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수호

우리 땅 우리 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

한부울 2007. 9. 25. 21:13
 

우리 땅 우리 魂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

 

백두산을 가르는 중국과 북한 국계비의 마지막인 21번째 비석. 두만강이 시작되는 지점에 세워졌다. 중국과 북한간의 국경협정이 체결된 1962년에 처음 비석이 세워졌지만 1990년에 현재의 화강암으로 교체돼 비석에는 ‘1990’이라고 연도가 새겨져 있다. -특별취재팀


《일제의 식민지배는 한민족의 강역을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축소시켰고, 남북 분단은 다시 우리의 영토의식을 휴전선 이남에 가뒀다.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집요한 억지주장에만 분노하면서 우리는 오랫동안 북방의 변경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본보 특별취재팀은 백두산과 천지, 압록강과 두만강, 간도와 연해주 등을 돌아보면서 영토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임을 절감했다. 1909년 아무 권한도 없는 일제가 이권의 대가로 중국에 간도를 넘겨버린 간도협약에 가슴을 쳐야 했다.

백두산과 천지를 양분한 북-중 밀약의 정확한 진상을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까웠고, 간도 영유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전율을 느꼈다. 우리가 대응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초조감도 들었다. 더 이상 외면하고 방치하면 영원한 ‘민족의 실지(失地)’가 될지도 모르는 영토분쟁의 현장을 소개한다.》 

<1> 철책 하나 없는 北-中 국경

‘도화선(圖和線) 200km’라는 도로표지를 지나쳤다. 도로의 기점인 두만강 하구의 북-중(北-中)간 국경도시, 투먼(圖們)에서의 거리다. 차가 달리는 곳은 백두산의 해발 1300m 지점, 행정구역상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시다. 표지석을 지나 겨우 5분을 달렸을까. ‘두만강 발원지’라고 한글과 한자로 병기된 말끔한 교통표지가 우뚝 길 왼편에 나타난다. 차를 멈추고 표지가 가리키는 도로 안쪽 숲을 향해 들어서다가 붉은색 페인트로 쓴 ‘월경(越境)관광 금지’ 경고문에 순간 발길이 주춤해진다.

○ 한 발은 북한, 한 발은 중국

“자칫하면 조선(북한)군이나 중국군에게 붙잡힌다”며 연방 주위를 살피는 길잡이의 긴장된 목소리와는 달리 사방 어디에도 국경을 나타내 주는 철책 하나 보이지 않는다. 길 안쪽으로 200여m를 걸어 들어갔다. 표지가 없었다면 그저 지나치고 말았을 작은 웅덩이에 불과한 두만강 발원지가 나타난다. 거기서 시작된 물의 흐름을 찾기 위해 동쪽으로 100여m를 걸어가자 폭이 채 1m도 되지 않는 도랑 같은 물줄기가 보인다. 다리를 벌려 도랑의 이쪽과 저쪽을 밟고 섰다. 두만강은 중국과 북한의 경계를 가르는 국경하천. 그러니 지금 취재기자의 한쪽 발은 중국, 또 다른 한쪽은 북한을 딛고 선 것이다. 다시 도로로 나가기 위해 들어왔던 길을 되짚어 100여m쯤을 걸어나간 지점, 도로 안쪽으로 들어선 오른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비석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서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북쪽 면 글씨가 뚜렷이 보였다.

○ 백두산의 마지막 국계비

  

‘中國 21(2) 1990.’ 비석의 남쪽 면에는 똑같은 글씨체로 ‘조선 21(2) 1990’이 붉은색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약 1m. 어른 허리께에 차는 높이다. 북한과 중국 어느 쪽도 국경선을 언제 어떻게 획정했는지 공식적으로 밝힌 적이 없지만 백두산을 가르는 표석으로 1960년대 이후 엄연히 실재해 온 국경 경계비(국계비)들. 21번 비석은 마지막 국계비였다.

백두산 일대의 국계비는 북-중간 국경의 ‘실체적 증거’다. 변화가 있었다면 1962년에 세워진 국계비가 1990년에 현재의 화강암 소재로 바뀌었다는 것뿐. 백두산 지역의 주민들은 이 국계비와 함께 40여년을 살아왔다. 이들 국계비는 요즘 밀수꾼들의 접선지로 이용되기도 한다. 중국 안투(安圖)현에 사는 조선족 청년 A씨의 얘기.

“요즘은 차 밀수를 많이 하는데 옌볜에 굴러다니는 한국제 고급차들 다 북한땅 거쳐서 들어온 겁니다. 저쪽(북한)에서 ‘오늘밤 차 한대 간다’며 ‘17호 쪽으로 간다, 19호 쪽으로 간다’고 하면 금방 그쪽으로 차 한 대 다닐 길을 닦았다가 차만 지나가면 국경부대가 못 보게 싹 흔적을 치워 버린단 말입니다.”

○천지를 가르는 두개의 비석

“백두산의 서쪽 등반코스에 5월이면 꽃이 활짝 피는데 ‘꽃축제’라고 아주 장관입니다. 서쪽 코스, 여기 말로 ‘시포(西破)’의 시작점이 5호 국계비죠.” 현지 등반가이드 B씨는 등산 가이드들에게도 국경비는 중요 지형지물이라고 전한다. 5호비는 천지 서쪽의 봉우리인 청석봉(2664m) 남쪽에 세워져 있다. 이 5호비와 동북쪽 대각선으로 마주보고 있는 지점에 6호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5호비와 6호비를 잇는 직선이 중국측 지도에 표시된 천지를 분할하는 국경선이다. 1∼4호 국계비를 보려면 백두산 남쪽 코스를 택해야 한다. 행정구역상 중국은 창바이(長白)현, 조선은 양강도 혜산시가 마주보는 지역이다. 1∼4호비는 백두산 관면봉에서 시작해 서북 방향의 와호봉 제운봉으로 연결되는 코스에 있다. 출발점은 창바이현의 23도구. 계곡 아래로 압록강 상류가 보이는 이 남쪽 등산로는 북한과 중국 양쪽 국경을 넘나들어야 한다. 따라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코스를 올라본 한국인 K씨의 경험담. “중국 사람들은 통행증을 받은 뒤 국경경비대의 안내를 받으면서 차를 타고 올라가요. 저는 아예 미화 100달러짜리를 준비해 갖고 가서 북한 국경경비대와 부닥칠 때마다 찔러줬어요.”

 

 

○중국의 묘한 2중 정책

21호비가 세워진 곳은 북한 쪽의 홍토수와 중국 쪽의 뤄류허(弱流河)가 만나는 지점. 20호비 또한 홍토수와 중국 쪽 무수린허(母樹林河)의 합수지점에 설치됐다. 지난해 21호비 앞쪽에 군사도로가 뚫리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옌볜대학출판사에서 2002년 발간한 ‘연변관광자원과 리용(이용)’이라는 책에서는 책자는 21호비를 관광자원의 하나로 소개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21호비로 통하는 길은 중국인들조차 통행을 하려면 국경경비대에 신분증을 제시하고 통행 목적을 밝혀야 하는 군사도로다. 중국은 지난해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린(吉林)성과 랴오닝(遼寧)성 국경지역에 15만명의 군을 추가투입했다. 백두산 등반 북쪽 코스의 관문인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의 주민 C씨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지역 출신 변방 경찰들이 국경을 지켰는데 요즘은 허베이(河北) 쓰촨(四川)성 등 내지에서 온 군인들로 싹 바뀌었고 경비도 강화됐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을 막고 북한 정권에 변고가 생기면 신속하게 대응하려는 것 같다는 게 그의 짐작이다.

허룽(和龍)시 주민 D씨는 조금 다른 설명을 보탰다. “국계비에 가까이 가거나 사진촬영을 하는 것은 여전히 위법이지만 요즘은 시 재원 확보를 위해 두만강 발원지나 만주족 발상지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위안츠(圓池)’ ‘댜오위타이(釣魚臺·일명 김일성 낚시터)’ 등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경 경비 강화와 관광 홍보는 모순이다. 중국의 진짜 속내는 뭘까. 2002년 2월부터 중국사회과학원이 주도하는 학술프로젝트 ‘동북공정(東北工程)’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민의 반중(反中)감정 격화를 예상하면서도 국가 주도로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시도엔 한반도 통일 이후까지 대비하는 장기적이고 거대한 국가전략이 숨어있는 듯해서다. 동북공정은 단순한 역사논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 사회과학원 홈페이지(www.chinaborderland.com)가 동북공정의 목표를 ‘동북변경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고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한 것부터 학술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근 10년 내 동북아는 세계의 주목을 받는 지역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의 러시아 북조선 한국 몽골 일본 미국 등의 국가와 중국이 갖는 쌍방관계 다자관계는 매우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고 밝힌 대목은 중국의 의도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중국의 2002년 동북공정 개시와 지난해 동북변경지역 군사력 증강에는 분명 상관관계가 있다. 말없이 서 있는 국계비와 우뚝 선 백두산, 도도히 흐르는 압록강과 두만강 주변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은 머지않은 장래에 동북아에 암운을 드리울 가능성이 있다. 영토분쟁은 우리에게도 그리 먼 얘기가 아닌 것이다.

▼中, 천지에서 ‘국경 이벤트’

2001년 8월 28일. 천지에 최초로 금이 그어졌다. ‘중국의 물개’로 불리는 장젠(張健·40) 베이징(北京)체육대 교수가 천지를 헤엄쳐 횡단했다. 장 교수는 천지 동서쪽의 국경경계비(5호비와 6호비)를 잇는 선과 200m 간격의 평행선을 그리며 물을 갈랐다. 물론 중국 쪽에서 수영을 했다. 이는 천지에 국경선이 있음을 보여주려 한 의도적인 이벤트가 아니냐는 의심을 샀다. 중국 언론들은 행사 전날까지 이 이벤트에 관해 일절 언?僿舊?않았으나 행사 당일엔 일제히 ‘천지 횡단’을 부각하면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북한은 중국에 강력히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두산 창바이(長白)폭포 인근에 사는 한 주민은 “작년에도 한 중국인 사업가가 천지의 중국 쪽 절반만 운항하는 관광유람선을 띄우려 했다가 북한의 거센 항의를 받고 철회한 일이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중국지도출판사에서 제작한 지린(吉林)성 지도는 천지 한복판에 국경선을 그어놓고 있다. 이에 따르면 북한과 중국은 천지를 약 6 대 4의 비율로 나눠 갖고 있다. 그러나 1997년 북한 교육도서출판사가 펴낸 조선지도첩엔 국경선이 천지의 동서 양끝까지만 그려져 있다. 북한이 천지에 국경선을 표시하지 않은 것은 백두산은 부득이하게 중국과 나눠 가졌어도 천지만은 온전히 조선의 것이라는 정서가 깔려 있다. 한국지도는 이를 더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최근 발간된 ‘북한행정도’(성지문화사) ‘최신북한지도’(우보지도문화사) ‘대한민국전도’(새한지도) 모두 천지를 통째로 북한 영토에 포함시키고 있다. 천지에 사는 물고기들의 ‘국적’은 확실히 북한이다. 천지에는 원래 어류가 살지 않았으나 북한 조선과학원의 동물연구소 어류학자들이 60년 84년 89년 91년에 각각 5, 100, 120, 216마리의 물고기를 방류했다. 그래서 세계 화산호 중 가장 높고, 가장 깊고, 가장 넓은 천지에 붕어 산천어 등이 살게 됐다. 중국은 백두산을 AAAA급 관광구로, 북한은 백두산과 천지를 각각 명승지 제19호와 제351호로 지정해 놓고 있다. 

 

토문강 둘러싼 쟁점

 

두만강과 토문강이 서로 다른 강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구분한 함경도도. 정조 11년(1787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서는 백두산 동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토문강원으로 표시해, 대각봉 아래에서 나와 무산을 거쳐 흐르는 두만강의 흐름과 뚜렷이 구분했다.-서울대 규장각 소장

청(淸)나라는 1658년 현재의 간도지역에 대해 봉금령(封禁令)을 내린 이래 19세기 초반까지 이 지역에 사람이 살거나 농경지를 개간하는 것을 금했다. 조선 역시 19세기 후반까지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가는 행위를 ‘범월(犯越)’로 규정해 엄격히 다스렸다. 따라서 간도는 오랜 세월 조선과 청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중간지대로 존재했다. 간도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서울대 백충현 교수의 말처럼 ‘영토협상은 쌍방이 과거의 사실 중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국제법으로 엮어서 주장하는 과정’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 土門과 豆滿의 혼용과 구별

중국측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당시 조선과 청 모두 토문이 두만강인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기록을 보면 실제로 청은 토문과 두만을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전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지도에도 토문과 두만을 같은 것으로 표기한 것이 있다. 이 점은 한국측에 불리한 대목. 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는 토문과 두만을 명확히 구분해 그리는 조선의 지도가 늘어났다. 179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여지도(輿地圖)에는 두만강과 분명히 다른 물줄기가 정계비에서부터 표시돼 있다. 역시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함경도도는 백두산 동쪽에서 나와 북류하는 물길을 ‘토문강원’으로 명기하고 있다. 또한 영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全圖)는 정계비에서 갈라지는 물줄기가 두만강 북쪽의 ‘분계강(分界江)’으로 흐르다가 하류에서 두만강과 합쳐지는 것으로 돼있다.

● 영토의식에 눈뜨는 조선


조선은 건국 초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4군 6진을 개척했으나 두 차례의 호란(胡亂)을 겪은 뒤 이 지역을 방치했다. 군사방어선도 남쪽으로 후퇴했다. 인천교육대 강석화 교수는 “정계비를 세울 때만 해도 조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상류의 강변지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북방의 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은 중흥기인 영·정조대였다. 영조 때인 1767년부터는 백두산을 ‘조선의 종산(宗山)’으로 인정해 매년 세 차례 제사 지내기 시작했다. 이 지역이 조선의 영토임을 공식 선언한 것이었다. 나아가 폐사군(廢四郡) 복구론, 요동수복론 등과 같은 논의가 일기도 했다. 토문은 두만이 아니고 쑹화(松花)강이라는 주장이 본격 제기된 것도 이때였다.

● ‘사기극’이라는 주장의 맹점

“1880년대 조선정부는 국경쟁의를 일으켰다. 투먼강(圖們江·두만강의 이칭) 북쪽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위증과 망언을 이용해 역사상 보기 드문 국제 외교사기극을 도모한 것이다.” 중국의 역사학자인 산둥(山東)대 쉬더위안(徐德源) 교수는 1998년 ‘토문, 두만이 각각 다른 두 강이라는 망언에 관한 반박’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조선이 백두산정계비를 비밀리에 옮겼으며 △그에 맞춰 돌더미와 흙더미도 쑹화강 쪽으로 축조했다고 주장했다. 조선이 간도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정계비 위치를 바꾸고 국경축조물을 날조했다는 얘기는 돌출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현재의 정계비 터를 기준으로 하면 간도는 분쟁의 소지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실수라 해도 면책될 순 없다

국경 정계(定界) 합의의 청측 대표인 목극등(穆克登)이 저지른 실수는 중국측에 결정적으로 불리한 대목이다. 현지 역사학자 A씨는 목극등의 실수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두만강을 경계로 생각했다면 정계비 위치를 두만강이 안 보이는 곳에 잘못 잡았고, 둘째 두만을 토문으로 오기(誤記)했으며, 셋째 두만강 상류가 아닌 물줄기에 국경축조물을 쌓게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1885년, 1887년 감계(勘界)담판에서 조선은 “목극등이 주장해 세워진 축조물대로 쑹화강을 국경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충현 교수는 “비석의 위치가 잘못됐거나 비문에 오기가 있다면 국제법적으로 청의 중대과실에 해당한다”고 해석했다. 이일걸 박사(성균관대 강사)도 “과실 책임은 일방적으로 청에 있다”고 논문을 통해 주장해 왔다.

● 소백산정계비설은 타당한가

이를 뒤집기 위해 중국학계는 “정계비가 당초 압록강과 두만강이 다 보이는 소백산에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조선이 정계비를 옮겼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정계비 건립 당시 목극등과 동행한 청의 화가가 작성해 청과 조선 정부에 제출한 지도를 보면 토문은 백두산의 대각봉보다 위쪽에 표기돼 있다. 현재 중국학자들이 주장하는 소백산보다도 북쪽에 그려진 것이다. 강석화 교수는 “당시 조선측 통역관으로 동행했던 김지남(金指南)이 남긴 ‘북정록(北征錄)’의 답사경로를 보아도 소백산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 간도는 조선인이 개척했다

간도지역의 개척자는 조선인이었고 이들은 삶터를 옮긴 후에도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특히 1869년과 1870년 함경도 지역에 대흉작이 들자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가 농경지를 개간하는 조선인들이 급증했다. 조선의 지방관이 주민들의 집단이주를 조장하기도 했다. 회령부사는 주민들이 개간청원서를 내면 이를 허용해주는 방식으로 이주를 지원했다. 강계군수는 자신의 권한 아래서 서간도 일대의 땅을 28개면으로 나눠 7개면은 강계군, 8개면은 초산군, 9개면은 자성군, 4개면은 후창군에 분속시켰다. 반면 청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청이 두만강 대안(對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관리하겠다고 나선 것은 1860년 러시아와 베이징조약을 체결한 이후. 청은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도 변발하고 호복을 입으라고 강요했다.

● 주민들은 청원도 조선에 했다

청은 1882년에야 간도주민들을 자국인으로 편입하겠다는 방침을 고시했다. 이에 간도의 조선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과 토문강은 엄연히 별개의 것이므로 두만강 이북지역에 대해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하려는 청의 시도를 막아달라”고 조선정부에 청원하기도 했다. 1885년과 1887년에 조선이 청과 회담에 나선 것도 간도주민들의 이 같은 청원 때문이었다.

 

간도는 어떻게…

《“지린성(吉林省) 투먼(圖們)시를 지나치자마자 차를 몰던 가이드가 “두만강이오”라고 외쳤다. 물길의 너비가 30m나 될까. 두만강은 지도의 굵은 실선이 연상시켰던 품 넓고 유유한 강이 아니었다. 옌지∼훈춘(琿春)간 국도 302호선과 숨바꼭질하듯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흐르는 두만강은 바지만 걷고도 건널 수 있는 곳이 많았다. 학정과 굶주림에 신음하다가 고향 땅을 등져야 했던 조선 유민들이 건넌 두만강도 이랬을까?》

● 바지만 걷어도 건너는 두만강

“당시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지금보다는 수량이 더 많았고 강기슭의 숲도 더 울창했던 것 같습니다. 10리 간격으로 배치된 국경수비대 군인들의 감시도 있었고요. 하지만 도강(渡江)을 막을 만한 큰 장애물은 없었습니다.”(양태진 동아시아영토문제연구소장) 두만강과 압록강은 조선인들에게 마치 한강이나 낙동강처럼 국내 하천으로 인식되었다는 게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국경 하천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중국학계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장광차이링(張廣才嶺), 하얼빠링(哈爾巴嶺), 라오이에링(老爺嶺) 등의 산맥과 쑹화(松花)강 같은 큰 물길이 가로막고 있는 둥베이(東北) 지역은 중국 내지(內地)로부터 접근하는 것보다는 조선에서 넘나들기가 훨씬 쉬웠습니다.”(조선족 원로 사학자 C씨)

● 국경은 선 아닌 지대의 개념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던 간도 지역은 12세기 초부터 500여년간 임자 없는 땅이었다. “당시 국경은 선(線) 개념이 아니라 지대(地帶) 개념이었습니다. 명대(明代·1368∼1644)에 간도지역은 고려 및 조선과의 군사적 완충지대로 어느 쪽의 일방적인 통제력도 미치지 않는 중립지대였어요.”(박선영 포항공대 교수) 청대(淸代)에 들어 사정이 좀 달라진다. 청은 1660년대 백두산을 조상의 발상지로 성역화하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했다. 병자호란 이후 청을 섬겨야 했던 조선 정부는 간도 영유권과 관련해서는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일단 봉금(封禁)조치에는 협조했다. 거기엔 조선 변경에 대한 청나라 사람들의 침탈을 단속할 명분을 얻기 위한 고려도 작용했다.

● 목숨을 건 犯越과 유민 哀史

이후 200여년간 조선과 청은 봉금 합의를 엄격히 지켰지만 목숨을 걸고 범월(犯越)하는 조선인들을 막지는 못했다. “1867년 여름 새 무산부사(茂山府使)가 부임해 각종 세금과 벌금으로 쌀 10여만 석을 강제 징수했다. 이를 피해 마을사람들이 500여리의 원시림을 뚫고 백두산 기슭으로 들어갔다. 여름에는 더워 죽고 겨울엔 얼어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여서 지금도 길가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1872년 압록강 상류 지안(集安) 린장(臨江) 등지의 조선유민 생활상을 기록한 최종범(崔宗範)의 ‘강북일기(江北日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강을 건너 신천지를 찾은 조선 유민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원시림과 황무지, 그리고 그곳까지 뒤쫓아온 일부 조선 관리들의 가렴주구였다. 그런데도 이주민은 늘어나기만 했다.

● 결국 淸도 봉금을 풀었으나

그나마 굶주림을 면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간도에서 피땀으로 마련한 농토는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의 3배나 되는 수확을 안겨 줬다. 처음에는 월강(越江)을 중죄로 다스리던 조선 관리들도 나중에는 이를 눈감아주거나 도와주기까지 했다. 결국 1880년대 청이 봉금을 풀었다. 팽창하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청조의 발상지에 주민을 대거 이주시켜 개발한다는 이민실변(移民實邊) 정책을 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인들은 쫓겨날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이미 간도는 조선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1890년대 무산 종성 회령 온성 경원 대안(對岸)의 조선인은 지역인구의 93%(청측 통계) 또는 98%(조선측 통계)를 차지했다. 조선과 청이 간도문제로 충돌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 ‘농업혁명’을 일으킨 조선 유민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 하순까지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어는 두만강 압록강 대안지역에 벼농사를 처음 도입한 것은 조선 유민들이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를 ‘농업혁명’으로 높이 평가한다. “‘이밥(흰 쌀밥)은 뼈밥’이라는 말이 있다. 조선족은 얼음이 서걱거리는 강물에 들어가 보를 막고 도랑을 냈다. 쌀을 수입하던 둥베이지방은 1910년대 말부터 쌀을 수출하게 됐다.”(‘중국조선족역사상식’ 중) 벼농사는 1870년대 퉁화(通和) 옌지(延吉) 등에서 시작돼 압록 두만 하이란(海蘭) 무단(牧丹) 쑹화강 유역으로 퍼져 나갔다. 1차 세계대전 발발(1914년)에 따른 쌀값 급등이 벼농사 확산의 중대 전기가 됐다.

● 민족의 피땀이 어린 간도

그와 함께 조선 유민들은 동북 3성(省) 전역의 강 유역과 평지로 거주지를 넓혀 갔다. 1933년에는 북위 50도의 헤이룽(黑龍)강 연안에서 벼 재배에 성공하는 ‘기적’을 이뤄 내기도 했다. 중국 통계에 따르면 1920년 현재 동북 3성 주요 지역 무논의 80∼100%는 조선족이 개간한 것이었다. 1934년 동북 3성 총 인구에서 조선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3.3%에 불과했지만 조선족의 벼 생산량은 전체 수확량의 90.1%에 달했다. 간도의 황무지가 비옥한 옥토로 바뀌는 과정은 곧 조선 유민들이 간도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우뚝 서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 그 이상의 역사가 숨쉬는 곳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간도는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항일독립운동의 주 무대가 됨으로써 개척의 역사에 투쟁의 역사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족 원로 사학자 C씨는 이렇게 말한다. “개척과 투쟁으로 삶의 근거지를 다지고 지켜 왔다는 점에서 조선족은 중국의 30여개 과계민족(跨界民族·주변 국가로부터 국경을 넘어 들어온 소수민족이라는 뜻) 중에서도 아주 유별난 사례입니다.”

투먼·옌지=특별취재팀 

 

서간도를 재발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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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중국 단둥(丹東)에서 북쪽으로 120리쯤 떨어진 볜먼(邊門) 마을의 ‘이찬산(一面山)’역은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가오리먼(高麗門)’역으로 불렸다. “1962년인가, 류사오치(劉少奇·당시 중국 국가주석)가 평양에서 (조중비밀변계조약을 체결하고) 열차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 역명을 보고는 깜짝 놀라 바꾸라고 했다디요.” 볜먼의 조선족들 사이에는 1961년 중국 방문에 나선 김일성(金日成) 전 북한 주석이 이 곳을 지나다 역 이름을 보고 조선 땅이라고 할까 봐 중국 정부가 서둘러 개명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그 무렵 이찬산역 인근의 ‘가오리먼차오(高麗門橋)’역은 아예 폐쇄됐다. 볜먼 남쪽의 ‘조선촌’도 ‘탕허(湯河)’로 이름이 바뀌었다.]

● 볜먼은 역사책에 나오는 책문

역사책에 나오는 책문(柵門)이 바로 볜먼이다. 책문이란 조선인들이 청(淸)나라에 들어갈 때 거쳐야 하는 국경검문소. ‘고려문’으로 불리기도 한 이 지역엔 일찍이 조선인마을이 형성됐다. 병자호란 때 포로가 됐던 조선인들이 터를 잡았다고 한다. 책문은 하나만 있었던 게 아니다. 청 이전에 명(明)은 랴오둥(遼東)지방 동북쪽 변경에 흙 돌 나무로 울타리를 쳤는데 이를 변장(邊墻)이라고 했다. 이어 청은 1660년대 허물어진 변장 근처에 버드나무를 잇대어 심고 그 바깥에 참호를 판 유조변(柳條邊)을 구축한 뒤 사이사이 사람과 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문을 20여개 만들었다. 그것이 책문이었다. “명대에 변장의 동북쪽 지역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명과 형식상의 조공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실상 자치를 했다. 변장은 명의 국경선 역할을 한 것이다.”(남의현 강원대 강사)

● ‘압록-두만강이 국경’ 문건 거의없어

청은 왕조의 발상지인 변장의 동북쪽지역에 대한 관심이 명보다 컸다. 하지만 이 지역에 온전한 지배력을 행사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린다. 중국학자들은 이 지역에 대한 청의 실질적 지배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유조변이 ‘만주를 보호·관리하기 위한 문화적 구분선’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러시아와 일본의 학자들은 대체로 유조변이 사실상의 국경선이었다고 해석한다. 이에 따르면 압록강에서 북쪽으로 120리쯤 떨어진 책문이 청의 국경이 된다. 한국 학자들은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청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조선과의 국경으로 표현한 문건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때까지 청의 공식문건에 나타난 가장 바깥쪽 변경은 볜먼 북쪽의 펑청(鳳城)이라는 것.

 

  

● ‘레지선’과 ‘PING-NGAN’

청대 사서인 길림통지(吉林通志)는 “조선의 변경이 선양(瀋陽)∼지린에 접하였다”고 적었다. 통문관지(通文館志)는 펑황청(鳳凰城·지금의 펑청) 부근을 조선과의 경계로 기록했다. 청 강희제의 명을 받아 1708년부터 1716년까지 변경 지도를 작성한 프랑스 선교사 레지(R´egis) 또한 “펑황청 동쪽에 조선의 서쪽 국경이 있다”고 밝혔다. 레지의 실측도에는 조선의 북서쪽 국경선인 이른바 ‘레지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그려져 있다. 펑청 부근을 지나는 레지선과 압록강 사이엔 평안(平安)도의 중국어 발음을 표기한 ‘PING NGAN’이라는 알파벳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를 손질해 청이 내놓은 황여전람도(1718)엔 레지선과 이 문자가 없다.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는 “청이 불리한 내용을 지운 것 같다”고 추정했다. 일본인이 작성한 동판조선국전도(1882)나 김대건(1822∼1846) 신부의 ‘조선지도’에도 압록강 대안 지역 대부분은 조선 영토로 표시돼 있다.

● 고려 때도 집단이주가 있었다

중국 학계는 간도에 조선인들이 거주한 것은 봉금령이 내려진 1660년대 이후라고 주장한다. 청나라 영토에 불법적으로 넘어왔음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고려 때에도 이주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98년 중국 옌볜(延邊)에서 발간된 ‘중국조선족력사상식’도 “명 초기에 요동 일대에는 수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명 초기 요동지역 총인구의 10분의 3을 차지했다”고 인정한다. 특히 명말청초에 건너간 이주민의 자손들은 여전히 “나는 조선인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을 갖고 있다. 랴오닝성 번시(本溪)현의 박가보(朴家堡)촌과 허베이(河北)성 칭룽(靑龍)현 박장자(朴杖子)촌은 당시에 형성된 대표적인 조선족 마을. 이곳엔 아직도 동성동본 금혼과 같은 우리의 풍습이 남아있다.

● 조선인 마을 조선관리가 관할

1660년대부터 200여년간 이어진 청의 봉금 시기에 조선인들의 월강(越江) 이주는 두만강 대안지역 뿐만 아니라 압록강 대안지역으로도 대거 이뤄졌다. 그 결과 19세기 말 압록강 대안지역의 조선인 인구가 옌볜지역보다 많았다. 퉁화(通化) 환런(桓仁) 콴뎬(寬甸) 등에 이주한 조선인은 1897년 당시 3만7000여명에 이르렀다. 이에 조선 정부는 1903년 양변관리사를 파견해 서간도 지역 조선인 마을을 묶어 향약(鄕約)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조선의 행정력이 미친 것이다. 조선족 학계에서는 ‘동북 농업혁명’으로 일컬어지는 벼농사가 시작된 곳도 북간도가 아니라 서간도라는 것이 통설이다. “1845년 뗏목을 몰던 평안도 초산 일대 80여 가구의 농민들이 훈(渾)강 유역에 논을 처음 만들었다. 1875년에는 평안도 사람들이 환런에 정착해 벼농사를 지었다. 130여년 전 훈강 유역에서 시작된 논농사가 간도 전역으로 신속히 퍼졌다.”(이야기 중국조선족력사·2000년 옌볜)

● ‘東爲土門’에 가려진 서간도문제

압록강 대안의 서간도 문제는 국내 학계에서 오랫동안 소홀히 취급돼 왔다. 백두산정계비의 ‘동위토문(東爲土門)’ 해석 문제에 집착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변장과 유조변에 맞닿아 있는 서간도 문제는 한국과 중국의 국경분쟁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정계비문 해석 문제에서 좀 더 시야를 넓혀 명과 청이 실제로 자국의 영토를 어디까지로 인식하고 있었느냐는 시각에서 간도문제를 바라보면 서간도는 동간도 혹은 북간도만큼이나 중요한 지역이다.”(박선영 교수)


볜먼·번시·평청=특별취재팀 

 

출처 - 동아일보


‘중국지’(1735년)에 소개된 프랑스 예수회 소속 선교사 레지의 지도(왼쪽). 지도상에 굵은 선으로 표현된 압록강 두만강 이북에 ‘레지선’이 있다. 레지선과 압록강 사이에 평안도의 중국어 표기인 ‘PING NGAN’(네모안)이라는 지역명이 적혀 있어 이 지역 전역 혹은 일부에 조선의 지배력이 미쳤음을 추정케 한다. 19세기 제작된 김대건 신부의 ‘조선지도(가운데)’와 일본인이 제작한 ‘동판조선국 전도(오른쪽)’에도 압록강 북쪽 지역 대부분이 조선 영토로 표시돼 있다.
중국 지린성 투먼시 인근 302번 국도에서 바라본 두만강. 수심이 간신히 무릎까지 차오를 정도다. 조선 후기 간도 이주의 주요한 통로였던 이 일대에서는 최근 탈북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강 건너편은 북한의 함경북도 온성군.-지린성 투먼시=특별취재팀두만강 상류인 중국 지린성 조선족자치주 난핑에서 건너다본 북한의 무산. 무산 마을의 개 짖는 소리가 중국 쪽에서 들릴 만큼 지척이다. 법으로 월경이 금지됐지만 이미 19세기 초부터 두만강을 건너 삼을 캐거나 경작을 하는 조선인들이 급증했다. 1803년의 순조실록은 “무산에서는 강이 잠시라도 얼어붙으면 나무하고 꼴 베는 아이들이 다니는 길이 이루어질 정도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강 건너를 이웃 읍 보듯 해 범월을 막을 수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난핑=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