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중국은 공청단派 시대”
[위클리조선] 2007년 10월 16일(화) 오전 11:25
리커창(李克强·52) 중국 랴오닝(遼寧)성 당서기에겐 추쥔(儲君·황태자)이란 말이 항상 따라다닌다. 리 서기에게 황태자란 별칭이 붙은 것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 겸 당 총서기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 서기는 후 주석의 지원에 힘입어 그동안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리 서기는 오는 10월 15일 열릴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17전대)에서 권력의 핵심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것이 확실시된다. 그는 또 2012년 제18전대에선 후 주석에 이어 공산당 총서기 자리를 이어받아 최고 권좌에 오를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후 주석과 리 서기는 마치 바늘과 실처럼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83년 초 후 주석이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共靑團) 서기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리 서기는 당시 후 주석과 함께 근무하면서 후보위원, 후보서기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리 서기는 후 주석이 공청단 제1서기가 됐을 때 서기로 승진했다. 후 주석은 1992년 제14차 전대에서 50세의 젊은 나이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후 주석의 당시 임무는 공청단과 노동조합을 관리·감독하는 것이었다. 후 주석은 1993년 자신이 신임하는 당시 38세인 리 서기를 공청단 제1서기로 발탁했다. 리 서기는 이후 5년간 공청단을 명실공히 중국 공산당의 전위부대로 만들었다.
리 서기의 고향은 후 주석과 같은 안후이(安徽)성이다. 고교 졸업 후 리 서기는 중국의 국부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대혁명 정신에 따라 고향의 농업공사에 배치돼 농민으로 생활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직후 그는 1978년 베이징대 법학과에 입학,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학생회 활동도 열심히 했던 그는 1982년 졸업할 때 27명의 우수 학생 중 한 명으로 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 공청단을 관장하던 후치리(胡啓立) 당시 중앙서기처 서기에 의해 발탁돼 공청단 중앙에 들어간 그는 재직기간에 베이징대 대학원에 진학,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이기도 하다. 1991년 발표한 그의 논문 ‘중국 경제의 3원 구조’는 중국 경제학계 최고상인 쑨예팡(孫冶方) 경제과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후 주석은 1998년 당시 44세인 그를 허난(河南)성 성장(省長) 대리 겸 부서기로 임명했다. 중국 역사상 최연소 성장 및 첫 박사 학위 보유 성장이 된 그는 이때부터 중앙 정계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는 낙후한 농업지대였던 허난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동부 연·해안의 자본과 인재를 끌어들이는 전략을 추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후 주석은 2004년 그를 동북 최대 공업 지역인 랴오닝(遼寧)성 당서기로 임명했다. 리 서기는 부임하자마자 골칫거리인 펑후(棚戶) 지역 정비에 나선다. 펑후 지역은 광부와 그 가족의 임시 거처를 위한 판자촌이었으나 이후 빈민가로 변했다. 리 서기는 국가개발은행으로부터 500억위안을 대출 받아 120만명에게 새 집을 지어주는 실적을 냈다. 후 주석은 올 초 이곳을 방문, 리 서기의 업적을 크게 칭찬하기도 했다. 후 주석은 리 서기의 명석한 두뇌, 성실성, 온화한 성격과 누구든 부하를 만들 수 있는 친화력을 높이 평가해왔다.
리 서기가 후 주석의 후계자로 부상하면서 두 사람의 지지 기반인 공청단 출신들도 중국의 권력 핵심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른바 ‘단파(團派·퇀파이)’ 출신들은 그동안 권력을 누려왔던 상하이방(上海邦)을 제치고 중국의 최고 권력 인맥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후 주석은 1980년부터 1982년까지 간쑤(甘肅)성 건설위원회 부주임을 지낸 뒤 공청단 간쑤성 서기(1982년 9~12월)를 지냈으며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를 거쳐 1984년 12월부터 1985년 11월까지 공청단의 최고 책임자인 중앙위원회 서기처 제1서기를 역임했다. 단파는 공청단 제1서기를 지내고 1981~1987년까지 총서기를 역임한 개혁파 후야오방(胡耀邦·1989년 사망) 집권 당시 태동했다. 단파의 세 불리기는 1992년 후 주석이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르고 장쩌민(江澤民)의 후계자로 지목되면서 시작됐다.
17전대 이후 단파는 크게 약진할 것이 분명하다. 과거 상하이방이 누렸던 위세는 앞으로 이들의 몫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쳉리 연구원은 “단파는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파벌이 될 것이 분명하다”면서 “중국 정치에서 향후 5~10년 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후 주석은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단파 출신들을 대거 요직에 기용해왔다.
특히 후 주석은 지난 9월 19일 비서실장격인 당 중앙판공청 주임에 링지화(令計劃·52)를 임명했는데, 이는 지방 외곽에서부터 차례로 단파 출신을 심어왔던 후 주석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단파를 권력 핵심부에 기용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중앙판공청 주임은 중국의 권력 심장부인 중난하이(中南海)의 ‘총지배인’으로 당 정치국의 문안기초, 기밀문건 보관, 회의 조정, 일상관리, 안전경호, 보안 등을 지휘하는 권력 중추기관의 책임자이다. 1949년 이래 중앙판공청 주임을 거친 양상쿤(楊尙昆) 전 국가주석,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 등 10명은 모두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올랐을 만큼 막강한 자리다.
링 신임 주임은 공청단 출신으로 1970년대부터 공청단에서 근무하다가 1984년 공청단 제1서기였던 후 주석의 비서로 인연을 맺었다. 이후 20여년 동안 후 주석의 브레인으로 일해온 그는 후 주석이 구이저우(貴州)와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 당 서기로 지방에서 근무할 때 베이징에서 중앙 정계의 민감한 동향을 보고하기도 했다. 이번 발탁 인사로 링 주임은 25명으로 구성되는 당 정치국의 유일한 후보위원 자리를 꿰찰 것으로 전망된다.
단파의 핵심 인물을 보면, 리 서기를 비롯해 리위안차오(李源潮) 장쑤(江蘇)성 당서기, 왕자오궈(王兆國) 전인대 부위원장, 저우창(周强) 후난(湖南)성 성장, 위안춘칭(袁純淸) 산시(陝西)성 성장, 장바오순(張寶順) 산시(山西)성 당서기, 류옌둥(劉延東) 당 통일전선공작부장, 한정(韓正) 상하이시장, 왕양(汪洋) 충칭(重慶)시 당서기, 후춘화(胡春華) 공청단 제1서기 등이 있다. 31개 성·자치구·직할시의 서열 1, 2위인 당 서기와 성장 62명 중 22명이 현재 공청단 출신으로 채워져 있다. 2005년 10명에서 불과 2년 만에 배 이상으로 늘었다. 후 주석은 최근 2003년 사스(SARS·급성중증호흡기증후군) 사태 책임을 지고 좌천됐던 단파의 멍쉐눙(孟學農) 전 베이징 시장을 산시성 성장으로 복귀시켰다.
이처럼 중국의 권력 핵심으로 부상한 단파 출신들을 두고 ‘3다3소(三多三少)’라는 평가도 있다. 재경 부문이 아닌 곳에 진출한 인물은 많은 데 비해 재경 부문 인물은 적고, 지방정부 지도자 출신은 여럿이지만 중앙요직 경험자는 드물며, 학력이 높은 사람은 많지만 현장 실무 경력은 적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이들은 ‘당이 요구하면 단은 행동한다’는 공청단의 슬로건처럼 강력한 추진력을 갖추고 있다. 공청단은 규약에서 스스로를 ‘공산당의 조수’ ‘공산당의 예비군’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들은 젊을 때부터 사실상 공산당의 미래를 담보하기 위한 엘리트로 자라왔다.
이들이 당의 주요 간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교육제도의 변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문화대혁명(1966~1976년) 기간 중 한국의 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가오카오(高考·대입시험)를 폐지했다. 엘리트 의식을 조장하는 부르주아의 온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시기엔 노동자·농민·군인처럼 출신성분이 좋고 당성이 강한 사람에게 대학 입학의 특전이 주어졌다. 능력보다는 출신성분이 대학 입학을 좌우했다. 마오 주석이 사망하고 복권된 덩샤오핑(鄧小平)은 1977년 실력에 따른 대학 입학을 보장하기 위해 가오카오를 부활시켰다. 1977년 11월 실시된 가오카오에는 13세 최연소자에서 37세 최연장자까지 520만명이 몰렸고, 이 중 2%만 대학 캠퍼스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합격자들은 다음해인 1978년 봄에 입학했지만, 이들은 가오카오를 치른 해를 기준으로 ‘77지(級·학번)’로 불린다. 이들은 또 공청단에 들어가면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세력이 됐다. 77학번 이후의 세대들도 물론 선배들의 뒤를 이어 공청단에 대거 가입, 중국의 새로운 엘리트 그룹이 된 셈이다.
이들 중 눈에 띄는 세력으로는 베이징대 출신들이 있다. 후 주석을 정점으로 한 제4세대 정치지도자들은 칭화(淸華)대를 비롯한 이공계 출신 인사가 주류였으나, 앞으로 등장할 제5세대 중에는 베이징대를 비롯한 인문·사회계 출신이 약진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단파 출신이면서 베이징대 출신을 ‘진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국무원 부장 및 각 성의 성장급 이상 고위직(장관급 이상) 중 베이징대 출신은 57명, 칭화대 출신은 37명이다. 베이징대 출신은 연령 면에서도 57명 중 39명은 1950년대에 태어난 50대여서 차기 지도자로 도약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에선 그동안 칭화대 출신들이 최고위층을 독점해왔다. 1980년대 말 장관급 이상 고위직의 40%는 칭화대 출신이었고, 최근 10년간 칭화대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직을 300여명 배출했다. 현재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8명 모두가 공대 출신이고, 이 중 3명이 칭화대 출신이다. 후 주석,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 우관정(吳官正) 중앙기율위 서기가 칭화대 출신이다. 최근 사망한 황쥐(黃菊) 상무위원 겸 부총리까지 합하면 칭화대 출신은 4명이다. 칭화대가 권력을 차지한 것은 1950년대 당시 구소련의 교육방식을 본떠 공대 교육을 강화하면서 인재들이 대부분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와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를 적절하게 관리하는 인재가 필요해짐에 따라 베이징대를 비롯한 인문·사회계 출신이 약진하게 된 것이다. 중국 정치권력에서 인문·사회계 출신의 부상은 거시적 안목에서 복잡한 이해관계의 조정·통합이 가능한 간부가 더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다. 특히 후 주석이 자신의 기반인 공청단 출신을 키우면서 베이징대 인문·사회계 출신의 인사들이 대거 발탁되고 있다. 실제로 베이징대 출신 고위직 관리 중 인문·사회계 전공자가 90%에 달한다. 다른 대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31개 성·자치구·직할시의 당 서기와 성장들 중 인문·사회계 전공자의 점유율이 75%로 높아졌다.
때문에 앞으로 중국의 차차(次次)세대(제6세대) 지도자들로는 공청단과 베이징대 출신이나 인문·사회계 출신이 도약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발표된 중국 당·정 인사에서 눈여겨볼 인물은 후춘화 공청단 제1서기와 저우창 후난성 성장이다. 46세인 저우 성장은 리커창 랴오닝성 당 서기로부터 공청단 제1 서기직을 물려받은 후 8년 동안 재직하다 후난성 성장으로 임명됐다. 현재 중국의 성장들 가운데 가장 젊은 그는 시난(西南) 정법대학을 졸업했다. 공청단 서기와 공청단 제1서기를 지냈고 2002년 당 제16기 중앙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승승장구해 왔다. 43세인 후 제 1서기는 저우 성장으로부터 자리를 넘겨받았다. 베이징대 중문과를 졸업한 그는 베이징에 당 조직 차원의 일자리가 마련돼 있었으나 시짱에 근무를 자원했다. 1983년 8월 공청단 시짱자치구 위원회 조직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는 공청단 제1서기가 될 때까지 3년 정도를 제외하곤 줄곧 시짱에서 근무하는 등 책임감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는 1988년 시짱 당 서기로 부임한 후 주석으로부터 상당한 총애를 받기도 했다.
또 이번 17전대를 앞두고 지방정부 고위간부들도 이미 대대적으로 물갈이됐다. 현재까지 개편된 지방정부 당·정 지도부 구성을 보면 부서기와 부성장 자리가 대폭 줄어들었다. 지금까지 당 서기 밑에 여러 명의 부 서기를 둔 것과는 달리 당서기 1명과 부서기 2명만 두는 방식으로 조직을 대폭 간소화한 ‘일정양부(一正兩副)’ 제도도 정착되고 있는 것이다. 또 지방 당·정 지도부의 평균연령이 낮아지는 연경화(年輕化) 현상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후 주석이 성급 당 위원회 지도부에 50세 이하를 3명, 45세 전후를 1명 이상 의무적으로 포진시키도록 지시함에 따라 1950년대, 1960년대 출생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런 지방의 주요 간부들은 대부분 단파 출신들이 발탁되고 있다.
이번 17전대는 후 주석이 집권2기를 맞아 친정체제를 구축, 본격적으로 21세기 중국의 새로운 청사진을 펼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권력서열 1위인 공산당 총서기로 임기 5년을 마친 후 주석은 이번 17전대에서 두 번째 당 총서기 임기를 시작하게 된다. 후 주석은 국가주석을 선출하는 내년 3월 전인대에서 국가주석도 연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럴 경우 후 주석은 마오쩌둥, 덩샤오핑, 장쩌민으로 이어지는 중국 최고지도자의 반열에 명실상부하게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후 주석의 최대 과제는 중국을 강대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후 주석은 친위 세력을 전진 배치, 앞으로 5년간 자신의 청사진을 강력히 추진토록 할 계획이다. 단파 출신들이 대거 요직에 기용되는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후 주석의 친정체제 출범과 함께 중국의 권력 핵심으로 등장한 공청단이 과연 ‘새로운 중국’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 주목된다. ▒
공청단 이란
1920년 결성된 ‘공산주의청년단’
현재 249만개 지부에 7188만명
공청단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기 이전인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사회주의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결성됐다.
사회주의청년단은 1921년 7월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이후 1922년 5월 공산당 산하의 조직으로 확대 개편됐고, 1925년 중국 공산주의청년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항일전쟁 때는 민주청년단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건국 이후에는 중국 신민주주의청년단으로 개칭되기도 했지만, 1957년부터 다시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공청단은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활동이 정지되는 등 한때 암흑기를 맞기도 했다. 공청단은 1978년 10월 제10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이때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현재 전국 기층(基層) 단(團) 위원회는 19만9000개, 단 총지부는 22만개, 단 지부는 249만1000개, 단원 수는 7188만명이다. 전문 단 간부는 19만1000명이며, 학생 단원(14~25세)의 총수는 3570만명으로 전체 총 단원 수의 49%를 차지하고 있다.
공청단파의 핵심 인물
리커창(李克强) 랴오닝성 당서기
리위안차오(李源潮) 장쑤(江蘇)성 당서기
왕자오궈(王兆國) 전인대 부위원장
저우창(周强) 후난(湖南)성 성장
위안춘칭(袁純淸) 산시(陝西)성 성장
장바오순(張寶順) 산시(山西)성 당서기
류옌둥(劉延東) 당 통일전선공작부장
한정(韓正) 상하이시장
왕양(汪洋) 충칭(重慶)시 당서기
후춘화(胡春華) 공청단 제1서기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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