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에 가스실이 없었다고?
[조선일보] 2007년 09월 21일(금) 오후 10:50
2007년 4월 19일 유럽 의회는 ‘제노사이드(genocide·인종학살), 반인륜적 범죄, 전쟁범죄를 공공연하게 용서 또는 부정하거나 그 의미를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는 결의(Framework Decision on Racism and Xenophobia)를 채택했다. 포괄적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 결의안이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인 영국의 재야 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David Irving)이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된 사건이 이 결의안 채택의 배경이었다. 어빙은 롬멜과 괴벨스 등의 전기를 쓴 전기 작가이자 2차대전에 대한 대중적인 저작으로 유명한 역사가였다. 1970년대까지의 어빙은 비교적 괜찮은 역사가였다는 것이 독일사 전공자들의 중평이다.
1977년 출간된 ‘히틀러의 전쟁’이라는 저서에서 어빙은 한 사람의 미치광이가 아닌 평범한 독일인들에게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골드하겐의 논조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어빙의 주장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 캐나다에서 열린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에른스트 쥔델(Ernst Zuendel)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하면서부터였다.
이 재판을 통해 어빙은 아우슈비츠에 가스실이 없었다는 쥔델의 주장에 설복되었다. 어빙의 새로운 주장의 핵심은 히틀러가 최종해결책을 알지 못했으며 아우슈비츠에는 가스실이 없었고 4년 동안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 전체보다 하룻밤 새 드레스덴에서 공습으로 죽은 자가 더 많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홀로코스트 연구자 데보라 립슈타트가 1995년 영국에서 출간된 책에서 어빙을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라고 규정하자, 어빙은 립슈타트와 펭귄 출판사를 명예훼손죄로 영국 법정에 고소했다. 아이히만 재판 이래 세계 언론의 주목을 끈 이 재판에서 홀로코스트는 다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었다. 거튼플랜(Guttenplan) 이 쓴 이 책은 홀로코스트를 부인한 어빙의 재판을 다루고 있다.
어빙의 논지는 간단했다. 가스실 , 즉 홀로코스트 자체가 날조이기 때문에 자신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 해석이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이 이상한 재판의 판사 찰스 그레이(Charles Gray)는 “판사가 역사가는 아니다”라고 했지만, 법정에서 역사 이야기가 빠진 날은 하루도 없었다. 출간 첫 해 불과 2000여 권이 팔린 이 책이 불러일으킨 재판은 하루 소송비용만 1만 파운드에 달하는 비싼 재판이었다. 겨우 수천 권 팔린 책에 200만 파운드가 넘는 소송비용을 감당해야 했던 펭귄 출판사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재판은 이겼지만 진 재판이었다.
다시 재판정으로 돌아가자. 영국의 명예훼손죄에 관한 법은 조금 이상하다. 자신의 주장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임을 입증해야 하는 책임이 원고가 아닌 피고에게 있는 것이다. 노회한 역사가인 어빙에 비해 데보라 립슈타트의 논변은 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변호인단은 나치즘에 대한 일급 역사가인 캠브리지 대학의 독일사 교수 리처드 에반즈(Richard Evans)에게 도움을 청했다.
에반즈는 두 명의 박사 과정 학생들을 고용해 어빙의 책을 샅샅이 읽고 자료를 검토하여, 어빙의 자료 왜곡과 해석의 오류를 남김없이 들추어낸다. 700페이지가 넘는 보고서에서 에반즈는 어빙의 오류가 단순한 실수나 무지의 소산이 아니라 잘 계산된 의도적 실수이자 오류임을 명쾌하게 들추어냈다. 보고서는 어빙이 자신의 의도와 일치할 때는 히틀러 측근들의 증언이나 기록들을 보기 좋게 인용하다가도, 그렇지 않을 때는 아예 무시하거나 자신의 의도에 맞게 자료를 왜곡했다는 점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에반즈는 검사보다 더 날카롭게 어빙을 추궁했다. 괴링이 1923년의 한 집회에서 눈을 부릅떴다는 어빙의 서술에 대해, 그것이 작가의 창작이라는 어빙의 대답을 받아내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을 비롯한 거물 역사가들이 증인으로 동원된 너무도 역사적인 재판 과정을 거치면서, 판사는 9명의 증인이 남긴 150만 단어의 증언들, 수천 페이지의 리포트와 수만 페이지의 도큐멘트를 읽어야만 했다.
팔자에도 없는 역사 공부를 호되게 해야만 했던 판사는 333페이지에 이르는 판결문에서 어빙이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의도에 따라 역사적 증거들을 왜곡하고 조작했다고 지적하고 어빙에게 150만 파운드의 보상금을 지불하라는 패소 판결을 내렸다.
2006년 오스트리아 당국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어빙을 체포하자, 데보라 립슈타트를 위시한 영미의 역사가들은 체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역사적 진실은 법정이 아니라 역사가들의 논쟁을 통해 밝혀져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난 주말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역사가 대회’의 총회에서 유럽의회의 결의안에 대해 대회의 입장을 밝히자는 제안이 있었다. 미국 역사학회는 이에 대해 역사논쟁을 법리적으로 해결해서는 안 된다는 성명서 초안을 준비해서 발표했고, 영국의 입장도 이와 유사했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역사학계의 공식 입장은 결의안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역사가 사법적 판결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나는 역사적 진실과 사법적 정의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탁월한 리포트인 이 책을 문득 다시 생각했다.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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