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대륙의 촉나라 산악 풍경을 그린 산수화이다.
중국남종화를 빼껴 그린 것이 조선남종화라고 하면서 기존 사학자들은 둘러대고 있지만 그러한 것은 눈감고 아웅하는 식에 유치함이 아닐 수 없다.
거칠고 깊은 계곡, 험준한 산악을 풍경을 직접보지 않고 빼껴 그린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못나고 어리석은 후세가 낳은 블랙코메디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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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남종화의 진수를 보다
[세계일보] 2007년 10월 16일(화) 오전 09:35
올해는 현재(玄齋) 심사정(1707∼1769)이 태어난 지 300년이 되는 해다. 진경시대를 대표하는 조선후기 사대부 출신의 대표적 화가인 겸재 정선(1676∼1759), 관아재 조영석(1686∼1761)과 더불어 ‘사인삼재(士人三齋)’로 불리는 인물이다. 겸재가 진경산수화의 시조이고, 관아재가 조선풍속화의 시조로서 각기 조선 고유색을 드러내는 새로운 화풍을 창안했다면, 현재는 이들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나 명나라 오파 남종문인화풍을 수용하여 조선남종화를 배태시켰다. 현재는 왜 어린 시절 스승인 겸재가 중국의 남·북종화를 종합해 조선 진경산수화를 이끌던 시기에 유독 중국 남종화에 관심을 가졌을까. 그의 조부의 형 심유창이 영조가 왕세제 시절, 제거 음모에 가담한 것이 실마리가 돼준다. 현재는 과거시험에서 부정을 저지른 조부 심익창으로 인해 과거 응시자격이 박탈되면서 출세 길이 막히자 어린 시절 겸재 밑에서 서화를 익혔다. 그림 그리기는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사대부에겐 유일한 차선책이었던 것. 그러나 그가 10대 때 겸재가 지방관으로 파견되면서 관계는 끊기게 된다.
현재는 하는 수 없이 당시 유행하던 중국 남종화 화보를 보고 베끼는 임모(臨摸)로 그림을 배워 나갔다. 양자강 하류의 고온다습한 풍토를 반영해 습윤한 먹의 번짐을 즐겨 사용하는 중국 남종문인화풍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열대 기후에서 탄생한 남종화는 선묘 표현으로 안 되는 비와 안개 풍경 등을 그리기 위해서 먹의 번짐으로 그리는 묵법을 발전시켜 왔다. 이에 비해 북종화는 황하의 운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필선과 선묘가 즐겨 사용됐다.
중국화보는 판각화보로 생략이 많다. 현재는 생략된 부분을 회화화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그림을 만들어 나갔다. 현재는 그러면서도 차츰 스승의 ‘진가’를 깨닫기 시작한다. 간송미술관에서 28일까지 열리는 ‘현재 탄신 300주년 기념전’의 관람 포인트는 여기에 있다. 나이가 들수록 초기 먹의 번짐에 의존하는 화법에 점차 암석기가 드리워진다. 조선 산수의 골기(骨氣)가 화폭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47세 때 금강산 사생여행에서 그린 ‘만폭동도’는 먹의 번짐 속에 강한 골기를 담아 남종화풍을 조선화하기 시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전시작품 중에서 가장 주의를 기울여 봐야 할 작품은 현재가 죽기 한 해 전에 그린 ‘촉잔도권’(燭棧圖圈). 촉나라로 들어가는 중국 쓰촨(泗川)성 300리 길의 절경을 상상해 그린 이 그림은 심사정이 조카의 청을 받아 62세 때인 1768년 영조 44년 8월에 그렸다. 이듬해 5월 심사정이 작고했으니 그의 절필(絶筆)작이면서 생애 최고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화선지 6폭을 붙여 가로 818㎝, 세로 58㎝ 크기 두루마리 작품인 촉잔도권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856㎝)에 버금가는 대작이다. 이 그림은 청송 심씨와 풍양 조씨 가문을 거쳐 내려오다 1936년 간송 전형필이 당시 큰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할 때 무려 5000원을 주고 구입했으며 손상된 부분을 표구하고 복원하느라 6000원을 들였다는 일화가 있다. 험준한 바위를 그릴 때 붓을 빗자루 쓸 듯이 사용하는 부벽찰법(斧劈擦法), 비구름과 안개에 싸인 산을 표현하는 미가운산법(米家雲山法), 새털구름처럼 산을 표현하는 권운(捲雲)준, 도끼로 찍어 내리듯이 바위산을 그어 내리는 부벽(斧劈)준 등을 마음껏 휘두른 심사정의 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수작이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은 “남종화가들이 내놓은 화보를 베껴 그리면서 배운 12가지 준법과 스승인 겸재로부터 영향 받은 꼿꼿하고 칼칼한 준법까지 심사정의 모든 화법이 다 녹아 있는 남종화의 완결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현재는 ‘촉나라로 가는 길목의 험난함이야말로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는 이백의 시를 떠올리며 인생의 굴곡진 여정을 풀어내듯 화폭에 펼쳐냈다.
전시에서는 현재 작품을 비롯해 그에게 영향을 받은 원교 이광사, 표암 강세황, 호생관 최북 등 당대 화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편완식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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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심사정의 남종화풍의 촉잔도권에 대하여
글쓴이: 최두환 2007.10.17 20:11
어제 신문에도 나왔던 내용이고, 매스컴에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내용 가운데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촉잔도권(蜀棧圖卷)"이 소개되었다. 화선지 6폭을 붙여 가로 818㎝, 세로 58㎝ 크기 두루마리 작품이다.
현재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 : 1686-1761)과 함께 조선후기 사대부 출신 화가들 중의 대표화가로서 사인삼재(士人三齋)라고 부른다.
이 촉잔도권(蜀棧圖卷)은 중국 사천성(泗川省), 즉 촉나라로 들어가는 300리 길의 절경을 심사정이 조카의 청을 받아 62세 때(1768 영조 44년) 8월에 그리고서 이듬해 5월 심사정이 작고했으니 그의 절필작(絶筆作)이면서 생애 최고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이런 그림을 모두들 "상상해 그린 이 그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중국지형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상식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그림을 보면, 촉나라의 입구의 험준한 산들과 높은 봉우리, 가파른 절벽, 구름에 잠긴 골짜기를 돌아 드넓은 강물이 나타나며, 끝이 나는 그림 곳곳에는 어렵게 길을 걷고 있는 나그네가 등장한다. 이 그림은 절대로 현지를 걸어보지 않고, 현지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의 그림으로 볼 수 없다.
그러면서 이 현재에 대하여 중국 남종화(南宗畵)를 자기식으로 소화해 조선 남종화를 완성했다고 평가해준다. 이것이 이상하다.
중국땅에도 가지도 않았으면서 자기식으로 소화한 남종화풍이란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해야 옳은가? 말이다.
이 그림은 청송 심씨와 풍양 조씨 가문을 거쳐 내려오다 1936년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이 당시 큰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할 때 무려 5000원을 주고 구입했으며 손상된 부분을 표구하고 복원하느라 6000원을 들였다는 일화가 있다. 복원을 했다면 새로 만들어졌다는 말이니 원작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그림은 사천성 촉도를 그린 것이다.[조선일보, 2007 10. 16(화) A24]
다시 말해보자.
이 그림이 중국에 가서 그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중국의 촉잔도를 상상하여 한반도에서 그렇게 그릴 수 있었는가?
그런 그림인가?
전자였다면 현재 심사정은 중국대륙 사람이며, 후자였다면 현재 심사정은 귀신임에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원형기억력사를 생각해보자. 바로 그 중국대륙 자체가 조선이고, 현재 심사정이 중국대륙 그곳에 살았거나, 그 대륙에 살다가 지나갔던 곳에서 그린 그림이라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다.
그 "촉잔도"를 그린 솜씨나, 경치는 실물을 그린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마치 안평대군의 "무릉도원"을 그린 그림과 같은 맥락이다.
현재 심사정은 한반도 사람이라고 절대로 볼 수 없다. 그 그림을 보고 생각을 다시 해보자.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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