고 하였다.


또 박준규(1995 pp.228-229)는 송강 정철(1536~1592)의 문학에 대한 연구에서 송강이 주로 담양의 식영정(息影亭)과 환벽당(環壁堂) 그리고 소쇄원(瀟灑園)에서 활동하였으므로, 이는 곧 담양의 누정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송강문학에서 보이는 누정은 약 45개소며, 누정한시(樓亭漢詩)는 75題(114首)로 집계되어 그의 문학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


2. 한국식 명승 팔경과 樓・亭・臺


한국의 자연문화경관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 가운데 또 다른 하나가 팔경이다. 팔경은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유래되었는데, 우리나라로 전래된 것은 고려 19대 명종(明宗)년간(1171~1197)이라고 여겨진다. 고려후반기에는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을 모티브로 하여 송도팔경(松都八景)5)이 선정된다. 그런데 송도팔경 가운데 7경은 소상팔경식(장소+경관)으로 되어 있지만, 마지막 1경인 박연폭포는 “장소+경관”이 아니라 “장소”만 선정한 한국식 팔경이다.4)

 

                                       그림 8) 관동팔경 가운데 총석정 일부분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신도한양팔경6)(新都漢陽八景)이 정해지는데 이것은 중국식에서 벗어나 한국식으로 팔경을 지정하고 있다. 장소만 선정하는 한국식 팔경을 “명승형”(강영조 김영란 1991, p. 27)이라고 하기도 한다.


조선시대부터 유명한 관동팔경7)과 관서팔경8)은 한국을 대표하는 명승 팔경이다. 이 16경 가운데 亭子가 7개소, 樓閣이 5개소, 臺가 2개소 기타가 2개소로 관동・관서 팔경 가운데 樓・亭・臺가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87.5%다. 따라서 한국식 명승 팔경은 곧 樓・亭・臺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관동팔경의 樓・亭・臺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풍류를 즐기고 빼어난 경치를 문학으로 읊어, 산수유람의 거점이 됨과 동시에 문학의 산실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시대 안축의 관동별곡, 조선시대 정철(鄭澈)이 읊은 관동별곡(關東別曲), 그리고 겸제 정선(1676~1759)의 실경 산수화가 있다. 그림 8은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유명한 총석정을 실경산수화로 그린 그림의 일부분이다. 6각 현무암 절리가 발달한 꼭대기에 산수유람을 즐기는 사람이 보인다.

 

                                         그림 9) 겸제 정선의 진경산수화 청간정

 

                                                         그림 10) 청간정 부분


관동팔경 가운데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청간정(淸澗亭)에 대해서는 이식(李埴 1584-1647)이 편찬한 수성지(水城誌)에 다음과 같이 기록9)되어 있다. “청간정은 원래 역(驛)에 딸린 정자로 만경대(萬景臺) 남쪽 2리에 있었다. 계곡물(澗水)과 붙어 있기 때문에 정자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만경루가 허물어지자 역의 정자를 臺 옆으로 옮겨와 드디어 뛰어난 경치가 되었다. 정자가 바닷물과 떨어진 것이 겨우 5, 6보이지만, 만경대가 바닷물을 막아주기 때문에 예부터 수해를 입지 않았다. 비록 큰바람이 불어 큰 파도가 치더라도 계단을 넘지 않으니 오히려 기이한 경관이 된다(중략) 지금 이 정자는 군수 최천(崔倩)이 1555년에 중수하였다.”


여기서 역에 있던 정자를 臺 옆으로 옮겨와 그림 26과 같은 뛰어난 경치가 된 것을 보면 자연경관에 적절한 樓・亭・臺를 넣어 자연문화경관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9의 청간정 그림 가운데 일부분을 확대한 것을 보면, 사람들이 만경대 위에서 경치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최완식(1993 p.82)에 나오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앞에 돌봉우리가 있는데 층층으로 솟아올라 축대와 같고, 위는 평평한 책상과 같으며 높이는 능히 수십 길이 됨직하다. 삼면이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지만, 바람이 없고 물이 맑으면 고기를 헤아릴 수 있다. 臺 위 네 모퉁이에 고송(古松)이 몇 그루가 서로 그림자를 엇갈리게 교차시키고 있는데, 옛날에 동쪽 모퉁이에 작은 樓가 있어 만경루(萬景樓)라고 불렀으나, 지금은(1633) 臺라고 이름을 바꾸어 부르고 있다.” 이는 동일한 장소가 때로는 樓로 때로는 亭으로 때로는 臺로 불리워졌던 좋은 사례로 樓・亭・臺의 관계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송강 정철이 쓴 관동별곡 가운데 의상대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일출 유상을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일출을 본 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의상대가 옛부터 유상의 거점이 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자료다.


           배꽃은 벌써 지고 소쩍새 슬피 울 때

           낙산사 동쪽 언덕인 의상대에 올라 앉아

           해돋이를 보려고 한밤중쯤 일어나니

           상서로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듯

           여섯 마리 용이 해를 떠받치는 듯

           해가 바다에서 솟아오를 때는 온 세상이 흔들리는 듯

           하늘에 치솟아 뜨니 가는 털도 헤아릴 만큼 밝다.

           혹시나 지나가는 구름이 해를 가릴까 두렵구나..(중략)

 

                        그림 11) 겸재 정선의 의상대 : 우상 화면에 일출장면이 보인다.

 

                        그림 12) 실경산수화 의상대의 일부분인 이화대 일출 유상 장면


이밖에도 의상대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권3 낙산이대성조, 관암 홍경모(1774∼1851)의 관암유사 권13 洛山寺記, 조선 숙종대왕의 관동팔경시 등에서 찾을 수 있다(최완수 1993 p. 84). 그 내용들을 종합해 그림 11의 실경산수화와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11의 좌측에 여러 채의 집이 있는 곳이 낙산사이고 그 주변에 피어있는 흰 꽃이 배꽃이다. 그 주위를 송림이 둘러싸고 있다. 낙산사 오른쪽 끝으로 해안절벽위에 앉아 일출을 즐기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이 이화대(梨花臺)이며, 그림의 우상단부에 붉은 해가 뜨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 하단부에 바닷물이 통하고 있는 관음굴이 있고 그 위에 亭子 한 채가 신라 때 의상대사의 설화와 관계있는 의상대(義相臺)로 추정된다.  순암 이병성(1675∼1735)은 「밤에 낙산사를 찾아서」라는 시에 “낙산사에 들르는 많은 사람들 아침마다 오직 해뜨기만 기다린다(多少洛山呵(?)導客 朝朝但侯日輪昇)”라는 내용이 있다. 의상대의 일출이 유명했고 이를 보기 위해 조선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유람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지면 관계상 관동팔경 가운데 총석정, 청간정, 의상대만 사례분석 했지만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결과를 종합해 볼 때 樓・亭・臺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일출 월출 풍류를 즐기고 빼어난 경치를 문학으로 읊어, 산수유람의 거점이 됨과 동시에 문학의 산실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Ⅳ. 결 론


한국에 살다보면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 앞에서 누구라도 자연을 찾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또한 사는 것이 답답하고 지칠때면 누구라도 자연을 찾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 옛 선조들은 세속을 떠나 樓・亭・臺에 찾아가 머무르면서 자연을 즐기기를 즐겨했다.


1. 樓・亭・臺는 역사적으로 서로 다르게 발달했다. 역사서에 기록된 것에 의하면 臺에 관한 기록이 樓亭보다 500년이나 앞서 있다. 臺는 일찍부터 군사적인 목적으로 발달한 반면 정자는 유상(遊賞)하는 목적으로 하는 건물로 만들어졌다.

2. 樓・亭・臺의 정의를 비교하면 樓・亭・臺는 각기 다른 양식이다. 또한 중국과도 비교하면 다르다. 우리나라는 자연에 있는 높다란 바위인데 비해 중국은 인공적인 구조물이다.

3. 조선시대 전기에는 樓・亭・臺가 664개소이었으나 후기가 되면 2906개소로 4배 이상 늘어났다. 또한 도별 분포를 보면 樓亭이 많은 곳이 臺도 많은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臺가 특별히 많은 道가 강원도인데, 臺가 많은 이유는 해안 일출 경관과 산악 경관이 뛰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4. 신숙주와 노사신의 정의에 의하면 樓・亭・臺는 遊觀(유관: 시간이 있을 때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는)하는 곳이다.

5. 한국식 명승 팔경(관동별곡 관서별곡)에는 樓・亭・臺가 많다(87.5%).

6. 樓・亭・臺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풍류를 즐기고 빼어난 경치를 문학으로 읊어, 산수유람의 거점이 됨과 동시에 문학의 산실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관동팔경, 관동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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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veryone who lives in Korea falls into temptation to go for Nature in front of apparent changes of four seasons. And also when they feel oppressed and tired in their own life. Thus, our old ancestors enjoyed to be unworldly in Nu․Jung․Dae enjoying the Nature.


1. Nu․Jung․Dae had developed differently each other historically. According to historic records, the records about Dae antedates the records about Nu․Jung by 500 years. Dae had developed in military purpose while Jung in strolling purpose.


2. Nu․Jung․Dae have their own styles, which are different from each other. These are different from China, too.


3. There were 664 of Nu․Jung․Dae in the preceding period of Chosun Dynasty while there were 2096 of them in the latter period, which were over quadruple. Kangwon province has many of Dae especially because of outstanding sceneries of waterfront sunrising and mountains.


4. According to the definitions of Shin Suk-ju(1417-1475) and No Sa-shin(1427-1498), Nu․Jung․Dae are the places where people have their own relaxing time with beautiful scenery.


5. There are many of Nu․Jung․Dae in The Eight Scenery(87.5%).


6. Many people had visited Nu․Jung․Dae to enjoy beautiful sceneries and compose and recite Korean ode. Thus, Nu․Jung․Dae became the base of Landscape-strolling Garden, and also space for literature. Kwandong - Eight Scenery(關東八景) and Kwandong - Byeolgok(關東別曲) are typical examples of them.


key words : Nu(樓), Jung(亭), Dae(臺), garden, palace, land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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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강영조 김영란(1991), 韓國八景의 형식과 입지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정원학회지 10 :27-36.

2. 계성(1634), 園冶 영인본, 도서출판 조경

3. 김영숙 안계복(1995), 臺 양식의 역사적 발달과정 및 특징에 관한 연구, 한국조경학회지 23(2) : 124-136

4. 민족문화추진회 역(1985)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서울 : 민족문화문고간행회

5. 박준규(1995), 송강 정철의 누정제영고(樓亭題詠攷), 고시가연구 2, 3 : 191-230

6. 서경원(2002), Landscape Architecture, 서울, 도서출판 담디.

7. 서길수(1998), 고구려 역사유적 답사, 서울, 사계절출판사

8. 안계복(1991), 한국의 樓亭양식상 諸특성 및 계획이론에 관한 연구, 한국조경학회지19(2) : 1-11

9. 안계복(1993), 「臺」양식의 역사적 발달과정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2(2) : 26-36

10. 안계복(1998), 邑誌圖 분석을 통한 臺의 原型에 관한 연구,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연구논문집 57 : 207-217

11. 이정화(1998), 퇴계시 연구 - 누정한시(樓亭漢詩)를 중심으로-, 한국사상과 문화 2 : 117-132

12. 최완수(1993), 겸제 정선 진경산수화, 서울,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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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作豁然虛敞者(작활연허창자)

2) 崇板築謂之臺

3) 園林之臺 或掇石而高上平者 或木架高而板無屋者 或樓閣前出一步而敞者俱爲臺

4) 중국의 동정호(洞庭湖) 남쪽에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쳐지는 여덟 지점에서 계절과 기상에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다.

5) 자동심승(紫洞尋僧), 청교송객(淸郊送客), 북산연우(北山煙雨), 서강풍운(西江風蕓), 백악청운(白嶽晴蕓), 황교만조(黃郊晩照), 장단석벽(長湍石壁), 박연폭포(朴淵瀑布)

6) 기전산하(畿甸山河), 도성궁원(都城宮苑), 열서성공(列署星拱), 제방기포(諸坊碁布), 동문교장(東門敎場), 서강조박(西江漕泊), 남도행인(南渡行人), 북교목마(北郊牧馬)

7)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양양의 의상대(義湘臺),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

8) 평양의 연광정(練光亭), 성천의 강선루(降仙樓), 안주의 백상루(百祥樓), 영변의 약산동대(藥山東臺), 선천의 동림폭포(東林瀑布), 의주의 통군정(統軍亭), 강계의 인풍루(仁風樓), 만포의 세검정(洗劍亭)

9) 최완수(1993), 겸제 정선 진경산수화, 서울, 범우사. p.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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